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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예레미야

[스크랩] 예레미야 52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8:02

예레미야 52장 주석

 

=====52:1

  시드기야가...나이 이십 일 세라 - 시드기야란 이름은 그의 왕명이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의 원래 이름은 맛다니야였다(왕하 24:17 참조). 그는  조카인  여호야긴이

폐위되고 난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 되었다(B.C. 597년).


=====52: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 이것은 시드기야 통치의 결산에  해당되는  말이

다.  아울러 이는 유다의 패망에 대한 주요 원인을 암시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52:3

 여호와께서...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 - 유다에서 일어난 일들은 여호와의 진

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으며, 결국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함으로써 그들이

유다 땅에서 쫓겨나는 여호와의 진노가 성취되었던 것이다(왕하 24:20 참조).   한편,

본절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며, '실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신의 눈앞에서 쫓아낼  때까

지 그것이(죄악이) 여호와의 진노에 대해 유다와 예루살렘 안에  있었도다'이다.   한

편, 일반 역사가들은 유다의 멸망이 주변 상황에 따른 것이지 여호와의  진노로  인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이 여호와이시고 또 유다 멸망의

변수를 만드신 분이 여호와이시란 것이 신앙인의 역사에 대한 관점일 것이다(Bright).


=====52:4

 시드기야 구 년은 현대력으로 B.C. 588년에 해당된다.  그리고 히브리 종교력

   시 월은 바벨론식으로 데벱월(에 2:16)에 해당하며, 양력으로는 12-1월에  해당한

다.  바벨론 군대는 겨울의 혹한을 이용하여 기습적 공격을 감행했던 것 같다.


=====52:5

  십 일 년까지 에워싸였더니 - 앗수르 고분 부조를 연구해 보면,예루살렘 성의 포위

공격의 형태가 어떠했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전투 양상은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성을 포위하여 진을치고, 그리고 성벽 파괴

용 무기들을 가동했으며, 또한 임시 망루를 만들어 그 위에 올라가 불화살이나 돌  따

위를 성안으로 던지는 그런 전략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포위 공격은 시드기야 제  11

년 넷째 달(6절) 즉, 현대력으로 B.C. 586년 6-7월경까지 계속되었다.  넷째 달이라고

하는 언급은 70인역(LXX)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포위 공격은 약  18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셈이다.


=====52:6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 성중의 기근에 대해서 39장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여

기서와 애 4:1-10에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다(Nicholson).  '심하여'의  히

브리어 '하자크'(*         )는 '달라붙다', '지속되다'는 뜻으로, 오랜 기간 동안 포

위당함으로 인해 기근의 상태가 극에 달했음을 나타낸다.


=====52:7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 본절의 내용은 39:4에도 언급되고 있다.   시드기

야와 그의 근신들은 삼엄한 바벨론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달아났을  것이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서와 같이 맛소라 사본은 시드기야의 탈주에 대한 언급을 생략

하고 있으나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서, 그리고 39장에 언급된 사실로 보아서도  왕의

탈주는 분명하다(Bright).

   아라바는 사해(死海) 남쪽에서 아카바 만에 이르는 넓은 광야 지역이다.


=====52:8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 왕의 호위대가 왕을 혼자 내버려두고 흩

어지게 된 상황이 언급되는데, 어쩌면 어둠 속이었기 때문에 일사 불란하게 왕을 호위

하지 못했을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갈대아인들이 왕을 목표로  해서  추적해

왔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39:1-10에는 이같은 내용이 언급되고  있

지 않다.  이 사건은 애 4:19, 20에 반영되고 있다.


=====52:9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 시드기야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신

하들에 관한 내용은 39:5-7과 왕하 25:5-7에 기록되어 있다.  '하맛 땅 립나'는  오론

테스 강가에 있는 가데스 남쪽 고대 수리아의 한 도시였는데, 느부갓네살은 여기서 원

정군의 전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립나는 또한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군사 도로가 마주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하였으며, 느부갓네살의 임시 본부가 위

치해 있던 곳이었다(Thompson).


=====52:10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투항하라는 예레미야의 권면을 끝내 거부함으로써, 그 목전에

서 자녀가 살해되는 것을 보아야 하는 처절한 아픔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곳의

   모든 방백이란 립나에 죄수로 수용되어 있던 유다 방백들을 말한다.  왕하  25장에

는 이러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송되었던 것이 분명하

며, 이들에 대한 처형은 예루살렘 함락 후 몇 주가 지나서 행하여졌을 것이다.


