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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이사야

[스크랩] 이사야 주석 31~40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07
성 경: [사31:1]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ꃨ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 선지자는 애굽이 제공할 수 있는 도움 가운데 특히 말을 지목해서 거론한다. '말'이 고대 근동에 처음 유입된 이후 이 지역에서의 전쟁 양상은 급속도로 변모되어 갔다. 전차 부대와 기병대 등 , 말만이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지구력과 기동력은 싸움의 질을 변화시켰으며 파괴력 또한 엄청나게 증강시켰다. 따라서 병거와 마병은 보유력은 곧 그 나라의 군사력을 측정하는 기준으로까지 인식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앗수르는 당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 수효에 관한 한, 애굽도 이에 못지 않았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바로는 600대의 특별 병거를 위시한 많은 병거들을 대동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했으며(출 14:7), 시삭은 60, 000의 마병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했다(대하 12:3). 또한 애굽은 인접한 국가들에게 병거를 수출하기도 하였다(왕상 10:29). 이로 보건대, 유다가 앗수르의 위협을 당하여 애굽 특히 그들의 '말'에 마음이 끌렸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성 경: [사31:2]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ꃨ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 선지자는 대단히 완곡하게 풍자적으로 (irony), 그리고 대단히 완곡하게 하나님의 지혜와 애굽의 지혜, 그리고 애굽에 자신을 의뢰한 유다 지도자들의 지혜를 비교한다(5:21;19:11-15;28:14, 25;30:1.2)-'애굽이 지혜롭다면, 하나님은 더욱 지혜로우시지 아니하냐?(그러므로 마땅히 그에게 조언을 구했어야 했다.) 유다 지도자들아, 너희들만 지혜롭고 하나님은 지혜롭지 아니하시느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들로 하여금 큰코를 다치게 하실 것이다)'(Alexander).
ꃨ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 자신을 불신한 백성들에 대해 선포하신 경고를 결코 철회치 아니하신다는 말이다. 오직 중심에 우러나는 회개가 아니고서는 어떠한 것으로도 하나님의 징계를 변경시킬 수 없다.
ꃨ 악행하는 자의 집...행악을 돕는 자를 치리시니 - '악행하는 자의 집'은 유다를 가리키고(1:4), '행악을 돕는자'는 애굽을 가리킨다-'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불행을 가져오기로 마음 먹으시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Oswalt).

성 경: [사31:4]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대립 된다. (1)부정적으로 보는 경우 : 목자들(애굽)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사자(하나님)는 일단 잡은 먹이 (유다)를 놓지 않고 끝까지 잡아먹는다(징벌한다, Delizsch, Young, Lange). (2)긍정적으로 보는 경우 : 목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다를 끝까지 보호하실 것이다(Calvin, Oswalt, J.Watts). 여기서는 후자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성 경: [사31:5]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ꃨ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 앞절에서 사자로 비유된 하나님께서 본문에서는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새로 비유된다. 어미새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제 몸도 아끼지 않고 싸울 만큼 모성애가 강하다(신 32:11). 이는 하나님과 유다의 관계에 있어서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즉,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자처럼'강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정과 관심이 '어미새처럼' 끈끈하고 뜨거움을 묘사하는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선지자는 연속되는 4개의 동사들을 사용하여 다양하게 표현한다.
ꃨ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 '호위하며'(*, 가난)는 '덮다', '가리다'는 뜻으로 , '넘어가다'로 번역된 '파사흐'(*)와 평행을 이룬다. '파사흐'는 출애굽기에서 유월절 사건과 관련하여 사용된 동사인데 그때 하나님의 보복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들은 남김없이 죽이는 한편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넘어갔던' 것이다(출 12:13, 23, 27). 이는 미래에 있을 구원이 출애굽과 비슷할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11:15; 30:29). '건지며'(*, 나찰)와 '구원하리라'(*, 말라트)는 평행하는 말로서 다같이 '구해낸다'는 뜻이 있다.

성 경: [사31:6,7]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그 백성을 위로하시는 여호와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선지자는 동(同)시대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ꃨ 너희는 심히 거역하는 자에게로 돌아오라 - '심히 거역하겠다'는 말은 직역하면 '반역을 심화하였다'(*, 헤에미쿠 사라)이니,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것을 더욱 심화시켰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아직 회개의 문이 닫힌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죄악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긍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ꃨ 은우상, 금우상을...던져 버릴 것이며 - 우상 숭배가 만연되었던 때에 참회개의 증거는 이전에 섬기던 우상들을 무가치하게 내던져 버린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30:22). 회개는 내면에서부터 보이지 않게 시작하지만 항상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인 열매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또 그럴 때에만 그 진실성을 인정 받게 되는 것이다(눅 3:8-14참조).

성 경: [사31:8]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ꃨ 앗수르는 칼에 엎어질 것이니 - 앗수르의 멸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서 주어진다(8, 9절). 그러나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백성들의 회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본문 초두에 나오는 접속사 '와우'(*)에서 이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그때에 앗수르가 떨어질 것이며...'(원문).
ꃨ 사람의 칼로 말미암음이 아니겠고 - 앗수르 군대가 군사적 열세 때문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비한 힘에 의해 괴멸된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신비가 반복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홍해를 건넌 사건 ,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전투, 기드온의 승리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 될 것인데 , 여기에 선지자는 앗수르의 몰락을 첨가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덧붙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굳건한 신앙 관계에 있을 때에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음을 또한 교훈하고 있다.
ꃨ 그 장정들은 복역하는 자가 될 것이라 - 한 나라의 꽃이라고 할 수있는 청년들, 곧 전쟁을 위하여 선발된 용사들이 외국으로 끌려가 노예로 복역하게 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완전한 붕괴를 뜻한다.

성 경: [사31:9]
주제1: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
주제2: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
ꃨ 그의 반석은...그의 방백들은 기호를 인하여 놀라리라 -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반석'이 '그의 방백들'과 평행하는 말로서, 앗수르의 왕을 가리킨다는 데에 일치한다(Delitzsch, Cheyne, Lange). 군대를 지휘하던 그, 그래서 백성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왕도 두려움 때문에 싸움 한번 변변히 못하고 그만 물러나고 말 것이다. '기호를 인하여'(*, 미네스)는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 '기호때문에', 즉 적군의 군기를 보고 크게 두려워 한다.(Oswalt, J.Watts). (2) '기호로부터', 즉 너무나 무서워서 자신들의 군기마저 뒤에 팽개친 채 도망친다(Calvin, Delitzsch). '두려움을 인하여'라는 말과의 평행을 고려할 때 전자가 더 나을 것이다.
ꃨ 여호와의 불은...예루살렘에 있느니라 - 예루사렘은 하나님의 불이 타오르는 풀무이며 그곳에서 타는 불은 죄악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능력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풀무인 한, 그래서 함부로 손대는 자마다 소멸하는 불에 의해 멸망할 수밖에 없다면 (레 10:1-7 참조),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보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Oswalt).

성 경: [사32:1]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ꃨ 보라 장차 한 왕이...정사할 것이며 -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 도성을 공격하려던 대적들(앗수르)은 몰살되는 반면 그 도성은 영속성을 보장받게 되는데(31:4-9), 선지자는 계속해서 장차 그 도성에서 시행될 참되고 의로운 통치에 대해서 서술한다. 그 통치는 새로운 왕과 방백들, 즉 새로운 정부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제 동참할 '한 왕과 방백들'은 눌려 도망가는 '앗수르의 왕(반석)과 그 방백들'과 대비된다(31:9).저들은 역사의 무대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에들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 언급된 '왕'은 아마도 종교 개혁을 통해서 여호와 신앙을 부흥시킨 히스기야 왕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다. 선지자의 시선은 당대를 넘어 먼 미래에 미치며 그의 예언은 메시야 시대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성취되어진다.
ꃨ 의로...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 '의'(*, 체데크)와 '공평'(*, 미쉬파트)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통치 규범이다(1:21, 27). '의'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제된 올바른 행동의 원리라면, '공평'은 그 원리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선지자는 전자를 왕의 덕목에, 후자를 방백들의 덕목에 각각 적용시킨다.

성 경: [사32:2]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ꃨ 광풍을 피하는 곳...같으니 - 악한 정부의 통치가 백성을 괴롭히는 '광풍'과 '폭우' 그리고 '마른 땅'과 '곤비한 땅'과 같다면, 선한 정부의 통치는 그것들로부터의 백성을 보호해주는 '가리는 것'(*, 마하베), '덮는 것'(*, 세테르), '시냇물'(*, 펠레그), '무거운 바위의 그늘'(*, 첼 셀라-카베그)과 같을 것이다. '광풍-폭우'와 '마른 땅-곤비한 땅'은 팔레스틴 땅의 여행객들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자연 재해들로서, 전자는 큰 비를 동반한 폭풍을, 후자는 뜨거운 햇볕으로 사람의 목을 타게 만드는 무서움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4:6;25:4을 보라.

성 경: [사32:3]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ꃨ 보는 자의 눈이...기울어질 것이니 - 공의로운 통치가 가져오는 유익은 비단 외적인 측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내면적인 변화까지도 유발된다. 선지자는 이것을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소경 같고 귀머거리 같았던 자들이 다시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게 된다(29:18, 19). 이 약속은 전에 선지자가 들었던 것(6:9, 10)이고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경고(29:10)와 대조된 것이다. '듣는자의 귀가 기울어진다'는 말은 '주의 깊게 경청한다'(*, 카솨브)는 뜻이다.

성 경: [사32:4]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ꃨ 조급한 자의 마음이... 말을 분명히 할것이라 - 급하게 서두르며 초조하고 분주하여 헛된 일에 집착하던 '조급한 자'(*, 님하람)의 마음이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 참된 지식과 통찰력을 갖게 된다. 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는 '어눌한 자'(*, 일김)가 되어 혀를 잘 놀릴지 못하던 자들이 이제는 세련되고 적절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일김'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를 경멸하는 자'를 빗된 말(28:11 참조, Knobel, Drechsler)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을 가리킨다.(Delitzsch, Alexander).

성 경: [사32:5]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ꃨ 어리석은 자를...정대하다 말하지 아니하리니 - 이와 같은 영적인 명징(明澄)함의 결과로, 가치가 전도되어 참과 거짓이 뒤바뀌고 악덕과 미덕이 혼동되던 시대에 상습적으로 자행되어졌던 잘못된 일들이 바로잡아질 것이며 모든 일이 올바른 질서 위에서 시행되어짐을 의미한다. '어리석은 자'(*, 나발)는 '사악한 자'로도 번역 가능하다. '궤휼한 자'라 번역된 '킬라'(*)는 '간교하다'는 뜻을 가진 '네킬라'(*)의 단축형 (Gesenius) 혹은 '낭비하다'는 뜻을 가진 '칼라'(*)에서 파생된 말(Hitzig)로 설명되기도 하니 확실하지는 않다.

성 경: [사32:6,7]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아의 통치]
본문은 '왜냐하면'(*, 키)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선지자는 '어리석은 자'와 '궤휼한 자'가 전에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명예로운 칭호(관직)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들의 본성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ꃨ 어리석은 자는...없어지게 함이며 - 성경에서 '어리석음'은 머리의 둔함에 관련된 말이 아니라 마음의 완악함에 관계되는 말이다(신 32:6; 시 14:1 ; 74:22). 어리석은 자는 먼저 하나님을 거스려 죄악을 범하고 다음에는 동료 인간들에 대하여 악행을 저지른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관계에서 옳지 못한 인간 관계가 배태(胚胎)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린 자의 '심령(*, 네페쉬)을 비게 한다"는 말은, 굶주린 자를 먹이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그의 양식을 빼앗아 생존할 수조차 없게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죄악을 밥먹듯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ꃨ 궤휼한 자는...그리함이어니와 - '궤휼한 자'는 재물과 이권을 획득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 하여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된 먹이는 스스로를 보호할 줄 모르는 '가련한 자'(*, 아니윔)와 '빈핍한 자'(*, 에브욘)이다.

성 경: [사32:8]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도래할 메시야의 통치]
ꃨ 고명(高明)한 자는...서리라 - '고명한 자'(*, 나디브)는 외부적인 요인에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발적인 동기에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힘쓰는, 천성적으로 성품이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이다. 그는 궤휼한 자가 끊임없이 악한 계책을 도모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항상 고귀하고 덕스러운 일을 생각하고, 또한 생각한 그것을 반드시 실천으로 옮기려고 애쓴다. 이러한 그의 덕행은 시간이 지난다 하여도 변하지 않으며 어떤 장애가 가로막을지라도 중단되지 않는다. '서리라'(*, 쿰)는 말은 '자라나다', '견고히 서다'는 뜻이다(40:8).

성 경: [사32:9]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ꃨ 너희 안일한 부녀들이...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 본문은 추수 절기에 춤을 추는 유다의 여자들에 대해서 말한다.(삿 21:20 이하, G.E.Wright). 선지자는 그들을 '안일한 부녀', '염려 없는 딸들'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들은 풍족한 수확의 기대와 즐거움에 도취되어 다가올 재난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재난의 때는 어김없이 임할 것이다. 예루살렘 부녀들의 허영과 교만을 그린 3:16-4:1과 본문을 비교하라.


성 경: [사32:10]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ꃨ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너희가 당황하여 하리니 - 직역하면 '너희 자신 만만하고 두려워할 줄 모르는 여자들아 너희가 몸을 떨것이다(즉, 두려움에 전율할 것이다)'이다. 극히 대조되는 앞말과 뒷말의 결합을 통하여 선지자는 충격을 가중시킨다.

성 경: [사32:11,12]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ꃨ 옷을 벗어...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 이제 선지자는 재난의 때에 그들이 취해야 될 마땅한 태도를 설명한다. 평상복을 벗고 가슴을 치는 행위는 고대 근동에서 큰 재난을 당했을 때 슬픔을 나타내는 관습화 된 것이다.( 3: 24 ; 15:3 ; 22:12 ;욜 1:13; 나2:7).
ꃨ 좋은 밭...포도나무를 위하여 - 이전에 풍성한 곡식을 산출했던 좋은 밭과 열매 많던 포도나무가 재난으로 황폐하게 변해버리는 것, 곧 삶의 터전을 상실하는 것이 그들이 애통한 이유인 것이다(16:7-11).

성 경: [사32:13]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ꃨ 형극과 질려가 내 백성의 땅에 나며 - '내 백성의 땅'과 '형극과 질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출 3:8, 17;13:5;33:3)에서 어떻게 '형극과 찔레'가 나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7;5:6;7:23).
ꃨ 희락의 성읍...나리니 - 본문은 불변사 '키'(*)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것은 앞의 사상을 확대, 설명하는 '...까지도'로 해석함이 무난하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야기되는 황폐함이 땅에 만이 아니라 심지어 희락의 성읍, 기쁨이 넘치는 집들까지도 미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이것은 다음절에서 확인된다.

