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사1: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ꃨ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 이사야의 예언 활동은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 740-680년경) 계속된다.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적 격변기이다. 웃기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구가한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낳고 그것은 다시 전쟁을 낳았다. 아하스는 수리아-에브라임 연합군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되었고(왕하 16:5),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방어해야만 하였다(왕하 18:13). 이 모든 것은 선지자에 의해 '백성들의 죄악에 따른 여호와의 심판'으로 정식화된다.
ꃨ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 '아모스'는 히브리어로 '아모츠'(*)라고 발음되며, 선지자 아모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델리취(Delitzsch)는 선지자의 아버지의 이름이 표기된 것은 그 역시 선지자였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라고 말한다.
ꃨ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 선지자의 예언은 주로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마리아를 비롯한 앗수르와 바벨론 등의 주변 열국들까지도 예언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13-27장, 34장). 이런 사실로 미루어 어떤 주석가들은 본절의 표제가 기껏해야 1-12장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들 열방들은 유다와 예루살렘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Alexander), 주제에 있어서 이차적 중요성밖에 갖고 있지 않음(Calvin)을 알 수 있다.
ꃨ 이상(異像)이라 - '이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존'(*)은 본래 엑스터시한 상태에서의 시각적 경험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되어 후에는 예언 일반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구약 예언서 가운데 본서외에 오바댜와 나훔에서 이와 동일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옵 1:1;나 1:1, '묵시').
성 경: [사1:2,3]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막(표제)이 오르면 독자의 시선은 말할 수 없이 장중하고 엄숙한 대자연의 법정으로 인도된다. 대재판관(여호와)이 있고 피고(이스라엘)가 있다. 그리고 증인들(하늘과 땅)이 있다. 이 재판은 통상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 먼저 증인이 호출된다:'하늘이여...땅이여...'(2a절). 이어서 대재판관이 피고에 대한 기소장을 읽는다(2b, 3절). 그 죄명은 반역죄이다. 선지자는 이 광경을 사람들이 잊을 수 없도록 아름답고도 슬픈 4행시로 노래지었다.
ꃨ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 세계는 그 앞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선지자는 특별히 하늘과 땅을 지목해서 부른다. 그 까닭은 하늘과 당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걸쳐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하면서 그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과 보살핌을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증인으로 참여한 바 있기 때문이다(신 4:26, 36;30: 19;31:28;시 50:4, 5).
ꃨ 내가 지식을 양육하였거늘 -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가 부자(父子) 관계에 비유된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자식이었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셨다(출 4:22;호 11:1). 이러한 관계성은 약속의 씨앗이라는 형태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말씀에서 암시되었다(창 15:4). 그 씨앗은 자라서 출애굽의 감격과 더불어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는 탐스러운 결실로 이어진다. 여호와는 갓태어난 이스라엘을 '자기 눈동자같이' 보호하고 인도했으며 온갖 향기로운 것들로 먹게 하셨다(신 32:8-14).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장성한 성년이 되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신 26:19;28:1) 이름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에 가장 잘 부합되는 시대를 찾는다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 그리고 웃시야와 요담의 시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식인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지극한 돌보심이 개역 성경에는 '양육하였다'는 한 단어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키우고'(*, 깃달티)와 '향상시켰다'(*, 로마므티)는 두 단어로 되어 있다. '깃델'과 '로멤'은 종종 동의어로 사용된다(23:4;겔 31:4).
ꃨ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 '거역하다'로 번역된 '파솨'(*)는 본래 '도망치다', '달아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의지에서 여호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ꃨ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 이스라엘은 지각이나 통찰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이스라엘이라는 주어에 종속된 '알다'(*, 야다)라는 동사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러므로써 그 표현은 더욱 강력한 것이 되었다. 70인역(LXX)은 그 뒤에 여호와를 가리키는 '나를'(*, 메)이라는 목적어를 삽입하였다. 반면에 혹자는 주인을 가리키는 '그를'(him)이라는 목적어를 보충하였다(Gesenius, De Wette). 그러나 본문 그대로가 그 기소를 더욱 통렬한 것이 되게 한다(Leupold). '알다'와 '깨닫다'의 두 동사는 모두 경험에서 직접 취해진 말이다.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식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출애굽과 같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주어졌다. 언약 관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여호와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다(출 6:7). 그러나 그 지식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는 데 이스라엘의 문제가 있다.
성 경: [사1:4]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ꃨ 슬프다 - 여호와의 기소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만큼 이를 반향(反響)이라고 하듯 그 뒤를 따르는 화답은 '슬프다'는 감탄사로 시작된다. '슬프다'로 번역된 '호'(*)는 장례식의 애도를 표시하는 비탄의 감탄사(렘 22:18)로서 탄식이나 저주의 표현에 자주 쓰인다(G.E. Wright). 이 말은 다른 곳에서 '화로다' 혹은 '화있을진저'등으로도 번역되었다(5:8;6:5;10:5;28:1 등등).
ꃨ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 - 이스라엘은 정치적, 민족적 공동체로서 자신을 여호와의 나라(백성)라고 이해할 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약속에 근거하여 자기를 여호와의 자녀(종자)라고 이해하였다. 자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이해는 이스라엘의 삶을 실제적으로 가능케 한 원동력으로서 항상 작용하였다. 여호와의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당연히 '거룩한 나라'(*, 고이 카도쉬, 출 19:6)가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범죄한 나라'(*, 고이 호테)로 전락하였다. '호테'는 '과녁을 빗나가다'(miss the mark)는 뜻을 가진 동사 '하타'(*)의 능동 분사형으로, 이스라엘이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 암 카도쉬, 신 7:6)이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허물 진 백성'(*, 암 케베드 아온)으로 전락하였다. '케베드 아온'은 무거운 죄짐을 지고 허덕이는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다.
ꃨ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 - 여호와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씨'(*, 제라 코데쉬, 6:13)가 되도록 기대되었으나,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행악의 종자'(*, 제라 메레임)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 말을 속격으로 받아들여 '행악자의 자손'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오히려 동격의 의미에서 '행악자들로 구성된 자손'이라고 애해하는 것이 더 낫다(Gesenius' Hebrew Grammar, ed. E. Kautzsch). 여호와께서 양육한 '자식'(*, 바님)은 어찌되었는가 ? 그는 '행위가 부패한 자식'(*, 바님 마쉬히팀)이 되었다. '마쉬히팀'은 '타락한'(Gesenius, Henderson), '남들을 부패시키는'(Leupold), '파괴적으로 행동하는'(Lange), '변질된'(Calvin) 등으로 번역된다. 시적 평행법으로 구성된 이러한 묘사들은 이스라엘이 상습적이고도 계속적인 범죄 행위로 인하여 스스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악해졌을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파괴적인 결과만을 산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ꃨ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물러갔도다 - 먼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렸다. 나아가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경멸하고 업신여겼다. 병행하는 두 구절에서 각기 '버리다'와 '경멸하다'로 번역된 '아자브'(*)와 '나아츠'(*)는 동이가어로서, 두 단어 모두 언약과 관련하여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 신들에게 전향하는 행위를 나타낸다(민 14:11;신 31:16, 20;32:19;삿 2:12 등). 랑게(Lange)는 '버렸다'를 소극적 죄악으로, '경멸하였다'를 적극적 죄악으로 분류하였다.
성 경: [사1:5]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ꃨ 너희가 어찌하여...패역하느냐 -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회개케 할 목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조치들을 취할 때마다 그 결과는 더욱더 악화되었다:'더욱더 패역하느냐.' 실로 극한점에 이른 저들의 죄악 때문에 주의 징계로써도 돌이키게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패역하다'(*, 사라)는 '진실에서 이탈하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여호와를 배신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불법을 더하다'로 번역하였다.
ꃨ 온 머리는...온 마음은 - '머리'(*, 로쉬)와 '마음'(*, 레바브)이란 명사에 관사가 수반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머리와 모든 마음'(every head and every heart)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Hitzig, Lange). 그러나 관사의 생략은 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자주 허용되었으며(9:12 참조), 또한 이 말이 인간의 신체에서 취해진 비유임을 고려할 때, '온 머리와 온 마음'(the whole head and the whole heart)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Alexander). 이것들은 일부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각각 다른 사회적 계층들(Hendewerk)이나 공동체의 내외적 상태(Umbreit)를 상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신체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치명적인 두 부분을 의미한다.
성 경: [사1:6]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ꃨ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 머리와 마음이 병들고 지친 이스라엘의 내적인 황폐함은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를 좀더 인상적으로 보여주려는 선지자의 의도에 따라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 처절한 모습으로 시각화되어 나타난다.
ꃨ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 - 오래된 상처는 고름을 짜내야 하고 출혈을 막기 위해서는 붕대를 싸매야 한다. 그리고 상처 부위를 부드럽게 하고 치료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기름을 발라주어야 한다(눅 10:34 참조).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치료조차 받지 못했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피폐함은 심각했다.
성 경: [사1:7]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선지자의 시선은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로 옮겨간다. 그는 고국 이스라엘의 황폐한 정경에서 율법의 저주를 본다.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한 자에 대해서 일찍이 율법은 경고하기를, '그 땅과 성읍이 황폐할 것'(레 26:33)이며, '알지 못하는 민족이 그 토지 소산을 먹을 것'(신 28:33)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에 임한 일이 과연 그러하였다. 선지자에게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율법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ꃨ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이방인에 의해서 생기는 것과 같은 파괴'(Caspari, Lange, Knobel). 이것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채택되고 있으며 이방인을 파멸시키는 자로 명시하고 있는 앞 구절에서 강력한 근거를 얻고 있다. (2)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은 파괴'(Delitzsch). 이것은 '파괴됨'(*, 마흐페카)이란 낱말이 옛적에 소돔 성에 임했던 무서운 파멸을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 것이다(13:19;신 29:23;암 4:11). 이중 어느 해석을 취하더라도 이스라엘의 황폐된 모습에서 율법의 저주를 읽으려는 선지자의 시선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성 경: [사1:8]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ꃨ 딸 시온 - '시온'은 성전의 고귀함 때문에 예루살렘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경에서 '딸'(*, 바트)은 관용적으로 어떤 민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47:1, '바벨론의 딸';시 45:12, '두로의 딸'). 시온과 이스라엘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이룬다. 선지자는 '딸 시온'이란 말로써 사랑스럽고 정결한 이미지를 야기시킨 후 바로 뒤에서 정반대의 비유들을 대조시킴으로써 충격을 가중시킨다(Oswalt). 이 같은 기법은 3:17;4:4에서도 사용되었다.
성 경: [사1:9]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7절에서 암시된 '소돔과 고모라와의 유사성'에 의해서, 그리고 8절에서 처음 싹을 틔운 '남은 자' 개념에 의해서(4장 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m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본절은 이중적으로 결합된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은 그 죄악의 격심함과 그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었다. 이 비교는 여호와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충격적이며 수치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 이스라엘에는 극소수의 남은 자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돔과 고모라와는 구별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희망적인 것이었다. 부정과 긍정의 이런 이중적 의미는 사도 바울이 롬 9:29에서 본문을 인용할 때 전혀 손상됨이 없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즉 바울은 한편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유전만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여전히 유효함을 상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혹독한 심판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소수의 참된 신자들을 남겨두신다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ꃨ 만군의 여호와(*, 야훼 체바오트) - 이는 '하늘과 땅과 별들과 모든 거민들의 주님'(Alexander)이라는 뜻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그 전능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남은 자를 보존하실 수도 있다. 만약 이스라엘이 그 악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 경: [사1:10]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 2절과 같은 동사가 사용된다. 그러나 그 대상은 다르다. 죄악의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와 거의 동일하다. 그 죄는 겔 16:49에서 '불의와 탐욕과 힘없는 자에 대한 착취'로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는 주저함이 없이 그들을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적 병행어로 기술된 '관원'과 '백성'은 나라 전체가 한결같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심판의 전달자일 뿐 아니라 율법의 참된 해석가고 부름받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율법(*, 토라)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비난(11-15절)과 교훈(16, 17절)으로 진행되었다.
성 경: [사1:1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너희의 무수한 제물 - '제물'로 번역된 '제바힘'(*)은 '살해된 동물의 고기,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피뿌리는 제물에 대한 포괄적인 명칭으로 언급되었다(19:21;삼상 2:29;3:14). 이것은 13절에서 역시 '제물'로 번역된 '미느하트'(*)와 구별되는데, '미느하트'는 피 없는 제사 즉 식물로써 바치는 소제를 말한다. 제물의 종류와 횟수, 그리고 바쳐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7항을 참조하라.
성 경: [사1:12]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 '너희에게'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너희의 손에서'이다. 에발트(Ewald)는 '너희에게'에 강조점을 두어 '그것을 누가 너 같은 사람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반면에 알렉산더(Alexander)는 '그것을'에 강조점을 두어 '그따위 헛된 출석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여기서 '마당'은 솔로몬 성전 주변의 경내를 가리킨다. 에스겔은 안뜰과 바깥뜰이 있다고 말한다(겔 8:16;10:5).
성 경: [사1:13,14]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 이 말은 첫째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제사를 혐오하시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그들이 제사와 더불어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둘째 여호아가께서 혐오하시는 대상이 무엇임을 밝히 보여준다. 그것은 제사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근본 정신에서 이탈된 외식적인 행위이다. 본래 제사와 행악은 절대로 양립하지 못한다. 서로 배타적인 이 둘이 결합된 모양을 가리켜 성경은 '외식'이라 부른다. 가짜와 거짓을 싫어하시는 여호와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진리이신 그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예배 행위에 대한 여호와의 태도는 14절에서 세 개의 동사로 보다 구체화된다:'싫다'-'귀찮다'-'지겹다'.
성 경: [사1:15]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손을 펼 때에 - 문자적으로는 '손을 뻗칠 때'이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것은 구약 시대에 가장 일반화된 기도 자세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내적인 열망의 가시적 표현이라고 믿어졌다.
ꃨ 많이 기도할지라도 - 혹자는 이 말을 '중언 부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큰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불쾌할 뿐이다. 참되고 진실한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불의로 얼룩진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탄원이며,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려는 거룩한 열망이다(주기도문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헛된 몸짓과 공허한 울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ꃨ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경멸하시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다. 붉은 '피'(*, 다밈)는 '악을 행한다'(13절)의 시각적 표현이다. 즉, 이 '피'는 희생 제물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혹은 상징적 의미에서의 악행을 의미하는 것이다(Calvin). 사해 사본의 이사야서는 이 말 뒤에 '너희 손가락은 불법으로 물들었다'는 구절을 첨가하였다.
성 경: [사1:16]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사랑을 기억하셔서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훈하신다. 그것은 먼저 악에서 떠나라는 말로 제시된다. '스스로 씻으라'(*, 라하추)는 말은 원래 신체적, 의학적 의미에서 자신을 세척하라는 말이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 하자쿠)는 도덕적 의미에서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말이다. 이 두 말의 상관 관계에 대해 델리취(Delitzsch)는 앞의 씻음은 단번의 회개요, 뒤의 씻음은 날마다의 점진적인 성화라고 하였다.
성 경: [사1:17]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선행을 배우며 - 악을 그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그 필요 충분 조건에 응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적으로 너무나 무지해서 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초등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처럼 이제라도 선행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힘써 배워야 할 과목은 '공의'이며, 이 과목의 주된 학습 내용은 본절에서 세 가지 실천 사항으로 언급된다.
성 경: [사1:18]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회개의 촉구]
ꃨ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양털같이 되리라 - 평행으로 이루어진 이 두 구절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다면, 그것이 어떻게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질 수 있겠느냐 ?'(Kaiser, Marti, Michaelis 등).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제사 행위를 통해서 그들의 죄를 중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과 착각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조롱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것을 의문문으로 해석해야 할 어떤 근거도 없다. 또 전후 문맥을 고려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음 해석을 취한다. (2)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을지라도,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지리라'(Alexander, Delitzsch 등). 죄가 여기서 붉은색으로 표현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피로 물든 손과의 연관성 때문이지만(15절), 종말론적인 표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흰색의 반대는 검은색이지만 종말론에서 희색의 반대는 붉은색이다. 흰색은 세마포를 입은 성도의 색이며 성결의 색으로 간주된다(전 9:8;단 7:9;마 17:2;계 1:14;3:4;7:9;19:8). 반면에 붉은색은 바벨론의 색이며 지상 나라의 색이며 마귀의 고유한 색이다(계 12:3, 9;17:4). 본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사이에 변론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에도 불구하고'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자유이며 사랑이다. 공의대로만 보자면 이스라엘은 사형을 언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보적 상벌의 법칙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 자유로써 이스라엘을 변화시키시며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려고 하신다. 이러한 가능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유는 진실로 새로운 삶으로 결실한다.
성 경: [사1:19,20]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회개의 촉구]
수농과 거역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주제는 율법이 선언된 이래 불변의 주제로서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레 26장 ;신 28장). 본문은 그 내용의 대조와 발음의 유사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절의 '먹다'(*, 토켈루)와 20절의 '삼키우다'(*, 테우클루)는 언어 유희의 대표적인 예다. 19절과 20절은 두운법(頭韻法)으로 이루어졌다.
ꃨ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창 3:18)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가인이 그 아우를 죽였을 때 그는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아니할 것이라'(창 4:12)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땅의 소산을 먹는 것과 인간의 행사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종종 물질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는데, 이는 참것의 그림자인 현재의 복락을 맛봄으로써 하늘의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이다.
성 경: [사1:2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유다의 패역]
ꃨ 신실하던 성읍이...창기가 되었는고 - 원문대로 읽으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가, 신실하던 성읍이'이다. 2절에서 부자 관계로 표현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여기서 부부 관계로 표현되었다. 부부 관계의 기초는 '신실함'(*, 네에마나)이다. '네에마나'는 '받치다', '기초하다', '기대다'는 뜻을 가진 '아만'(*)이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성도들이 기도 끝에 낭송하는 '아멘'이란 말도 이 말에서 비롯된 것임). 칼빈(Calvin)은 이 말을 '순결함'으로 이해하였다. 부부 관계에서 순결이 파괴될 때 간음이 되듯이,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배반할 때 그것은 영적 간음이 된다(출 34:15, 16;신 31:16;호 1:2 이하). 그리하여 한때 순결하였던 신부 이스라엘은 창녀(*, 자나)가 되었다. 어찌하여(*, 예카). 이 말은 애가(elegy)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이다. 예레미야 애가는 이 말로 시작하고 이 말로 표제를 삼았다(애 1:1;2:1;4:2). 선지자의 탄식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의 확인이다.
ꃨ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 과거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추함이 '이제는'(*, 아타)이란 말에서 극적으로 대비된다. '살인자들'(*, 메라츠힘)은 강도나 살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가장하여 부정직한 방법으로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소유를 착취하는 자를 의미한다(엠 2:34;요일 3:15). 그 주범은 유다의 지도자라 자처하는 고관들과 방백들이다.
성 경: [사1:22]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유다의 패역]
ꃨ 네 은은...너의 포도주에는 - 비유적으로 표현된 '은'과 '포도주'는 그 고상함과 귀중함에서 볼 때 높은 계급의 관원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나 은은 찌끼가 되고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다. 이 말은 이전 황금 시대에 고관들에 의해 나타났던 덕과 공의가 쇠퇴하고 지금은 그 찌꺼기와 그림자만 남았음을 뜻한다(Delitzsch). 비록 찌끼가 은을 대신하여 아직도 반짝이고 포도주가 불그레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순수를 상실한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럴 듯한 가짜를 싫어하신다(딤후 3:5).
성 경: [사1:23]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유다의 패역]
ꃨ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 '방백들'(*, 사림)과 '패역함'(*, 소레림)은 두운법에 맞춘 것이다. 선지자는 두운법을 사용함으로써 방백들과 그들의 패역함을 한층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방백들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패역한 사람들이다'이다.
ꃨ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 '사랑하며'(*, 오헤브)와 '구하며'(*, 로데프)는 모두 분사로 쓰여 그들의 행위가 계속 지속되며 습관적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구하다'는 동사는 원어상 '따라가다', '열심히 추구하다'는 뜻을 갖는다. 그들이 그처럼 열심히 추구하고 흠모해 마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뇌물'(*, 솰르모님)이었다. '뇌물'은 '평화'를 뜻하는 '솰롬'(*)과 발음이 비슷하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구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뇌물'이었다.
성 경: [사1:24]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 -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이처럼 한데 모아 놓은 곳은 이곳 외에 없다. '주'(*, 하아돈)라는 명칭은 본서에서 '만군의 여호와'와 결합되어 위협과 징벌을 가하는 경우에 쓰인다(3:1;10:16, 33;19:4). '만군의 여호와'에 대하여는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의 전능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권위있는 통치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창 49:24;시 132:2, 5 등에서는 '야곱의 전능자'라고도 표현되었다(49:26;60:16). 70인역(LXX)에서는 이것 대신 '야곱의 전능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선지자는 이 세 가지 이름을 한데 묶음으로써 여호와의 무한한 엄위와 전능하심을 최고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그 뒤에 이어질 말씀들이 매우 중요하며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하시되'(*, 네움)라는 동사에서 한결 분명해진다.
ꃨ 말씀하시되 - '네움'은 비밀스럽고 중요한 사실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창 22:16에서 처음 나오고 렘, 겔에서 자주 등장함).
성 경: [사1:25]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나의 손을 내게 돌려 - '손을 되돌린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개입, 간섭하실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렘 6:9;겔 38:12;암 1:8). 하나님의 간섭은 찌끼를 태우고 혼잡물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몇몇 주석가들은 이것을 징벌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 그러나 '아쉬바'(*)라는 동일한 동사로 시작되는 26절과 비교해 볼 때 회복의 의미가 더 강한 듯하다.
ꃨ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 문자적으로는 '잿물처럼 너의 찌끼를 녹이고'이다. 하나님은 마치 잿물을 가지고 은에서 납 성분을 녹이듯이, 예루살렘의 경건치 못한 자들을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성 경: [사1:26]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본래와 같이 - '사사들'과 '모사들'은 권력을 쥐고 있는 관원들과 방백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정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불순물이 제거된 뒤에 예루살렘은 21절 상반절에 기록된 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평화의 구현기요 메시아적 통치의 예표로서 상징된다. 그러면 이러한 예루살렘의 회복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 가까운 미래에 있어서 어쩌면 그것은 유다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팔레스틴에 귀환할 때 이들을 지도한 스룹바벨이나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히 실현되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24:23).
성 경: [사1:27]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귀정(歸正)한 자 - KJV는 이것을 범죄로부터 돌아선 자라는 뜻의 '개종자들(converts)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랑게(Lange)는 '포로에서 귀환하는 자들'에게 이것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것을 이중적 전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가까운 미래에서는 '포로에서 풀려난 자들', 그리고 먼 미래에서는 '죄로부터 구속된 성도들'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 경: [사1:28]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그러나 패역한 자와...멸망할 것이라 - 25절과 관련하여 정련 과정의 반대 측면, 즉 찌끼와 혼잡물의 운명이 제시된다(Lange). 그들의 운명을 강조하는 듯이 '패망'(*, 쉐베르)이란 명사가 문장의 맨 앞에 나온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파멸, 패역한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그리고)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종말에 이르리라.'
성 경: [사1:29]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상수리나무...동산 - 선지자는 부분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수법으로 '상수리나무'(*, 엘림)와 '동산'(*, 가노트)을 들어 당시에 편만해 있던 모든 유(類)의 거짓된 우상 숭배를 표현한다. 류폴드(Leupold)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이것들은 두 가지 방식의 우상 숭배, 즉 나무 숭배 의식(tree- cult)과 동산 숭배 의식(garden-cult)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무에 관하여는 57:5;왕하 16:4;렘 2:20;3:6;17:2;겔 6:13;호 4:13을, 동산에 관하여는 65:3;66:17을 참조하라.
성 경: [사1:30]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물 없는 동산 - 늘 푸른 나무와 물기 어린 동산처럼 그렇게 번성하기를 꿈구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달려간 그들은 허무한 우상의 결국만큼이나 자신들도 헛되이 비참함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Alexander). 그러나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를 택하고 그로 즐거워하는 자들의 운명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할'(시 1:3) 것이다. 선지자가 종말론적 구원의 표상과 관련하여 동산에서 물이 넘칠 것을 노래한 구절로는 35:6, 7;41:18;44:3;48:21;66:12 등이 있다.
성 경: [사1:3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강한 자는...그의 행위는 - '강한 자'(*, 헤하손)는 불법한 통치자(아마도 '우상 숭배를 조성한 지도자', Leupold)이며, '그의 행위'(*, 포알로)는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우상(혹은 '안녕을 도모하는 그 수단과 고안물', Vitringa;'우상 숭배하는 행위', Lange)을 의미한다. 우상은 불티와 같아서 그것을 따라가는 자에게 재앙만을 야기시킨다.
성 경: [사2:1]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ꃨ 아사야가 받은 바...말씀이라 - 문자적으로는 '이사야가 본(*, 하자) 말씀(*, 하다바르)이라'이다. 이런 표현은 매우 드물다. 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주의 말씀이 ...에게'이다(렘 14:1;겔 13:1;호 1:1;욜 1:1;욘 1:1;미 1:1;습 1:1 등). 아모스만이 이와 비슷한 표현법을 쓰고 있다(암 1:1).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 이외에도 '사건', '사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으로 파악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의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곧 사건이며, 사건은 곧 그의 말씀인 것이다.
성 경: [사2:2]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ꃨ 말일에 - 문자적으로는 '날들의 끝에'(*, 베아하리트 하야밈)이다. 이 말은 본서에서 단 한번 나온다. 그것은 창 49:1;민 24:14;신 4:30;31:29 등에서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에프 에스카톤 톤 헤메론, 히 1:2)로 번역하였다. 율법 학자들은 그날을 메시야의 날로,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옛 세대의 끝으로 보았으며, 오늘날 많은 주경 학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에 이르는 신약 시대로 이해한다.
ꃨ 여호와의 전의 산이...뛰어나리니 - '여호와의 전의 산'은 '시온'을 가리킨다(시 2:6;3:4;24:3;렘 31:23;욜 2:1;3:17 등). 고래(古來)로 산들은 그 높이와 위엄에서 사람들의 찬탄을 받아왔으며 신들이 거주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숭배되어 왔다(예컨대, 희랍의 올림푸스 산 등). 그러나 실제로 시온은 전혀 높지 않은 자그마한 언덕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바산의 산들이 이 낮고 하찮은 하나님의 산을 내려다 본다고 말하였던 것이다(시 68:16). 그러나 종말에는 모든 것이 극적으로 변화된다. 그날에 시온은 가장 높아질 것이요, 그 영광 앞에서 다른 모든 산들은 평지나 다름 없어질 것이다(슥 14:10).
ꃨ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모여든다'(*, 나하루)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흐른다'(stream)는 뜻이다. 그 옛날 범죄의 절정을 상징하였던 바벨탑에서 각처로 분산되었던 인류는(창 11:1-9)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다시 시온 산으로 물밀듯이 몰려들 것이다. 인류의 범죄와 구원의 역사는 '바벨탑에서 시온 산으로'(from the Babel to the Zion)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시온 산이 '하나님이 세운 구원의 높이'를 상징한다면, 바벨탑은 '인간이 세운 죄악의 높이'를 상징한다.
성 경: [사2:3]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ꃨ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나올 것임이니라 - 백성들이 그처럼 시온에 오고자 한 것은 거기에만 율법, 즉 여호와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율법은 '참된 종교'(Alexander) 혹은 '시내 산의 토라와 대조적인 의미에서 시온의 토라라 할 수 있는 복음'(Delitzsch)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의 강조점은 '시온에서부터'에 놓는다. 이는 구원의 길이 시온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요 4:22).
성 경: [사2:4]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ꃨ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판결하시리니 - 앞에서 율법의 수여자 혹은 인생의 행할 길을 가르쳐 주시는 참된 교사로 그려졌던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민족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며 판단하시는 재판관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판결과 중재가 가능한 것은 열방들이 율법의 말씀으로써 삶의 지침을 삼고 그 뜻에 기꺼이 복종하려 하기 때문이다. '판단하다'(*, 솨파트)는 '다스리다', '왕노릇하다'(Calvin)나 '징벌하다'(Cocceius)는 뜻보다는 '중재하다'(Alexander)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ꃨ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만들 것이며 -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때 전쟁도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그날에 사람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제작하였던 칼과 창을 생산적인 농기구로 바꾸게 될 것이다(슥 9:10). '보습들'(*, 이팀)은 당을 갈아서 흙덩이를 일으키는 도구이며, '낫들'(*, 마즈메로트)은 쓸데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전지용(剪枝用) 가위이다.
성 경: [사2:5]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야곱 족속아 오라 - 문자적으로는 '야곱의 집이여, 오라'이다. '야곱의 집'은 하나님의 선택된 가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다(8:17; 10:20;14:1;29:22 등). 앞절에 비추어 볼 때 본문에는 교묘한 대조가 숨어 있다. 즉 율법에 무지한 이방인들조차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데,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은 오히려 뒤로만 물러간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바인을 들어 이스라엘에게 고상한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선교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롬 11:14).
ꃨ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 '여호와의 빛'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Delitzsch) 혹은 '여호와께서 계시해주신 진리의 말씀인 성경'(Alexander)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타민족이 갖지 못한 이 빛을 특권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달리 빛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으며 단지 그 가운데 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암흑 가운데서 방황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야만 되었다.
성 경: [사2:6]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 원문대로 읽으면 '가득 채워졌다(*, 말레우), 동방으로부터(*, 미케뎀)'이다. 여기서 '동방'은 지리적으로 팔레스틴 동쪽 특히 앗수르, 아람, 바벨론 등을 가리킨다. 고대 근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이들 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온 이방 풍속들로 온 이스라엘이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ꃨ 이방인으로 더불어...언약하였음이라 - 본문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1) '이방인의 자녀들에게서 만족을 취하였다'(Luzzatto). (2) '이방인들과 결혼함으로 인해 연합되었다'(LXX, Targum). (3) '이방인들과 상업적 계약을 체결하였다'(Cheyne). 심지어 제롬(Jerom)은 여기서 남색(男色)과 같은 성적(性的)범죄를 발견하기도 한다. 문맥과 관련하여 이 말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정치적, 상업적,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이방들과의 교류가 확대되어 결과적으로 성별된 여호와의 백성과 거룩하지 못한 태생의 이방인들 간의 구별이 폐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본문은 앞절과 관련하여 대조적이다. 즉 말일에 시온으로부터 여오화의 빛이 이방으로 퍼져나갈 것임에 반해, 오히려 이방의 악한 풍습들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어온 것이다.
성 경: [사2:7]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마필(馬匹)이 가득하고 - 이방과의 자유로운 교섭의 결과, 이스라엘 땅에 경제적 부(富)를 상징하는 은금과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마필 역시 가득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일찍이 모세에 의해 강력하게 공고된 것들이었다(신 17:16, 17). 그러나 자기 의지의 수단으로서 경제적, 군사적 힘을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솔로몬 왕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왕상 10:26-11:8), 웃시야 왕 때에는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되었다(대하 26:6-15). 여기에도 앞 구절(4절)과 비교해 볼 때 대조가 암시되어 있다. 즉, 말일에 전쟁 무기가 평화의 도구로 바뀌어지는 것과 이와는 반대로 마필로 힘을 과시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비교해보라.
성 경: [사2:8]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우상도 가득하므로 - '가득하다'(*, 말라)는 동사가 계속해서 문두(文頭)에 나온다. 본서에서 우상과 관련한 구절들로는 40:18-20;41:6, 7, 29;44:9-20 ;45:16-20; 46:1, 2, 5-7 등이 있다. 종말의 풍경과 이스라엘의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가 여기까지 이어진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지만 정작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에는 우상만이 가득하다.
성 경: [사2:9]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 이러한 우상 숭배는 천한 자와 귀한 자, 즉 사회 각 계층에 편만히 퍼져 있었다. '천한 자'로 번역된 '아담'(*)과 '귀한 자'로 번역된 '이쉬'(*)는 구약에서 인간에 대한 대표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전자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후자는 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5:15).
성 경: [사2:10]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 이 후렴구의 변형이 19절과 21절에 나온다.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사람들은 바위 구멍 속에 몸을 피하거나(삿 6:2;삼상 13:6) 얼굴을 땅속에 묻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 임할 재앙이 너무도 크고 두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구절이 동방에서 계절풍을 피하거나 사막을 통과하는 지독한 열풍을 피하는 관례적인 습관에서 착안된 표현이라고 추정한다(Leupold).
성 경: [사2:11]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눈이 높은 자가...굴복되고 - '눈이 높은'(*, 에네 가브후트)은 마음의 내적 교만이 나타내는 외적 몸짓을 가리키는 것이다(시 101:5, Calvin). 본문에서 '높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 ('가브후트'와 '룸')와 '낮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솨펠'과 '솨흐')가 평행한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극명하다. 우리가 여호와를 높이면 그가 우리를 높이시려니와, 우리가 여호와를 낮추면 그도 우리를 낮추신다(57:15).
성 경: [사2:12]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 - 문자적으로는 '만군의 여호와에게 있는 한 날'이다. 그날은 (1)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다. 이 칭호는 그가 전우주적인 심판을 시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Leupold). 또한 (2) 여호와의 생각 속에 영원한 비밀로 존재하다가 지정된 때가 이르렀을 때 역사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날이다(Delitzsch). (3) 반드시 하루일 필요는 없다. 주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시 90:4;벧후 3:8, Lange). 마지막으로 (4) 두려운 심판의 날이다. 이것은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 계속되는 전치사 '알'(*, against)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날은 이미 많은 선지자들로부터 예고된 최후의 날이다(13:6;욜 1:15;2:1, 11, 31;암 5:18, 20;습 1:7, 14;슥 14:1 등).
ꃨ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自高)한 자에게 - 심판의 날에 이르러 파멸의 운명에 처해질 대상들이 먼저 열거되었다. 이를 '사람'(everyone)의 의미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인 '모든 것'(everything)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Vitringa, Gesenius, Alexander). '높음'을 나타내는 세 개의 형용사 - '교만한'(*, 게에), '거만한'(*, 람), '자고한'(*, 니사)-는 동의어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뒤에 나오는 자연들과 결부시켜 '장엄하고 인상적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높이 들린 모든 것들에 대하여'로 해석하기도 하고(Leupold),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창 3:5, J. Watts).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진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Lange).
성 경: [사2:13-16]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여호와의 심판은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시에 넘어뜨리는, 지진을 동반한 무서운 폭풍으로 형상화된다. 그 폭풍은 북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바다로 향한다(Kaiser, Leupold). 이 방향은 이스라엘의 적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방향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ꃨ 레바논의...백향목과 바산의...상수리나무 - 레바논은 '흰 산'이란 뜻인데, 그 산의 꼭대기가 1년 중 거의 절반이 눈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팔레스틴과 시리아 접경에 위치한다. 그곳의 자랑인 백향목은 성경에서 종종 위엄과 능력의 상징으로 취해졌으며(삿 9:15;왕상 4:33;왕하 14:9;시 92:12;104:16), 세속적인 교만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시 29:5, 6;렘 22:6;슥 11:1, 2). 바산은 요르단 동쪽에 자리하고 길르앗 북쪽에 위치하며 그 남쪽으로는 야르묵 강이 흐르는 고원 지대이다. 지금은 엔-누크라(en-Nuqra)라고 불리며 가축을 키우기 좋은 목축지가 있다. 황소와 상수리나무로 유명하다(시 22:12;겔 27:5, 6;39:18;암 4:1). 주석가들은 이것들이 유다의 높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Jerome, Vitringa, Gesenius). 이 나무들은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올 때 군사용 목적으로 벌목되어 완전히 황폐화되고 말았다(37:24).
성 경: [사2:17]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 약간 변형된 11절의 반복이다. '눈이 높은 사람'(*, 에네 가브후트 아담)이 '스스로 높은 사람'(*, 가브후트 하아담)으로 바뀌었을 뿐, 그 의미는 11절과 동일하다. 이런 반복은 이전의 상세한 시각적 묘사로부터 다시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진술로 환원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시의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사2:18]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 선지자의 시선은 여호와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대상인 우상으로 옮긴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엘릴림)처럼, 완전한 무(naught)로 화할 것이다(슥 13:2). 랑게(Lange)는 13-16절이 7절에 관계되듯이, 본절 이하는 8절에 관계된다고 주장한다.
성 경: [사2:19]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사람들이 암혈(巖穴)과 토굴로 들어가서 - 10절의 경고가 여기서 직접적인 예언으로 바뀐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그 숭배자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상들이 무로 화하듯이, 그 숭배자들은 여호와의 진노를 피해 암혈과 토굴에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 경: [사2:20]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 70인역(LXX)은 이 구절에 착안하여 그들이 동물 숭배에 빠졌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Luzzatto, Malbim). 그러나 두더지와 박쥐는 우상 숭배자들이 몸을 피할 '암혈'과 '토굴'과 연관하여 취해진 것이다. 즉, 그들은 두더지와 박쥐들이 서식하고 있던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금과 은의 형상들을 던지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행동은 '역겨움에서'(Leupold), 혹은 '심판자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Delitzsch) 취해질 것이다.
성 경: [사2:21]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본문은 우상에 대하여 언급할 때마다 뒤따라 나오는 후렴구이다(10, 19절).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수치와 파멸이 어느 정도로 극심할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하여 후렴구로 반복되는 것 같다.
