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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왕기(3): 솔로몬 이야기(2)(9-11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5:09

열왕기(3): 솔로몬 이야기(2)(9-11장)


10-7. 솔로몬의 두 번째 꿈 이야기(9:1-9)
  왕상 3장에는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꿈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서 솔로몬은 지혜와 부와 장수까지 누리게 될 것이 예고되고 있다. 이러한 첫 번째 꿈 이야기는 솔로몬의 번영기인 (왕상 3-8장)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제 왕상 9장에 이르면 솔로몬이 꾼 두 번째 꿈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꿈은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전건축을 마쳤을 때에 주어졌다(1). 이 꿈은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한 후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졌다. 하나님은 전에 기브온 산당에서 나타나신 것처럼 다시 꿈을 통해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2). 하나님은 솔로몬이 성전봉헌식 때에 드린 모든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기도한 대로
1) 그가 건축한 전을 거룩하게 구별할 것이며,
2)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고,
3)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3).

  그리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그가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행하면,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그의 후손이 영원히 왕위를 계승하게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다(4-5). 그러나 그와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말씀을 좆지않고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에 거룩하게 구별한 성전도 버릴 것이며, 이스라엘은 민족들 중에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6-9).

  솔로몬의 두 번째 꿈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할 경우에 임할 재앙이 크게 강조되고있다. 이러한 내용은 뒤에 이어지는 솔로몬의 타락과 재앙에 대한 중요한 전조와 단서가 된다. 실제로 뒤에 나오는 (왕상 9:10-10;29)의 이야기는 솔로몬이 다윗의 행위를 좆지 않아서 재앙의 씨앗을 뿌려놓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두 번째 솔로몬의 꿈 이야기는 솔로몬이 멸망을 자초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 열왕기 3장과 9장에 나오는 두 개의 꿈 이야기는, 솔로몬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10-8. 두 번째 히람과의 관계(9:10-14)
  솔로몬 이야기에서는 솔로몬과 히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두 번 언급하고 있다. 5장에 기록된 히람과의 관게는 매우 공평하며 우호적인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왕상 9:10-14)에 나타나는 두 번째 히람과의 교역은 매우 불공평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솔로몬은 20년 동안 성전과 그의 궁전을 완성했다. 그 후에 솔로몬은 히람이 솔로몬의 요구대로 백향목과 잣사무와 금을 제공해준 대가로 히람에게 갈릴리에 있는 20개의 성읍을 주었다. 그러나 히람은 두로에서부터 와서 솔로몬이 준 성읍들을 돌아보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히람은 솔로몬에게 "형이여! 내게 준 성읍이 어찌 이러하냐?" 고 불평을 했다. 히람은 솔로몬이 준 성읍들이 자신이 제공한 건축 자재의 대가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신량이 부족한 두로와 왕인 히람은 옥수수 등을 재배할 수 있는 해안이나 평지의 땅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히람에게 준 땅은 산악 지대의 성읍이었기 때문에, 히람이 실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이 성읍 이름은 "가불" 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가불'은 '별로 좋은 점이 없는','무가치한'이라는 뜻을 지닌 베니게어에서 온 말이다. 이곳은 가불'은 '악고'의 동쪽으로 약 13Km 떨어진 곳 있는 현재의 '카불'일 가능성이 많다. (대하 8:2)을 보면 후에 히람은 이 성읍들을 솔로몬에게 반환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솔로몬이 이 성읍들은 '담보로' 제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Keil). 그 후에 히람은 금 120달란트를 솔로몬에게 보냈다(10-14). 고대 이스라엘의 화폐 가치상 금 1달란트는 3,000세겔에 해당되며, 약 34.27kg의 무게를 지녔다. 당시 은 30세겔은 장정 한 사람의 노예 값이었는데, 금세겔은 은세겔의 15배 가량 되었다. 따라서 금 1달란트는 은 45,000세겔에 해당되는 값어치를 지녔다. 여기에 기록된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은 불성실한 교역이었다. 또한 솔로몬은 갈릴리의 20개의 성읍을 히람에게 줌으로써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파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율법에는 약속의 땅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매매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두 번째 교역 이야기에서 솔로몬은 율법을 범하고, 이방인의 원망을 사는 일을 저질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10-9. 솔로몬의 건축 사업과 노동 정책(9:15-25)
  이러한 솔로몬의 태도는 그의 노동 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 나타나는 징용(5:13-18)은 안식이 허락된(한 달 일하고 두 달을 쉼) 관용 적인 징용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단락에 나오는 두 번째 징용은(9:15-28) 거의 노예 징용에 가깝다. 또한 첫 번째 징용이 성전 건축을 위한 징용이었다면, 두 번째 징용은 바로의 딸을 위한 궁과, 마병성, 그리고 국고성과 같은 개인 건축을 위한 것이었다. 솔로몬은 역군을 일으켜서 성전과, 자기의 궁전, 밀로와 예루살렘 성,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였다(15). 밀로란 명칭은 '채우다'는 뜻인 '말레'에서 파생된 말로, 이는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장 취약한 북방의 방어를 위해 북동쪽 또는 북서쪽에 '흙과 돌로 채워 세운 성채'를 가리킨다. 원래 이곳은 여부스인들의 성채였으나 다윗에게 정복당했다(삼하  5:6-9). 다윗은 밀로에서부터 성을 쌓아 수도 예루살렘의 성벽을 건축하였다(대상 11:8). 그리고 후에 솔로몬은 이 밀로를 다시 증축 또는 수축을 했다(24). 다윗은 여부스족속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을 빼앗아 밀로와 예루살렘 성을 건축했다(삼하 5:9). 