성 경: [사32:15]
주제1: [여호와의 외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ꃨ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聖神)을...부어 주시리니 - 본문을 직역하면 '영이 위에서부터 우리에게 부어질 때까지'이다. 성령을 부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기까지 재난은 지속 된다. 그때가 언제일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반드시 도래한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변화 될 것이다. 영을 부어 주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왕권 확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일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만 일어난다.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될 때 거기에는 무력함과 불의만이 판을 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어 인생을 다스리실 때 비로소 이 땅은 풍요함을 되찾고 집집마다 희락이 찾아 들며 나라 전체에 평안이 깃들게 될 것이다.
ꃨ 광야가 아름다운 발이 되며...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야기되는 복스러운 변화는 먼저 땅에서부터 나타난다. '광야' 곧 곡식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이 '아름다운 밭' 곧 경작된 땅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거둔 소출도 나중에 산출될 그 풍성함에 비추어 보면 야생숲으로 여겨질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 경: [사32:16]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ꃨ 공평이...있으리니 - 물질의 풍요로움은 축복의 서장에 지나지 않는다. 선지자는 변화된 땅에 거할 변화될 백성들의 영적 특성에 주목한다. '곡식을 산출하는 비옥한 밭이나 경작되지 않는 목초지에도 의와 공평이 거한다'는 말은, '의와 공평이라는 새 시대의 규범들이 온 땅 위에 편만해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 체다카)와 '공평'(*, 미쉬파트)은 '하나님을 높임'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함'이라는 율법의 두 기본적인 의무 조항들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말들이다(Calvin, Kissane).

성 경: [사32:17]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ꃨ 의의 공효는...평안과 안전이라 -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주어짐을 역설한 말이다. 이를 신약의 언어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성 경: [사32:18]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본문은 그 의미상 13절과 대조된다. 한때 희락과 기쁨이 감돌던 곳이었으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형극과 질려가 자라던 '내 백성'의 집에 하나님의 의로부터 발출되는 참된 평화가 깊이 스며들 것이다.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 그리고 '종용히 쉬는곳'은 모든 이들이 꿈꾸는 곳이겠거니와 이러한 곳에서 거할 수 있는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경건한 성도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요 14:27 참조).

성 경: [사32:19]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ꃨ 먼저 그 삼림은 우박에 심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 본문은 세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그리고 삼림은 철저히 가라앉고 성읍은 전적으로 황폐해지리라'(RSV). (2)'그때에는 삼람 비탈이 서늘하겠고 성읍은 평화롭게 될 것이다'(NEB). (3)'비록 우박이 삼림에 쏟아져 내리고 성읍은 평지처럼 될지라도'(NIV). 문맥상 세번째가 가장 무난하겠다(G. W. Grogan).

성 경: [사32:20]
주제1: [여호와의 의로운 나라]
주제2: [심판과 회복의 약속]
ꃨ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너희는 복이 있으니라 - 하나님의 백성이 편안하게 농사 짓는 행복한 전원시적인 분위기로 본장은 마감된다. 물기 마를 염려가 없는 땅, 곧 '물가'에서는 농부가 뿌린 씨앗마다 풍성한 수확으로 결실한다. 소와 나귀 등의 가축들을 씨뿌린 밭에서 몰아내는 것이 상례임에도 여기에 나오는 농부는 오히려 가축을 이끌어 일찍 나온 잎들을 뜯어먹게 한다. 왜냐하면 땅이 너무나 비옥하여 곡식이 속히 자라기 때문이다. 이 같은 풍성한 생산력은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복주심의 결과로서 묘사된다. 30:23-25을 참조하라.

성 경: [사33:1]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ꃨ 화 있을진저...사람이 속이리라 - 앞에서 유다에게 내려진 '화'(*, 호)가 본장에서는 '유다를 학대하며 속이는 자', 곧 앗수르에게 선고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애굽)의 도움을 의뢰하는 자의 결국은 파멸이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결국은 구원이다'는 선지자의 일관된 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Oswalt). 이것을 구체적인 역사의 배경 속에서 고찰하면 이해하기 쉽다.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공격하였다. 히스기야 왕은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받쳐 그 침입을 저지하려 하였다, 산헤립을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언약을 깨고 재차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왕하 18:13-17). 이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 왕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했으며 하나님은 그 종 이사야를 보내어 응답하셨다. 스미스(G. A. Smith)는 그것이 본장에 기록된 것이라 한다. 선지자는 언약을 파기한 앗수르에 대해 재앙을 선포하는데, 그 내용은 '악인은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한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성 경: [사33:2]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ꃨ 여호와여...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에 대한 깨달음은 기도를 통해서 주어질수 있으므로 선지자는 문득 예언을 중단하고 기도를 삽입시킨다. 여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성도의 기도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1)스스로에게 아무런 공적도 없음을 겸손히 시인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참으로 무력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은혜를 베푸소서'). (2)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주를 앙망하오니').

성 경: [사33:3]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ꃨ 진동시키시는 소리로 인하여...열방이 흩어졌나이다 - '진동시키는 소리'와 '주의 일어나심'은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현재의 위기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 원수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청각적, 시각적으로 묘사한 말이다. '진동시키는 소리'에 대하여는 30:30;삼상 2:10;7:10;욥 37:4, 5;40:9;시 18:13;29:3-9;77:18;104:7;단 10:6;계 1:10을 '주의 일어나심'에 대하여는 민 10:35;시 68:1을 참조하라. 본문은 아마도 산헤립의 군대가 여호와의 사자에 의해서 하룻밤에 궤멸된 사건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37:36)

성 경: [사33:4]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ꃨ 황충의 모임같이...뛰어 오르리라 - '황충'이라고 번역된 '하실'(*)은 '잘라 먹다', '탐식하다'는 뜻의 '하살'(*)에서 파생된 명사로, 메뚜기의 일종을 의미한다(신 28:38;왕상 8:37;시 78:46;욜 1:4).이들은 떼로 몰려 다니면서 곡식을 남김없이 갉아먹었다. 비유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 메뚜기떼가 들판을 휩쓸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앗수르군의 노략을 또한 그처럼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유다 백성들에 의해 노획될 것이다.

성 경: [사33:5]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ꃨ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 - 승리의 결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아지실 것을 묘사한 말로 본장의 서론부(1-6절)는 일단락된다(Delitzsch, Oswalt). '지존하시다'로 번역된 '니스가브'(*)는 '사가브'(*) 동사의 수동 분사형으로, 높아지신 상태만이 아니라 높임을 받으시게 된 변화를 또한 암시한다(Alexander). 지극히 '높은 데'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스스로 높은 자로 자처하실 뿐 아니라, 한편 그 백성에 대하여는 당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셔서 시온 곧 예루살렘에 의와 공평을 충만하게 하신다(Calvin).

성 경: [사33:6]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구원을 바라는 기도]
ꃨ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 선지자는 계속해서 히스기야 왕의 통치하에서 백성들은 '안정감'(*, 에무나)을 잃지 않고 '구원과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향유하게 되리라고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경외함이 너의 보배'라는 결론적인 말속에 담겨 있다. '여호와 경외'(*, 이르아트 야훼)는 하나님을 무서워한다기보다는 그의 본성을 바르게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기꺼이 복종하고 공경하려는 마음으로 그를 예배하고자 하는 내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다른 곳에서 이것은 '지혜의 근본(실체)'이라 불리기도 한다(시 111:10;잠 1:7;9:10). 이같이 영적으로 개화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이지 않을 뿐더러 금과 은 같은 보물 대신 하나님 경외함을 그 즐거운으로 삼게 된다. 메시야 시대의 영적 속성들을 기록한 11:2과 비교하라.

성 경: [사33:7]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보라 그들의 용사가...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 선지자는 앞에서 간략한 형태로 본장의 주체를 소개한 뒤에 다시 그것을 세부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진술한다. 그는 먼저 아무데서도 도움받을 길 없는 현재의 비참함을 슬퍼하는 용사의 애가로 시작한다(7-9절). 언급된 '용사'(*, 에르엘람)는 평행하는 '평화의 사신들'과 동의어로서, 평화 협상을 위해서 산헤립이 평화의 조건으로서 내세운 금과 은을 가지고 갔으나(왕하 18:14), 산헤립은 평화의 조건으로서 다시 예루살렘의 완전 항복을 요구하면서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성 경: [사33:8]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치며 -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해 유린당하는 유다의 형편을 묘사한다. 대로가 황폐하여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자 끊기고 여행객도 보이지 않으며 장사하는 이들의 자취도 찾아볼 수 없는 것(삿 5:6)은 전쟁 상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다.
ꃨ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 어떤이는 '성읍들'(*, 아림)을 '중인들'(*, 아딤)로 수정해서 읽을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언약을 파기했다'는 말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Duhm, Oswalt, J. Watts). 그러나'성읍들'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터에 굳이 맛소라 본문을 바꿀 필요는 없는 듯이 보인다.

성 경: [사33:9]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땅이 슬퍼하고...목엽(木葉)을 떨어치는도다 - 유다의 참상이 땅에 반영된다. 가장 비옥한 땅으로 일컬어지던 대표적인 네 곳들-레바논, 사론, 바산, 갈멜-이 하나같이 황폐해진다. 백향목과 전나무로 꽉차 있어서 언제나 울창한 이스라엘 북쪽의 레바논은 바짝 말라 볼품 없는 모양이 될 것이며(2:13), 감멜 산 남쪽 기슭에서 욥바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의 넓은 평원으로서 아름다운 들풀과 목초지를 자랑하던 사론(대상 27:29)은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사막과 같이 될 것이며, 동과 서에 위치한 비옥하고 기름진 땅들로서 과일 나무와 삼람으로 유명한 바산 (2:13;렘 50:19;미 7:14;슥 11:2)과 갈멜은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성 경: [사33:13]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너희 먼데 있는 자들이...가까이 있는 자들아 - '먼데 있는 자들'과 '가까이 있는 자들'은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Alexander). 앗수르를 파멸시킨 하나님의 권능에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것이어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족하다는 말이다.

성 경: [사33:14]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함께하리요 하도다 - '시온의 죄인들' 곧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거하면서도 그 행위와 습성이 앗수르와 별로 다를바 없는 불법하고 불의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앗수르를 삼킨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그들 또한 삼킬 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성 경: [사33:15]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앞절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선지자는 그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인다. 시 15편; 24:3-6과 유사한 내용이다.
ꃨ 토색한 재물을 가중히 여기는 자 - '토색한 재물'(*, 베차 마아솨코트)은 다른 사람을 착취함으로 해서 얻어지는 부당한 소득을 가리키며, '가중히 여기다'(*, 마아스)는 말은 '거절하다', '멸시하다'는 뜻이다. 의로운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연약한 자를 이용하거나 억누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으므로 그의 손은 언제나 깨끗하다.

성 경: [사33:16]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그 물은 끊이지 아니하리라 -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경건한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로부터 풍족한 사랑을 호흡하며 복된 삶을 영위해 나간다. 선지자는 그것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1)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몸소 그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다. '높은 곳'(*, 메로밈)은 적의 위협이나 어떠한 자연의 재해도 접근 불가능한 난공 불락의 요새 곧 가장 안전한 장소를 가리킨다(25:12). (2)하나님께서 일상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양식'(*, 레헴)과 '물'(*, 밈)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으로 구비해야 할 필수품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으로 주인을 삼고 그 보시기에 의롭고 경건하게 살기를 힘쓰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다. 그럴진대, 성도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성 경: [사33:17]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너의 눈은...목도하겠고 - 선지잔는 계속해서 앞에서 말한 경건한 신자들을 향해 그들이 누릴 풍요한 미래의 모습을 말한다(17-24절).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여기 언급된 '왕'(*, 멜렉)이 히스기야 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의 위기 상황에서 찢긴 의복과 삼베옷을 입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으나(37:1) 위기가 끝나고 적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다시 존귀의 위엄을 회복한 영광스런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Delitzsch, Alexander). 그러나 이것을 배타적으로 히스기야 왕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1)동일한 문맥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분명히 묘사하고 있으며(22절), (2) '왕'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는 사살은 선지자가 역사상의 특정한 왕뿐 아니라 이상적인 왕을 염두해 두고 있음을 시사하며, (3)히스기야 왕이 다스렸던 협소한 영토와 본문에 언급된 '광활한 땅'과는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잘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히스기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서 거론되었다는 견해를 취한다(Calvin).

성 경: [사33:18,19]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 구원 받은 백성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그들이 겪었던 두려웠던 순간들을 회고하게 될 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희열과 감격 속에서 승리의 환호성을 터트리게 될 것이다 :'지난날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자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어디있느냐?'(고전 1:20;15:55 참조). 한때 공물과 전리품들을 계산하고 장부에 기입하던 서기들(*, 소페르)과 그 공물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던 관리들(*, 쇼켈)과 탑 (망대)을 세워 도성을 습격하려던 계획을 세우던 앗수르 관리들(*, 소페르 에트-하미그달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더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지껄이며 길길이 날뛰던 '강포한 백성'(*, 암 노아즈) 곧 앗수르인들 또한 꿈과 같이 사라질 것이다.

성 경: [사33:20]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그 줄이 하나도 끊이지 아니할 것이며 - 결코 정복되지 않는 도성 예루살렘은 그곳에서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축제(절기)의 성읍'(*, 키르아트 모아테누)이라 불린다.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루살렘에 성소가 고정되기 전, 즉 광야를 떠들며 대적과 싸우던 불안정한 시절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장막'(성막)이라는 협소하고 유동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장막은 본래 하나님의 거주하심을 상징하는 처소로 세워졌다(출 25:8; 29:44, 45).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거주하심'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거주한다'는 말은 성경적 의미에서 '친밀하게 연합함을 뜻한다(창 30:20; 시 5:4).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는 자력으로는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과 백성의 참교제는 그런 연 후에라야 허락되었다. 이 경우 성막은 동물의 피를 뿌려 백성의 만남이 실현되는 '친교의 공간'(*, 오헬 모예드)으로 기능하였다(출 40:2). 성막은 언제나 12지파의 한 가운데 위치하였으며 그들과 더불어 진퇴(進退)를 같이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며(임마누엘의 원리), 와으로서 그들을 다스리심(신정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막은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의 모형론적인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새것이 옛것을 대신하고 실재가 그림자를 대신하는 그때에는 응당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히 11:9, 10).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시는 미래의 그날에는 '임마누엘의 원리'(21절)와 '신정의 이상'(22절)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구현될 것이다(G. Vos, Biblical Theology).

