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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예레미야

[스크랩] 예레미야 23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55

예레미야 23장 주석

 

=====23:1

  목자에게(*           , 르임) - 다른 곳에서도 이 말이 자주 쓰이고 있는데,  이곳

에서도 역시 유다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한글 개역 성경에는 표현되지  않았

지만, 원문상 복수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왕을 포함하여 그의 주변에서  불의와

패역의 길로 인도하는 조언이나 정책을 제시했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하는  말

이다(). 한편 히브리어 본문에는 '화 있으리라'는 말이 문두에 놓여 있는데, 이  말은

왕을 비롯한 지도층의 죄악에 대한 단순한 단죄와 비난의 정도를 넘어서는 심판  선언

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예레미야는 지금까지 유다의 마지막 네왕의 죄악에 대해서 집중

적으로 공격해 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본절의 목자들에는 이스라엘 양무리를 흩어지게

하는 일차적 책임이 있는 이들 왕들이 우선적으로 포함될 것이다.


=====23:2

  너희가 내 양무리를 흩으며 - 우리는 여기서 교회와 국가의 우두머리들이 범죄했을

때 그 악한 영향력이 백성들에게 미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제사장들과 귀족들의 범죄와 우상 숭배로 인하여 민족 전체가 파국을  맞게      되었으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던 것이다(Clarke).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 이 말의 히브리어는 '파카드'(*        )인데, 본 어구에

서 번역된 바와 같이 '돌보아주다', '보살피다'란 뜻이 제일차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언어 유희에 의해 본절 후반부에서 다시 한번 쓰이고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

를 '보응하리라'고 번역하였다. 두 번째 의미는 '책임을 묻다', '처벌하다'란  뜻이다

(Bright). 원래 목자의 임무는 양떼를 지키고 돌보는 것인데, 이들 이스라엘 자도자들

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히려 흩어지게 하고 몰아내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23:3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번성할 것이며 - 여기서는  흩어진  양떼를

다시 모으는 장면이 등장한다. 1절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양떼를  모으

는 일을 하는자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천명하신다. 그 백성은       그릇된 목자들의

길을 좇음으로써 언약을 거부하였고 범민족적으로 반역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지만,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귀환의  은혜

에 참여케 되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포로기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이 구절은 포로기의 신명기 사상을 가진 저자의 작품이 되고  만다.  그러나

추방과 포로라고 하는 말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무턱대고 이 단락이       포로기에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포로 이후의 결실과 번영에 대한 내용은 포로기에도 있었

지만9겔 36장;슥 8:9-13) 포로기 이전에도 흔히 등장한다(호 2:21-23;암 9:11 등). 또

한 이곳에는 '남은 자'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24장;40-44장). 이 주제 역시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사 1:9;37:4;미4:7;7:18). 따라서 이상과  같

은 사실들은 본 단락이 포로기 이후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무모성을  보여준

다.


=====23:4

 그들이 다시는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 '축이 나다'(*        , 파카드)는

말은 2절에서 언급되었던 히브리어 동사 '파카드'(돌아보다)에 대한 언어 유희적 관계

에 있는 말로서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Bright).  양떼는

보살핌을 받고 일일이 계수되어질 것이기 때문에 축이 나지 아니할 것이다. 한편,  이

러한 회복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포로 이전과 동일한 상황으로 되어질 것이라는  뜻으

로 이해하나 이는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여호와로

부터 임명받은 목자들이 그들을 충실하게 돌보아줄 것이고 또 그 땅에서 공포와  두려

움을 다 제거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  이후의

상황을 겨냥하지만 나아가 메시야 시대를 아울러 함축하고 있다.