그러나 그 당시 다윗의 건축은 시온 산의 고지대 지역을 중심으로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솔로몬은 수도 방어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저지대 부분까지 성벽을 확장, 또는 증축했다. 하솔은 '울타리를 둘러 친 땅'이라는 뜻이다. 갈릴리 호수의 북쪽으로 16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하솔은 북쪽으로부터 뻗어내려오는 두 주요 도로가 합쳐지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따라서 솔로몬은 이 언덕에 성채를 쌓아 북방 국경 및 훌레 평야를 방어하는 요새로 삼았다(Yadin). 이후 하솔은 B.C. 8세기경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이스라엘의 북방 국경을 방어하는 주요 성읍이 되었다. 므깃도는 에스드렐론과 샤론 평원 사이에 위치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또한 이곳은 팔레스틴 내륙에서 베니게에 이르는 길과 애굽에서 수리아,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길의 교차점으로서 주요 교통로이기도 했다(삿 5:19; 삼상 31:1; 왕하 23:29).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상 이곳에서는 많은 전쟁이 치루어졌는데, 이런 맥락에서 계시록은 므깃도를 그리스도께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멸망시키실 최후의 큰 전투 장소, 곧 아마겟돈 전쟁의 무대로 묘사하고 있다(계 16:16). 게셀은 예루살렘과 욥바 중간의 팔레스틴 평지에 있는 성읍이다. 원래 '게셀'에는 가나안인들이 거주하였으나, 애굽의 바로가 빼앗아 솔로몬에게 주었다(16). 이는 솔로몬의 아내인 바로의 딸을 위한 일종의 지참금이었다. 솔로몬은 이곳에 요새를 구축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게셀은 이스라엘의 이후 '게셀'은 마카비 시대까지 주요 군사 요충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게셀과 아래 벧호론을 건축하고, 또 바알랏과 그 땅에 있는 다드몰과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자기의 모든 영토 안에 건축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들을 건축하였다(17-19). 벧호론은 깊은 계곡에 의해 동서로 구분된다. 이중 동쪽지역을 '윗 벧호론', 서쪽 지역을 '아래 벧호론'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동쪽 지역은 해발 525m, 서쪽 지역은 해발 315m이기 때문이다(Reed). 이 벧호론은 게셀과 함께 블레셋을 방어하기 위한 진지였으며, 베냐민, 유다, 에브라임 지역을 방어하는 길목이었다(Keil). 따라서 솔로몬은 이곳을 더욱 견고하게 요새화시켰다. (대하 8:5)을 보면 솔로몬이 '윗 벧호론'까지 증축했음을 알 수 있다. 바알랏은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단 지파의 영역이며 깁브돈과 여훗 사이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수 19:44-45). 다드몰은 다메섹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전략상 요충지였다. 이곳은 많은 정원과 종려나무 숲들이 있어 쾌적한 오아시스 지대 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새로 점령한, 왕국의 북동 지역을 지원할 국고성을 다드몰에 건축했던 것이다(대하 8:3,4). 국고성은 나라에 필요한 물품들(군량미, 왕국의 재산, 구제용 식량 등)을 비축하는 장소였다(창 41:35; 출 1:11; 대하 17:12; 32:28). 이러한 국고성은 물품의 저장 뿐 아니라 방비도 요구되었으므로 요새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솔로몬이 거느린 마병의 수는 만 이천 명이었다(10:26). 솔로몬은 말과 기병들을 위해서 성을 건축했다. 이처럼 요새화된 국고성과 여타 전쟁용 병거 및 말과 기병대는 주로 북방 국경 지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대하 8:4; 16:4). 이는 당시 솔로몬 왕국에 위협이 될만한 세력은 주로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이들을 건축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자들, 즉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사람, 그리고 여부스 사람을 노예 역군으로 삼았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다 쫓아내지 못한 토착민들이었다(삿 1:21-36).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주하여 살면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다. 솔로몬은 이러한 노예들을 건축 사업을 위해 역군으로 사용했다. 20년에 걸친 솔로몬의 건축 공사는 막대한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솔로몬은 옛 가나안 토착민의 자손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함으로써 이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었다. 솔로몬에 의해 동원된 가나안인 역군들의 수는 15만명이 넘었다(5:15). 그러나 솔로몬은 율법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로 삼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될 수 없었다(레 25:39-43). 가나안인들에 비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특권과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부역에서 면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비록 좀더 자유롭고 대가를 받으며 일을 했지만, 3만명 이상이 건축사역에 동원되었다(5:13-14).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이스라엘 자손의 노역도 과중하게 부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역 사무를 총괄하는 감역관의 존재와 솔로몬 사후 르호보암을 향한 백성들의 호소 및 탄원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일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12:4,18). 설로몬의 건축 사업을 감독하는 두목은 550명이었는데, 이들은 상급 감독으로 이스라엘인 250명과 가나안인 300명으로 구성되었다(5:16). 바로의 딸을 위한 궁전이 완성이 되게 되자, 바로의 딸은 다윗 성에서 나와서 그녀를 위해 건축한 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때에 솔로몬은 왕비가 떠난 다윗 성에 밀로의 건축 사업을 수행했다(24). 솔로몬은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그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렸으며, 여호와 앞에 있는 매 단마다 분향을 드렸다(25). 이렇게 해서 솔로몬이 건축하려던 모든 사업이 완성이 되게 되었다(26). (대하 8:13)을 보면 이 세 번의 제사는 일년의 세 절기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다. 일부 사람들은 이 언급을 '불필요한 반복'이라고 본다(Montgomery).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은 이 기록이 일상적인 제사기능이 발휘됨으로써 성전의 참다운 완성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Bahr, Hammond).