성 경: [사33:21]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여호와께서는...넓은 하수(河水)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니라 - 참으로 '권능 있는 자'는 예루살렌을 위협하는 앗수르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도성을 지키시는 여호와이시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면 그 도성은 큰 강이 빙 둘러서 아무라도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천혜의 요새들처럼 그 영구한 안전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시 46:4-5;겔 47:1-12;슥 14:8). 선지자는 아마도 유브라데 강에 둘러싸인 바벨론이나 나일 강에 둘러있는 애굽의 테베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성 경: [사33:22]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대저 여호와께서는 우리 재판장이시요...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권능으로써 도성을 방비하시는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거의 동일한 뜻을 가진 세 가지 칭호로 불려진다. (1)그는 우리의 재판장이시다(*, 쇼푸테누). 그는 공의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준열하게 판단하신다(11:3, 4). (2)그는 우리의 율법 수여자이시다(*, 메호케케누). 그는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따라야만 되는 삶의 규범을 제정해 주신다(신 33:21). (3)그는 우리의 왕이시다(*, 말루케누). 그는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삼상 12:12). 그에게 현대적 의미의 입법권, 사법권, 행전권이 모두 속해 있다. 이는 그분만이 인생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한 분이시며, 우리의 참된 주관자이시며, 우리의 유일 무이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성 경: [사33:23]
주제1: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구원]
주제2: [대적들에 대한 여호와의 경고]
ꃨ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 옛주석가들은 물론 현대의 많은 주석들까지도 21절의 '배'(앗수르를 가리킴)의 표상이 본문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데는 큰 난점이 따르니, 다른 데서 앗수르가 항상 남성형으로 취급되는 반면, 본문의 '하발라이크'(*, 너의 돛대줄)의 어미는 여성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앗수르가 아니라 유다가 언급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낫겠다(Delitzsch, Oswalt). 앞에서 승리자로 묘사되었던 유다가, 여기서는 정비조차 제대로 안 된 낙후한 배로 묘사된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아즈) 모든 것이 뒤바뀐다. 유다의 결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앗수르에게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간명하다 : 승리는 외적인 조건에 달려 있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 있다.

성 경: [사34:1]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열국이여...귀를 기울일지어다 - 1:2에서 땅과 하늘을 소환했던 것처럼 여기서 선지자는 지상에 거하는 모든 이민족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나 이 소환은 그들을 증인으로 삼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에게 예비된 심판의 무서운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다. '열국'(*, 고임)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스리는 이방 민족을 일컥는 말로서, '민족들'(*, 우밈)과 동의어이다.
ꃨ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 노벧(Knobel)은 '땅에 충만한 것'을 짐승들로, '셰계에서 나는 모든 것'을 식물들로 규정하고 선지자가 그 대상을 부르고 있는 순서에서 '열국들, 백성들-짐승들-식물들'의 점강법적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임의적인 해석의 한 예일 뿐이다 '땅에 충만한 것'과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은 시적 동의어로서 '온 땅에 편만한 인구'를 가리키는 말이다(Oswalt).

성 경: [사34:2]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륙케하셨은즉 - 열국과 거기 속한 여호와의 격렬한 진노의 내용은 마치 옛 가나안 족속들처럼 '진멸'(*, 헤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수 6:17, 21;삼상 15:3). '헤렘'의 사상은 '여호와만이 홀로 전쟁의 유일한 승리자이시며 따라서 전쟁에서 얻어진 전리품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해야 하고 이것이 인간에게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완전히 파멸시킨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럴진데, 이 말과 관련하여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열국의 범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홀로 그들을 정복하실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삼키게 될 것이다'(Oswalt).

성 경: [사34:3]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그 살륙당한 자는...산들이 녹을 것이다 - 여호와의 극심한 진노와 그에 뒤따르는 가공할 장면이 묘사된다. 살륙당한 자의 수효가 너무 많기 때문에 땅에 묻지도 못하고 다만 내어 던지게 된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풍기는 악취가 천지를 진동시키고(겔 39:11 이하), 시체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인해 산들마져 녹는다(즉, 피가 강물처럼 흘러 산들을 씻기운다).

성 경: [사34:5]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멸망으로 정한 백성 위에 내려서 - '에돔' (*)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에서의 후손(창 36장)으로서 끊임없이 이들을 훼방하고 대적하였다(창 25:23;민 20:14-21;대하 21:8-10; 25:11; 28:17;암 1:11, 12;옵 1:1-14). 특히 이들은 B.C. 586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협조했으며 이로 인해 에돔은 이스라엘의 제 1의 증오 대상이 되었다(겔 35장 참조). 하여튼 에돔은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로서 '멸망으로 정한 뱃성'으로 규정되고 있다(25:9-12에서 '모압'이 하나님 백성의 전형적인 원수로 취급된 것과 유사하다).

성 경: [사34:6,7]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선지자는 에돔으로 대표되는 열국의 진멸을 '희생 제사에 비교한다(렘 46:10; 51:40; 겔 39:17; 습 1:7-9). 이는 동물들이 하나님의 예배와 영광을 위해 살육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돔의 멸망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이바지하기 때믄이다(Calvin). 몸집이 작은 '어린 양'과 '염소'와 '수양'은 에돔의 평민들을 사용하며, 몸집이 큰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는 에돔의 영주들을 상징한다(Delitzsch). '들소'(*, 레에밈)는 다른 곳에서 희생 동물로서 거론되지 않는 것으로서, 이마에 뿔이 달려 있으며 '힘'의 상징으로 자주 나온다(민 23:22;신 33:17;욥 39:9;시 22:21;92:10). 아마도 이는 다른 곳에서 드려진 것보다도 더 큰 대규모의 희생 제사가 '보스라'와 '에돔 땅'에서 드려질 것과 또 이 살육에서 제외될 자가 아무도 없게 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보스라'는 사해 남단에서 남동쪽으로 약 32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에돔의 성읍(혹은 수도)으로, 오늘날의 '부세이라'(Buseirah)로 추정되고 있다(63:1;창 36:33; 대상 1:44;렘 49:13-22;암 1:12 참조).

성 경: [사34:8]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신원하실 해라 - 본문은 '왜냐하면'(*, 키)이라는 불변사로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에돔을 이토록 잔혹하게 진멸하시는 이유가 제시된다. 선지자는 그것을 '여호와의 복수'라고 말한다. 그 복수는 에돔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고 핍박을 받아온 시온을 위한 것이다. 에돔은 시온에 대한 그들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복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감정적인 응징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복수'(*, 나캄)는 어느 한 쪽의 폭압적인 범죄로 인해 어그러지고 뒤틀린 상태를 바로 잡고 균등케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평행하는 단어 '신원함'(*, 쉴루밈)이라는 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보상', '보수'라는 뜻을 갖는 이 단어는 '안전케 하다', '회복시키다', '갚다'는 뜻을 가진 '솰람'(*)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다(J.Watts).

성 경: [사34:9,10]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에돔 땅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를 생생하게 묘사된다. 이 묘사는 파괴된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킨다(창 19:24-28;신 29:23;렘 49:18). '소돔과 고모라'는 성경에서 범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표상으로 주어지고 있다(유 1:7). '역청'과 '유황'은 모두 불에 잘 타는 가연성 물질이어서 한번 점화되면 꺼지지 않고 오래도록 타오른다(Sanetius, Leupold). 본문의 표현은 특히 에돔이 사해에 근접해 있고 그곳에 화산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한편, 꺼지지 않는 불과 끊임없이 떠오르는 연기는 세상의 종말을 암시한다(계 19:3, Delitzsch).

성 경: [사34:11]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당아와 고슴도치...부엉이와 까마귀 - 열거된 짐승과 새들 가운데 까마귀(*, 오레브)만이 분명하게 확인될 뿐, 그 나머지 이름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당아'(혹은 펠리칸)라고 번역된 '카아트'(*)는 '토하다'란 뜻의 '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아마도 그 새의 울음소리를 본따서 만든 말인 듯하다(레 11:18;시 102:6;습 2:14, Delitzsch). '고슴도치'라고 번역된 '키포트'(*)는 '움츠리다', '둥글게 굽다'는 뜻의 '카파드'(*) 동사에서 파생된 명칭이며, '부엉이'라고 번역된 '얀소프'(*)는 탈무드에서 종종 나쁜 징조를 나타내는 새로 언급되는데 아마도 으스스한 소리를 내는 그 새의 울음소리에서 따온 말인 듯하다(Oswalt).
ꃨ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 '줄'과 '추'는 건축하는 일에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에돔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파괴하는 일에 이것들을 사용하신다. 그 작업의 결과, 여호와께서는 '혼란'(*, 토후)과 '공허'(*, 보후)라는 말에서 암시된 것처럼, 창조 때의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상태속으로 에돔을 던져버릴 것이다(말 1:4, 5 참조).

성 경: [사34:12]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없게 될 것이요 - 이는 세습 귀족들이 모여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 군주국이었던 에돔에 이러한 일이 끊어질 것을 말하니 곧 왕국으로서의 에돔의 운명이 끝장날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사34:13]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시랑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 '시랑'(*, 타님)은 사막에 사는 야수의 일종을 가리키는데(13:22;렘 9:11), '재칼'(Gesenius, Ewald) 혹은 '이리'(Henderson)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욥 30:29에도 '시랑'과 '타조'가 함께 나온다.

성 경: [사34:14]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 '들짐승'(*, 치임)은 광야에서 거주하는 동물들을 가리키며, '이리'(*, 이임)는 '울부짖는 동물'을 가리킨다. '치임'과 '이임'은 형태와 소리가 비슷한 두 개의 다른 낱말이 어우러져서 언어 유희(paronomasia)의 효과를 가져온다.
ꃨ 수염소가...쉬는 처소를 삼으며 - '수염소'와 '올빼미'는 마성적(魔性的)인 괴물들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거주할 안락한 장소를 구해 오랫동안 헤매던 이들이 이전에 왕과 방백들이 잠자던 궁궐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발견한다.

성 경: [사34:15]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열국에 임할 여호와의 진노]
ꃨ 부엉이가 거기 깃들이고 - '부엉이'로 번역된 '키포즈'(*)는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화살 뱀', '뛰어오르는 뱀'으로 이해된다. '악마'와 '뱀'의 이미지는 서로 유사점이 있다.
ꃨ 솔개들도...거기 모이리라 - '솔개'(*, 다야)는 시체들을 먹고 사는 '검은 독수리'를 가리킨다. 본문의 의미는 분명하다 :'사람이 살던 곳에 광야의 야수들이 깃들어 살 뿐 아니라 그곳에 보금자리를 꾸미고 계속적으로 번식하니, 이는 에돔의 파멸이 영구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Alexander).

성 경: [사34:17]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
주제2: [예언의 확실성]
ꃨ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나눠 주셨으니 - 그 옛날 여호와께서 제비를 뽑고 줄로 재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셨던 것처럼(민 26:55, 수 18:4-10). 그와 동일한 방법과 그 세심함으로 에돔 땅을 나누어 혐오스러운 동물들에게 분배해주신다는 뜻이다(Alexander, Oswalt).

성 경: [사35:1]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ꃨ 광야의 메마른 땅이...피어 즐거워하며 - 프록쉬(Procksch)가 단테의 '신곡'에서 차용하여 '지옥 대 낙원'(Inferno v. Paradiso)이라 이름지은 것처럼(Leupold) 34장과 본장은 첨예란 대조를 이룬다. 그것은 특히 땅의 변화에서 현저하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대표하는 에돔은 황무한 땅으로 변하는 반면에, '광야와 메마른 땅'(사막)은 백합화 꽃피는 소망스럽고 기쁜 낙원으로 화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사막'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유다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경유하게 되는 시리아 사막을 가르킨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으나(Delitzsch, Lange),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열망하는 본장의 문맥상 이는 성도들이 통과해야 할 죄많은 이 세상을 암시하는 듯하다. '백합화'로 번역되 '하바찰레트'(*)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한데, 아마도 그것은 풍부한 강우(降雨) 뒤에 즉시 만개하여 온 땅을 융단처럼 수놓은 작은 꽃들을 가리킬 것이다 (Oswalt).

성 경: [사35:10]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ꃨ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 (*, 페두예)은 전절의 '구속함을 얻은 자'(*, 게울림)에 평행하는 말로서 동의어이다. '되사다', '구속하다', '친족의 권리를 행사하다'는 뜻을 가진 '가알'(*) 동사는 법정 용어로서 친족에 대해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과 연관된 말이다(레 25:25, 32, 48;민 35:19;룻 4:4, 6). 이 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학정 밑에서 구속하신 행위와 관련하여 자신을 '고엘'(*) 로서 소개하신 이래, 깊은 종교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43:1;48:20;출 6:6;15:13;시 74:2;106:10 참조). '구속하다'(*, 가알)는 낱말은 바벨론에서의 귀환이란느 소망스러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본서의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나온다(41:14;43:14;60:16;63:16). '속량하다', '몸값을 지불하고 풀어주다'는 뜻을 가진 '파다'(*) 동사 역시 초태생의 구별과 연관된 법정 용어였으나(출 13:13, 15 참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하는 말로 전용(轉用)되었다(특히 신 7:8;9:26 등). '구속하다'와 '속량하다', 이 두 말은 렘 31:11에서도 같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도 시온의 주제가 '속량받고 구속함을 얻는 자들'과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렘 31:12, J.Watts).
ꃨ 시온에 이르러 - 하나님의 성이 있는 시온은 이 대로의 최종 도착지일 뿐 아니라 모든 성도의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곳에만 하나님의 백성이 갈망하는 참된 안식이 있으며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 있다. 길(Gill)은 말한다 : "묘사된 '대로'는 '밑에 있는 시온' 즉 교회로 향할 뿐 아니라 '위에 있는 시온' 즉 천국으로도 향한다. 이 길을 걷는 모든 구속된 성도는 그곳에 도달할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그들의 영혼은 그 주인인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리고 부활의 순간에 그들의 육체는 흙무덤에서 돌아와 마침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마주서게 될 것이다."
ꃨ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 이는 그 얼굴이 항상 희락이 넘칠 것을 가리키니 , 즉 시온에 이르는 성도의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을 일컫는 말이다.
ꃨ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 현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을 따라잡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날 것이다'(원문, 신 28:2;시 23:6 참조). 그럴진데 시온의 백성들 , 곧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속량받고 구속한을 입은 성도들의 삶은 얼마나 복될 것인가!

