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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열왕기상

[스크랩] 열왕기상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5:08

왕상 1       

▣ 왕이 된 솔로몬-열왕기상 1-4장-


우리는 이제 이스라엘의 보좌를 계승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생애와 통치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다윗을 통하여 겸손히 낮아지고, 망명 생활을 하며, 거절을 당한 그리스도의 모형을 본다. 그러나 솔로몬에게서는 “평화의 왕“(솔로몬이란 이름은 “평화를 좋아하는“이란 뜻이다)이 영광과 광채 가운데서 자기의 백성을 통치하는 모형을 본다. 솔로몬이 평화와 대단한 번영 가운데 살며 통치할 수 있었던 기반은 다윗의 정복 활동에 있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솔로몬(1장)


다윗은 이제 자신의 왕의 소임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들 아도니야가 이런 상황의 이 점을 틈타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다윗을 계승할 자로 솔로몬을 지목하셨고, 그 일이 실현되어가고 있는 동안 내내 “내가 왕이 될 것이라“고 광고하였다(1:17/2:13-15). 아도니야는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고 있었다! 말하기는 슬프지만, 다윗의 믿음직한 고문들 가운데 얼마가 이 사악한 음모에 가담하였으며, 그 중에는 이전에도 한 번 이러한 일을 행했던 요압(삼하 15:1- 이하)과 제사장 아비아달도 끼어 있었다. 배반한 왕자는 마차를 준비하고 백성들의 인심을 구함으로써 압살롬의 전철을 밟았다(삼하 15:1- 이하).

그러나, 세 사람의 충성된 신하들이 이 일을 알고 밧세바에게 알렸다. 그러자, 밧세바는 이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였는데, 그녀는 다윗이 다음 대왕으로서 그녀의 아들 솔로몬에게 계승하리라던 그의 맹세를 파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전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다윗은 솔로몬이 즉시 보좌를 차지하기를 원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사독과 나단, 밧세바는 지체하지 않고 솔로몬을 왕의 노새에 앉히어 그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임을 선포하였다. 40절은 그 소식이 그 땅 백성들에게 큰 기쁨으로 받아 들여졌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아도니야와, 의심없이 그를 찬양한 군중은 이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은 반역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역한 왕자는 보호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제단으로 달려갔으며, 솔로몬은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사악한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회개도 하지 않고 다만 도움을 받고자 하나님께로 도망하는 것은 참으로 나쁜 일이다. 제단은 아도니야에게 있어서 교제의 장소가 아니라 도피의 장소였다."



왕상 2       

2. 하나님의 진노를 시행하는 솔로몬(2장)


다윗의 마지막 권고(1-11절/ 대상 22-29장)-다윗은 정치가들에게 영적인 것에 대해 강조하였다. 이는 그의 아들이 여호와의 길로 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솔로몬에게 율법을 배우고 순종하라고 권하였다(신 17:14-20/수 1:8).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놀라운 약속들을 주셨지만(삼하 7:8-17), 그 약속들은 솔로몬의 믿음과 순종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었다. 또한 다윗은 그를 대적했던 원수들과, 그를 보좌한 친구들에 대해 상기시켰다.


아도니야에게 임한 심판(12-25절)-만약 아도니야가 그의 적절한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살 수 있었을 터이나, 고집스럽게 굴복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다윗의 마지막 아내인 아비삭(1:1-4)을 요구하는 성급한 주장을 하였는데, 이는 다윗의 모든 것이 솔로몬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밧세바는 이 전체의 이야기에서 무죄한 중재자인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은 자기의 형제의 요구 속에 담긴 배반의 뜻을 깨달았으며, 아비아달과 요압의 배반도 알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었다(22절). 아도니야는 너무 지쳐 있었고, 이제 죽어야만 했다.


아비아달과 요압에게 임한 심판(26-35절)-솔로몬은 아비아달의 직분을 존중하여 죽이지는 않았으나, 그를 제사장의 사역에서 제외시켰는데, 이로써 사무엘상 2장 30-36절의 내용이 성취되었다. 요압은 그의 친구가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심판이 곧 그에게 임할 것임을 알았다. 그도 아도니야처럼 보호를 받기 위하여 제단으로 도망하였다. 요압은 여러 사람을 죽인 죄가 있었으며 그 죄값을 치러야만 했다. 브나야가 군대의 새 장관이 되었으며, 사독은 대제사장이 되었다.


시므이에게 임한 심판(36-46절)-이 사람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달아날 때 다윗을 지독하게 저주했던 사람이다(삼하 16:5- 이하). 솔로몬은 그가 지켜볼 수 있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시므이에게 명령했으며, 이는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 비해 훨씬 자비로운 처사였다. 그러나 시므이는 왕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허세를 부려 도전하려“ 하였으며 이는 결국 그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게 하였다. 솔로몬의 이러한 심판들이 잔인한 것 같으나, 이러한 사람들은 왕의 적들이었으며 곧 여호와의 적들이었음을 명심하자."


왕상 3       

3.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솔로몬(3장)


그는 순전히 정략적인 목적으로 애굽의 공주와 결혼하였고, 후에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함으로써(11:1이하) 여호와를 향한 참된 예배에서 돌아서게 된다.그러나, 그의 통치의 초기에는 여호와에 대한 진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그를 삶의 첫자리에 두기를 원하였다. 솔로몬에게 무엇이나 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을 때 그는 지혜와 이해의 마음을 원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다른 모든 축복들도 주셨다(마 6:33)! 그러나 만일 솔로몬이 이 축복들을 누리기 원하였다면 말씀에 순종하여 행했어야 하는 것이다(13-14절).

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한 가지의 실례에 불과하다. 이 두 여인이 왕의 보좌에 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젊은 솔로몬이 얼마나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섬기고자 원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 “솔로몬보다 크신“(마 12:42)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는 지혜를 주시며, 모든 필요에 대처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물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지혜에 의존할 필요가 있으며 이 세상의 지혜를 의존해서는 안된다(고전 1:18-31/약 3:13-1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심에 있어서 그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게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귀중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셨고 그가 만족스럽게 섬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


왕상 4       

4. 하나님의 부를 누리는 솔로몬(4장)


1-6절에는 솔로몬의 “각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7-19절에는 이스라엘의 각 분할구를 감독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왕에 대한 사무엘의 경고가 현실로 나타났다(삼상 8:10-18/신 17:14-20 참조). 그 민족의 물질적인 번영은 영적인 번영과 균형을 유지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몇 년 내에 왕국이 분열되어 솔로몬의 광채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였으나“(4:20)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은 볼 수가 없다. 물질적인 번영을 누리면서도 여전히 영적일 수도 있는데,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부를 잘 다루지 못한다.

그의 왕국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왕국이었고(21절/ 창 15:18 참조) 평화와 번영의 날들이었다(25절). 그러나 죄와 배반의 씨가 뿌려지고 있었다. 솔로몬은 애굽에서 말들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율법에 직접적으로 불순종하는 일이었다(신 17:16). 그는 또한 많은 아내를 거느렸는데(11:1/신 17:17), 이러한 죄들은 결국 왕국의 몰락을 초래했다.