성 경: [사2:22]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후기의 삽입으로 간주되었으며(Diestel, Cheyne), 어떤 곳에서는 아예 빠져 있다(LXX).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본절은 앞에서 논의된(5절 이하) 내용의 결론이며, 동시에 3;1 이하에서 새로 이어질 내용의 도입부로 작용한다.
ꃨ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 인생의 유한함이 창 2:7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기술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이 붙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시편 기자는 그 허망함을 이렇게 노래했다:"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圖謀)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이와 관련된 구절들로는 욥 7:7;34:14, 15;시 78:39;90:36-6;104:29 등이 있다.
성 경: [사3:1]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예루살렘과 유다 - 1:1과 2:1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聖都)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유다 전역으로 퍼져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그리고 유다로부터'로 되어 있다.
ꃨ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모든 물 - 유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모든 것들의 구체적 대상으로서 먼저 언급된 것은 '양식'(*, 레헴)과 '물'(*, 마임)이다. 이 둘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 불가결한 두 요건으로서 거론된 것이다(Alexander, Delitzsch). 양식과 물을 끊는다는 것은 기근을 뜻하며(레 26:26;겔 4:16;5:16;14:13), 이것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공 때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25:3;렘 38:9;애 4:4, 10).
성 경: [사3:2,3]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하나님의 심판은 앞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단순히 육체적 파멸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의 총체적 와해로까지 이어진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유다를 지탱하던, 다시 말하면 유다 사람들이 의뢰하고 의지하였던 그들의 지도자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1) 군사적 지도자들: 용사(*, 깁보르) - '힘있는 남자' 혹은 '영웅'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높은 계급의 군대 장관을 뜻한다(Michaelis, Gesenius, Delitzsch). 전사(*, 이쉬 밀르하마) - 군인을 가리킨다. 이 말은 앞의 '용사'와 관련하여 높은 계급의 군인으로 이해되기도 하고(vITRINGA), 혹은 '용사'와는 구별된 사병으로 이해되기도 한다(cOCCEIUS, dELITZSCH). 오십부장 - 50명으로 구성된 군대의 최하급 단위 부대의 장을 말한다. 이것은 본래 행정, 사법적인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나(출 18:25, 26), 후에 군사적 목적으로 변경되었다. (2) 정치적 지도자들: 재판관(*, 쇼페트) - 여기서는 사법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당국에 의해 임명된 행정 관리들을 가리킨다. 장로(*, 자켄) - 이들은 나이든 노인으로 그들의 지혜와 경륜을 발휘하여 지도적 위치에서 공동체를 다스렸다. 귀인(*, 네수 파님) - 문자적으로는 '얼굴이 들린 (사람)'인데,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하했던 사람을 가리킨다(9:15;왕하 5:1;욥 22:8). 모사(*, 요에츠) - 왕의 측근으로서, 나라의 중요한 정책 결정에 조언을 했던 사람을 말한다. (3) 종교적 지도자들: 선지자(*, 나비) -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계시해주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들이 복술자와 함께 열거된 것으로 보아 거짓된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같다(Michaelis, Gesenius). 복술자(*, 코셈) - 점을 쳐주는 사람을 가리킨다(겔 21:21-23). 이런 행위는 모셉법에 의해 정죄되었다(신 18:10-14). 능란한 요술자(*, 네본 라하쉬) - '라하쉬'(*)는 '속삭이다'는 뜻으로서, 마술 주문을 외우거나 중얼거리는 것을 가리킨다(삼하 12:19;시 41:7). (4) 산업 기술자: 공교한 장인(*, 하캄 하라쉼) - 기술에 능한 사람들로서 전쟁 무기의제조(Michaelis) 혹은 우상 제조(Umbreit) 혹은 연금술(Gesenius, Ewald) 혹은 산업 기술(LXX, Luther, Vitringa)에 종사한 사람들을 가리킨다(왕하 24:14;렘 24:1). 앞절과 마찬가지로 본문의 예언 또한 느부갓네살 왕이 침공해 올 때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왕하 24:14-16을 참조하라.
성 경: [사3:10,11]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가 반복되어 나온다. 사람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기 마련이다. 의를 심으면 의의 열매를, 악을 심으면 악의 열매를 말이다. 비록 경험적 현실에서 이 같은 응보가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으나(시 73편;말 2:17;3:13)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날에 모든 것은 바르게 드러날 것이다. 선지자는 지혜 문학적 격언 형식으로, 혹은 일반적인 금언 형식으로 이 같은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이 말이 갖는 통시적, 공시적 보편성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 경: [사3:12]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 선지자는 앞에서 논의된 내용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는 법정 진술로 이어지는 뒷부분과의 연관성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문은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내 백성이여 !(혹은, 내 백성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들의 압제자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여자들이 그들을 억압할 것이다'이다. 여기에서 '아이들'이 나이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성격적 측면에서의 방자함과 치졸함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4절). '아이들'과 더불어 거론된 '여자들' 역시 무능력하고 무자격한 통치자의 예로서 제시된 것이다. 어쩌면 선지자는 아달랴 왕비의 악한 통치(왕하 11:1-20)나 이세벧의 폭정(왕상 18:4;21:5 이하)을 상기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Leupold). 이러한 무자격한 통치자들이 나라를 주관하는 경우, 그 치명적인 결과는 자명해진다.
성 경: [사3:13]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ꃨ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 본문에 사용된 두개의 동사, 즉 '일어나시며'(*, 니차브)와 '서시도다'(*, 오메드)는 각각 분사형으로서 여호와께서 재판하시기 위하여 법정에 들어서시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해주고 있다(미 6:1 이하). 재판하시는 분으로서 여호와는 기소하는 검사요, 심판하는 판사며 집행자로 묘사된다(Delitzsch).
성 경: [사3:14]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ꃨ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 원문대로 읽으면 '그리고 너희, 너희가 먹어 치웠다. 포도원을'이다. 강조점이 '너희'(*, 아템)에 놓인다. 여기에 묘사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5장). 그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가꾸고 돌보는 자들로 방백들과 장로들, 즉 지도자들을 세우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도원을 지키라는 부름을 받은 그들에 의해 포도원이 침탈되고 황폐케 된 것이다. 병행하는 다음 구절에서 그들의 죄악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ꃨ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있도다 - '탈취한 물건'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게젤라트'(*)는 '가죽을 벗기다', '상처를 입히다'는 뜻의 동사 '가잘'(*)에서 파생된 말이다. 가난한 자를 착취, 약탈하는 것은 그의 피부를 벗기는 것과도 같은 끔찍한 악행이다.
성 경: [사3:15]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ꃨ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 백서들에 대한 지도자들의 범죄가 두 동사로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짓밟다'(*, 다카)는 '박살내다', '짓이기다'는 뜻이며, '맷돌질하다'(*, 타한)는 '잘게 부수다', '억압하다'는 뜻이다. 여기 보여진 광경은 너무나 선명하고 참혹해서 결코 잊을 수 없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땅에 가슴을 대고 엎드려 있으며 그 얼굴은 피와 먼지로 뒤범벅되어 있다. 그 얼굴을 관원의 발이 짓누르고 있다. 그가 발에 힘을 줄 때마다 가난한 자의 얼굴은 더욱더 땅에 파묻힌다. 백성들에 대한 지도자들의 횡포가 이와 같았다. 지도자들의 범죄는 대개 정치적 이유로 밝혀지지도 않고 묵과되기 쉽다. 그러나 공의로운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절대로 간과되지 않는다(잠 14:31;19:17;21:13;22:16, 22;28:27;29:7 참조).
성 경: [사3:16]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시온의 딸들 - 1:8의 '딸 시온'이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의인화시킨 것이라면, 본문의 '시온의 딸들'(*, 베노트 치욘)은 시온에 거주하는 부녀들을 가리킨다.
ꃨ 교만하여 - 교만의 주제가 2:11 이하에서 계속되고 있다. 남자들의 교만이 주로 권력과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나타난다면, 여자들의 교만은 주로 허영과 음란으로 나타난다.
ꃨ 늘인 목 - 고개를 숙이며 걷는 것이 겸양의 표시로 간주되듯이, 목을 늘여 머리를 하늘 높게 쳐들고 걷는 것은 교만의 표중으로 간주된다.
ꃨ 아기죽거려 행하며 - 아이들처럼 잰 걸음으로 걷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다. 루터(Luther)는 이것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걸었다'로 번역하였다.
성 경: [사3:17]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 '정수리'는 머리 꼭대기를 말한다. 교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 하나님은 딱지(*, 시파흐)가 생기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딱지는 '옴 따위의 피부병'(KJV), '앞머리를 깎아 미는 것'(G.R. Driver), '대머리가 되게 하는 것'(Alexander) 혹은 '비듬투성이가 된 불결한 모습'(Lange) 등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아름다움을 생명으로 하는 여성에게 이것은 치명적인 형벌이다.
성 경: [사3:18]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구체적 목록을 열거하기에 앞서 선지자는 이것들을 '티프에레트'(*)라는 한단어로 요약한다. 이 말은 '장식품' 혹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번역할 수 있다.
ꃨ 발목 고리(* -, 아카심). 이는 금, 은, 상아 고리로서 발목에 다는 것이다.
ꃨ 머리의 망사(*, 슈비심). 이는 머리에 덮은 그물 아래로 금박이나 은박실을 땋은 것으로, 대개 리본 장식을 매었다. 반달 장식(*, 사하로님). 목에 둘러서 가슴까지 내려오게 한 반달 모양의 금속 목걸이를 말한다(삿 8:21).
성 경: [사3:19]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면박(*, 레알로트) - 얼굴에 걸치는 값비싼 면사포를 말한다.
성 경: [사3:20]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발목 사슬(*, 체아도트) - 이는 '걷다'(*, 차아드)에서 파생된 것으로, 걸음걸이를 멋지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발목 고리에 연결하여 단 장신구이다.
ꃨ 호산부(*, 레하쉼) - '마술부리다'(*, 라하쉬)에서 파생된 것으로, 부적과 같은 말이다.
성 경: [사3:21]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지환(*, 타바오트) -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말한다.
ꃨ 코 고리(*, 니즈메 하아프) - 코를 뚫어 매다는 것으로, 동방에서 널리 사용된 장신구의 일종이다.
성 경: [사3:22]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예복(*, 마할라초트) - 특별한 때에만 입는 정장을 말한다.
ꃨ 겉옷(*, 마아타포트) - 옷 위에 걸쳐 입는 가운 비슷한 옷으로, 안에 입은 옷보다도 더 화려하였다.
성 경: [사3:23]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세마포 옷(*, 세디님) - 인도의 직물로 만든 베일이나 옷을 말한다(삿 14:12, 13, 잠 31:24).
ꃨ 너울(*, 레디딤) - 머리에서부터 겉옷 위로 둘러 전신을 가리는 넒은 망토를 말한다.
성 경: [사3:24]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을 때, 부유한 시온의 부녀들은 축적된 부(富)를 이용하여 온갖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식품들로 몸을 가꾸었음을 이상의 목록들에서 알 수 있다. 마땅히 가져야할 내면의 덕(벧전 3:3, 4 참조)은 가꾸지 않고 오직 외모를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된 그들에게 여호와의 진노는 다음과 같이, 즉 먼저 사치스러운 것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누추하고 비참한 것들을 들여놓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곧 없어질 좋은 것들과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나쁜 것들의 대조가 '대신에'(*, 타하트)라는 전치사에 의해 짝지워진다. '타하트'는 본절에 모두 5번 나온다. '자자한 흔적'(*, 키)이란 노예 혹은 죄인의 표시로서 불로 낙인한 것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 열거된 사항들은 모두 전쟁과 관련된다. 즉, '상처입고-포로로 잡히고-슬픔으로 머리를 뜯고-국가적 재난에 직면해 베옷을 입고-끝내는 노예가 된다.' 시온의 부녀들이 누렸던 한때의 쾌락과 허용은 전쟁과 더불어 일순간에 재난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성 경: [사3:25]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너희 장정(壯丁)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戰亂)에 망할 것이며 - 앞절에서 암시되었던 상황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전쟁에서 읽은 것은 장식품들만이 아니다. 그들의 남편이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 자신은 과부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불행 이외에, 나라 전체가 치욕적인 패배 속에 함몰되리라는 내용도 함축되어 있다.
성 경: [사3:26]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 성문은 백성들의 삶의 중심지이다. 한때 웃음소리 드높았던 그곳이 그날에는 통곡소리로 가득할 것이다. 한때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던 그곳은 그날에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울부짖음만 스산하게 울려 퍼지는 텅 빈 공간이 될 것이다(14:31;렘 14:2;애 1:4).
성 경: [사3:4]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아이들로...적자들로...하시리니 - '아이들'(*, 네아림)과 '적자들'(* -, 타알룰림)은 병행하는 동의어이다. 이 명사들은 비인격적인 추상 명사로서 나이의 측면에서라기보다는 그 성격적 측면에서 '어린 것들'이라고 호칭된다. 따라서 이 말은 '유치함', '치졸함'(Delitzsch) 혹은 '무책임성'(Leupold)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이 20세에 왕위에 오른 아하스를 예언한 것(왕하 16:2)이라고 하기도 하고(Ewald, Hitzig, Knobel), 혹은 이사야 선지자 이후의 일련의 사악한 왕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Lowth). 그러나 12절의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말은 특정한 인물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적자'라고 번역된 '타알룰림'이 '욕망을 만족시키다', '자기 기분을 채우다'는 뜻을 가진 '히트알렐'(*)에서 파생되었음을 보더라도, '적자의 통치'라는 것은 '법과 공의도 없이 오직 통치자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잔인성을 만끽하는 공포 정치'임이 분명하다. 5절 이하에서는 이러한 통치가 가져오는 비극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성 경: [사3:5]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 먼저 수평적 측면에서 극단적인 이기심과 불신으로 말미암는 인간 관계의 파탄이 초래된다. 그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특징지워진다.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사는 이웃은 각기 돌보고 서로 즐거워해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서로 학대하고 잔해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ꃨ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 수직적 측면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권위의 상실이다. 그것은 하극상으로 특정지워진다. 고대 사회에서 노인은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다(레 19:32;신 28:50). 마땅히 있어야 할 공경과 우러름이 사라진 사회는 더 이상 질서있는 사회, 틀을 갖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총체적으로 '무정부 상태'로 파악될 수 있다.
성 경: [사3:6]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선지자는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한 토막의 짧은 삽화를 소개한다. 그것은 남들보다 점잖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받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ꃨ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 이 말은 앞의 '우리 관장이 되어'에 병행하는 말이다. 그 뜻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당신의 책임하에 수습해 달라'는 것이다. '손'(*, 야데카)은 권위를 상징하는 낱말이다(창 16:9;출 18:10).
성 경: [사3:7]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 문자적인 뜻은 '나는 싸매는 자가 되지 않겠다'이다. '고치는 자'라고 번역된 '호베쉬'(*)는 '싸매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관장이 되어 달라고 초청받은 이의 이러한 거절에 대해 어떤 이들은 '나는 하지 않겠다'는 항의와 반감의 표현이라고도 하고(Lowth, Knobel, Alexander) 혹은 '나는 할 수 없다'는 무능력의 고백이라고 보기도 한다(Targum, De Wette, Leupold, Delitzsch).
성 경: [사3:8]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 '멸망하였고'로 번역된 '카쉘라'(*)는 '흔들거리다', '걸려 넘어지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엎드러졌다'로 번역된 '나팔'(*)은 '떨어지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예루살렘이 비틀거리고 유다가 떨어졌다'가 된다. 선지자가 여기서 완료 시제를 쓴 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확실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예언적 완료 시제).
ꃨ 그 영광의 눈을 촉범(觸犯)하였음이라 - '촉범하였음이라'(*, 라므로트)는 말은 '항거하다', '대들다'는 뜻을 가진 동사 '마라'(*)에서 연유하였다(시 78:17). '영광의 눈'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에서 뿜어 나오는 신령한 빛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은 종종 '눈'으로 비유된다(욥 25:5 참조).
성 경: [사3:9]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소돔과 같으니 - '그들의 안색'(*, 하카라트 페네헴)은 탈굼역과 시리아 역본을 따른 몇몇 주석가들에 의해 '한 쪽편을 들어 낯을 보아주는 당파적 편애'로 해석되기도 한다(Clericus, Hitzig). 그들은 신 1:17;16:19;잠 24:23;28:21 등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에서 그 근거를 취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어떤 특수한 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기보다는 병행하는 구절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죄악이 너무 깊어서 얼굴에까지 각인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Gesenius, Calvin, Delitzsch 등). 앞절에서 묘사된 그들의 죄는 뼈 속까지 파고들어서 영혼마저 마비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며 굳이 죄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자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성 경: [사4:1]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 이전에 고운 얼굴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었던 여자들이 더할 나위 없는 비참함으로 남자를 구걸하는 지경에까지 떨어질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일곱'은 완전수로서 허다하게 많은 여자들이 한 남자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본문의 한 남자는 전쟁에서 죽지 않고 생존한 사람이다. 그에게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애걸한다.
ꃨ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 우리를 먹여 달라, 입혀 달라 조르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본처가 아닌 첩이라 할지라도 부양받을 권리를 지녔다. 그러나 결혼해 달라고 사정하는 여인들은 그러한 당연한 권리조차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ꃨ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 그들의 소원은 한 가지뿐이다. 제발 결혼만 해달라는 것이며 '...의 아내'라고 불리우게 해 달라는 것이다(창 12:17, '아브람의 아내 사래';창 46:19, '야곱의 아내 라헬').
ꃨ 우리로 수치를 면케하라 - 그들이 이처럼 결혼하기를 구걸하는 것은 수치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수치는 과부의 수치요(54:4), 또한 자식을 갖지 못한 수치이다(창 30:23). 시온의 부녀들의 교만과 허영은 끝내 수치를 면케 해달라고 비는 굴욕으로 마감된다.
성 경: [사4:2]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그 날에(*, 바욤 하후) - 앞절과 동일한 '그 날에'라는 말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그러나 내용은 정반대이다. 1절의 '그 날'이 심판의 날이요 수치의 날이며 서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날이라면, 본문의 '그 날'은 회복의 날이요 영광의 날이며 새로운 싹이 돋는 날이라고 할 것이다.
ꃨ 여호와의 싹이...그 땅의 소산은 - '여호와의 싹'이 메시야를 가리킨다고 보는 점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일치한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미 시작하신 구원 운동을 비유하는 것이며, 그 운동의 일직선상에서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Leupold). '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체마흐'(*)는 식물의 자라남이 함축하고 있는 신선한 생명력과 활력을 나타내는 말로서, 우리말의 '싹', '가지'보다 더 포괄적이다(창 19:25;렘 23:5;겔 16:7;호 8:7;슷 3:8). 때로 망각되고 때로 은폐되었던 여호와의 싹, 즉 여호와의 구속 사역은 질긴 생명력으로 엄동(嚴冬)의 땅을 뚫고 솟아올라 그 가냘픈 듯이 보이는 싹을 틔운다. 어떤 주석가들은 병행하는 구절에서 이와 동의어로 쓰인 '땅의 소산'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이중적 기원을 읽기도 한다(Vitringa, Hendewerk). 곧 그것이 '여호와의 싹'인 한에서 신적인 기원을, 다른 한편 그것이 '땅의 소산'인 한에서 인간적인 기원을 묘사한다는 것이다(롬 1:3, 4 참조). 그러나 선지자가 그 같은 것을 말하고자 의도하였는지는 의문이다. 계속해서 선지자는 거듭되는 4개의 명사로 여호와의 싹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ꃨ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 개역 성경에는 '아름답다'와 '영화롭다'로만 표현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비슷한 뜻을 가진 4개의 명사, 즉 '체비'(*), '카보드'(*), '가온'(*), '티프에레트'(*)로 표현되어 있다. '체비'는 광채 혹은 영광을 뜻하며, '카보드'는 명예와 존귀 혹은 영광을 뜻하며, '가온'은 고상함과 위엄을 뜻하며, '티프에레트'는 장식 혹은 광채를 뜻한다. 이처럼 '아름다움'을 뜻하는 4개의 명사를 병렬시킴으로써 선지자는 여호와의 싹이 나타내는 비할 데 없는 영광과 그 아름다움을 최고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아름다움이 모든 이들에게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메시야의 영광이 믿음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만 밝히 보이듯이, 여호와의 싹과 땅의 소산으로 비유된 여호와의 구원 운동이 지니는 지극한 아름다움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에게만 인식되는 것이다.
ꃨ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 - 이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며, 2:2-4:1에 묘사된 심판에서 생존한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Leupold). 이들에 대한 묘사가 다음절에서 계속된다.
성 경: [사4:3]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 '시온'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집을 가리키는 동일한 이름이다(2:3). '남아 있는 자'(*, 하니쉬아르)와 '머물러 있는 자'(*, 하노타르)는 동의어로서 둘 다 집합적인 의미를 갖는 단수로 쓰였다(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n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고 칭함을 얻으리니 - '녹명된'이란 표현은 '생명의 책'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출 32:32;시 69:28;단 12:1;말 3:16;눅 10:20;빌 4:3;계 3:5;13:8;17:8;20:12, 15;21:27). 고대의 도성(都城)들은 그 도성의 시민으로 인정된 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한 시민 인명록(人名錄)을 보존하였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고 혹은 지워지는 것은 공동체의 삶가가 관련하여 개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종말론적으로 표상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요 세말의 구원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차이는 단지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느냐 안하느냐를 넘어서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의 문제로까지 부각되는 것이다(행 13:38 참조). 따라서 이들에게 '거룩'(*, 카도쉬)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부여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화하는 심판을 통해서 더러움의 때를 벗고 순결한 원상태로 회복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사4:4]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 '루아흐'(*)는 '영' 혹은 '바람'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영은 땅 위를 휩쓰는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놀라운 힘과 권능으로써 더러운 모든 것들을 제거하신다. 그 앞에서 악인이 징벌을 당하기 때문에 그것은 '심판의 영'이라 불리우며, 또한 불로 태움같이 악을 철저히 제거하기 때문에 그것은 '소멸의 영'이라 불리운다(Delitzsch). 이러한 씻음이 선행된 뒤에야 이스라엘은 비로소 본래의 '거룩한 나라'(출 19:6)로 회복될 것이다.
ꃨ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정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 '시온의 딸들'의 죄악을 선지자는 '더러움'으로 표현하고, '예루살렘'(의 남자들)의 죄악을 '피'로 표현한다. 남자들, 특히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였으니, 그들의 죄악을 '피'(*, 데메)라 불러 마땅하다. 여자들은 허영과 사치속에서 음욕을 찾아 헐떡였으니, 그들의 죄악을 '더러움'(*, 초아트)이라 불러 당연하다. '오물(혹은 배설물)'을 뜻하는 '초아트'는 그들의 도덕적 불결함을 드러내고, '피'는 그들의 법적인 살인 행위를 고발한다(Delitzsch).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온전히 씻겨지며, 청결케 될 날이 온다. 그날은 여호와의 구원의 날이다. '씻으시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하츠'(*)는 '몸을 정결케 한다'는 신체적 의미 이외에도 법적으로 '사면되다', '깨끗케 되다'는 의미로 내포하고 있다.
성 경: [사4:5]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만드시고 -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그리고 창조하실 것이다(*, 우바라), 여호와께서. 시온 산의 모든 장소(*, 메콘) 위에와 그녀의 집회(*, 미크라에하)위에...' 시온 산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여호와의 전의 산'(2:2)일 뿐 아니라 거룩한 백성들이 모여서 축제를 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여호와는 과거 광야 유랑 때 시내 산에서 보였던 영광을 훨씬 능가하는 새로운 영광을 창조하신다. 이 영광으로 인해 '시온 산 구석구석이 찬란하게 빛날 것'(Calvin)이며, 이 영광의 빛으로 인해 시온 산은 모든 산 위에 뛰어나 굳게 서며 만방이 그리로 몰려들게 될 것이다(2:2).
ꃨ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 - 선지자는 독자의 시선을 멀리 광야 유랑 시대로 인도한다. 그때 여호와는 낮의 구름과 밤의 불로써 출애굽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해주셨던 것이다(출 13:21, 22). 낮의 구름과 밤의 불은 여호와의 임재와 보호의 표징이었다. 구름과 화염 사이에 놓여 있는 '연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델리취(Delitzsch)는 '구름과 연기'를 중음법(重音法)으로 파악한다. 즉, 형체는 구름이면서 실체는 연기로 되어 있어 일반적인 구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구름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이가 주석가들은 불이 없이는 연기가 생길 수 없다는 점을 들어 '화염'에 연결시킨다(70인역, Vitringa, Lange, Hengstenberg). 공동 번역은 본문을 이렇게 풀이하였다: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솟아오르는 연기와 환한 불길.'
ꃨ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 '천막'(*, 후파)은 덮여 있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시온 산위에 구름 형태로, 연기와 화염의 빛의 형태로 떠 있게 된다.
성 경: [사4:6]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또 천막이 있어서...되리라 - 본절에 나오는 낮의 더위와 풍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적대적인 세력들에 대한 상징어이다. 이들에 맞서 그늘을 지어주고 숨을 곳을 만들어 주는 '천막'은 '구름'(Lowth)이나 '시온 산'(Delitzsch)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으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Gesenius, Gray).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성도의 그늘이며 피난처가 되시는 것이다(시 91:1):"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6, 7).
성 경: [사5:1]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노래하리라'로 시작한다. 그 노래는 '살아하는 자가 소유하고 있는 포도원'에 관한 것이다. 남자 친구 사이에 맺어진 깊은 우정을 가리키는 '야디드'(*)와 '도드'(*)가 본문에서는 동일하게 '사랑하는 자'로 번역되었다. 선지자가 자신의 벗이라고 부른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일컫는 친숙한 비유어이다(3:14;시 80:8).
성 경: [사5:2]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 포도원에 기울인 주인의 정성과 수고가 연이어 기술된다. 그는 좋은 장소를 선택하였을 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경작하였다. '땅을 파다'(*, 아자크)는 곡괭이로 땅을 푸석푸석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구약 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온다. 그 다음 단계는 여기저기 박혀 있는 다돌들을 제거하는(*, 사칼) 것이다. '사칼' 동사는 '아자크'와 더불어 피엘 동사로 쓰여서 '돌을 옮기다'는 뜻을 갖는다.
ꃨ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 이처럼 할 수 있는 모든 수고를 다했으니 주인으로서는 좋은 포도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즉 '들포도'(*, 베우쉼)를 낸 것이다. '베우쉼'은 '악취를 풍기다'는 뜻의 '바아쉬'(*)에서 파생된 명사로, 조악하고 쓴 야생 포도를 가리킨다(라틴어:Labrusca). 70인역(LXX)은 이것을 '가시나무(혹은 엉겅퀴)'(*, 아칸다스)로 해석했다. 여기에서 선지자의 노래가 끝나고 다음절에 선지자의 친구이며 포도원 주인인 여호와의 노래가 1인칭으로 이어진다.
성 경: [사5:3]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 '이제'(*, 아타)는 현재 시점을 말한다기보다는 '사정이 이와 같으니'라는 뜻의 논리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Alexander). 예루살렘과 유다 주민들은 판단하는 자로서 소환된다. 그들은(칼빈(Calvin)의 주장처럼) 그들 자신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낯선 사람과 그의 포도원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소환된 것이다. 그들은 아직 이 이야기 속에서 말해지고 있는 대상이 자신들임을 알지 못한다. 구약에 있어서 이와 동일한 경우는 삼하 12:1-6에 나오며, 신약에서는 마 21:33-41에 나온다. 두 경우 모두 처음에는 이야기 속의 대상들이 자기 자신임을 모르고 판단하다가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판단을 구하는 내용이 다음절에서 의문형(interrogation)으로 제시된다.
성 경: [사5:4]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있었으랴 - 본문과 다음절('이제 내가') 사이에는 휴지(休止)가 있어서, 마치 청중들이 주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포도원을 위하여는 어떠한 변명도 주어질 수 없음을 침묵으로써 시인하는 듯하다(Gray). 그러나 주인의 단호한 말이 이 침묵을 깨뜨린다.
성 경: [사5:5]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그 울타리를 걷어...그 담을 헐어 짓밝히게 할 것이요 - 주인의 진노는 먼저 포도원을 보호하고 있던 울타리와 담을 허물어뜨리는 것으로 표출된다. 포도원은 대개 '가시 울타리'(*, 메수카트) 혹은 '돌담벽'(*, 가데르)으로 둘렀으며 때로 완전성을 기하기 위하여 울타리와 돌담벽을 이중으로 두르는 경우도 있었다(G. Rawlinson). 이러한 울타리와 돌담이 제거될 때, 포도원이 사람과 짐승에 의해 '짓밟히고 먹힘을 당할 것임'은 명약 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성 경: [사5:6]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 주인에 의해 더 이상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포도원은 자연 황폐해질 수 밖에 없다(잠 24:30, 31). '질려와 형극'(*, 솨마르 와솨이트)은 '가시덤불과 가시'란 뜻이다. '가시덤불'은 '황무한 땅'에 어울린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저주받은 땅, 즉 실락원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듯이(창 3:18),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아 황무하게 된 포도원에 가시덤불만 무성하다. 가시나무는 종종 인간의 여러 죄악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 경: [사5:7]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 이것은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2, 4절)에 대한 설명이다. 여호와께서 기대하신 좋은 포도는 '공평'(*, 미쉬파트)과 '의로움'(*, 체다카)이었다(1:21, 27). 그러나 정작 맺힌 것은 '포학'(*, 미스파흐)과 '울부짖음'(*, 체아카)이었다. '미쉬파트'와 '미스파흐', 그리고 '체다카'와 '체아카'는 언뜻 들어서는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발음이 유사하다. 이런 유사성을 이용하여 선지자는 속내용은 변질되었음에도 겉모양만 비슷한 이스라엘의 범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1:22). '미쉬파트'와 대조 '체다카'와 대조되는 '미스파흐'는 '피흘림', '억압'을 뜻하며 '체다카'와 대조되는 '체아카'는 '억눌린 자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출 3:9)를 뜻한다. 이 억압과 부르짖음이 여섯 번의 '화 있을진저'(8, 11, 18, 20, 21, 22절) 모음 속에서 상세하게 묘사된다.
성 경: [사5:8]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가옥에 가옥을 연(連)하며 전토(田土)에 전토를 더하여 - '화 있을진저'(*, 호)로 시작되는 글모음 중 첫 번째는 탐욕스런 부자들에 대한 것이다. '토지'와 '가옥'은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요 생존의 근거였다(레 25:33). 하나님의 율법은 토지의 매매를 금지하며 설혹 주인이 바뀐 토지라 할지라도 7년 안식년다을 일곱 번째 맞는 그 다음 해, 즉 50년째(회년)가 되면 원주인에게 다시 귀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25장). 이처럼 율법 속에 명시된 토지 보유의 원리와 경제 정의를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가옥과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자신들의 부(富)를 축적하는 행위는 율법에 대한 반역이요 공동체의 기틀을 파괴하는 범죄 행위라고 말해 지나침이 없다(왕상 21:2;욥 22:8;미 2:2).
성 경: [사5:9]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 '정녕히'로 번역된 '임-로'(*)는 무자적으로 '...않는다면'(if-not)이라고 번역되는데, 이것은 부정적인 어휘를 써서 가장 강력한 확신을 전달하는 고대의 서약 형식에 일치하는 것이다(민 14:23;시 95:11).
성 경: [사5:10]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열흘같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바트가 나겠고...한 에바가 나리라 - 여호와께서 비를 막으시면(6절) 농작물이 자랄 수 없고 그것은 기근이라는 무서운 재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제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집에서 사는 부자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머물 수 없을 것이다. '열흘갈이'는 한 쌍의 황소가 하루 동안 밭을 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를 말한다(Delitzsch, Gray). '바트'(*)는 액체의 측량 단위로서, 건조한 곡식을 재는 '에바'(*, 에파)와 일치한다. 에스겔에 의하면, 10에바는 한 호멜에 해당된다(겔 45:11). '호멜'은 왕조 시대 이후에 '고르'(*, 코르)라고 불리워졌으며, 그 용량은 약 220리터 정도이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본문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의 징벌의 결과로 밭은 씨를 뿌린 것의 1/10에 해당하는 수확밖에 거두지 못하며 포도원에서도 포도주가 거의 산출되지 못할 것이다'(Calvin).
성 경: [사5:11]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밤이 깊도록 머물러...화 있을진저 - '화 있을 진저'(*, 호)로 시작되는 글모음 중 두 번째는 탐식가들과 그들의 쾌락 추구에 관한 것이다. 8절에 묘사된 부자들의 풍요로움은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는 술자리로 이어진다. 여기서 '독주'(*, 쉐카르)와 '포도주'(*, 야인)가 병행되고 있는데, 후자가 순수한 포도주라면 전자는 석류(아 8:2)와 사과, 꿀 등을 섞은 혼합 포도주로서 알콜 도수가 훨씬 더 높은 것이다. 술에 취해 세월을 허비하는 방탕함은-사도 바울에 의하면-악한 세상의 특징이다(엡 5:16, 18).
성 경: [사5:12]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생각지 아니하는도다 - '여호와의 행하심'(*, 포알 야훼)은 '그의 손으로 하신 일'과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역사속에서 활동하신 일, 특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힘들여 수고하심과 일하심을 가리킨다(시 92:4). '포알'(*)에는 '노동', '일'이라는 뜻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을 삼고 육체의 향락에 도취된 자들에게 여호와의 일, 즉 영적인 역사는 한낱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주의 행하심에 관심도 아니 갖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도 않는 소행은 어리석은 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엡 5:17).
성 경: [사5:13]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사로잡힐 것이요...주릴 것이요...목마를 것이며 - 현재의 열락(悅樂)에 대조되는 미래의 고통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눅 6:25)와 일치한다. 본절에 나오는 '귀한 자'는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영광'이니, 백성들로부터 높임을 받는 자, 즉 사회의 지도급 인사를 말하며, '무리'는 그들과 함께 죄악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킨다. 예언 성취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해 과거 시제로 묘사된 '사로잡힘'과 '굶주림'과 '목마름'은 그들의 '무지함'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이때 그 무지는 단순한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여호와의 일에 대한 악의적인 무관심(12절)이라고 할 것이다.
성 경: [사5:14]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13절과 마찬가지로 '이러므로'(*, 라켄)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는 앞절에 묘사된 징벌의 결과, 이들이 어느 정도까지 몰락할 것인가를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함이다. 뒤따르는 동사들 역시 13절과 마찬가지로 과거 시제로 쓰여서 예언 성취의 확실함을 더해주고 있다. '음부'에 관해서는 삼상 2:1-10 주제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陰俯) 개념'을 참조하라. 선지자에 의하면, 음부는 탐욕스러운 괴물과 같아서 끝없는 욕망으로 한껏 입을 벌려 죄인들을 삼킨다(합 2:5). 삼켜질 대상들이 뒤에 열거된다.
ꃨ 그들의 호와로움과...그 중에서 연락(宴樂)하는 자 - '그들의 호와로움'(*, 하다라)은 직역하면 '그녀의 장식'이니, 곧 예루살렘의 허영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소란스러운 무리'(*, 하모나)와 그들이 내뿜는 '모든 소음'(*, 쉐오나), 그리고 '환락'(*, 알레즈)들이 넓게 열린 음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이는 사악한 자들의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진다고 한 고라 자손의 노래(시 49:14)를 연상시킨다(Delitzsch).
성 경: [사5:15,16]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이러한 징벌의 결과로 이루어질 궁극적인 미래의 모습이 두 개의 대립 개념-인간은 낮아지고(15절) 여호와는 높임을 받는다(16절)-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주제는 2장에서부터 계속 발전된 것이다.
ꃨ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 '공평'과 '의'에 대하여는 1:21, 27을 보라. 만군의 여호와, 즉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평과 의 가운에서 당신을 가장 잘 드러내시며, 당신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도 바로 공평과 의 가운데서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일찍이 공평과 의 가운데서 행하였더라면 그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이 온 세계에 거룩하신 분으로 높임을 받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공평과 의 대신 포학과 부르짖음으로 응수할 뿐이었다(7절). 이에 하나님은 비뚤어진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 심판의 엄정함과 죄를 척결하시는 의로움을 통해서 교만의 극치에까지 높아진 이스라엘을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던지시며(14절), 마침내 당신 자신을 온 세계에 거룩하신 분으로 친히 증거하시려는 것이다.
성 경: [사5:17]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草場)에 있는 것같이 먹을 것이요 - 본문은 주석가들에 따라 그 해석이 크게 둘로 나뉜다. (1) 약속으로 보는 경우:'어린 양들(의인)이 살진 자들(부유한 죄인)의 소유를 대신 차지하게 될 것이다'(Targum, Calvin, Vitringa). (2) 경고로 보는 경우:'거룩한 땅이 이방인들의 수중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Gill), 혹은 '부자의 소유가 가난한 자의 수중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Hendewerk), 혹은 '땅 그 자체가 파멸될 것이다'(Michaelis, Lowth).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 바람직하다.