성 경: [사35:2]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ꃨ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 전절에서 묘사된 완전하고 즐거운 변화의 상을 더욱 인상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선지자는 독자들에게 친숙한 세 개의 비교를 덧붙인다 : '레바논의 영광이 그것(사막)에 주어졌고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원문). 이들 세 지역은 비옥함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한데, 특히 '레바논'은 향기로운 백향목으로, '갈멜'은 웅장한 상수리나무로, 그리고 '사론'은 꽃들과 비옥한 목초지로 이름이 나 있다(33:9 참조, Leupold).
ꃨ 그것들이...보리로다 - 문장 초두에 나와 있는 '헤마'(*)를 개역 성경은 '그것들'이라고 번역하여 마치 광야와 메마른 땅(Vitringa) 혹은 바로 앞에 거론된 세 지역(Delitzsch, Lange)이 지칭된 것처럼 하였다.그러나 이것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70인역(LXX)에서 주어진 듯하다 :'내 백성.'

성 경: [사35:3,4]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ꃨ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두려워 말라 - 이러한 영광스러운 변화에의 전망과 더불어 현실에서 좌절하고 절망한 백성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주어진다 : '강하게 하라. 축 처진 손들을, 그리고 흔들리는 무릎들을 굳게 하라'(원문). '밑으로 처진 손'과 '요동하는 무릎'은 각각 연약함과 버티지 못함을 상징한다(Alexander). 이들은 삶의 목적을 상실할 뿐더러 더 이상 삶을 영위해 갈 만한 힘을 잃어버린 자들이다(히 12:12). 이러한 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소망과 의미, 그리고 능력이 허여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ꃨ 너희 하나님이 오사...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그에게 아무리 가까이 가고자 하여도 닿지 못한다고 탄식하는 자들에게 들려지는 대답이다. 이 말 속에서 '여호와의 오심'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의 오심은 그가 이루고자 하시는 두 가지 목적과 결부되어 있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했던 원수들에 대한 공의로운 보응과 복수, 그리고 그의 백성에 대한 구원이다(살후 1:6, 7 참조).

성 경: [사35:5]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ꃨ 그 때에 -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성취되어질 미래의 그 시간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여진 것이다.
ꃨ 소경의 눈이... 귀가 열릴 것이며 - 인간의여러 신체 기능 중에서 특히 '눈'과 '귀'는 육체적인 상태와 아울러 영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6:10;29:9, 10;30:20, 21;32:3). 델리취(Delizsch)는 여기 언급된 육체적 치유가 영적 치유를 비유할 뿐더러 장차 여호와의 오심으로 인해 실현되어질 전인격적이고도 총체적인 구원의 외적인 측면을 나타낸다고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지적은 적절하다.

성 경: [사35:5]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ꃨ 저는 자는...노래 하리니 - 절름발이와 벙어리의 경우에 그 치유의 완전함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즉 절름발이는 완전히 치유되어 마치 사슴처럼 뛸 수 있을 정도가 될 것이며, 벙어리는 혀를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까지 될 것이다(Leupold). 절름발이의 치유와 관련하여 행 3:8을 참고하라.
ꃨ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이제 선지자는 구원에 관한 두 번째 표상으로 독자를 이끈다. '사막에서 시내가 흐른다'는 주제는 본서의 후반부(특히 40-55장)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41:17, 18; 43:19, 20;44:3, 4;48:21;49:10;51:3 등), 건조한 땅으로 뒤덮인 이스라엘에서 '물'이 생명과 구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58:11;시 1:3;143:6;렘 2:13;17:8, Oswalt).

성 경: [사35:7]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ꃨ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원천이 될 것이며 - 사막에서 '물이 솟고-시내가 흐르고-못이 되고-마침내 원천이 되는' 일련의 계속적인 발전을 통해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구원의 완전성이 강조된다. '뜨거운 사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솨라브'(*)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낮은 대기층에서 불균등한 빛의 굴절 현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Alexander). 그렇다면 불볕 내리쬐는 사막에서 목이 갈한 이들을 헛된 환영으로 유도하는 이 가짜 오아시스가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진짜 '못'(*, 아감)으로 변화게 될 것이다.
ꃨ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의 브들이 날 것이며 - 여호와께서 시온의 송사를 위해 에돔에게 보수하시는 행위(34:8)를 통해 에돔 궁궐이 '시랑의 굴'이 풀과 갈대와 부들이 자라나는 윤택한 초장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43:19, 20 참조, Oswalt)

성 경: [사35:8]
주제1: [장차 임할 메시아적인 구원]
주제2: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환희]
ꃨ 거기 대로가 있어 - 8-10절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자들이 '시온으로 돌아오는'(10절)대로에 대해서 말한다. 본디 길을 찾을 수 있는 '공공도로'(*, 마슬룰)가 놓여진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적적인 일인데, 이 일은 사막이 낙원으로 변함과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은 '통행 가능과 불가능'이란 측면에서 34:10과 예리한 대조를 이룬다('대로'에 대하여는 11:16을 참조하라).
ꃨ 그 길을...있게 된 것이라 - '그 길'이 '거룩한 길'인 것은 그것이 여호와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룩함을 덧입는 성도들이라는 데 기인한 것이다. 그 길은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해서만 있게 될 것이다. 그럴진데 '깨끗하지 못한 자'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또 이스라엘 자녀 중에서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그 길을 지나지 못한다.
ꃨ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 본문은 전혀 다른 두 가지로 해석될 수있다. (1)그 길이 너무도 정확하기 때문에 심지어 '바보'(*, 에윌림)라도 실수함 없이 갈 수 있다(KJV, E. Young, Alexander, Delizsch, Leupold). (2)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바보)은 그 길을 결코 가지 못한다. 이 경우, 그 의미는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한다'는 말과 같게 될 것이다(Oswalt).

성 경: [사36:1]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히스기야 왕 십 사 년에...취하니라 -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은 앗수르의 왕이 된 산헤림 (B.C. 705-681)은 그의 비문에서 '유다의 성읍 46개를 취하고 히스기야를 조롱 속의 한 마리 새처럼' 예루살렘을 봉쇄했다고 의기 양양하게 기록하고 있다(Pritchard). 이 사건은 히스기야 왕 14년( B.C. 701년)에 일어났다.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왕하 18:13-16에 따르면, 산헤립은 평화를 조건으로 하여 그 대가로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라는 막대한 양의 공물을 요구하였다. 이에 히스기야는 성전과 왕궁의 곳간을 털고 심지어 성전 문과 기둥에 입혀진 금까지 벗겨 앗수르에게 바쳤다. 그러나 산헤립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33:1 이하 참조). 그는 퇴각하는 척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도성의 항복을 요구하였다.

성 경: [사36:2]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서매 - '라기스'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25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대하 11:5-9)으로 당시 앗수르군의 주력 부대가 위치한 곳이다(대하 32:9). 이곳에서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항복을 독촉하기 위하여 대군과 더불어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였다. '랍사게'(*, 랍-솨케)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왕의 술잔을 시중드는 사람'을 뜻하는 직책명인데, 아마도 왕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는 고위 관료를 가리키는 듯하다(느 1:11 참조), 왕하 18:17에 의하면, 그 외에 '다르단'(군대 장관, 20:1)과 '랍사리스'(고위 관리)등도 같이 파견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되었다.

성 경: [사36:3]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궁내 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아가리라 - 앗수르의 사신들에 맞서 히스기야 진영에서도 역시 3명의 사절들이 파견되었다. '궁내 대신'은 문자적으로는 '집 위에 있는 사람'으로, 왕 다음 가는 권력의 서열에 위치한, 오늘날의 '총리'에 해당되는 직책이다(22:15). '서기관'은 국내외의 정치적 협약이나 사건들을 기록하고 또한 대외적인 공문서 처리와 서신 연락 사무를 기록하고 또한 대외적인 공문서 처리와 서신 연락 사무를 총괄하는 고급 관료를 가리키는 말인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전문적인 율법 교사를 일컫는 말로 변했다(와하 12:10;22:3, 8;렘 36:12, 20;37:15, 20). '사관'은 나라 안의 고위 관리를 가리킨다(삼하 8:16;20:24;왕상 4:3;대상 18:15). 흥미로운 것은, 22:15과 연관하여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셉나와 엘리아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22:19-21, Oswalt).

성 경: [사36:4]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 앗수르의 왕의 사신인 랍사게의 도전적인 연설이 소개된다(4-20절). 그의 연설은 외교 언어인 아람어 대신 유다 방억으로 진행되는데(11절) 이는 명백히 유다 백성들을 분열, 선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 기록된 것들은 그가 말한 그대로를 정확히 옮긴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유능한 역사가에 의해 효과적으로 요약, 정리된 듯하다(Leupold).
ꃨ 네가 의뢰하니 무엇을 의뢰하느냐 - 앗수르의 막강한 무력 앞에서도 항복하기를 거부하는 유다의 완강함에 대하여 놀라움과 경멸을 드러내면서 묻는 말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는 '의뢰하다'(*, 바타흐)는 말인데, 이단어는 5-7, 9절에서도 연속적으로 나온다. 선지자 이사야가 거듭 경고했던 바와 같이 유다는 앗수르의 위협에 직면하여 애굽을 크게 의뢰하였다(30, 31장 참조). 랍사게는 애굽을 의뢰하는 유다의 이러한 자신감을 꿰뚫어 보고 있으며 그것이 근거 없는 헛된 자만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말한다.

성 경: [사36:5]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내가 말하노니...입술에 붙은 말 뿐이니라 - '모략'(*, 예차)과 '용맹'(*, 게부라)은 왕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자질들로서 이들은 항상 거론된다(11:2). '모략'은 '전쟁을 계획하고 전략을 입안하는 힘'을 가리키며, '용맹'은 '계획되고 입안된 이 모든 것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능력' 혹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울 수 있는 영웅적인 힘'을 가리킨다. 그런데 랍사게는 히스기야 왕이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 두 가지를 '입술에 붙은 말', 곧 전쟁할 때 아무 쓸모도 없는 말재주로 치부해버린다. 그가 이렇게까지 호언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경고를 통해서 유다의 실정을 인지하고 있으며 유다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 것까지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사36:6]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 한때 애굽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로서 앗수르 제국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은 이전에 아하스 왕이 수리아 - 에브라임 연합군의 공격을 맞아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처럼, 이제 앗수르의 침략을 당하여 애굽에게 손을 벌린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애굽은 유다가 바라는 든든한 지팡이가 되지 못하였다.
ꃨ 그것은 상한 지파이와 일반이라 - '애굽 - 갈대 지팡이'의 비유는 겔 29:6, 7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파피루스 갈대와 골풀이 풍부한 애굽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적절하다(Delitzsch). '상한 갈대'는 사람이 그것에 의존하여 몸을 기댈 때 지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완전히 부러져서 도리어 그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성 경: [사36:7]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그는...그 신이 아니냐 - 랍사게의 물음은 히스기야 왕의 종교 개혁과 연관된 것이다(왕하 18:4). 잘 알려진 대로, 히스기야는 유다에 있는 모든 산당들을 다 헐어버리고 예루살렘 중앙 성소에서만 예배할 수 있도록 개혁 조처를 단행하였다. 우상 숭배와 다신론적 사고에 물든 이교도 랍사게의 눈에 이것은 신들의 수효를 제한하는 일대 실수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앗수르인들은 신들을 숭배하는 제단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에 부속되는 권력의 힘도 더해지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예배 장소를 한 곳으로 감소시킨 히스기야의 행위는 결정적으로 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고 신들을 격노하게 만들 뿐이라고 그들은 확신하였다(Oswalt).

성 경: [사36:8]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그러므로...못하리라 - 랍사게는 앞에서 유다가 군사적, 종교적으로 의지하는 두 대상-애굽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조롱하고 부인한 뒤에 여기서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 군사력의 문제를 거론한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환기시키려고 애쓰는 것처럼 앗수르의 군사력과 유다의 군사력은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아니하였다(5:28 참조). 이처럼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한 랍사게로서 유다 사절들에게 협상과 굴복을 권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본문의 '내기하라'(*, 히트아레브)는 말은 '결합하다', '서약하다'는 뜻을 가진 '아라브'(*) 동사의 히트파엘형(강의 재귀형)이니, 곧 전쟁하겠다는 헛된 생각을 버리고 앗수르 왕에게 서약하라는 항복 요청인 것이다(Alexander, Calvin, J. Watts).

성 경: [사36:9]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그런즉 네가 어찌...얻으려 하느냐 - 이같은 경멸적인 비교에 근거하여 랍사게는 두 가지를 주장한다. (1)히스기야는 앗수르 왕과는 상대가 안될 뿐더러 심지어 그 밑에 있는 장군들 가운데 가장 못난 자도 물리치지 못한다. (2)히스기야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진데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도는 다른 나라, 곧 애굽에 의존하는 길뿐이나 그럴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성 경: [사36:10]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여호와께서...멸하라 하셨느니라 - 한술 더 떠서 랍사게는 자신들이 유다를 치러 온 것은 하나님의 재가(裁可)를 받아서 된 일이라고 강변한다. 이 말은 분명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5:26 이하;7:18 이하;8:7, 8;10:5, 6 등). 이 점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앗수르인들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고대의 전쟁 기록에서 정복자는 자신의 승리를 동일시하며 정복된 나라의 신들이 자신의 편이 되었으므로 이러한 승리가 가능한 것으로 전공(戰功)을 자랑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의 말은 수호신의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유대인들을 더욱더 공포에 떨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Alexander, Oswalt).

성 경: [사36:11]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 - 랍사게의 주장은 히스기야의 사신들을 크게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격동하여 유다를 침공하도록 하였다는 앗수르측의 선전이 백성들에게 미칠 심리적 충격과 그 파급 효과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랍사게에게 모든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말고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외교 언어인 아람 방언으로 말해줄 것을 비굴한 태도로 요청한 것이다. '아람어'는 수리아어를 가리키지만 본문에서는 당시 식자층과 궁중에서 널리 사용되는 고급 언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Alexander).

성 경: [사36:12]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랍사게가 가로되...보내신 것이 아니냐 - 랍사게는 유다 사절들의 요청을 일축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한층 공공연하게 드러내 보인다. '대변을 먹으며...소변을 마신다'는 말은 포위 기간 중에 극심한 기근에 시달릴 것을 위협하는 말이다.

