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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예레미야

[스크랩] 예레미야 22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55

예레미야 22장 주석

 

=====22:1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 이 단락의 말씀 역시 시드기야 때에 작성되어 전달되었

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트'(*         )는  '궁전'을

뜻한다.


=====22:2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 여호와의 말씀은  왕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도 전달된다. '네 신하와 네 백성'이란 표현은 문자적으로 직역하

면'네 종들과 네 백성'이다. 그러나 이곳의 '종'이란 말은 왕의 신하들이나  관리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Bright).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매일같이 궁궐문을  드나들었다

고함은 국사나 재판 등의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21:12 참조). 한편, 클라크(Clarke)

는 당시 신하들이 왕에게 반역을 도모하도록 부추겼음을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22:3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          )이며

'공평'은 '체다카'(*        )인데, 이들은 대단히 중요한 용어로서 때로는  구약에서

함께 연결되어 쓰이곤 한다. 이 두 용어는 모두 언약의 율법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 '미쉬파트'는 사사나왕들이 시행하여야 할 언약 율법과 규례와 관련하여 주로  쓰

였고, '체다카'는 여호와의 규범과 표준에 맞추어 바르게 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

된다. 왕과 모든 백성은 항상 모든 사실을 다 고려한 후 정의롭고 공평하개 행동할 것

이 항상 요구되었다. 특히 왕이 하여야 하는 주요한 임무는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

과 같이 정의를 세우고 타인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이었다(Thompson).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말며 - 이들 세 계층에 대한 보호는 언약  규정

조항의 일부였었다(출 22:21-26;23:9;레 19:33. 34;신 10:18, 19;24:17). 왕은 백성들

과 마찬가지로 시내 언약 요구 사항을 충족 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다윗 언약(삼하

7장)은 이런 관점에서 모세 언약과 그 근본적인 취지 면에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Thompson).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 이 지적은 재판상의 불공정이나 권력의 남용에 따른 무

죄한 피흘림뿐만아니라 도벱에서의 인신 제사와 관련된 극악한 관행도 가리키는 것 같

다(7:31;19:3-15).


=====22: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 예레미야는 이제 왕가의 존속 여부가 어디에 달

렸는지를 지적한다. 그것은 왕들의 여호와 율법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는 번영과 왕조의 존속을 의미한다.


=====22:5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이 집이 황무하리라 - 왕과 백성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거부

했을 때의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삶을 두고  맹

세하셨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에 기초를 둔 백성이므로 여호와의 말씀

을 무시하고는 번영이 있을 수 없었다.


=====22:6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꼭대기 같으나 - 본절과 다음 절은 시어체로 기록

되어 있으며 전후 산문체 단락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여기 언급된 '길르앗'과  '레바

논'은 숲이 울창한 것으로 유명했다. 왕의 궁전은 이들 지역에서 나온 목재로  지어졌

기 때문에 때로는 '레바논 숲의 집'이라고 불리었다 한다(왕상 7:2;사 22:8 참조). 그

러나 그토록 웅대하고 위엄어린 곳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는

한, 여호와는 그곳을 '광야'와 '거민이 없는 성'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

레바논은 가장 기름지고 생산량이 많은 지역이었으므로 여기서 이들은 왕가에 대한 상

징으로 쓰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Clarke).


=====22:7

 본절에서 바벨론 군대는 벌목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시 74편은 바벨론 사람들이 도

끼와 철퇴 등을 가지고 성전을 파괴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준비하리

니'의 히브리어 '카다쉬'(*        )는 '성결하게 하다', '구별하다'는  뜻을  지니는

바,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구별하심을 나타낸다.


=====22:8,9

 이 두 구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모압 평지에서 언약을 체결할 당

시 주셨던 경고의 말씀과 일치하는 내용이다(신 29:24-26). 여기서 특별히 주의를  끄

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한 결과 파멸에 이르자 도리어  이방인들의  지적과

조롱을 당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마땅할 성도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가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지탄과 경멸을  당하게

될 뿐이다.


=====22:10

 여기서 단수로 표현되어 있는 죽은자란 요시야를  가리킨다(Delitzsch).  요시야는

b.c. 609년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였다(왕하 23:29,30). 그리고 잡혀간 자란 말이 쓰

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말한다. 그느느 요시야가 죽자 그의  뒤를

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애굽의 바로느고에 폐위되고 석달 후  애굽으로  잡혀갔다(왕하

23:31-35). 살룸(11절)은 그의 개인적 이름이었으며 그의 왕명은 여호아하스였다.  대

상 3:15에 따르면 여호아하스는 요시야의 네 번째 아들이었고 그의 부친 사후  '국민'

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대하 36:1). 여기에는 아마 백성들의 반애굽 성향과 같은  정

치적 동인(動因)이 배후에 깔려있었을 것이다.