솔로몬은 자연에 대한 위대한 학자였다. 잠언, 전도서와 솔로몬의 아가서를 읽을 때에 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3,000개의 잠언이 모두 남겨져 있지는 않으며,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노래집“은 솔로몬의 아가서이다. 자연을 지켜봄으로 하나님의 방법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백합, 씨, 참새, 그리고 자연의 다른 형태들을들어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보다 크신 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인격에 있어서 크시며, 지혜와 부요하심에 있어서 크신 분이다(골 1:19/골 2:3/골 2:9).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신부로서 교회, 즉 피로 값주고 사신 그를 믿는 죄인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더욱 위대하시며, 어느 날 그는 위대한 왕국을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왕상 5 

▣ 성전건축-열왕기상 5-8장-


이 장들에서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기록한다(삼하 7:12-16/왕상 8:15-21). 젊은 왕에게 있어서 이 일이 거대한 사업임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확신을 주셨으며 솔로몬은 여호와를 신뢰하였다(6:11-14). 이와 병행하는 구절은 역대상 22장-역대하 7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준비(5장)


다윗-그는 전체의 계획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은 승인하셨으나 솔로몬이 실제적인 일을 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다윗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대상 28:11-21) 값비싼 재료들을 이미 모두 준비해 놓았었다(대상 22:5/대상 22:14-16). 그는 아들에게 이 일을 장려하였고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지원하실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다(대상 28:1-21).


두로의 이방왕 히람-그는 이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목재와 기술자들을 공급할 것에 동의하였다. 솔로몬은 곡식 이만 석(약 26,000말)과 순전한 올리브 기름 이십 석(약 30말)을 해마다 지불했다(왕상 9:10-14).


이스라엘-인력은 시간제로 등록하거나 징발되는 것으로 동원되었고 무거운 “노예 노동“은 가나안 사람들이 맡아서 했다. 이들은 약 150,000명이 동원되었으며(5:15/9:20-22), 유대인 30,000명은 “정규적인“ 일을 하였다. 10,000명이 한달은 일하고 두 달은 집을 돌보았다. 이러한 동원은 이 땅의 일할 수 있는 인구의 1/40에 해당되는 수였으므로 그다지 압박을 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봉사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성전 건축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협력한 결과임을 나타내었다. 준비된 자료들, 즉 버틸 수 있는 크고 귀한 돌들과, 건물을 영광스럽게 할 귀금속들은 모두 최고품이었다. 이것은 “나무나 짚이나 풀“이 아니라 “금, 은, 보석“으로 건축하라는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고를 상기시킨다(고전 3:10-23). 오늘날 하나님은 물질로 된 성전에 거하시지는 않지만(행 17:24),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일에 값싸고 초라한 것으로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왕상 6-7     

2. 건축(6-7장)


성전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성경 사전을 참고하자. 아마도 “성전 전지역“이 성전 이외의 건축물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7:1-12). 솔로몬은 먼저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여기에는 7년이 소요되었다(6:38). 다음으로 그는 왕궁을 건축하고, 다른 건축물들과 궁정을 지었는데 모두 성전 구역을 이루고 있었다(9:10). 이 모든 것의 건축 기간은 20년이었다.


성전 건축에 대해 모든 세밀한 점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다. 성전 본당은 성막의 두 배로 지어졌으므로, 성전 자체는 거대한 크기의 건물이 아니었다. 성전은 다듬은 돌로 짓고 나무로 덮었다. 그 위에 다시 금으로 덮었으며,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6장 7절에서 돌은 채석장에서 미리 다듬어져서 조용히 제자리에 갖다 맞추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돌을 다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다듬고 있었으며, 따라서 모든 것들이 서로 잘 맞추어졌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주님의 성전인 교회를 세우는 일을 보조할 때에 따라야 할 좋은 본이다(엡 2:19-22/벧전 2:5-8).

성전은 성막보다 더 크고 정교하였다. 이것은 가죽으로 덮은 임시적인 천막이 아니었으며 그보다는 이동할 수 없는 장엄한 석조 건물이었다. 창문도 있었으며 마루도 있었는데(6:4/ 6:15), 이들은 둘 다 성막에는 없던 것이었다. 솔로몬은 지성소에 감람목으로 두 그룹을 만들어 두었는데(6:23-30), 이 아래에 법궤를 두었다. 바깥 뜰이 무미건조한 반면에 성전에는 야긴(“그가 세우실 것이다“)과 보아스(“주 안에 힘이 있다“)라고 불리우는 두 개의 기둥(13-21절)을 세운 아름다운 현관이 있었다(7:1-12). 힘(강함)과 견고함(안정됨)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 이제 자기 백성에게 속하게 되어 이 땅에 정착시키게 되었다. 작은 놋대야 대신에 열 두 마리의 황소가 받치고 서 있는 “주조한 바다“(7:23-26)를 만들었다. 이들은 또한 열 개의 옮길 수 있는 놋대야(7:27-35))를 만들어 성전 전역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역대하 4장 1절에서는 놋단이 지성소의 크기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가 아닌 열 개의 촛대가 있었고(대하 4:7-8), 열 개의 떡상이 있었다.


신약에서는 성전의 의미에 대해서 성막에 대한 교훈만큼 많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이들은 성막이 겸손함으로 이 땅에 계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성전은 살아있는 돌들로 이루어진 “거룩한 성전“을 세우시는 영광 중에서의 현재 그의 사익을 상징한다고 본다. 또는 성막은 오늘날 우리의 순례 생활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성전(영속적인 건물)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영광 중에 통치할 것을 모형으로 보여 준다.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약속들을 믿지 않고 성전의 현존함을 믿었던 것은 너무도 잘못된 일이었다. 건립된 후 500년도 안되어 이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6장 11-13절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중요한 것은 큰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상기시키셨다."

왕상 8 3. 봉헌(8장)


법궤가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그의 영광으로 성전을 채우셨다(1-11절). 후에 에스겔은 그 영광이 떠나는 것을 보게 된다(겔 8-11장). 솔로몬은 백성에게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상기시켰다(12-21절).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의 가족을 위하여(22-30절), 죄를 범한 사람들을 위하여(31-40절), 이방인 나그네들을 위하여(41-43절), 그리고 추방된 민족을 위하여(44-53절) 기도했다. 기도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며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구하는 내용이다. 솔로몬은 그의 기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마음의 상태가 성전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죄가 징계를 가져오며 회개는 용서와 축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헌당보다는 사람들을 헌신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44-53절의 내용은 사실로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포로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본토로 회복시켜 성전을 재건하고 그를 섬기게 하셨다. 또한 이 기도와 약속은 불신앙 가운데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서도 이 말세의 날에 성취되고 있다. 기도를 마친 후, 솔로몬은 그 백성을 축복하고(54-61절)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도록 권고하였다. 왕이 다른 민족들도 여호와의 진리를 알고 있음에 대해 관심을 표명한 것에 유의하자.