성 경: [사36:13]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크게 외쳐 가로되 - 어떤 이들은 '일어서서 크게 외쳤다'는 말을 '자신의 말을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Delitzsch, Leupold), 혹은 '백성들의 눈에 보다 더 잘 보이는 높은 위치에 섰다'(Calvin)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성 경: [사36:14]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 히스기야와 산헤립의 대조는 랍사게가 이들에게 붙이고 있는 칭호에서 우선 극명하게 드러난다. 산헤립에 대하여는 '대왕'(13절)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히스기야에게는 아무런 호칭도 붙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히스기야를 '잘못된 길로 백성을 유혹하고 속이는 자', '그 백성을 능히 구원하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자'로 규정한다.

성 경: [사36:15]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히스기야가...받지 말라 - 랍사게가 히스기야를 이처럼 '백성을 미혹하는 자', '백성을 구원 못하는 무능한 자'로 비난하는 까닭은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지도자 히스기야에 대해 등을 돌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어떠한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말도록 회유한다.

성 경: [사36:16]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 '나와 축복(*, 베라카)을 만들자'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베라카'는 '선물'을 뜻하는 말로도 나온다(삼상 25:27;왕하 5:15 등). 따라서 본문은 '화평하자는 표증으로서 예물을 가져오라'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만일 본문을 각자 상대방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마음의 상태가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Delitzsch), 랍사게의 입을 통해 들려진 앗수르의 왕의 말은 일견 지극히 자애로운 초청처럼 들리지만 실은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항복을 권유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ꃨ 그리하면 너희가...먹을 것이며...마실 것이요 - 본문은 12절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신의 소변을 마실 것'이란 말과 대조된다. 이런 대조를 통해서 앗수르 왕의 사신은 유다 백성들이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여 무기를 던지고 손을 들고 나온다면 그들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 것인지를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는' 축복은 성경에서 이상적인 번영을 나타내는 말로 즐겨 사용되고 있다(왕상 4:25;미 4:4 슥 3:10 참조 , Leupold).

성 경: [사36:17]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내가 와서 너희를...옮기기까지 하리라 - 현란하고 교묘한 언어로 채색되어 있지만 본문의 의미는 명료한 것이다. 즉 앗수르 왕이 애굽 원정을 마차고 고국으로 귀환할 때, 유다 백성들은 본토에서 추방되어 낯선 땅으로 강제로 옮겨질 것이다. 반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피정복민들을 멀리 있는 다른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은 앗수르 제국의 주요한 식민 정책 중의 하나였다.

성 경: [사36:18]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열국의 신들 중에... 있느냐 - 이제까지 앗수르와 싸워 무릎 꿇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는 말이다. 고대인들은 한 나라의 존립 여부가 그 나라의 수호신의 능력 여하에 좌우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하는 것은 곧 그 나라의 신이 상대 나라의 신보다 약함을 시인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성 경: [사36:19]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건졌느냐 - 산헤립은 이전에 앗수르가 거두었던 혁혁한 전공을 상기시킨다. '하맛'과 '아르밧', 그리고 '사마리아'에 대해서는 10:9 주석을 참조하라. '스발와임'은 메소포티미아 남단에 위치한 도시 시파라 (Sipphara)로 추정된다(Alexander, Delitzsch).

성 경: [사36:20]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여호와가 능히...건지겠느냐 - 본문에서 앗수르 왕의 사신의 연설은 정점에 이른다. 그 요점은 정복 전쟁의 역사가 보여즈는 것처럼, 유다보다 지리적으로 더 넓고 신들의 숫자도 더 많은 강력한 국가들도 다 앗수르에게 백기를 들었거든 하물며 하나의 신밖에 갖지 못한 약소국 유다가 어찌 앗수르를 막아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가 알지 못한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으니, 그것은 주 여호와는 다른 신들과는 전혀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인간의 탐심에 의해 나무나 돌로 지음받은 신이 아니라 당신의 형상에 따라 흙으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며, 말씀 한마디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오직 그분만이 참되며 유일하고 영존하는 하나님이신 것이다.(2:8-11 ;17:7, 8 ;40:18-26 ;41:4 ;42:8;43:11-13;44:6-8;신 32:1-47;대상16:26;시86:8;96:5;97:9;습 2:11, Oswalt).

성 경: [사36:21]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그들이 잠잠하여...하였음이었더라 - 여기서 '그들'은 아마도 유다의 사신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대답지 말라'는 히스기야 왕의 명령을 따라 침묵을 지켰다. 이전에 그들의 불필요한 말 한마디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된 것과 비교해볼 때 이는 분명히 지혜로운 일이다(11절).

성 경: [사36:22]
주제1: [앗수르의 침공]
주제2: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
ꃨ 때에...그 옷을 찢고 - 세 명의 사신들은 비록 와의 명령에 따라 침묵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이교도의 비난에 대해 제대로 대꾸하지 못한 그들의 내면의 상처와 끓는 분노를 자신들의 옷을 찢는 행위로서 표시하였다. 유대인들은 지극히 혐오스러운 일을 당할 때, 흔히 자기 옷을 찢음으로써 그 감정을 나타내었다(특히, 참람한 일과 관련해서는 마 26:65을 참조하라).

성 경: [사37:1,2]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ꃨ 히스기야 왕이 듣고...보내매 - 본장은 그 내용상 앞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신들의 비통한 보고에 접한 히스기야 왕의 반응은 4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사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옷을 찢었다. 이는 극심한 슬픔과 분노를 표시하는 관습적인 행위이다(삼하 3:31;스 9:3;욥 1:20;렘 36:24). 둘째, 더 나아가 그는 '굵은 베' 곧 '삼베옷'(*, 사크)을 입었다. '삼베옷'은 재난 때에 입는 옷이며 참회의 때에 입는 옷이기도 하다(왕상 20:31, 32; 21:27;느 9:1;단 9:3;욜 1:13;욘 3:6;마 11:21). 셋째, 그는 기도하러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이후, 그곳은 공적인 중보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하나님이 그 백성의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하나님이 그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는 장소로 인정되었다(왕상 8:29, 33, 34). 마지막으로, 그는 엘리아김과 셉나, 그리고 제사장 중 어른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냈다. 이는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위로하심을 듣기 위한 것이다. 당시에 이미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해설, 전달하는 자로 높임 받고 있었으며 왕으로부터도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22:14;렘 37:3을 참조하라. 그러나 왕상 22:9의 경우는 정반대되는 사례이다, Alexander). 재난의 때를 당하여 히스기야 왕이 보여준 이러한 행위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원통한 일을 당할 때 본받아 마땅한 아름다운 신앙의 본으로 남아 있다.

성 경: [사37:3]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ꃨ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 사신들이 전한 히스기야의 말을 통해서 그가 현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환난'(*, 차라)은 '누르다', '억압하다'는 뜻의 '차라르'(*)에서 파생되 말로서 외부적인 괴로움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복합적인 영적인 짓눌림까지도 함의하는 말이다(Vitringa). 이 단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참회의 시편에 나온다(시 20:1;50:15;77:2;86:7). '책벌'(*, 토케하)은 호 5:9의 '견책하는 날'과 동일하게 쓰였다. '환난'과 '책벌'은 앗수르를 통해 유다에게 주어진 것이긴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인 것이다. '능욕'(*, 네아차)은 '조롱하다', '멸시하다'는 뜻의 '나아츠'(*)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앗수르인들이 '훼방한다'(신성 모독)는 의미이다(4절, J. Watts).

성 경: [사37:4]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ꃨ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 본문은 '혹시', '아마도'(*, 울라)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말을 듣지 못하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는 히스기야 자신의 겸허한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의 경건함은 그가 나라의 새존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받지 않으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주어지기만을 우선적으로 간구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Oswalt).
ꃨ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모독은 그들이 하나님을 이방 신들과 혼동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대하 32:19). 따라서 히스기야는 생명없고 무기력한 우상들과 대조, 구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적절하게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신 5:26;수 3:10;시 42:2;84:2;렘 5:2;10:10;23:36;단 6:26;마 16:16;26:63 참조 , Alexander).

성 경: [사37:5]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ꃨ 이와 같이...나아가매 - 본문은 히스기야 왕의 전갈이 끝나고 이사야 선지자의 답신이 곧 시작됨을 알려주는 구실을 한다.

성 경: [사37:6]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ꃨ 앗수르 왕의 종들이...두려워 말라 - 이사야의 메세지는 '두려워 말라'는 강한 권고로부터 시작된다. 전에 아하스 왕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떨릴 때도 선지자는 이와 비슷한 권고를 해준 바 있다(7:4). 여기서 '(앗수르의) 종들'로 번역된 단어는 앞절의 '(히스기야) 신하들'과 같은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어린 것들', '풋내기들'(*, 나아레)을 뜻하며, 경멸적인 어감을 나타내기 위해 선지자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말이다.

성 경: [사37:7]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ꃨ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 앞으로 전개될 사태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니, 그는 앗수르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불려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부터 철수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신'(*, 루아흐)은 '악인들을 멀리 날려버리는 강한 바람'(Calvin)이나 '악인들을 파괴하는 천사'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좌우하는 경향성, 태도, 혹은 기질'(19:14;민 5:14;호 4:12;슥 13:2;딤후 1:7 참조)을 가리킨다(Alexander, Oswalt, Leupold).
그가 풍성(風聲)을 듣고 - 앗수르 군대의 퇴각은 그들이 듣게 될 '풍성' 곧 '소문'과 깊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에디오피아 왕 디르하가 앗수르를 치기 위해 나아온다는 소문을 가리킨다(9절 이하, Delitzsch, Lange).

성 경: [사37:8]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앗수르 왕의 위협]
ꃨ 랍사게가...돌아가다가...만나리라 - 랍사게가 돌아간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추측컨대, 아마도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아무런 반응이나 응답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왕으로부터 후속 조처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서 그리했을 것이다(Lange, Leupold).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라기스'는 르호보암 왕이 세운 15개 요새중의 하나로서(대하 11:5-10) 훗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침략해 왔을 때, 끝까지 맞서 싸운 '견고한 성읍'으로 유명한 곳이다(렘 34:7). '립나'는 레위인이 거하던 성읍으로 도피성 가운데 하나(수 21:13)인데, 라기스보다 북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나 이동하였는가도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산헤립으로서는 에디오피아 군대가 자신을 치러올 경우를 대비해서 립나를 먼저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군사 전략상 보다 좋은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구스 왕 디하르가'가 앗수르 군대를 치러 올라온다는 소식이 산헤립의 귀에 들린 것은 이때였다(Oswalt, Leupold).

성 경: [사37:9]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앗수르 왕의 위협]
ꃨ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 산헤립이 랍사게에 이어 다시 사자들을 보낸 까닭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히스기야를 위협, 굴복시킴으로써 앞뒤로부터 적을 맞는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사37:11]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앗수르 왕의 위협]
ꃨ 앗수르 왕들이...얻겠느냐 - 본절은 '보라'(*, 힌네)라는 말로 시작된다.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이 말 속에 앗수르인의 자랑과 오만이 함축되어 있다.

성 경: [사37:12,13]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앗수르 왕의 위협]
ꃨ 나의 열조가 멸하신...어디 있느냐 - 랍사게가 산헤립의 업적으로 돌려 말한 모든 일들(36:18-20)을 산헤립은 그의 선조들의 업적으로 돌려 말한다. 그는 히스기야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지명들을 골라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는 예증을 전개한다. '고산'은 티그리스 강의 왼쪽 지류인 하불 강 동쪽에 있는 '수산'(Zuzan)인데,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 뒤 그 포로들이 이주한 곳이기도 하다(왕하 17:6). '하란'은 아브라함이 그의 부친과 더불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다가 머물러 살던 곳(창 11:31;행 7:2, 4)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다. '레셉' 역시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성읍인데 유프라테스강 서쪽에 있고, '들라살'은 갈그미스 너머 북쪽에 있으며, '에덴 자손'은 스바와 거래하던 상인들이다(겔 27:23). '하맛'과 '아르밧', 그리고 '스발와임'에 대하여는 10:9주석을 참조하라. '헤나'와 '이와'의 위치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성 경: [사37:14,15]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기도하여 가로되 - 히스기야의 반응은 같은 지경에 처했던 아하스와 크게 대비된다. 아하스는 그를 도와주겠다는 하나님의 요청과 징조를 구하라는 권고마저 거부한 반면(7:11, 12), 히스기야는 하나님께만 도움이 있음을 믿고 그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왕은 산헤립이 보내온 편지들을 읽은 뒤, 성전에 올라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펼쳐 놓았는데 이는 하나님이 모르는 그 무엇을 알려드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비통함과 충격을 당하여 하나님께 그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 위함이었다(Alexander, Oswalt).

성 경: [사37:16]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 히스기야의 기도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룹 사이에 계신...'(원문)으로 시작된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처럼 길고도 장엄하게 부르는 까닭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이름이 앗수르인들의 입을 통해서 더럽혀졌기 때문이다(겔 36:20-32 참조).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전체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는 분, 곧 '만군의 여호와'임을 고백한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기시도 하다. 그럴진데, 왕의 통치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록 앗수르의 힘이 지상에서 강력하다 하나 그들 또한 만군의 여호와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신 언약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과 독특한 유대를 맺고 계심을 지시해준다.

성 경: [사37:17]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여호와여...보시옵소서...들으시옵소서 - 눈은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우상들(43:8 참조)과 대조하여, 히스기야는 천지 만물을 감찰하시고 들으시는 '사시는 하나님'께 호소한다(Oswalt).

성 경: [사37:18,19]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앗수르 왕들이 과연...불에 던졌사오나 - 히브리어 원문에는 서두에 '진실로', '과연'(*, 암남)이란 말이 나온다. 주변 열국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신(우상)들을 불에 던져 파멸시켰던 앗수르의 군사적 업적에 관해서 히스기야는 '과연'이란 말로써 시인한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는 산헤립이 모르고 있는 한 가지 사실, 즉 산헤립이 멸망시킨 다른 나라들과 이스라엘이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차이점을 말한다.
ꃨ 이들은 참신이 아니라...멸망을 당하였나이다 - 우상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역시 사람의 손에 의해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성 경: [사37:20]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이제 우리를 그의 송에서 구원하사...알게 하옵소서 - 히스기야의 기도는 본문에서 그 핵심에 이른다. 그는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그와 그의 나라를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할 때조차 그의 관심은 하나님과 그 영광에 향해 있다. 이 점에서 히스기야의 기도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성 경: [사37:21]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이사야가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그에게 '보냈다'. 즉, 그의 제자들 중 한명(혹은 종)을 보내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성 경: [사37:22]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처녀 딸 시온이...머리를 흔들었느니라 - 현재와 같이 위축된 상황(3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유다가 앗수르를 조롱하며 멸시할 날이 미구에 이를 것이라는 예언이 시적으로 주어진다. '머리를 흔드는 것'은 경멸하는 몸짓(시 22:7;44:14;109:25;렘 18:16;애 2:15;마 27:39)이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퇴각하는 날,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등을 향하여'(*, 아하레카) 머리를 흔들어 댈 것이다. '처녀'란 말은 예루살렘 성이 위협을 당했을지언정 아직 정복되지 아니하였음을 상징하는 말이다(Michaelis, Hitzig).