성 경: [사5:18]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화 있을진저 - 세 번째 화는 여호와의 행하심을 믿지 아니하므로(12절) 오히려 대담하고 뻔뻔하게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선지자는 이들을 굵은 밧줄로 마차를 끄는 모습에 비유한다. '거짓의 끈'은 죄인들이 그들의 죄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교묘한 궤변이나 그릇된 노리를 가리킨다(Vitringa, Calvin). '끈다'로 번역된 '마솨크'(*)는 그 외에 '견고하게 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문의 의미는 자명하다. 즉, 거짓된 지식과 언변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불법을 합법화시킴으로써 악을 행함에 있어서 더욱 대담해진다는 것이다. 그 행위의 대담함과 그 논리의 견고함은 후반부의 '수레 줄'에서 한층 강화된 비유적 표현으로 반복된다. '수레 줄' 즉 마차의 밧줄은 그들이 무시하고 조롱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만 끊어지게 될 것이다.
성 경: [사5:19]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 이들이 앞절에 묘사된 것과 같은 행위를 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임하지 않는다'는 완악한 신념이 깔려 있다.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제발 하나님으로 하여금 지체치 말고 신속하게 움직이게 하여 우리 눈으로 그가 행하신다고 아득한 옛날부터 약속해 오신 그 심판을 보게 하라. 그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킬 것 아니냐 ?' 이런 조롱은 최고의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미 죄악으로 굳어져버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느껴질 리가 없다. 본문과 관련하여 벧후 3:3-5, 9을 참조하라.
성 경: [사5:20]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화 있을진저 - 네 번째 화는 도덕을 파괴하고 가치 전도(顚倒)에 앞장 서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자기의 잘못을 감추고 오히려 범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채택된 거짓 논리하에서는 선과 악의 구별은 철폐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선과 악을 규정한 객관적, 초월적인 규범이 더 이상 존재치 않으며, 있다면 언제나 선한 그들의 행위 밖에 없다. 이러한 범죄는 지도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고질적인 질병들이다. 혹자는 본문을 23절과 관련하여 불의한 사법부에 적용시키나(Gesenius, Hitzig), 유다 지도자 일반의 범죄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광명'과 '단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상징하며(시 19:8, 10), '흑암'(시 112:4;잠 2:13;전 2:13;마 6:23) '쓴 것'(민 5:18;신 32:32;렘 2:19;4:18;약 3:11)은 악의 상징어로 쓰인다.
성 경: [사5:21]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화 있을 진저 - 다섯 번째 화는 자기 자신을 지혜자로 자처하는 교만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자기 중심적 논리의 귀결은 언제나 교만이며, 교만은 악의 완성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위의 다른 권위를 인정치 않는다. 따라서 어떠한 훈계나 경고도 그에게는 들리지 않으며 교만은 이런 자기 폐쇄성을 그 특질로 삼는다(잠 1:7;12:1).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이들은 어리석음의 전형일 뿐이다. 참된 지혜는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주어진다(잠 1:7;3:5;9:10). 한편, 본문에 언급된 '지혜'와 '명철'은 위대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들로 간주되었다(11:2;창 41:39;삼상 16:18).
성 경: [사5:22,23]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화는 술에 젖은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범죄한 유다 지도자들의 한 전형으로 그려졌다.
ꃨ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은 - 선지자의 어조는 풍자적이다. 선지자는 그들을 용감하고 힘이 넘치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용감함은 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포도주를 마시기 위한 것이며, 그 유력함은 공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독주를 빚기 위한 것이다. '포도주'와 '독주'에 관하여는 11절을 참조하라.
성 경: [사5:24]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이로 인하여'(*, 라켄)라는 접속사에 유도되는 형벌 내용은 앞의 네 가지 화(18, 20, 21, 22절)에 대한 것이다. 자기 중심적 아집에 사로잡혀 선악을 혼동하고 어떠한 훈계도 거부한 채 교묘한 논리를 내세워 스스로를 정당화하기에 바쁜 유다 지도자들은, 당장은 권세가 있고 힘있어 보일지 모르나 선지자의 눈에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풀 같고 나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벧전 1:24). 불 같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들은 마치 땅 속에서 썩어가는 뿌리와 먼지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꽃마냥 그렇게 허무하게 소멸되고 말 것이다.
ꃨ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멸시하였음이라 - 그들은 실수에 의해서 한두 가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 자체를 무시하고 적대했다. 말하자면 그들의 범죄는 총체적이다.
성 경: [사5:25]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 본문은 몇몇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대로(Alexander, Calvin, Leupold)과거에 내려진 하나님의 형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 여기 쓰인 동사들은 예언적 과거 시제로서 임박한 미래의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선지자는 24절에 시적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서 임할 것인지를 말하려 한다. 본문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분노가 그 백성들 안에서 불탈 것이며'이다. '분노'로 번역된 '아프'(*)는 본래는 '(숨쉬는) 콧구멍'을 의미하는데, 화가 극에 달하여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모습에서 연유하여 '분노'란 뜻을 갖게 된 것이다.
ꃨ 산들은 진종하며 - 본문을 과거로 해석하는 이들은 이 말이 웃히야 왕 시대에 일어난 지진(암 1:1)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Leupold). 그러나 이 말은 여호와의 분노와 심판의 격력함을 나타내는 비유 언어로, 바로 앞에 나오는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는 표현과 연관된 것이다(Delitzsch).
성 경: [사5:26]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실 것이라 - 앗수르(혹은 바벨론) 군대의 침공을 가리킨다. '먼 나라'라는 표현은 신 28:49 이하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들은 땅 끝에서 사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니(39:3), 당시 사람들에게 유브라데 강은 땅 끝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슥 9:10 참조).
ꃨ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 올 것이로되 - 먼 곳에서부터 점차 가까이 달려오는 그들의 모습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보라'라는 감탄사에 이어 두 개의 부사로 집약되고 있다:'빠르게'(*, 메하라)와 '날렵하게'(*, 칼).
성 경: [사5:27]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신들메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 혹자는 이 구절이 밤에 휴식을 취할 때에도 허리띠와 신발 끈을 풀어 놓지 않을 만큼 전쟁에 임하는 각오가 대단하다는 식으로 해석한다(Henderson, Delitzsch). 그러나 '끊어지다'(*, 니타크)는 동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행진에 방해를 주는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기본적인 군사 장비를 철저하게 점검했음을 말하는 것이다(Leupold).
성 경: [사5:28]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들의 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기어졌으며 - 상황은 점점 더 급박해진다. 질서 정연하게 대오(隊伍)를 지어 먼 곳으로부터 달려온 그들은 이제 유다를 향한 모든 전쟁 준비를 다 끝마쳤다. 고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무기로 꼽히는 화살과 병거들은 출전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목표물을 향해 활은 '당기어졌다'(*, 데루코트). 이는 직역하면 '활을 발로 밟았다'이다. 고대인들이 전쟁에서 사용했던 강궁(强弓)은 활이 너무 커서 발로 밟아야만 구부릴 수 있었다(대상 5:18;시 7:13;11:2).
성 경: [사5:29]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 부르짖는 것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 함성과 더불어 드디어 전쟁은 시작된다. 고대인의 전쟁은 함성과 함께 시작되었다(시 74:4;렘 2:15). 선지자의 귀에 그 소리는 마치 암사자와 어린 사자의 포효소리로 들린다. '어린 사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케피림'(*)은 젖을 떼고 어미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먹이를 잡을 줄 아는 젊은 사자를 가리킨다. '부르짖음'과 '소리 지름'에 다같이 사용된 '솨아그'(*)는 사자가 먹이를 찾을 때의 포효소리를 뜻한다.
성 경: [사5:30]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어두우리라 - 위아래를 둘러보아도 도피할 데도, 도움을 청할 데도 없다(Leupold). '바라보다'로 번역된 '나바트'(*)는 '기대를 품고 바라보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땅을 바라봄'은 '하늘을 바라봄'과 대조되는 시적 표현이다(8:22). 보이는 것은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두움과 고통뿐이다. 위를 쳐다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고통과 결부된 흑암은 이스라엘의 절망을 표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야말로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20절) 이들에게 참으로 적절한 심판 아닌가 !
성 경: [사6:1]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 이 말이 왕이 죽기 전을 가리키는지 혹은 죽은 후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왕이 살아 있을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Gray). 웃시야 왕의 치세 때 유다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대하 26장) 백성들은 태평 성대(太平聖代)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번영의 이면에는 종교적 부패의 상처가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정규적인 제사는 있었으나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식어갔으며 향락과 사치 풍조가 더욱 번져갔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한편,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B.C. 745-727년)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근동 지방이 긴장에 휩싸이는 등 국제 정세의 흐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런 때에 선지자는 국가적 위기를 직감하고 성전을 찾아갔다.
ꃨ 내가 본즉 - 이 말이 선지자가 실제로 눈을 뜨고 보았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요 4:24). 그러면 선지자가 상상적이고 주관적인 자신의 내적 경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는가?(Gray, Knobel).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 경우에는 계시의 진실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양식에서 매우 특별한 경험, 즉 내적인 영혼의 눈으로 초자연적인 상(像)을 인식했음을 말할 것이다(G.Vos, Delitzsch).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느냐'이다.
ꃨ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 환상 속에서 선지자는 지상의 예루살렘으로부터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의 성전으로 옮겨진다. 선지자가 본,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다. '높이 들린 보좌'는 아마도 여섯 계단의 꼭대기에 놓여져 있는 솔로몬의 보좌에서 연상된 듯하다(왕상 10:18).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의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쉼없이 계속된다.
ꃨ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왕들은 보통 흘러 내리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찰 만큼 방대했으니 여기서 지상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왕되신 하나님의 장엄하신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Calvin). '성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칼'(*)은 웅장하게 건축된 궁전(잠 30:28;단 1:4) 혹은 여호와의 성전(왕하 24:13;시 29:9)을 뜻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이사야가 본 이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다름 아니다(요 12:41). 이 영광은 죄많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비밀한 것이어서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긴 옷자락으로 감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주의 영광에 있어서는 그 감추임조차도 영광이다. 그 영광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고 오직 공중나는 스랍들만 그를 찬미할 뿐이다.
성 경: [사6:2]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 '모셔 섰다'(*, 오메딤 밈마알 로)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위에 섰다'이다. 이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나타낸다(왕상 22:19;욥 1:6;슥 6:5). '스랍들'(*, 세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세라핌'은 복수형으로서 그 단수는 '뱀'을 뜻하는 '사라프'(*)이다(14:29;30:6;민 21:6,8;신 8:15). '사라프'는 본래 '태우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불타는 모습이 기어가는 뱀의 모양과 흡사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세라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ꃨ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그 둘로는...그 둘로는 날며 -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과 발이라는 묘사에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형상을 한 듯하다.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주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먼지에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 불경건성 때문이다. 남은 두 날개만이 본래의 목적대로 날기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Leupold).
성 경: [사6:3]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 '서로'(*, 제 엘 제)라는 말은 스랍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노래 부르는 방식(교송)을 나타낸다. '창화하다'(*, 카라)는 목소리를 드높여 찬양함을 뜻한다. 천상의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들로는 욥 38:7;시 29:1,2;계 4:8;7:11 등이 있다.
ꃨ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 스랍들이 부른 찬양의 주제는 만군의 여호와의 '거룩'(*, 카도쉬)과 '영광'(*, 카보드)이었다. '거룩'이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신적 존재의 본질이며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아니하는 불가해한 신비를 말하는 것이라면, '영광'은 역사와 자연 특히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한 신적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민 14:21;시 57:5,11;72:19). 다시 말하면, '거룩'은 인간과 구별되는 신적 본성으로서 은폐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영광'은 인간을 위한 신적 현현(顯現)으로서 계시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이래 기독 교회는 세 번 반복된 '거룩'이란 말에서 삼위 일체의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같은 반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최고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렘 7:4;겔 21:27). 칼빈(Calvin)조차도 이 구절에서 삼위 일체의 교의(敎義)를 인용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아니하였다.
성 경: [사6:4]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 여호와가 강림하실 때 시내 산이 진동했던 것처럼(출 19:18) 여호와의 거룩과 영광을 찬미하는 스랍들의 드높은 노랫소리에 선지자가 서 있는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다고 하니, 이는 스랍들의 찬양이 얼마나 힘있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ꃨ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연기는 스랍들의 찬양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 연기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한다(4:5;왕상 8:10;겔 10:4, Gray, Knobel).
성 경: [사6:5]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직역하면 , '나에게 화로다. 왜냐하면 나는 끝장났기 때문이다'이다. 선지자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완전 무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그 자신의 죄인됨과 그 백성의 죄악됨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아서(33:14) 부패한 인간이 그 앞에 설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본 자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출 33:20;삿 13:22). 환상 가운데 여호와를 목도한 선지자는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의식 속에서는 자기가 벌써 죽은 것처럼 느꼈다.
ꃨ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 선지자는 자신의 죄 가운데 특별히 부정한 입술을 지목해서 말한다. 이는 첫째로 정결한 입술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조할 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이 입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마 15:11) 부정한 입술이 모든 죄악을 총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었다(약 3:2 참조).
ꃨ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 선지자는 백성의 죄악에 대하여 깊은 연대 의식(혹은 책임 의식)을 느꼈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은 29:13에서 발견된다:"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ꃨ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그 자신과 민족의 깊은 절망 가운데서 선지자가 뵈온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었다. 성전 가득 뒤덮인 긴 옷자락, 주변에서 쉼없이 찬미하는 스랍들의 모습에서(1,2절) 선지자는 이 같은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의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 의식(儀式)이 뒤따른다.
성 경: [사6:6,7]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화저(火著)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내 입에 대며 - '단'은 제단이니 곧 하늘에 있는 향단을 가리킨다. 계시록에 의하면, 하늘 향단은 금으로 만들어졌다(계 8:3;9:13). '핀 숯'은 불타는 숯 혹은 뜨거운 돌을 뜻한다. 천상에서 거행된 죄사함의 성례는 스랍 중 하나가 단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정금으로 만든 화저(불집게)를 가지고 핀 숯을 취하여 선지자에게로 날아가 그가 부정하다고 탄식한 입술을 거기에 댐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상징적인 행동은 다만 선지자에게 그의 죄가 사해졌음을 확신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결코 '핀 숯' 자체가 정화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ꃨ 보라...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스랍들의 말로 앞절의 신비한 행동의 의미가 밝혀진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평행법은 선지자에게 사죄의 확신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본문에서 선지자가 받은 사죄 의식에는 피흘림의 제사가 결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 행위로 인하여 그 같은 제사가 불필요하게 될 날이 올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성 경: [사6:8]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그 영광을 뵈었던 선지자는 이제 사죄함을 받은 이후에 영적인 귀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그 음성은 직접적으로 선지자를 향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Jerome).
ꃨ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선지자는 하늘의 어전(御前) 회의에서 그곳에 참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왕상 22:19,20 참조). 그것은 헌신의 열정에 의해 자원하여 일하러 갈 사람을 구하는 음성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연관으로 인하여 '엘로힘'(*)이라고까지 불리웠다(창 6:2;시 8:5).
ꃨ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입술이 정결케 됨으로써 죄에서 자유함을 입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 가슴의 뜨거움만큼이나 불타는 정열로 이렇게 소리친다:'나를 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 히네니)란 말은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따라서 '나는 준비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말이다(Alexander, Michaelis). 죄씻음을 받은 감격이 헌신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경우로는 시 51:12-15에 언급되어 있다.
성 경: [사6:9]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 하나님의 명령은 '가서-말하라'는 두 개의 동사로 집약된다(출 3:16;7:15;삼하 7:5;18:21;왕상 18:8;대상 17:4). '이 백성'이란 말씀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경멸이 내포되어 있다(6:10;8:6,11,12;9:13;28:11, 14; 29:13;미 2:11;학 2:14).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을 상실하고 그 행위로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ꃨ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할 것이요 -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선지자가 백성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성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며',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무감각(혹은 영적인 불감증)은 예레미야가 말한 바 '마음이 강퍅하고 목이 곧은'(렘 7:24-26) 백성들의 상태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에 의해 그의 사역의 결과를 묘사한 말로 4복음서에서 인용되었으며(마 13:13;막 4:12;눅 8:10;요 12:39), 바울에 의해서 두번 인용되었다(행 28:26,27;롬 11:8).
성 경: [사6:10]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 앞절의 명령이 백성들에게 내려진 것이라면, 본문의 명령은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깨닫지 못하며 알지도 못하리라'로 단언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지 못지않게 선지자 역시 자신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미리 알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삼중의 명령으로 나타났다. (1)'둔하게 하라'(*, 하쉬멘):이는 '살지게 하라', '기름으로 덮이게 하라'는 뜻이니,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에 대해 마음으로 전혀 지각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2)'막히게 하라'(*, 하크베드):이는 '무디게 하라'는 뜻이니, 청력이 무디어져서 어떤 깨달음도 갖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3)'감기게 하라'(*, 하솨):이는 '흐려지게 하라'는 뜻이니, 시력과 함께 모든 통찰력을 상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선지자의 사역으로 인해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이 둔해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된다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선지자가 선포해야 할 말씀 그 자체에서 이 같은 결과가 직접적으로 초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의 등처럼, 길의 빛처럼'(시 119:105) 사람을 밝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전적으로 죄인의 부패한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비밀을 이렇게 묘사한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칼빈(Calvin)이 잘 말한 것처럼, 눈이 어두운 사람이 빛을 볼 수 없다 하여 원망할 수 없는 일이며, 귀가 막힌 사람이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여 불평할 수 없는 일이며, 지각이 둔한 사람이 자기가 이해 못하는 문제의 어려움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판의 제1차적인 원인은 늘 죄인에게 있다. 그위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말미암는 버려둠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롬 1:24,26,28).
성 경: [사6:11,12]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마침내는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일 수 없다는 것을 선지자는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주여, 이 백성들의 눈먼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 되겠습니까?"(시 90:13 참조). 이 같은 물음의 배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즉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아니하신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ꃨ 대답하시되...많을 때까지니라 - 선지자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이 너무 깊어서 완전한 파멸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엄위한 것이어서 그것은 온 나라가 황폐되고 백성들은 이방 민족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전국가적인 재난으로 실현되어지리라는 사실이다.
성 경: [사6:13]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그 중에 십분의 일이...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 본문은 내용상 앞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설혹 심판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다 할지라도 - 1/10은 극히 적은 수를 가리킨다 - 그마저 계속되는 파멸의 와류에 삼키우고 말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절망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극적인 마침이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절망에서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베임을 당한 나무의 표상에서 이러한 사상이 암시되고 있다.
ꃨ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남아 있는 것같이 - 밤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상록수에 가까우며 완전히 베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돋는 강인한 속성 때문에 이스라엘의 상징으로서 선택된 듯하다(Delitzsch). '그루터기'라고 번역된 '마체베트'(*)는 '뿌리'(De Wette), '줄기'(Gesenius), '기둥'(Leupold)을 뜻하는 말로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담지하고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Alexander).
ꃨ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최후까지 보존되어질 이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 제라 코데쉬)이다. '거룩한 씨'는 '행악의 종자'(*, 제라 메레임)와 대조되는 것으로서(1:4), 거듭되는 심판을 겪고서도 끝까지 살아 남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롬 11:5). 이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어'(37:31) 거대한 나무를 이루게 될 것이다.
성 경: [사7:1]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 본절은 예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로 - 에브라임 전쟁에 대한 요약이다. 선지자는 결과를 미리 말한 다음 세부적인 사항들을 밝히는 방식으로 예언을 진행시킨다. '웃시야-요담-아하스'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의 역사는 유다가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서 어떻게 국제적 분쟁의 회오리와 그 참혹한 파멸 가운데로 급락하게 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시로 - 에브라임 전쟁이었다(왕하 16장;대하 28장 참조). 구체적 설명은 강해란을 보라.
성 경: [사7:2]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 '다윗 집'은 다윗 왕조에 속한 아하스와 그의 정부를 가리킨다. 선지자가 본문에서 '다윗 집'으란 표현을 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함축되어 있다. (1)다윗의 집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르신-베가의 동맹군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다윗 왕조를 폐하고 괴뢰 정권을 세우는 데 있었던 것이다(6절). (2)이 위기는 다윗 왕조가 여호와와 맺은 언약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데서 온 필연적 결과이며(삼하 7장), 따라서 아하스가 직면한 외부적 위협은 실은 여호와의 징계로 주어진 것임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9절에서 선지자가 다시금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ꃨ 왕의 마음과...흔들렸더라 - 이 불길한 소식을 접했을 때 왕과 온 백성 곧 나라 전체가 보인 반응은 심장이 얼어 붙는 듯한 두려움, 그것이었다. 선지자는 그것을 직유법으로 표현한다:'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이는 주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단적으로 드려내 주고 있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불신은 오직 두려움만을 증폭시킨다.
성 경: [사7:3]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때에 여호와께서...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 이 상황에서 선지자는 '스알야숩'이란 의미 심장한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과 더불어 아하스 왕을 만나라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 온다'는 뜻이다(10:21).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위협(단지 남은 자만 돌아온다) 혹은 약속(적어도 남은 자는 꼭 돌아올 것이다)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문맥상 위로의 약속에 더 큰 비중이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 왕은 스알야숩뿐만 아니라 그 곁에 서 있는 이사야를 또한 만나야 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이 있는 이사야의 이름은 스알야숩이란 이름과 함하여 완전한 계시를 이룬다(Leupold).
성 경: [사7:4]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 이사야와 그 아들 스알야숩이 아하스 왕에게 보여진 것이 하나님의 시각적 메시지였다면, 본절부터는(9절까지) 청각적 메시지가 명료하게 전달된다. 그 메시지는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4개의 명령(혹은 권유)으로 시작된다. '삼가라'(*, 히솨메르)는 두려움에 쫓겨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종용하라'(*, 하쉬케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평온하고 안정된 마음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수 1:6)는 명령이 덧붙여진다. 왜냐하면 두려움이야말로 믿음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는 마음이 녹아 내리는 낙심밖에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앞의 두 가지가 신앙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라면, 뒤의 두 가지는 불신앙에서 오는 전형적인 상태이다.
성 경: [사7:5]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이르기를 - 개역 성경에는 '때문에'(*, 야안 키)란 말이 빠져 있다. 원문대로 읽으면 '아람이 너를 대적해서 악을 도모하여,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도, 말했기 때문에'이다. 언제나 아람이 먼저 거론된다(4절). 이는 원정군의 주도권을 쥔 나라가 아람이었음을 나타낸다.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은 동의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름을 셋으로 나누어 표기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운율을 고려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Alexander). 본문에서 시작한 긴 문장은 7절에서 끝난다(Gesenius, Hitzig, Ewald).
성 경: [사7:6]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하였으나 - 앞절에서 말한 '악한 꾀', 즉 원정군의 전쟁 목적이 명확하게 기술된다. 그것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그것을 곤하게 하고': '곤하게 하다'로 번역된 '네키체나'(*)는 '두렵게 하다', '포위하다'는 뜻이니, 곧 유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어넣어 스스로 무너지게 하자는 것이다. 고대의 전쟁은 신경전이 그 승패를 좌우했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쪽이 으레 패배하기 마련이었다. (2)'그것을 파하고': '파하다'(*, 나브키엔나)는 '산산이 쪼개다', '박살내다'는 뜻이니, 힘으로 유다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온 나라를 유린하자는 것이다. (3)'다브엘의 아들을...왕을 삼자':최종적인 목표는 다윗 왕조를 폐하고 자기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괴뢰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다브엘의 아들'은 '르말리야의 아들'이란 이름처럼 경멸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더구나 이스라엘인인지 수리아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왕상 15:18에 나오는 수리아인 '다브림몬'과 그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수리아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사7:7]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 본문은 5절에서 시작한 긴 문장의 귀결절에 해당하며 동시에 새로운 절을 유도하는 상관적인 기능을 갖는다:유다를 공격하여 정권을 바꾸고자 하는(6절) 르신과 베가의 악한 꾀는(5절) 결코 실현되지 못한다(7절). 왜냐하면...(8,9절).
성 경: [사7:8,9]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 여기서 '머리'(*, 로쉬)는 한 나라의 수도 혹은 주권(통치)을 뜻하는 비유 언어이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의역 가능하다: '아람의 수도는 (오직) 다메섹일 뿐, 예루살렘은 아니다. 르신이 다메섹의 왕이라면 그의 통치는 (오직) 다메섹에만 국한될 뿐, 예루살렘에는 미칠 수 없다.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므로 용납될 수 없다.'
ꃨ 육십 오년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 본문은 앞에 나온 내용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아람에 대한 진술에 이어 에브라임이 나온다는 것이다. (2)본문의 시점(아하스 왕 2년, 곧 B.C. 734년)으로부터 보면 에브라임의 패망이 불과 십 몇 년 내의 일인데 선지자가 65년이라고 말한 것은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본문을 후대에 편집되어 삽입된 것으로 간주했다(Eichorn, Gesenius). 그러나 현대적인 논리를 앞세워 섣불리 성경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선, 선지자의 눈은 시종 일관 유다에 향해 있다. 주변 국가에 대한 언급도 유다에 관련있을 때만으로 한정된다. 그는 아람의 한계에서 그와 동맹한 에브라임의 운명을 읽고, 또한 에브라임의 운명에서 같은 민족인 유다의 미래를 읽는다. 그 미래는 전적으로 신앙에 따라 좌우된다. 둘째, 연대 문제에서 그것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한 B.C. 722년의 예루살렘 점령에 국한시키기보다, B.C. 669년에 있었던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에 의한 식민지 정책에 맞춘다면, 65년이라는 기한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앗술 바니팔은 주변 여러 민족들을 데려와서 사마리아에 거주케 하였는데,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에브라임은 국가로서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고 혼합 민족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왕하 17:24;스 4:2).
성 경: [사7:10]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 앞절과 본절 사이에 짧은 휴지(休止)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는 선지자의 전언(傳言)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마음이 앗수르쪽으로 기울어진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된다.
성 경: [사7:11]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아하스 왕에게 그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징조'는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증거로서 취해졌다. 그것은 때로는 이적(38:7,8;출 4:8)으로, 때로는 미래 사건들을 지명하는 지각 가능한 상징들(8:3,4,18;겔 12:6)로 나타난다. 만일 아하스가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한다면, 그는 이적적인 증거를 구함으로써 불신앙을 확신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최후의 기회였다.
성 경: [사7:12]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 여호와를 시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인 언행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신 6:16의 금지 계명을 내세워 자신의 불신앙을 포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징조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의 불신앙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Umbreit)나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능력(Gesenius)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내적인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스스로 고안해낸 별도의 대책이 서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성 경: [사7:13]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하려느냐 - 개역 성경에 단수로 나와 있는 '사람'은 원문에는 '사람들'(*, 아나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선지자 자신을 가리킨다기보다는(Bultema) 아마도 권세자들에 의해 압제받는 백성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의 책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너희가 백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도 마치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이제는 불신앙으로 그의 은혜마저 거절하는구나.'
성 경: [사7:14]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문자적으로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이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창 29:32-35;30:6-13;3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관습으로 보인다(창 16:15;삼하 12:24;눅 1:62,63등). 그러나 누가 아이의 이름을 짓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 1:23에서는 본문의 주어가 3인칭 복수형(그들)으로 인용되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이다. 일차적으로 그 이름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르신-베가의 멸망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또 그의 어머니인 '처녀'(*, 알마)는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예로부터 학자들 간에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1)그 어머니는 동정녀 마리아이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주장(E.J.Young):이것은 아이의 성장과 아하스 당대의 정치적 상황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는 15-17절로 인해 수용하기 어렵다. 이러한 난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본절의 아이와 15,16절의 아이를 구분하거나(박윤선), 혹은 본절과 15절의 아이와 16절의 아이를 각각 다른 인물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Bultema, Calvin), 이 경우에 해석의 자의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마 1:23에 의거, 본문이 메시야적 예언임에 틀림없다고 할지라도 시공간적 거리를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아기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그 어머니는 아하스 왕의 왕비 혹은 후궁을 가리키며, 그 아이는 히스기야를 가리킨다는 주장(Lindblom, Steinmann):이는 주로 유태계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연대기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B.C.728년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 이미 25세였으므로,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는 10대의 소년이었던 것이다(대하 29:1). (3)그 어머니는 이사야 선지자의 아내이며 그 아이는 선지자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주장(Clements):이 경우에 선지자가 8:3에서처럼 '선지자의 아내' 혹은 '여선지자'(*, 하네비아)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굳이 '알마'(*)라는 모호한 말로 대신하였는가가 의심스럽다. 게다가 그의 아내처럼 오래도록 결혼 생활을 한 여자를 '알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도 수긍하기 힘들다. (4)선지자가 특정인을 가리키지 않고 일반적으로 당시 유다에 살고 있던 어머니들을 가리킨다는 주장(O.Kaiser). 이 경우에 정관사 '하'(*)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상의 어떤 주장도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 다만 이제까지 주어진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볼 때, 우선 징조로서의 이 아이는 아하스 당대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그 아이의 성장 기한과 르신-베가 동맹군의 몰락이 결부되어 있다는 15,16절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또한 이 징조는 아하스 당대에만 국한될 수 없다. 그것이 다윗의 집에 주어졌고, 더욱이 이 임마누엘의 위로가 앗수르의 위협과 더불어 소멸되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큰 역사적 지평으로 확대된다. 선지자의 예언이 궁극적인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은 그 인격 속에 임마누엘의 약속과 구원을 구현할 메시야의 탄생에서이다. 따라서 추측컨대, 아이의 어머니는 선지자와 동(同)시대 사람으로서 다윗 가문에 속한 한 처녀이며, 그 아들의 이름 임마누엘은 위기의 순간에 그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장차 인간의 몸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함께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사7:15]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때에 미쳐 - 영아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 선악을 분별한다 함은 영아의 상태를 넘어섬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그 아이가 자라서 사물을 판단하는 나이에 이를 때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나이는 대략 3세 정도로 추정된다.
성 경: [사7:16]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 '미워하는'은 문자적으로는 '두려워하는'이다. 유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 나라 수리아와 에브라임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과(B.C. 732년) 살만에셀 5세(B.C.722년)의 침공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며(왕하 15:29;16:9;17:6), 따라서 그들로부터 가해진 위협도 소멸될 것이다.
성 경: [사7:17]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여호와께서...임하게 하시리니 - 비록 수리아와 에브라임에 의한 위협은 소멸된다 할지라도 유다의 시련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유다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앗수르로부터 올 것이다.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심판의 위협으로의 이 돌연한 변화는 실은 아하스 왕의 불신앙이 자초한 것이다(10-13절). 불신앙에 대한 심판은 여호와로부터 온다. 앗수르는 그 손의 막대기에 불과하다(10:5).
ꃨ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 앞으로 당할 환난의 무서움과 그 비참함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그 분열의 역사에 비견된다. 민족의 분열은 모든 비극의 뿌리요 모태였다.
성 경: [사7:18]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 - 유다를 괴롭힐 침략군에는 앗수르 뿐만 아니라 애굽도 첨가된다. 선지자는 애굽을 파리로, 앗수르를 벌로 비유하고 있다. 나일 강을 끼고 있는 애굽에는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많은 종류의 곤충들, 그중에서도 특히 파리가 많았다. 반면에 많은 산과 숲으로 우거진 앗수르에는 벌떼가 많았다. 본문을 역사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상황의 전후 관계가 불분명할 수 있다. 애굽 군대가 유다 땅을 유린하게 된 것은(왕하 23:28-30) 훨씬 후대의 요시야 왕 때였다(B.C.609년). 그리고 애굽 왕 바로느고가 이끄는 애굽 군대와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군대가 격돌한 저 유명한 갈그미스(Carchemish)전투에서 애굽이 패퇴함으로써 고대 근동의 주도권은 사실상 바벨론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B.C.605년). 앗수르 군대에 의한 피해는 히스기야 왕 때 가장 극심하였다(36,37장).
성 경: [사7:19]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 선지자의 비유는 계속된다. 파리와 벌로 비유된 애굽과 앗수르 군대는 여호와의 신호에 따라서 유다 땅 전역을 뒤덮게 될 것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여기 언급된 네 장소를 각각 파리와 벌의 서식지로 파악하여, 거친 골짜기와 가시나무 울타리는 파리에, 바위틈과 모든 초장은 벌에 연결시켰다. 또한 클레리커스(Clericus)는 이들 장소들이 군대가 주둔하기 적합한 곳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오스발트(Oswalt)는 이들이 곤충들로 비유된 외국 군대로부터 유다 백성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선택한 장소들이라고 하였다.
성 경: [사7:20]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 애굽은 유다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선은 다시 앗수르에게 향한다. 18절에서 벌로 비유된 앗수르가 여기서 다시 삭도로 비유된다. 그것은 '세내어 온 삭도'이다. 선지자는 아마도 아하스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상당한 양의 돈을 주고 그의 도움을 구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듯하다(왕하 16:7,8).
ꃨ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수염도 깎으시리라 - 1:6에서 전신에 상처입은 패전(敗戰) 군인으로 그려진 유다 백성이 여기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깎여진, 더할 나위없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삼하 10:4,5).
성 경: [사7:21]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 벌거벗은 상태 곧 황무지로 변하고 만 유다의 비참함을 선지자는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의 소유물은 겨우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젖을 뽑아낸들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현저한 인구 감소로 인하여 그 젖이 오히려 남아돌 것이라고 한다.
성 경: [사7:22]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 앗수르의 삭도를 피하여 남아 있는 자에게 제공되어질 음식은 응결된 젖과 야생꿀이 그 전부이다. 그들은 싫증이 날 정도로 계속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Delitzsch).
성 경: [사7:23]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그 날에는 천(千) 주(株)에 은 일천 개의 가치되는 포도나무...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 본절 이하에서 질려와 형극으로 특징지워지는 황무지에 대한 묘사가 계속 반복된다. 남은 자들이 뻐터와 꿀로 연명하게 되는 것은 포도와 곡식으로 가득 채워졌던 언덕들이 모두 가시덤불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은 일천 개'는 은화 일천 세겔을 말한다. 이처럼 최상품의 포도나무들이 재배되던 곳이 그 날에는 질려와 형극으로 무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다 백성들에게 임할 비극을 극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사7:24]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 찔레와 형극으로 가득 차고 사나운 들짐승들이 서식하게 될 그곳에 살과 활을 갖지 않고 나가는 것은 크나큰 위험이 될 것이다. 그 땅이 쓸모가 있다면 어쩌면 사냥터로나 적합할지도 모른다.
성 경: [사7:25]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 이전의 유다는 포도나무로 상징되는 농업 경제를 자랑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제는 소와 양으로 상징되는 유목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가 본 유다의 미래 모습이다(G.W.Grogan).
성 경: [사8:1]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 본장은 7장과 동일한 역사적 맥락 위에 놓인다. 앞서 선지자는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가 성장하기 전에 먼저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몰락하고 그 다음에 유다가 황폐해질 것을 예언한 바 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경과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1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Kissane).
ꃨ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 새로 주어질 이 징조는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도 뚜렷이 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큰 서판을 취하도록 명령되었다. '서판'(*, 길라욘)은 금속으로 만든 판을 가리킨다(30:8).
ꃨ 그 위에 통용 문자로 - '통용 문자로'(*, 베헤레트 에노쉬)라는 말은 직역하면, '(한)사람의 필체(writing style)로'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자로 기록하라는 것이다.
ꃨ 마헬살랄하스바스 - 본래의 음대로 읽으면 '마헤르-솰랄-하쉬-바즈'이다. 그 뜻은 '신속하게-약탈물을-급속히-노획물을', 즉 '약탈과 노획이 급속히 이르름'이다. 이는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앗수르에 의해 머지 않은 장래에 노략당할 것을 나타낸다(4절).
성 경: [사8:2]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 -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왕에게 빌붙어 후에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앗수르 제단을 건립하는 데 협력한 자이며(왕하 16:10-16), 스가랴는 아마도 아하스 왕의 장인을 가리킬 것이다(왕하 18:1,2;대하 29:1). 이들이 진실한 증인이라 불리는 것은 그 지명도와 영향력이 커서 백성들에게 사실을 왜곡됨 없이 말해주리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사8:3]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 직역하면 '내가 여선지자를 가까이하매'이다. '여선지자'(*, 하느비아)는 그의 아내를 말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대개 그 남편이나 부친의 품위를 따라 여자에게도 그와 비슷한 칭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출 15:20) 그녀가 반드시 어떤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했으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성 경: [사8:4]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 '아빠'(*, 아비)와 '엄마'(*, 임미)는 갓난 아이가 최초로 발음하는 소리이다. 이제 예언 성취의 시간은 임마누엘의 때보다 더 앞당겨졌다. 왜냐하면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아는것'(7:15,16)보다 '아빠-엄마'라고 웅얼거리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앗수르에 의한 수리아와 사마리아의 몰락은 훨씬 더 급박한 사실로 눈앞에 놓이게 된다.
성 경: [사8:5]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여호와께서 다시...일러 가라사대 - 수리아와 사마리아의 약탈만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유다가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한 일로 인하여 장차 벌어질 사태를 백성들 또한 목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본절은 7:10에서 처럼, 짧은 시간의 경과를 전제할 수도 있다(Alexander).
