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1장 주석
=====21:1,2
본문에서 시드기야는 B.C. 588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침략을 받자 당
황하여 예레미야를 부르고 있다. 그는 본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반바벨론
파의 듯세로 인하여 애굽, 암몬, 두로, 모압, 시돈 등과 동맹을 맺어 바벨론에 반란을
꾀하였다(겔 17:15). 그러나 막상 상황이 다급해지자 그는 자신이 투옥시켰던(32:2)
예레미야에게 특사를 보내어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말기야의 아들 바
스훌이 등장하고 있는데, 20:1-6에 언급된 임멜의 아들 바스훌과는 동명 이인이다. 이
곳의 바스훌은 더욱더 악랄하게 예레미야를 반대했었으며 훗날에 가서는 예레미야를
반역죄로 처형하려고도 하였었다(38:1-13). 그 뒤에 등장하는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는 본장에서 시드기야의 특사로 예레미야에게 왔지만 훗날에도 예레미야를 찾아
오게 된다.(37:3). 그는 예레미야에 대해서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
로 보인다. 그는 29:25-27에서 예레미야를 징책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는 유사(有司)
로 언급되고 있다.
여호와께 간구하라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 여기서 '간구하라'(* ,
다라쉬)고 하는 말은 여호와의 생각과 뜻을 찾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구약
에서는 이 말이 다양한 문맥에 산재해서 나타난다(창25:22;출18:15;신4:29;삼상9:9;사
31:1;호10:12 등). 시드기야는 그때로부터 약 1세기 전, 즉 B.C.701년 예루살렘이산헤
립과 앗수르 군대에 의해 포위 당했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왕하19:35 ,
36;사 37:36,37). 그때 여호와께서는 기사를 행하사 산헤립을 물러가게 했었다. 현 상
황 역시 그때와 대단히 비슷한 상황으로서 어떤 기적이 없이는 도저히 극복될 수가 없
는 처지였다. 다만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갈대아인들과 느부갓네살
(히브리어 음역은 '네부카드레차르'< >이며, 아카드어로는 나부-카
두리-우추르임)이란 이름은 보다 완전한 형태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장에서만도 수차
례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이 이름이 '네부카드네차르'(*
)로 쓰였다(27:6,8;28:3,11;29:1,3등). 그는 B.C. 605년에서 562년 사이에 바
벨론을 통치했으며, 나보폴라살(B.C. 625-605년)의 아들이며 후계자였다.
=====21:3,4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대했으나 그들에게 주어지는 응답은 약간의 희망마저도
완전히 꺾어버리는 그러한 것이었다. 약한 병기를 가지고 강력한 갈대아 군대와 맞서
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나마 있는 그 병기도 되돌려 버리실 것이고 침략
자들을 성 안으로 불러들이실 것이다. 이제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 함락을 들이키기 위
한 하나님께로부터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범죄한 유다를 징벌할 목
적으로 하나님이 친히 유다를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에 대한 원문의 해석은
다소 분명하지 않다. 이는 성 밖에서 갈대아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유다의 방위 군대가 침략자들과 더 이상 맞붙어 싸울 힘이
없어 다시 성 안으로 퇴각해 들어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는 성안으로 불러모아
딜 갈대아 군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함락 당시의 상황과 더 잘 어울릴 것
이다.
=====21:5
든 손과 강한 팔 곧 대노로 -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그들을 치실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갈대아인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
용하실 것임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든 손과 강한 팔'(*
, 베야드 네투야 우비즈로아 하자카)이란 표현은 32:21에서도 쓰이고 있
으며, 형용사의 순서가 바뀐 형태로 나타나 있다. 구약에서는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가끔 등장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을 치르실 때 주로 쓰
였다(주로 모세 오경에서).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하나님이 유다에 대하여 성전(聖
戰)을 치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야는 이른바 신명기와
같은 고대 전통의 계승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흔히 등장하는 이런 어구를 자주 사
용하였을 것이다.
=====21:6
큰 염병에 죽으리라 - 성경에는 '염병'(* , 데베르)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
오지만, 그 증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대체로 흑사병(pest), 티푸스
(typhus), 콜레라(cholera), 천연두(smallpox) 등이 성경에서 염병으로 지칭된 질병들
로 짐작된다. 이 염병은 구약 시대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던 병 중 하나였다. 왜냐하
면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이 병에 걸리면 거의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배회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결과 염병의
형벌의 네 차례나 받았으며(민11:33;14:37;16:46;25:9)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불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로서 임할 염병에 대해 수차례 예언하고 있다(14:12;24:10;겔7:15
;12:16).