성 경: [사37:23]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네가 훼방하며...누구에게냐 -예루살렘에 대한 앗수르의 위협은 그 오만함과 방자함으로 인하여 단순한 군사적 의미를 넘어 감히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훼방하며 능욕하는 신성 모독의 차원에까지 미쳤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성 경: [사37:24]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이를 것이며 - 이하에서 산헤립이 말한 되풀이로 이해되는 본절은 고대의 왕들이 남겨놓은 기념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된 어투와 매우 흡사하다. 산헤립이 교만하게 '감히 우리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으며 우리가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지 못 갈 데가 없다'고 호언하는데, 그의 교만은 전적으로 '병거'(*, 레케브)로 대표되는 앗수르의 무력에 근거한 것이다.

성 경: [사37:25]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밟아 말리리라 - 앞절에서처럼 본문은 과거형으로 시작해서 미래형으로 끝난다. 이는 지금까지 그의 원정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던 만큼 앞으로의 원정도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다(Alexander). 앞서 레바논의 우거진 삼림들이 앗수르 군대의 나아감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머나먼 원정길에서 피할수 없이 따라오는 목마름조차도 역시 문제가 못 될 것이다. 그는 물이 없는 곳에서는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다고 노래한다. 그의 허풍은 앗수르 군대의 수효가 엄청나기 때문에 그들이 단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애굽의 모든 강들이 다 말라버릴 것이라는 말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산헤립(B.C. 705-681)은 애굽 델타에까지 결코 원정하지 못하였다. 실제 애굽 공격은 그의 후계자 에살핫돈(B.C. 670년)과 앗술바니팔(B.C. 668년) 때에 이르러서야 수행되었던 것이다(Leupold).

성 경: [사37:26]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네가 어찌 듣지 못하였겠느냐...되게 하였노라 - 앗수르 왕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1인칭으로 기술된다(26-29절). 하나님은 앗수르 왕이 내세운 공적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지도 않는다. 본문에서 그 초점은 '(네 말이 다 사실일진대) 땅에서 되어진 그 모든 일의 참된 주체가 과연 누구냐?'에 모아진다. 하나님은 앗수르가 거두었던 놀라운 군사적 성공도 당신께서 태초부터 이미 작정하셨던 신적인 계획 속에 포함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앗수르는 하나님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시켜 나가는 신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10:5).

성 경: [사37:27]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그러므로 그 거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같았었느니라 - 앗수르 군대 앞에서 평평한 지붕 위에 돋아나서 햇볕이 들면 쉬어 시들어버리는 약한 풀이나 아직 영글지도 않아서 낫을 댈 필요조차 없는 곡식과도 같았다(시 129:6). 그들은 이 모든 현상이 자기들의 위압적인 힘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며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 중에 포함됨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성 경: [사37:28]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나를 거스려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이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앉고 일어섬'에 대하여는 시 139:2, '나가고 들어옴'에 대하여는 신 28:6;시 121:8 등을 보라(Alexander).

성 경: [사37:29]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돌아가게 하리라 - '코에 갈고리를 꿰고 자갈을 먹이는 것'은 말 안 듣는 짐승을 다룰 때 사용하는 수법이다(욥 41:2;겔 19:4;29:4;38:4). 하나님은 분노와 교만으로 길길이 날뛰는 앗수르를 강제적으로 유다로부터 철수시켜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드신다는 말이다.

성 경: [사37:30]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먹을 것이니이다 -오만한 정복자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응징의 말씀에 이어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말한다. 발언의 핵심은 한 '징조'는 사건에 앞서 믿음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어떤 기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 '하나님께서 진실로 역사하셨구나!'하는 것을 확인하게끔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출 3:12, 18 참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쟁의 참상과 흔적이 남아있는 금년과 제2년에는 정상적인 파종과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그때까지 백성들은 땅에서 절로 자라나는 것만을 먹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제3년이 되면 백성들의 생활은 정상으로 회복되고 자신이 뿌린 씨에서 수확을 거두고 그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포위 상태로 인해 유다의 농업 경제의 기초가 다 훼파되었다 할지라도 그 상처가 아물어 흔적초차 볼 수 없는 날이 곧 이르리라는 것이다.

성 경: [사37:31,32]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남는 자는...나을 것임이라...이를 이루시리이다 - 앞절의 농사 비유를 확대하여 선지자는 그것을 유다가 예루살렘의 구원에 적용한다. 즉,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이 온전히 회복되듯이 포위된 성읍으로부터 '남은 자'가 나와 다시 번성하게 될 것이다. '남은 자'의 주체가 다시 등장한다(4:3;6:13;10:21, 22;11:11, 16 참조). '남은 자'와 동의어로 쓰이는 '피하는 자'(*, 펠레타)의 문자적인 뜻은 '피난', '구출'인데, 여기서는 '피신한 사람들'이라는 집합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Alexander, Calvin). '여호와의 열심'은 이 모든 일의 절대적 확실성을 보증하는 근거로서 덧붙여진다(9:7).

성 경: [사37:33,34]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이 성에 이르지 못하니라 - 앞에서 대체적으로 말해졌던 앗수르 왕의 장래가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보다 명확하게 예언된다. 그 요지는 '그 왕이 이 성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본문에서 2번 반복되고 있다. '방패'(*, 마겐)는 화살과 창을 막을 뿐 아니라 성벽에 접근했을 때, 위에서 떨어지는 돌이나 역청을 막는데도 사용되었다. '흉벽'으로 번역된 '솔렐라'(*)는 돌을 들어 던지는 전쟁 무기(Calvin)가 아니라 언덕 위에 있는 도성을 공략하거나 포위할 목적으로 쌓아 올린 작은 토성을 가리킨다(렘 32:24, Delitzsch, Oswalt).

성 경: [사37:35]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구원하리라 -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받은 것은, 첫째로, 산헤립에 의해서 모욕되고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23절)을 보존하고 그 영광을 천하 만국에 증거(20절)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며,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 종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한 것이다. 다윗 언약의 핵심은 '다윗의 나라와 그 위가 그의 자손들로 더불어 견고케 되며 영원히 보존된다'는 것이다(삼하 7:12, 13, 16). 이 약속은 후에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영적으로 참되고 온전하게 성취되었다(9:7;11:1;55:3;렘 30:9;겔 37:24;호 3:5 참조, Oswalt, Calvin).

성 경: [사37:36]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 선지자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의 대군을 잃고 비참한 모습으로 고국으로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을 보도한다. 이러한 패배는 그가 하나님과 더불어 대적하고 싸운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것은 본문에서 두 가지로 지적될 수 있다. 첫째로, 앗수르 군대의 몰살은 단 하룻밤 사이에 기적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기적적인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들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 근거해서,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가 사용한 치명적인 살육의 도구는 쥐가 옮기는 페스트 전염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결정적인 단서는 없다. 설혹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하룻밤 사이에 전염병으로 인해 엄청난 숫자의 대군이 몰살당한것 역시 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이 기적의 주체는 '여호와의 사자'였다. 이 '여호와의 사자'는 유월절의 밤에 애굽의 장자들을 단번에 살육하였던 '죽은의 천사'를 연상시킨다(출 12:12).

성 경: [사37:37]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떠나 돌아가서 - 직역하면 '(야영지를) 해체하고(*, 이사), 떠나서(* .옐레크) 돌아왔다(*, 야솨브)'이다. 연속적으로 배치된 이들 세 동사는 그들이 혼란 중에 서둘러 퇴각하였음을 보여준다.

성 경: [사37:38]
주제1: [앗수르의 회유에 대한 유다의 반응]
주제2: [히스기야의 기도]
ꃨ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그를 칼로 죽이고 - 산헤립의 최후는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되었다(7절). 그는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암살은 그가 신전에서 '니스록'신에게 경배할 때에 일어났다. '니스록'(*)은 '결합자'라는 뜻인데 아마도 산헤립의 개인 수호신인 듯하다. 앗수르의 대표적인 신들 이름에는 '니스록'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는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헤립의 개인 이름에는 '니스록'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는 대적의 손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헤립이 그의 신에게 기도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것은 구원이 아니라 아들들의 손에 의한 비참한 죽음이었다.

성 경: [사38:1]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ꃨ 그 즈음에 - 히스기야 왕은 29년을 통치하였다(왕하 18:2). 그중 15년은 질병이 나은 후에 여호와의 은혜로 생명이 연장된 기간이다. 따라서 본문의 사건은 그의 재위 14년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의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한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36:1). 히스기야 왕이 치명적인 병을 얻어 죽음을 선고받은 후에 여호와 앞에서 그토록 슬퍼하며 통곡한 것도 이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그가 슬퍼한 것은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보다도 오히려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민족이 당할 비극적인 처지를 더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Calvin, Vitringa)은 히스기야의 질병이 앗수르 군대 퇴각 이후에 발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 들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 왕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치유 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구원까지 약속되고 있기 때문이다(6절). 따라서 본장과 39장의 사건은 36, 37장보다 시간적으로 앞에 위치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Lange, Leupold, Oswalt, Delizsch).
ꃨ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 히스기야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21절의 '종처'(腫處)라는 말을 근거로 할때, 그의 병이 염증을 동반하는 치명적인 병-가령, 종기나 등창 같은-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레 13:18;욥 2:7 참조).
ꃨ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 '살지 못하리라'는 말은,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히스기야에게 이 말은 결코 변경될 수 없는 냉혹한 사형 선고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철회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새의 운명과 관련된 하나님의 선고에도 집행 유예(執行猶豫)는 있다(출 32:6-12 참조). 언제나 인생에게 복주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그의 종들이 기도를 기꺼이 들으시며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나, 성도의 기도는 그것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을 변경시킬 수 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이다(Oswalt).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히스기야의 겸손과 기도의 열심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다.

성 경: [사38:2]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ꃨ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기도하며 - 이러한 행동은 아합 왕이 취했던 것과 일견 비슷하게 보이나(왕상 21:4), 그 기본 정신에서는 크게 차이가 난다. 아합이 그의 얼굴을 벽으로 향한 것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지 못한 노여움에서였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자세를 갖기 위해서이다.

성 경: [사38:3]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ꃨ 여호와여 구하오니...추억하옵소서 - 히스기야의 기도는 '의인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구약의 확신에 부합되는 것이다(시 4:3;6:8;17편;26편;34:15, 17, 18;잠 15:29).그러나 그 초점은 행동의 완전함이 아니라 동기의 순전함에 모아진다. 히스기야도 인간인 한 비록 그의 행사가 다 완전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순전한 양심에 따라 최대한 바르게 행하고자 하였다. 왕하 18:1-7에 나오는 역사적인 기록과 평가를 참조하라.
ꃨ 진실과 전심으로 - 문자적으로는 '진리(*, 에메트) 안에서 그리고 완전한 마음(*, 레브 솰렘) 안에서'이다. '에메트'는 흔들림없이 일관되게 일을 추진해 나가는 성실성을 가리키며, '레브 솰렘'은 나뉘지 않은 마음의 온전함, 즉 정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 경: [사38:4]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ꃨ 이에...가라사대 -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선지자에게 전달된다. 첫 번째 말씀과 두 번째 말씀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그렇게 오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하 20:4의 평행구에서 볼 수 있듯이, 선지자는 그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사38:5]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ꃨ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말씀하시기를 -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할 때는 여호와의 이름만 간단히 언급되었다(1절). 그러나 위로를 제시할 때, 선지자는 여호와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라는 독특한 명칭으로 부른다. 이는 히스기야에게 베풀어진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가 그 조상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 기인한 것이며,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Calvin). '다윗'은 단순한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왕국의 연속성을 약속받은 인물로서 언급되고 있다(삼하 7:12-16). 물론 이 영속성이 다윗 자신이 아니라 그의 후손과 관련된 것임을 말할 나위도 없다.
ꃨ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 '듣고-보았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참되고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셨다는 말이다. 여호와는 의인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들으시며, 특히 의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귀하게 보신다.

성 경: [사38:6]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ꃨ 너와 이 성을...보호하리라 -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약속은 유다에 이미 진주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는 앗수르 군대의 위협으로부터의 일시적인 보호뿐만 아니라(Hitzig, Hendewerk, Knobel). 동시에 일단 퇴각한 후에도 계속해서 있을 수 있는 추가적인 모든 위협으로부터의 완전한 보호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Gesenius, Rosenmtiller). 이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으니 앗수르는 결코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사38:7]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ꃨ 나 여호와가...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 개역 성경은 1인칭 문장으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3인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 '그리고 이것이 여호와께로부터 너에게 (주어질) 징조니, 그가 말씀하신 이 말씀을 여호와께서 이루실 것이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일의 순서상 이사야의 말이 주어지기 전에 징조를 구하는 히스기야의 적극적인 요청이 선행되었을 것이다(22절; 왕하 20:8 참조). 이 점에서 히스기야의 행동은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아하스의 불신 행위와 대조를 이룬다(7:12, Skinner, Oswalt).

