에스겔 33장 주석
=====33:1
총 3부로 구성된 본서의 마지막 3부(33-48장)가 시작되는 곳으로 이제껏 이스라엘
과 주변 열강의 죄악을 지적하고 그 죄과로 말미암아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1부(1-24장), 2부(25-32장)와는 달리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한 시점에서(32:1 주석 참
조) 선지자는 더 이상 심판에 의한 멸망을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회복과
구원이라는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로 그 예언의 내용을 전환시킨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심판 예고 중에서도 그들의 고토 귀환(11:17;14:22)과 회복된 나라에서의
여호와 경배(20:40-44)를 언급한 바 있는데 본 예언부터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된다. 이 3부는 크게 두 단락으로 대별되는 바, 그 첫째는 이스라엘의
고토 회복과 그 회복된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약속이며(33-39장), 둘
째는 하나님에 의해 회복된 새 나라에서 영원히 여호와만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
이다(40-48장). 한편 그 시작인 본장은 선지자의 파수꾼적 사명(1-20절)과 안악한 백
성들에 대한 경고(21-33절)가 기술된다. 혹자는 1-20절까지의 내용이 회복과 구원이라
는 3부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점과 그 내용이 예루살렘 함락 직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새로운 단락에 포함시키는 견해를 배격하고 1-32장까지에 대
한 선지자의 최종적인 결론으로 이해한다(Kliefoth, Hengstenberg). 그러나 이 심판적
내용이 앞으로 전개될 회개와 회복의 전제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통시적인 개념과 구체
적인 연대의 언급이 중반부인 21, 22절에 나타나, 전후 단락의 내용을 하나로 이어 주
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본장을 3부의 서론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Delitzsch).
=====33:2
본절에서 6절까지는 일반적인 군대의 파수병에 대한 비유를 들어 파수꾼의 막중한
책임과 파수꾼의 경고에 대한 반응을 비유하여, 이스라엘의 영적 파수꾼으로 부름받은
에스겔 선지자가 전개할 예언의 내용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 이는 예언의 대상이 다시 이스라엘 민족으로 환원된
사실을 가리키며 본장이 새로운 단락의 서론부라는 것을 지지하는 구절이다.
칼을 한 땅에 임하여 - 여기서 '칼'은 고대 전쟁의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바, 여기
서는 대적의 침략으로 야기될 전쟁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33:3
나팔을 불어 - 이 말은 성경의 용례상 특별하게 백성들을 소집하기 위한 신호를 나
타내는 데 쓰여진 표현이다(Schroder). 한편 원어상 '나팔'(* , 쇼파르)은 '새
기다'란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염소 뿔로 만든 나팔의 용도는 연주용이라기보다
는 주로 축제 때 사람들의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새겨넣거나 전쟁 때 경각심을 일깨우
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다(민 10:6, 7;왕상 1:34).
=====33:4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 '그 피'란 파수꾼의 나팔 소리에도 불구하
고 방비하지 않아 죽게 된 자의 피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
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죽게 됨을 강조한다.
=====33:5
본절은 4절에 선포된 내용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반복절이다.
=====33:6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 바 되려니와 - 본 구절에서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적 의미
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2절) 그 죽음은 파수꾼의 직무에 관계없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의 결과임을 말한다.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 이 말은 파수꾼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
무, 곧 백성들의 안녕과 보호의 직임을 게을리함으로써 백성들을 무방비 상태로 죽음
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은 그 죄값을
파수꾼에게서 찾으신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 있어 영적 파수꾼된 선지자의 책무와
그에 순종해야 하는 백성들의 의무를 적절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33:7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 실로 구약에 있어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그
백성들에게 닥쳐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소식을 미리 대언해 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영적 각성과 여호와 찬양을 실천케 하는 영적 파수꾼으로 비유된다(렘 6:17).
=====33:8,9
본문은 3-6절의 비유에 대한 해설에 해당한다.
=====33:10
우리는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 예언의 새로운 전환을 시사하는 구절로
서 이제까지 지속되어온 에스겔의 심판 예고 사역이 바로 백성들을 영적으로 각성시켜
본절처럼 그들 스스로가 죄를 인식하며, 그 죄를 시인케 함으로써 철저한 회개와 구원
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Schroder). 혹자는 이를 닥쳐온 심판
을 모면하기 위한 위선적인 고백으로 생각하기도 한다(Havernick).
