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장 주석
=====20:1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이라 - '유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키드'(*
)는 '감독관'이라는 뜻으로서 성전내의 질서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던 것 같다. 그
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때에 '열방의 감시자'로 임명되었다(1
:10). 그런데 역설적으로 성전의 '감독'이 하나님의 '감독'을 방해하는 상황이 된 것
이다(Bright). 한편, 본서에는 바스훌이라 이름한 관리가 두 번 언급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곳에 언급된 바스훌로서 38:1에 언급되고 있는 그다랴의 아비인 바스훌과 동
일 인물인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사람은 21:1과 38:1에 언급되고 있는 '말기야의 아
들 바스훌'이 그 사람이다. 이 이름의 기원은 애굽에 있었던 듯하다(Nichoson). 본절
의 바스훌은 성전에서 예레미야의 활동을 금지시키는 것을 그의 임무 중 하나로 맡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서기 바룩을 보
내 두루마리를 읽게 했던 것 같다(36:5).
=====20:2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 맛소라 사본은 '바스훌리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게 했다'라고 사역형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70인역(LXX)은 그가 직접 때렸다고 표
현하고 있다.
베냐민의 윗문 - 37:13과 38:7에는 베냐민문이란 명칭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문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곳의 베냐민 윗문과 혼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Nich
olson). 본절에 언급되어 있는 이 문은 성전 경내에 이르는 문들중의 하나였던 것이
분명하며 요담이 지은 바 있는 '여호와 전의 윗문'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왕하 15 :
35;겔 9:2). 이 이름에서 우리는 이 문이 성전 북쪽 편에 있었을 것이며 베냐민 땅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0:3
네 이름을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 바스훌이 다음 날 아침 예레미야를 놓아
주자 예레미야는 그에게 '마골밋사빕'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주었다. 이것은 '사방의
두려움'이란 뜻으로 6:25에는 북쪽의 무자비한 적을 가리키는 데 쓰였던 말이었다. 이
말은 10절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46:5;49:29;시 31:13;애 2:22 등에서도 쓰였다. 분
명하지는 않으나 이 '마골밋사빕'이란 이름은 바스훌이란 이름의 뜻과 언어 유희(word
play)의 관계에 있었던 같다. 아무튼 이 새로운 이름이 명명된 것은 이 이름에 걸맞는
처지에 이르게 될 것임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스훌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처
벌하는 감독의 위치에 있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두려움이 그와 이 민족을 사로잡게
될 때 크고 두려운 심판에 처하게 될 것이다(Thompson).
=====20:4
그들이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칼로 죽이리라 - 여기서 예레미야는 바스
훌에게 붙여준 이 새 이름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여호와께서는 바스훌로 하
여금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그의 친구들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 말은 곧
,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그 메시지를 거부하는 일에 앞장섰던
바스훌과 같은 인물 때문에 유다가 참경에 처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의 이
새 이름은 결국 그에게 내리는 저주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칼에 맞아 쓰러
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져서 끌려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또한 온 유다에 임하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다. 이 시점에 와서는 북방의 적이 더 이상 모호한 존재로 명시
되지 않고 바벨론 왕과 그 군대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20:5
이성의 모든 부와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붙이리니 - 이 예언은 B.C. 597년 이
전에 주어졌던 것이다. 본절에는 적들에게 빼앗기게 될 여러 종류의 전리품들이 언급
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네 가지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 말들에
이어 세 가지 동사가 쓰이면서 철저한 약탈의 의미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그것은
'붙이다, 탈취하다, 가져가다' 등이다. 이러한 말들로 보아 재앙의 참혹한 상황에는
사정 봐주는 일이 조금도 없을 것이란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20:6
너와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되어 옮기우리니 - 바스훌 개인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내용은 그와 그의 가족이 바벨론으로 이주되어서 그곳에서 죽을 것이고 거짓
예언을 전달하면서 사귀어 왔던 친구들과 함께 거기서 묻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예
언은 B.C.597년에 그가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성취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B.C. 597
년 이후에는 마아세의 아들 스바냐가 그의 직책을 떠맡은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29:24, 26, 29). 바스훌은 제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민족에 아무런 재앙에 해도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선지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14:13).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으며 죽어 마땅한 죄악을 범한 짓이었다(26,28장 참조). 또한 본절에는 '거
짓'이란 명사가 쓰이는데, 이 말의 원어는 '쉐케르'(* )이다. 예레미야는 이
말을 매우 많이 사용하였던 바(6:13;7:4;8:8;9:3;13:25 등) 이 말을 통해 예레미야는
중요한 뜻을 전달하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즉 유다의 지도자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제
사장들 또 지혜있는 자들과 왕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거짓 예언이라는 깊은 오류
에 빠져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Thompson).