 10-10. 솔로몬의 무역 활동(26-28) <참고 지도: 솔로몬의 무역>
  또한 솔로몬은 이러한 건축물 뿐 아니라, 많은 배들도 건축했다. 솔로몬이 배를 건축한 곳은 에돔 땅 홍해 물가 엘롯 근처에 있는 에시온게벨이었다. '엘롯' 또는 '엘랏'(신 2:8)은 '에시온게벧'과 더불어 홍해의 아카바 만 최북단에 위치한 2개의 주요 항구 도시였다. 이 중에서 '에시온게벧'이 보다 윗편에 위치해 있었다. 이 두 항구도시는 전략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에시온게벨은 홍해의 한 지류인 아카바 만의 상부에 있는 항구로서, 이 지역은 아카바 만의 상부에 있었다. 이 지역은 일찍이 이스라엘이 모압 광야를 지날 때 진을 친 적이  있었다(민 33;35-36; 신 2;8). 그런데 솔로몬은 이곳에 항구를 건설하여 오빌과의 해상무역 기지로 삼았다. 고고학은 이 지역에서 솔로몬 시대의 건축 공법으로 이루어진 건물과 성벽을 발견하였다(Cohen). 선박 제조에 있어 솔로몬은 당시 항해와 선박 건조 기술이 크게 발달한 베니게인들의 도움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좁은 해안 지대라는 국토의 지형적 조건이 베니게인들로 하여금 일찍부터 바다에 눈을 돌리게끔 했기 때문에, 솔로몬 당시 베니게인들의 항해와 선박 건조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Winer, 5:1,9). 한편 '베니게'는 당시 히람 왕의 통치하에 있었던 두로와 시돈 지역을 가리킨다. 히람은 자기이 백성들 중에서 바다에 익숙한 사공들을 솔로몬의 종들과 함께 이 곳으로 보내었으며, 그들은 그 곳에서 배를 타고 오빌에 가서 금 420달란트를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주었다(26-28). (대하 8:18)을 보면 히람이 솔로몬에게 보낸 것은 사공 뿐만 아니라 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배들은 비록 솔로몬의 소유였지만, 그것을 제작한 것은 히람의 백성인 베니게인들의 기술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솔로몬의 무역 선단은 일찍부터 해상 무역에 익숙한 베니게인들의 절대적인 도움을 입었다. 오빌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이 곳은 '인도 해안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무 역 품목들(금,은,상아,잔나비,공작 등)이 고대 인도 지역의 주요한 무역품들이다. 2) 긴 항해 길이 장거리 항해였음을 암시하고 있다(10:22). 인도의 봄베이 근처에 '수파라'란 항구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 '오빌'인 것같다고 학자들은 말한다(Jerom). 그러나 올브라이트는 오빌을 아프리카 동북부 해안 지역으로 보았고, 패터슨은 이 곳을 아라비아 남서부 해안 지역으로 보았다. 어쨌든 이 지역은 고대 세계에 금의 산지로 유명했다(대상 29:4). 따라서 이스라엘은 오빌에서 많은 금을 수입하였는데, 정금이라고 하면 곧 오빌을 연상할 정도였다(욥 22:24; 28:16; 시 45:9). 솔로몬은 오빌에서 금 이외에도 백단목과 각종, 보석 등을 운반해 왔다(10:11). (대하 8:18)에는 그들이 가져온 금이 사백 오십 달란트'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보통 히브리 알파벱의 숫자 표기상 20과 50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된다(Bahr, Keil). 당시 금 한 달란트의 무게는 대략 34.3kg이었고, 그 가치는 장정 1,500명의 노예값에 해당되었다. 솔로몬의 해상 무역은 그가 가진 부의 주요 원천 중 하나였다. 비록 본절은 해상 무역에 국한하여 소개했지만, 활발한 교역 활동은 솔로몬 시대의 특징 중에 하나였다(10:2,11,22,28; 대하 2:10; 9:14). 이러한 활발한 교역 활동에는 평화 시대라는 요인 외에도 애굽,수리아,아라비아 등으로 통하는 주요 교역로에 자리잡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한편, 이렇듯 활발한 통상 교역은 이스라엘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즉 이제까지 지파 중심으로 농경과 목축에 주력하던 이스라엘에 상공업의 물결이 밀려들어옴으로써 도시 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인 지파중심의 생활에서 탈피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대외적인 국가조직의 재편을 가져왔다.