=====22:11,12

  예레미야는 다른 그 어떤 왕보다 더욱 더 가혹하게 여호아하스를 단죄한다. 성경상

의 기록으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대하 36:1-4 참조) 여호아하스는  3개월이

라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선왕(先王) 요시야와는 정반대의 패역한 정치를 폈던  것으

로 짐작된다. 그는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첫 번째 유다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Fein

berg).


=====22: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 - 유다  역대  왕들의

범죄와 그 결과를 논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여호아하스에 이어 여호야김의  패역상에로

초점을 모은다. 그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여호야김에 의해 건축된  화려한  건물들이었

다. 그는 21:12과 3절에서 지적되었던 '체데크'(*        , 공평0와 '미쉬파트'(*

       , 정의)에다 부정의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불변사 '로'(*     )를 첨가한 표현

을 사용하여 이 점을 강조한다. NEB는 이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와 '부정한 수단

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RSV는 '불의로'와 '부정으로'라고 번역한다. 아마  여호야

김은 백성들의 무임 노동을 통하여 이 일을 완수하였을 것이다. 한편, 솔로몬은  예루

살렘과 그 밖의 다른 곳에다 자신을 위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했던 바가 있는데. 이것은 언약의 율법을 위반하는 중대한 범죄들 중의       하나였다

(레 19:13;신24:14,15;왕상5:13,14;12:3,4). 왕의 의무는 바로 이 율법을 지키고 보전

하는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스스로 그것을 위반하는 죄를  지었던  것이

다. 한편, 여호야김의 건축에 대해서 언급하면, 최근에 라맛라헬(Ramat Rahel) B.C. 7

세기 말경으로 보이는 세련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지적하고 있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며 또 어쩌면 그것이 여호야김의 작품이었을 수도 있다.  제5단계의

발굴은 B.C.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세련된 석조 건물로 만들어진 외벽과 대

문 그리고 내부의 거대한 건물이 있는 이스라엘 후대의 성이 서 있었다. 인간이  찍힌

항아리 손잡이 등의 귀중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 어떤 것은 두  개의  날개가

달린 왕의 인장과 '왕의 소유 헤브론'이란 글씨를 담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발

굴자는 그의 보고서에서 13-19절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여호야김은 왕위에  올랐

을 때 겨우 25세밖에 되지 않았고 또 36세에 죽었던 바(왕하 23:36) 엄청나게  타락하

고 자기도취에 빠졌던 젊은 독재자였을 것이다(Thompson).


=====22:14

  창을 만들고 - '만들고'의 히브리어 '카라'(*        )는  일반적으로  '쪼개다'나

'찢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4:30에서는 '넓히다'나 '확장하다'란 뜻으로 쓰였다(

한글 개역 성경은 눈을 크게 하기 위해 '그리다'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기 때

문에 우리는 여기서 '창을 넓히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22:15,16

 여기서 여호야김은 그의 아비 요시야와 대조되고 있다. 여호야김은 자신의 왕적 권

위를 근사한 궁궐을 지음으로써 과시하고자 했다. 반대로 요시야는       왕으로서  지녀야

할 진정한 가치 기준과 수행해야 할 책무를 바로 깨달았다. 그는 압제나 허장  성세라

고 하는 불의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삶을 즐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

는 공평과 정의를 먹고 마시는 음식처럼 소중히 여겼으므로(요 4:34  참조)고통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설 줄 알았다. 요시야의 이러한 공평과 정의의 정치 철학은  하

나님께 대한 경건하고 진솔한 신앙의 기반위에서 가능했음은 물론이다(Feinberg).


=====22:17

 여기에는 여호야김의 악행이 통렬하게 지적된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이기

적 탐욕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으며(왕하

24:3,4), 또 독재와 강탈에 혈안이 되었것이다(3절 참조). 한편 무죄한  피를  흘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재판상의 부당한  판결을  통해

무죄한 자로 극형에 처해지게 넘겨준다는 의미(Hyatt). (2) 무죄한 자를  살해한다는

의미.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26:20-23에 언급된 바 선지자 우리야의  피살  사건을

들 수 있다.


=====22:18

  여기서는 이 불경건한 통치자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이 선고되고 있다. 그것은  '슬

프다'란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화로다'(*        , 호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히

브리어 본문상으로는 네 번 등장한다. 그에게는 장례식장에 따르기 마련인 조의의  표

시나 애곡마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비참한  최후가  예고되고  있다(왕상

13:30 참조, Bright)


=====22:19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우고 - 이 구절 끝 부분에는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는 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약간의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다. 36:30에는  여호야

김의 시체가 낮의 뙤약볕에 그리고 밤의 서리에 노출되어 내던져진다는 내용이 언급되

고 잇으나, 왕하 24:6에는 '여호야김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의

장례가 정상적으로 치르어졌음을 암시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열조와

함께 잔다'는 말은 죽음을 나타내는 일반적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성경에는 여

호야김의 최후에 관한 정확한 언급이 나오지 않으므로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는 곤란하

나, 본무에 나타난 예언의 성취를 믿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

겠다. (1) 갈대아 연합군의 칩입 당시(왕하 24:2), 여호야김은 전사당하여 급히  매장

되었으나 침략군들에 의해 그 시신이 훼손되었으리라는 견해. (2) 궁정에 반란이 일어

나바벧론 정책으로 돌아선 여호야김이 살해되고, 그 시신이 갈대아 연합군에게 내던져

졌다는 견해(Cundall). (3) 갈대아 연합군이 침략할 즈음에는 이미 여호야김이  죽어

매장된 뒤였으나, 침략군들이나 일부 유다인들에 의해 그 무덤이 파헤쳐졌으리라는 견

해(Hyatt).