성 경: [사8:6]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 실로아 물은 기혼 샘물에서 발원하여 예루살렘 도성의 동편을 끼고 흐르는 작고 가느다란 시냇물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에 대조적인 의미로 쓰였다. 이는 곧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근하고도 비밀한 보호를 뜻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짓눌려 있어서 천천히 흐르는 이 실로아 물이야말로 참된 구원이 됨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ꃨ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 유다 백성들이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의 파멸을 보고 자만하여 기뻐한다는 뜻이다(rejoice...,KJV, NIV). 참조로, '기뻐하다'는 뜻의 '마소스'(*)대신에 '두려워하다', '녹다'는 뜻의 '마사스'(*)를 대치시켜 해석하기도 한다(RSV, Hitzig).
성 경: [사8:7]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 눈에 보이는것만으로 위로를 삼는 백성들에게 앗수르 군대의 힘과 위용이야말로 거세게 넘실대는 유브라데 강물처럼 마음 든든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범람하는 그 강물이 마침내 수리아와 사마리아를 넘어 유다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의지하는 이는 다 이와 같을 것이다.
성 경: [사8:8]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목에까지 미치리라 - 앗수르에 의한 유다의 약탈은 목에까지 물이 차는 정도의 극심한 홍수 상태로 비유되었다. 선지자의 예언처럼, 디글랏 빌레셀의 대군은 몇 년 안 되어 유다의 넓은 지역을 파괴하고 예물뿐 아니라 공물까지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대하 28:20,21). 그러나 더 큰 피해는 그 후대의 왕, 특히 산헤립(B.C. 705-681) 때에 이루어졌다.
ꃨ 임마누엘이여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말이 문장 맨 뒤에 놓여 있다. 선지자의 눈은 다시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한 아이에게 향한다. 이는 범람하는 물결이 거의 목에 차고 새의 편 날개가 온 땅을 덮는 것처럼, 유다 전역이 물에 잠긴 듯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란 오직 그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이 소망스러운 이름을 기점으로 하여 선지자의 어조와 전망은 일변한다. 비록 가까운 장래에 적들로부터 주어질 재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승리와 구원은 이 땅 위에 임할 것이다.
성 경: [사8:9,10]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명령법과 반복법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임마누엘이 주는 위로와 보호를 말하고 있다. 그 요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을 세상의 나라들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ꃨ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 '민족들'(*, 아밈)은 앗수르인들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적대하는 모든 민족들을 가리킨다. '훤화하다'(*, 로우)는 '격노하다', '시끄럽게 날뛰다'(Henderson), '제멋대로 날뛰다'(Alexander)는 뜻으로 전쟁의 함성을 말한다.
ꃨ 필경 패망하리라 - 격동하고 허리를 동이며 모략을 짜내는 등 저들이 온갖 수고와 준비를 아끼지 않을지라도 그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뭇 세력들에게 주어질 궁극적인 운명은 패망뿐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말이 9절에서만 3번, 10절에서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로 2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ꃨ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 저들이 필경, 궁극적으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이 놀라운 '임마누엘'(*)의 선언 때문이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칭호로 쓰이지 않고 선언적인 진술로 사용되었다.
성 경: [사8:11]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 임마누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선지자의 마음은 자연 위축되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처음부터 예측된 것이었다(6:9,10). 따라서 하나님은 연약해진 그를 강하게 만드실 필요가 있었다. '손'(*, 하야드)은 전능자 여호와의 손을 가리키며, 그 손이 선지자에게 얹혀질 때 특별한 영감과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다(겔 1:3).
성 경: [사8:12]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이 백성의 맹약(盟約)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 '맹약'이라 번역된 '케쉐르'(*)는 '공모하다', '협력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그 현대적 의미는 '반역', '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신하가 군주를 거역하고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에 주로 사용되었다(왕하 11:14;14:19;15:30). 당시 르신-베가 동맹군에 맞서 친앗수르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노선을 추종치 않고 반대하는 자들은 - 이사야 선지자가 대표적이다 -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반역자들로 간주되었다. 본문에서 선지자에 대한 동(同)시대인들의 시각을 확연하게 엿볼 수 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에게도 이와 동일한 비난이 가해졌다(렘 20:1,2;26:8-11;암 7:11-13).
성 경: [사8:13]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하고 -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만 주어진다. 그의 거룩하심을 인식한다 함은 그가 만군의 여호와, 곧 피조세계와 구별되어 홀로 높이 계시는 절대 주권자이심을 알아뵙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안절부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 경: [사8:14]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 '거룩한 피할 곳'으로 번역된 '미크다쉬'(*)는 '거룩한 것'(a holy thing)이란 뜻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피난처, 은둔처로 간주되어온 거룩한 장소 곧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왕상 2:28, Gesenius, Rosenmuller, Ewald). 여호와는 그를 믿고 그에게 도피하는 이들에게 피난처요 산성이 되어 주실 것이다(시 18:2).
ꃨ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올무가 되시리니 - '이스라엘의 두 집'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오직 인간의 생각만을 의지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들의 길을 가로막는 거북한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가 신약 성경에서 보다 명백하게 표현되었으니, '거룩한 자'(*, 토 하기온, 눅 1:35)-'미크다쉬'에 상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에게는 그가 보배가 될 것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될 것이다(롬 9:33;벧전 2:7,8). '예루살렘'은 강조적인 의미로 첨가된 것이다.
성 경: [사8:15]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 본문은 여호와가 그를 믿지 아니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거치는 돌'이 될 것이라는 앞절의 위협의 연속이다. 그것은 5개의 동사로 구성되는데 앞의 세 동사들은 '돌과 바위'에 관계되며 뒤의 두 동사들은 '함정과 올무'에 관계된다.
성 경: [사8:16]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 이 명령은 여호와로부터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싸매며'로 번역된 '초르'(*)는 '기입하다', '새기다'는 뜻의 '추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Vitringa), '묶다'는 뜻의 '차라르'(*)에서 파생된 말이다(Alexander). 선지자는 증거의 말씀을 적은 두루마리를 묶어 봉함하도록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계시가 무시되고 거절되었기 때문이다.
ꃨ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 이제 그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 즉 그 마음속에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질 것이다. 선지자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작은 집단에 제한될 것이며 전체로서 그 나라는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주의 계시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Leupold).
성 경: [사8:17]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 그의 공적 사역이 위축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로부터 얼굴을 돌리시는 이 암담한 때에 선지자가 취할 태도는 '기다림'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기다림은 '기대함'이다. 기대함은 소망으로 앞을 내다봄이다. 이러한 믿음의 자세가 '기다리며'(*, 하카), '바라본다'(*, 카와)는 두 동사에서 잘 나타난다. '카와'는 '기대한다'는 뜻이다.
성 경: [사8:18]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 주의 말씀이 거부되고 그의 활동이 제약되는 상황에서도 선지자의 마음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였다. 이는 아마도 11절의 결과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뉜다. 먼저, 몇몇 옛주석가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용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히 2:13)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는 메시야 자신이며, '자녀들'은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라고 주장한다(Henderson). 그러나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화자(話者)이며, '자녀들'은 그의 두 아들 즉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esenius, Ewald, Delitzsch, Rosenmuller). 이 해석이 타당하니 첫째, 선지자를 비롯하여 그의 두 아들이 모두 그 이름을 통한 징조와 예표로서 백성들에게 보내어졌다는 것과, 둘째, 히브리서의 인용과 관련하여,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선지자와 그 아들들의 이름이 갖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모형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Delitzsch).
ꃨ 징조와 예표 - 이 두 용어는 '미래 사건의 표징, 암시'(*, 튀포스)를 뜻하는 같은 의미의 낱말들로서 자주 결합되어 쓰인다(신4:34;6:22;7:19; 26:8; 28:46; 29:2; 4:11;시 135:9 등).
성 경: [사8:19]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 불신자들이 유혹하는 소리이다. '신접한 자'로 번역된 '오보트'(*)는 원래 '부풀게 하는 가죽'(욥 32:19)이란 뜻의 '오브'(*)의 복수형인데, 여기서는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 지하로부터 영을 부르는 사람, 즉 마술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신 18:11;삼상 28:8;대상 10:13). '마술사'로 번역된 '야데오님'(*)은 '알다'는 뜻의 '야다'(*)에서 파생된 말로, '아는 자', '지혜로운 자', '점쟁이'를 의미한다(레 19:31;신 18:11).
성 경: [사8:20]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 불신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후에 신자의 마땅히 행할 바를 명시한다. 본문은 전쟁시에 사용되는 슬로건(표어)의 형태로 되어 있다(삿 7:18 참조):'율법과 증거(의 말씀)에게로!'
ꃨ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 '율법과 증거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이자 규범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우된다. 앞서 말한 표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불행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 경: [사8:21,22]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아침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겪게 될 비참한 상태가 두 절에 걸쳐 묘사된다.
ꃨ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 우선, 그들의 처지는 사막의 불볕 아래 음식도, 물도 없이 허덕이는 비참한 모습과도 같다. 선지자는 아마도 앗수르의 압제 아래 백성들이 당하게 될 곤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번조(煩燥)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 그들의 고통이 너무도 격심하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하며 자기의 왕과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저주하게 될 것이다. '번조하여'(*, 히트카차프)는 '분노하다', '격노하다'는 뜻이다. 스스로 자초한 불행에 대하여 그 모든 원인을 그들의 지도자에게,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하나님에게 돌려 저주하는 행위는 가장 비열한 짓으로 여겨졌다(출 22:28;왕상 21:10).
ꃨ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 문자적으로는 '어두움 속으로 내쫓기리라'이다. '아펠라'(*)는 짙은 어두움에 사용된다(출 10:22). '쫓겨 들어간다'로 번역된 '메누다'(*)는 '내몰다', '추방하다'는 뜻을 가진 '나다'(*)동사의 수동 분사형이다. 선지자의 묘사는 비유로 가득하다. 본장의 마지막 절에서 지배적인 색조는 흑암이며, 주된 정조는 절망이다. 이 모든 것이 아침을 빼앗긴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이들에게 예정된 운명이 된다.
성 경: [사9:1]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 본문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8:23로 매겨져 있다. 비록 '흑암', '고통' 등의 어두운 단어들이 연속되고 있지만 내용은 정반대이다. 흑암이 걷히고 빛이 다시 비췬다. 이 모든 변화는 한 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비롯된다(6,7절). 흠정역은 문장 첫머리에 나오는 불변사 '키'(*)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함으로써(nevertheless) 이러한 변화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ꃨ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본절에 언급된 지역들은 사사 시대 이래로 주변 열국들의 침입으로 항상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이방 민족들과 접경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하여 팔레스틴의 다른 지역들보다도 이방적 색채가 더 짙었다. 게다가 최근에 자행된 앗수르 군대의 침략(B.C. 733,732년)으로 이 근방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 이런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요인들 때문에 갈릴리 지역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아왔던 것이다(요 1:46;7:41,52;행 2:7). 그러나 새 날이 밝을 때, 흑암이 가장 깊은 이 땅에 빛이 가장 먼저 비췰 것이다.
성 경: [사9:2]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빛이 비취도다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은 앞에 언급된 갈릴리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가리키며,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와 평행을 이룬다. '흑암'은 슬픔 혹은 재난으로 바꿔 말할 수 있으며, 더 넓게는 죄와 그로 말미암는 총체적인 불행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시 107:10,11). '큰 빛'은 세상의 빛이요(요 8:12) 참된 빛이며(요 1:9) 의의 태양이신(말 4:2)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 마태에 의하면, 이 빛은 맨 먼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마을에서 부터 비취기 시작했다(마 4:13). 그가 처음 이적을 베푸신 곳도 갈릴리였으며(요 2:11), 맨처음 가르치신 곳도 그가 자라나신 갈릴리의 나사렛 회당이었다(눅 4:14-17). 천국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곳도 바로 갈릴리 해변가였다(마 4:17;막 1:14,15). 이로써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본다는 선지자의 예언은 신약에 이르러 완전하게 응하였다.
성 경: [사9:3]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 내용은 주께 대한 찬양과 감사로 바뀐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일 가운데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나라를 창성케 해주신 것이다. '창성케 함'은 백성의 수를 많게 함이다. 둘째는, 즐거움을 더하게 해주신 것이다. 백성의 수의 증가와 즐거움의 증가는 모두 메시야 시대를 특징짓는 주도적인 현상들로 간주된다(26:15;66:8;슥 14:10,11).
성 경: [사9:4]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멍에와...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였음이니이다 - 본문의 '멍에'와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는 모두 노예를 다룰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이 가운데 특히 '멍에'(*, 수발로)와 '그 압제자'(*, 하노게스 보)는 애굽에서의 속박을 연상시킨다(출 2:11). 성경적 표상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을 속박하는 어두움의 세력을 대표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해방 사건은 애굽에서의 구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미디안의 날'을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적은 수효로 많은 대적들을 물리친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이 가장 분명하게 현시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삿 7:2, Oswalt, Calvin).
성 경: [사9:5]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살라지리니 - 구원은 압박받는 백성에게는 해방으로 경험되지만, 압제하는 군대에게는 패망 이외 다름 아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사상은 기드온의 승리(Junius)나 앗수르의 전멸(Delitzsch) 보다 더 크다. 전쟁을 위한 무장들인 '갑옷'(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군화'로 번역함)과 '군복'이 불에 태워지리라는 표현은 적들의 패망이라는 일차적인 의미 외에 더 나아가 전쟁 자체의 소멸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절에서 평강의 왕이신 메시야가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사9:6]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 '정사'로 번역된 '미스라'(*)는 '지도자가 되다'는 뜻의 '사라'(*)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통치'를 의미한다. '정사를 어깨에 멘다'는 말은 권위의 상징으로 주어진 금고리나 열쇠를 어깨에 걸친 데서 연유한 듯하다(22:22 참조).
ꃨ 기묘자라, 모사라 - '기묘'(wonder)와 '모사'(counsellor)를 구분하여 해석할 수도 있으나(Gesenius, Rosenmuller, Delitzsch),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lor) 라는 해석도 가능하다(28:29, Gray, Oswalt).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계획을 세우실 것이며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
ꃨ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 신적인 계획의 수립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첫째 이름과 둘째 이름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전혀 손색이 없다. '엘 깁보르'(*)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와 부를 하나님의 이름이며(10:21),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신 10:17;느 9:32;시 24:8;렘 32:18). 따라서 이 아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성(神性)을 소유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ꃨ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라 - '영존함'은 신성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아버지'에 놓인다. 히브리식 사고에서 아버지는 아들과 상관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부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후원자, 보호자 등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22:21;욥 29:16;시 103:13). 따라서 '아비 아드'(*)는 그의 백성들, 더 넓게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ꃨ 평강의 왕이라 - 마지막으로 그는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자로서 '왕'이라 불리운다. 높은 곳에 앉아서 밑에 있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왕의 개념은 히브리적이라기보다는 이교적이다. 더 나아가 그는 '평화의 왕'(*, 사르-솰롬)으로 불린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며, 그의 다스림 역시 평화로울 것이다(시 72:3,7;렘 33:6;미 5:4;슥 9:10 등).
성 경: [사9:7]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와 그의 자손이 영원토록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확약하셨다(삼하 7:13,16). 사실 다윗 왕국은 구약 역사에서 백성들이 동경하던 하나님 왕국의 실체임과 동시에 장차 메시야에 의해 건설될 항구적인 평화의 왕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O.Robertson).
ꃨ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 그 나라의 영속성은 다윗 언약에 기초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내부 구조는 '공평'(*, 미쉬파트)과 '정의'(*,체다카)이다. '공평'과 '정의'야말로 메시야 왕국을 지상의 나라와 구별짓는 결정적인 표지인 셈이다. '보존하다'(*, 사아드)는 '떠받치다', '유지하다'는 뜻이다.
성 경: [사9:8]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 본문에서 '말씀'(*, 다바르)은 보냄을 받은 자 곧 사자와 동일시되고 있다(시 107:20;147:15,18). 이 말씀은 여호와로부터 보내졌기 때문에 일점 일획의 어김도 없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보내신 자에게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55:11). 여기에 히브리적 사고의 독특함이 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말씀과 사건이 구별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사건으로 구체화되며, 이를 통해서 그 말씀의 진실성이 입증된다(호 6:5).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과 함께 사건이라는 의미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38:7;42:16;창 34:14;신 17:5;삼상 3:11). 그 말씀이 야곱에게 보내어진다. 마치 음울한 소식을 전하러 가는 전령처럼 말이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의어로 쓰였으며, 여기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킨다(Alexander).
성 경: [사9:9]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5:3)과 대조되는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미루어 충분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겸손하기보다는 교만으로 일관한다.
성 경: [사9:10]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대신하리라 하도다 - 자만으로 가득 찬 에브라임의 말이다. 벽돌과 뽕나무는 둘 다 값싼 건축 자재들인데, 빈약한 건물이나 서민들의 집을 지을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에 반해서 다듬은 돌과 백향목은 고급품들로서 권세자들의 거처나 호화로운 건물을 지을 때 주로 이용되었다(왕상 5:6;대하 1:15;2:3;스 3:7;암 5:11).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들이 외국 군대의 침공을 받아 손상을 입을지라도 자신들의 힘으로 이전보다 더 강성해진다고 호언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사9:11]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 에브라임은 그들의 교만의 대가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르신의 대적'(*, 차레 레친)은 언어 유희를 이용한 수법으로 앗수르인들을 가리킨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르신과 동맹을 체결했었다. 그러나 르신이 죽고 앗수르에 의해 수리아(아람)가 정복된 이후(왕하 16:9) 에브라임은 앗수르의 종속국으로 전락한 아람에 의해 침략을 당하게 된다(12절-'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성 경: [사9:12]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 '앞'(*, 케뎀)과 '뒤'(*, 아호르)는 오히려 동과 서로 이해함이 자연스럽다(11:14;창 2:8;욥 23:8 등).
ꃨ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 그러나 실제로 블레셋은 북이스라엘을 침략한 적이 없고 남유다만을 괴롭혔을 뿐이다(대하 28:18,19). 따라서 여기 언급된 '이스라엘'은 온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Delitzsch).
성 경: [사9:13]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이 백성이...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 '돌아오다'(*, 슈브)는 완전한 전환을 뜻하며, '찾다'(*, 다라쉬)는 '문제를 풀기 위해 물어 옴, 혹은 전심으로 구함'을 뜻한다(출 18:15;신 4:29). 그러나 이들 동사 위에 부정사(不定詞) '로'(*)가 놓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백성은 반역적인 태도를 고집하였다.
성 경: [사9:14]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종려가지와 갈대 - '종려가지'(*, 키파)는 그 아름다움과 유익함으로 인해 대단히 고귀한 식물로 평가되었으며, 후일 로마 동전에 유대의 상징으로 새겨지기도 하였다(시 92:12;아 7:7,8, Alexander). 이와 대조적인 이미지로 사용된 '갈대'(*, 아그몬)는 '습지', '늪', 혹은 '시궁창'(*, 아감)에서 자라는 식물(풀)로, 대단히 천하게 여겨졌다. 이 둘은 아마도 고귀한 자와 천한 자를 암시하는 듯하다(19:15).
성 경: [사9:15]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 이사야가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을 가리켜 '꼬리'라고 부르는 까닭은 ('꼬리'(*, 자나브)에는 본래 사악하고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들이 마치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권세있는 자들의 편에 빌붙어 부끄러운 말과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E.J.Young).
성 경: [사9:16]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하니 - 3:12의 탄핵과 유사하다. 지도자들의 범죄는 특히 무겁게 취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잘못은 자신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성 경: [사9:17]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이 백성이 각기 설만(褻慢)하며 -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이는'(*, 키)이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토록 진노하시며 그들을 버릴 수밖에 없는 까닭을 설명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들 모두가 부패했다. '설만하다'(*, 하네프)는 '모독하다', '불경건하다'는 뜻이니,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심 대신 오히려 하나님을 비웃고 모독하는 불경건만이 가득함을 나타낸다(시 14:3).
ꃨ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대상이었다(1:17;출 22:22;신 10:18;14:29). 그러나 그들에게까지도 주께서 평상시 베푸시던 긍휼이 거절될 것이다. 이는 주의 진노하심과 크기가 어느 정도이며 또한 백성들의 죄악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전자는 반복되는 후렴구에서, 후자는 이어지는 진술에서 명확히 표현되고 있다.
성 경: [사9:18]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대저 악행은 불태우는 것 같으니 - 죄악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선지자는 그것을 '불'에 비유한다. 이 불은 인간의 내면에서 끝없이 타오른다(창 4:7 참조). 물을 부어 꺼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아무도 이 불을 끄지 못한다. 따라서 성경은 끝없이 타오르는 악행의 불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결과라고 말한다(롬 1:28-32).
ꃨ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같은 것이라 - 선지자의 묘사는 거세게 타오르는 산불을 연상시킨다. 죄악의 불길은 먼저 가시나무를 삼키고 (질려와 형극은 보통 사악한 사람의 상징어로 자주 쓰인다(삼하 23:6;미 7:4)) 이어서 큰 삼림에까지 옮겨 붙어 (혹자는 이를 죄악의 집단에 참여한 온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Vitringa)) 대 초원 위에 지천으로 타올라 마침내 온 하늘을 연기로 가득 채운다. 이러한 일련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선지자는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가 어떻게 온 나라를 파멸로 이끄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16절).
성 경: [사9:19]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되리니 - 죄악의 불길 위에 또 하나의 불길 곧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이 오버랩 된다. 이 둘은 다르지 않다. 대초원을 태웠던 죄악의 불길 그 자체가 이미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임을 알게 된다. 화마(火魔)가 핥고 지나간 그 땅은 검게 그을은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한다. '소화된다'(*, 네으탐)는 말은 '빨갛게 달아 오르다', '타서 검게 되다'는 뜻이다(Luther, Calvin, Virtringa, Lowth).
성 경: [사9:20]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우편으로 움킬지라도...먹을 것이며 - 무정부 상태하의 내란, 즉 동족간의 무자비한 살육은 자기 살을 뜯어먹는 굶주림에 비교되고 있다. 그들은 탐욕에 지배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이런 자기 파멸적인 탐욕은 선지자의 다음 말, 곧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는 표현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팔'(*, 제로아)은 비유적으로 '힘', '원조', '도움'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상부 상조해야 할 이웃을 가리킨다(Gesenius, Rosenmuller, Maurer).
성 경: [사9:21]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 서로 보호하고 위해 주어야 할 이웃(혹은 지체)이 오히려 서로 물고 뜯는 원수로 변할 때 거기에는 '완전한 파멸' 밖에 남지 않는다(갈 5:15).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간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 북왕국 안에서 두 형제 지파,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서로를 질시하고 다툼으로 일관하더니(삼상 10:27;삼하 20:1;왕상 12:16;15:27;16:21;왕하 9:14 참조),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남유다를 공격하여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빚기에 이르른 것이다(왕하 15:13-16,25,30).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충족되지 아니하였다.
성 경: [사10: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ꃨ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 선지자는 여기서 관료적인 이스라엘의 법집행의 부당함을 탄핵한다. 법 앞에 만민을 공평하게 대우하라는 율법 정신이 완전히 소멸된 당시 이스라엘의 타락상이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출 23:6-9;레 19:15;신 10:17;16:19;24:17). 본절을 유다에 국한된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5:23). 이런 죄악은 남북을 불문하고 온 이스라엘에 편만하였던 것이다(암 5:12). '법령을 발포하며'와 '말을 기록하며'는 두 종류의 다른 직급, 즉 재판관과 서기관을 암시하는 말(Aben Ezra, Kimchi, Grotius)이라기보다는 동일한 뜻을 지닌 평행법으로 봄이 무난하다.
성 경: [사10: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ꃨ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화 있을진저 - 권세자들의 편에 선 재판관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편파적이며 일방적인 판결을 능사로 삼을 때, 권력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더 이상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불공평한 판결이 지배하는 곳에서 피해자는 언제나 '빈핍한 자'와 '가련한 자'뿐이다. 선지자는 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과부와 고아들'이라고 언급한다.
성 경: [사10: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ꃨ 벌하시는 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욤 페쿠다'(*)는 문자적으로 '방문의 날'이니,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하심을 특별히 나타내시는 때를 가리킨다(호 9:7, Alexander). 그날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와 동일시되는데, 이는 곧 앗수르에 의한 침공을 암시한다(5절;5:26). 선지자는 하나님의 방문의 날과 관련하여 불의한 재판관들에게 세 가지 물음을 던지는데,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다음절에서 통렬하게 제시된다.
성 경: [사10: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ꃨ 포로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 그들의 결국은 참으로 비참할 것인데,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감옥 안에 눕거나 전쟁터에서 나뒹구는 주검이 될 것이다. 이어 선지자의 시선은 범죄한 이스라엘로부터 그를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부름받은 앗수르로 향한다.
성 경: [사10:5]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운명을 나타낸 '화 있을진저'(*, 호)가 앗수르에게도 적용된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잠시 사용된후, 그 교만 때문에 역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
성 경: [사10:6]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 '한 나라'는 직역하면 '불경한(*, 하네프) 나라'이다. 그 나라는 평행을 이루는 문장에서 '나의 노한 백성'으로 구체화된다. 이는 '나의 진노의 대상이 된 백성'이란 뜻이다(34:5).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를 가장 경건한 민족이라 자부하고 앗수르 같은 이방 나라는 신(神)을 모르는 불경한 민족이라 멸시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정반대로 말한다:' 너희들이야말로 불경한 백성이며 앗수르는 너희들을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받았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Oswalt).
성 경: [사10:7]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멸절하려하여 -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 부름받은 바, 그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고 자신의 힘의 한계를 깨달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앗수르의 마음에는 이러한 깨달음 대신 중동의 지배자가 되려는 패권주의적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는 무력을 근간으로 하는 제국주의의 필연적 속성이다(왕하 18:25).
성 경: [사10:8]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 앗수르가 그 같은 야망을 품은 것이 결코 헛된 공상만은 아니라는 것이 반어법으로 표현된다. 실제로 앗수르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왕은 대왕(36:4)의 칭호를 가졌으며, 그 밑에 있는 방백들마저도 그 지위와 위세에 있어서 다른 나라의 왕들과 버금갈 정도였다.
성 경: [사10:9]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 이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앗수르가 거둔 혁혁한 전과(戰果)때문이었다. 사실 앗수르가 취하고자 했던 도성 중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의도에서 빗나간 것이 없었다. 과거의 자신감을 토대로 앗수르는 미래의 성공을 스스로 예견한다. '갈그미스'는 유브라데 강변에 위치한 성읍으로서(대하 35:20;렘 46:2-12) B.C. 717년에 함락되었다. '갈로'는 '갈그미스'로부터 남쪽 50마일 정도에 있는 '갈레'를 가리키는 듯하며(암 6:2), B.C. 738년에 함락되었다. '하맛'은 오론테스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민 34:8;왕하 14:25,28;암 6:2,14), B.C.738년과 720년에 함락되었다. '아르밧'은 '하맛'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왕하 18:34), 둘 다 수리아의 성읍들이었다. '아르밧'은 B.C. 740년에 함락 되었다. '다메섹'은 수리아의 수도이며(B.C. 732년 함락),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이다(B.C. 722년 함락). 언급된 6개의 성읍들은 아마도 지정학적 근접성을 기준으로 하여 배열된 듯하다(Oswalt).
성 경: [사10:10]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 고대의 정복 전쟁은 신들 간의 전쟁으로 고려되었으며, 신들의 우열은 전쟁의 승패에 직결되었다. '미쳤나니'(*, 마체아)는 '도달했다', '발견했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굴복시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 경: [사10:1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내가...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 결국 앗수르의 최종 목표는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앗수르는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다른 나라의 우상들, 특히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수입된 우상들과 같이 취급하였다. 여기에 그의 결정적인 실책이 있다. 여호와에 대한 모독에 이어 앗수르의 파멸이 곧 뒤따름을 보라.
성 경: [사10:1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 - 교만은 사람의 마음에서 발원하여 마음의 창이라고 할 수 있는 눈에서 비친다. 앗수르 왕의 이 같은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다.
성 경: [사10:1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총명한 자라 - 그는 자신이 거둔 모든 성공을 자신의 힘과 지혜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결과라고 해석한다. 스스로 도취하는 나르시스적 경향은 '나는 총명한 자라'는 말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는 '내 솜씨가 정말 절묘했어'라는 식의 자화 자찬(自畵自讚)의 말과 같다(Calvin). 그런데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약자에 대한 잔인한 핍박과 약탈이다.
ꃨ 용감한 자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 '용감한 자 같이'를 직역하면 '황소처럼'으로도 된다(시 22:12). '황소'는 앗수르의 권능의 상징이었다.
성 경: [사10:1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하는도다 - 정복 전쟁과 재물 탈취의 용이함이 비유로 묘사된다. 그 용이함은 어미새가 자리를 비운 새둥지에서 알을 줍는 것에 비견된다. 만약 어미새가 있었다면 생사(生死)를 각오하고 침입자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 강조점은 아무도 앗수르를 대적하거나 저항하지 못하였다는 데 있다.
성 경: [사10:15]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도끼가 어찌...큰 체 하겠느냐 - 교만의 어리석음을 선지자는 날카롭게 공박한다. 도끼와 톱은 유용한 물건이긴 하지만 사람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만약 도끼와 톱이 정반대로 자기들이 사람을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성 경: [사10:16]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살진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 앗수르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 가지로 선포되니, 하나는 병의 형별이요 다른 하나는 불의 형벌이다. '살진 자로 파리하게 한다'는 말은 질병을 보낸다는 말이다(레 26:16;신 28:22). 이는 앗수르군 진영에 전염병이 도져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이 죽었다는 기록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37:36). '영화'는 앗수르의 잘 무장된 군대를 가리킨다(Delitzsch). 그 영화 밑에 불을 질러 깨끗이 소멸시킨다는 말은 앗수르 군대의 급속하고도 완전한 멸망을 비유하는 말이다(Vitringa, Rosenmuller, Clericus). 선지자는 '불태우다'는 의미의 '야카드'(*) 동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불타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듯한 생생함을 느끼게 한다.
성 경: [사10:17,18]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형극과 질려가...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 거룩한 불꽃에의해 소멸될 대상은 두 부류로 나뉜다. 먼저 형극과 질려는 앗수르인들의 하류 계층을 가리킨다. 둘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은 상류 계층을 의미한다. 이 같은 앗수르인들의 총체적인 파멸은 '전부'라는 말에서 강조되고 있으니, 이는 직역하자면 '영혼에서 육체까지'이다. 이 말은 전인(the whole man)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현이다(시 16:9;84:2).
성 경: [사10:19]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그 삼림에...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 - 앗수르의 황폐함은 마치 거대한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몇 그루의 나무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광경에 비유되고 있다. 불에 타고 남은 나무의 수가 얼마나 적을 것인지는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다'는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어린아이가 셀 수 있는 숫자는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
성 경: [사10:20]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그 날에...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 '자기를 친 자'는 앗수르를 가리킨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외에 앗수르를 의지하다가 징벌을 당하였다. 그러나 심판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뼈아픈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후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진실로 의지할 것이라는 말이다.
성 경: [사10:2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 이 일은 스알야숩(7:3)의 이름속에 포함된 예언의 성취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능하신 하나님'(*, 엘 깁보르)은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에게 적용된 이름 중 하나이다(9:6).
성 경: [사10:2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돌아오리니 - '네 씨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창 22:17)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성취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삼하 17:11) 되었으나, 저들의 범죄로 인하여 남은 자는 소수에 국한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오직 약속의 자녀라야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롬 9:6-8,27)는 사상과 연결시켜 인용한다.
성 경: [사10:2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온 세계 중에 -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행하기로 작정하신 훼멸은 온 땅 가운데서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이니 거기에서 살아 남은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성 경: [사10:2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 앞절에서 무서운 위협의 말이 선포된 후, 곧 이어서 위로의 말이 덧붙여진다. '시온'은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곳이며,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경건하고 신실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위로는 소수의 신실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할 것이다(Calvin).
성 경: [사10:25]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내가 불구(不久)에 네게는 분(憤)을 그치고...그들을 멸하리라 - 앞절의 '두려워 말라'는 위로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가 제시된다. 즉, 하나님께서 곧 그의 분노를 이스라엘에서 앗수르로 옮기실 것이다(12절). '불구에'는 '오래지 않은 시간에', '짧은 시간에'란 말이다. 앗수르의 파멸은 다음절에서 두 가지 사건으로 형상화된다.
성 경: [사10:26]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죽이신 것같이 - 첫째, 그것은 기드온과 300 군사에 의한 미디안 군대의 패퇴에 비교된다(9:4). 오렙 반석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을 죽인 곳이다(삿 7:25).
ꃨ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같이 - 둘째, 그것은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가 몰살한 것과 비교된다(출 14:16-18).
성 경: [사10:27]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 '기름'으로 번역된 '솨멘'(*)은 '비만', '지방', '기름'을 뜻하는 말이다. 앗수르로부터의 이스라엘 해방은 황소의 목이 비대해짐에 따라 멍에가 찢어져 자유하게 됨과 같이(Hitzeg, Hendewerk) 그렇게 확실하게 올 것이다. 흠정역은 본문을 '기름부음 때문에'(because of the anointing)라고 번역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 경: [사10:28]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치중을 머무르고 - '아얏'은 예루살렘 북동쪽에 위치한 성읍으로, '돌더미'를 뜻하는 '아이'를 가리키는 듯하다(수 8:1-28). '미그론'은 벧엘에서 도보로 약 8시간쯤 걸리는 곳에 위치하였으며, '믹마스'는 예루살렘 북방 약 7마일 정도에 위치한 군사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베냐민 지파의 주요 성읍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짐을 풀었다. 이는 행군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병참 기지를 건설하기 위함일 것이다. '치중'(*, 켈라)은 '그릇, 옷, 도구, 무기'등의 군수 물자를 뜻한다.
성 경: [사10:29]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영(嶺)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 '영'(*, 마으바라)은 '산길'을 뜻하는 말로, 믹마스와 게바 사이에 있는 오늘날의 와디 슈바니트(Wady-es- suweinit)를 가리킨다(삼상 13:23). 깊고 거치른 좁은 골짜기 길을 따라 빠른 속도로 진군하던 군대는 게바(수 18:24;21:17)에서 야영한다.
성 경: [사10:30]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딸 갈림아...라이사야...너 아나돗이여 - '갈림'과 '라이사'는 기브아와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한 성읍이다(삼상 25:44). 두 곳 모두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시간 15분쯤 되는 거리에 있는 오늘날의 아나타(Anata)란 곳이다(수 21:18;삼하 23:27;대상 6:60). 28,29절에 비해 본절은 선지자의 개인적인 반응이 강하게 투사된다. '갈림'과 '라이사'는 근접한 성읍이어서 큰소리로 외치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외침은 군대가 옴을 알려주는 경계의 소리라기보다는 극도의 공포에서 우러나는 비명에 가까울 것이다.
성 경: [사10:3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맛메나 사람은...게빔 거민은 도망하도다 - '맛메나'는 '기름더미'란 뜻이다. '게빔'은 '물웅덩이'란 뜻이다. 두 성읍 다 예루살렘에 근접한 것은 확실하나 분명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들 거민 또한 황급히 도망한다.
성 경: [사10:3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 '놉'은 아마도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스코푸스(Scopus) 동산을 가리키는 듯하다(Oswalt).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열(戰列)을 재정비한다.
ꃨ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 손을 흔드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위협적인 제스처이다. 예루살렘이 정복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 앗수르 군대가 휘두르는 손이 클로즈업되면 문득 환상은 끊긴다.
성 경: [사10:3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 삼림의 비유가 다시 등장한다. 그 삼림은 앗수르이다. 벌목하시는 이는 주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도끼찍는 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진다. 위협하듯이 하늘 향해 뻗은 가지가 둘로 꺾어진다. 큰 나무, 굵은 나무 할 것없이 두 동강 난다. 이 모양으로 앗수르의 파멸은 철저할 것이다.
성 경: [사10:3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레바논이...작벌을 당하리라 - 앗수르는 종종 레바논의 삼림에 비교되었다(겔 31:3). 선지자는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의 붕괴에서 작고 가녀린 한 싹을 예언적으로 내다본다(11장).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ꃨ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 이사야의 예언 활동은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 740-680년경) 계속된다.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적 격변기이다. 웃기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구가한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낳고 그것은 다시 전쟁을 낳았다. 아하스는 수리아-에브라임 연합군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되었고(왕하 16:5),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방어해야만 하였다(왕하 18:13). 이 모든 것은 선지자에 의해 '백성들의 죄악에 따른 여호와의 심판'으로 정식화된다.
ꃨ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 '아모스'는 히브리어로 '아모츠'(*)라고 발음되며, 선지자 아모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델리취(Delitzsch)는 선지자의 아버지의 이름이 표기된 것은 그 역시 선지자였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라고 말한다.
ꃨ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 선지자의 예언은 주로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마리아를 비롯한 앗수르와 바벨론 등의 주변 열국들까지도 예언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13-27장, 34장). 이런 사실로 미루어 어떤 주석가들은 본절의 표제가 기껏해야 1-12장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들 열방들은 유다와 예루살렘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Alexander), 주제에 있어서 이차적 중요성밖에 갖고 있지 않음(Calvin)을 알 수 있다.
ꃨ 이상(異像)이라 - '이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존'(*)은 본래 엑스터시한 상태에서의 시각적 경험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되어 후에는 예언 일반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구약 예언서 가운데 본서외에 오바댜와 나훔에서 이와 동일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옵 1:1;나 1:1, '묵시').