  이러한 솔로몬의 통치 아래에서 가나안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로 전락해 갔다. 전에 사무엘은 왕정이 이루어졌을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해 미리 예고한 적이 있었다. 솔로몬은 처음에는 성전 건축을 위해 역군을 일으켰지만, 후에는 병거와 기병을 위한 성, 바로의 딸을 위한 궁전, 그리고 배와 선단을 만드는일에 사용되었다. 국고성은 군사적 목적으로, 바로의 딸을 위한 별궁은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선단은 부를 추구하기 위해서 지어졌다(왕상 9:28). 이로 인해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가 솔로몬 정부의 특징이 되게 되었 다. 솔로몬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으며, 독재자가 되어 점점 더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무거움 짐을 지우고 있었다.


11. 솔로몬과 여인 이야기(2); 시바 여왕의 방문(10:1-13)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 내러티브에서 여인과 관계된 이야기를 두 번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 이야기였다(3장). 여기에서 솔로몬은 신적인 지혜를 가진 이상적인 왕으로 나타나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10장에 기록된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솔로몬이 하나님이 주신 부와 지혜를 백성이 아닌 자신을 위해 쓰고 있는 것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는 공의로운 판결에서 부를 모으고 즐기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 두 번째 이야기는 솔로몬이 이상적인 왕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들고 있다.

  스바의 여왕은 여호와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려고 했다(1). '스바'는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지금의 예멘-에 있는 셈족 국가로 사베안(Sabaeans)왕국을 가리킨다(Keil). 이 나라는 그 위치상 이방세력의 영향에서 비교적 안전한 변방 지대였기 때문에 비옥한 초승달지역의 권력투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나라는 독자적인 정치와 경제 문화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이 나라는 고대 근동에서 중요한 무역 기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즉 그 위치로 인해서 근동 북방의 여러 나라들 및 아프리카, 인도, 지중해 국가들은 스바를 통해서만 향료, 보석, 황금등을 수입할 수 있었다(욥6:19; 시72:10,15; 사 60:6; 렘 6:20; 겔 27:22,23; 38:13). 본문의 스바 여왕은 아라비아의 전설에 의하면 '발키스'란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아비시니아전설에는 '마퀴다'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 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통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아비시니아 왕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입증되지는 않았다(Winer, Patterson).

  해상 무역의 발달로 인해 솔로몬 왕국의 부유함과 지혜는 먼 나라까지 전파되었다. 그의 명성은 다메섹이나 가사로 가는 아라비아 무역상들에 의해 스바 여왕의 귀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목적을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소문으로만 듣던 솔로몬의 명예와 지혜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고대 아라비아인들은 지혜로 유명한 족속이었으며, 전설에 의하면 스바 여왕은 지혜의 여왕으로 이름이 나있었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로, 스바 여왕은 상업적인 통상관계를 맺기 위해서 방문했을 수도 있다. 당시 솔로몬은 홍해 근처에 '에시온게벧'항구를 가지고 홍해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 활동을 하고 있었고(9:26-28; 10:11,20-28), 스바 또한 금, 향품, 보석 등을 많이 수출하는 나라였다(사 60:6; 렘 6:20; 겔 27:22). 따라서 스바 여왕은 이스라엘과 통상을 맺어 남아라비아에까지 확장된 솔로몬의 무역권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자 방문했을 수도 있다. '어려운 문제'로 번역된 '히다'는 '수수께끼' 또는 '비유'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비유적 속담들이나 문제들을 가리키는데, 이는 지혜를 시험하는 일에 종종 사용되었다. 이러한 수수께끼는 아라비아 부족에게는 세련된 대화 방식의 하나였다. 아라비아 문학에는 이러한 수수께끼와 비유적 속담들이 풍부히 들어 있다.