=====21:7
시드기야의 그 신하들과 남은자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 염병에서 살아남
고 또 칼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왕들과 신하들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신하'에 해당하는 '에베드'(* )는 원래 '종', '노예',
'하인'을 뜻하나 여기서는 유다왕 시드기야를 보좌했던 근신(近臣)들을 말한다. 왕하
25장을 참조하면 이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 역사적 상황을 좀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21:8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 여기에서 일반 백성 전체에게
주어지는 간략한 서술이 언급되어 있다. 내용상 이것은 38:2,3과 유사하다. 아마 예레
미야는 같은 내용의 충고를 수차례 걸쳐 반복했었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백성들에
게 선택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었다. 이런 표현은
지혜문학과 그밖의 다른 문헌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예컨대, 신 30:15-20에도 이와 유
사한 형태가 표현되어 있는데, 그 선택의 주제는 언약에 대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하
는 것이다. 한편 본서는 산문과 운문으로 번갈아가며 표현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산
문체이다. 어떤 학자들은 운문만이 예레미야 작품이고 산문체 서술들은 후기 신명기
학파 저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곤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산문체를
예레미야의 작품이 아닌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의 것이
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21:9
여기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은 향하여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적에게 항복하라는 이 같은 조언은 그의 정치적 동기를 의심하게끔 만들었고,
강상적 이미지를 띤 정치 지도자들에게 핍박의 명분을 제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반역자로 여겨지기도 했었다(28장). 그러나 B.C. 586년 이 민족이 멸망했
을 때 그는 이곳에 남아 민족의 갱생을 위해 일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결코 개인
적 이익을 탐하는 그런 매국노가 아니었던 것이다.
=====21:10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것이요 - 예레미야가 주장하는 원리는 간단하
고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불의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이 민족을 버리셨다는 것
이며,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항복할 것을 권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라고 요
청하엿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미래의
갱생을 위하여 오히려 전일보하는 선택임을 주지시키고자 했다.
=====21:11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 - '유다 왕의 집'이란 유다 왕가(王家)를 가리키
며, 그 왕가의 기원을 연 다윗을 대조적으로 상기시키는 말이다(12절 참조). 그들의
선조 다윗은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공의롭게 통치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이스
라엘을 번영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열 왕국 시대의 대다수 왕들은 다윗과는
달리 불순종과 배도의 길을 멸망을 자초하였던 것이다.
=====21:12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 여기서는 왕의 근본적인 임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서술되고 있는데, 그것은 '공의'(* , 미쉬파트)를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 랍보케르)란 표현은 낮의 더위를 피해 아침 시간에 성문에서
열리던 소송 사건을 염두에 둔 표현인 것 같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왕들의 주요 임우
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정의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이란 정의의 수호자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이런 의무가 더욱 강조되었으며, 솔로몬은 하나님께 다른 그 무
엇보다도 선과 악을 분별할 지혜를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왕상 3:9).
=====21:13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 공동번역은 '계곡을 굽어보는 예루살렘아, 벌판에
우뚝 솟은 바위야'라고 번역하여 요새로서의 예루살렘의 지형적 이점을 시각적으로 잘
드러내었다. 유다 백성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예루살렘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비웃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분히 조
소적인 표현으로서 그들의 자만을 꼬집고 있다. 한편 본절의 '너희'는 2인칭 단수 여
성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도시나 성
들은 흔히 그곳 주민들의 '어미'로 표현되었으며 그 부변의 마을들은 '딸들'로 불리었
다(왕하 19:21;사 37:22).
=====21:14
70인역(LXX)에는 본절의 첫 행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 이 부분을 포함시
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앞 구절과는 달리 여기서 '너희'는 2인칭 남성 복수로 표현되
고 잇는데, 이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수풀'(* , 야아르)이란
명사에 대해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이 왕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라고 설명한다. 이
렇게 설명하는 근거로서 왕상7:2에 있는 '레바논 나무로 궁(레바논 수풀 궁)을 지었
다'는 내용을 제시한다. 아마 이 궁을 건축하는 데는 엄청난 백향목이 소요되었을 것
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을 예루살렘 혹은 유다의 온 땅을 암시하는 보다 폭넓은 의
미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수풀을 불에 사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
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이다9사 9:18;10:18, D.R. J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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