축제는 14일간 계속되었다(65절). 첫 주간에는 희생제사를 드리고 금식을 하며 공식적인 봉헌 의식을 행하였으며, 두번째 주에 백성들은 자기의 장막으로 가서 여호와 안에서 즐거워하였다. 9장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특권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상기시켰으며, 만일 백성이 순종하는 중에 여호와를 따른다면 그의 보좌를 영원히 세우시겠으나 만일 그들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은 그 민족을 제해 버리시겠다고 하셨다. 불행하게도 이 민족은 죄와 불신앙에 빠졌으며, 9장 6-9절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아름답고 값비싼 성전은 주후 586년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갔을 때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성막에 거하셨으며(출 40:34), 다음으로는 솔로몬의 성전에 계셨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하였다(요 1:12-14). 오늘날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며(고전 6:19-23), 집합적으로는 교회가 하나님의 전이다(엡 2:21). 적그리스도가 예배를 요구하는 환란 기간 동안에는 미래의 유대 성전이 세워질 것이며(살후 2:1-12),그리스도의 천년 왕국 기간 중에도 영광스러운 성전이 있을 것이다(겔 40-48 장).



왕상 9:1-9   

▣ 솔로몬의 죄-열왕기상 9-11장-


역대하 7-9장은 이 부분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위대한 건축 계획을 완성한 후의 솔로몬의 생애를 다룸으로써, 이 지혜롭고 경건한 왕이 어떻게 점차 영적으로 쇠퇴해갔으며 간접적으로 왕국의 분열을 초래했는가를 보여 준다.


1. 하나님의 훈계(9:1-9)


하나님은 솔로몬이 보좌에 오른 지 얼마 안되어 그에게 나타나셨으며(3:5), 그 때 젊은 왕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할 거룩한 지혜를 구하였었다. 하나님은 또한 성전을 건축하는 어려운 시기에 왕을 격려하기 위한 멧세지를 보내셨다(6:11-13). 이제 그의 위대한 계획이 완성되었을 때 솔로몬은 여호와께로부터 또다른 멧세지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권하고 있다. 우리는 대개 대단히 성공적인 성취를 이룬 후에는 가장 큰 시험에 직면한다.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재확인하고 “온 힘을 다해 마음을 지켜야 할“(잠 4:23) 책임과, 말씀에 순종하여 행할 것을 솔로몬에게 상기시키셨다. 만일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의 보좌는 굳게 설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실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솔로몬이 불순종하며 그를 따르는 자녀들이 불순종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축복을 회수하시고 그 백성을 그들의 좋은 땅에서 내어쫓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세운 큰 집들을 파괴되어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기념하는 상징으로 남겨질 것이다. 성경의 어디를 펴 보아도 이러한 원리들이 진실임을 발견한다. 순종은 축복으로 인도하고 불순종은 징계로 인도한다. 유감스럽게도 본 장에서 솔로몬 왕이 이 경고를 마음에 간직하지 못하고 점점 여호와께로부터 멀어지다가 결국 생애의 종말에 가서는 무죄한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한 것을 보게 된다(11:40)."


왕상 9:10-10:13      

2. 위험한 동맹들(9:10-10:13)


히람과의 동맹(9:10-14)-우리는 이미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위하여 목재와 기술자를 히람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살펴보았다(5:1-12). 나중에는 돈이 필요하여 히람에게서 “빌렸으며“ 담보로 갈릴리의 20개 성읍을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마태복음 4장 15절에 나오는 “이방인의 갈릴리“이다. 히람은 그 성읍들을 보았을 때 “무가치한 것“(Cabul)으로 여겼으며, 역대하 8장 1-2장은 히람이 몇 개의 성읍을 거래상 솔로몬에게 주었음을 알려 준다. 어떤 사건이 있든지 이방 민족들과의 동맹은 율법에 금지되어 있었으며, 이 동맹들은 다만 솔로몬을 더욱 깊은 문제로 빠지게 하였다(대하 6:14-7:1).


애굽과의 동맹(9:15-24)-솔로몬은 애굽으로부터 말들과 다른 사치품을 들여오기 위해 정책적으로 애굽의 공주와 결혼하였다(10:28-29). 유대인에게 있어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는 화 있을진저“라고 말했다(사 31:1). 이방 여인들과 결혼함으로써 솔로몬은 그의 백성에게 좋지 않은 본이 되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이방인들의 일에 개입하게 만들었다.


다른 민족들과의 동맹(3:25-10:13)-솔로몬의 해군은 왕국에서 요구하는 사치품들을 구하러 인도에까지 항해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스바 여왕의 방문 역시 개인적인 방문 이상의 일이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그들 간에는 무역 협정 및 다른 동맹들이 체결되었다. 솔로몬과 여왕은 값비싼 선물을 교환하였으며,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와 부에 완전히 압도당한 채 돌아갔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2장 42절에서 그녀에 대해 언급하셨으며, 그 시대의 유대인들은 경고하는 데에 그녀의 방문을 사용하셨다. 만일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방인도 그러하였을진대 “솔로몬보다 크신 분“을 그들 가운데 두고도 그를 거절한 유대인들이 당할 심판은 얼마나 크겠는가!

이 사건을 통하여 명성과 행운의 위험을 읽을 수 있다. 10장 7절에는 “지혜와 복“이라고 되어 있으나, 10장 23절에는 “재산과 지혜“로 기록되어 재산이 먼저 오는 것을 본다. 솔로몬이 물질적인 것에 점점 더 중요성을 둠에 따라 영적인 일에 쇠퇴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왕상 10:24-49       

3. 파괴적인 야망(10:24-49)


디모데전서 6장 9절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에 떨어진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솔로몬의 생애에 일어났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축복의 풍성함에는 아무 관련이 없었고, 자기의 마음을 만족시켜 줄 훨씬 더 훌륭한 사치품들을 구하러 사람들을 멀리 보냈어야 했다. 솔로몬의 말년의 모습이 회의주의와 세상적인 개념들로 가득 찬 전도서에 나타나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일년에 금 666달란트를 받은 일은 중요한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계 13:8). 그는 성별된 그릇이면 어떤 것이라도 사용하시는 주님(딤후 2:20-21)과는 달리 금그릇만을 사용하였고(21절), 참으로 영광과 호화로움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영화로움 속의 솔로몬조차도 하나님의 단순한 백합화 한 송이의 아름다움만 못하다고 말씀하셨다(마 6:29). 신명기 17장 16-20절에 기록된 왕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을 솔로몬이 어떻게불순종하였는지 유의해 보자. 그는 말들과 병거, 돈, 아내들을 늘려갔다. 아마도 솔로몬은 성전 건축만으로도 그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충분하며, 이제는 과거의 축복들 위에서 빈둥거릴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전도서 2장에서는 재물을 얻는 데에 대한 그외 관심을 보여 준다."


