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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잠언

[스크랩] 잠언 27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5:47

잠언 27장 주석

 

=====27:1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 본절은 미래란 불확실하므로 미래에 대한 과신은  위험

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미래를 위한 현명한 계획을       세우는 일까지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겸

허하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이상은

소극적 관심에서 본 것이고 적극적 관점에서 보면 오늘 주어진 일에 충실하라는  가르

침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약 4:13-16은 이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흔히 오

늘은 많은 부를 축적하고 미래에 선행을 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의  재물이

내일 어떻게 없어질지 모르므로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사실에  덧붙여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의 삶을 충실하게, 기쁘게 살아야 한다(마 6:34).  요컨

대 본절은 소극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과신을 버릴 것을, 적극적으로는 오늘을  충실하

게 살되 공동체 속에서 최선을 다해 덕행을 실천하며 살 것을 가르친다.


=====27:2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 '타인'에 해당하는 '자르'(*    )는 '낯선 사람'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어떤 사람의 업적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가

리킨다.  자기 칭찬은 교만의 일종이다.  랍비들은 어떤 사람에 관한 평가를 할 때 그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는 제삼자가 주는 정보에 의존했다고 한다.  그런데 신약은  여

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이 진정한 칭찬이며 성도는 그 칭찬

만을 사모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 12:43).


=====27:3

 돌과 모래 덩어리는 무겁다.  이것을 운반해 본 사람이라면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지치게 하는지를 안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분노는 더욱 지치게 하는데 그것은  참기

힘든 영적, 정신적 불쾌감을 타인에게 안겨주기 때문이다(McKane).       돌이나 모래와 미

련한 자의 분노는 비교 차원에서 상이한 질적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

고 또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은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

기 위하여 물질적인 것과 대비시키고 있는데 이 같은 어법을 상징적 평행법이라고  한

다.


=====27:4

  원문 직역은 '노함은 잔인하고 분노는 잔혹하다.  그러나 질투 앞에 설 자가  누구

겠는가?'이다.  분노도 견디어 내기 힘든 것이지만 질투는 더욱더 그러하다는 뜻이다.

'노함'이나 '분노'가 성경에서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점을 고려할  때  여기

'질투'도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질투란  사르는

불과 같이 파괴적인 폭력성을 띤 격정의  절정  상태에  있는  감정이다(욥       38:25;사

32:6;나 1:8).  그러나 긍정적인 의미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무관심과 대비를 이루는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질투가 그것이다(출 20:5;슥 8:2).


=====27:5

 원문 직역은 '공개적 꾸짖음은 숨어서 하는 사랑보다 낫다'이다.  '공개적 꾸짖음'

이란 솔직한 말로 직접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숨어서  하는

사랑'이란 문맥상, 잘못을 꾸짖는 방식으로는 한번도 드러나지 않는 형태의 사랑을 말

한다.  즉 이는 신약의 은밀히 베푸는 선행과는 의미가 다른 사랑이다.  참사랑의  일

부는 분명한 꾸짖음으로 나타난다.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무작정 잘못을  숨기려고만

들면 오히려 상대방을 더 큰 올무에 빠뜨릴 수가 있다.


=====27:6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 원문 직역은 '친구가 주는 상처는 신실

하다'이다.  외상(外傷)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상처'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본절이 의도한 것은 친구의 아주 강한 꾸지람인 것 같다.  어떤 역본은 '한번 뻗은 펀

치'로 번역하고 있다(NEB).  그것이 강한 펀치와 같이 손상을 주는 것이었을지라도 친

구의 꾸지람이 유익한 것은 그 꾸지람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25:12;신 17:9;욥 12:20).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 원문상 본 구절은 '원수의 키스들은

간사하다' 혹은 '원수의 키스들은 풍부하다'로 직역될 수 있는데  상반절과  효과적인

대비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자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7:7

  본절의 교훈은 깊이 연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꿀이라는  음식

외에 소유, 경험, 교육 등과 관련하여서도 이 교훈을 적용하고 있다.  적용의  범위가

넓음에도 불구하고 본절이 주는 교훈은 뚜렷하다. 즉 많은 필요를 느끼고 있는  사람

은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 보다 받은 바 은혜에 대해  더  감사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쾌락에 탐닉하여 있는 사람은 웬만한 기쁨에도 만족하지 못하지만 자기 절제적인

사람은 작은 기쁨의 소재에도 큰 감사를 느끼는 것이다(Cook).  또한 이를 복음과  관

련지어 생각해 보면, 자신의 영적 기아를 뼈저리게 느끼는 소위 심령이 가난한 자일수

록 복음의 메시지를 더 큰 은혜와 감격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마

5:6).