=====52:11

그 죽는 날까지 옥에 두었더라 - 겔 12:13의 성취이다.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옮

겨져 거기서 죽을 때까지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상세한 설명은 39:7에는 언

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 성의 함락 전후에 겪었던 그  쓰라린  육체

적, 정신적 고초를 감내하면서 그 이후 그가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살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짐작컨대, 아마 그는 그 이후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옥에 해당하는 '베트 하페쿠드트'(*                      )는, '감옥'이란 뜻으로

본서에 자주 언급되는 '마타라'(*           )와 비교된다(32:2, 8, 12; 33:1;  37:21

등).  문자적으로 '징계의 집'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혹자는 시드기

야가 삼손처럼 맷돌을 돌려야 했다고 해석하나(Hitzing) 확실한 근거는 없다.


=====52:12

  본절의 내용은 39:1-10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오 월'은  현재의  7-8월에

해당되며, '십 일'은 왕하 25:8에서는 7일로 나타나 있다.  아무튼 느부사라단이 예루

살렘에 도착한 것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약 한 달이 지난 때였다(Bright).  한편 그의

도착 연대로 언급되고 있는 느부갓네살 십 구 년은 B.C. 586년에  해당된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실제적으로 왕위에 등극한 때가 B.C. 605년이었다는 연대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52:13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의 주요 건물들을  불사르

는 장면이 언급되는데, 그 불길은 전도시를 휩쓸었을 것이다(Thompson).   한편  어떤

이는 '귀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가돌'(*             )을 그다랴라고 번역하였는

데, 이는 음가가 다소 비슷하기 때문이나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52:14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 고대 유적지에 대한 발굴 중에 기드론 계곡이 탐

사된 적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황폐가 극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헐다'(*         , 나타츠)라고 하는 말은 본서에서 빈번하게 쓰였다.  여호와는  예

레미야에게 열방을 헐어내리는 임무를 맡기셨으며(1:10), 또한 여호와 자신이 한 나라

를 헐어내리실 것이라고도 말씀했다(18:7), 그리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이미  헐어내

리셨던 것이다(31:28).


=====52:15

  본절은 느부사라단이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사실을 언급한다.

   백성 중 빈한한 자에 대한 언급이 왕하 25:11; 렘 39:9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맛소

라 사본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사본에는 수록되어 있다.  본절의 '빈한한 자'나 16절의

'빈천한 국민'은 히브리어로는 모두 '달로트'(*           )이다.  결국 느부사라단은

유다의 지도층뿐만 아니라 빈부 귀천을 막론한 일반 백성들까지 상당수를 잡아갔던 셈

이다.

   무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몬'(*           )은 '하몬'(*           )의 어미  변

화로 보고 '군중', '무리'로도 번역되나, '공교한 기술자'로 번역될 수도 있다.


=====52:16

  빈천한 국민을 남겨 두어 - 정치적으로 비중이 없는 자들은 남아서 포도원을  가꾸

는 농부가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힘이 없고 빈천한 자들이었다.  갈대아인들은 유다

를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킬 만한 충분한 포로들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람들

이 필요없었을 것이다.  한편, 40-41장의 내용을 보면, 미스바 지역 공동체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듯이 보인다.  아마 그들은 바벨론 군대를 용케 피했던 자들에 의해 인

도된 집단이었으리라 짐작된다.


=====52:17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놋바다 -  본절에  언급되어  있는  성전  기구들은  왕상

7:15-39에 나온다.  이 '두 놋기둥'에는 기둥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하나는 야긴이

었고 좌편에 세워진 기둥의 이름은 보아스였다.  그 꼭대기에는 백합화  형상이  있었

다.  상세한 설명은 왕상 7:15-22을 참조하라.  '놋바다'는 왕상  7:23-26에,  그리고

'받침'에 대해서는 왕상 7:27-39에 언급되고 있다.  이 기둥의 용도가 어떠한  것이었

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제단의 불이나 화롯불을 담아두었던 것 같다.   이러한

기둥들은 수리아 신전 벽화를 보건대 B.C. 10세기경에 대단히 유행했던 것 같다.