=====23:5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이 구절은 다윗 혈통의 이상적인

왕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을 실현하게 될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예레미야의 직접적인 언급으로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메시야에 관한 기사 중의  하나이

다(Frost). 여기서 '의로운 가지'라고 하는 말은 훗날에 가서는 대망의 앙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정확한 어구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사상은 사  11:1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리고 '의로운 가지'(*                , 체마흐 차디크)에 해당하는 히브

리어의 음가는 현재 왕위에 있는 시드기야란 이름과 언어 유희적 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시드기야 통치 초기에 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Bright). 그리고 '때가 이르리니'란 말은 엄숙한 선언에 대한 주의를  환

기시키는 방법으로 쓰였다(Feinberg).


=====23: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 메시야 사상과 관련하여 구약과 후대 랍비 문헌

에는 두 가지 양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가

르침과 메시야시대에 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 5절에서는 메시야 개인에 관한  가르침

이 주어졌고 본절에서는 메시야 시대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

을 것이다(사 11:1-5, 6-16 참조).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가 온갖 제한과 속박에서

해방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외부의 대적들이나 내적인 긴장이

그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그날에 이스라엘 모든 가족들도  이상적

인 왕의 통치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함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이스라엘 왕국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남북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이 앞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이 주제는 30, 31장에서 더욱 자세히 언급된다. 한편, 본절  하반절

에 언급된 이상적인 왕이 유다 역사에 등장한 일이 없기 때문에, 즉 바벨론       포로에서

부터 로마인들의 예루살렘 파괴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기다리던

그런 메시야가 나타난 바 없으므로, 이는 주 예수께 적용될 수 밖에 없다. 그분이야말

로 우리를 모든 죄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는 메시야이며, 정의의 심판을 행하는  의로

운 왕이시다(Clarke).


=====23:7

 본절과 그 다음절인 8절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16:14, 15과 동일하다.  메시

야와 그의 시대에 이루어질 일들을 묘사하는 문맥을 고려하건대, 본문의 내용은  단지

포로 귀환에만 국한시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23:8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거하리라 하시니라  -  여태까지는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왔으나 이제는 새로운      출애굽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러나라에 흩어졌던  여호와

의 백성은 이상적인 왕이 통치를 시작하게 되면, 포로된 상태로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북쪽 땅에서, 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흩으사

내어쫓았던 그 모든 땅에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신약  시

대에만 백성이 죄의 올무로부터 벗어나 교회에 편입될 사실을 예언한  내용이기도  하

다. 이상과 같이 고국으로 남은 자들을 다시 불러모으는 장면은 사 11장과 겔 34,  37

장 등에서도 나타난다.


=====23:9

 본절 이하에서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을 고발하며 경고하고 있다. 백성들은  미

혹시키는 이 악한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다른 선지자들도 경계한 바       있지만(사28:7-13

;겔13:1-16;미3:5-12)특히 예레미야가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던 대상이다(2:8;5:30,31 ;

6:13,14;8:10, 11;14:13-15;18:18-23;26:8, 11;27:1-16). 한편,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

자들 간의 대치는 시드기야 시대에 가장 극심하였던 바, 이는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사항이기도 하다(Bright, Feinberg).

   내 중심이 상하며 - 유다는 완전히 타락해 있었고 여호와의 말씀은 조롱거리로  전

락해 버리고 말았으므로, 이런 사실이 그를 몹시도 괴롭혔음을 시사한다. 한편 브라이

트(Bright)는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사색 차원이 아니라 극도의 혼란 속

에서 어지러이 동요되고 있었던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나타낸다.


=====23:10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다고 하는 것은 그곳이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찼음을 말한다(5:7, 8). 가나안의 풍요의 신 바알 숭

배는 풍요의 결실을 가져오기는 커녕 오히려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저

주로 인하여 땅은 풍성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슬퍼하며 불모지가 되어 버렸다. 이  땅

에 좋은 결실을 허락하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뿐이신 것이다(호2:5-8;

암4:4-9 참조). 여기서 광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드바르'(*          )는 바싹 마른

사막과 같은 지역이 아니라 스탸 지역의 사람이 살지 않는       초지(草地)정도를  뜻하고

있다.