성 경: [사1:2,3]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막(표제)이 오르면 독자의 시선은 말할 수 없이 장중하고 엄숙한 대자연의 법정으로 인도된다. 대재판관(여호와)이 있고 피고(이스라엘)가 있다. 그리고 증인들(하늘과 땅)이 있다. 이 재판은 통상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 먼저 증인이 호출된다:'하늘이여...땅이여...'(2a절). 이어서 대재판관이 피고에 대한 기소장을 읽는다(2b, 3절). 그 죄명은 반역죄이다. 선지자는 이 광경을 사람들이 잊을 수 없도록 아름답고도 슬픈 4행시로 노래지었다.
ꃨ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 세계는 그 앞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선지자는 특별히 하늘과 땅을 지목해서 부른다. 그 까닭은 하늘과 당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걸쳐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하면서 그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과 보살핌을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증인으로 참여한 바 있기 때문이다(신 4:26, 36;30: 19;31:28;시 50:4, 5).
ꃨ 내가 지식을 양육하였거늘 -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가 부자(父子) 관계에 비유된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자식이었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셨다(출 4:22;호 11:1). 이러한 관계성은 약속의 씨앗이라는 형태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말씀에서 암시되었다(창 15:4). 그 씨앗은 자라서 출애굽의 감격과 더불어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는 탐스러운 결실로 이어진다. 여호와는 갓태어난 이스라엘을 '자기 눈동자같이' 보호하고 인도했으며 온갖 향기로운 것들로 먹게 하셨다(신 32:8-14).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장성한 성년이 되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신 26:19;28:1) 이름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에 가장 잘 부합되는 시대를 찾는다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 그리고 웃시야와 요담의 시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식인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지극한 돌보심이 개역 성경에는 '양육하였다'는 한 단어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키우고'(*, 깃달티)와 '향상시켰다'(*, 로마므티)는 두 단어로 되어 있다. '깃델'과 '로멤'은 종종 동의어로 사용된다(23:4;겔 31:4).
ꃨ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 '거역하다'로 번역된 '파솨'(*)는 본래 '도망치다', '달아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의지에서 여호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ꃨ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 이스라엘은 지각이나 통찰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이스라엘이라는 주어에 종속된 '알다'(*, 야다)라는 동사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러므로써 그 표현은 더욱 강력한 것이 되었다. 70인역(LXX)은 그 뒤에 여호와를 가리키는 '나를'(*, 메)이라는 목적어를 삽입하였다. 반면에 혹자는 주인을 가리키는 '그를'(him)이라는 목적어를 보충하였다(Gesenius, De Wette). 그러나 본문 그대로가 그 기소를 더욱 통렬한 것이 되게 한다(Leupold). '알다'와 '깨닫다'의 두 동사는 모두 경험에서 직접 취해진 말이다.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식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출애굽과 같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주어졌다. 언약 관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여호와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다(출 6:7). 그러나 그 지식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는 데 이스라엘의 문제가 있다.
성 경: [사1:4]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ꃨ 슬프다 - 여호와의 기소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만큼 이를 반향(反響)이라고 하듯 그 뒤를 따르는 화답은 '슬프다'는 감탄사로 시작된다. '슬프다'로 번역된 '호'(*)는 장례식의 애도를 표시하는 비탄의 감탄사(렘 22:18)로서 탄식이나 저주의 표현에 자주 쓰인다(G.E. Wright). 이 말은 다른 곳에서 '화로다' 혹은 '화있을진저'등으로도 번역되었다(5:8;6:5;10:5;28:1 등등).
ꃨ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 - 이스라엘은 정치적, 민족적 공동체로서 자신을 여호와의 나라(백성)라고 이해할 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약속에 근거하여 자기를 여호와의 자녀(종자)라고 이해하였다. 자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이해는 이스라엘의 삶을 실제적으로 가능케 한 원동력으로서 항상 작용하였다. 여호와의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당연히 '거룩한 나라'(*, 고이 카도쉬, 출 19:6)가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범죄한 나라'(*, 고이 호테)로 전락하였다. '호테'는 '과녁을 빗나가다'(miss the mark)는 뜻을 가진 동사 '하타'(*)의 능동 분사형으로, 이스라엘이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 암 카도쉬, 신 7:6)이 되도록 기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허물 진 백성'(*, 암 케베드 아온)으로 전락하였다. '케베드 아온'은 무거운 죄짐을 지고 허덕이는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다.
ꃨ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 - 여호와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씨'(*, 제라 코데쉬, 6:13)가 되도록 기대되었으나,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행악의 종자'(*, 제라 메레임)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 말을 속격으로 받아들여 '행악자의 자손'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오히려 동격의 의미에서 '행악자들로 구성된 자손'이라고 애해하는 것이 더 낫다(Gesenius' Hebrew Grammar, ed. E. Kautzsch). 여호와께서 양육한 '자식'(*, 바님)은 어찌되었는가 ? 그는 '행위가 부패한 자식'(*, 바님 마쉬히팀)이 되었다. '마쉬히팀'은 '타락한'(Gesenius, Henderson), '남들을 부패시키는'(Leupold), '파괴적으로 행동하는'(Lange), '변질된'(Calvin) 등으로 번역된다. 시적 평행법으로 구성된 이러한 묘사들은 이스라엘이 상습적이고도 계속적인 범죄 행위로 인하여 스스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악해졌을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파괴적인 결과만을 산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ꃨ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물러갔도다 - 먼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렸다. 나아가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경멸하고 업신여겼다. 병행하는 두 구절에서 각기 '버리다'와 '경멸하다'로 번역된 '아자브'(*)와 '나아츠'(*)는 동이가어로서, 두 단어 모두 언약과 관련하여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 신들에게 전향하는 행위를 나타낸다(민 14:11;신 31:16, 20;32:19;삿 2:12 등). 랑게(Lange)는 '버렸다'를 소극적 죄악으로, '경멸하였다'를 적극적 죄악으로 분류하였다.
성 경: [사1:5]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ꃨ 너희가 어찌하여...패역하느냐 -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회개케 할 목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조치들을 취할 때마다 그 결과는 더욱더 악화되었다:'더욱더 패역하느냐.' 실로 극한점에 이른 저들의 죄악 때문에 주의 징계로써도 돌이키게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패역하다'(*, 사라)는 '진실에서 이탈하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여호와를 배신하고 등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불법을 더하다'로 번역하였다.
ꃨ 온 머리는...온 마음은 - '머리'(*, 로쉬)와 '마음'(*, 레바브)이란 명사에 관사가 수반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머리와 모든 마음'(every head and every heart)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Hitzig, Lange). 그러나 관사의 생략은 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자주 허용되었으며(9:12 참조), 또한 이 말이 인간의 신체에서 취해진 비유임을 고려할 때, '온 머리와 온 마음'(the whole head and the whole heart)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Alexander). 이것들은 일부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각각 다른 사회적 계층들(Hendewerk)이나 공동체의 내외적 상태(Umbreit)를 상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신체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치명적인 두 부분을 의미한다.
성 경: [사1:6]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ꃨ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 머리와 마음이 병들고 지친 이스라엘의 내적인 황폐함은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를 좀더 인상적으로 보여주려는 선지자의 의도에 따라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 처절한 모습으로 시각화되어 나타난다.
ꃨ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 - 오래된 상처는 고름을 짜내야 하고 출혈을 막기 위해서는 붕대를 싸매야 한다. 그리고 상처 부위를 부드럽게 하고 치료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기름을 발라주어야 한다(눅 10:34 참조).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치료조차 받지 못했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피폐함은 심각했다.
성 경: [사1:7]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선지자의 시선은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로 옮겨간다. 그는 고국 이스라엘의 황폐한 정경에서 율법의 저주를 본다.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한 자에 대해서 일찍이 율법은 경고하기를, '그 땅과 성읍이 황폐할 것'(레 26:33)이며, '알지 못하는 민족이 그 토지 소산을 먹을 것'(신 28:33)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에 임한 일이 과연 그러하였다. 선지자에게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율법의 진리를 확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ꃨ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이방인에 의해서 생기는 것과 같은 파괴'(Caspari, Lange, Knobel). 이것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채택되고 있으며 이방인을 파멸시키는 자로 명시하고 있는 앞 구절에서 강력한 근거를 얻고 있다. (2)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은 파괴'(Delitzsch). 이것은 '파괴됨'(*, 마흐페카)이란 낱말이 옛적에 소돔 성에 임했던 무서운 파멸을 지칭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 것이다(13:19;신 29:23;암 4:11). 이중 어느 해석을 취하더라도 이스라엘의 황폐된 모습에서 율법의 저주를 읽으려는 선지자의 시선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성 경: [사1:8]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ꃨ 딸 시온 - '시온'은 성전의 고귀함 때문에 예루살렘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경에서 '딸'(*, 바트)은 관용적으로 어떤 민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47:1, '바벨론의 딸';시 45:12, '두로의 딸'). 시온과 이스라엘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이룬다. 선지자는 '딸 시온'이란 말로써 사랑스럽고 정결한 이미지를 야기시킨 후 바로 뒤에서 정반대의 비유들을 대조시킴으로써 충격을 가중시킨다(Oswalt). 이 같은 기법은 3:17;4:4에서도 사용되었다.
성 경: [사1:9]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배은 망덕한 유다의 비참한 실태]
7절에서 암시된 '소돔과 고모라와의 유사성'에 의해서, 그리고 8절에서 처음 싹을 틔운 '남은 자' 개념에 의해서(4장 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m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본절은 이중적으로 결합된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은 그 죄악의 격심함과 그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었다. 이 비교는 여호와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충격적이며 수치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 이스라엘에는 극소수의 남은 자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돔과 고모라와는 구별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희망적인 것이었다. 부정과 긍정의 이런 이중적 의미는 사도 바울이 롬 9:29에서 본문을 인용할 때 전혀 손상됨이 없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즉 바울은 한편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유전만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여전히 유효함을 상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혹독한 심판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소수의 참된 신자들을 남겨두신다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ꃨ 만군의 여호와(*, 야훼 체바오트) - 이는 '하늘과 땅과 별들과 모든 거민들의 주님'(Alexander)이라는 뜻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그 전능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도, 남은 자를 보존하실 수도 있다. 만약 이스라엘이 그 악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 경: [사1:10]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 2절과 같은 동사가 사용된다. 그러나 그 대상은 다르다. 죄악의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와 거의 동일하다. 그 죄는 겔 16:49에서 '불의와 탐욕과 힘없는 자에 대한 착취'로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는 주저함이 없이 그들을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적 병행어로 기술된 '관원'과 '백성'은 나라 전체가 한결같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심판의 전달자일 뿐 아니라 율법의 참된 해석가고 부름받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율법(*, 토라)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비난(11-15절)과 교훈(16, 17절)으로 진행되었다.
성 경: [사1:1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너희의 무수한 제물 - '제물'로 번역된 '제바힘'(*)은 '살해된 동물의 고기,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피뿌리는 제물에 대한 포괄적인 명칭으로 언급되었다(19:21;삼상 2:29;3:14). 이것은 13절에서 역시 '제물'로 번역된 '미느하트'(*)와 구별되는데, '미느하트'는 피 없는 제사 즉 식물로써 바치는 소제를 말한다. 제물의 종류와 횟수, 그리고 바쳐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7항을 참조하라.
성 경: [사1:12]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 '너희에게'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너희의 손에서'이다. 에발트(Ewald)는 '너희에게'에 강조점을 두어 '그것을 누가 너 같은 사람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반면에 알렉산더(Alexander)는 '그것을'에 강조점을 두어 '그따위 헛된 출석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로 해석한다.
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여기서 '마당'은 솔로몬 성전 주변의 경내를 가리킨다. 에스겔은 안뜰과 바깥뜰이 있다고 말한다(겔 8:16;10:5).
성 경: [사1:13,14]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 이 말은 첫째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제사를 혐오하시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그들이 제사와 더불어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둘째 여호아가께서 혐오하시는 대상이 무엇임을 밝히 보여준다. 그것은 제사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근본 정신에서 이탈된 외식적인 행위이다. 본래 제사와 행악은 절대로 양립하지 못한다. 서로 배타적인 이 둘이 결합된 모양을 가리켜 성경은 '외식'이라 부른다. 가짜와 거짓을 싫어하시는 여호와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진리이신 그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예배 행위에 대한 여호와의 태도는 14절에서 세 개의 동사로 보다 구체화된다:'싫다'-'귀찮다'-'지겹다'.
성 경: [사1:15]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손을 펼 때에 - 문자적으로는 '손을 뻗칠 때'이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것은 구약 시대에 가장 일반화된 기도 자세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는 내적인 열망의 가시적 표현이라고 믿어졌다.
ꃨ 많이 기도할지라도 - 혹자는 이 말을 '중언 부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큰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도마저도 하나님께서는 불쾌할 뿐이다. 참되고 진실한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불의로 얼룩진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탄원이며,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려는 거룩한 열망이다(주기도문 참조).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는 헛된 몸짓과 공허한 울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ꃨ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경멸하시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다. 붉은 '피'(*, 다밈)는 '악을 행한다'(13절)의 시각적 표현이다. 즉, 이 '피'는 희생 제물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혹은 상징적 의미에서의 악행을 의미하는 것이다(Calvin). 사해 사본의 이사야서는 이 말 뒤에 '너희 손가락은 불법으로 물들었다'는 구절을 첨가하였다.
성 경: [사1:16]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사랑을 기억하셔서 그들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훈하신다. 그것은 먼저 악에서 떠나라는 말로 제시된다. '스스로 씻으라'(*, 라하추)는 말은 원래 신체적, 의학적 의미에서 자신을 세척하라는 말이며, '스스로 깨끗케 하라'(*, 하자쿠)는 도덕적 의미에서 자신을 성결케 하라는 말이다. 이 두 말의 상관 관계에 대해 델리취(Delitzsch)는 앞의 씻음은 단번의 회개요, 뒤의 씻음은 날마다의 점진적인 성화라고 하였다.
성 경: [사1:17]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책망]
ꃨ 선행을 배우며 - 악을 그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그 필요 충분 조건에 응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적으로 너무나 무지해서 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초등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처럼 이제라도 선행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힘써 배워야 할 과목은 '공의'이며, 이 과목의 주된 학습 내용은 본절에서 세 가지 실천 사항으로 언급된다.
성 경: [사1:18]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회개의 촉구]
ꃨ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양털같이 되리라 - 평행으로 이루어진 이 두 구절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다면, 그것이 어떻게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질 수 있겠느냐 ?'(Kaiser, Marti, Michaelis 등).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제사 행위를 통해서 그들의 죄를 중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과 착각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조롱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것을 의문문으로 해석해야 할 어떤 근거도 없다. 또 전후 문맥을 고려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음 해석을 취한다. (2) '너희 죄가 주홍 같고 진홍 같을지라도, 눈이나 양털처럼 희어지리라'(Alexander, Delitzsch 등). 죄가 여기서 붉은색으로 표현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피로 물든 손과의 연관성 때문이지만(15절), 종말론적인 표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흰색의 반대는 검은색이지만 종말론에서 희색의 반대는 붉은색이다. 흰색은 세마포를 입은 성도의 색이며 성결의 색으로 간주된다(전 9:8;단 7:9;마 17:2;계 1:14;3:4;7:9;19:8). 반면에 붉은색은 바벨론의 색이며 지상 나라의 색이며 마귀의 고유한 색이다(계 12:3, 9;17:4). 본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사이에 변론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에도 불구하고'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자유이며 사랑이다. 공의대로만 보자면 이스라엘은 사형을 언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보적 상벌의 법칙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 자유로써 이스라엘을 변화시키시며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려고 하신다. 이러한 가능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유는 진실로 새로운 삶으로 결실한다.
성 경: [사1:19,20]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회개의 촉구]
수농과 거역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주제는 율법이 선언된 이래 불변의 주제로서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레 26장 ;신 28장). 본문은 그 내용의 대조와 발음의 유사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절의 '먹다'(*, 토켈루)와 20절의 '삼키우다'(*, 테우클루)는 언어 유희의 대표적인 예다. 19절과 20절은 두운법(頭韻法)으로 이루어졌다.
ꃨ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창 3:18)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가인이 그 아우를 죽였을 때 그는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아니할 것이라'(창 4:12)는 저주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땅의 소산을 먹는 것과 인간의 행사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종종 물질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는데, 이는 참것의 그림자인 현재의 복락을 맛봄으로써 하늘의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이다.
성 경: [사1:2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유다의 패역]
ꃨ 신실하던 성읍이...창기가 되었는고 - 원문대로 읽으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가, 신실하던 성읍이'이다. 2절에서 부자 관계로 표현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여기서 부부 관계로 표현되었다. 부부 관계의 기초는 '신실함'(*, 네에마나)이다. '네에마나'는 '받치다', '기초하다', '기대다'는 뜻을 가진 '아만'(*)이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성도들이 기도 끝에 낭송하는 '아멘'이란 말도 이 말에서 비롯된 것임). 칼빈(Calvin)은 이 말을 '순결함'으로 이해하였다. 부부 관계에서 순결이 파괴될 때 간음이 되듯이,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배반할 때 그것은 영적 간음이 된다(출 34:15, 16;신 31:16;호 1:2 이하). 그리하여 한때 순결하였던 신부 이스라엘은 창녀(*, 자나)가 되었다. 어찌하여(*, 예카). 이 말은 애가(elegy)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이다. 예레미야 애가는 이 말로 시작하고 이 말로 표제를 삼았다(애 1:1;2:1;4:2). 선지자의 탄식은, 이스라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의 확인이다.
ꃨ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 과거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추함이 '이제는'(*, 아타)이란 말에서 극적으로 대비된다. '살인자들'(*, 메라츠힘)은 강도나 살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가장하여 부정직한 방법으로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소유를 착취하는 자를 의미한다(엠 2:34;요일 3:15). 그 주범은 유다의 지도자라 자처하는 고관들과 방백들이다.
성 경: [사1:22]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유다의 패역]
ꃨ 네 은은...너의 포도주에는 - 비유적으로 표현된 '은'과 '포도주'는 그 고상함과 귀중함에서 볼 때 높은 계급의 관원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나 은은 찌끼가 되고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다. 이 말은 이전 황금 시대에 고관들에 의해 나타났던 덕과 공의가 쇠퇴하고 지금은 그 찌꺼기와 그림자만 남았음을 뜻한다(Delitzsch). 비록 찌끼가 은을 대신하여 아직도 반짝이고 포도주가 불그레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순수를 상실한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럴 듯한 가짜를 싫어하신다(딤후 3:5).
성 경: [사1:23]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유다의 패역]
ꃨ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 '방백들'(*, 사림)과 '패역함'(*, 소레림)은 두운법에 맞춘 것이다. 선지자는 두운법을 사용함으로써 방백들과 그들의 패역함을 한층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방백들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패역한 사람들이다'이다.
ꃨ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 '사랑하며'(*, 오헤브)와 '구하며'(*, 로데프)는 모두 분사로 쓰여 그들의 행위가 계속 지속되며 습관적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구하다'는 동사는 원어상 '따라가다', '열심히 추구하다'는 뜻을 갖는다. 그들이 그처럼 열심히 추구하고 흠모해 마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 그것은 '뇌물'(*, 솰르모님)이었다. '뇌물'은 '평화'를 뜻하는 '솰롬'(*)과 발음이 비슷하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구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뇌물'이었다.
성 경: [사1:24]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 - 하나님의 성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이처럼 한데 모아 놓은 곳은 이곳 외에 없다. '주'(*, 하아돈)라는 명칭은 본서에서 '만군의 여호와'와 결합되어 위협과 징벌을 가하는 경우에 쓰인다(3:1;10:16, 33;19:4). '만군의 여호와'에 대하여는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의 전능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권위있는 통치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창 49:24;시 132:2, 5 등에서는 '야곱의 전능자'라고도 표현되었다(49:26;60:16). 70인역(LXX)에서는 이것 대신 '야곱의 전능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선지자는 이 세 가지 이름을 한데 묶음으로써 여호와의 무한한 엄위와 전능하심을 최고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그 뒤에 이어질 말씀들이 매우 중요하며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하시되'(*, 네움)라는 동사에서 한결 분명해진다.
ꃨ 말씀하시되 - '네움'은 비밀스럽고 중요한 사실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창 22:16에서 처음 나오고 렘, 겔에서 자주 등장함).
성 경: [사1:25]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나의 손을 내게 돌려 - '손을 되돌린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개입, 간섭하실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렘 6:9;겔 38:12;암 1:8). 하나님의 간섭은 찌끼를 태우고 혼잡물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몇몇 주석가들은 이것을 징벌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 그러나 '아쉬바'(*)라는 동일한 동사로 시작되는 26절과 비교해 볼 때 회복의 의미가 더 강한 듯하다.
ꃨ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 문자적으로는 '잿물처럼 너의 찌끼를 녹이고'이다. 하나님은 마치 잿물을 가지고 은에서 납 성분을 녹이듯이, 예루살렘의 경건치 못한 자들을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성 경: [사1:26]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본래와 같이 - '사사들'과 '모사들'은 권력을 쥐고 있는 관원들과 방백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정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불순물이 제거된 뒤에 예루살렘은 21절 상반절에 기록된 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평화의 구현기요 메시아적 통치의 예표로서 상징된다. 그러면 이러한 예루살렘의 회복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 가까운 미래에 있어서 어쩌면 그것은 유다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팔레스틴에 귀환할 때 이들을 지도한 스룹바벨이나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히 실현되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24:23).
성 경: [사1:27]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귀정(歸正)한 자 - KJV는 이것을 범죄로부터 돌아선 자라는 뜻의 '개종자들(converts)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랑게(Lange)는 '포로에서 귀환하는 자들'에게 이것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것을 이중적 전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가까운 미래에서는 '포로에서 풀려난 자들', 그리고 먼 미래에서는 '죄로부터 구속된 성도들'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 경: [사1:28]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그러나 패역한 자와...멸망할 것이라 - 25절과 관련하여 정련 과정의 반대 측면, 즉 찌끼와 혼잡물의 운명이 제시된다(Lange). 그들의 운명을 강조하는 듯이 '패망'(*, 쉐베르)이란 명사가 문장의 맨 앞에 나온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파멸, 패역한 자들과 죄인들은 모두 함께. (그리고) 여호와를 버린 자들은 종말에 이르리라.'
성 경: [사1:29]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상수리나무...동산 - 선지자는 부분을 들어 전체를 나타내는 수법으로 '상수리나무'(*, 엘림)와 '동산'(*, 가노트)을 들어 당시에 편만해 있던 모든 유(類)의 거짓된 우상 숭배를 표현한다. 류폴드(Leupold)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이것들은 두 가지 방식의 우상 숭배, 즉 나무 숭배 의식(tree- cult)과 동산 숭배 의식(garden-cult)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무에 관하여는 57:5;왕하 16:4;렘 2:20;3:6;17:2;겔 6:13;호 4:13을, 동산에 관하여는 65:3;66:17을 참조하라.
성 경: [사1:30]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물 없는 동산 - 늘 푸른 나무와 물기 어린 동산처럼 그렇게 번성하기를 꿈구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달려간 그들은 허무한 우상의 결국만큼이나 자신들도 헛되이 비참함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Alexander). 그러나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를 택하고 그로 즐거워하는 자들의 운명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할'(시 1:3) 것이다. 선지자가 종말론적 구원의 표상과 관련하여 동산에서 물이 넘칠 것을 노래한 구절로는 35:6, 7;41:18;44:3;48:21;66:12 등이 있다.
성 경: [사1:31]
주제1: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주제2: [심판 후의 구속]
ꃨ 강한 자는...그의 행위는 - '강한 자'(*, 헤하손)는 불법한 통치자(아마도 '우상 숭배를 조성한 지도자', Leupold)이며, '그의 행위'(*, 포알로)는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우상(혹은 '안녕을 도모하는 그 수단과 고안물', Vitringa;'우상 숭배하는 행위', Lange)을 의미한다. 우상은 불티와 같아서 그것을 따라가는 자에게 재앙만을 야기시킨다.
성 경: [사2:1]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ꃨ 아사야가 받은 바...말씀이라 - 문자적으로는 '이사야가 본(*, 하자) 말씀(*, 하다바르)이라'이다. 이런 표현은 매우 드물다. 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주의 말씀이 ...에게'이다(렘 14:1;겔 13:1;호 1:1;욜 1:1;욘 1:1;미 1:1;습 1:1 등). 아모스만이 이와 비슷한 표현법을 쓰고 있다(암 1:1).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 이외에도 '사건', '사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으로 파악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의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곧 사건이며, 사건은 곧 그의 말씀인 것이다.
성 경: [사2:2]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ꃨ 말일에 - 문자적으로는 '날들의 끝에'(*, 베아하리트 하야밈)이다. 이 말은 본서에서 단 한번 나온다. 그것은 창 49:1;민 24:14;신 4:30;31:29 등에서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에프 에스카톤 톤 헤메론, 히 1:2)로 번역하였다. 율법 학자들은 그날을 메시야의 날로,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옛 세대의 끝으로 보았으며, 오늘날 많은 주경 학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에 이르는 신약 시대로 이해한다.
ꃨ 여호와의 전의 산이...뛰어나리니 - '여호와의 전의 산'은 '시온'을 가리킨다(시 2:6;3:4;24:3;렘 31:23;욜 2:1;3:17 등). 고래(古來)로 산들은 그 높이와 위엄에서 사람들의 찬탄을 받아왔으며 신들이 거주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숭배되어 왔다(예컨대, 희랍의 올림푸스 산 등). 그러나 실제로 시온은 전혀 높지 않은 자그마한 언덕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바산의 산들이 이 낮고 하찮은 하나님의 산을 내려다 본다고 말하였던 것이다(시 68:16). 그러나 종말에는 모든 것이 극적으로 변화된다. 그날에 시온은 가장 높아질 것이요, 그 영광 앞에서 다른 모든 산들은 평지나 다름 없어질 것이다(슥 14:10).
ꃨ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모여든다'(*, 나하루)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흐른다'(stream)는 뜻이다. 그 옛날 범죄의 절정을 상징하였던 바벨탑에서 각처로 분산되었던 인류는(창 11:1-9)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다시 시온 산으로 물밀듯이 몰려들 것이다. 인류의 범죄와 구원의 역사는 '바벨탑에서 시온 산으로'(from the Babel to the Zion)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시온 산이 '하나님이 세운 구원의 높이'를 상징한다면, 바벨탑은 '인간이 세운 죄악의 높이'를 상징한다.
성 경: [사2:3]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ꃨ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나올 것임이니라 - 백성들이 그처럼 시온에 오고자 한 것은 거기에만 율법, 즉 여호와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율법은 '참된 종교'(Alexander) 혹은 '시내 산의 토라와 대조적인 의미에서 시온의 토라라 할 수 있는 복음'(Delitzsch)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의 강조점은 '시온에서부터'에 놓는다. 이는 구원의 길이 시온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요 4:22).
성 경: [사2:4]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메시야 통치에 관한 예언]
ꃨ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판결하시리니 - 앞에서 율법의 수여자 혹은 인생의 행할 길을 가르쳐 주시는 참된 교사로 그려졌던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민족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며 판단하시는 재판관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판결과 중재가 가능한 것은 열방들이 율법의 말씀으로써 삶의 지침을 삼고 그 뜻에 기꺼이 복종하려 하기 때문이다. '판단하다'(*, 솨파트)는 '다스리다', '왕노릇하다'(Calvin)나 '징벌하다'(Cocceius)는 뜻보다는 '중재하다'(Alexander)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ꃨ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만들 것이며 -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때 전쟁도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그날에 사람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제작하였던 칼과 창을 생산적인 농기구로 바꾸게 될 것이다(슥 9:10). '보습들'(*, 이팀)은 당을 갈아서 흙덩이를 일으키는 도구이며, '낫들'(*, 마즈메로트)은 쓸데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전지용(剪枝用) 가위이다.
성 경: [사2:5]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야곱 족속아 오라 - 문자적으로는 '야곱의 집이여, 오라'이다. '야곱의 집'은 하나님의 선택된 가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다(8:17; 10:20;14:1;29:22 등). 앞절에 비추어 볼 때 본문에는 교묘한 대조가 숨어 있다. 즉 율법에 무지한 이방인들조차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데,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은 오히려 뒤로만 물러간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바인을 들어 이스라엘에게 고상한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선교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롬 11:14).
ꃨ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 '여호와의 빛'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Delitzsch) 혹은 '여호와께서 계시해주신 진리의 말씀인 성경'(Alexander)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타민족이 갖지 못한 이 빛을 특권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달리 빛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으며 단지 그 가운데 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암흑 가운데서 방황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야만 되었다.
성 경: [사2:6]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 원문대로 읽으면 '가득 채워졌다(*, 말레우), 동방으로부터(*, 미케뎀)'이다. 여기서 '동방'은 지리적으로 팔레스틴 동쪽 특히 앗수르, 아람, 바벨론 등을 가리킨다. 고대 근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이들 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온 이방 풍속들로 온 이스라엘이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ꃨ 이방인으로 더불어...언약하였음이라 - 본문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1) '이방인의 자녀들에게서 만족을 취하였다'(Luzzatto). (2) '이방인들과 결혼함으로 인해 연합되었다'(LXX, Targum). (3) '이방인들과 상업적 계약을 체결하였다'(Cheyne). 심지어 제롬(Jerom)은 여기서 남색(男色)과 같은 성적(性的)범죄를 발견하기도 한다. 문맥과 관련하여 이 말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정치적, 상업적,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이방들과의 교류가 확대되어 결과적으로 성별된 여호와의 백성과 거룩하지 못한 태생의 이방인들 간의 구별이 폐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본문은 앞절과 관련하여 대조적이다. 즉 말일에 시온으로부터 여오화의 빛이 이방으로 퍼져나갈 것임에 반해, 오히려 이방의 악한 풍습들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어온 것이다.
성 경: [사2:7]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마필(馬匹)이 가득하고 - 이방과의 자유로운 교섭의 결과, 이스라엘 땅에 경제적 부(富)를 상징하는 은금과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마필 역시 가득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일찍이 모세에 의해 강력하게 공고된 것들이었다(신 17:16, 17). 그러나 자기 의지의 수단으로서 경제적, 군사적 힘을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솔로몬 왕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왕상 10:26-11:8), 웃시야 왕 때에는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되었다(대하 26:6-15). 여기에도 앞 구절(4절)과 비교해 볼 때 대조가 암시되어 있다. 즉, 말일에 전쟁 무기가 평화의 도구로 바뀌어지는 것과 이와는 반대로 마필로 힘을 과시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비교해보라.
성 경: [사2:8]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우상도 가득하므로 - '가득하다'(*, 말라)는 동사가 계속해서 문두(文頭)에 나온다. 본서에서 우상과 관련한 구절들로는 40:18-20;41:6, 7, 29;44:9-20 ;45:16-20; 46:1, 2, 5-7 등이 있다. 종말의 풍경과 이스라엘의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가 여기까지 이어진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지만 정작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에는 우상만이 가득하다.
성 경: [사2:9]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 이러한 우상 숭배는 천한 자와 귀한 자, 즉 사회 각 계층에 편만히 퍼져 있었다. '천한 자'로 번역된 '아담'(*)과 '귀한 자'로 번역된 '이쉬'(*)는 구약에서 인간에 대한 대표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전자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후자는 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5:15).
성 경: [사2:10]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 이 후렴구의 변형이 19절과 21절에 나온다.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사람들은 바위 구멍 속에 몸을 피하거나(삿 6:2;삼상 13:6) 얼굴을 땅속에 묻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 임할 재앙이 너무도 크고 두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구절이 동방에서 계절풍을 피하거나 사막을 통과하는 지독한 열풍을 피하는 관례적인 습관에서 착안된 표현이라고 추정한다(Leupold).
성 경: [사2:11]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눈이 높은 자가...굴복되고 - '눈이 높은'(*, 에네 가브후트)은 마음의 내적 교만이 나타내는 외적 몸짓을 가리키는 것이다(시 101:5, Calvin). 본문에서 '높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 ('가브후트'와 '룸')와 '낮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솨펠'과 '솨흐')가 평행한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극명하다. 우리가 여호와를 높이면 그가 우리를 높이시려니와, 우리가 여호와를 낮추면 그도 우리를 낮추신다(57:15).
성 경: [사2:12]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 - 문자적으로는 '만군의 여호와에게 있는 한 날'이다. 그날은 (1)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다. 이 칭호는 그가 전우주적인 심판을 시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Leupold). 또한 (2) 여호와의 생각 속에 영원한 비밀로 존재하다가 지정된 때가 이르렀을 때 역사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날이다(Delitzsch). (3) 반드시 하루일 필요는 없다. 주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시 90:4;벧후 3:8, Lange). 마지막으로 (4) 두려운 심판의 날이다. 이것은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 계속되는 전치사 '알'(*, against)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날은 이미 많은 선지자들로부터 예고된 최후의 날이다(13:6;욜 1:15;2:1, 11, 31;암 5:18, 20;습 1:7, 14;슥 14:1 등).
ꃨ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自高)한 자에게 - 심판의 날에 이르러 파멸의 운명에 처해질 대상들이 먼저 열거되었다. 이를 '사람'(everyone)의 의미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인 '모든 것'(everything)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Vitringa, Gesenius, Alexander). '높음'을 나타내는 세 개의 형용사 - '교만한'(*, 게에), '거만한'(*, 람), '자고한'(*, 니사)-는 동의어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뒤에 나오는 자연들과 결부시켜 '장엄하고 인상적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높이 들린 모든 것들에 대하여'로 해석하기도 하고(Leupold),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창 3:5, J. Watts).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진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Lange).
성 경: [사2:13-16]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여호와의 심판은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시에 넘어뜨리는, 지진을 동반한 무서운 폭풍으로 형상화된다. 그 폭풍은 북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바다로 향한다(Kaiser, Leupold). 이 방향은 이스라엘의 적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방향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ꃨ 레바논의...백향목과 바산의...상수리나무 - 레바논은 '흰 산'이란 뜻인데, 그 산의 꼭대기가 1년 중 거의 절반이 눈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팔레스틴과 시리아 접경에 위치한다. 그곳의 자랑인 백향목은 성경에서 종종 위엄과 능력의 상징으로 취해졌으며(삿 9:15;왕상 4:33;왕하 14:9;시 92:12;104:16), 세속적인 교만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시 29:5, 6;렘 22:6;슥 11:1, 2). 바산은 요르단 동쪽에 자리하고 길르앗 북쪽에 위치하며 그 남쪽으로는 야르묵 강이 흐르는 고원 지대이다. 지금은 엔-누크라(en-Nuqra)라고 불리며 가축을 키우기 좋은 목축지가 있다. 황소와 상수리나무로 유명하다(시 22:12;겔 27:5, 6;39:18;암 4:1). 주석가들은 이것들이 유다의 높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Jerome, Vitringa, Gesenius). 이 나무들은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올 때 군사용 목적으로 벌목되어 완전히 황폐화되고 말았다(37:24).
성 경: [사2:17]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 약간 변형된 11절의 반복이다. '눈이 높은 사람'(*, 에네 가브후트 아담)이 '스스로 높은 사람'(*, 가브후트 하아담)으로 바뀌었을 뿐, 그 의미는 11절과 동일하다. 이런 반복은 이전의 상세한 시각적 묘사로부터 다시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진술로 환원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시의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사2:18]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 선지자의 시선은 여호와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대상인 우상으로 옮긴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엘릴림)처럼, 완전한 무(naught)로 화할 것이다(슥 13:2). 랑게(Lange)는 13-16절이 7절에 관계되듯이, 본절 이하는 8절에 관계된다고 주장한다.
성 경: [사2:19]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사람들이 암혈(巖穴)과 토굴로 들어가서 - 10절의 경고가 여기서 직접적인 예언으로 바뀐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그 숭배자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상들이 무로 화하듯이, 그 숭배자들은 여호와의 진노를 피해 암혈과 토굴에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 경: [사2:20]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ꃨ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 70인역(LXX)은 이 구절에 착안하여 그들이 동물 숭배에 빠졌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Luzzatto, Malbim). 그러나 두더지와 박쥐는 우상 숭배자들이 몸을 피할 '암혈'과 '토굴'과 연관하여 취해진 것이다. 즉, 그들은 두더지와 박쥐들이 서식하고 있던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금과 은의 형상들을 던지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행동은 '역겨움에서'(Leupold), 혹은 '심판자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Delitzsch) 취해질 것이다.
성 경: [사2:21]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본문은 우상에 대하여 언급할 때마다 뒤따라 나오는 후렴구이다(10, 19절).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수치와 파멸이 어느 정도로 극심할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하여 후렴구로 반복되는 것 같다.
성 경: [사2:22]
주제1: [시온의 영광(미래)과 수치(현재)]
주제2: [우상 숭배자에게 임할 심판]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후기의 삽입으로 간주되었으며(Diestel, Cheyne), 어떤 곳에서는 아예 빠져 있다(LXX).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본절은 앞에서 논의된(5절 이하) 내용의 결론이며, 동시에 3;1 이하에서 새로 이어질 내용의 도입부로 작용한다.
ꃨ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 인생의 유한함이 창 2:7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기술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이 붙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시편 기자는 그 허망함을 이렇게 노래했다:"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圖謀)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이와 관련된 구절들로는 욥 7:7;34:14, 15;시 78:39;90:36-6;104:29 등이 있다.