성 경: [사38:8]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은총을 입은 히스기야]
ꃨ 아하스의 일영표에...물러가게 하리라 - '아하스의 일영표'는 히스기야의 선왕(先王) 아하스가 세운 해시계를 말한다.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 의하면, 일영표는 바벨론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herod. .109). 이것이 앗수르에 의해 전달되었을 것이고, 아하스가 다메섹에 있는 디글랏 빌레셀을 방문했을 때 이에 대한 지식을 도입한 듯하다(왕하 16:10 참조). '일영표'는 문자적으로 '계단들'(*, 마알로트)이니, 해가 떠오를 때와 질 때를 기준으로 해서 계단에 드리워진 그늘을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수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왕하 20:9, 10의 병행구에 따르면,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에게 그림자가 앞으로 10도 나아가는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도록 제안했으며, 왕은 좀더 어렵게 보이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ꃨ 이에...물러가니라 - 히찌히(Hitizig)는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간 현상을 히스기야의 죽음이 뒤로 연기된 것과 평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10'이라는 숫자 대신에 '15'라는 숫자가 사용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칼빈(Calvin)은 '당시 해시계는 12눈금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하였다...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숫자상의 차이 때문에 꺼림칙해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시계의 눈금의 정확한 수치는 차치하고라도, 해시계 자체에 대해서 학자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더구나 이 징조는 히스기야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진 '이적적'인 것이다(대하 32:31 참조). 그럴진대, 이러한 현상이 히스기야의 눈앞에서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혹자는 이것을 부분적인 일식 현상으로 해석한다(Bosanquet). 그러나 이로써는 그림자가 뒤로 물러감을 설명하지 못한다. 가장 적절한 해석은 이것을 시각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서 빛의 굴절 현상으로 인해 오후에 바닥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이적적으로' 위로 옮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Delitzsch, Lange, Oswalt). 본문에서도 '뒤로 물러간 것'은 태양이 아니라 그 그림자였다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태양의 진행이 한시적으로 거꾸로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물리학적인 견지에서 이 지구상에 엄청난 문제점들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어떠한 이유로도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통상적으로 자신이 설정해 두신 이 세상의 법칙들과 조화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듯하다. 마침 신기루가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상한 현상을 나타내듯이, 그 징조는 빛의 굴절 작용으로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Leupold). 그러나 본문 자체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문제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추론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성 경: [사38:9]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유다 왕 히스기야가...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 히스기야 왕의 시편(9-20절)은 오직 본서에서만 볼 수 있다. 그는 이 시편을 죽음의 병에서 회복된 후에 지었다.본절은 이 시편의 표제인데,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유다 왕 히스기야의 글(*, 믹탑), 그가 병들었다가 그 병에서 살아난 때'(원문). '믹탑'은 보통 '기록된 글' 혹은 '쓰여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이 다른 시편의 표제에는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게세니우스(Gesenius)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믹탐'(*)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믹탐'은 시편의 전문 용어로서, 시 16편, 56-60편에서 표제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하여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문학에 탁월하였던 히스기야는 성전 예배시에 관악과 성악을 복구시켰으며(대하 29:25-30), 특히 위원회를 결성하여 잠언을 수집하고 고대 문서들을 수집, 보관하는 등의 일을 추진케 한 바 있다(잠 25:1). 따라서 이러한 그가 본 시편을 지었다는 사실은, 몇몇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 경: [사38:10]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 직역하면 '내 날들의 고요함 가운데서 음부의 문으로 내가 달려간다'이다. '고요함'(*, 데미)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건강한 생활의 평탄한 과정'(Delitzsch), '격정의 때가 지나고 사람의 성격이 한층 고요해지는 때'(Umbreit), '정오의 휴지(休止)'(Cheyne)의 긍적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진다(Gesenius, Maurer, Knobel). 그럴진대, '내 날들의 고요함'을 '내 생애의 정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NSB). '음부의 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이다(5:14;14, 9, 11, 15;28:15, 18, 삼하 12:15-25하 주제 강해, '구약의 사후(死後) 개념-(陰府)' 참조).

성 경: [사38:11]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내가 또 말하기를...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 계속하여 히스기야는 돌연한 죽음으로 인하여 그가 상실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를 노래하니, 그 첫째는 '여호와를 뵈옵는 것'이며, 그 둘째는 '사람들(동료)과 교제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뵈옵는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본다는 말이 아니라, 성전에서 공중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며 그와 살아있는 접촉과 교제를 나눈다는 말이다(시 11:7;17:15;27:4;42:2;63:2;84:2 참조).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는 필경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람과 어울리는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히스기야가 생존세계, 곧 짧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들이었는데 이제 죽음의 자리에서 이것들을 안타깝게 추상하는 것이다.
ꃨ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뵈옵지 못하겠고 - 히브리어 원문에는 '여호와'의 단축형인 '야'(*)가 연속해서 두 번 나온다. 직역하면 '내가 보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 여호와. 산 자들의 땅에서'이다. '야 야'(*)는 '야훼'(*)의 오류가 아니라 강의적인 반복을 나타내는 것이다(Alexander).

성 경: [사38:12]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나의 거처는...하였도다 - 자기 생명의 덧없음을 상기하면서 시인은 그것을 두 가지로 비유한다. (1)목자가 장막을 걷음 : 목자는 목초지가 싱싱한 곳에 '장막'(*, 오헬)을 세우고 짐시 기거한다. 그러나 그 기간은 풀이 남아 있을 때뿐이다. 풀이 마르면 목자는 곧 장막을 걷고 새로운 곳을 찾아 이동한다. (2)직공이 베를 틀에서 끊음 : 피륙이 베틀에서 완성되어진 다음에는 순식간에 직공의 손에 의해서 잘려진다. 인생의 덧없음에 대하여는 40:6-8;마 6:30;벧전 1:23을 참조하라.

성 경: [사38:13]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 탈굼역(Targum)은 본문의 동사(*, 쉬위티)를 변형시켜 '(괴로움으로 인해 나는 사자처럼) 포효하였다(*, 쉬와티)'라고 읽는다(Houbigant).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사자'에 비교된 이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데 난점이 있다. 또 혹자는 '솨와'(*) 동사에 '...과 같이 되다', '...에 필적하다'는 뜻이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나는 아침까지 (사자)와 같이 되었다(즉, 포효하였다)'는 해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뒤에 나오는 '뼈를 꺾는다'는 표상을 '사자'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시 7:2), 동일한 표상을 양자 모두에게 적용해야 하는 보순에 빠지게 된다(Alexander). 그러므로 문맥상 본절은 히스기야가 극한 고통 속에서도 인내로서 밤을 세웠으나, 아침이 되어도 병세는 그대로였으며 오히려 '사자가 그의 뼈를 물어 뜯는 것'과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거의 죽게 된 사람처럼 혼미한 소리를 내뱉는 뜻으로 이해함이 무난하겠다.

성 경: [사38:14]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여호와여...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 구원을 호소하는 왕의 탄원은 '주여'(*, 아도나이) 라는 외침으로부터 시작된다 : '주여! 나에게 억압, 나의 보증이 되소서'(원문). '억압'(*, 아쉐카)은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느끼는 짓눌림을 나타내는 전문적인 법정 용어이다(마 18 : 28-30 참조). '나의 보증이 되소서'(*, 아르베니)라는 단어 역시 법정 용어이니, 채무자의 압박을 경감시켜 주기 위해 그 빛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시 119:122;잠 20:16;27:13 참조). 히스기야는 채무자의 입장에서 채권자이신 여호와께 자신을 위해 보증이 되어 달라고, 즉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욥 17:3, Wildberger, Cheyne, J. Watts).

성 경: [사38:15]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각근히 행하리이다 - 본절을 기점으로 시편의 정조가 '비탄'에서 '찬양'으로 급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고-행하셨다'는, 즉 '주께서 내 기도를 응답하셨고-죽음의 질병으로부터 구원해주셨다'는 두가지 사실로부터 유도된다.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 앞에서 시인은 할 말을 잊는다 :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삼하 7:20 참조, Alexander, Delitzsch, Leupold, Lange, J. Watts). 이제 그는 은혜로 부여받은 15년이라는 여생을 지난날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엄숙하고도 경건하게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한다. '각근히 행하리이다'의 히브리어 '에다데'(*)는 시온산을 향해 나아가는 백성들의 엄숙한 행진을 묘사하는 말이다(시 42:4).

성 경: [사38:16]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원컨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주옵소서 - 본문은 개역 성경처럼 간구 형태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여기 사용된 두 동사는 모두 히필형(사역형 능동)으로서 명령형뿐만 아니라 미완료형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미완료형으로 번역할 경우에는, '당신이 나를 치유하시며(*, 타할리메니). 나를 살게 하시리이다'(*, 하하예니)가 되어 두 동사 모두 기도자의 확신을 나타낸다.

성 경: [사38:17]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보옵소서...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 죽음에서 벗어난 후 히스기야는 자신의 이전 고통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가져다준 영적인 유익을 노래한다. 히스기야는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건강의 축복을 '평안'(혹은 '온전함', *, 솰롬)이란 한 단어로 요약하여 말한다. 진실로 깨닫는 자에게는 고통조차도 그를 연단, 완성시키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롬 8:28 참조).
ꃨ 주께서...사랑하사...건지셨고...던지셨나이다 - '사랑하사'에 해당하는 '하솨크'(*)는 내적으로 확고하게 결합된 사랑을 의미한다. 또 '멸망'의 히브리어 '벧리'(*)는 '허무', '부정'을 뜻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멸망의 형벌을 받는다'는 의미로 취한다. 그리고 '등 뒤에 던지다'라는 말은 '주께서 사라지게 하다', '망각하다',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느 9:26 참조). 반대로 주께서 무언가를 기억하실 때는 그 대상을 그의 얼굴 앞에, 눈앞에 놓으신다고 표현된다(시 90:8; 109:15;렘 16:17;호 7:2). 결국 하반절은 히스기야가 자신에게 선고된 죽음의 재난을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시 103:3, 4 참조, Alexander).

성 경: [사38:18]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 본절과 19절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하여, '죽음'과 '생명'을 대조시킨다. '죽은 자는 하나님을 찬미하지 못한다'는 구약적 인식에 관하여는 욥 10:21, 22;시 6:5;30:9;88:10-12;115:17 등을 참조하라. 특히 본절과 관련하여, 사후(死後) 세계에 대한 이러한 비관적인 생각은 히스기야가 죽음을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결과로 파악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Calvin).

성 경: [사38:19]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 '산 자 곧 산 자'(*, 하하)는 강의적 반복이다(11절 참조). 죽음을 선고받은 자의 슬픔의 '어제'와, 죽음에서 벗어난 자 곧 산 자의 찬미의 '오늘'이 대조되고 있다(Lange). '주의 신실을 아비가 자녀에게 알게 한다'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된다(출 12:24-27;신 6:7 참조). 왜냐하면 이 당시 히스기야는 아직 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다(Alexander).

성 경: [사38:20]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노래하리로다 - 히스기야의 시편은 그가 자신의 동료 예배자들에게 자기와 더불어 찬미할 것을 권유하는 말로 끝난다. 찬미의 주제는 '여호와의 구원'이며, 그 방법은 '악기를 사용하여 노래하는 것'이며, 그 장소는 '여호와의 전'이다. 아마도 히스기야는 성전에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염두에 둔 듯하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는 '여호와'라는 고유 명사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라는 부정사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문장이다. 가장 무난한 독법은, 부정사에 임박한 미래적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생각하고 본문을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로 읽는 것이다(Oswalt).

성 경: [사38:21]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이사야는 이르기를...왕이 나으리라 하였었고 - 앞에서 언급하지 못했던 사항들을 이사야 선지자는 부연하니, 그중 첫째가 치료약에 관한 것이다. 선지자는 왕에게 무화과 열매를 찧어 만든 찜질약을 종처 부위에 바르도록 처방하였다. 무화과나무는, 델리취(Delitzsch)에 의하면, 종기를 빨리 곪게 하여 고름을 터뜨리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무화과나무는 오히려 종기에 해로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Grotius). 이들의 말에 따르면, 무화과나무가 상처에 해로운데도 붙이게 한 것은, 히스기야의 질병이 오직 여호와의 권능에 의해서만 기적적으로 치유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치료를 매개 물질 없이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역사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모든 치유 행위는 여호와께 속한다. 그는 때때로 병을 직접 치유하시나, 또다른 경우에는 매개 물질을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치유하기도 한다(Oswalt).

성 경: [사38:22]
주제1: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주제2: [히스기야의 감사 노래]
ꃨ 히스기야도 말하기를...하였었더라 - 선지자의 처방 다음에 징조를 구하는 히스기야의 요청이 이어진다(왕하 20:7, 8). '여호와의 전에 올라간다'는 말은, 예배드리기 위하여 혹은 여호와를 찬미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간다는 말이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왕하 20:5). 이에 히스기야는 그 약속을 확증할 수 있는 징조를 요구했으며, 여호와께서는 해의 그림자가 뒤로 10도 물러가는 이적으로 응답해 주신 것이다(8절).

성 경: [사39:1]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ꃨ 그 때에 - 바벨론의 사절들이 히스기야 왕을 찾아온 것은, 왕의 병이 회복된 직후였다. 본장의 사건은 38장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ꃨ 므로닥발라단이...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은, 앗수르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두 번에 걸쳐 바벨론을 통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맨 처음에 그는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 반대하여 B.C. 721-710년까지 12년간 바벨론을 통치했다. B.C. 710년에 사르곤 2세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한 뒤 재기하여 산헤립에 대항하여 다시 바벨론의 군주가 되었다. 여기 언급된 사건은 이중 후자의 연대(B.C. 701년 직후)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병에서 회복한 왕에게 사절을 통해 선물과 축하의 서한을 보내는 것은 고대의 관례에 속한 일이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사절들을 파송하면서 외교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그 사실을 축하하기 위함이었지만(대하 32:31 참조). 진정한 속셈은 유다의 도움을 입어 앗수르에 대항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있었다.

성 경: [사39:2]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ꃨ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며 - 히스기야의 기쁨은 사절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정중한 방식으로 그에게 존경을 표시한 바벨론 왕의 태도에서 기인된 것이기도 하지만(Alexander), 더 크게는 유다와 같은 약소 국가가 감히 바벨론의 군사 동맹 상대로 인정받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연유한 것이다(Leupold).
ꃨ 그에게 궁중 보물...다 보였으니 - 히스기야 왕이 바벨론의 사절들에게 궁중의 보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보여준 것은 이러한 자부심의 외적 표현이며, 유다의 국력을 널리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왕은 바벨론이 지리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예루살렘에는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왕은 자기를 드러내고 세상의 보물을 자랑하는 데 급급하였다. 역대하 기자는 이 장면을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신' 것으로 본다(대하 32:31). 왕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취함으로써 이 시험에 실패하였으며, 결국 이로 인해 유다의 바벨론 포로가 예고되기에 이른다.

성 경: [사39:3]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ꃨ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나아와 -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온 것은 바벨론 사절들이 떠난 직후였을 것이다. 이사야라는 이름 앞에 '선지자'라는 직함이 언급된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사람으로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ꃨ 묻되...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에게 세 가지 물음을 던진다. (1)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나이까?' : 이에 대해 왕은 대답하지 않는다. 외국과의 동맹에 대한 선지자의 부정적인 입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왕으로서 이 문제를 가급적이면 회피하고 싶었을 것이다(Gesenius, Oswalt). (2)'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 이에 대해 히스기야는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까닭을 학자들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왕의 개인적인 명성과 정치적인 중요성이 먼 거리에 있는 바벨론에까지 퍼졌음을 은근히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Calvin). 둘째, 친선과 우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먼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환대한다는 것은 마땅한 도리라는 점을 내세워 자신의 잘못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다 (Vitringa). 셋째, 선지자의 의심과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Knobel). 둘째 의견이 가장 자연스럽게 보인다.