=====23:11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 '내 집'은 성전을 가리키는데,  제사장들

은 그곳에서 이방 종교 의식과 부도덕한 관행들을 시행하여 오염시켜  놓았던  것이다

(왕하 21:3-7;23:4-7). B.C.622년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성전과 그 경내에서 이

교의 종교 의식들을 뿌리뽑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B.C. 609년 그가 전사하자 이러

한 관행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시대에  다시

시행되었던 것이다. 겔 8장에는 그 당시 성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점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예레미야의 중심을 상하게 하고 그의 온 육체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23:12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 '미끄러운 곳'이란 미끄럼길을 뜻하는 말로서  하

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은 파멸 상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종종 쓰인다(시 35:6;73:18).

즉 앞에서 언급된 배도자들은 사악한 동기에 의해 스스로 이 길로 들어섰으며 이제 걷

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23:13

 그들은 바알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 여기서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들을 언

급하고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가 그들보다 더 악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도 볼 수 있겠다(Bright). 우매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티플라'

(*          )는 '범죄 행위', '위반되는 것'이란 뜻도 내포한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

은 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으며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 거짓 선지자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자들이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민족이 언약의 주이신 여호와께 전폭적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격

려하고 인도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알고 있다.


=====23:14

 예루살렘 선지자들의 범죄 행위가 지적되고 있다. 그들이 북왕국의 거짓 선지자들

보다 더 악한 이유는, 그들이 (1) 북왕국의 배도와 파멸의 과정을 목격했음에도  돌이

킬 생각조차하지 않았으며 (2)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도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

고 또한 (3) 그들의 타락상이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될 정도로 노골적이며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을 행동과 삶으로 거부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의 악한 일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악을  행하는

자들을 오히려 격려하였다.


=====23:15

  쑥(*  , 라아나)이란 '저주하다'는 뜻을 추측되는, 잘 사용되지 않는  동사

에서 유래한 말로서 맛이 쓴 식물이다. 이 말과 함께 독한 물이란 말이  쓰이고  있는

데, 구약에서는 종종 이 두 낱말이 짝을 이루며 쓰인다(9:15).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

에게 임할 처벌의 고통이 쓰라리고 치명적이 될 것임을 나타낸다.


=====23:16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 이들은 백성들에게 안전과 태평성대를 약속하고 있었

다. 그리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죄악을 회개할 것을 촉구하지 않았으며, 여호와께로 돌

아설 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더 적극적으로 죄악에 가담해 있었을 것이

다. 따라서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은 곧 멸망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것을 주된 본분으로 삼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생각, 즉

스스로 유도해 낸 생각을 예언이라고 주장하였다는 말이다(Clarke).


=====23:17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이들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오직 자기 백

성들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였지, 악과  범법  행위에

대해 단호한 조처를 취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으로는 보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자기들을 뒷바라지 해주고 지켜 주실것이라고 하는 어리석

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공의와 거룩함을

엄격하게 요구하고 계셨으므로 비록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언약의  하

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을 경시하고 거역하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23: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 이 구절은 누구도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한  자가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여호와의  회의를  알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는 욥 15:8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는 단순한 수사 의문문이 아니며 예레미야 자신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에

평화를 외치는 자의 말이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것

이 더 좋겠다(Bright, Nicholson). 그리고 '여호와의 회의'(*                   , 베

모드 야훼)란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참된 종들과 깊은 교제를 통해 진리를 계시

해주시는 것과 연관지어 이해되어야 하겠다(암 3:7, Feinberg).


=====23:19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 '회리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

겁고 악취를 풍기는 사막의 열풍을 말하는데,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권능과 심판을 묘

사하는 대목에서 종종 등장한다(시 58:9). 한편 본절과 다음절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

하고는 30:23, 24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후대에

삽입된 내용이라고 주장하나, 문맥상 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선지자가  같은

내용을 다른 상황에 적용하여 같은 말을 반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섣부르게      삽입론을

펴서는 안 될 것이다.