우리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 여기서 '쇠패하게'(* , 네마킴)
는 '녹이다', '썬다'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어찌 능히 살리요'란 절망적인 고
백과 관련하여 죄가 인간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33:11
본절은 내용상 18:23, 32의 반복이다.
악인의...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이 악인의
멸절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 돌이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하는 구절로
(신 8:5, 6;히 12:9-11), 절망을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를 통한 새로
운 구원의 소망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 연속적으로 반복된 원어 '슈부'(* )는 '돌아가다'란 의
미외에 '회복하다', '새롭게 하다'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바, 본 구절에서 이 말은 단
순하게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떠남은 물론 철저
한 회개와 함께 새로운 신앙의 사람으로 그의 전인격이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33:12
의인이...구원치 못할 것이요 - 율법 주의에 얽매여 '자기의'(自己義)를 구원의 요
건으로 확신하는 유다인들의 보편적인 생각과 당시 선조들의 의가 자손에게 전가된다
는 그릇된 사상으로(18:20, 21) 인해 하나님의 심판적 징계를 회개와 구원의 전제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징계 자체를 이유없는 고난이라고 불평하며 심판적 경고
와 그에 따른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의 예언을 무시하고 배격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구절이다. 에스겔은 구원의 소망을 제시한 11절에 이어 그러한 자들의 왜곡된 구원관
을 경고하기 위해 20절까지 구원은 자기의가 아닌 회개와 새로운 신앙의 회복 속에 임
하는 것이며 개개인의 운명은 어느 누구도 아닌 다사자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14:10, 14, 16, 18, 20) 하나님 심판의 기본적인 성격을 설파하고 있다.
=====33:13
그 의를 스스로 믿고 - 여기서 '스스로 믿고'는 주관적인 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기의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러한 자가 죄를 범하면
서도 과거의 의가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그릇된 확신 속에 안주하는 것을 경고하는 내
용으로 계속적인 의의 실행만이 구원의 조건임을 제시한다(Schroder).
=====33:14
법과 의대로 행하여 - 여기서 '법'(* , 미쉬파트)은 종교적, 도덕적, 법률적
의미에서의 정의를 가리키며 '의'(* , 체다카)는 종교적, 도덕적 의미에서의 올
바름(right, NIV)을 각각 가리킨다. 따라서 '법과 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의롭
고 올바른 내적, 외적 상태를 포괄적으로 언급한 것이다(18:5). 이런 점에서 본 구절
은 '돌이켜 자신의 죄에서 떠나서'라는 앞 구절과 함께 진정한 회개란 단순히 죄를 떠
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격의 회복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른 삶을 사는 것임
을 재삼 주지시킨다.
=====33:15
14절에 언급된 '법'과 '의'에 따른 행위가 몇 개의 구체적인 실례로 기술된다.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 상반절인 대인(對人) 관계에 대한 의의 회복을 말한 것
이라면 본 구절은 대신(對神) 관계에 대한 회복을 가리킨다. 여기서 '생명의 율례'는
협의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을, 광의적으로는 구원과 영원한 삶의 근거가
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18:21;20:11).
=====33:16
본절에 대해서는 18:22 주석을 참조하라.
=====33:17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된 자신
들을 이방인들과 같이 심판 대상으로 삼은 사실을 하나님의 공평치 못한 섭리로 받아
들였다는 의미로 최후까지 회개하지 않음은 물론 그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려
는 백성들의 가증함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만유 앞에 공평
하신 분이심을 깨닫고 회개했어야 하나 도리어 강퍅한 마음으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 했던 것이다.
=====33:18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 본 구절은 내용상 13절 상반절과 논리적 연관을
맺고 있다.
=====33:19
본절은 11절, 그리로 14-16절과 내용상 상통한다.
=====33:20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였던 까닭에
모든 죄의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했다(사 6:5).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죄가 언
약 공동체의 공동 책임으로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의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신다. 곧 이스라엘의 죄는 공동체적 성격과 함께 개인적인 책임도 내포
하는 것이었다.
=====33:21
본절은 선지자 예언의 새로운 전환부가 된다는 것을 연대기적 사실로 입증해주는
핵심 부분이다. 본장 이전에까지 언급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이 예루살렘의 함
락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함락 뒤에 선지자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한 24:25-27의 내용이
본절에서 성취되고 있다. 따라서 24:27의 예언대로 이제 선지자는 그 입을 열어 심판
뒤의 상황, 곧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될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게 된다.