  그녀는 수많은 수행원들과 함께 수많은 향품과 금과 은, 그리고 보석을 낙타에 싣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멘'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400km나 되는 먼길이었다. 그녀는 예루살렘에서 솔로몬을 만나서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모두 말했다(2). 물론 이 문제들은 수수께끼의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솔로몬은 그녀가 묻는 모든 말에 모두 대답을 했으며, 대답을 알지 못해서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3).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가 건축한 궁전과, 그가 먹는 상의 음식과, 관리들에 대한 제반 사항과, 술 맡은 관원과, 그리고 여호와께 올라가는 계단을 보고 넋을 잃을 정도로 감탄하였다(4-5). 이 '계단'은 왕궁에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매우 예술적으로 꾸며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솔로몬 왕에게 자신이 자기 나레에서 솔로몬에 대해 들은 모든 소문이 사실이라고 말했다(6). 그녀는 사실 그 소문을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실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솔로몬을 만난 후에 솔로몬의 부와 지혜가 소문보다 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7).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곁에서 그 지혜를 듣는 신하들이 복이 있다고 고백했다. 본문에는 솔로몬의 신복들처럼 솔로몬 곁에서 늘 지혜를 들었으면 하는 스바 여왕의 아쉬운 심경이 표현되었다 하겠다. 한편 성도들은 솔로몬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월등한 지혜를 소유하신(마 12:42)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듯 복된 처지를 망각하지 아니하고 항상 말씀안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히 13:15). 그녀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에 공의를 행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했다(8-9).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금 120달란트와 매우 많은 향품과 보석을 드렸다(10).

  그 후에 히람의 배들이 오빌에 가서 많은 백단목과 향품을 실어왔다(11). 백단목의 정확한  종류와 명칭은 불확실하다. 요세푸스는 이 나무를 일종의 소나무 목재로 보았다. 백단목(아체 알무김)은 인도와 실로가 원산지인 '붉은 백단향 나무', 곧 '자단목'과 같은 종류일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이 적갈색의 백단향 나무도 본절의 백단목처럼 단단하고 나무결이 고와 악기 제조에 적합했다고 한다(Trever). 솔로몬 왕은 그 백단목으로 성전과 왕궁의 난간이 있는 층계를 만들었으며, 또 노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수금과 비파를 만들었다. 이러한 고급 백단목은 전에도 후에도 이스라엘에 온 적이 없었다(12). 솔로몬 왕은 왕의 규례대로 스바 여왕에게 예물을 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 스바 여왕은 같이 온 수행원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13).


12. 솔로몬의 부와 지혜(2)(10:14-29)

  솔로몬의 통치의 이중적인 모습은 그의 부와 지혜에 대한 묘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솔로몬은 (왕상 4장)에서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지혜를 사용하여 백성들의 필요를 체워주고, 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왕상 10:14-29)에서는 그 지혜가 솔로몬 자신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곳에는 솔로몬이 신명기에 기록된 규정(신 17:16-17)을 어기면서 자신을 위해서 수많은 금과 은과 말과 여인들을 소유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이 매년 거두는 세입금은 금 666 달란트였다(14). 금 666달란트가 현대의 화폐 가치로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 금 1달란트의 무게는 34.3kg정도엿으며, 이는 은 45,000세겔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당시 은 30세겔은 노예 장정 한 사람의 값이었으므로(출 21:32), 금 1달란트는 약 1,500명의 노예값을 지불할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이 액수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엄청난 것으로 비추어졌음을 분명하다. 또한 솔로몬은 이 세금 외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소규모 상인들(상고)과, 대규모로 무역을 하는 객상들과, 동맹을 맺은 주변의 아라비아 왕들, 그리고 국내의 지방장관(나라의 방백)들에게도 세금을 받았다(15). 솔로몬은 금을 쳐서 얇게 편 후에 그것으로 방패 하나에 금 600세겔이 들어가는 큰 방패 200개와(16), 방패 하나에 금 3마네가 들어가는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들었다. 이러한 방패는 나무로 만든 방패 위에 얇게 편 금을 입혀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큰 바애는 전신을 가릴 수 있는 진지 방어용 방패를 말하며, 작은 방패는 개인이 사용하는 휴대용 방패를 의미한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 방패들을 레바논 나무로 만든 궁전에 두었다(17).