=====23:20

 여기서 우리는 잠시 예레미야가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큰 박해를  받았으

며 또한 그의 메시지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상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또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여

겼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내버린다는 것에 동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Nicholson). 그러나 본절은 범죄에 따른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

다. 한편, 말일에(*                         , 베아하리트 하야밈)란 말은 직역하면

'종말의 때에'란 뜻으로서 메시야 시대에 관한 서술로도 쓰이나 여기서는 단순히 예레

미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Bright, Feinberg).


=====23:21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아들인 일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

어낸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며,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빌미로 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웠던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감각이 없는 반면에 자신의 권위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

겠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아

전 인수격으로 적용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23:22

 참된 선지자의 표적들 중의 하나가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세움받

은 백성은 그에 합당하게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점을  가

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선지자의 주된 사역은 그들이 죄악에 빠져있을 때 그것을

꿰뚫어 보고 그들을 하여금 죄악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다(Nicholson).


=====23:23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지 않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하지만,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우리들의 모든 행위를 다  보

고 계시다. 하나님은 초월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내재해 계시고 우리들의  머

리털까지 세시고 계시며, 새들을 먹이시고 식물에게 옷을 입히신다(Nicholson, Clarke

).


=====23:24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 본절의 질문은 앞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는 수사 의문문의 형식으로서 그 대답은 부정문을 유도하고 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갔던 일이 있으나, 하나님은 지역 신이 아니신 고로 하나님으로부터 도

망칠 수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들이 비록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으며 그들의 모든 행위는 전부 하나님께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23:25

  몽사를 얻었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람'(*        )은 '꿈꾸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종종 꿈이나 환상을  통해  전달되었다(창  37,41장;  민  12:6;삼상

28:6;단 2:7;욜 2:28;슥 1:7-6:8). 본절의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받은 계시의  정당

성을 강조하기 위해 꿈꾼 사실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들의 편익을 취하

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일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이비(似而非)나 이단은 많은 부분

에서 참종교와 외형적인 면에서 유사한 면을 보이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인하고

그 말씀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가감한다는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23:26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 히브리 원문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구절이

다. 혹자는 '언제까지'에 해당하는 '아드 마타'(*             )를 '몽사를 얻었다'(2

5절)에 해당하는 '할라메티'(*            )의 오기(誤記)로 보거나(Duhm), '이  마음

을 품겠느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예쉬 벧레브'(*               )의 '하'(*    )

를 27절 서두(히브리어 원문상의)의 '하'(*    )에 연결시키거나(Rudolf) 혹은  '하예

쉬 벧레브'를 '하야슈브 레브'(*               )로 고쳐 읽기도  한다(Brockington).

그러나 굳이 히브리어 원문을 수정하지 않더라도 본절의 의미는 비교적 명확하게 이해

된다. 즉 거짓 선지자들은 나름대로 자기 예언의 근거와 기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조만간 그 거짓됨이 드러나고 만다는 말씀이다.


=====23:27

  여기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끼치는 해악(害惡)이 우상 숭배로 말미암은  것과  다름

바 없는 것으로 거론된다. 한편 내 이름이란 단순한 칭호 이상의 의미,  곧       하나님의

인격과 본성을 함축하는 말이다.


=====23:28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 하나님의 진리와 거짓 선지자들의 꿈은 본질적으로

서로 달라서 엄격히 분리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비유이다. 하느님의 참된 메신저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백성들에게 큰 유익을 주는 영의 양식이 되지만 , 거짓 선지자들의  말

들은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며 도리어 해악만 끼칠 뿐이었다.한편, 성경에 언급되는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들로는 시드기야(왕상 22:11, 12), 하나냐(28:1-17), 스마야(29:

30-32), 바스훌(20:6), 노아댜(느 6:14), 이세벧(계 2:20) 등을 들 수 있겠다.