=====22:20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대화의 상대방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파국을 멀리  선포

하고 슬퍼할 것을 명령받는다. 레바논은 유다의 북쪽 국경, 바산은 북동쪽 국경, 그리

고 아바림은 남동쪽 국경으로서, 이들 지역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맥에 위치하여 유

다 땅 전부를 관망할 수 잇는 높은 곳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란 패배한 유다의 정

치적 동맹국들을 말한다(호 8:9 참조). 아마 이 애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 더 나아가서는 27장에 언급된 반바벨론 반역을 기도하였던 서쪽의 여러 세력들을 가

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B.C. 605년 갈그미스에서 애굽  군대를  격파한

후 이들을 다 진압하였다(46:2-12).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스글론이  진압되었으며

(47:2-7) 이어서 트랜스요르단 지역은 느부갓네살의 속국이 되었다(왕하 24:1, 2참조)


=====22:21

 네가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 예루살렘 파국의 원인은 이 백성이 처음부터

여호와께 순종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2:31;3:24, 25:7;24-26;11:7-10 참조).  이

제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였다(Thompson).


=====22:22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요 - '목자들'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종교적 지

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실제로 바벨론의 침략으로 말미암아(B.C.  597년)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다(왕하 24:22-25:7). 그런 다음 예루살렘은 '수치'를 당할  것이고  도

그녀의 '악'으로 인하여 '욕'을 당할 것이다. '악'의 히브리어  '라아'(*         )를

'재앙'으로 번역할 경우, 본절 하반절은 이렇게 번역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

는 너의 재앙으로 인하여 수치에 알맞는 심판을 받을 것이고 욕을 당할 것이다.'


=====22:23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 예루실렘의 궁전과 각종 건물들에는 엄청남 양의 백향목

재목들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예루살렘 거민들이나 지도층 인사들을       가리킨다

고 해석되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유다 백성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도 문맥

상 자연스럽다. 높은 가지 위에 깃들인 새처럼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기 기만에 불과하였다(6, 7절;21:13 참조, D.R. Jones).


=====22:24

고나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 반지라할지라도 - '고니야'란 이름은 여호야긴에  대

한 단축 명칭이다(52:31). 그의 또 다른 단축형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요고냐이다

(24:1;27:20;28:4;29:2). 한편, '인장 반지'란 것은 어떤 문서에 자신의 서명을  표할

때 쓰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징세용 곡식과 기름을 수집하는 데  쓰였던  토기

항아리들에는 두 개의 날개로 상징되는 왕의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거기에는  또한

'왕에게 속함'이란 말과 징세가 이루어진 도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Thompson). 유다

의 왕들은 여호와의 인장 반지로 쓰이는 여호와의 공식적인  대변자들로  간주되었다.

동일한 비유가 요호야김의 손자인 스룹바벨에게도 적용되었다(학 2:23). 그러나  고나

야는 여호와의 인장 반지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함으로 더 이상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으로 존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22:25-27

 고니야와 그 모친인 느후스다가 함께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는 예언이다. 고니야가

왕으로 즉위할 때 불과 18세였으므로, 그모친인 느후스다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

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본문의 예언은 바벨론의 2차 침입으로 인해 그대로 성취되었

다(왕하 24:8-16).


=====22:28

  여기에는 버림받고 깨어진 그릇에 대한 비유가 제시되고 있다. 이 장면은 앞서  언

급된 깨어진 오지병에 대한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있다(19:1-13).  백성들은  여고냐를

원했던 것 같으나(28:1-4 참조) 하난미의 인정을 받지 못한 여고냐의  말로는  비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아울러 예레미야는 본절에서 여고냐뿐만아니라 그 자손까지  언

급함으로써 다윗 왕가 자체에 대한 징벌을 암시하고자 했다(Feinberg).


=====22:29,30

  세 차례에 걸쳐 '땅'을 호출함으로써 시작되는 본문은 징벌의  철저함과  엄숙성을

상기시킨다. 고니야가 무자할 것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그가  아이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대상 3:17,  18).

그러나 여호야긴의 자손 중 다윗 왕위에 앉힐 자가 없었다는 점에서 무자한 것으로 간

주되고 있다 하겠다. 그의 손자 스룹바벧(대상 3:19)은 포로 후에 총독의 직책으로 귀

환하였지만 왕은 아니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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