=====52:18

  가마들과 부삽들과 불집게들... - '가마'는 조그마한 물건들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데 사용되었다.  아무튼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여러 기구들은 크기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놋바다의 직경은 약 456cm 정도되었다.  이런 기구들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에는 바벨론으로 옮겨갈 만큼 귀중한 것이었다(Thompson).


=====52:19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 갔는데 - 이를 직역하면, '금이었던 것 - 금,  은이

었던 것 - 은'이다.  아마도 이 말은 본절의 잔들, 화로들, 주발들, 솥들  등이  모두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금으로  만들어진  제기들이  출

25:29 이하에 언급되고 있고, 왕상 7:49 이하에는 이들 항목 중 대부분이 언급되고 있

다.


=====52:20

 열 두 놋소 곧...놋 중수를 - 왕하 25:16에는 본절에 언급된 항목들이 나오지 않는

다.  어떤 학자들은 놋으로 만들어진 열 두 소들이 한세기 반 전에 이미 앗수르의  공

물로 보내졌기 때문에 본절이 첨가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설령 앗수르로 보내진  것

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들은 그 이후에 다시 되돌려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Bright).


=====52:21

  한 기둥의 고가 십 팔 규빗이요 - 70인역(LXX)은 대하 3:15과 같이 기둥의  높이를

35규빗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왕상 7:15 주석을 참조하라.


=====52:22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며 - 기둥의 장식이나  조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왕상

7:16-20에 언급되어 있다.  이런 류의 장식은 대제사장의 의복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출 28:33).  한편 라스 삼라(Ras Shamra)에서 발견된 용기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이

런 장식은 이스라엘 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주변 나라에서도 알려져 있었다.


=====52:23

 그 사면에 있는 석류는 구십 륙이요 - 몇몇 세부적인 사항들은 왕상 7장의  내용과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데, 아마 여기서는 예루살렘 함락 당시  바벨론으로  약탈되어간

성전 기물들에 대한 대략적인 요약 진술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본장의

기록 목적도 세부적인 사실 전달에 있었던 것이 아니며 아름답고 귀중한 것들이  약탈

당하고 파괴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Thompson).


=====52:24

  여기서 다시 느부사라단이 등장한다.  '스라야'는 요시야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의 손자였다(대상 6:13-15).  스라야의 아들은 여호사닥으로서, 포로기 이후 성

전 재건을 주도하였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부친이었다(스 5:2; 학 1:1 등 참조).  그

리고 '부제사장 스바냐'는 29:24-32과 37:3에 언급되었던 스바냐와  동일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 명의 문지기는 성전을 관리했던 것으로 보이는 높은 직책의  제사

장들이었다.


=====52:25

   군사를  거느린  장관  하나와...왕의  시종  -  '장관'으로   번역된   '사리스'

(*           )는 '거세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환관을  의

미한다.  본서 중반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환관이란 직책은 처음에는 왕의  내실을

관리했던 직책이나, 그 이후 보직(補職)의 범위가 확장되어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브

라이트(Bright)는 이 사람이 군대 장관이 아니라 대민 관계를 맡았떤 공직자였던 것으

로 설명한다.  그러나 어쩌면 군대와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야전에서  전투를  하던

사람이 아니라 국방 장관 정도 되는 직책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왕의  시종'

(*                         , 로에 페네 하멜레크)에 대한 문자적 번역은 '왕의 얼굴

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아마도 이들은 왕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어 빈번하게 왕과 접촉했던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들의 숫자가 본

절에서는 칠 인으로 되어 있으나 왕하 25:19에는 다섯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군대 장관의 서기관'이란 것은 부사령관이나 부관 정도 되는 그런 위치였을  것이다.

'국민'(*                  , 메암 하아레츠)의 문자적 번역은 '그 땅의  백성'으로서

일반 서민을 가리킨다(Bright).


=====52:26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 시드기야가 압송되어 갔던 립나로 이들 선발된  무

리들 역시 이송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그곳에서 처형 당하기 위해서 붙잡혀 갔을  것

이다(27절).