성 경: [사3:1]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예루살렘과 유다 - 1:1과 2:1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聖都)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유다 전역으로 퍼져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그리고 유다로부터'로 되어 있다.
ꃨ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모든 물 - 유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모든 것들의 구체적 대상으로서 먼저 언급된 것은 '양식'(*, 레헴)과 '물'(*, 마임)이다. 이 둘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 불가결한 두 요건으로서 거론된 것이다(Alexander, Delitzsch). 양식과 물을 끊는다는 것은 기근을 뜻하며(레 26:26;겔 4:16;5:16;14:13), 이것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공 때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25:3;렘 38:9;애 4:4, 10).
성 경: [사3:2,3]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하나님의 심판은 앞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단순히 육체적 파멸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의 총체적 와해로까지 이어진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유다를 지탱하던, 다시 말하면 유다 사람들이 의뢰하고 의지하였던 그들의 지도자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1) 군사적 지도자들: 용사(*, 깁보르) - '힘있는 남자' 혹은 '영웅'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높은 계급의 군대 장관을 뜻한다(Michaelis, Gesenius, Delitzsch). 전사(*, 이쉬 밀르하마) - 군인을 가리킨다. 이 말은 앞의 '용사'와 관련하여 높은 계급의 군인으로 이해되기도 하고(vITRINGA), 혹은 '용사'와는 구별된 사병으로 이해되기도 한다(cOCCEIUS, dELITZSCH). 오십부장 - 50명으로 구성된 군대의 최하급 단위 부대의 장을 말한다. 이것은 본래 행정, 사법적인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나(출 18:25, 26), 후에 군사적 목적으로 변경되었다. (2) 정치적 지도자들: 재판관(*, 쇼페트) - 여기서는 사법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당국에 의해 임명된 행정 관리들을 가리킨다. 장로(*, 자켄) - 이들은 나이든 노인으로 그들의 지혜와 경륜을 발휘하여 지도적 위치에서 공동체를 다스렸다. 귀인(*, 네수 파님) - 문자적으로는 '얼굴이 들린 (사람)'인데,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하했던 사람을 가리킨다(9:15;왕하 5:1;욥 22:8). 모사(*, 요에츠) - 왕의 측근으로서, 나라의 중요한 정책 결정에 조언을 했던 사람을 말한다. (3) 종교적 지도자들: 선지자(*, 나비) -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계시해주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들이 복술자와 함께 열거된 것으로 보아 거짓된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같다(Michaelis, Gesenius). 복술자(*, 코셈) - 점을 쳐주는 사람을 가리킨다(겔 21:21-23). 이런 행위는 모셉법에 의해 정죄되었다(신 18:10-14). 능란한 요술자(*, 네본 라하쉬) - '라하쉬'(*)는 '속삭이다'는 뜻으로서, 마술 주문을 외우거나 중얼거리는 것을 가리킨다(삼하 12:19;시 41:7). (4) 산업 기술자: 공교한 장인(*, 하캄 하라쉼) - 기술에 능한 사람들로서 전쟁 무기의제조(Michaelis) 혹은 우상 제조(Umbreit) 혹은 연금술(Gesenius, Ewald) 혹은 산업 기술(LXX, Luther, Vitringa)에 종사한 사람들을 가리킨다(왕하 24:14;렘 24:1). 앞절과 마찬가지로 본문의 예언 또한 느부갓네살 왕이 침공해 올 때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왕하 24:14-16을 참조하라.
성 경: [사3:10,11]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가 반복되어 나온다. 사람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기 마련이다. 의를 심으면 의의 열매를, 악을 심으면 악의 열매를 말이다. 비록 경험적 현실에서 이 같은 응보가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으나(시 73편;말 2:17;3:13)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날에 모든 것은 바르게 드러날 것이다. 선지자는 지혜 문학적 격언 형식으로, 혹은 일반적인 금언 형식으로 이 같은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이 말이 갖는 통시적, 공시적 보편성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 경: [사3:12]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 선지자는 앞에서 논의된 내용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는 법정 진술로 이어지는 뒷부분과의 연관성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문은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내 백성이여 !(혹은, 내 백성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들의 압제자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여자들이 그들을 억압할 것이다'이다. 여기에서 '아이들'이 나이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성격적 측면에서의 방자함과 치졸함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4절). '아이들'과 더불어 거론된 '여자들' 역시 무능력하고 무자격한 통치자의 예로서 제시된 것이다. 어쩌면 선지자는 아달랴 왕비의 악한 통치(왕하 11:1-20)나 이세벧의 폭정(왕상 18:4;21:5 이하)을 상기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Leupold). 이러한 무자격한 통치자들이 나라를 주관하는 경우, 그 치명적인 결과는 자명해진다.
성 경: [사3:13]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ꃨ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 본문에 사용된 두개의 동사, 즉 '일어나시며'(*, 니차브)와 '서시도다'(*, 오메드)는 각각 분사형으로서 여호와께서 재판하시기 위하여 법정에 들어서시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해주고 있다(미 6:1 이하). 재판하시는 분으로서 여호와는 기소하는 검사요, 심판하는 판사며 집행자로 묘사된다(Delitzsch).
성 경: [사3:14]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ꃨ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 원문대로 읽으면 '그리고 너희, 너희가 먹어 치웠다. 포도원을'이다. 강조점이 '너희'(*, 아템)에 놓인다. 여기에 묘사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5장). 그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가꾸고 돌보는 자들로 방백들과 장로들, 즉 지도자들을 세우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도원을 지키라는 부름을 받은 그들에 의해 포도원이 침탈되고 황폐케 된 것이다. 병행하는 다음 구절에서 그들의 죄악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ꃨ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있도다 - '탈취한 물건'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게젤라트'(*)는 '가죽을 벗기다', '상처를 입히다'는 뜻의 동사 '가잘'(*)에서 파생된 말이다. 가난한 자를 착취, 약탈하는 것은 그의 피부를 벗기는 것과도 같은 끔찍한 악행이다.
성 경: [사3:15]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ꃨ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 백서들에 대한 지도자들의 범죄가 두 동사로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짓밟다'(*, 다카)는 '박살내다', '짓이기다'는 뜻이며, '맷돌질하다'(*, 타한)는 '잘게 부수다', '억압하다'는 뜻이다. 여기 보여진 광경은 너무나 선명하고 참혹해서 결코 잊을 수 없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땅에 가슴을 대고 엎드려 있으며 그 얼굴은 피와 먼지로 뒤범벅되어 있다. 그 얼굴을 관원의 발이 짓누르고 있다. 그가 발에 힘을 줄 때마다 가난한 자의 얼굴은 더욱더 땅에 파묻힌다. 백성들에 대한 지도자들의 횡포가 이와 같았다. 지도자들의 범죄는 대개 정치적 이유로 밝혀지지도 않고 묵과되기 쉽다. 그러나 공의로운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절대로 간과되지 않는다(잠 14:31;19:17;21:13;22:16, 22;28:27;29:7 참조).
성 경: [사3:16]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시온의 딸들 - 1:8의 '딸 시온'이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의인화시킨 것이라면, 본문의 '시온의 딸들'(*, 베노트 치욘)은 시온에 거주하는 부녀들을 가리킨다.
ꃨ 교만하여 - 교만의 주제가 2:11 이하에서 계속되고 있다. 남자들의 교만이 주로 권력과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나타난다면, 여자들의 교만은 주로 허영과 음란으로 나타난다.
ꃨ 늘인 목 - 고개를 숙이며 걷는 것이 겸양의 표시로 간주되듯이, 목을 늘여 머리를 하늘 높게 쳐들고 걷는 것은 교만의 표중으로 간주된다.
ꃨ 아기죽거려 행하며 - 아이들처럼 잰 걸음으로 걷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다. 루터(Luther)는 이것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걸었다'로 번역하였다.
성 경: [사3:17]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 '정수리'는 머리 꼭대기를 말한다. 교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 하나님은 딱지(*, 시파흐)가 생기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딱지는 '옴 따위의 피부병'(KJV), '앞머리를 깎아 미는 것'(G.R. Driver), '대머리가 되게 하는 것'(Alexander) 혹은 '비듬투성이가 된 불결한 모습'(Lange) 등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아름다움을 생명으로 하는 여성에게 이것은 치명적인 형벌이다.
성 경: [사3:18]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구체적 목록을 열거하기에 앞서 선지자는 이것들을 '티프에레트'(*)라는 한단어로 요약한다. 이 말은 '장식품' 혹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번역할 수 있다.
ꃨ 발목 고리(* -, 아카심). 이는 금, 은, 상아 고리로서 발목에 다는 것이다.
ꃨ 머리의 망사(*, 슈비심). 이는 머리에 덮은 그물 아래로 금박이나 은박실을 땋은 것으로, 대개 리본 장식을 매었다. 반달 장식(*, 사하로님). 목에 둘러서 가슴까지 내려오게 한 반달 모양의 금속 목걸이를 말한다(삿 8:21).
성 경: [사3:19]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면박(*, 레알로트) - 얼굴에 걸치는 값비싼 면사포를 말한다.
성 경: [사3:20]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발목 사슬(*, 체아도트) - 이는 '걷다'(*, 차아드)에서 파생된 것으로, 걸음걸이를 멋지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발목 고리에 연결하여 단 장신구이다.
ꃨ 호산부(*, 레하쉼) - '마술부리다'(*, 라하쉬)에서 파생된 것으로, 부적과 같은 말이다.
성 경: [사3:21]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지환(*, 타바오트) -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말한다.
ꃨ 코 고리(*, 니즈메 하아프) - 코를 뚫어 매다는 것으로, 동방에서 널리 사용된 장신구의 일종이다.
성 경: [사3:22]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예복(*, 마할라초트) - 특별한 때에만 입는 정장을 말한다.
ꃨ 겉옷(*, 마아타포트) - 옷 위에 걸쳐 입는 가운 비슷한 옷으로, 안에 입은 옷보다도 더 화려하였다.
성 경: [사3:23]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세마포 옷(*, 세디님) - 인도의 직물로 만든 베일이나 옷을 말한다(삿 14:12, 13, 잠 31:24).
ꃨ 너울(*, 레디딤) - 머리에서부터 겉옷 위로 둘러 전신을 가리는 넒은 망토를 말한다.
성 경: [사3:24]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을 때, 부유한 시온의 부녀들은 축적된 부(富)를 이용하여 온갖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식품들로 몸을 가꾸었음을 이상의 목록들에서 알 수 있다. 마땅히 가져야할 내면의 덕(벧전 3:3, 4 참조)은 가꾸지 않고 오직 외모를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된 그들에게 여호와의 진노는 다음과 같이, 즉 먼저 사치스러운 것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누추하고 비참한 것들을 들여놓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곧 없어질 좋은 것들과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나쁜 것들의 대조가 '대신에'(*, 타하트)라는 전치사에 의해 짝지워진다. '타하트'는 본절에 모두 5번 나온다. '자자한 흔적'(*, 키)이란 노예 혹은 죄인의 표시로서 불로 낙인한 것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 열거된 사항들은 모두 전쟁과 관련된다. 즉, '상처입고-포로로 잡히고-슬픔으로 머리를 뜯고-국가적 재난에 직면해 베옷을 입고-끝내는 노예가 된다.' 시온의 부녀들이 누렸던 한때의 쾌락과 허용은 전쟁과 더불어 일순간에 재난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성 경: [사3:25]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너희 장정(壯丁)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戰亂)에 망할 것이며 - 앞절에서 암시되었던 상황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전쟁에서 읽은 것은 장식품들만이 아니다. 그들의 남편이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 자신은 과부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불행 이외에, 나라 전체가 치욕적인 패배 속에 함몰되리라는 내용도 함축되어 있다.
성 경: [사3:26]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백성들이 받은 심판]
ꃨ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 성문은 백성들의 삶의 중심지이다. 한때 웃음소리 드높았던 그곳이 그날에는 통곡소리로 가득할 것이다. 한때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던 그곳은 그날에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울부짖음만 스산하게 울려 퍼지는 텅 빈 공간이 될 것이다(14:31;렘 14:2;애 1:4).
성 경: [사3:4]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아이들로...적자들로...하시리니 - '아이들'(*, 네아림)과 '적자들'(* -, 타알룰림)은 병행하는 동의어이다. 이 명사들은 비인격적인 추상 명사로서 나이의 측면에서라기보다는 그 성격적 측면에서 '어린 것들'이라고 호칭된다. 따라서 이 말은 '유치함', '치졸함'(Delitzsch) 혹은 '무책임성'(Leupold)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이 20세에 왕위에 오른 아하스를 예언한 것(왕하 16:2)이라고 하기도 하고(Ewald, Hitzig, Knobel), 혹은 이사야 선지자 이후의 일련의 사악한 왕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Lowth). 그러나 12절의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말은 특정한 인물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적자'라고 번역된 '타알룰림'이 '욕망을 만족시키다', '자기 기분을 채우다'는 뜻을 가진 '히트알렐'(*)에서 파생되었음을 보더라도, '적자의 통치'라는 것은 '법과 공의도 없이 오직 통치자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잔인성을 만끽하는 공포 정치'임이 분명하다. 5절 이하에서는 이러한 통치가 가져오는 비극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성 경: [사3:5]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 먼저 수평적 측면에서 극단적인 이기심과 불신으로 말미암는 인간 관계의 파탄이 초래된다. 그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특징지워진다.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사는 이웃은 각기 돌보고 서로 즐거워해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서로 학대하고 잔해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ꃨ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 수직적 측면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권위의 상실이다. 그것은 하극상으로 특정지워진다. 고대 사회에서 노인은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다(레 19:32;신 28:50). 마땅히 있어야 할 공경과 우러름이 사라진 사회는 더 이상 질서있는 사회, 틀을 갖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총체적으로 '무정부 상태'로 파악될 수 있다.
성 경: [사3:6]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선지자는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한 토막의 짧은 삽화를 소개한다. 그것은 남들보다 점잖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받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ꃨ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 이 말은 앞의 '우리 관장이 되어'에 병행하는 말이다. 그 뜻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당신의 책임하에 수습해 달라'는 것이다. '손'(*, 야데카)은 권위를 상징하는 낱말이다(창 16:9;출 18:10).
성 경: [사3:7]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 문자적인 뜻은 '나는 싸매는 자가 되지 않겠다'이다. '고치는 자'라고 번역된 '호베쉬'(*)는 '싸매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관장이 되어 달라고 초청받은 이의 이러한 거절에 대해 어떤 이들은 '나는 하지 않겠다'는 항의와 반감의 표현이라고도 하고(Lowth, Knobel, Alexander) 혹은 '나는 할 수 없다'는 무능력의 고백이라고 보기도 한다(Targum, De Wette, Leupold, Delitzsch).
성 경: [사3:8]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 '멸망하였고'로 번역된 '카쉘라'(*)는 '흔들거리다', '걸려 넘어지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엎드러졌다'로 번역된 '나팔'(*)은 '떨어지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예루살렘이 비틀거리고 유다가 떨어졌다'가 된다. 선지자가 여기서 완료 시제를 쓴 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확실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예언적 완료 시제).
ꃨ 그 영광의 눈을 촉범(觸犯)하였음이라 - '촉범하였음이라'(*, 라므로트)는 말은 '항거하다', '대들다'는 뜻을 가진 동사 '마라'(*)에서 연유하였다(시 78:17). '영광의 눈'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에서 뿜어 나오는 신령한 빛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광은 종종 '눈'으로 비유된다(욥 25:5 참조).
성 경: [사3:9]
주제1: [유다에 임할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
주제2: [유다에 임할 형벌]
ꃨ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소돔과 같으니 - '그들의 안색'(*, 하카라트 페네헴)은 탈굼역과 시리아 역본을 따른 몇몇 주석가들에 의해 '한 쪽편을 들어 낯을 보아주는 당파적 편애'로 해석되기도 한다(Clericus, Hitzig). 그들은 신 1:17;16:19;잠 24:23;28:21 등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에서 그 근거를 취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어떤 특수한 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기보다는 병행하는 구절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죄악이 너무 깊어서 얼굴에까지 각인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Gesenius, Calvin, Delitzsch 등). 앞절에서 묘사된 그들의 죄는 뼈 속까지 파고들어서 영혼마저 마비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며 굳이 죄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자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성 경: [사4:1]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 이전에 고운 얼굴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었던 여자들이 더할 나위 없는 비참함으로 남자를 구걸하는 지경에까지 떨어질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일곱'은 완전수로서 허다하게 많은 여자들이 한 남자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본문의 한 남자는 전쟁에서 죽지 않고 생존한 사람이다. 그에게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애걸한다.
ꃨ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 우리를 먹여 달라, 입혀 달라 조르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본처가 아닌 첩이라 할지라도 부양받을 권리를 지녔다. 그러나 결혼해 달라고 사정하는 여인들은 그러한 당연한 권리조차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ꃨ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 그들의 소원은 한 가지뿐이다. 제발 결혼만 해달라는 것이며 '...의 아내'라고 불리우게 해 달라는 것이다(창 12:17, '아브람의 아내 사래';창 46:19, '야곱의 아내 라헬').
ꃨ 우리로 수치를 면케하라 - 그들이 이처럼 결혼하기를 구걸하는 것은 수치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수치는 과부의 수치요(54:4), 또한 자식을 갖지 못한 수치이다(창 30:23). 시온의 부녀들의 교만과 허영은 끝내 수치를 면케 해달라고 비는 굴욕으로 마감된다.
성 경: [사4:2]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그 날에(*, 바욤 하후) - 앞절과 동일한 '그 날에'라는 말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그러나 내용은 정반대이다. 1절의 '그 날'이 심판의 날이요 수치의 날이며 서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날이라면, 본문의 '그 날'은 회복의 날이요 영광의 날이며 새로운 싹이 돋는 날이라고 할 것이다.
ꃨ 여호와의 싹이...그 땅의 소산은 - '여호와의 싹'이 메시야를 가리킨다고 보는 점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일치한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이미 시작하신 구원 운동을 비유하는 것이며, 그 운동의 일직선상에서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Leupold). '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체마흐'(*)는 식물의 자라남이 함축하고 있는 신선한 생명력과 활력을 나타내는 말로서, 우리말의 '싹', '가지'보다 더 포괄적이다(창 19:25;렘 23:5;겔 16:7;호 8:7;슷 3:8). 때로 망각되고 때로 은폐되었던 여호와의 싹, 즉 여호와의 구속 사역은 질긴 생명력으로 엄동(嚴冬)의 땅을 뚫고 솟아올라 그 가냘픈 듯이 보이는 싹을 틔운다. 어떤 주석가들은 병행하는 구절에서 이와 동의어로 쓰인 '땅의 소산'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이중적 기원을 읽기도 한다(Vitringa, Hendewerk). 곧 그것이 '여호와의 싹'인 한에서 신적인 기원을, 다른 한편 그것이 '땅의 소산'인 한에서 인간적인 기원을 묘사한다는 것이다(롬 1:3, 4 참조). 그러나 선지자가 그 같은 것을 말하고자 의도하였는지는 의문이다. 계속해서 선지자는 거듭되는 4개의 명사로 여호와의 싹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ꃨ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 개역 성경에는 '아름답다'와 '영화롭다'로만 표현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비슷한 뜻을 가진 4개의 명사, 즉 '체비'(*), '카보드'(*), '가온'(*), '티프에레트'(*)로 표현되어 있다. '체비'는 광채 혹은 영광을 뜻하며, '카보드'는 명예와 존귀 혹은 영광을 뜻하며, '가온'은 고상함과 위엄을 뜻하며, '티프에레트'는 장식 혹은 광채를 뜻한다. 이처럼 '아름다움'을 뜻하는 4개의 명사를 병렬시킴으로써 선지자는 여호와의 싹이 나타내는 비할 데 없는 영광과 그 아름다움을 최고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아름다움이 모든 이들에게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메시야의 영광이 믿음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만 밝히 보이듯이, 여호와의 싹과 땅의 소산으로 비유된 여호와의 구원 운동이 지니는 지극한 아름다움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에게만 인식되는 것이다.
ꃨ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 - 이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며, 2:2-4:1에 묘사된 심판에서 생존한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Leupold). 이들에 대한 묘사가 다음절에서 계속된다.
성 경: [사4:3]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 '시온'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집을 가리키는 동일한 이름이다(2:3). '남아 있는 자'(*, 하니쉬아르)와 '머물러 있는 자'(*, 하노타르)는 동의어로서 둘 다 집합적인 의미를 갖는 단수로 쓰였다(주제 강해, '남은 자(The Remn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 참조).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고 칭함을 얻으리니 - '녹명된'이란 표현은 '생명의 책'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출 32:32;시 69:28;단 12:1;말 3:16;눅 10:20;빌 4:3;계 3:5;13:8;17:8;20:12, 15;21:27). 고대의 도성(都城)들은 그 도성의 시민으로 인정된 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한 시민 인명록(人名錄)을 보존하였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고 혹은 지워지는 것은 공동체의 삶가가 관련하여 개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종말론적으로 표상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요 세말의 구원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차이는 단지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느냐 안하느냐를 넘어서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의 문제로까지 부각되는 것이다(행 13:38 참조). 따라서 이들에게 '거룩'(*, 카도쉬)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부여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화하는 심판을 통해서 더러움의 때를 벗고 순결한 원상태로 회복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사4:4]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 '루아흐'(*)는 '영' 혹은 '바람'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영은 땅 위를 휩쓰는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놀라운 힘과 권능으로써 더러운 모든 것들을 제거하신다. 그 앞에서 악인이 징벌을 당하기 때문에 그것은 '심판의 영'이라 불리우며, 또한 불로 태움같이 악을 철저히 제거하기 때문에 그것은 '소멸의 영'이라 불리운다(Delitzsch). 이러한 씻음이 선행된 뒤에야 이스라엘은 비로소 본래의 '거룩한 나라'(출 19:6)로 회복될 것이다.
ꃨ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정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 '시온의 딸들'의 죄악을 선지자는 '더러움'으로 표현하고, '예루살렘'(의 남자들)의 죄악을 '피'로 표현한다. 남자들, 특히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였으니, 그들의 죄악을 '피'(*, 데메)라 불러 마땅하다. 여자들은 허영과 사치속에서 음욕을 찾아 헐떡였으니, 그들의 죄악을 '더러움'(*, 초아트)이라 불러 당연하다. '오물(혹은 배설물)'을 뜻하는 '초아트'는 그들의 도덕적 불결함을 드러내고, '피'는 그들의 법적인 살인 행위를 고발한다(Delitzsch).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온전히 씻겨지며, 청결케 될 날이 온다. 그날은 여호와의 구원의 날이다. '씻으시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하츠'(*)는 '몸을 정결케 한다'는 신체적 의미 이외에도 법적으로 '사면되다', '깨끗케 되다'는 의미로 내포하고 있다.
성 경: [사4:5]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만드시고 - 원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그리고 창조하실 것이다(*, 우바라), 여호와께서. 시온 산의 모든 장소(*, 메콘) 위에와 그녀의 집회(*, 미크라에하)위에...' 시온 산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여호와의 전의 산'(2:2)일 뿐 아니라 거룩한 백성들이 모여서 축제를 행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여호와는 과거 광야 유랑 때 시내 산에서 보였던 영광을 훨씬 능가하는 새로운 영광을 창조하신다. 이 영광으로 인해 '시온 산 구석구석이 찬란하게 빛날 것'(Calvin)이며, 이 영광의 빛으로 인해 시온 산은 모든 산 위에 뛰어나 굳게 서며 만방이 그리로 몰려들게 될 것이다(2:2).
ꃨ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 - 선지자는 독자의 시선을 멀리 광야 유랑 시대로 인도한다. 그때 여호와는 낮의 구름과 밤의 불로써 출애굽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해주셨던 것이다(출 13:21, 22). 낮의 구름과 밤의 불은 여호와의 임재와 보호의 표징이었다. 구름과 화염 사이에 놓여 있는 '연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델리취(Delitzsch)는 '구름과 연기'를 중음법(重音法)으로 파악한다. 즉, 형체는 구름이면서 실체는 연기로 되어 있어 일반적인 구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구름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이가 주석가들은 불이 없이는 연기가 생길 수 없다는 점을 들어 '화염'에 연결시킨다(70인역, Vitringa, Lange, Hengstenberg). 공동 번역은 본문을 이렇게 풀이하였다: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솟아오르는 연기와 환한 불길.'
ꃨ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 '천막'(*, 후파)은 덮여 있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시온 산위에 구름 형태로, 연기와 화염의 빛의 형태로 떠 있게 된다.
성 경: [사4:6]
주제1: ['여호와의 싹'을 통한 시온의 정화]
주제2: [예루살렘의 회복]
ꃨ 또 천막이 있어서...되리라 - 본절에 나오는 낮의 더위와 풍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적대적인 세력들에 대한 상징어이다. 이들에 맞서 그늘을 지어주고 숨을 곳을 만들어 주는 '천막'은 '구름'(Lowth)이나 '시온 산'(Delitzsch)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으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Gesenius, Gray).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성도의 그늘이며 피난처가 되시는 것이다(시 91:1):"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6, 7).
성 경: [사5:1]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노래하리라'로 시작한다. 그 노래는 '살아하는 자가 소유하고 있는 포도원'에 관한 것이다. 남자 친구 사이에 맺어진 깊은 우정을 가리키는 '야디드'(*)와 '도드'(*)가 본문에서는 동일하게 '사랑하는 자'로 번역되었다. 선지자가 자신의 벗이라고 부른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일컫는 친숙한 비유어이다(3:14;시 80:8).
성 경: [사5:2]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 포도원에 기울인 주인의 정성과 수고가 연이어 기술된다. 그는 좋은 장소를 선택하였을 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 경작하였다. '땅을 파다'(*, 아자크)는 곡괭이로 땅을 푸석푸석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구약 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온다. 그 다음 단계는 여기저기 박혀 있는 다돌들을 제거하는(*, 사칼) 것이다. '사칼' 동사는 '아자크'와 더불어 피엘 동사로 쓰여서 '돌을 옮기다'는 뜻을 갖는다.
ꃨ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 이처럼 할 수 있는 모든 수고를 다했으니 주인으로서는 좋은 포도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즉 '들포도'(*, 베우쉼)를 낸 것이다. '베우쉼'은 '악취를 풍기다'는 뜻의 '바아쉬'(*)에서 파생된 명사로, 조악하고 쓴 야생 포도를 가리킨다(라틴어:Labrusca). 70인역(LXX)은 이것을 '가시나무(혹은 엉겅퀴)'(*, 아칸다스)로 해석했다. 여기에서 선지자의 노래가 끝나고 다음절에 선지자의 친구이며 포도원 주인인 여호와의 노래가 1인칭으로 이어진다.
성 경: [사5:3]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 '이제'(*, 아타)는 현재 시점을 말한다기보다는 '사정이 이와 같으니'라는 뜻의 논리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Alexander). 예루살렘과 유다 주민들은 판단하는 자로서 소환된다. 그들은(칼빈(Calvin)의 주장처럼) 그들 자신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낯선 사람과 그의 포도원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소환된 것이다. 그들은 아직 이 이야기 속에서 말해지고 있는 대상이 자신들임을 알지 못한다. 구약에 있어서 이와 동일한 경우는 삼하 12:1-6에 나오며, 신약에서는 마 21:33-41에 나온다. 두 경우 모두 처음에는 이야기 속의 대상들이 자기 자신임을 모르고 판단하다가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판단을 구하는 내용이 다음절에서 의문형(interrogation)으로 제시된다.
성 경: [사5:4]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있었으랴 - 본문과 다음절('이제 내가') 사이에는 휴지(休止)가 있어서, 마치 청중들이 주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포도원을 위하여는 어떠한 변명도 주어질 수 없음을 침묵으로써 시인하는 듯하다(Gray). 그러나 주인의 단호한 말이 이 침묵을 깨뜨린다.
성 경: [사5:5]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그 울타리를 걷어...그 담을 헐어 짓밝히게 할 것이요 - 주인의 진노는 먼저 포도원을 보호하고 있던 울타리와 담을 허물어뜨리는 것으로 표출된다. 포도원은 대개 '가시 울타리'(*, 메수카트) 혹은 '돌담벽'(*, 가데르)으로 둘렀으며 때로 완전성을 기하기 위하여 울타리와 돌담벽을 이중으로 두르는 경우도 있었다(G. Rawlinson). 이러한 울타리와 돌담이 제거될 때, 포도원이 사람과 짐승에 의해 '짓밟히고 먹힘을 당할 것임'은 명약 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성 경: [사5:6]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 주인에 의해 더 이상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포도원은 자연 황폐해질 수 밖에 없다(잠 24:30, 31). '질려와 형극'(*, 솨마르 와솨이트)은 '가시덤불과 가시'란 뜻이다. '가시덤불'은 '황무한 땅'에 어울린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저주받은 땅, 즉 실락원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듯이(창 3:18),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아 황무하게 된 포도원에 가시덤불만 무성하다. 가시나무는 종종 인간의 여러 죄악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 경: [사5:7]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포도원의 비유]
ꃨ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 이것은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2, 4절)에 대한 설명이다. 여호와께서 기대하신 좋은 포도는 '공평'(*, 미쉬파트)과 '의로움'(*, 체다카)이었다(1:21, 27). 그러나 정작 맺힌 것은 '포학'(*, 미스파흐)과 '울부짖음'(*, 체아카)이었다. '미쉬파트'와 '미스파흐', 그리고 '체다카'와 '체아카'는 언뜻 들어서는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발음이 유사하다. 이런 유사성을 이용하여 선지자는 속내용은 변질되었음에도 겉모양만 비슷한 이스라엘의 범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1:22). '미쉬파트'와 대조 '체다카'와 대조되는 '미스파흐'는 '피흘림', '억압'을 뜻하며 '체다카'와 대조되는 '체아카'는 '억눌린 자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출 3:9)를 뜻한다. 이 억압과 부르짖음이 여섯 번의 '화 있을진저'(8, 11, 18, 20, 21, 22절) 모음 속에서 상세하게 묘사된다.
성 경: [사5:8]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가옥에 가옥을 연(連)하며 전토(田土)에 전토를 더하여 - '화 있을진저'(*, 호)로 시작되는 글모음 중 첫 번째는 탐욕스런 부자들에 대한 것이다. '토지'와 '가옥'은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요 생존의 근거였다(레 25:33). 하나님의 율법은 토지의 매매를 금지하며 설혹 주인이 바뀐 토지라 할지라도 7년 안식년다을 일곱 번째 맞는 그 다음 해, 즉 50년째(회년)가 되면 원주인에게 다시 귀속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25장). 이처럼 율법 속에 명시된 토지 보유의 원리와 경제 정의를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가옥과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자신들의 부(富)를 축적하는 행위는 율법에 대한 반역이요 공동체의 기틀을 파괴하는 범죄 행위라고 말해 지나침이 없다(왕상 21:2;욥 22:8;미 2:2).
성 경: [사5:9]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 '정녕히'로 번역된 '임-로'(*)는 무자적으로 '...않는다면'(if-not)이라고 번역되는데, 이것은 부정적인 어휘를 써서 가장 강력한 확신을 전달하는 고대의 서약 형식에 일치하는 것이다(민 14:23;시 95:11).
성 경: [사5:10]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열흘같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바트가 나겠고...한 에바가 나리라 - 여호와께서 비를 막으시면(6절) 농작물이 자랄 수 없고 그것은 기근이라는 무서운 재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제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집에서 사는 부자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머물 수 없을 것이다. '열흘갈이'는 한 쌍의 황소가 하루 동안 밭을 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를 말한다(Delitzsch, Gray). '바트'(*)는 액체의 측량 단위로서, 건조한 곡식을 재는 '에바'(*, 에파)와 일치한다. 에스겔에 의하면, 10에바는 한 호멜에 해당된다(겔 45:11). '호멜'은 왕조 시대 이후에 '고르'(*, 코르)라고 불리워졌으며, 그 용량은 약 220리터 정도이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본문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의 징벌의 결과로 밭은 씨를 뿌린 것의 1/10에 해당하는 수확밖에 거두지 못하며 포도원에서도 포도주가 거의 산출되지 못할 것이다'(Calvin).
성 경: [사5:11]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밤이 깊도록 머물러...화 있을진저 - '화 있을 진저'(*, 호)로 시작되는 글모음 중 두 번째는 탐식가들과 그들의 쾌락 추구에 관한 것이다. 8절에 묘사된 부자들의 풍요로움은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는 술자리로 이어진다. 여기서 '독주'(*, 쉐카르)와 '포도주'(*, 야인)가 병행되고 있는데, 후자가 순수한 포도주라면 전자는 석류(아 8:2)와 사과, 꿀 등을 섞은 혼합 포도주로서 알콜 도수가 훨씬 더 높은 것이다. 술에 취해 세월을 허비하는 방탕함은-사도 바울에 의하면-악한 세상의 특징이다(엡 5:16, 18).
성 경: [사5:12]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생각지 아니하는도다 - '여호와의 행하심'(*, 포알 야훼)은 '그의 손으로 하신 일'과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역사속에서 활동하신 일, 특히 이스라엘을 위하여 힘들여 수고하심과 일하심을 가리킨다(시 92:4). '포알'(*)에는 '노동', '일'이라는 뜻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을 삼고 육체의 향락에 도취된 자들에게 여호와의 일, 즉 영적인 역사는 한낱 우스갯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주의 행하심에 관심도 아니 갖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도 않는 소행은 어리석은 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엡 5:17).
성 경: [사5:13]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사로잡힐 것이요...주릴 것이요...목마를 것이며 - 현재의 열락(悅樂)에 대조되는 미래의 고통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눅 6:25)와 일치한다. 본절에 나오는 '귀한 자'는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영광'이니, 백성들로부터 높임을 받는 자, 즉 사회의 지도급 인사를 말하며, '무리'는 그들과 함께 죄악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킨다. 예언 성취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해 과거 시제로 묘사된 '사로잡힘'과 '굶주림'과 '목마름'은 그들의 '무지함'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이때 그 무지는 단순한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여호와의 일에 대한 악의적인 무관심(12절)이라고 할 것이다.
성 경: [사5:14]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음부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13절과 마찬가지로 '이러므로'(*, 라켄)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는 앞절에 묘사된 징벌의 결과, 이들이 어느 정도까지 몰락할 것인가를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함이다. 뒤따르는 동사들 역시 13절과 마찬가지로 과거 시제로 쓰여서 예언 성취의 확실함을 더해주고 있다. '음부'에 관해서는 삼상 2:1-10 주제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陰俯) 개념'을 참조하라. 선지자에 의하면, 음부는 탐욕스러운 괴물과 같아서 끝없는 욕망으로 한껏 입을 벌려 죄인들을 삼킨다(합 2:5). 삼켜질 대상들이 뒤에 열거된다.
ꃨ 그들의 호와로움과...그 중에서 연락(宴樂)하는 자 - '그들의 호와로움'(*, 하다라)은 직역하면 '그녀의 장식'이니, 곧 예루살렘의 허영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소란스러운 무리'(*, 하모나)와 그들이 내뿜는 '모든 소음'(*, 쉐오나), 그리고 '환락'(*, 알레즈)들이 넓게 열린 음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이는 사악한 자들의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진다고 한 고라 자손의 노래(시 49:14)를 연상시킨다(Delitzsch).
성 경: [사5:15,16]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이러한 징벌의 결과로 이루어질 궁극적인 미래의 모습이 두 개의 대립 개념-인간은 낮아지고(15절) 여호와는 높임을 받는다(16절)-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주제는 2장에서부터 계속 발전된 것이다.
ꃨ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 - '공평'과 '의'에 대하여는 1:21, 27을 보라. 만군의 여호와, 즉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평과 의 가운에서 당신을 가장 잘 드러내시며, 당신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도 바로 공평과 의 가운데서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일찍이 공평과 의 가운데서 행하였더라면 그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이 온 세계에 거룩하신 분으로 높임을 받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공평과 의 대신 포학과 부르짖음으로 응수할 뿐이었다(7절). 이에 하나님은 비뚤어진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 심판의 엄정함과 죄를 척결하시는 의로움을 통해서 교만의 극치에까지 높아진 이스라엘을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던지시며(14절), 마침내 당신 자신을 온 세계에 거룩하신 분으로 친히 증거하시려는 것이다.
성 경: [사5:17]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草場)에 있는 것같이 먹을 것이요 - 본문은 주석가들에 따라 그 해석이 크게 둘로 나뉜다. (1) 약속으로 보는 경우:'어린 양들(의인)이 살진 자들(부유한 죄인)의 소유를 대신 차지하게 될 것이다'(Targum, Calvin, Vitringa). (2) 경고로 보는 경우:'거룩한 땅이 이방인들의 수중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Gill), 혹은 '부자의 소유가 가난한 자의 수중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Hendewerk), 혹은 '땅 그 자체가 파멸될 것이다'(Michaelis, Lowth).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 바람직하다.