=====20:7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이기셨으므로 - 여기서 '권유하다'에 해당하는 '파타'(
* )는 '유혹하다', '속이다', '설득하다' 등의 뜻을 지니며, 출 22:16에는 이
단어가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신성 모독적인 어감을 피하기 위하
여, 이 단어를 '설득하다', '부추기다' 등으로 약하게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속이
다', '꾀다'라고 번역한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신성모독적 감정을 표했다고 보기는 어
렵다. 그는 소명 당시부터 그 소명을 감당하기 두려워했으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
음으로 그 일에 전념하였으나(1:4-10) 점점 심각해오는 핍박의 양상을 맞아 다만 깊은
갈등에 사로잡혀 역설적 항변을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Feinberg). 이는 그가
15:18에서 여호와를 가리켜 속이는 시내라고 말한 사실과 일맥 상통한다.
=====20:8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치욕과 모욕거리가 - 예레미야가 줄곧 외쳐왔던 메
시지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심판 선언이 이제는 사람
들로부터 모욕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Brigh). 한편 전반절의 '외치다'(*
, 자아크)란 동사와 '부르짖다'(* , 카라)란 동사는 공격적이고 큰소리로 선
언한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그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언약을 위반했
다고 하는 비난과 예루살렘의 멸망 선포는 조소거리가 되었으며, 거센 반발과 핍박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20:9
예레미야는 더 거세어져가는 핍박의 와중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도 해보았다.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선지자가 가
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포기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
나 말씀이 불과 같아서 속에다 담아둘 수가 없었다. 답답하여의 히브리어 '라아(*
)는 '기진하다'의 뜻으로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한
편 사도 바울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다'(고전 9:16)라고 고백하였다.
=====20:10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 이는 사람들이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
며 '저기 마골밋사빕이 지나간다'라고 수근거리며 비난했던 것을 가리킨다. 이 '마골
밋사빕(사방의 두려움)'이란 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바스훌에게 붙여준 이름이었지
만, 이제 예레미야의 별명이 되었다. 예레미야가 당했던 고뇌는 친한 벗들처럼 예레미
야의 반대 편에 서서 그가 잘못된 길로 가기글 바랐던 데서 한층 심화되었다. 그들은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그때가서 그를 때려 잡자'라고 수군거렸다. 여기서 '유혹
을 받아'라고 하는 동시에 7절 상반절에 언급된 '권유하다'란 말과 같은 히브리어(*
,파타)이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미혹된 길에 빠져 반역죄로 몰아 붙일 수 있는
망언을 내뱉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Feinberg). 이처럼 선지자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단절감과 소외로 말미암는 이런
고독은 예레미야에게 참으로 처량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20:11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 선지자의 절망과 낙심에 대한 묘사의 한가운데
이르러서 다소 문맥의 흐름과는 벗어난 듯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즉 여호와로부터
받은 소명조차도 회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내용이 등장한
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회의와 갈등 속에 방
황하다가 마침내 그의 신앙의 최종적인 영역에 도달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다시 여호
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두려운 용사와 같고 또 자기
와 함께하신다'라고 하는 고백은 시 24:8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박
해자들이 강한 것 같아도 자기를 쓰러뜨릴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위기의 순간을 맞았
을 때 예레미야는 1:18,19의 여호와의 약속을 회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전의
위기 상황에서도 이 약속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힘을 얻은 적이 있다(15:20).
=====20:12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 이 구절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11:20이 반복된 내용이다. 여기서 '폐부와 심장'이라고 하는 말은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생각'을 뜻한다. '폐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켈라요트'(* )는 감정
이나 감추어진 동기 등이 들어있는 장소로, 그리고 '심장'(* ,레브)은 생각과 의
지가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각각 간주되었다. 한편 사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브'
(* )는 법정 용어로서 논쟁, 소송, 변론 등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의 대적들은
그를 치려고 그에게 불리한 증거를 수집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10절;18:18). 그러
나 재판이 열리면 여호와께서 그의 변호사가 되어 주실 것이다.