=====52:27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바벨론으로

붙잡혀 간 이들 포로들에게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바 있으며(50:17-20;

51:45-49 등) 이런 내용은 이사야서와 에스겔서에서도 나타난다(사 52:1-12; 겔  37장

등).  반면에 바벨론에 투항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나 애굽으로 달아난 자들에게는 미

래의 희망이 없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52:28

  제 칠 년에 유다인이 삼천 이십 삼이요 - 바벨론 연대 계산법에 따르면 여기서의

제 칠년은 B.C. 597년이다.  이것은 느부갓네살 등극 년도인 B.C.  605년부터  계수한

것이 아니라 이듬해인 B.C. 604년부터 그의 즉위 년도를 계수한 방법이다. 열왕기하

도 이와 같은 연대 계산법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때 잡혀간 유다인 삼천 이십  삼

인은 유다 전역에서 사로잡혀 갔던 자들의 숫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왕하 24:14,  16

에 언급된 포로들의 숫자와는 틀리는데, 아마 열왕기하에서는 이미       국외로 추방당해

있던 사람들의 숫자를 모두 합하였던 것 같다.  혹은 본절의 숫자는 성인 남자만을 센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52:29

 느부갓네살의 십 팔 년에 - 바벨론 연대 계산법에 따르면 B.C. 586년에  해당되며,

열왕기에 따르면 그의 즉위 19년에 해당된다.


=====52:30

  유다인이 칠백 사십 오 인이니 - 28절에서부터 본절까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무리가 세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B.C. 597년, 두 번째

는 B.C. 586년, 그리고 세 번째는 B.C. 581년의 사건이다. 본 절에는 세 번째로 끌려

간 무리들의 숫자가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사건 이후에 발생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차례에 걸친 패배와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또

다른 반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면 그다랴를 암살한  범죄에

대한 처벌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포로로 끌려간 전체 숫자가 4600명

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 부녀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15,000명에서 20,000명  정

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가던 중에 죽었을  수도  있다.

비록 적은 숫자로 보이긴 하지만 앞으로 이스라엘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자들이  바

로 이들 중에 있었다(Thompson).


=====52:31

  에윌므로닥의 즉위 원년 십 이 월 이 십 오일 - 에윌므로닥은 느부갓네살의 아들로

서 B.C. 561-56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의 원 이름은 '아멜-마르둑'으로서 '마르둑

의 사람'이란 뜻이다.  반면에 에윌므로닥은 '어리석은 므로닥'이란 뜻이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변경시켰던 것으로 보인다(Bright).  그리고 '이십 오일'이란

말은 70인역(LXX)에서는 24일로, 그리고 왕하 25:27에는 27일로 표현되어 있다.  날짜

가 이렇게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떤 세부적인 관점의  차이에서  연유하였을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시드기야 이전에 잠시 왕위에 있었던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석방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당시 유다에서는 시드기야보다 여호야긴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여호야긴이 돌아오게 될것으로도 믿고  있었

다(28:1-4).  바벨론의 고고학 발굴에 나타난 그 당시의 기름 영수증에는 그가  '유다

의 왕'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머리를 들게 하고(*               , 나사로쉬)는 창 40:13, 20에 처음  나타나는

표현인데, 여기서처럼 '석방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Feinberg).   특히  '나사'

(*         )는 '높이다', '명예롭게 하다'의 뜻을 내포하므로, 여호야긴이 석방된 뒤

에 후한 대접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52:32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 '바벨론에 있는 왕들'이란 말은  여호

야긴처럼 볼모로 잡혀온 피정복국의 왕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를 단순히       포로로서

잘 대우해 주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바벨론 왕실에서 특권을 지니고 생활

하도록 배려하였음을 뜻한다고 봄이 좋을 것 같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윌므로닥

은 어떤 연유로 인해 선왕(先王)인 느부갓네살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이때  여호야긴과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52:33

 그에게 특별한 혜택이 주어졌음을 시사한다.  특히 왕의 면전에서 함께 식사했다는

사실은 왕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이다.  여호야긴은 적

어도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사실은 앞에 언급된 기름 영수증에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은택은 그의 평생 동안이었다고 지적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에윌므로닥

을 몰아내고 그 후 왕위에 올랐던 네리글리살 때에도 그런 특권을 계속 누렸음을 짐작

케 한다(Thompson).


=====52:34

 본장의 마지막 네 구절(31-34절)은 신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오랫동안 살았으며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났다고  하

는 사실은 회복의 때를 예언한 예레미야의 약속이 성취되는 하나의 징후였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미래가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이나 애굽으로 달아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 있다는 예언의 성취에 관한 전조(前兆)이기도  하였던

것이다(Thompson).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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