=====27:8

 자기 집을 떠나 방황하는 자의 비참함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묘사는 공동체를

떠나지 말라는 경고로 볼 수도 있는데 당시 사회에서 공동체의 결속력은 매우 강한 것

이어서 공동체에서 강제로 쫓겨나거나 스스로 떠나는 일은 생존 자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도망자나 방랑자가 되는 일은 가장  혹

독한 징벌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창 4:12,13).  그러나 가장 위험하고 절망적인  떠

남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떠남이다.


=====27:9

  친구의 충성된 권고 - 원문상의 의미가 다소 난해하기 때문에 본절에 대한 해석 또

한 다양하다.  그러나 외형보다는 마음을 중시하고 있는 문맥을 고려할 때 '진실한 마

음에서 되어진 권고가 주는 즐거움'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RV).  당시  향료,  장

미, 아로마틱 나무 등을 이용하여 제조한 향은 귀한 손님이 방문하기 전 집안에  뿌려

졌으며 이 향으로 인하여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손님은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W.J. Deane).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권고는 비록 그  내용

이 견책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해도 듣는 자로 하여금 반발하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 준다.


=====27:10

 본절은 모순적인 것 같이 보인다.  관습이나 고대의 예의상 가족과 같이 생각되었

던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고 말하면서 역경의 때에 형제의 집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가지 말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의 핵심은 형제에게 도움을 청하

지 말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라는 데에 있다.  즉  이

웃의 가까운 친구는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보다 더욱 긴밀히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

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친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토록 하라고 권고로 보면 될 것이다.


=====27:11

  비방하는(*       , 하라프) - 문자적인 뜻은 '경멸하다.' 이것은 부모나 교사가 거

짓 교사 혹은 무책임한 부모라는 혹평을 받는 것을 암시한다.  당시 교사나 부모는 자

신이 가르친 제자나 자식의 결점과 약점에 대한 책임을 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설

사 타인의 무고한 비난이 있다 할지라도 자식이나 제자가 그 가르친 바대로 살 때에는

그 부모나 교사가 기쁨을 느낄 것이다.  바울은 회심 이후 조롱과 비난과 핍박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전한 복음을 받은 자들이 듣고 바로 깨달아 자신처럼 복음을 다

른 사람에게 전하며 살 때 그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하였다(살전 2:17-20).


=====27:12

  슬기로운 자...어리석은 자 - 각각 '아룸'(*        ), '페타임'(*          )으로

문자적인 뜻은 '신중한 자' 그리고 '단순한 자'이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이 함

께 목격하는 내용은 '재앙'으로 번역된 '라아'(*     )인데 이것은 '악'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아룸'과 '페타임'은 각각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자'  그

리고 '악을 분별할 수 없는 자'가 된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우매한 자는 지혜를 가

까이 함으로써 악을 분별하고 거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권고라 하

겠다.


=====27:13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 이것은 나그네나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증인으로 나섰을 경우 최대한 주의하라는 권고로 보여진다.  당시는  저당잡

은 것이라 할지라도 옷의 경우는 해가 지기 전까지  본인에게  돌려  주어야  했다(출

22: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그네나 알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그 옷을  맡아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약속을 이행치  않고  도망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Clark).


=====27:14

  본절은 표면적으로 이른 아침에 큰 목소리로 축복하거나 혹은 인사함으로써 그  듣

는 자로 하여금 오히려 성가시게 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멍청한 사람에 대한 묘사인 것

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침에 큰소리로 하는 축복의 말 혹은  인

사를  겉으로는 요란하지만  진심은  결여된  가식적인  아첨으로  해석하고   있다

(W.J.Deane, Clark, Cook).  참지혜자는 가식적인 아첨의 축복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27:15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 이것은 여러 군데 구멍이 뚫려 있어서  비오

는 날이면 계속해서 비가 새는 지붕을 연상케 한다.  이 같은 오두막에  사는  사람의

경우 일단 비가 내리면 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결국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아내와 사는 자의 처지도 이와 같다 하겠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

기를 싫어하고 밖으로 겉돌게 되면 결국 가정의 평화는 바랄 수 없다.  70인역(LXX)의

본절 직역은 이와 같다 : '빗방울들은 썰렁한 날 사람을 그의  집  밖으로  몰아낸다.