성 경: [사39:4]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ꃨ 이사야가 가로되...하나도 없나이다 - 선지자의 세 번째 물음이 주어진다. 즉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 왕의 대답은 매우 솔직하다. 그러나 왕의 대답 속에 담긴 솔직함이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참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성 경: [사39:5]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ꃨ 왕은...들으소서 - 엄숙하고도 권위있는 신적(神的)인 판결이 주어질 때, 전형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병행구인 왕하 20:16에는 '만군의'(*, 체바오트)라는 말이 빠져 있다.

성 경: [사39:6]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ꃨ 보라 날이 이르리니...남을 것이 없으리라 -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형벌은 히스기야가 지은 죄-역대하의 기록에 따르면, 그것은 교만의 죄이다(대하 32:25)-에 상응해서 주어진다. 히스기야가 왕가의 모든 보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바벨론 사절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였듯이, 그와 그의 조상들이 축적한 바로 그 보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바벨론으로 옮기우게 될 것이다(Jarchi, J. Watts, Leupold).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된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미래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옮겨지게 되니, 본서의 제 1부가 앗수르와 관계했던 방식으로, 이제 본서의 제 2부는 바벨론에 관계하게 될 것이다.

성 경: [사39:7]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ꃨ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하셨나이다 - 바벨론으로 옮기우는 것은 히스기야의 보물만이 아니다. 장차 그에게서 날 자손 중 몇 명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서 왕궁의 환관(*, 사리심)이 될 것이다. 참조로 '사리스'(*)에는 '고자', '환관'이라는 뜻도 있다(창 37:36; 39:1; 왕하 8:6 등 참조, Targum, Gesenius, Lange). 본절 첫구절에 표현된 미래형을 통해서 히스기야가 아직 자손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Delitzsch, Alexander). 본 예언의 성취 여부에 대하여는 왕하 24:12-16;단 1:1-7을 보라.

성 경: [사39:8]
주제1: [히스기야의 실수와 그 결과]
주제2: [히스기야의 범죄]
히스기야 왕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당신의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긍적적인 의미로, 혹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부정적인 의미로 이 말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히스기야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파멸 선고가 그 당대에는 임하지 아니하고 그 후손들에게 일어날 것을 생각하며 기뻐한다는 것이다(Gesenius, Hitzig, Oswalt). 그러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는 말은 그러한 이기심의 절정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파멸의 선고 중에서 자비를 베푸셔서 그때를 늦쳐 주신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대하 32:26 참조). 이와 유사한 경우에 대하여는 왕하 22:18-20을 보라. 따라서 히스기야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많은 주석가들과 더불어 '좋소이다'라는 말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가 '타당하다'(just)는 사실에 대한 엄정한 인식과 그리고 형벌의 때를 늦쳐준 것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크나큰 '자비로움'에 대한 감사가 복합적으로 함축된 개념으로 파악한다(Alexander, Calvin, Delitzsch, Leupold, J.Watts, Lange).

성 경: [사40: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위로]
ꃨ 위로하라...위로하라 - 앞장의 내용과 비교할 때 본절의 내용은 다소 돌연적이기는 하지만, 이 같은 표현 방식이 본서의 특징임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가 된다. 무대는 바벨론 포로시대로서 이제 그 시대의 종결의 임박성을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이 두 번 반복됨으로써 그 성취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피력한다.
ꃨ 내 백성 - 본절 앞부분의 '너희 하나님'과 본 용어는 상호 연관성을 지닌다(렘 31:33;호 1:9, 10). 이 둘은 언약적 용어인데, 여기서 이 용어가 사용된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슴 아픈 사건(특히, 바벨론 포로 사건)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스라엘의 선조들과 맺었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파기되지 않았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Fausset, Whybray).

성 경: [사40: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위로]
ꃨ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 히브리어 원문은 '키 나르차 아오나'(*)이다. 여기서 '니르차'(*)의 원형은 '라차'(*)로서 '죄값을 지불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위로의 메시지의 핵심은 죄값이 지불되었다는 것,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망했고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하는 징벌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죄사함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심판도 궁극적 의미의 심판은 아니었다. 궁극적 심판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이스라엘은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적 신실성으로 말미암아 본문과 같은 약속을 받게 되었을 따름이다.

성 경: [사40: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ꃨ 외치는 자의 소리여 - 히브리어 원문 '콜 코레'(*)는 서술적 용법('한 음성이 외친다'), 형용적 용법('외치는 음성'), 명사적 용법('외치는 자의 음성')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본 구절을 인용한 마 3:3과 본서에서의 용례를 고려할 때 명사적 용법의 번역이 좋다. 그렇다면 '외치는 자'가 누구이냐라는 문제가 생기는데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6:4에 근거할 때 천상적 존재, 곧 천사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ꃨ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여기 '사막'을 단지 바벨론과 팔레스틴 사이에 있는 지리상의 광야로만 생각함으로써 본 구절을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한 언급으로 국한시킨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본서가 지향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너무 축소시킨 견해이다. 가깝게는 2절에서 분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암시된 사실 하나만으로도 본문은 우주적 구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사막'은 죽음의 땅, 심판의 땅이며 그 같은 땅에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9:1-7).

성 경: [사40: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본절은 동방의 군주들이 여행에 앞서 선발대를 보내어 골짜기에 길을 만들고 언덕을 평평하게 함으로써 여행에 장애를 주는 요소들을 제거하던 관행을 연산케 한다. 한편 본절은 침례 요한에게 적용될 수 있는데 침례 요한의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에서 떠난 것, 자기 확신, 민족적 특권에 대한 자만심, 위선 그리고 비종교성을 제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꺼이 준비케 하는 일이었다(말 4:6;눅 1:17).

성 경: [사40: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ꃨ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 여기 '모든 육체'란 인간의 본성 혹은 일반적인 의미의 인류를 가리키는데(창 6:12;시 145:21). 본절에서는 후자가 옳다. 한편 '보리라'에 해당하는 '라우'(*)는 '몸소 체험하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출애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익숙했던 여호와의 현현보다는(6:3;출 33:18-23) 성육신하신 하나님 곧 예수의 오심을 암시한다. 신약은 이 사실을 이렇게 묘사한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 경: [사40: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ꃨ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 여기 '아름다움'은 '하스도'(*)인데 그 원형은 '헤세드'(*)이다. 이 말이 본문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두 가지 대표적 견해가 있는데 그 하나는 인간 관계에서 당연히 요구되는 예의이며(Gleek), 또 다른 하나는 친절 긍휼이 여김이다. 야보고와 베드로는 둘 다 이것을 '돝사'(*) 곧 '영광'으로 번역하였는데(약 1:10, 11;벧전 1:24, 25) 이 영광이란 어떤 사람을 아름답게, 힘있어 보이게 하는 건강, 기력, 미, 재능, 지혜 등을 뜻한다(Barnes). 인간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예법, 그것을 지나서 상대방에게 친절, 선을 베푸는 것 그리고 건강미, 지혜 따위가 들의 꽃과 같이 마르고 시들 것이라고 본문은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인간의 모든 자랑거리와 아름다움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함을 뜻한다.

성 경: [사40: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본절의 이미지는 사막의 열풍(sirocco)이 불어올 때 봄에 피어난 꽃들이 갑작스럽게 시들어버리는 현상에서 취해졌다(Whybray).

성 경: [사40: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ꃨ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 본문의 의미는 말씀의 영원성과 불변성뿐만 아니라 유효성, 곧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서리라'로 번역된 '야쿰'(*)이 바로 '유효성'의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용어이다.

성 경: [사40: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ꃨ 높은 산에 오르라 - 이는 적군의 침입을 알리기 위하여 파수대 따위와 같은 높은 곳에 머물렀던 파수꾼이나(52:8) 자기 부대의 도착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앞서 파송되어 높은 지대로 오르곤 하였던 전령(삼상 31:9;삼하 18:19-21)의 모습에서 착안한 표현이다. 한편, 높은 산에 올라 전할 '아름다운 소식'이란 1차적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 소식이며, 더 나아가서는 성육신하여 오실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다.

성 경: [사40:1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ꃨ 상급...보응 - 전자는 '쉐카로'(*), 후자는 '페울라토'(*)인데 이 용어들은 전투의 승리자가 본국으로 귀환할 때 가져갔던 노획물 혹은 공물 따위를 의미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강한 능력을 동반하고 오실텐데 그때에는 여호와를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흑암의 세력들이 패퇴당할 것이다.

성 경: [사40:1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침례 요한에 관한 예언]
본절은 그 내용상 앞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하나님이 강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얻은 대가는 새끼 밴 암양과 양떼 곧 새롭게 회복된 백성이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는 성도의 목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게 한다(요 10:11-15).

성 경: [사40:1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손바닥...뼘...되...명칭...간칭 - 이들은 모두 당시의 측량 도구를 가리키는데, 본절에서 이것들을 가지고 달고 재어보는 대상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다. 당시보다 오늘날은 측량 도구가 발달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것이든 오늘날의 것이든 간에 그것들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이 위대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성 경: [사40:1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 '모사'란 '이쉬 아차토'(*)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그의 조언의 사람'이다. 본문은 당시 군왕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정치 전문가들에 의존하였던 사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절은 하나님을 조언할 책략가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自己充足性)과 초월성을 가르친다.

성 경: [사40:1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하나님의 피조 세계조차 헤아릴 자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에 통달하고 하나님을 유일 무이성, 초월성 및 무한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세상 존재와 구별되는 거룩하신 분임을 밝히고 있다.

성 경: [사40:1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저울의 적은 티끌 - 원문 직역은 '저울 위에 살짝 놓인 먼지'이다. 본절은 물동이의 물 한 방울, 저울 위에 살짝 놓인 먼지 등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여 눈에 보이는 가시적 물리 집단인 당시의 국가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사40:1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표면상으로 본절은, 하나님이 비교할 상대가 없는 위대한 분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핵심적인 의미는, 그 유명한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이나 짐승들로도 그분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기에는 오히려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땔감용 나무와 희생 제사용 짐승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과 그 이웃 나라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틴이 가장 울창한 삼림과 가장 풍성한 동물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했었다.

성 경: [사40:1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아무것도 아니라...없는 것...빈 것 - 이에 해당하는 세 히브리어 '아인'(*) '메에페스'(*), '토후'(*)는 우상과 관련한 묘사에서 자주 언급된다(41:24, 29;44:9-11;46:1, 2). 물론 여기서는 제 힘만 믿고 제국주의적 야심에 불탔던 열방들에 대한 풍자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주권 앞에서 그들의 존재란 무기력하고 미미하기 짝이 없다는 점에서 허탄하고 허무한 우상(18절 이하 참조)에 비교될 수 있겠다(Watts).

성 경: [사40:1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인간이 가진 특징 중에 하나는 경험한 세계를 토대로 경험치 못한 세계를 상상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같은 특징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유용하다. 그러나 그 같은 기능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피조 세계에 보이는 어떤 사물이나 인간을 연관시키는 목적에 사용할 때는 우상 숭배라고 하는 극악한 죄에 빠지게 되는데 바로 이점을 본절은 지적하고 있다.

성 경: [사40:1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본절은, 우상이 인간의 고안물임을 밝히고 있다. 앞부분에서(17절) 열국을 말하고 나란히 우상을 말하는 까닭은 고대 세계에서 한 나라와 우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을 단지 전쟁 당사국간의 싸움이 아니라 나라마다 섬기던 신들 간의 싸움으로 믿었다. 따라서 싸움 후 진 편의 신은 없어지든지 이긴 편의 신에게 종속적 존재가 되곤 하였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당시 이방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바벨론의 말둑(Marduk) 신에 의한 하나님의 패배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18절에서부터 저자는 우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물건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성 경: [사40:2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 우상을 세운 사람이 그 마음대로 옮기거나 고정시킬 수 있음을 암시함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분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성 경: [사40:2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본절은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하기 위해 질문하는 교사를 연상케 한다. 이스라엘은 어려서부터 만물의 기원을 배웠다. 저자는 하나님이 피조 세계와 초월해 계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의문법을 사용하고 있다.

성 경: [사40:2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메뚜기 같으니라 - 땅과 하늘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람이 지극히 자그마하게 보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문맥상 하나님과 비교조차 되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함과 미미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성 경: [사40:2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귀인들을...헛되게 하시나니 - 인간의 눈에 방백이나 재판관들은 힘있는 자들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무력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권세를 주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언제든지 그 권세를 폐하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사40:2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37:31과 뚜렷이 대조되는 구절이다. 견고하게 뿌리내려 과실을 맺는 의인과는 반대로, 악인은 열매는 커녕 뿌리조차 내리지 못하는 식물에 비유되고 있다.

성 경: [사40:2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 이에 해당하는 '에쉬에'(*)는 문자적으로 '내가 같아지겠느냐'는 뜻이다. 하나님의 유일 무이성이 이번엔 하나님 자신의 말로써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하에서는 이러한 강조의 근거가 이어지고 있다.

성 경: [사40:2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눈을 높이 들어...보라 - 하늘 영역을 보라고 말한다. 25절까지에서는 땅의 영역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하늘 영역에까지 확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 완전성, 절대성을 증명하고 있다.

성 경: [사40:2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본절에서는 야곱, 곧 이스라엘이 자신은 정당한데 그 정당한 사정이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있다고 원망한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우리는 26절에까지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절대성, 초월성, 무한성, 무비성(無比性)이 강조된 것을 보아왔는데 본절부터 31절까지에서 그 강조한 바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성 경: [사40:2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정이 외면당했다고 생각하여 절망, 좌절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먼저 자신을 영원하신 분,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 그리고 한번 시작한 일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일관성 있는 분, 신실한 분, 아무도 깨달을 수 없는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분임을 선포하신다.

성 경: [사40:2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계속해서 본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긍휼에 풍성하신 분임을 첨가하고 계신데, 영원, 무한, 신실, 전지하신 분이 힘없고 능력없는 자에게 힘주신다는 사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든다.

성 경: [사40:3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 '장정'에 해당하는 '바후림'(*)의 문자적인 뜻은 '선발된 자'인데 이들은 긴박한 사업, 위험한 일 등을 수행하기 위하여 피택된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들이 특별히 뽑힌 장정들이라고 할지라도 질병이나 피로, 사고 등에 의하여 그 힘이 쇠약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성 경: [사40:3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주제2: [하나님의 능력과 절대적 주권]
ꃨ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의존적 존재이므로,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라는 강한 권고의 말씀이다. 본서 1장은 이스라엘의 당면된 현실을 바라보면 소망이 없음을 강변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으로 인한 소망과 가능성을 조금씩 비치기 시작하는데 그 절정은 53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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