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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예레미야

[스크랩] 예레미야 47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8:00

예레미야 47장 주석

 

=====47:1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 본 구절은 뒤에 이어지는 2-7절의 신탁이 언제의  것이

었느냐 하는 연대기적 내용을 암시한다.  70인역은 본절의       대부분을  빠뜨리고  그냥

'블레셋에 대하여'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본절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바로가 가사를 공격한 때가 언제인지 하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

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이 B.C. 609년의 바로느고의 원정과 연계되어 있을 것으

로 본다.  그 원정에서 바로느고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므깃도에서 유다 군대를 패배시

키고 또 요시야를 전사시킨 후에(왕하 23:29, 30) 앗수르를 응원하기  위해 하란으로

출병하였다.  이 사건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서술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

등장한다.  즉 헤로도투스는 느고가 B.C. 609년 요시야 군대를 패배시킨후 카디티스란

성(이곳은 가사로 밝혀져 있다)을 정복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교되는

다른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러한 것 중 몇 개를  참조  삼아  살펴보기로  하자.

(1) 애굽의 가사에 대한 공격이 바로느고와 느부갓네살 사이의 전쟁, 곧 B.C. 605년의

전투와 연계되어 있다는 견해.  (2) 블레셋에 대한 공격이 시드기야 제 4년(B.C.  593

년)경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견해(Blayney).  (3) 이 예언이 요시야 통치 그 어느때에

주어졌을 것이라는 견해(Dahler).


=====47:2

  물이 북방에서 일어나 창일하는 시내를 이루어 - 본 구절은 바벨론 군대의  등장을

묘사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사야는 이와 유사한 표현을 앗수르 군대에  적용하였다(사

8:7, 8).  어쩌면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멜로'(*         )는 '가득함', '충만함'이

란 뜻으로서 풍요로운 수확이나 부(富)를 가리킨다(Calvin).


=====47:3

 아비의 손이 풀려서 그 자녀를 돌아보지 못하리니 - 문자적인 번역은 '아비들이 손

에 힘이 빠져서 자식들을 위해 되돌아가지 못하리라'이다(Bright).  이는 어린 자식들

이 뒤에 처져도 되돌아가서 데려올 경황도 힘도 없는 상황을 시사한다.  또한  본절에

는 '굽 치는 소리'와 '병거 바퀴의 울리는 소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말  발굽

소리 그리고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를 말하며 원문은 아마도 이 같은 소리를      의성어로

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데, '굽 치는 소리'의 '치는'에  해당하는  '솨아타'

(*           )는 덜거덕 덜거덕하는 말발굽 소리를 나타낸다.  한편 이 구절의  어감

은 대단히 생생하고 또 짧은 스타카토로 이어지고 있다.  적군의 진군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47:4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자를 - 블레셋과 함께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함

께 연계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는 모든 조력자마저 끊겨버렸음을 나타내는데, 아마도

블레셋과 페니키아의 도시들 간에는 어떤 동맹이 맺어져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느부

갓네살이 블레셋을 점령한 것은 어쩌면 페니키아를 공격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을 수도

있다.  B.C. 605년경에 블레셋과 페니키아 도시들 간에 그런 동맹이 있었는지  현재로

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충분히 가능했었을 것으로 보인다.  페니키아의       주요  두

도시인 두로와 시돈은 B.C. 594년과 B.C. 587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바벨론

에 저항했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두로를 포위  공격하였다

(Bright).

   갑돌 섬 - 이 지명에 대해서는 (1) 지중해 해변을 따라 뻗어 있는  블레셋에  속한

지역, (2) 갑바도기아, (3) 크레테 등으로 보는 견해들 등 분분하지만,  크레테  혹은

그 주변의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이곳은 블레셋의  원고

향에 해당하는 곳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와 팔레스틴 연안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보면, 블레셋의 멸망 이후 두로와 시돈도 최종적으로 항

거하다가 마침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


=====47:5

  가사가 삭발되었고 - 가사에 거하는 주민들이 깊은 슬픔과 곤경에 처해 있음을  나

타내는 표현으로서, 그들이 그러한 슬픔과 곤경  속에서  머리털을       깎았다는  뜻이다

(Clarke).  또한 자기 몸에다 깊은 상처를 내는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상 숭배 행위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겠다(왕상 18:28, Bright).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멸망되었나니 - 아스글론은 가사,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과 더불어 블레셋 다섯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에리트 임캄'(*                      )은 다양하게 번

역되고 있는데, 니콜슨(Nicholson)은 '그들 힘의 빈약한 남은 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영역본 KJV는 이를 '그들 골짜기의 남은 자'(the remnant of their valley)라고  번역

하였고 RSV는 70인역의 독본을 채택하여서 '오 아나킴의 남은 자여'(O remnant of the

Anakim)라고 번역하였다.  '평지'로 번역된 '임캄'(*           )은 '평지' 혹은  '계

곡'이란 뜻도 있지만, 우가릿어의 '힘'을 뜻하는 말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

해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우가릿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족에 속하는       언어로서

한때는 고대 수리아에서 사용되었다.  1928년에 우가릿어로 기록된 토판이 최초로  발

견된 바 있는데, 오래지 않아 곧 해독되었다.  거기에는 히브리어에 대한 것뿐만 아니

라 이스라엘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Nicholson).  즉 이 두 블레셋 마을들이 남은 힘과 병력을 다 소진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70인역의 '아나킴'이란 표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살았다고  하

는 거인들을 가리킨다(민 13:22, 23; 신 1:28).


=====47:6

 여호와의 칼이여 - 이것은 여호와의 칼과 선지자 간의 대화를 나타내고 있는  장엄

한 의인법적 표현이며 돈호법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숭고한 상상력을 불러일

으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  클라크(Clarke)는 이를 '오, 너 여호와의 칼이여'라고  번

역하였다.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 이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분노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만큼 블레셋의 재난이 끔찍할 것임과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

한 것이라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Clavin).


=====47:7

  여호와께서 이를 명하셨은즉 - 그러나 여호와의 칼의 심판을 억제시키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실제로 이 예언은 B.C. 604년경에 성취되었는데, 그  해

에 느부갓네살이 해안 평원에 나타나 아스글론을 포위 공격하고 그       성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현재의 사카라(멤피스)에서 고대 서신이 한 통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아스글

론의 왕 아돈이 바로 왕에게 보내는 서신으로서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편지

는 바벨론 군대가 아펙으로 진격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아돈은

바로느고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또 바벨론에서 발견된 영수증과 같은 문서에는  아

스글론에서 잡혀온 왕의 아들들과 어부들, 그리고 그외의 다른 사람들의 아들들에  대

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같은 묶음 내의 다른 영수증들에는 유다의  야우킨(여호야

긴)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이런 점들로 보아서 정확하지는 않

지만 그 어간의 어느 시기에 아스글론에서 포로들이 붙잡혀 왔던 것이 분명하다.   아

스글론에서 멀지 않은 아스돗 지역에서 유적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여기서도

B.C. 7세기말경의 파괴상을 보여주는 어떤 층이 발견되었다.  이것 역시 느부갓네살의

아스글론 원정지에 아스돗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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