=====23:29

 본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된 불과 방망이는 공히 불법과 죄의 세력을  멸하는

파괴적인 힘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악을  철저히  소각시키며(5:14

참조), 인생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히 4:12). 그러므

로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오직 철저한 파멸만이 기다릴뿐이다.


=====23:30,31,32

 이 세절은 원문상 공히 '내가  에 대항하여 본다'(*               ,  힌네  알)는

말로 시작되며,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상을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

의 말씀을 도적질한 죄이다(30절). 그들은 참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자신을 통해 계시된 것처럼 착복, 도용했을 뿐만 아니라 인기에  편승하는  말을

교묘히 섞어 진리를 왜곡시켰다. 둘째는, 혀를 함부로 놀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죄이다(31절). 그들은 그들의 거짓 예언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말씀하

셨다'고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거짓된 생각을 늘어놓았다. 셋째로는, 백성들을

미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한 죄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인기에만 편승하여 죄를  정확히

지적하거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결국 영적, 도덕적  불감증에       빠지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23:33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요 - '엄중한 말씀'에 해당하는 '마사'(*         )

는 '(짐을) 들어  올리다'는  뜻인  '나사'(*         )에서  유래한  말로서  '말씀'

(oracle, NIV) 혹은 '짐'(burden, KJV, RSV) 으로 번역된다. 거짓 선지자들의 꾐에 빠

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배도의 길로 걸어감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마

치 무거운 짐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RSV는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대답

인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를 '너희가 짐이니라'(You are burden)고 옮겼다(LXX, Vu

lgate). 그리고 본절의 '마사'는 이렇듯 패역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

해 무서운 심판의 신탁을 베푸신 것으로도 이해된다. 이런 측면을 중시한 고대 역본으

로는 탈굼역(Targum)과 시리아역(Syriac Versions)을 들 수 있다. 결국 본절은 사람들

이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경멸조로 비웃는 말이라 하겠다.


=====23:34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는  벌하리라 하셨다 - 본절 이하에는 '여호와의 엄중

한 말씀'이라 말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여호와의 엄중

한 말씀'이라 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관해서는 명확한  규명이  어렵지만

대채로 다음 세 가지 정도의 뜻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1) 여호와의 심판  메시지

에 대해 조롱조로 하는 말, (2)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께 짐스러운 존재이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메세지를 짐스럽다고 말하는 것, (3) 특히 거짓 선지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

로서(37절 참조),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의 예언을 보증하기 위해 그들의 예언을 '여호

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도용한 것 등이다.


=====23:35,36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조롱조로 받지 말고, 겸허히 순종하는  자세

로 받아들이라는 권면이 나타난다.

   망령되이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파크'(*        )는 '변질시키다', '왜곡

시키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 인수(我田引水)격으로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23:37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 허탄하고 망령된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의  말

씀을 겸허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

이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도리어 배척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이다. 즉

그것은 인생이 악한 정욕과 탐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완고해지기 때문이

다(Calvin).


=====23:38

  34절 주석을 참조하라.


=====23:39

  본절의 잊어버리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솨'(*        )는 '잊어버리다', '제거

하다'는 뜻이며 '엄중한 말씀'이라 번역된(38절) 히브리어 '마사'(*        )의  어근

'나사'(*        )와 그 음역이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언어 유희(word play)의  일면을

보여준다. 즉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한 대가로 그들은 징벌에 처해지고 마는 것이다 (D

. R. Jones).


=====23:40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파멸가 수치가 임할 수밖에 없음을  확

정하는 구절이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

에 통해 이 예언은 성취되었다.(왕하 25:8-12). 한편, 수치(*         , 켈리마)는 치

욕(*         , 헤르파)과 거의 같은 뜻이나 어감이 더 강한 말이다(Parkhyrst).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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