성 경: [사5:18]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화 있을진저 - 세 번째 화는 여호와의 행하심을 믿지 아니하므로(12절) 오히려 대담하고 뻔뻔하게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선지자는 이들을 굵은 밧줄로 마차를 끄는 모습에 비유한다. '거짓의 끈'은 죄인들이 그들의 죄악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교묘한 궤변이나 그릇된 노리를 가리킨다(Vitringa, Calvin). '끈다'로 번역된 '마솨크'(*)는 그 외에 '견고하게 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문의 의미는 자명하다. 즉, 거짓된 지식과 언변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불법을 합법화시킴으로써 악을 행함에 있어서 더욱 대담해진다는 것이다. 그 행위의 대담함과 그 논리의 견고함은 후반부의 '수레 줄'에서 한층 강화된 비유적 표현으로 반복된다. '수레 줄' 즉 마차의 밧줄은 그들이 무시하고 조롱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만 끊어지게 될 것이다.
성 경: [사5:19]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 이들이 앞절에 묘사된 것과 같은 행위를 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임하지 않는다'는 완악한 신념이 깔려 있다.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제발 하나님으로 하여금 지체치 말고 신속하게 움직이게 하여 우리 눈으로 그가 행하신다고 아득한 옛날부터 약속해 오신 그 심판을 보게 하라. 그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킬 것 아니냐 ?' 이런 조롱은 최고의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미 죄악으로 굳어져버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느껴질 리가 없다. 본문과 관련하여 벧후 3:3-5, 9을 참조하라.
성 경: [사5:20]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화 있을진저 - 네 번째 화는 도덕을 파괴하고 가치 전도(顚倒)에 앞장 서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자기의 잘못을 감추고 오히려 범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채택된 거짓 논리하에서는 선과 악의 구별은 철폐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선과 악을 규정한 객관적, 초월적인 규범이 더 이상 존재치 않으며, 있다면 언제나 선한 그들의 행위 밖에 없다. 이러한 범죄는 지도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고질적인 질병들이다. 혹자는 본문을 23절과 관련하여 불의한 사법부에 적용시키나(Gesenius, Hitzig), 유다 지도자 일반의 범죄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광명'과 '단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상징하며(시 19:8, 10), '흑암'(시 112:4;잠 2:13;전 2:13;마 6:23) '쓴 것'(민 5:18;신 32:32;렘 2:19;4:18;약 3:11)은 악의 상징어로 쓰인다.
성 경: [사5:21]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화 있을 진저 - 다섯 번째 화는 자기 자신을 지혜자로 자처하는 교만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자기 중심적 논리의 귀결은 언제나 교만이며, 교만은 악의 완성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위의 다른 권위를 인정치 않는다. 따라서 어떠한 훈계나 경고도 그에게는 들리지 않으며 교만은 이런 자기 폐쇄성을 그 특질로 삼는다(잠 1:7;12:1).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이들은 어리석음의 전형일 뿐이다. 참된 지혜는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주어진다(잠 1:7;3:5;9:10). 한편, 본문에 언급된 '지혜'와 '명철'은 위대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들로 간주되었다(11:2;창 41:39;삼상 16:18).
성 경: [사5:22,23]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화는 술에 젖은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범죄한 유다 지도자들의 한 전형으로 그려졌다.
ꃨ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은 - 선지자의 어조는 풍자적이다. 선지자는 그들을 용감하고 힘이 넘치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용감함은 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포도주를 마시기 위한 것이며, 그 유력함은 공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독주를 빚기 위한 것이다. '포도주'와 '독주'에 관하여는 11절을 참조하라.
성 경: [사5:24]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이로 인하여'(*, 라켄)라는 접속사에 유도되는 형벌 내용은 앞의 네 가지 화(18, 20, 21, 22절)에 대한 것이다. 자기 중심적 아집에 사로잡혀 선악을 혼동하고 어떠한 훈계도 거부한 채 교묘한 논리를 내세워 스스로를 정당화하기에 바쁜 유다 지도자들은, 당장은 권세가 있고 힘있어 보일지 모르나 선지자의 눈에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풀 같고 나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벧전 1:24). 불 같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들은 마치 땅 속에서 썩어가는 뿌리와 먼지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꽃마냥 그렇게 허무하게 소멸되고 말 것이다.
ꃨ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멸시하였음이라 - 그들은 실수에 의해서 한두 가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 자체를 무시하고 적대했다. 말하자면 그들의 범죄는 총체적이다.
성 경: [사5:25]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 본문은 몇몇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대로(Alexander, Calvin, Leupold)과거에 내려진 하나님의 형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 여기 쓰인 동사들은 예언적 과거 시제로서 임박한 미래의 확실함을 강조하고 있다. 선지자는 24절에 시적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서 임할 것인지를 말하려 한다. 본문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분노가 그 백성들 안에서 불탈 것이며'이다. '분노'로 번역된 '아프'(*)는 본래는 '(숨쉬는) 콧구멍'을 의미하는데, 화가 극에 달하여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모습에서 연유하여 '분노'란 뜻을 갖게 된 것이다.
ꃨ 산들은 진종하며 - 본문을 과거로 해석하는 이들은 이 말이 웃히야 왕 시대에 일어난 지진(암 1:1)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Leupold). 그러나 이 말은 여호와의 분노와 심판의 격력함을 나타내는 비유 언어로, 바로 앞에 나오는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는 표현과 연관된 것이다(Delitzsch).
성 경: [사5:26]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오게 하실 것이라 - 앗수르(혹은 바벨론) 군대의 침공을 가리킨다. '먼 나라'라는 표현은 신 28:49 이하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들은 땅 끝에서 사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니(39:3), 당시 사람들에게 유브라데 강은 땅 끝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슥 9:10 참조).
ꃨ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 올 것이로되 - 먼 곳에서부터 점차 가까이 달려오는 그들의 모습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보라'라는 감탄사에 이어 두 개의 부사로 집약되고 있다:'빠르게'(*, 메하라)와 '날렵하게'(*, 칼).
성 경: [사5:27]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신들메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 혹자는 이 구절이 밤에 휴식을 취할 때에도 허리띠와 신발 끈을 풀어 놓지 않을 만큼 전쟁에 임하는 각오가 대단하다는 식으로 해석한다(Henderson, Delitzsch). 그러나 '끊어지다'(*, 니타크)는 동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행진에 방해를 주는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기본적인 군사 장비를 철저하게 점검했음을 말하는 것이다(Leupold).
성 경: [사5:28]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들의 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기어졌으며 - 상황은 점점 더 급박해진다. 질서 정연하게 대오(隊伍)를 지어 먼 곳으로부터 달려온 그들은 이제 유다를 향한 모든 전쟁 준비를 다 끝마쳤다. 고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무기로 꼽히는 화살과 병거들은 출전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목표물을 향해 활은 '당기어졌다'(*, 데루코트). 이는 직역하면 '활을 발로 밟았다'이다. 고대인들이 전쟁에서 사용했던 강궁(强弓)은 활이 너무 커서 발로 밟아야만 구부릴 수 있었다(대상 5:18;시 7:13;11:2).
성 경: [사5:29]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그 부르짖는 것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 함성과 더불어 드디어 전쟁은 시작된다. 고대인의 전쟁은 함성과 함께 시작되었다(시 74:4;렘 2:15). 선지자의 귀에 그 소리는 마치 암사자와 어린 사자의 포효소리로 들린다. '어린 사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케피림'(*)은 젖을 떼고 어미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먹이를 잡을 줄 아는 젊은 사자를 가리킨다. '부르짖음'과 '소리 지름'에 다같이 사용된 '솨아그'(*)는 사자가 먹이를 찾을 때의 포효소리를 뜻한다.
성 경: [사5:30]
주제1: [포도원에 임할 심판]
주제2: [지도층의 타락과 그 결과]
ꃨ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어두우리라 - 위아래를 둘러보아도 도피할 데도, 도움을 청할 데도 없다(Leupold). '바라보다'로 번역된 '나바트'(*)는 '기대를 품고 바라보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땅을 바라봄'은 '하늘을 바라봄'과 대조되는 시적 표현이다(8:22). 보이는 것은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두움과 고통뿐이다. 위를 쳐다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고통과 결부된 흑암은 이스라엘의 절망을 표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야말로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20절) 이들에게 참으로 적절한 심판 아닌가 !
성 경: [사6:1]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 이 말이 왕이 죽기 전을 가리키는지 혹은 죽은 후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왕이 살아 있을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Gray). 웃시야 왕의 치세 때 유다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대하 26장) 백성들은 태평 성대(太平聖代)를 향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번영의 이면에는 종교적 부패의 상처가 점차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정규적인 제사는 있었으나 이미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식어갔으며 향락과 사치 풍조가 더욱 번져갔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켰다. 한편,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B.C. 745-727년)이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근동 지방이 긴장에 휩싸이는 등 국제 정세의 흐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이런 때에 선지자는 국가적 위기를 직감하고 성전을 찾아갔다.
ꃨ 내가 본즉 - 이 말이 선지자가 실제로 눈을 뜨고 보았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요 4:24). 그러면 선지자가 상상적이고 주관적인 자신의 내적 경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는가?(Gray, Knobel).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 경우에는 계시의 진실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양식에서 매우 특별한 경험, 즉 내적인 영혼의 눈으로 초자연적인 상(像)을 인식했음을 말할 것이다(G.Vos, Delitzsch).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느냐'이다.
ꃨ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 환상 속에서 선지자는 지상의 예루살렘으로부터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의 성전으로 옮겨진다. 선지자가 본,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다. '높이 들린 보좌'는 아마도 여섯 계단의 꼭대기에 놓여져 있는 솔로몬의 보좌에서 연상된 듯하다(왕상 10:18).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의 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쉼없이 계속된다.
ꃨ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왕들은 보통 흘러 내리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찰 만큼 방대했으니 여기서 지상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왕되신 하나님의 장엄하신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Calvin). '성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칼'(*)은 웅장하게 건축된 궁전(잠 30:28;단 1:4) 혹은 여호와의 성전(왕하 24:13;시 29:9)을 뜻한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이사야가 본 이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다름 아니다(요 12:41). 이 영광은 죄많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비밀한 것이어서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긴 옷자락으로 감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주의 영광에 있어서는 그 감추임조차도 영광이다. 그 영광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고 오직 공중나는 스랍들만 그를 찬미할 뿐이다.
성 경: [사6:2]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 '모셔 섰다'(*, 오메딤 밈마알 로)는 문자적으로는 '그의 위에 섰다'이다. 이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나타낸다(왕상 22:19;욥 1:6;슥 6:5). '스랍들'(*, 세라핌)은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세라핌'은 복수형으로서 그 단수는 '뱀'을 뜻하는 '사라프'(*)이다(14:29;30:6;민 21:6,8;신 8:15). '사라프'는 본래 '태우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말인데, 불타는 모습이 기어가는 뱀의 모양과 흡사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따라서 '세라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불타는 자들'이 된다.
ꃨ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그 둘로는...그 둘로는 날며 - 이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으며 얼굴과 발이라는 묘사에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형상을 한 듯하다. 천상의 존재인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주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먼지에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 불경건성 때문이다. 남은 두 날개만이 본래의 목적대로 날기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이는 주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Leupold).
성 경: [사6:3]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 '서로'(*, 제 엘 제)라는 말은 스랍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노래 부르는 방식(교송)을 나타낸다. '창화하다'(*, 카라)는 목소리를 드높여 찬양함을 뜻한다. 천상의 존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들로는 욥 38:7;시 29:1,2;계 4:8;7:11 등이 있다.
ꃨ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 스랍들이 부른 찬양의 주제는 만군의 여호와의 '거룩'(*, 카도쉬)과 '영광'(*, 카보드)이었다. '거룩'이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신적 존재의 본질이며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아니하는 불가해한 신비를 말하는 것이라면, '영광'은 역사와 자연 특히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한 신적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민 14:21;시 57:5,11;72:19). 다시 말하면, '거룩'은 인간과 구별되는 신적 본성으로서 은폐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에, '영광'은 인간을 위한 신적 현현(顯現)으로서 계시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 이래 기독 교회는 세 번 반복된 '거룩'이란 말에서 삼위 일체의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같은 반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최고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렘 7:4;겔 21:27). 칼빈(Calvin)조차도 이 구절에서 삼위 일체의 교의(敎義)를 인용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아니하였다.
성 경: [사6:4]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 여호와가 강림하실 때 시내 산이 진동했던 것처럼(출 19:18) 여호와의 거룩과 영광을 찬미하는 스랍들의 드높은 노랫소리에 선지자가 서 있는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다고 하니, 이는 스랍들의 찬양이 얼마나 힘있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ꃨ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연기는 스랍들의 찬양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 연기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한다(4:5;왕상 8:10;겔 10:4, Gray, Knobel).
성 경: [사6:5]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직역하면 , '나에게 화로다. 왜냐하면 나는 끝장났기 때문이다'이다. 선지자가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호와의 완전 무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그 자신의 죄인됨과 그 백성의 죄악됨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아서(33:14) 부패한 인간이 그 앞에 설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본 자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출 33:20;삿 13:22). 환상 가운데 여호와를 목도한 선지자는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의식 속에서는 자기가 벌써 죽은 것처럼 느꼈다.
ꃨ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 선지자는 자신의 죄 가운데 특별히 부정한 입술을 지목해서 말한다. 이는 첫째로 정결한 입술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조할 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마음으로 범죄한 것이 입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마 15:11) 부정한 입술이 모든 죄악을 총체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었다(약 3:2 참조).
ꃨ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 선지자는 백성의 죄악에 대하여 깊은 연대 의식(혹은 책임 의식)을 느꼈다.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은 29:13에서 발견된다:"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ꃨ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그 자신과 민족의 깊은 절망 가운데서 선지자가 뵈온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었다. 성전 가득 뒤덮인 긴 옷자락, 주변에서 쉼없이 찬미하는 스랍들의 모습에서(1,2절) 선지자는 이 같은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의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 의식(儀式)이 뒤따른다.
성 경: [사6:6,7]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화저(火著)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내 입에 대며 - '단'은 제단이니 곧 하늘에 있는 향단을 가리킨다. 계시록에 의하면, 하늘 향단은 금으로 만들어졌다(계 8:3;9:13). '핀 숯'은 불타는 숯 혹은 뜨거운 돌을 뜻한다. 천상에서 거행된 죄사함의 성례는 스랍 중 하나가 단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정금으로 만든 화저(불집게)를 가지고 핀 숯을 취하여 선지자에게로 날아가 그가 부정하다고 탄식한 입술을 거기에 댐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상징적인 행동은 다만 선지자에게 그의 죄가 사해졌음을 확신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결코 '핀 숯' 자체가 정화의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ꃨ 보라...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스랍들의 말로 앞절의 신비한 행동의 의미가 밝혀진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평행법은 선지자에게 사죄의 확신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본문에서 선지자가 받은 사죄 의식에는 피흘림의 제사가 결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 행위로 인하여 그 같은 제사가 불필요하게 될 날이 올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성 경: [사6:8]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그 영광을 뵈었던 선지자는 이제 사죄함을 받은 이후에 영적인 귀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그 음성은 직접적으로 선지자를 향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Jerome).
ꃨ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선지자는 하늘의 어전(御前) 회의에서 그곳에 참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왕상 22:19,20 참조). 그것은 헌신의 열정에 의해 자원하여 일하러 갈 사람을 구하는 음성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연관으로 인하여 '엘로힘'(*)이라고까지 불리웠다(창 6:2;시 8:5).
ꃨ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입술이 정결케 됨으로써 죄에서 자유함을 입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 가슴의 뜨거움만큼이나 불타는 정열로 이렇게 소리친다:'나를 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 히네니)란 말은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따라서 '나는 준비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말이다(Alexander, Michaelis). 죄씻음을 받은 감격이 헌신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경우로는 시 51:12-15에 언급되어 있다.
성 경: [사6:9]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 하나님의 명령은 '가서-말하라'는 두 개의 동사로 집약된다(출 3:16;7:15;삼하 7:5;18:21;왕상 18:8;대상 17:4). '이 백성'이란 말씀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경멸이 내포되어 있다(6:10;8:6,11,12;9:13;28:11, 14; 29:13;미 2:11;학 2:14). 하나님에 대한 참된 두려움을 상실하고 그 행위로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ꃨ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할 것이요 -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선지자가 백성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성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며',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무감각(혹은 영적인 불감증)은 예레미야가 말한 바 '마음이 강퍅하고 목이 곧은'(렘 7:24-26) 백성들의 상태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에 의해 그의 사역의 결과를 묘사한 말로 4복음서에서 인용되었으며(마 13:13;막 4:12;눅 8:10;요 12:39), 바울에 의해서 두번 인용되었다(행 28:26,27;롬 11:8).
성 경: [사6:10]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 앞절의 명령이 백성들에게 내려진 것이라면, 본문의 명령은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깨닫지 못하며 알지도 못하리라'로 단언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지 못지않게 선지자 역시 자신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미리 알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삼중의 명령으로 나타났다. (1)'둔하게 하라'(*, 하쉬멘):이는 '살지게 하라', '기름으로 덮이게 하라'는 뜻이니,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에 대해 마음으로 전혀 지각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2)'막히게 하라'(*, 하크베드):이는 '무디게 하라'는 뜻이니, 청력이 무디어져서 어떤 깨달음도 갖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3)'감기게 하라'(*, 하솨):이는 '흐려지게 하라'는 뜻이니, 시력과 함께 모든 통찰력을 상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선지자의 사역으로 인해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이 둔해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된다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선지자가 선포해야 할 말씀 그 자체에서 이 같은 결과가 직접적으로 초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의 등처럼, 길의 빛처럼'(시 119:105) 사람을 밝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전적으로 죄인의 부패한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비밀을 이렇게 묘사한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칼빈(Calvin)이 잘 말한 것처럼, 눈이 어두운 사람이 빛을 볼 수 없다 하여 원망할 수 없는 일이며, 귀가 막힌 사람이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여 불평할 수 없는 일이며, 지각이 둔한 사람이 자기가 이해 못하는 문제의 어려움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판의 제1차적인 원인은 늘 죄인에게 있다. 그위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말미암는 버려둠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롬 1:24,26,28).
성 경: [사6:11,12]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마침내는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일 수 없다는 것을 선지자는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주여, 이 백성들의 눈먼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 되겠습니까?"(시 90:13 참조). 이 같은 물음의 배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즉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아니하신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ꃨ 대답하시되...많을 때까지니라 - 선지자의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이 너무 깊어서 완전한 파멸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엄위한 것이어서 그것은 온 나라가 황폐되고 백성들은 이방 민족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전국가적인 재난으로 실현되어지리라는 사실이다.
성 경: [사6:13]
주제1: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위임]
주제2: [이사야의 소명]
ꃨ 그 중에 십분의 일이...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 본문은 내용상 앞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설혹 심판에서 살아 남은 자가 있다 할지라도 - 1/10은 극히 적은 수를 가리킨다 - 그마저 계속되는 파멸의 와류에 삼키우고 말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절망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극적인 마침이 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절망에서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베임을 당한 나무의 표상에서 이러한 사상이 암시되고 있다.
ꃨ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남아 있는 것같이 - 밤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상록수에 가까우며 완전히 베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돋는 강인한 속성 때문에 이스라엘의 상징으로서 선택된 듯하다(Delitzsch). '그루터기'라고 번역된 '마체베트'(*)는 '뿌리'(De Wette), '줄기'(Gesenius), '기둥'(Leupold)을 뜻하는 말로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담지하고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Alexander).
ꃨ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최후까지 보존되어질 이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 제라 코데쉬)이다. '거룩한 씨'는 '행악의 종자'(*, 제라 메레임)와 대조되는 것으로서(1:4), 거듭되는 심판을 겪고서도 끝까지 살아 남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롬 11:5). 이들은 성장을 거듭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어'(37:31) 거대한 나무를 이루게 될 것이다.
성 경: [사7:1]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 본절은 예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로 - 에브라임 전쟁에 대한 요약이다. 선지자는 결과를 미리 말한 다음 세부적인 사항들을 밝히는 방식으로 예언을 진행시킨다. '웃시야-요담-아하스'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의 역사는 유다가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서 어떻게 국제적 분쟁의 회오리와 그 참혹한 파멸 가운데로 급락하게 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시로 - 에브라임 전쟁이었다(왕하 16장;대하 28장 참조). 구체적 설명은 강해란을 보라.
성 경: [사7:2]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 '다윗 집'은 다윗 왕조에 속한 아하스와 그의 정부를 가리킨다. 선지자가 본문에서 '다윗 집'으란 표현을 쓴 데는 두 가지 이유가 함축되어 있다. (1)다윗의 집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르신-베가의 동맹군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다윗 왕조를 폐하고 괴뢰 정권을 세우는 데 있었던 것이다(6절). (2)이 위기는 다윗 왕조가 여호와와 맺은 언약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데서 온 필연적 결과이며(삼하 7장), 따라서 아하스가 직면한 외부적 위협은 실은 여호와의 징계로 주어진 것임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9절에서 선지자가 다시금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ꃨ 왕의 마음과...흔들렸더라 - 이 불길한 소식을 접했을 때 왕과 온 백성 곧 나라 전체가 보인 반응은 심장이 얼어 붙는 듯한 두려움, 그것이었다. 선지자는 그것을 직유법으로 표현한다:'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이는 주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단적으로 드려내 주고 있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불신은 오직 두려움만을 증폭시킨다.
성 경: [사7:3]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때에 여호와께서...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 이 상황에서 선지자는 '스알야숩'이란 의미 심장한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과 더불어 아하스 왕을 만나라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 온다'는 뜻이다(10:21).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위협(단지 남은 자만 돌아온다) 혹은 약속(적어도 남은 자는 꼭 돌아올 것이다)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문맥상 위로의 약속에 더 큰 비중이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 왕은 스알야숩뿐만 아니라 그 곁에 서 있는 이사야를 또한 만나야 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이 있는 이사야의 이름은 스알야숩이란 이름과 함하여 완전한 계시를 이룬다(Leupold).
성 경: [사7:4]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 이사야와 그 아들 스알야숩이 아하스 왕에게 보여진 것이 하나님의 시각적 메시지였다면, 본절부터는(9절까지) 청각적 메시지가 명료하게 전달된다. 그 메시지는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4개의 명령(혹은 권유)으로 시작된다. '삼가라'(*, 히솨메르)는 두려움에 쫓겨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종용하라'(*, 하쉬케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평온하고 안정된 마음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수 1:6)는 명령이 덧붙여진다. 왜냐하면 두려움이야말로 믿음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는 마음이 녹아 내리는 낙심밖에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앞의 두 가지가 신앙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라면, 뒤의 두 가지는 불신앙에서 오는 전형적인 상태이다.
성 경: [사7:5]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이르기를 - 개역 성경에는 '때문에'(*, 야안 키)란 말이 빠져 있다. 원문대로 읽으면 '아람이 너를 대적해서 악을 도모하여,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도, 말했기 때문에'이다. 언제나 아람이 먼저 거론된다(4절). 이는 원정군의 주도권을 쥔 나라가 아람이었음을 나타낸다.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은 동의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름을 셋으로 나누어 표기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운율을 고려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Alexander). 본문에서 시작한 긴 문장은 7절에서 끝난다(Gesenius, Hitzig, Ewald).
성 경: [사7:6]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하였으나 - 앞절에서 말한 '악한 꾀', 즉 원정군의 전쟁 목적이 명확하게 기술된다. 그것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그것을 곤하게 하고': '곤하게 하다'로 번역된 '네키체나'(*)는 '두렵게 하다', '포위하다'는 뜻이니, 곧 유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어넣어 스스로 무너지게 하자는 것이다. 고대의 전쟁은 신경전이 그 승패를 좌우했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쪽이 으레 패배하기 마련이었다. (2)'그것을 파하고': '파하다'(*, 나브키엔나)는 '산산이 쪼개다', '박살내다'는 뜻이니, 힘으로 유다의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온 나라를 유린하자는 것이다. (3)'다브엘의 아들을...왕을 삼자':최종적인 목표는 다윗 왕조를 폐하고 자기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괴뢰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다브엘의 아들'은 '르말리야의 아들'이란 이름처럼 경멸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더구나 이스라엘인인지 수리아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왕상 15:18에 나오는 수리아인 '다브림몬'과 그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수리아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사7:7]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 본문은 5절에서 시작한 긴 문장의 귀결절에 해당하며 동시에 새로운 절을 유도하는 상관적인 기능을 갖는다:유다를 공격하여 정권을 바꾸고자 하는(6절) 르신과 베가의 악한 꾀는(5절) 결코 실현되지 못한다(7절). 왜냐하면...(8,9절).
성 경: [사7:8,9]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은 이사야]
ꃨ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 여기서 '머리'(*, 로쉬)는 한 나라의 수도 혹은 주권(통치)을 뜻하는 비유 언어이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의역 가능하다: '아람의 수도는 (오직) 다메섹일 뿐, 예루살렘은 아니다. 르신이 다메섹의 왕이라면 그의 통치는 (오직) 다메섹에만 국한될 뿐, 예루살렘에는 미칠 수 없다.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므로 용납될 수 없다.'
ꃨ 육십 오년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 본문은 앞에 나온 내용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아람에 대한 진술에 이어 에브라임이 나온다는 것이다. (2)본문의 시점(아하스 왕 2년, 곧 B.C. 734년)으로부터 보면 에브라임의 패망이 불과 십 몇 년 내의 일인데 선지자가 65년이라고 말한 것은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본문을 후대에 편집되어 삽입된 것으로 간주했다(Eichorn, Gesenius). 그러나 현대적인 논리를 앞세워 섣불리 성경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선, 선지자의 눈은 시종 일관 유다에 향해 있다. 주변 국가에 대한 언급도 유다에 관련있을 때만으로 한정된다. 그는 아람의 한계에서 그와 동맹한 에브라임의 운명을 읽고, 또한 에브라임의 운명에서 같은 민족인 유다의 미래를 읽는다. 그 미래는 전적으로 신앙에 따라 좌우된다. 둘째, 연대 문제에서 그것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한 B.C. 722년의 예루살렘 점령에 국한시키기보다, B.C. 669년에 있었던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에 의한 식민지 정책에 맞춘다면, 65년이라는 기한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앗술 바니팔은 주변 여러 민족들을 데려와서 사마리아에 거주케 하였는데,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에브라임은 국가로서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고 혼합 민족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왕하 17:24;스 4:2).
성 경: [사7:10]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 앞절과 본절 사이에 짧은 휴지(休止)가 있음이 분명하다. 아하스는 선지자의 전언(傳言)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마음이 앗수르쪽으로 기울어진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된다.
성 경: [사7:11]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아하스 왕에게 그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징조'는 예언의 성취와 약속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증거로서 취해졌다. 그것은 때로는 이적(38:7,8;출 4:8)으로, 때로는 미래 사건들을 지명하는 지각 가능한 상징들(8:3,4,18;겔 12:6)로 나타난다. 만일 아하스가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한다면, 그는 이적적인 증거를 구함으로써 불신앙을 확신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최후의 기회였다.
성 경: [사7:12]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 여호와를 시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인 언행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신 6:16의 금지 계명을 내세워 자신의 불신앙을 포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징조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의 불신앙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Umbreit)나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능력(Gesenius)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내적인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스스로 고안해낸 별도의 대책이 서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성 경: [사7:13]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하려느냐 - 개역 성경에 단수로 나와 있는 '사람'은 원문에는 '사람들'(*, 아나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선지자 자신을 가리킨다기보다는(Bultema) 아마도 권세자들에 의해 압제받는 백성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의 책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너희가 백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도 마치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이제는 불신앙으로 그의 은혜마저 거절하는구나.'
성 경: [사7:14]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문자적으로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이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창 29:32-35;30:6-13;3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관습으로 보인다(창 16:15;삼하 12:24;눅 1:62,63등). 그러나 누가 아이의 이름을 짓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 1:23에서는 본문의 주어가 3인칭 복수형(그들)으로 인용되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이다. 일차적으로 그 이름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르신-베가의 멸망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또 그의 어머니인 '처녀'(*, 알마)는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예로부터 학자들 간에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1)그 어머니는 동정녀 마리아이며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주장(E.J.Young):이것은 아이의 성장과 아하스 당대의 정치적 상황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는 15-17절로 인해 수용하기 어렵다. 이러한 난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본절의 아이와 15,16절의 아이를 구분하거나(박윤선), 혹은 본절과 15절의 아이와 16절의 아이를 각각 다른 인물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Bultema, Calvin), 이 경우에 해석의 자의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마 1:23에 의거, 본문이 메시야적 예언임에 틀림없다고 할지라도 시공간적 거리를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아기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그 어머니는 아하스 왕의 왕비 혹은 후궁을 가리키며, 그 아이는 히스기야를 가리킨다는 주장(Lindblom, Steinmann):이는 주로 유태계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연대기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B.C.728년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 이미 25세였으므로,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는 10대의 소년이었던 것이다(대하 29:1). (3)그 어머니는 이사야 선지자의 아내이며 그 아이는 선지자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주장(Clements):이 경우에 선지자가 8:3에서처럼 '선지자의 아내' 혹은 '여선지자'(*, 하네비아)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굳이 '알마'(*)라는 모호한 말로 대신하였는가가 의심스럽다. 게다가 그의 아내처럼 오래도록 결혼 생활을 한 여자를 '알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도 수긍하기 힘들다. (4)선지자가 특정인을 가리키지 않고 일반적으로 당시 유다에 살고 있던 어머니들을 가리킨다는 주장(O.Kaiser). 이 경우에 정관사 '하'(*)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상의 어떤 주장도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 다만 이제까지 주어진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볼 때, 우선 징조로서의 이 아이는 아하스 당대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그 아이의 성장 기한과 르신-베가 동맹군의 몰락이 결부되어 있다는 15,16절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또한 이 징조는 아하스 당대에만 국한될 수 없다. 그것이 다윗의 집에 주어졌고, 더욱이 이 임마누엘의 위로가 앗수르의 위협과 더불어 소멸되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큰 역사적 지평으로 확대된다. 선지자의 예언이 궁극적인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은 그 인격 속에 임마누엘의 약속과 구원을 구현할 메시야의 탄생에서이다. 따라서 추측컨대, 아이의 어머니는 선지자와 동(同)시대 사람으로서 다윗 가문에 속한 한 처녀이며, 그 아들의 이름 임마누엘은 위기의 순간에 그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장차 인간의 몸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함께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사7:15]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때에 미쳐 - 영아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 선악을 분별한다 함은 영아의 상태를 넘어섬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그 아이가 자라서 사물을 판단하는 나이에 이를 때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나이는 대략 3세 정도로 추정된다.
성 경: [사7:16]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임마누엘의 징조]
ꃨ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 '미워하는'은 문자적으로는 '두려워하는'이다. 유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 나라 수리아와 에브라임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과(B.C. 732년) 살만에셀 5세(B.C.722년)의 침공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며(왕하 15:29;16:9;17:6), 따라서 그들로부터 가해진 위협도 소멸될 것이다.
성 경: [사7:17]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여호와께서...임하게 하시리니 - 비록 수리아와 에브라임에 의한 위협은 소멸된다 할지라도 유다의 시련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유다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앗수르로부터 올 것이다.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심판의 위협으로의 이 돌연한 변화는 실은 아하스 왕의 불신앙이 자초한 것이다(10-13절). 불신앙에 대한 심판은 여호와로부터 온다. 앗수르는 그 손의 막대기에 불과하다(10:5).
ꃨ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 앞으로 당할 환난의 무서움과 그 비참함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그 분열의 역사에 비견된다. 민족의 분열은 모든 비극의 뿌리요 모태였다.
성 경: [사7:18]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 - 유다를 괴롭힐 침략군에는 앗수르 뿐만 아니라 애굽도 첨가된다. 선지자는 애굽을 파리로, 앗수르를 벌로 비유하고 있다. 나일 강을 끼고 있는 애굽에는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많은 종류의 곤충들, 그중에서도 특히 파리가 많았다. 반면에 많은 산과 숲으로 우거진 앗수르에는 벌떼가 많았다. 본문을 역사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상황의 전후 관계가 불분명할 수 있다. 애굽 군대가 유다 땅을 유린하게 된 것은(왕하 23:28-30) 훨씬 후대의 요시야 왕 때였다(B.C.609년). 그리고 애굽 왕 바로느고가 이끄는 애굽 군대와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군대가 격돌한 저 유명한 갈그미스(Carchemish)전투에서 애굽이 패퇴함으로써 고대 근동의 주도권은 사실상 바벨론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B.C.605년). 앗수르 군대에 의한 피해는 히스기야 왕 때 가장 극심하였다(36,37장).
성 경: [사7:19]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 선지자의 비유는 계속된다. 파리와 벌로 비유된 애굽과 앗수르 군대는 여호와의 신호에 따라서 유다 땅 전역을 뒤덮게 될 것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여기 언급된 네 장소를 각각 파리와 벌의 서식지로 파악하여, 거친 골짜기와 가시나무 울타리는 파리에, 바위틈과 모든 초장은 벌에 연결시켰다. 또한 클레리커스(Clericus)는 이들 장소들이 군대가 주둔하기 적합한 곳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오스발트(Oswalt)는 이들이 곤충들로 비유된 외국 군대로부터 유다 백성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선택한 장소들이라고 하였다.
성 경: [사7:20]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 선지자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 애굽은 유다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선은 다시 앗수르에게 향한다. 18절에서 벌로 비유된 앗수르가 여기서 다시 삭도로 비유된다. 그것은 '세내어 온 삭도'이다. 선지자는 아마도 아하스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상당한 양의 돈을 주고 그의 도움을 구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듯하다(왕하 16:7,8).
ꃨ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수염도 깎으시리라 - 1:6에서 전신에 상처입은 패전(敗戰) 군인으로 그려진 유다 백성이 여기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깎여진, 더할 나위없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삼하 10:4,5).
성 경: [사7:21]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 벌거벗은 상태 곧 황무지로 변하고 만 유다의 비참함을 선지자는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의 소유물은 겨우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젖을 뽑아낸들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현저한 인구 감소로 인하여 그 젖이 오히려 남아돌 것이라고 한다.
성 경: [사7:22]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 앗수르의 삭도를 피하여 남아 있는 자에게 제공되어질 음식은 응결된 젖과 야생꿀이 그 전부이다. 그들은 싫증이 날 정도로 계속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Delitzsch).
성 경: [사7:23]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그 날에는 천(千) 주(株)에 은 일천 개의 가치되는 포도나무...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 본절 이하에서 질려와 형극으로 특징지워지는 황무지에 대한 묘사가 계속 반복된다. 남은 자들이 뻐터와 꿀로 연명하게 되는 것은 포도와 곡식으로 가득 채워졌던 언덕들이 모두 가시덤불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은 일천 개'는 은화 일천 세겔을 말한다. 이처럼 최상품의 포도나무들이 재배되던 곳이 그 날에는 질려와 형극으로 무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다 백성들에게 임할 비극을 극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사7:24]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 찔레와 형극으로 가득 차고 사나운 들짐승들이 서식하게 될 그곳에 살과 활을 갖지 않고 나가는 것은 크나큰 위험이 될 것이다. 그 땅이 쓸모가 있다면 어쩌면 사냥터로나 적합할지도 모른다.
성 경: [사7:25]
주제1: [임마누엘 예언]
주제2: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
ꃨ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 이전의 유다는 포도나무로 상징되는 농업 경제를 자랑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제는 소와 양으로 상징되는 유목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가 본 유다의 미래 모습이다(G.W.Grogan).
성 경: [사8:1]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 본장은 7장과 동일한 역사적 맥락 위에 놓인다. 앞서 선지자는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가 성장하기 전에 먼저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몰락하고 그 다음에 유다가 황폐해질 것을 예언한 바 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경과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1년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Kissane).
ꃨ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 새로 주어질 이 징조는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도 뚜렷이 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큰 서판을 취하도록 명령되었다. '서판'(*, 길라욘)은 금속으로 만든 판을 가리킨다(30:8).
ꃨ 그 위에 통용 문자로 - '통용 문자로'(*, 베헤레트 에노쉬)라는 말은 직역하면, '(한)사람의 필체(writing style)로'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자로 기록하라는 것이다.
ꃨ 마헬살랄하스바스 - 본래의 음대로 읽으면 '마헤르-솰랄-하쉬-바즈'이다. 그 뜻은 '신속하게-약탈물을-급속히-노획물을', 즉 '약탈과 노획이 급속히 이르름'이다. 이는 수리아와 에브라임이 앗수르에 의해 머지 않은 장래에 노략당할 것을 나타낸다(4절).
성 경: [사8:2]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 -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왕에게 빌붙어 후에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앗수르 제단을 건립하는 데 협력한 자이며(왕하 16:10-16), 스가랴는 아마도 아하스 왕의 장인을 가리킬 것이다(왕하 18:1,2;대하 29:1). 이들이 진실한 증인이라 불리는 것은 그 지명도와 영향력이 커서 백성들에게 사실을 왜곡됨 없이 말해주리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사8:3]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 직역하면 '내가 여선지자를 가까이하매'이다. '여선지자'(*, 하느비아)는 그의 아내를 말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대개 그 남편이나 부친의 품위를 따라 여자에게도 그와 비슷한 칭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출 15:20) 그녀가 반드시 어떤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했으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성 경: [사8:4]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 '아빠'(*, 아비)와 '엄마'(*, 임미)는 갓난 아이가 최초로 발음하는 소리이다. 이제 예언 성취의 시간은 임마누엘의 때보다 더 앞당겨졌다. 왜냐하면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아는것'(7:15,16)보다 '아빠-엄마'라고 웅얼거리는 것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앗수르에 의한 수리아와 사마리아의 몰락은 훨씬 더 급박한 사실로 눈앞에 놓이게 된다.