왕상 11      

4. 고의적인 배교(11장)


잠언 5장 20-23절과 6장 20-24절을 쓴 사람이 이방 민족으로부터 많은 아내와 첩들을 취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었던 일부다처 제도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것이었지만, 그가 이방 여인들을 택한 처사는 하나님께 대한 고의적인 배교 행위였다(신 7:1-14). 이같은 반복된 죄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솔로몬의 마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았다(11:4). 하나님은 “마음의 순전함“을 원하셨으며(9:4),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하나로 규합된 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사람이 이교의 제단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이 일에 진노하셨으며 오류를 범하는 왕을 믿음으로 돌이키기 위하여 몇 가지 징계를 내리셨다.


경고의 멧세지(9-13절)-하나님은 솔로몬에게서 왕국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말이 솔로몬에게 충격을 주어 마음을 돌이키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욱 맹렬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에돔의 침략(14-22절)-솔로몬의 “안식의 왕국“은 이제 전쟁으로 실의에 빠졌다! 야고보서 4장에는 이 사건에 대한 영적인 해설이 나와있다. 바로를 포함한 솔로몬의 동맹국들은 별로 한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애굽은 에돔과 결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르손의 적대행위(23-25절)-수 년 동안 이 전사의 무리들은 솔로몬의 국경을 괴롭혔다. 배교한 왕은 급속히 땅을 잃어가고 있었다.


여로보암과의 경쟁(26-43절)-솔로몬 자신이 여로보암의 용감성과 근면성 때문에 그를 승진시켰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눈에 띄지 않는 청년을 열지파의 왕이 되도록 선택하셨다! 한 지파는 유다인데 여기에는 “작은 베냐민“(12:21)이 포함되었다. 솔로몬은 자기에게 경쟁자가 있음을 알았을 때 그를 죽이려 하였다. 왕은 백성들이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동 계획으로 신음하고 있음을 알았어야만 했다(12:6-11). 사실, 공공 임무를 맡고 있던 아도니람은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12:18).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만일 솔로몬이 여호와께 성실하게 머물러 있었다면 그의 말년은 징계와 패전 대신에 축복과 승리로 채워졌을 것이다.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할 과제를 아들에게 물려 주었으며, 르호보암은 솔로몬을 부유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 무거운 부담들을 어떻게 하든 덜어주어야 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위대한 영광과 광채의 은택을 입는 것 같았으나 모든 일들이 잘 되어나간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지속될 수 없는 덧없는 영광이었다. 요한계시록 3장 17-18절의 설명은 이 상황에 잘 어울린다."



왕상 12:1-14:20      

▣ 분열된 왕국-열왕기상 12-16장-


이 부분에서는 “종말의 시작“을 기록한다. 솔로몬의 죽음과 더불어 이 민족의 영광은 시들기 시작했다. 열왕기상은 솔로몬 통치 40년,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된 85년의 125년 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유다는 다섯 왕이 통치했으나 이스라엘은 여덟 명의 왕이 통치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사악한 왕이었다. 이어서 열왕기하는 이스라엘(북지파)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간 것과 유다(남지파)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을 다룬다.


1. 왕국의 분열(12:1-14:20)


르호보암의 어리석음(12:1-15)-솔로몬의 광대한 건축 및 확장 계획은 그 민족에게 명성과 영광을 가져다 주었으나,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세금은 무거운 것이었으며 이들은 이러한 부담들에서 어느 정도 구제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솔로몬은 그의 말년에 가치관을 바꾸었으며 영적인 축복보다도 물질적인 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전 1:12-2:26 참조). 만일 아들 르호보암이 나이 많은 지도자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을 것이지만, 그는 백성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경험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의 조언을 따라, 결과적으로 그릇된 결정을 내렸다. 지도자가 되는 길은 종이 되는 길이다(막 10:42-45).


여로보암의 반역(12:16-13:34)-하나님은 솔로몬의 죄로 인하여(11:9-13) 여로보암이 열 지파의 왕이 되도록 택해 놓으셨다(11:26-40). 죄는 굉장한 분리자요 파괴자이다. 유다와 베냐민만이 르호보암에게 남겨졌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르호보암은 이 기회를 선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열 지파를 우상 숭배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백성들이 매년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거기서 반역을 도모할 것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영역 안에서 예배하도록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는 아론의 죄를 반복하여(출 32:1-6)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단(Dan)에 다른 하나는 벧엘에 두었다. 그는 또한 예배의 장소를 성역화하였으며, 자신의 제사장 제도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고안된 인간이 만든 종교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축복 같은 것은 없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러한 배교가 지속되게 하실 수 없으셨으므로 왕에게 경고와 심판의 멧세지를 보내셨다(13장). 왕이 제단에 향을 태우며 제사장처럼 행동하는 것에 유의하자! 알려지지 않은 한 하나님의 사람이 미래의 왕 요시야의 출생을 알렸으며(13:22/왕하 23:15-18), 인간이 만든 종교는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을 경고하였다. 여로보암이 그 선지자를 체포하려고 했을 때 그의 손이 말라버렸고 제단은 공개적으로 부숴짐으로써 그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되었다! 왕은 치료해줄 것을 간청했으며, 그 사람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자 왕은 그를 왕궁으로 초대하여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거절하여 속임수에 빠지지 않았다. 그 하나님의 사람이 동료 선지자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여 생명을 잃은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13장 11-34절에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도록 하지 말라. 어떠한 댓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신 말씀을 순종하라.


하나님의 심판(14:1-20)-아비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는 젊은 나이였다(그의 아버지는 22년을 통치하였다). 물론 왕은 그의 보좌를 계승할 아들이 없을 것을 염려하였다. 오늘날의 다른 타락한 사람들처럼 여로보암은 도움이 필요하자 그의 거짓 신들에게서 돌아서야만 했다. 그는 자기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을 처음 알려 주었던 아히야 선지자에게로 돌이킬 수 밖에 없었다. 여로보암은 감히 직접 갈 수가 없었으므로 그의 아내를 변장시켜 선지자에게 보내었다. 그러나 이 눈먼 선지자는 여로보암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영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아히야는 변장을 폭로하고 사악한 왕에게 심판의 멧세지를 보냈다. 그 멧세지는 실현되었다. 왕비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아들이 죽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등지고 간 것은 참으로 나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열 지파를 놀라운 축복과 승리로 인도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는 다른 왕들이 따를 나쁜 본을 남겼다."


왕상 14:21-15:24    

2. 유다의 쇠퇴(14:21-15:24)


르호보암(14:21-31)-17년 동안 솔로몬의 악한 이 아들은 백성들을 무서운 죄로 이끌어갔다. 그는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행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패망시킨 사악한 왕의 본을 따랐다. 하나님은 애굽이 올라와서 그 민족을 치도록 하여 징벌을 가하셨다. 백성은 그들의 영적인 가치관을 잃었다. 값비싼 황금 방패는 이제 값싼 놋 방패로 대치되었다. 물건들은 똑같아 보였으나 하나님은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아비얌(15:1-8)-“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단 3년만 통치하도록 허락하셨다. 그의 어머니가 압살롬과 인척관계가 됨을 주목하자(2절의 “아비살롬“). 그는 여로보암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대하 13장).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하여 그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 승리는 순전한 군사적인 승리였으며 그 민족에게 영적인 부흥 운동은 없었다.