=====20:13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 본절은 예레미야의 깊은
내적 고백이라는 문맥상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고 또 본 단락의 분위기와 다소 어울리
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에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후대에 삽입된 찬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의 애가들도 종종 본문과 같은 신앙과 믿음의 내용을 내포
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결론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시 6:8,9). 더군다나 본절의
용어는 예레미야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행악자의 손에서'란 표현은 15:21과 21:12 그
리고 23:14 등에서도 나타나며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다'란 표현은 이곳과 23:14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 후자의 표현은 본서 외에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쓰이지 않고
있다. 한편, '가난한 자'(* , 에비욘)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빈곤에 처한
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특히 신앙이 돈독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
도 좋을 것 같다.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는 세상적으로 가난한 경건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해자의 위협을 받는 시련의 때에 한 사람을 지탱시켜 주는 것은 결코 재산
이나 부가 아니라 영적 힘인 것이다.
=====20: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 여기서 예레미야의 갈등과 고뇌가 극한에 치닫고 있
음을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낳아준 것에 대해 탄식한 때도 있
었다(15:10). 그러나 그는 거기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지는 않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
였을 뿐이다. 하나님이나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범법 행위였다(레 20:9;24:10-16). 본절에서 선지자는 비록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저주와 원망은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받은 사실과 그가
출생하기 전에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1:5). 한편, 소망과
믿음의 고백(11-13절)에 이어 곧바로 이처럼 침울하고 절망적인 탄식이 토로되는 것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혹자는 구문의 위치 변경이 가해졌다고 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본절 이하가 바스훌의 말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견해들은
지나친 추측에 근거하였을 뿐이다. 우리는 당시 예레미야가 직면했던 심리적 갈등과
불안을 고려할 때, 이처럼 갑작스런 심리 상태의 전환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Myer
s).
=====20:15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 예레미야는 자신의 아버지를 저주하지
않고(부모를 저주하는 이에 대한 모세 율법의 규정인 출 21:17 참조) 자기 아버지에게
자신의 출생 소식을 전해 준 그 사람에게 저주를 돌리고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
네가 생남하였다"라고 알려주었는데, 여기서 '아들'에 해당하는 '벤'(* )은 때때
로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다만 '아이'란 뜻으로 쓰이지만, 본절에서는 아들임을 분명
히 하기 위해 '자카르'(* ), 즉 '남자 아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한편, 이스라
엘 남자에게 있어서 아들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가통을 이어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딸들도 유산 상속에 참여하긴 했지만(민 27:8), 그래도 가문의 머리
는 남자였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아버자가 아들의 탄생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였을
것이 당연하다.
=====20:16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 이는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뒤집
어 엎으신 성읍'들로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평원에 있던 다른 성읍들을 가리키는
말이다(Brigh, Thompson, 23:14;창19:24-28;사1:9 참조). 예레미야는 극에 달한 낙심
과 고뇌 가운데 자신의 출생 소식을 전한 자에게 소돔과 고모라에게 임했던 저주와 심
판이 임하기를 바라는 끔찍한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레미야가
이 사람에게 실제로 저주를 퍼붓고 싶어한다는 식의 문자적 해석을 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는 극도의 곤경에 처하여 차라리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강렬한 어조의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20: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 이런 표현들은 특정 대상에 대해 실
제적으로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포자기적 고통을 나타
내기 위한 다분히 문학적 기교에서 나온 것임에 분명하며,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레미
야의 절망이 얼마나 심각하고 고통스러웠는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18
어찌하여 내가 태어서 나와서 - 이 구절은 예례미야의 고뇌의 시의 결론에 이르고
있는데,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였던 자로서 어찌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할 정
도로 심각한 탄식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이런 비탄의 부르짖음과 고뇌에 찬 질
문에 대해 아무런 용담도 주시지 않았다. 어쩌면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당신의 약속과
뜻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회복하기를 침묵함으로써 기다리고자 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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