마찬가지로 욕을 퍼붓는 여인은 그의 남편을 그의 집 밖으로 몰아낸다.'


=====27:16

 본절의 원문 직역은 이렇다.  '누구든지 그녀를 숨기는 것은 바람 혹은 그의  오른

손의 기름을 숨기는 것이다.'  15절과 연관시키지 않으면 난해해지는 구절이다.  의미

하는 바는 입심은 아내의 혀를 억제하거나 그 소리를 숨기기란 실로 어렵다는 것이다.

바람을 억제할 수 없듯이 말싸움하기 좋아하는 아내의 기질을 억제할 수 없다.   그리

고 손에 묻은 기름의 냄새를 숨길 수 없듯이 아내의 목소리가 집 담을 타고 밖으로 나

가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27:17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 본 구절의 해석은 분명하지 않지만 크

게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그 하나는 부정적인 해석으로 한 사람의 감정적인 말은

다른 사람의 감정 역시 나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해석을 취하는 경우 얼굴이 빛난

다는 것은 얼굴이 상기됨을 가리킨다.  또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해석으로 두 친구 사

이의 건설적인 토론이나 인격적인 친교는 인격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 경우

'얼굴'은 양쪽의 인격 혹은 지적 능력 등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두 칼이  부딪히듯이

두 사람의 인격과 지혜가 진지한 사귐과 토론이라는 장(場)을 통해 더 발전된다는  것

이다.  아마도 전자는 언어 사용의 부정적 측면을 주시하는 15, 16절의 연장선에서 이

루어진 해석같고 후자는 본절 상반절의 철과 철이 서로 부딪히는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을 근거로 한 해석인 것 같다.  이 두 해석 중 어느 한 해석을 지지하기란  쉽

지 않지만 본절을 종교 교육적인 차원의 문제로 이해할 경우 후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  참고로 탈무드는 종교 교육을 위한 효과적인 방식 중의 하나를 소개하는  대목

에서 본절과 유사한 인용을 하고 있다 : '두 생도는 토라 연구 중에 서로를  예리하게

만든다.'


=====27:18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 영화를 얻느니라 - 무화과나무는 세

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잘 자라난다.  그러나 일단 수확때가 되면 이 나무는 풍성한 소

출을 낸다.  본절의 핵심적 교훈은 부지런하라는 것인데 하반절은 사람을 섬기는 일에

서도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특히 '시종하는'(*      , 솨마르)

은 극히 세밀하고 자상한 섬김을 가리키는데 이 같은 섬김의 노력을 한 종의 경우  인

정을 받지 못한다거나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는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보상을 바라

기 이전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봉사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  교훈은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부지런하고 성실한 섬김을       나타내야

할 영역은 말씀 깨달음, 복음 전파, 성도사랑 등 허다하다.  이처럼 봉사와 섬김을 마

친 후 우리는 조바심을 내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수고한 자에게  대가가

지불된다고 약속하셨으며(딤후 2:6), 결코 우리의 수고를 간과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히 6:10).


=====27:19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 - '한 사람의 마음은 한 사람에 대하여  그러하다'

가 원문 직역이다.  여기 두 번 언급되고 있는 이 '한 사람'을 동일 인물로 보느냐 서

로 다른 인물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동일 인물로 볼 경우에는, (맑은 물

이 얼굴을 비추듯이) '인간의 마음이 그 사람의 진정한 성품을  나타낸다'(NIV)  혹은

'우리가 진정한 자기 인식에 도달하려면 우리의 마음  자세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A.P.Ross)는 의미로 해석된다.  반면에 서로 다른 인물로 볼 경우는  인간이  자신의

성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른 사람을 관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Toy).   두

해석 중 어느 쪽을 택해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27:20

 음부와 유명(幽冥)은 만족함이 없고 - 문자적인 뜻은 '지옥과 멸망은 가득 차지 않

고'이다.  '지옥'은 죽음의 세계를, '멸망'은 의인화된 파괴적인 힘인 죽음을 각각 가

리키는데 이 둘은 역사 이래 모든 시대, 모든 나라 민족들을 삼켜왔고 그러나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그 무엇처럼 버티고 서 있다.  지옥이나 멸망 못지 않게 만족을 모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눈으로 봄으로써 시작되는 인간의 욕망이다. 아담의 타락이후

끝없는 이 욕망에 시달리는 인간에게 진정한 안식이란 없다.  그러나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욕망은 누그러지며 따라서 그분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맛볼 수 있다(요 4:13, 14;빌 4:11-13).