  이러한 방패들은 전투용이 아니라 의식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1세겔을 11.424g으로 보면(Sellers), 큰 방패 하나당 약 6.9kg의 금이 들었다. 그리고 1마네를 약 571.2g으로 계산하면 작은 방패는 한 개당 약 1.7kg의 금이 사용되었다. 이 금방패들은 아마도 레바논 나무 궁의 벽에 장식용으로 걸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 보관된 금방패들은 르호보암 때에 애굽 왕  시삭에게 탈취당하고 말았다(14:26). 솔로몬은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그 위에 정금을 입혔으며, 그 보좌에 6층계가 있고, 보자 뒤에는 둥근 머리가 있었다. 그리고 앉는 자리 양편에는 팔걸이가 있었으며, 팔걸이 곁에는 사자가 하나씩 있었다. 그리고 여섯 층계의 좌우편에는 12마리의 사자가 놓여 있었다(18-20). 솔로몬의 보좌는 팔걸이와 그 곁의 사자 장식으로 미루어 애굽식에 가까왔던 것 같다. 바사(페르시아)왕의 보좌에는 이러한 팔걸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서(잠 30:30,31), 성경에서 흔히 통치와 심판을 상징한다(암 3:8; 계 10:3). 여섯 층계 좌우편에 있는 12사자상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Keil). 고대 근동 지역의 유물들을 고찰하건대, 비록 보좌가 높고, 정교하게 만들어 졌으며, 팔걸이에는 각종 동물 형상들이 조각되어 있는 사실들이 입증되었으나(Layard). 그 규모나 형태 및 화려함 등에 있어서는 당시대 솔로몬의 보좌와 같은 것은 없었다. 솔로몬의 보좌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보좌는 먼 후대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Keil & Delitzsch, p. 164).

  솔로몬이 마시는 그릇은 모두 금그릇이었으며, 레바논 나무로 만든 궁에서 사용하는 그릇도 모두 금그릇이었다. 솔로몬 시대에는 은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은그릇이 사용되지 않았다(21). 이러한 표현은 솔로몬 왕국의 부가 극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솔로몬은 바다에 다시스 배를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했으며, 3년에 한 번씩 그배들로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왔다(22). 여기에서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열왕보다 컸다고 기록하고 있다(23). 천하가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 얼굴을 보려고 각기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 방문객들이 가져오는 예물은 금과 은 그릇,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였다(24-25). 3장에서부터 줄 곧 찬양되던 솔로몬의 지혜는 이로써 그 이야기를 끝을 맺고 있다. 또한 솔로몬은 병거와 마병을 모았으며, 이로 인해 그에게는 병거가 1400대가 있었고, 마병이 14000명이 있었다. 그는 이 마병들을 병거성과 예루살렘에 나누어 배치하였다(26). 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처럼 많게 만들어으며, 백향목을 평지에 나는 뽕나무처럼 많게 만들었다(27). 솔로몬은 말들을 애굽에서 내어왔는데, 이는 왕의 장사꾼들이 떼로 값을 매겨서 산 것이었다(28). 솔로몬이 애굽에서 내오 온 병거는 한 대에 은 600세겔이었다. 솔로몬은 자신 뿐 아니라, 헷 족속의 왕들과 아람 왕들을 위해서도 말과 병거를 내어 왔다(28-29).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은 사실은, 경제적 번성에 따르는 군사적 부강으로 간단히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왜냐하면 1) 이스라엘의 지형은 산악 지대가 많아 병거가 많이  필요없는데, 이러한 사실은 다윗이 하닷에셀에게서 빼앗은 병거 일천 대 중 백 대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셔버린 사실에서도 입증된다(대상 18:4). 2) 더구나 왕이 말을 모으는 일은 신명기 규례상 명백히 금지된 일이라는 점(신 17:16) 등의 문제에 대해 솔로몬의 병거와 마병은 (1) 단순히 전투용 뿐이아닌 상업적 목적(매매 혹은 상선단의 보호)도 지닌 것이라는 해석도 있으나(Dentan), (2)무엇보다도 왕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Hammond, Wevers).

  한편 신명기 규례가 '왕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말 것'(신 17:16)을 명한 이유는 (1) 무엇보다 병마(兵馬)에 의존하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시 20:7; 33:17; 잠 21:31). (2)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이킬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즉 말의 주산지인 애굽과의 잦은 외교나 거래 관계는 결국 애굽의 우상 문화를 끌어들이게 되고, 나아가 정치적 종속의 관계를 띨 우려마저 있었기 때문이다(Craigie). 그리고 이렇게 되면,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출애굽 은총이 업신여김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솔로몬은이 율법의 금지 조항이 염려한 점을 망각하고, 단순히 예비용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말을 애굽으로부터 수입하였다(28,29절). 이로써 솔로몬 왕에게 드러워지는 실패와 타락의 전조(前兆)를 느낄 수 있다. 은 1세겔(Shekel)은 대략 11.4Kg이었으므로, 은600세겔은 약 7kg의 중량이다. '마네'(Maneh)로는 12마네, '달란트'(Talent)로는 0.2달란트이다(16). 헷사람은 히타이트족을 가리킨다(창 10:15; 23:3). 히타이트족은 B.C. 2천년대 초 경에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바 있지만, 솔로몬 당시에는 작은 왕국들로 나뉘어져 있었다(Gelb). 그리고 이 왕국들은 팔레스틴 북쪽 변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국은 남쪽 애굽과 북쪽 헷 왕국들 사이에서 병거와 말  매매의 중간 상인 구실을 한 것이다. 이러한 수입과 매매를 통해 얻은 수익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아람 민족은 유브라데 강주변, 즉 이스라엘의 북쪽 및 북동쪽  경계에 여러 개의 작은 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다(Bowman). 본절의 아람 왕들은 바로 이 작은 국가들의 왕들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이들에게도 애굽의 병거와 말을 수입해 되팔았다. 그런데 아람인들은 이전부터 자주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서왔던  민족이었다(삼하 8:5,6; 10:8-18). 그리고 이러한 적대 관계는 솔로몬 통치 이후 분열 왕국  대에 가서도 내내 계속된다(20:20; 22:35; 왕하 7:15; 8:28; 대하 24:24). 그러므로 솔로몬은 세속적 무역 정책의 결과 결국 이스라엘의 대적에게 무기를 판 셈이 되고 말았다(Wordsworth).