아사(15:9-24 /대하 14-16장)-그는 선한 왕이었으며, 악한 통치자들의 치세 이후에 온 환영할 만한 변화였다. 그는 르호보암이 세운 무서운 죄들을 없애버리려 하였다(14:24). 그의 통치 아래서 짧지만 안식과 부흥의 기간을 보냈다(대하 14-15장 참조). 그는 자기 어머니조차 우상 숭배를 하였다는 이유로 폐위시켰다(대하 15-16).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통치는 시작한 것처럼 끝나지는 않았다. 그는 보호받기 위해 인간을 의존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존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는 수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위하여 싸우도록 고용하는 데에 성전의 재산을 사용하였다. 이 경건하지 못한 동맹은 사람으로 값을 치루었다.


여호사밧(15:24/22:41-50/대하 17:1-21:3)-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려 하였고 우상을 타파한 이 선한 왕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은 그에게 많은 승리를 주셨는데, 이는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였기“ 때문이다(대하 22:9)."


왕상 15:25-16:34    

3. 이스라엘의 멸망(15:25-16:34)


여기서는 나답으로 시작하여 아합으로 끝나는 여섯 왕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모두는 악한 왕이었다. 나답은 그의 아버지의 사악한 우상 숭배를 계속하였다.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바아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바아사는 24년 간 통치하였으며, 그로써 여로보암의 모든 씨가 멸망될 것이라는 14장 14-15절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러나 선지자 예후는 바아사에게 그의 집이 멸망할 것을 통보하였다. 바아사의 아들 엘라는 2년도 안되는 기간을 통치하였으며 그의 군대장관의 하나인 시므리에게 술취해 있는 동안 죽임을 당하였다. 시므리는 일주일 동안만(16:15) 민족을 이끌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 바아사의 집을 쓸어버림으로써 예후의 예언을 성취하였다(16:1-4). 그러나 군대가 반기를 들어 오므리를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번에는 시므리를 향해 오므리가 행진해 왔으며 이에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화염 속에서 자살하였다. 오므리는 열 두 해를 통치하였으며(소규모의 민중 반란을 진압한 후) 백성들을 더욱 악한 죄로 몰아갔다. 그의 아들 아합은 이세벨과 결혼하였으며 이로 인해 바알 숭배가 왕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오므리가 명성을 얻을 만한 유일한 일이 있다면 북 왕국의 수도로 사마리아를 개설한 일이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아합이 보좌에 올랐으며 그의 지도 아래 지파들은 우상 숭배와 사악함으로 더욱 쇠퇴하여 갔다.

이 민족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 시기가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어 백성들에게 전파하도록 했던 때인 것을 주목하자. 13장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선지자를 보았는데 엘리야와 엘리사도 나온다. 물론 예후와 아히야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들을 다시 불러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뿐이었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 14:34). 거룩한 왕이 통치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축복하셨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통치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심판과 패전을 보내셨다.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민족이 이제 진리에 등을 돌리며 영적인 일들에 쇠퇴해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그렇다. 그들은 때때로 물질적인 번영을 누렸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기뻐하신다는 표시는 되지 못했다. 사실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은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인도해 갔다! 거룩한 나라를 세우는 최선의 길은 거룩한 교회 안에 거룩한 시민들을 소유하는 일이다(딤전 3장)."



왕상 17      

▣ 엘리야의 승리-열왕기상 17-18장-


민족이 죄와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민족이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초청하셨다. 선지자란 “예언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또한 “정면에서 말하는“ 사람인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고 백성들의 죄를 폭로하였다. 디셉 사람 엘리야가 이와 같은 선지자였는데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약 5:17). 그러나 큰 용기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두 장에서는 여호와께로부터 온 두 가지 명령, 즉 “가서 숨으라! 가서 보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엘리야를 보게 된다.


1. 사적인 사역-“가서 숨으라“(17장)


누가복음 4장 25절은 가뭄이 삼 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열왕기상 18장 1절에서 우리는 “3년째에“ 갈멜산의 대결이 발생했음을 발견한다. 따라서 가뭄은 엘리야가 갑자기 아합의 궁정에 나타나 “가뭄이 3년간 계속될 것이라“고 선포하기 6개월 전에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비가 없다는 것은 백성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신 11:13-17/대하 7:12-15). 아합과 그의 사악한 이방인 아내 이세벨은 그 백성을 바알 숭배로 이끌어 갔는데 이 종교는 우리가 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도덕한 것이었다. 3년 간의 가뭄이 지속된 것은 엘리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약 5:17). 그는 멧세지를 전달하고는 그의 공식적인 사역에서 3년 간 은퇴했었다. 이 기간 동안에 여호와께서는 은혜스럽게 그를 돌보셨다. 순종하는 종은 자기 주인의 신실한 돌보심에 언제나 의지할 수 있다. 엘리야가 경험했던 세 가지 훈련을 살펴보자.


마른 시내(2-7절)-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정확히 어디로 가라는 것과, 무엇을 하라는 것까지 말씀하셨다(잠 3:5-6/시 37:3-6 참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엘리야의 사역을 철회하신 사실은 그들의 죄에 대한 또다른 심판이었다(시 74:7-9). 여호와는 엘리야에게 시냇물을 마시도록 허락하셨고 매일 먹을 떡과 고기를 공급하셨는데 이것들을 엘리아에게 전해 준 것은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성경에서 첫번째로 그 이름이 나오는 새이다(창 8:7). 이 새는 부정한 새였으나 놀라운 목적으로 이 새를 사용하셨다. 엘리야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떡과 물과 고기를 즐기는 동안 100명의 선지자들은 동굴에 숨어서(18:4) 떡과 물만으로 지내야 했다. 그런데 시내물이 마르는 날이 왔다. 이것은 엘리야가 죄를 범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다른 장소를 예비하셨다는 뜻이었으며, 이것은 엘리야가 여호와를 신뢰하였고 시냇물을 신뢰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텅빈 통(8-16절)-하나님의 말씀은 시련의 때에 하나님의 종을 인도한다. 그러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 과부가 너를 먹일 것이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명령인가(눅 4:22-26)! “사르밧“이란 “정련“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용광로에 넣고 연단하고 계심이 분명하다. 엘리야가 과부의 가난함을 알고 기분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그녀는 마지막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 잘못된 일은 결코 없다. 과부가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첫자리에 두었을 때 하나님은 그녀와 아들과 손님에게 공급해 주셨다. 14절에서 엘리야가 이방 여인 앞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높였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그분께 드리는 일이다. 남은 일은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다. 주님은 몇 개의 보리떡과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시지 않으셨는가!


죽은 소년(17-24절)-마른 시냇물은 엘리야의 시련이었고 죽은 아이는 과부의 시련이었다. 큰 축복 다음에는 대개 큰 시험이 오기 마련이다. 그 과부의 믿음이 18절이 시사하듯이 실패해야 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시편 119편 75절과 사무엘상 3장 18절을 보고 실망과 시련 중에서 취할 올바른 대처 방법을 알아보자. “그 소년을 내게 달라“는 것이 엘리야의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소년에게 다시 생명을 주실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첫번째 부활의 사건이다. 선지자는 시체를 그의 개인용 객실(지붕 위에 있는 다락)로 데리고 가 그 소년의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가 그 아이의 죽은 몸 위에 자기의 몸을 대고 뻗쳐있을 만큼 그 소년을 위하여 고민하였음을 눈여겨 보자! “죽은 자를 영적으로 살리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기적은 여인으로 하여금 믿음의 간증을 하게 했다. 그녀가 말씀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은 참으로 나쁜 일이다."