=====27:21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 이쉬  레피  마할랄로)

- 문자적인 뜻은  '칭찬하는 말로 한  사람을'이다.  여기서  '칭찬'을  어떻게  해석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좌우된다. 먼저 이를 한 사람의 자질을 평가하는 공적인  평판

으로 볼 경우에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객관적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 우수한  자

질의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많은 사람의 평판에 의하여 다윗은 사울보다 우수한  지

도자임이 입증되었다(삼상 18:7).  또 다른 한편 '칭찬'은 한 사람을 시험하는 도구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칭찬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내는 시험의 도구가 될 수  있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지한 자는 칭찬을 구할 것이고 귀가 엷은 자는 칭찬에  마

음이 부풀 것이고 지혜로운 자는 칭찬에 담담할 것이다(Fausset). 이와같이  칭찬은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려내는 도구가 된다.  여기 '칭찬'에  비유되는  상반절의

'도가니', '풀무' 등은 분명 순전한 것을 가려내는 도구이다.  이 이미지를 중시할 때

후자가 더 타당한 해석이라 여겨진다.


=====27:22

 절구에 ... 찧을지라도 - 껍데기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곡물을 절구에  넣고

찧는 일은 타락하는 일보다 훨씬 정교하고 힘이 든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

음은 그 같은 정교한 작업을 통해서도 제거되지 않는다.  어리석음은 그에게 너무  밀

착되어 있어서 온갖 징계, 가르침, 권면이 그에게는 무익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는 징계 중 가장 큰 징계는 내버려 두심이다.  그 어떤 징계와 가르침과

권면을 통해서도 그 완고함을 버리지 않는 자는 진정 어리석은 자로 하나님의 유기(遺

棄)를 당하고 만다(롬 1:28).  그러므로 징계를 당하는 자는 아직 버림을 당한 단계는

아니니 즉각 회개해야 할 것이다(히 6:1-8).


=====27:23

  부지런히 살피며 ... 마음을 두라 - 본절로부터 끝절까지는  반농반목(半農半牧)인

이스라엘의 생활 방편을 잘 보여 준다.  자신이 소유한 가축을 목동에게만 맡기지  말

고 직접 주인인 자신이 나서서 관찰하라는 명령이다.  말하자면 가축의 숫자를 하나하

나 세어 보기도 하고 병든 것은 없이 잘 자라는지 그리고 각각의 종류가 어떤  비율로

증가하는지 등에 대해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27:24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 현재 부유하다고 해서 자만할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재물이란 물거품처럼 날아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태와  방종

에 빠지지 말고 재물이나 소득을 있을 때 잘 관리하라는 권면이다.


=====27:25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 땅이 규칙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소산물을 내놓

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여기 '풀'은 '데쉐'(*      )로서 사라져 버리거나 곧 떠

나버릴 물질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우리는 재물이나  지위를

누리는 자의 일시적 기쁨과 대비되는, 농부가 누릴 지속적인 기쁨을 연상케 된다.  계

절이 바뀜에 따라 산야(山野)의 형편이 달라지는 것을 관심깊게 주시하고  그  대책을

세우기만 한다면 농부는 지속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27:26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 밭은 금방 소비해 버리고 말 재물과는 달리 쉽게 소

비하거나 빼앗길 수 없는 재산이 되어 준다.  가축을 잘 기르는 일은 밭과 같은  부동

산을 마련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27:27

  잘 기른 가축은 그 주인과 그 식구들 심지어 그 가정의 종에게까지 음식을  제공해

준다.  23-27절에서 우리는 땅의 소산을 잘 관리하고 가축을 잘 길러서 안정될 뿐  아

니라 번성하는 삶을 사는 평화롭고 풍성한 전원의 한 가정을 연상케 된다.   이  같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 기본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지혜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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