십 이 년 시 월 오 일 - 예루살렘의 함락은 시드기야 왕 제 11년(B.C. 586) 4월의
일이었다(렘 39:2).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연대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8개월이 경
과한 시기로서, 이렇듯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에스겔 선지자가 그 멸망 소식을 접
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학자들과 사본들은 맛소라
사본의 '12년'을 '11년'의 오기로 본다(LXX, 수리아역, Hitzig, Doederlein,
Hengstenberg, Eichrodt). 또한 이러한 견해는 약 1세기가 지난 후 에스라가 동료들과
함께 똑같은 길을 4개월 만에 여행했다는 기록에 유추하여 볼 때(스 7:9) 에스겔에게
소식을 알린 도망자의 여정이 약 6개월 정도라는 사실과도 합치하는 바,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하겠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소식을 접한 시기를 에스겔이 잘못
길고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그의 예언이(24:25-27) 성취된 사실에 대한 특
별한 소식을 접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33:22
본절에서 에스겔 선지자의 새로운 예언이 시작된 것은 결코 도망자의 소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 때문임을 시사한다. 곧 본절에 사용된 동사 '임하여'
(* , 하예타 엘라), '여시더니'(* , 이프타흐)가 모두 미완
료형으로 계속적인 동작의 상태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쓰인 점과 '열리기로'(* ,
이파타흐)가 '열리다'란 뜻을 강조하기 위한 강세 반복어란 점에서 선지자는 이미 도
망한 자가 소식을 전하기 이전 저녁부터 새로운 구원과 회복의 예언을 선포하고 있었
다고 볼 수 있다(Schroder, Delitzsch).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 본 구절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가리킨다(Michaelis, Delitzsch, Schroder).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 곧 1-20절의 예언과 23절 이후의 예언을 구분지어
주는 말로 23절 이후의 예언은 도망온 자로부터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들은 후에 선포
된 것임을 암시한다.
=====33:23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접한 선지자에게 처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적인 구
원과 위로의 선포 이전에 형식적인 선민 사상에 젖어있던 자들에 대한 책망의 형식으
로 전개된다. 곧 본절에서 29절까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그 당에 남아있는 유다인
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33:24
이스라엘 황무한 땅 - 여기서 '황무한'(* , 헤라보트)은 원어상 성읍이나
집들의 파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본 구절은 예루살렘이 바벧론의 침략으로 철저하게
약탈되고 폐허가 되었기에(렘 33:10-13) 오히려 피신한 유다인들이 거주하는 곳보다
더 핍절한 환경이 되었음을 보여준다(Schroder).
아브라함은...주신 것이 되느니라 - 본 구절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이라
는 사실에 집착해 여전히 죄악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향에 남은 유다인
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준다(요 8:33, 39). 곧 그들은 아브라함이 혼자의 몸으로도 가
나안 땅을 하나님께 기업으로 얻은 바 되었으며 그 기업이 후손에게까지 약속된 것이
라는 사실을 들어, 죄악에 빠진 자신들의 상태를 망각하고 여전히 가나안 땅이 자신들
에게 회복될 것이며 심지어는 그 회복의 조건이 아브라함 때와 비교해 숫적으로 많은
자신들에게 훨씬 더 유리하다는 착각에 빠졌다. 실로 그들은 외적 조건에만 매달려 문
제의 본질, 곧 자신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의 자격을 상실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33:25
본절부터 29절까지 그들의 구체적인 죄목이 종교적, 도덕적 측면에 걸쳐 포괄적으
로 나열된다.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 - 구약 이스라엘에 있어 피는 곧 생명의 상징이었기에 일찍
부터 이 피의 식용이 금지된 바 있다(창 9:4-6;레 17:12;19:26). 따라서 본 구절은 그
들이 피를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은 채 고기를 먹음으로써 율법을 경시하고 어긴 사실
을 가리키는 듯하다(Delitzsch, Havernick). 또한 이는 하반절의 우상 숭배와 관련하
여 우상에게 바친 피 있는 제물의 식용을 언급한 것으로도 보여진다(18:6, 11,
15;22:3). 이와 달리 혹자는 피가 곧 생명의 상징이란 점을 비유해 그들의 살인 행위
를 책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Hengstenberg). 그러나 '먹으며'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먹은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며 살인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에 다시 언급되므로 이 견해
는 타당하지 않다.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 영역 성경 중 리빙 바이블(LB)은 본 구절을
'너희가 우상을 숭배하고 살인하니'(you worship idols, and murder)로 의역했다. 이
해석은 본 구절에 매우 적절하다.