왕상 18      

2. 공적인 사역-“가서 너를 보이라“(18장)


개인적으로 훈련을 받고 시험을 거친 다음에 이제는 공적인 일을 위해서도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사악한 아합왕과 대면하라고 명령하신다(18:1). 우리는 한 번의 설교를 위하여 3년을 기다린 엘리야의 인내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엘리야와 오바댜(1-16절)-오바댜는 타협적인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엘리야의 생애와는 직접적인 대조를 이룬다. 엘리야는 주님을 공개적으로 섬기며 두려움이 없는 반면에 오바댜는 아합을 섬기며(7-8절), 여호와를 은밀히 섬기려 한다(3-4절). 엘리야는 “영문 밖“에 있었으며(히 13:13) 오바댜는 궁정 안에 있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나 오바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동안에 오바댜는 말들과 노새를 구하기 위하여 풀을 찾고 있었다! 엘리야가 오바댜를 대면하자 깜짝 놀란 종은 선지자를 신뢰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엘리야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그가 은밀하게 행했던 헌신적인 일들에 대해 “자랑“해야만 했다(13절).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엘리야가 아닌 오바댜의 길을 걷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엘리야와 바알(17-29절)-선지자는 아합왕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왕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 또한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악한 사람은 언제나 세상에 생기는 문제거리들을 신자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들 자신의 죄 탓으로 돌리는 일은 결코 없다. 경쟁은 엘리야와 아합 사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있었다. 이 민족은 두 길 사이에서 절름거리며 흔들리고 있었으나,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출 32:26/수 24:15/마 12:30). 그들의 죄에 직면하여서도 백성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21절). 엘리야는 참 하나님이 불로써 응답하시리라는 불가능한 상황을 요구하였다. 물론 그는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시는 일“이 과거에 가끔 있었던 일임을 알고 있었다(레 9:24/대상 21:26).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신뢰할 때 그는 두려움이나 실패를 느끼지 않았다. 물론 바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응답할 리가 없었다! 사단은 백성들을 속이기 위하여 불을 보낼 수도 있었다(욥 1:16/계 13:13).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허락지 않으셨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를 조롱하였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시 2:4). 이교도들은 거짓 하나님이 응답해 주기를 바라서 어느 정도의 극단에까지 이르고 있는지 깜짝 놀랄 일이다(시 115편 참조). 저녁 제사를 행할 즈음(오후 3시)에는 바알이 거짓 신임이 모두에게 분명해졌다.


엘리야와 이스라엘(30-46절)-바알을 섬기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며 죄임을 폭로하는 것은 엘리야가 그 날 해야 할 임무의 반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일은 민족이 여호와를 예배하도록 되돌리는 일이었다. 엘리야가 백성들을 개혁하기 위해서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을 다시 살리기를 원했다. 우선 그는 백성들이 무너뜨려지도록 버려 두었던 제단을 수리하였다. 이것은 축복을 받기 위한 첫단계이다. 개인적인 헌신의 제단을 수리하며, 가족제단, 희생의 제단, 하나님과의 교제의 제단을 보수하라. 열 두 개의 돌을 사용함으로써 엘리야는 그들이 한 마음으로 단합하였음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켰다. 왜냐하면 여러해 동안 이 민족은 죄로 말미암아 분열되어 있었다. 사람이 불을 붙이기에 불가능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엘리야는 나무와 희생제물에 네 통의 물을 세 번씩이나부었다. 이것은 물 열 두 통을 뜻한다. 선지자는 믿음으로 간단한 기도를 드렸으며, 하나님의 불은 나무와 희생제물과, 물과 제단까지 모두 태웠다. 그러나 엘리야는 여전히 할 일이 있었다. 먼저 거짓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19절/ 그들 중 850명/ 신 13:1-5 참조).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39절)라는 지식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악을 미워해야 하며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제거해야만 한다. 심판은 언제나 축복을 위한 길을 준비한다.

그리고는 선지자가 왕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길에 있을 때에 비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왕이 출발하여 길을 갈 때에 엘리야는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3년 반 전에 그는 가뭄을 위하여 기도했었다(약 5:17). 그는 깨어 기도하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골 4:2) 또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기까지 기도로 버티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죄가 심판을 받기 전에는 축복의 소나기를 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오래지 않아 하늘에 검은 구름이 덮이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비가 왔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셔서 왕의 마차보다 앞서 달리게 하셨으므로 그와 마차는 이스르엘까지 경주해 갔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공적으로 행하시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감추어진 생활은 우리의 공적인 생활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것이다. 마른 시내의 훈련, 텅빈 통, 죽은 소년의 훈련들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갈멜산의 승리를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 40:31)."



왕상 19:1-8  

▣ 엘리야의 패배-열왕기상 19장-


18장에서의 승리의 장면과는 대조적인 장면을 본 장에서 보게 된다. 우리의 가장 큰 시련은 가장 큰 축복들 다음에 오는 경우가 많다! 믿음의 사람이 그의 눈을 주께로부터 옮김으로써 두려움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부드럽게 다루신다.


1. 하나님이 엘리야를 새롭게 하심(19:1-8)


야고보서 5장 17절은 엘리야가 “성정이 같은 사람,“ 즉 모든 신자들처럼 똑같은 시련과 실패를 당하는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임을 상기시킨다. 850명의 성난 선지자들을 대면해서도 두려워 하지 않았던 엘리야가 한 여인의 위협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의 실패에도 육체적인 원인도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갈멜산에서의 대결은 그를 지치게 했으며 정서적으로 메마르게 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몸을 잘 보살펴야 하며 특히 열띤 사역과 희생을 한 후에는 더욱 잘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엘리야의 실패의 주된 원인은 영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세벨을 보았으며 여호와를 보는 데 실패하였다. 그는 이세벨의 위협을 들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을 잊었다. 그가 취했던 매 단계들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렸었다(17:2/17:8/18:2/18:36). 그러나 이제 두려움은 인내하지 못함으로 이어졌으며, 인내치 못함은 불순종으로 인도해 갔다(사 28:16). 그는 더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한다.