13. 하나님에 대한 솔로몬의 태도(2)(11:1-13)

  하나님에 대한 솔로몬의 태도는 처음과 나중이 크게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다. 6-8장을 보면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으며 하나님을 크게 경외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와 그 후손이 계속해서 말씀을 지키면 그의 가문에서 계속해서 왕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11:1-13)을 보면 솔로몬은 우상의 산당을 건축하고 이방 신을 섬기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말씀을 듣게 된다.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은 우상의 산당을 지었으며(11:6-7), 하나님을 사랑하던 솔로몬우상을 섬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은 솔로몬의 나라를 빼앗아 그의 신복에게 주실 것을 선언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솔로몬의 아들 때에 심판을 시행하실 선언하셨다(11:11-12).

  솔로몬은 바로의 딸 외에도 많은 이방의 여인들, 즉 모압과 아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을 사랑했다(1). 바로의 딸은 솔로몬의 아내들 증에서 정실에 속했으며, 따라서 솔로몬은 그녀를 위해서 특별히 별궁을 건축했다.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사랑했다는 말은 이 일에 그의 개인적인 정욕이 개입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솔로몬이 이러한 나라들과 통혼한 것에는 외교적인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국제 결혼은 원래부터 외교적인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열왕기 기자는 이 일이 율법을 어긴 일이라고 못박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나라들과의 통혼을 금하셨기 때문이다(신 7:3-4).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게 될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었다(2). 그러므로 솔로몬이 이러한 율법의 명령과 정신을 무시하고 가나안 족속(헷족속)을 비롯한 이방의 많은 여인들과 결혼한 것은 혼합주의를 채택한 범죄였다.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이 여호와께서 금하신 나라의 여인들을 연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애했다'('다바크')는 말은 '집착하다', '달라붙다'는 뜻으로서 강렬한 감정적 애착 상태를 의미한다(시 102:5; 애 4:4 등). 따라서 이 말은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과의 애정에 탐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솔로몬 왕은 후비가 700명이었으며, 빈장이 300명이었다. 10장에서 우리는 솔로몬이 말과 은금을 많이 소유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일을 생각해보았다. 이제 솔로몬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율법까지 어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솔로몬이 (신 17:16-17)에서 금한 세 가지 명령을 모두 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비('사라')는 '후궁'들과 구별되는, '왕비'의 지위를 가진 여인들이다. 이들은 원래 이웃 나라의 공주, 혹은 왕족이었기 때문에 구별된 지위와 특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빈장('필레게쉬')은 '후궁'을 의미한다. 이러한 수많은 이방 여인들은 여호와와 율법을 향하던 솔로몬의 마음을 변하게 만들고 말았다(3). 솔로몬이 나이가 들었을 때에 왕비들이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다른 신을 좆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때는 솔로몬이 60세정도 되었을 때로 보인다. 그는 말년에 우상을 좆음으로 부친 다윗과 같이 전심으로 여호와를 좆지 못했다. 솔로몬이 이방 종교를 허용한 일은 이방인과의 동맹을 견고하게 했을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다(4).