=====33:26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 여기서 '칼'은 일반적인 전쟁의 상징이 아니라 제
한적인 '폭력'의 의미를 '가증한 일'은 우상 숭배를(18:12) 각각 가리킨다
(Delitzsch). 특별히 슈로더(Schroder)는 '가증한 일'(* , 아시
텐 토에바)이 여성형이란 점을 들어 이를 우상 숭배와 관련된 종교적 매음 행위로 보
았다.
=====33:27
26절에 언급된 범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
으 시사한다.
산성과 굴 - 여기서 '산성'(* , 메차도트)은 험한 산 위에 있어서 공략
하기 어려운 천연 요새를, '굴'(* , 메아라)은 이스라엘 산지에 산재해 있어 은
신하기에 알맞은 천연의 석회 동국을 각각 가리킨다(삼상 13:6). 하나님은 이런 곳에
피신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심판의 징벌이 임하게 하실 정도로 그 징벌을 철저하게
행하신다.
=====33:28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하고 - '황무지와 놀라움'(* , 쉐마마
우메솨마)이란 말은 둘 다 '황폐케 되다', '폐허가 되다', '경악하게 하다'란 뜻의 어
근 '솨멤'(* )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본 구절을 '황폐
시켜 폐허가 되게 하고'(NIV, RSV), '가장 황폐하게 만들고'(KJV)로 번역했다.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 여기서 '권능의 교만'(* , 게온 우
즈)은 곧 세속적인 힘에서 유래한 교만을 가리키는 바, 본 구절은 그러한 교만의 근거
가 되는 그들의 모든 세상적 존립 기반을 없어지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7:24 주석 참조).
=====33:29
그 때에...알리라 - 여기서 '알리라'(* , 야다)는 단순한 지식적 앎이 아니라
전인격을 통한 체험적 깨달음으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그 맥을 같이한다
(골 1:10). 따라서 본 구절은 위에 언급된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이스라엘 사
람들로 하여금 죄의 길에서 떠나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11절).
=====33:30
본절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루살렘 심판 예언이 성취됨으로써 고조될 선지자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이 진실한 회개와 구원의 소망 때문이 아닌 자신들의 이기적 정욕 충족
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 '담 곁에서'는 은밀하고 비밀한 것을, '집
문에서'는 공공연하게 공개되는 것을 각각 의미하는 말이며(Delitzsch, Schroder),
'너를'(* , 베카)은 '너에게 관해서'란 문자적 의미로,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
겔과 그의 예언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임을 가리킨다(Schroder). 그리고 이것은 예루
살렘 멸망 예언의 성취 후 선지자의 존재가 백성들간에 음으로 양으로 급속하게 부각
되었음을 시사한다.
자, 가서...들어보자 -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과 그에 대한 순종의 자세라기보다
는 단지 새로운 소식에 대한 호기심의 총족을 위한 행동이다(31절 주석 참조).
=====33:31
내 백성처럼...행치 아니하니 - 본 구절은 실천적 순종이 결여된 그들의 내적 자세
를 암시하고 있는 바, 그들의 행동이 극히 위선되고 가증된 것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입으로 사랑을 나타내어도 - 여기서 '사랑'(* , 아가빔)은 그들의 이기적
안목에서 자신들의 기호와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것을 가리킨다(Delitzsch,
Schroder). 따라서 본 구절은 후반절과 관련하여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모든 좋
은 말들이 기실은 자신들의 이기적 욕구 충족에 그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그들의 내적, 외적 상태의 양면성을 암시한다(Gesenius,
Havernick).
=====33:32
음악을 잘하며...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 구약 선지자들이 종종 그들의 예언
을 노래로 읊어 전달한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삼상 10:5;왕하 3:15). '사랑의 노
래를 하는 자같이'(* , 케쉬르 아가빔)는 세속적 의미에서 노래로
즐거움을 주는 가수와 같다는 뜻이다(Delitzsch, Hitzig). 이는 백성들이 에스겔의 예
언을 회복과 구원의 전제로서 진지하게 경청한 것이 아니라 단지 좋은 음악을 듣듯이
피상적으로 들은 사실을 시사한다. 즉 회개를 전제로 선포한 심판의 구원의 메시지 중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에 맞는 구원의 메시지만을 아무런 결단이나 돌이킴 없이 듣기
좋은 말로만 수용했다.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 백성들에게 선포한 심판이 성취될 것임을 말한다. 곧 그들은
아직도 회개에 이르기 위한 내적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구원의 약
속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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