선한 사람의 발걸음은 여호와께로부터 명령을 받는다(시 37:23). 그러나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선지자의 발걸음은 그를 보다 나쁜 곤경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엘리야는 유다로 도망하였는데, 그는 아합의 딸이 여호사밧과 더불어 그 곳에서 통치하고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왕하 8:16-18)! 그는 80마일(약 128km)을 여행하여 보다 큰 위험 속으로 들어갔다! 낙심하여 혼자 있기를 원한 엘리야는 시종을 남겨두고 황무지로 여행했다. 여행할 때는 다른 사람과 같이 행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창 2:18). 외로움과 의기소침은 대개 편승하기 마련이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지쳐서 엘리야는 자려고 누웠다. 그의 취침 기도는 이러했다.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모세가 큰 실망의 때를 당하여 이런 기도를 했었으며 요나도 그러하였다(민 11:15/욘 4:3).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엘리야는 그의 시선을 자기에게 두고 그가 행한 일, 그리고 그가 하지 않은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님은 은혜로 그의 종을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음식과 휴식이 필요한 것을 아셨으나, 그에게는 역시 영적인 자극이 필요하였다 엘리야는 음식을 먹고 잠이 들었다! 여기서 회개나 무슨 관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그는 포기한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번째로 먹이셨다. 이제는 엘리야가 일어나서 다시 여행을 시작하였다. 여호와의 손은 일찌기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출 3장), 율법을 받았던 호렙산으로 엘리야를 인도해 갔다. 하나님의 자녀가 타락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로 돌보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격려가 된다."


왕상 19:9-18 

2. 하나님이 엘리야를 책망하심(19:9-18)


굴에서 그에게 임한 말씀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9절). “네가 왜 여기있느냐?“ 이 질문은 어느 때에나 우리 자신에게 물어도 좋은 질문이다. 엘리야의 대답은 다시금 그의 마음의 실망을 나타내었다. 그는 이스라엘 중 여호와께 충성된 자는 자신뿐이라고 여겼다. 자신의 교만과 자기를 변호하려는 욕망을 자백하는 대신 엘리야는 자기의 경우에 대해 여호와와 논쟁하기를 계속한다. 그래서 여호와는 그를 가르치기 위하여, 그리고 항복하는 자리로 이끌기 위하여 다른 방법을 사용하셔야만 했다.

여호와는 왜 바람과 지진과 불을 일으키셨는가? 한 가지 이유는 마음이 산란한 이 선지자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데는 많은 도구들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었다. 사실상 하나님은 자연 가운데서는 순종하는 종을 찾기에 어려움이 없다(시 148:1-8).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 이 타락한 선지자에게는 이 일이 참으로 큰 문책이 되었다. 더구나 광풍이 지난 후에 세미한 음성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일이 언제나 크고 시끄러운 방법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갈멜산의 기적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 민족 가운데 영적인 일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 엘리야는 요란하고 큰 일이 성취되기를 원하였으나 하나님은 때로는 조용하고 작은 일을 더 좋아하신다. 우리가 할 임무는 하나님께 어떤 방법을 쓰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돌아가라.“ 이것은 엘리야가 두 번이나 자신을 변호하려고 한 후에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14-15절). 하나님은 그에게 봉사할 또다른 기회를 주고 계셨다. 엘리야는 수리아의 새로운 왕으로서 하사엘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예후를, 그리고 새로운 선지자로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게 된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의 실패에 대하여 불평하고 근심하기를 멈추고 사역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분명히 좋은 충고이다."



왕상 19:19-21       

3. 하나님이 엘리야의 후임을 정하심(19:19-21)


그 땅에 신실한 신자 칠천 명이 있다고 확신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격려하시는 방법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홀로 서 있을 때에 신자들은 어디에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다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이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제, 엘리야의 사역은 종말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그는 계승자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선포하도록 준비시켜야 했다. 이 일도 엘리야에게 격려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자기가 떠난 후에도 그의 일이 계속될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를 위한 실제적인 교훈이 있다. 우리가 만일 달아나는 대신 주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멧세지를 기다린다면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으로 격려해 주실 것이다.


엘리야의 첫 사역은 자기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지명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엘리사가 들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을 때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그에게 던짐으로 이루어졌다. 이 행위는 이제 엘리사가 엘리야와 같은 능력과 권위를 가진 선지자라는 사실을 상징하였다. 엘리사는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도록 승락을 받고 싶었고 이 일은 허락되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와 같은 작별은 며칠 걸려야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눅 9:61-62 참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즉시로 따를 것이며, 다른 이들을 하나님보다 앞에 두어서는 안된다.

엘리사가 황소를 죽이고, 농기구로 장작을 삼아 불을 피웠다는 것은 그가 결정적으로 과거를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자기의 뒤에 있는 교각을 불사른“ 것이다. 이 잔치에는 엘리사의 가족뿐 아니라 이웃의 친구들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그의 새로운 소명이 잘 되기를 비는 마음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잔치가 일단 끝나자 엘리사는 일어나 자기의 주인을 따랐으며 그에게 봉사하였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은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사였으며(왕하 8:8-15) 예후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 역시 엘리사였다(왕하 9:1-10). 그러나,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었으므로 그는 간접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기름부은 것이다.

엘리사가 다른 열 한 사람(아마도 아버지의 종들/ 19절)의 도움을 받아 쟁기를 갈고 있었다는 것은 엘리사가 부유한 가정 출신인 것은 암시한다. 성경에서는 대개 바쁜 사람들을 부르셨음에 주목하자. 모세는 양들을 돌보고 있었고 기드온은 곡식을 타작하고 있었으며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은 고기잡는 일에 바빴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을 맡은 사람이었다. 하나님께는 게으른 성도들을 위해 줄 자리가 없다! 엘리사가 가족과 가정과 물려받을 수 있는 부를 포기한 것은분명히 믿음과 헌신의 행위였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기까지는 뒷전에 머물러 있었으며(왕하 2장), 그 후에야 비로소 사역을 이어 받았다. 엘리야의 사역은 “지진과 불과 바람“의 사역이었으나 엘리사는 “조용하고 작은 음성“처럼 사역하였다. 물론 그의 사역에 있어서 심판을 받는 일도 있다. 왜냐하면 죄는 언제나 심판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야의 생애에 있어서 이러한 경험은 낙담과 실의에 대한 좋은 경고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우리를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 “나만이 진리를 붙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물론 칠천 명의 숨은 사람들이 엘리야의 편에 서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엘리야의 씁쓸한 태도가 그의 사역을 단축시킨 것 같다. 실망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이사야 40장 31절의 말씀대로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이다."


왕상 20       

▣ 하나님이 아합을 처리하심-열왕기상 20-22장-


아합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왕상 16:29-33/왕상 21:25-26). 그의 이방인 아내 이세벨은 무대의 배후에서 그를 다스렸으며 바알 숭배가 이 땅의 공식적인 종교가 되도록 주선하였다. 아합은 “스스로 팔려 악을 행하였다“(21:20/21:25). 이 장에서 우리는 그의 죄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최후의 심판을 본다.


1. 아합의 방어(20장)


도전(1-12절)-수리아왕은 32명의 다른 왕들의 지원을 받아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사마리아를 위협하였다. 그의 사신들은 왕의 부와 가족을 요구했으며 아합은 복종할 것을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궁들을 그들의 전리품으로 취할 권리에 대해서는 거절하였다. 아합은 용감한 일면을 보여 주었으나 종말이 가까와졌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만일 여호와와 함께 했더라면 그는 자기의 문제를 하나님께 돌릴 수 있었을 것이었으나, 바알은 왕을 구원할 수 없었다.