성 경: [사8:5]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여호와께서 다시...일러 가라사대 - 수리아와 사마리아의 약탈만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유다가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한 일로 인하여 장차 벌어질 사태를 백성들 또한 목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본절은 7:10에서 처럼, 짧은 시간의 경과를 전제할 수도 있다(Alexander).
성 경: [사8:6]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 실로아 물은 기혼 샘물에서 발원하여 예루살렘 도성의 동편을 끼고 흐르는 작고 가느다란 시냇물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에 대조적인 의미로 쓰였다. 이는 곧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근하고도 비밀한 보호를 뜻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짓눌려 있어서 천천히 흐르는 이 실로아 물이야말로 참된 구원이 됨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ꃨ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 유다 백성들이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의 파멸을 보고 자만하여 기뻐한다는 뜻이다(rejoice...,KJV, NIV). 참조로, '기뻐하다'는 뜻의 '마소스'(*)대신에 '두려워하다', '녹다'는 뜻의 '마사스'(*)를 대치시켜 해석하기도 한다(RSV, Hitzig).
성 경: [사8:7]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 눈에 보이는것만으로 위로를 삼는 백성들에게 앗수르 군대의 힘과 위용이야말로 거세게 넘실대는 유브라데 강물처럼 마음 든든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범람하는 그 강물이 마침내 수리아와 사마리아를 넘어 유다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의지하는 이는 다 이와 같을 것이다.
성 경: [사8:8]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ꃨ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목에까지 미치리라 - 앗수르에 의한 유다의 약탈은 목에까지 물이 차는 정도의 극심한 홍수 상태로 비유되었다. 선지자의 예언처럼, 디글랏 빌레셀의 대군은 몇 년 안 되어 유다의 넓은 지역을 파괴하고 예물뿐 아니라 공물까지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대하 28:20,21). 그러나 더 큰 피해는 그 후대의 왕, 특히 산헤립(B.C. 705-681) 때에 이루어졌다.
ꃨ 임마누엘이여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말이 문장 맨 뒤에 놓여 있다. 선지자의 눈은 다시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한 아이에게 향한다. 이는 범람하는 물결이 거의 목에 차고 새의 편 날개가 온 땅을 덮는 것처럼, 유다 전역이 물에 잠긴 듯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란 오직 그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이 소망스러운 이름을 기점으로 하여 선지자의 어조와 전망은 일변한다. 비록 가까운 장래에 적들로부터 주어질 재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승리와 구원은 이 땅 위에 임할 것이다.
성 경: [사8:9,10]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하나님의 도구 앗수르]
명령법과 반복법으로 이루어진 본문은 임마누엘이 주는 위로와 보호를 말하고 있다. 그 요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을 세상의 나라들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ꃨ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 '민족들'(*, 아밈)은 앗수르인들을 위시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적대하는 모든 민족들을 가리킨다. '훤화하다'(*, 로우)는 '격노하다', '시끄럽게 날뛰다'(Henderson), '제멋대로 날뛰다'(Alexander)는 뜻으로 전쟁의 함성을 말한다.
ꃨ 필경 패망하리라 - 격동하고 허리를 동이며 모략을 짜내는 등 저들이 온갖 수고와 준비를 아끼지 않을지라도 그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뭇 세력들에게 주어질 궁극적인 운명은 패망뿐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말이 9절에서만 3번, 10절에서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로 2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ꃨ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 저들이 필경, 궁극적으로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이 놀라운 '임마누엘'(*)의 선언 때문이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칭호로 쓰이지 않고 선언적인 진술로 사용되었다.
성 경: [사8:11]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 임마누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으므로 선지자의 마음은 자연 위축되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처음부터 예측된 것이었다(6:9,10). 따라서 하나님은 연약해진 그를 강하게 만드실 필요가 있었다. '손'(*, 하야드)은 전능자 여호와의 손을 가리키며, 그 손이 선지자에게 얹혀질 때 특별한 영감과 능력을 덧입을 수 있었다(겔 1:3).
성 경: [사8:12]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이 백성의 맹약(盟約)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 '맹약'이라 번역된 '케쉐르'(*)는 '공모하다', '협력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그 현대적 의미는 '반역', '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말은 신하가 군주를 거역하고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에 주로 사용되었다(왕하 11:14;14:19;15:30). 당시 르신-베가 동맹군에 맞서 친앗수르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정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노선을 추종치 않고 반대하는 자들은 - 이사야 선지자가 대표적이다 -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반역자들로 간주되었다. 본문에서 선지자에 대한 동(同)시대인들의 시각을 확연하게 엿볼 수 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에게도 이와 동일한 비난이 가해졌다(렘 20:1,2;26:8-11;암 7:11-13).
성 경: [사8:13]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하고 -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만 주어진다. 그의 거룩하심을 인식한다 함은 그가 만군의 여호와, 곧 피조세계와 구별되어 홀로 높이 계시는 절대 주권자이심을 알아뵙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안절부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 경: [사8:14]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 '거룩한 피할 곳'으로 번역된 '미크다쉬'(*)는 '거룩한 것'(a holy thing)이란 뜻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피난처, 은둔처로 간주되어온 거룩한 장소 곧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왕상 2:28, Gesenius, Rosenmuller, Ewald). 여호와는 그를 믿고 그에게 도피하는 이들에게 피난처요 산성이 되어 주실 것이다(시 18:2).
ꃨ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올무가 되시리니 - '이스라엘의 두 집'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오직 인간의 생각만을 의지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들의 길을 가로막는 거북한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가 신약 성경에서 보다 명백하게 표현되었으니, '거룩한 자'(*, 토 하기온, 눅 1:35)-'미크다쉬'에 상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에게는 그가 보배가 될 것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될 것이다(롬 9:33;벧전 2:7,8). '예루살렘'은 강조적인 의미로 첨가된 것이다.
성 경: [사8:15]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 본문은 여호와가 그를 믿지 아니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거치는 돌'이 될 것이라는 앞절의 위협의 연속이다. 그것은 5개의 동사로 구성되는데 앞의 세 동사들은 '돌과 바위'에 관계되며 뒤의 두 동사들은 '함정과 올무'에 관계된다.
성 경: [사8:16]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 이 명령은 여호와로부터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싸매며'로 번역된 '초르'(*)는 '기입하다', '새기다'는 뜻의 '추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Vitringa), '묶다'는 뜻의 '차라르'(*)에서 파생된 말이다(Alexander). 선지자는 증거의 말씀을 적은 두루마리를 묶어 봉함하도록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계시가 무시되고 거절되었기 때문이다.
ꃨ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 이제 그 말씀은 소수의 사람들, 즉 그 마음속에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질 것이다. 선지자의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작은 집단에 제한될 것이며 전체로서 그 나라는 부정적인 태도 때문에 주의 계시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Leupold).
성 경: [사8:17]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 그의 공적 사역이 위축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로부터 얼굴을 돌리시는 이 암담한 때에 선지자가 취할 태도는 '기다림'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기다림은 '기대함'이다. 기대함은 소망으로 앞을 내다봄이다. 이러한 믿음의 자세가 '기다리며'(*, 하카), '바라본다'(*, 카와)는 두 동사에서 잘 나타난다. '카와'는 '기대한다'는 뜻이다.
성 경: [사8:18]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 주의 말씀이 거부되고 그의 활동이 제약되는 상황에서도 선지자의 마음은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였다. 이는 아마도 11절의 결과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뉜다. 먼저, 몇몇 옛주석가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용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히 2:13)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는 메시야 자신이며, '자녀들'은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라고 주장한다(Henderson). 그러나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화자(話者)이며, '자녀들'은 그의 두 아들 즉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esenius, Ewald, Delitzsch, Rosenmuller). 이 해석이 타당하니 첫째, 선지자를 비롯하여 그의 두 아들이 모두 그 이름을 통한 징조와 예표로서 백성들에게 보내어졌다는 것과, 둘째, 히브리서의 인용과 관련하여,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선지자와 그 아들들의 이름이 갖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모형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Delitzsch).
ꃨ 징조와 예표 - 이 두 용어는 '미래 사건의 표징, 암시'(*, 튀포스)를 뜻하는 같은 의미의 낱말들로서 자주 결합되어 쓰인다(신4:34;6:22;7:19; 26:8; 28:46; 29:2; 4:11;시 135:9 등).
성 경: [사8:19]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 불신자들이 유혹하는 소리이다. '신접한 자'로 번역된 '오보트'(*)는 원래 '부풀게 하는 가죽'(욥 32:19)이란 뜻의 '오브'(*)의 복수형인데, 여기서는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 지하로부터 영을 부르는 사람, 즉 마술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신 18:11;삼상 28:8;대상 10:13). '마술사'로 번역된 '야데오님'(*)은 '알다'는 뜻의 '야다'(*)에서 파생된 말로, '아는 자', '지혜로운 자', '점쟁이'를 의미한다(레 19:31;신 18:11).
성 경: [사8:20]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ꃨ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 불신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후에 신자의 마땅히 행할 바를 명시한다. 본문은 전쟁시에 사용되는 슬로건(표어)의 형태로 되어 있다(삿 7:18 참조):'율법과 증거(의 말씀)에게로!'
ꃨ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 '율법과 증거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이자 규범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우된다. 앞서 말한 표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불행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 경: [사8:21,22]
주제1: [앗수르의 압제 중에 나타나는 임마누엘의 위로]
주제2: [유다의 배교에 관한 경고]
아침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겪게 될 비참한 상태가 두 절에 걸쳐 묘사된다.
ꃨ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 우선, 그들의 처지는 사막의 불볕 아래 음식도, 물도 없이 허덕이는 비참한 모습과도 같다. 선지자는 아마도 앗수르의 압제 아래 백성들이 당하게 될 곤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번조(煩燥)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 그들의 고통이 너무도 격심하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하며 자기의 왕과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저주하게 될 것이다. '번조하여'(*, 히트카차프)는 '분노하다', '격노하다'는 뜻이다. 스스로 자초한 불행에 대하여 그 모든 원인을 그들의 지도자에게,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하나님에게 돌려 저주하는 행위는 가장 비열한 짓으로 여겨졌다(출 22:28;왕상 21:10).
ꃨ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 문자적으로는 '어두움 속으로 내쫓기리라'이다. '아펠라'(*)는 짙은 어두움에 사용된다(출 10:22). '쫓겨 들어간다'로 번역된 '메누다'(*)는 '내몰다', '추방하다'는 뜻을 가진 '나다'(*)동사의 수동 분사형이다. 선지자의 묘사는 비유로 가득하다. 본장의 마지막 절에서 지배적인 색조는 흑암이며, 주된 정조는 절망이다. 이 모든 것이 아침을 빼앗긴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이들에게 예정된 운명이 된다.
성 경: [사9:1]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 본문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8:23로 매겨져 있다. 비록 '흑암', '고통' 등의 어두운 단어들이 연속되고 있지만 내용은 정반대이다. 흑암이 걷히고 빛이 다시 비췬다. 이 모든 변화는 한 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비롯된다(6,7절). 흠정역은 문장 첫머리에 나오는 불변사 '키'(*)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함으로써(nevertheless) 이러한 변화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ꃨ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본절에 언급된 지역들은 사사 시대 이래로 주변 열국들의 침입으로 항상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이방 민족들과 접경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하여 팔레스틴의 다른 지역들보다도 이방적 색채가 더 짙었다. 게다가 최근에 자행된 앗수르 군대의 침략(B.C. 733,732년)으로 이 근방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 이런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요인들 때문에 갈릴리 지역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아왔던 것이다(요 1:46;7:41,52;행 2:7). 그러나 새 날이 밝을 때, 흑암이 가장 깊은 이 땅에 빛이 가장 먼저 비췰 것이다.
성 경: [사9:2]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빛이 비취도다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은 앞에 언급된 갈릴리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가리키며,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와 평행을 이룬다. '흑암'은 슬픔 혹은 재난으로 바꿔 말할 수 있으며, 더 넓게는 죄와 그로 말미암는 총체적인 불행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시 107:10,11). '큰 빛'은 세상의 빛이요(요 8:12) 참된 빛이며(요 1:9) 의의 태양이신(말 4:2)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 마태에 의하면, 이 빛은 맨 먼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마을에서 부터 비취기 시작했다(마 4:13). 그가 처음 이적을 베푸신 곳도 갈릴리였으며(요 2:11), 맨처음 가르치신 곳도 그가 자라나신 갈릴리의 나사렛 회당이었다(눅 4:14-17). 천국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곳도 바로 갈릴리 해변가였다(마 4:17;막 1:14,15). 이로써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본다는 선지자의 예언은 신약에 이르러 완전하게 응하였다.
성 경: [사9:3]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 내용은 주께 대한 찬양과 감사로 바뀐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일 가운데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나라를 창성케 해주신 것이다. '창성케 함'은 백성의 수를 많게 함이다. 둘째는, 즐거움을 더하게 해주신 것이다. 백성의 수의 증가와 즐거움의 증가는 모두 메시야 시대를 특징짓는 주도적인 현상들로 간주된다(26:15;66:8;슥 14:10,11).
성 경: [사9:4]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멍에와...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였음이니이다 - 본문의 '멍에'와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는 모두 노예를 다룰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이 가운데 특히 '멍에'(*, 수발로)와 '그 압제자'(*, 하노게스 보)는 애굽에서의 속박을 연상시킨다(출 2:11). 성경적 표상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을 속박하는 어두움의 세력을 대표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해방 사건은 애굽에서의 구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미디안의 날'을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적은 수효로 많은 대적들을 물리친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이 가장 분명하게 현시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삿 7:2, Oswalt, Calvin).
성 경: [사9:5]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살라지리니 - 구원은 압박받는 백성에게는 해방으로 경험되지만, 압제하는 군대에게는 패망 이외 다름 아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사상은 기드온의 승리(Junius)나 앗수르의 전멸(Delitzsch) 보다 더 크다. 전쟁을 위한 무장들인 '갑옷'(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군화'로 번역함)과 '군복'이 불에 태워지리라는 표현은 적들의 패망이라는 일차적인 의미 외에 더 나아가 전쟁 자체의 소멸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절에서 평강의 왕이신 메시야가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사9:6]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 '정사'로 번역된 '미스라'(*)는 '지도자가 되다'는 뜻의 '사라'(*)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통치'를 의미한다. '정사를 어깨에 멘다'는 말은 권위의 상징으로 주어진 금고리나 열쇠를 어깨에 걸친 데서 연유한 듯하다(22:22 참조).
ꃨ 기묘자라, 모사라 - '기묘'(wonder)와 '모사'(counsellor)를 구분하여 해석할 수도 있으나(Gesenius, Rosenmuller, Delitzsch),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lor) 라는 해석도 가능하다(28:29, Gray, Oswalt).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계획을 세우실 것이며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
ꃨ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 신적인 계획의 수립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첫째 이름과 둘째 이름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전혀 손색이 없다. '엘 깁보르'(*)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와 부를 하나님의 이름이며(10:21),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신 10:17;느 9:32;시 24:8;렘 32:18). 따라서 이 아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성(神性)을 소유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ꃨ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라 - '영존함'은 신성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아버지'에 놓인다. 히브리식 사고에서 아버지는 아들과 상관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부양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후원자, 보호자 등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22:21;욥 29:16;시 103:13). 따라서 '아비 아드'(*)는 그의 백성들, 더 넓게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ꃨ 평강의 왕이라 - 마지막으로 그는 백성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자로서 '왕'이라 불리운다. 높은 곳에 앉아서 밑에 있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왕의 개념은 히브리적이라기보다는 이교적이다. 더 나아가 그는 '평화의 왕'(*, 사르-솰롬)으로 불린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며, 그의 다스림 역시 평화로울 것이다(시 72:3,7;렘 33:6;미 5:4;슥 9:10 등).
성 경: [사9:7]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메시야 탄생과 통치]
ꃨ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와 그의 자손이 영원토록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확약하셨다(삼하 7:13,16). 사실 다윗 왕국은 구약 역사에서 백성들이 동경하던 하나님 왕국의 실체임과 동시에 장차 메시야에 의해 건설될 항구적인 평화의 왕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O.Robertson).
ꃨ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 그 나라의 영속성은 다윗 언약에 기초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내부 구조는 '공평'(*, 미쉬파트)과 '정의'(*,체다카)이다. '공평'과 '정의'야말로 메시야 왕국을 지상의 나라와 구별짓는 결정적인 표지인 셈이다. '보존하다'(*, 사아드)는 '떠받치다', '유지하다'는 뜻이다.
성 경: [사9:8]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 본문에서 '말씀'(*, 다바르)은 보냄을 받은 자 곧 사자와 동일시되고 있다(시 107:20;147:15,18). 이 말씀은 여호와로부터 보내졌기 때문에 일점 일획의 어김도 없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보내신 자에게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55:11). 여기에 히브리적 사고의 독특함이 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말씀과 사건이 구별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사건으로 구체화되며, 이를 통해서 그 말씀의 진실성이 입증된다(호 6:5).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과 함께 사건이라는 의미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38:7;42:16;창 34:14;신 17:5;삼상 3:11). 그 말씀이 야곱에게 보내어진다. 마치 음울한 소식을 전하러 가는 전령처럼 말이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의어로 쓰였으며, 여기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킨다(Alexander).
성 경: [사9:9]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5:3)과 대조되는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미루어 충분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겸손하기보다는 교만으로 일관한다.
성 경: [사9:10]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대신하리라 하도다 - 자만으로 가득 찬 에브라임의 말이다. 벽돌과 뽕나무는 둘 다 값싼 건축 자재들인데, 빈약한 건물이나 서민들의 집을 지을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에 반해서 다듬은 돌과 백향목은 고급품들로서 권세자들의 거처나 호화로운 건물을 지을 때 주로 이용되었다(왕상 5:6;대하 1:15;2:3;스 3:7;암 5:11).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들이 외국 군대의 침공을 받아 손상을 입을지라도 자신들의 힘으로 이전보다 더 강성해진다고 호언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사9:11]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 에브라임은 그들의 교만의 대가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르신의 대적'(*, 차레 레친)은 언어 유희를 이용한 수법으로 앗수르인들을 가리킨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르신과 동맹을 체결했었다. 그러나 르신이 죽고 앗수르에 의해 수리아(아람)가 정복된 이후(왕하 16:9) 에브라임은 앗수르의 종속국으로 전락한 아람에 의해 침략을 당하게 된다(12절-'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성 경: [사9:12]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 '앞'(*, 케뎀)과 '뒤'(*, 아호르)는 오히려 동과 서로 이해함이 자연스럽다(11:14;창 2:8;욥 23:8 등).
ꃨ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 그러나 실제로 블레셋은 북이스라엘을 침략한 적이 없고 남유다만을 괴롭혔을 뿐이다(대하 28:18,19). 따라서 여기 언급된 '이스라엘'은 온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Delitzsch).
성 경: [사9:13]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이 백성이...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 '돌아오다'(*, 슈브)는 완전한 전환을 뜻하며, '찾다'(*, 다라쉬)는 '문제를 풀기 위해 물어 옴, 혹은 전심으로 구함'을 뜻한다(출 18:15;신 4:29). 그러나 이들 동사 위에 부정사(不定詞) '로'(*)가 놓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백성은 반역적인 태도를 고집하였다.
성 경: [사9:14]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종려가지와 갈대 - '종려가지'(*, 키파)는 그 아름다움과 유익함으로 인해 대단히 고귀한 식물로 평가되었으며, 후일 로마 동전에 유대의 상징으로 새겨지기도 하였다(시 92:12;아 7:7,8, Alexander). 이와 대조적인 이미지로 사용된 '갈대'(*, 아그몬)는 '습지', '늪', 혹은 '시궁창'(*, 아감)에서 자라는 식물(풀)로, 대단히 천하게 여겨졌다. 이 둘은 아마도 고귀한 자와 천한 자를 암시하는 듯하다(19:15).
성 경: [사9:15]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 이사야가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을 가리켜 '꼬리'라고 부르는 까닭은 ('꼬리'(*, 자나브)에는 본래 사악하고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들이 마치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권세있는 자들의 편에 빌붙어 부끄러운 말과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E.J.Young).
성 경: [사9:16]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하니 - 3:12의 탄핵과 유사하다. 지도자들의 범죄는 특히 무겁게 취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잘못은 자신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성 경: [사9:17]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이 백성이 각기 설만(褻慢)하며 -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이는'(*, 키)이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토록 진노하시며 그들을 버릴 수밖에 없는 까닭을 설명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들 모두가 부패했다. '설만하다'(*, 하네프)는 '모독하다', '불경건하다'는 뜻이니,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심 대신 오히려 하나님을 비웃고 모독하는 불경건만이 가득함을 나타낸다(시 14:3).
ꃨ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대상이었다(1:17;출 22:22;신 10:18;14:29). 그러나 그들에게까지도 주께서 평상시 베푸시던 긍휼이 거절될 것이다. 이는 주의 진노하심과 크기가 어느 정도이며 또한 백성들의 죄악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전자는 반복되는 후렴구에서, 후자는 이어지는 진술에서 명확히 표현되고 있다.
성 경: [사9:18]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대저 악행은 불태우는 것 같으니 - 죄악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선지자는 그것을 '불'에 비유한다. 이 불은 인간의 내면에서 끝없이 타오른다(창 4:7 참조). 물을 부어 꺼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아무도 이 불을 끄지 못한다. 따라서 성경은 끝없이 타오르는 악행의 불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결과라고 말한다(롬 1:28-32).
ꃨ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같은 것이라 - 선지자의 묘사는 거세게 타오르는 산불을 연상시킨다. 죄악의 불길은 먼저 가시나무를 삼키고 (질려와 형극은 보통 사악한 사람의 상징어로 자주 쓰인다(삼하 23:6;미 7:4)) 이어서 큰 삼림에까지 옮겨 붙어 (혹자는 이를 죄악의 집단에 참여한 온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Vitringa)) 대 초원 위에 지천으로 타올라 마침내 온 하늘을 연기로 가득 채운다. 이러한 일련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선지자는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가 어떻게 온 나라를 파멸로 이끄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16절).
성 경: [사9:19]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되리니 - 죄악의 불길 위에 또 하나의 불길 곧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이 오버랩 된다. 이 둘은 다르지 않다. 대초원을 태웠던 죄악의 불길 그 자체가 이미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임을 알게 된다. 화마(火魔)가 핥고 지나간 그 땅은 검게 그을은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한다. '소화된다'(*, 네으탐)는 말은 '빨갛게 달아 오르다', '타서 검게 되다'는 뜻이다(Luther, Calvin, Virtringa, Lowth).
성 경: [사9:20]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우편으로 움킬지라도...먹을 것이며 - 무정부 상태하의 내란, 즉 동족간의 무자비한 살육은 자기 살을 뜯어먹는 굶주림에 비교되고 있다. 그들은 탐욕에 지배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이런 자기 파멸적인 탐욕은 선지자의 다음 말, 곧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는 표현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팔'(*, 제로아)은 비유적으로 '힘', '원조', '도움'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상부 상조해야 할 이웃을 가리킨다(Gesenius, Rosenmuller, Maurer).
성 경: [사9:21]
주제1: [한 아기를 통한 구원의 큰 빛]
주제2: [이스라엘의 죄악과 형벌]
ꃨ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 서로 보호하고 위해 주어야 할 이웃(혹은 지체)이 오히려 서로 물고 뜯는 원수로 변할 때 거기에는 '완전한 파멸' 밖에 남지 않는다(갈 5:15).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간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 북왕국 안에서 두 형제 지파,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서로를 질시하고 다툼으로 일관하더니(삼상 10:27;삼하 20:1;왕상 12:16;15:27;16:21;왕하 9:14 참조),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남유다를 공격하여 동족 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빚기에 이르른 것이다(왕하 15:13-16,25,30).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충족되지 아니하였다.
성 경: [사10: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ꃨ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 선지자는 여기서 관료적인 이스라엘의 법집행의 부당함을 탄핵한다. 법 앞에 만민을 공평하게 대우하라는 율법 정신이 완전히 소멸된 당시 이스라엘의 타락상이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출 23:6-9;레 19:15;신 10:17;16:19;24:17). 본절을 유다에 국한된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5:23). 이런 죄악은 남북을 불문하고 온 이스라엘에 편만하였던 것이다(암 5:12). '법령을 발포하며'와 '말을 기록하며'는 두 종류의 다른 직급, 즉 재판관과 서기관을 암시하는 말(Aben Ezra, Kimchi, Grotius)이라기보다는 동일한 뜻을 지닌 평행법으로 봄이 무난하다.
성 경: [사10: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ꃨ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화 있을진저 - 권세자들의 편에 선 재판관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편파적이며 일방적인 판결을 능사로 삼을 때, 권력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더 이상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불공평한 판결이 지배하는 곳에서 피해자는 언제나 '빈핍한 자'와 '가련한 자'뿐이다. 선지자는 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과부와 고아들'이라고 언급한다.
성 경: [사10: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ꃨ 벌하시는 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욤 페쿠다'(*)는 문자적으로 '방문의 날'이니,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하심을 특별히 나타내시는 때를 가리킨다(호 9:7, Alexander). 그날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와 동일시되는데, 이는 곧 앗수르에 의한 침공을 암시한다(5절;5:26). 선지자는 하나님의 방문의 날과 관련하여 불의한 재판관들에게 세 가지 물음을 던지는데,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다음절에서 통렬하게 제시된다.
성 경: [사10: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압제자가 받을 환난]
ꃨ 포로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 그들의 결국은 참으로 비참할 것인데,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감옥 안에 눕거나 전쟁터에서 나뒹구는 주검이 될 것이다. 이어 선지자의 시선은 범죄한 이스라엘로부터 그를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부름받은 앗수르로 향한다.
성 경: [사10:5]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운명을 나타낸 '화 있을진저'(*, 호)가 앗수르에게도 적용된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잠시 사용된후, 그 교만 때문에 역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
성 경: [사10:6]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 '한 나라'는 직역하면 '불경한(*, 하네프) 나라'이다. 그 나라는 평행을 이루는 문장에서 '나의 노한 백성'으로 구체화된다. 이는 '나의 진노의 대상이 된 백성'이란 뜻이다(34:5).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를 가장 경건한 민족이라 자부하고 앗수르 같은 이방 나라는 신(神)을 모르는 불경한 민족이라 멸시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정반대로 말한다:' 너희들이야말로 불경한 백성이며 앗수르는 너희들을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받았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Oswalt).
성 경: [사10:7]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멸절하려하여 -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 부름받은 바, 그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고 자신의 힘의 한계를 깨달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앗수르의 마음에는 이러한 깨달음 대신 중동의 지배자가 되려는 패권주의적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는 무력을 근간으로 하는 제국주의의 필연적 속성이다(왕하 18:25).
성 경: [사10:8]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 앗수르가 그 같은 야망을 품은 것이 결코 헛된 공상만은 아니라는 것이 반어법으로 표현된다. 실제로 앗수르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왕은 대왕(36:4)의 칭호를 가졌으며, 그 밑에 있는 방백들마저도 그 지위와 위세에 있어서 다른 나라의 왕들과 버금갈 정도였다.
성 경: [사10:9]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 이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앗수르가 거둔 혁혁한 전과(戰果)때문이었다. 사실 앗수르가 취하고자 했던 도성 중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의도에서 빗나간 것이 없었다. 과거의 자신감을 토대로 앗수르는 미래의 성공을 스스로 예견한다. '갈그미스'는 유브라데 강변에 위치한 성읍으로서(대하 35:20;렘 46:2-12) B.C. 717년에 함락되었다. '갈로'는 '갈그미스'로부터 남쪽 50마일 정도에 있는 '갈레'를 가리키는 듯하며(암 6:2), B.C. 738년에 함락되었다. '하맛'은 오론테스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민 34:8;왕하 14:25,28;암 6:2,14), B.C.738년과 720년에 함락되었다. '아르밧'은 '하맛'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왕하 18:34), 둘 다 수리아의 성읍들이었다. '아르밧'은 B.C. 740년에 함락 되었다. '다메섹'은 수리아의 수도이며(B.C. 732년 함락),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이다(B.C. 722년 함락). 언급된 6개의 성읍들은 아마도 지정학적 근접성을 기준으로 하여 배열된 듯하다(Oswalt).
성 경: [사10:10]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 고대의 정복 전쟁은 신들 간의 전쟁으로 고려되었으며, 신들의 우열은 전쟁의 승패에 직결되었다. '미쳤나니'(*, 마체아)는 '도달했다', '발견했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굴복시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 경: [사10:1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내가...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 결국 앗수르의 최종 목표는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앗수르는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다른 나라의 우상들, 특히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수입된 우상들과 같이 취급하였다. 여기에 그의 결정적인 실책이 있다. 여호와에 대한 모독에 이어 앗수르의 파멸이 곧 뒤따름을 보라.
성 경: [사10:1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 - 교만은 사람의 마음에서 발원하여 마음의 창이라고 할 수 있는 눈에서 비친다. 앗수르 왕의 이 같은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다.
성 경: [사10:1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총명한 자라 - 그는 자신이 거둔 모든 성공을 자신의 힘과 지혜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결과라고 해석한다. 스스로 도취하는 나르시스적 경향은 '나는 총명한 자라'는 말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는 '내 솜씨가 정말 절묘했어'라는 식의 자화 자찬(自畵自讚)의 말과 같다(Calvin). 그런데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약자에 대한 잔인한 핍박과 약탈이다.
ꃨ 용감한 자같이 위에 거한 자를 낮추었으며 - '용감한 자 같이'를 직역하면 '황소처럼'으로도 된다(시 22:12). '황소'는 앗수르의 권능의 상징이었다.
성 경: [사10:1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하는도다 - 정복 전쟁과 재물 탈취의 용이함이 비유로 묘사된다. 그 용이함은 어미새가 자리를 비운 새둥지에서 알을 줍는 것에 비견된다. 만약 어미새가 있었다면 생사(生死)를 각오하고 침입자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 강조점은 아무도 앗수르를 대적하거나 저항하지 못하였다는 데 있다.
성 경: [사10:15]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도끼가 어찌...큰 체 하겠느냐 - 교만의 어리석음을 선지자는 날카롭게 공박한다. 도끼와 톱은 유용한 물건이긴 하지만 사람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만약 도끼와 톱이 정반대로 자기들이 사람을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성 경: [사10:16]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살진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 앗수르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 가지로 선포되니, 하나는 병의 형별이요 다른 하나는 불의 형벌이다. '살진 자로 파리하게 한다'는 말은 질병을 보낸다는 말이다(레 26:16;신 28:22). 이는 앗수르군 진영에 전염병이 도져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이 죽었다는 기록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37:36). '영화'는 앗수르의 잘 무장된 군대를 가리킨다(Delitzsch). 그 영화 밑에 불을 질러 깨끗이 소멸시킨다는 말은 앗수르 군대의 급속하고도 완전한 멸망을 비유하는 말이다(Vitringa, Rosenmuller, Clericus). 선지자는 '불태우다'는 의미의 '야카드'(*) 동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불타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듯한 생생함을 느끼게 한다.
성 경: [사10:17,18]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형극과 질려가...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 거룩한 불꽃에의해 소멸될 대상은 두 부류로 나뉜다. 먼저 형극과 질려는 앗수르인들의 하류 계층을 가리킨다. 둘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은 상류 계층을 의미한다. 이 같은 앗수르인들의 총체적인 파멸은 '전부'라는 말에서 강조되고 있으니, 이는 직역하자면 '영혼에서 육체까지'이다. 이 말은 전인(the whole man)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현이다(시 16:9;84:2).
성 경: [사10:19]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앗수르의 교만과 형벌]
ꃨ 그 삼림에...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 - 앗수르의 황폐함은 마치 거대한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몇 그루의 나무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광경에 비유되고 있다. 불에 타고 남은 나무의 수가 얼마나 적을 것인지는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다'는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어린아이가 셀 수 있는 숫자는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
성 경: [사10:20]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그 날에...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 '자기를 친 자'는 앗수르를 가리킨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외에 앗수르를 의지하다가 징벌을 당하였다. 그러나 심판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뼈아픈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후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진실로 의지할 것이라는 말이다.
성 경: [사10:2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 이 일은 스알야숩(7:3)의 이름속에 포함된 예언의 성취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능하신 하나님'(*, 엘 깁보르)은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에게 적용된 이름 중 하나이다(9:6).
성 경: [사10:2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돌아오리니 - '네 씨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창 22:17)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성취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삼하 17:11) 되었으나, 저들의 범죄로 인하여 남은 자는 소수에 국한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오직 약속의 자녀라야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롬 9:6-8,27)는 사상과 연결시켜 인용한다.
성 경: [사10:2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온 세계 중에 -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행하기로 작정하신 훼멸은 온 땅 가운데서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이니 거기에서 살아 남은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성 경: [사10:2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 앞절에서 무서운 위협의 말이 선포된 후, 곧 이어서 위로의 말이 덧붙여진다. '시온'은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곳이며,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경건하고 신실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위로는 소수의 신실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할 것이다(Calvin).
성 경: [사10:25]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내가 불구(不久)에 네게는 분(憤)을 그치고...그들을 멸하리라 - 앞절의 '두려워 말라'는 위로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가 제시된다. 즉, 하나님께서 곧 그의 분노를 이스라엘에서 앗수르로 옮기실 것이다(12절). '불구에'는 '오래지 않은 시간에', '짧은 시간에'란 말이다. 앗수르의 파멸은 다음절에서 두 가지 사건으로 형상화된다.
성 경: [사10:26]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죽이신 것같이 - 첫째, 그것은 기드온과 300 군사에 의한 미디안 군대의 패퇴에 비교된다(9:4). 오렙 반석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을 죽인 곳이다(삿 7:25).
ꃨ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같이 - 둘째, 그것은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가 몰살한 것과 비교된다(출 14:16-18).
성 경: [사10:27]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 '기름'으로 번역된 '솨멘'(*)은 '비만', '지방', '기름'을 뜻하는 말이다. 앗수르로부터의 이스라엘 해방은 황소의 목이 비대해짐에 따라 멍에가 찢어져 자유하게 됨과 같이(Hitzeg, Hendewerk) 그렇게 확실하게 올 것이다. 흠정역은 본문을 '기름부음 때문에'(because of the anointing)라고 번역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 경: [사10:28]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치중을 머무르고 - '아얏'은 예루살렘 북동쪽에 위치한 성읍으로, '돌더미'를 뜻하는 '아이'를 가리키는 듯하다(수 8:1-28). '미그론'은 벧엘에서 도보로 약 8시간쯤 걸리는 곳에 위치하였으며, '믹마스'는 예루살렘 북방 약 7마일 정도에 위치한 군사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베냐민 지파의 주요 성읍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짐을 풀었다. 이는 행군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병참 기지를 건설하기 위함일 것이다. '치중'(*, 켈라)은 '그릇, 옷, 도구, 무기'등의 군수 물자를 뜻한다.
성 경: [사10:29]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영(嶺)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 '영'(*, 마으바라)은 '산길'을 뜻하는 말로, 믹마스와 게바 사이에 있는 오늘날의 와디 슈바니트(Wady-es- suweinit)를 가리킨다(삼상 13:23). 깊고 거치른 좁은 골짜기 길을 따라 빠른 속도로 진군하던 군대는 게바(수 18:24;21:17)에서 야영한다.
성 경: [사10:30]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딸 갈림아...라이사야...너 아나돗이여 - '갈림'과 '라이사'는 기브아와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한 성읍이다(삼상 25:44). 두 곳 모두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시간 15분쯤 되는 거리에 있는 오늘날의 아나타(Anata)란 곳이다(수 21:18;삼하 23:27;대상 6:60). 28,29절에 비해 본절은 선지자의 개인적인 반응이 강하게 투사된다. '갈림'과 '라이사'는 근접한 성읍이어서 큰소리로 외치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외침은 군대가 옴을 알려주는 경계의 소리라기보다는 극도의 공포에서 우러나는 비명에 가까울 것이다.
성 경: [사10:31]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맛메나 사람은...게빔 거민은 도망하도다 - '맛메나'는 '기름더미'란 뜻이다. '게빔'은 '물웅덩이'란 뜻이다. 두 성읍 다 예루살렘에 근접한 것은 확실하나 분명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들 거민 또한 황급히 도망한다.
성 경: [사10:32]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 '놉'은 아마도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스코푸스(Scopus) 동산을 가리키는 듯하다(Oswalt).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열(戰列)을 재정비한다.
ꃨ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 손을 흔드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위협적인 제스처이다. 예루살렘이 정복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 앗수르 군대가 휘두르는 손이 클로즈업되면 문득 환상은 끊긴다.
성 경: [사10:33]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 삼림의 비유가 다시 등장한다. 그 삼림은 앗수르이다. 벌목하시는 이는 주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도끼찍는 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진다. 위협하듯이 하늘 향해 뻗은 가지가 둘로 꺾어진다. 큰 나무, 굵은 나무 할 것없이 두 동강 난다. 이 모양으로 앗수르의 파멸은 철저할 것이다.
성 경: [사10:34]
주제1: [앗수르에 대한 심판 예언]
주제2: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
ꃨ 레바논이...작벌을 당하리라 - 앗수르는 종종 레바논의 삼림에 비교되었다(겔 31:3). 선지자는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의 붕괴에서 작고 가녀린 한 싹을 예언적으로 내다본다(11장).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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