정복(13-30절)-여호와는 왕과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개입하셨는데, 이는 아합이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그럴 만한 일을 행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다만 하나님이 수리아를 대적하셨으며, 그 나라를 심판하실 때가 왔을 뿐이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선지자는 놀란 왕에게 멧세지를 전했으며(13절), 아합의 즉각적인 대답은 그가 그 멧세지를 믿었음을 시사한다(14절). 아합은 믿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에게 제공된 마지막 기회를 움켜 잡았다. 그는 즉각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였으며 수리아의 막강한 군대를 향하여 정면으로 얼마 안되는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허락하시자 왕이 직접 전쟁의 책임을 지고 나갔으며 큰 영광 중에 전쟁을 끝냈다. 수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덕에서는 승리를 하지만 평지와 골짜기에서는 승리하지 못하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들은 다음 해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이 때에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사악한 왕에게 희망의 멧세지를 보냈으며, 이스라엘에게 또다른 굉장한 승리를 주셨다.


타협(31-43절)-사단은 힘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책략으로 성취하였다. 왜냐하면 사단이 아합을 즉시 적과 사악한 타협을 하도록 이끌어 갔기 때문이다. 적의 왕들과 신복들은 교만한 아합 앞에서 반성하고 스스로 낮추는 것처럼 위장하였으며 이 실없는 왕은 속임수에 빠져들어갔다. 그는 원수인 벤하닷을 가리켜 “나의 형제이다 !“라고 말했다. 두 왕은 평화의 언약을 세웠고, 아합은 벤하닷을 살려서 돌려 보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직접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이었다. 그의 동료로 말미암아 얼굴에 상처를 입은 익명의 선지자는 왕을 만나려고 기다렸다가 하나님의 심판의 판결을 알렸다. 도망친 죄수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아합왕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스스로 죄에 대한 선고를 내리도록 하였다(나단도 다윗에게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삼하 12장). 아합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많은 그의 백성들과 더불어 죽게 되었다. 하나님이 적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온전히 은혜였음을 반드시 명심하기 바란다. 왕이나 백성은 그러한 대접을 받을 만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이미 아합이 벤하닷이 아니라 하사엘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었다(19:15-17). 따라서 이 때는 그가 죽을 때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며 그의 뜻을 행하심에 있어서 크게 서두르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자비 가운데 하나님은 회개할 시간을 주시기 때문이다."


왕상 21      

2. 아합의 속임수(21장)


죄(1-16절)-사악한 자의 마음은 지속적으로 물질에 대하여 탐심을 보인다. 그리고 공허한 우상숭배에 만족을 느낄 수도 없었다. 이제 왕은 이웃의 포도원을 탐내어 토라진다. 왜냐하면 그의 이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도 않고 그에게 포도원을 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레 25:23/민 36:7). 왕비 이세벨은 남편의 이름으로 편지를 날조하여 나봇에 대한 거짓 증인을 세워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종교의 축제란 눈가림 아래 이 전체의 일을 숨겼다! 나봇은 돌에 맞아 죽었다. 무죄한 사람이 왕 아합과, 바알을 숭배하는 그의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죽은 것이다. “만물보다 부패하고 심히 거짓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심판(17-29절)-하나님은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계셨다. 그는 엘리야를 보내어 사악한 왕과 문제들을 해결하게 하셨다. “네가 나를 찾았느냐?“라는 아합의 질문은 민수기 32장 23절을 생각나게 한다.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엘리야는 아합의 집에 파멸을 알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예언은 실현되었다(왕하 9:10). 아합은 “악한 일에 자신을 팔았으며“ 그가 번 삯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왕은 여호와 앞에 자신을 겸손히 하였으며(성실한 마음으로였는지 또는 외식으로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여호와는 형벌을 연기하셨다. 곧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련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진실이다!"



왕상 22      

3. 아합의 패전과 죽음(22장)


아합은 기회가 있을 때에 수리아를 파멸시키지 않았으므로 적이 그를 공격하려고 돌아왔으며, 마침내 그를 죽였다. 아말렉을 파멸시키는 데 실패했던 사울왕을 죽인 자는 아말렉의 젊은이들 중의 하나였다. 아합의 딸이 여호사밧 왕과 결혼하였으므로, 이 전쟁을 위하여 아합과 여호사밧이 동맹을 한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였으며 그래서 이들은 아합을 섬기는 선지자들에게 물어보았다. 물론 이교 선지자들은 눈이 멀어서 두 왕의 욕망을 충족시켰으며 승리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약속은 빈말이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선지자에게서도 듣고 싶어했다. 미가 선지자가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그는 감옥에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게 했으며, 그의 멧세지를 요청했다. 빈정거림으로써 미가는 이교 선지자들의 공언을 그대로 말했다. 그러나 왕은 그가 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잃어버린 자가 여호와께로부터 듣고 싶어한다는 것은 이상한 방법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듣고 순종하고 싶어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미가는 이방 선지자들이 거짓말을 했으며 아합은 전쟁에서 죽고 이스라엘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이 충성된 선지자는 그의 사역의 댓가로 무엇을 받았는가? 감옥에서의 빵과 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께 충성했으며 이것이 고려해야 할 전부였던 것이다.


아합은 자신을 변장함으로써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대개의 군인들은 왕을 먼저 죽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육과 혈에 대하여 싸우지 말고 사단(왕)에 대항하여 기도와 말씀으로 싸우라고 말할 때의 개념도 이에서 온 것이다. 일단 왕을 파멸시키면 나머지는 쉬운 일이다(눅 11:14-26 참조). 여호사밧은 왕의 옷을 입고 전투에 나갔으나 주께서 그를 보호하셨다. 그러나 변장을 했던 아합은 죽임을 당했다. 34절은 그 군인이 목표를 겨냥하지도 않고 활을 쏘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화살이 적절한 목표에 가도록 인도하셨다! 여호와의 심판이 내리려 할 때는 인간이 사용하는 속임수나 변장도 그를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졌으며 왕을 잃었다.

왕은 사마리아에 장사되었다. 피에 젖은 마차는 연못에서 씻기워졌으며 개들이 그 피를 핥아 먹음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취되었다(20:42/21:19). 아합의 사악한 아들 아하시야가 그를 이어 통치하였고, 민족은 계속해서 죄악의 길을 걸었다.


아합왕은 용감한 군인이었으므로 만일 그가 진리 가운데서 여호와를 따랐더라면 이스라엘을 승리와 평화로 인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알숭배와 결탁한 일과 그의 불경건한 아내의 악한 영향이 결국 그를 패전으로 이끌어 갔다. 아합은 군사적인 승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였지만 자신을 율법에 복종시키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심판이 선언된 때에는 외적으로 겸손히 하였으며 “집행 유예“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얄팍한 회개는 오래 가지 못했다. 3년 반의 가뭄이나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났던 일도 그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을 “악에게 팔았으며“ 회개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구약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에게서 들었으나 회개하지 않았다 ! 그의 통치 하의 22년은 그 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리 인도해 갔을 뿐이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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