  솔로몬은 시돈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사람의 밀곰을 좆았다. 아스다롯은 가나안인들이 섬기던 풍요의 여신으로, 성적 사랑과 다산을 위해 숭배되던 우상이었다. 따라서 이 여신을 위한 제사에는 보통 음란한 행위가 의식의 순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이 여신 숭배와 관련된 진흙 상들이 출토된다. 그런데 이 우상들은 유방과 음부를 두드러지게 만든 소규모의 우상으로, 당시 일반 가정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Gray). 이는 당시에 아스다롯 숭배가 얼마나 이스라엘에 만연해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다. 밀곰은 암몬의 민족신으로 인신 제사로 유명하며 '몰록'이나 '몰렉'과 같은 신이다(7). '밀곰'은 히브리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파생된 명칭이다(IDB)(5-6). 또한 솔로몬은 모압의 그모스와 암몬인의 몰록을 위해서 예루살렘 앞에 있는 산에 산당을 지었다. 그모스는  모압  민족의 수호신으로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 그모스'란 이름은 '정복자'라는 뜻으로 추정된다(Gesenius). 그모스는 암몬의 신 몰륵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고 음란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모스'는 그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으며, 손에는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Keil). 예루살렘  앞 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있던 '감람산'을 말한다. 후에 감람산의 최남단 봉우리는 '범 죄의 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솔로몬이 이곳에 우상의 산당을 지었기 때문이었다(Robinson). 몰록은 '밀곰'과 동일시 된다. '몰록'은 고유 명칭이 아니라 '왕'이라는 뜻이다. 암몬인들은 그들의 신을 왕으로 호칭한 것이다. 몰록 숭배제사 의식에는 인신 제물이 바쳐졌다으며, 이 제사는 주로 예루살렘 남서쪽 힌놈의 골짜기 도벱에서 행해졌다(Gray; 왕하 23:10; 렘 32:35). 또한 솔로몬은 다른 이방의 왕비들이 섬기는 신을 위해서도 산당을 지었다. 이로 인해 솔로몬의 왕비들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을 하고, 그 신에게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7-8). 이러한 일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게을리 했으며, 솔로몬의 통치 방향이 혼합주의로 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사단은 누구든지 교만하고 방만한 틈을 발견하면 걸코 이를 놓치지 않는다.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이교 산당은 그후에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서 여호와를 떠나게 됨으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언약 백성이 언약을 깨뜨린 일에 대해 발하시는 거룩한 분노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분노는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을 향하신 일관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두 번이나(3:5-14, 9:2-9) 꿈을 통해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때에 솔로몬에게 다른 신을 좆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에게 미혹됨으로 이러한 여호와의 경고를 무시하고 말았다(9-10). 그러므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라를 빼앗아서 그의 신복에게 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11). 여기서 신복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인물은 '여로보암'이었다. 그는 솔로몬의 노역 감독관이었으나, 솔로몬이 죽은 후에 그는 나라를 나누어서 스스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다(B.C. 930-910).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솔로몬 때에 그를 징계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 때에 징계하시겠다고 선언하셨다(12). 그리고 나라를 빼앗을 때에도 모든 나라를 다 빼앗지는 않고, 한 지파를 남겨서 그의 아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3). 솔로몬의 왕위가 대를 끊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의 가치 때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바하르'하신 도성으로서, 다윗 언약에 근거된 바(삼하 7:13),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둘만한 장소로 택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의 행위는 그만한 자비를 받을 이유가 없지만, 하나님 자신의 언약과  선택을 위해서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이름을 세계 열방에 전파할 종교적 수도로서 유지되어야 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유다의 주권을 아주 박탈하지 않으신 것이다(Hammond). 솔로몬의 범죄는 모든 나라를 빼앗겨야 했지만, 하나님은 다윗 언약과 예루살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최소한의 것을 솔로몬의 후손에게 남겨 주셨다.


14. 왕위 계승문제(2)-왕국 분열-(11:14-43)

  솔로몬 내러티브에는 왕위 계승과 관계된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 1-2장에는 다윗의 죽음이 임박하면서 솔로몬이 선지자 나단과 대제사장 사독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솔로몬은 보좌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3명의 경쟁자, 즉 요압과 시므이, 그리고 아도니야를 물리쳐야 했다. 솔로몬은 이러한 정적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하면서 그의 왕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 내러티브의 후반부인 (11:14-43)에 가면 솔로몬의 왕권이 급격하게 약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솔로몬이 늙게 되자,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대적하게 되면서 왕위 계승의 암초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지자 아히야가 솔로몬으로부터 나라의 반을 빼앗아 여로보암에게 준다. 솔로몬은 말기에 3명의 정적들, 즉 에돔왕 하닷과 르손, 그리고 여로보암을 맞아 싸워야 했다. 그리고 결국 솔로몬 사후에 나라는 둘로 나뉘어지게 된다.

 14-1. 에돔 왕 하닷의 도전(14:14-22)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좆는 솔로몬을 징계하기 위해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셨다(14). 에돔은 이스라엘 동남쪽에 있는 사각형 모양의 국가이다. '에돔'이란 '붉은 지역'이라는 뜻으로, 이 지역에 붉은 바위와 흙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에돔은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이었는데(창 36:1), 왕정 시대에 에돔은 줄곧 남왕국 유다와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하닷은 '태양', 또는 '호통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에돔 왕을 부르는 일종의 왕의 호칭으로 보인다(Hammond). 과거에 다윗은 에돔에 있을 때에 군대 장관 요압이 에돔에 6달을 머물면서 에돔의 남자들을 모두 죽인 일이 있었다. 이때에 에돔의 왕족이었던 하닷은 어린 아이였는데, 그이 부친의 신복들이 그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시켰다. 이때에 하닷은 그의 신복들에 의해 미디안과 바란을 거쳐서 애굽으로 도피하게 되었다. 미디안은 아카바만 동쪽에 있는 북서 아라비아의 넓은 땅이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동남쪽이며, 에돔의 남쪽에 해당된다. 따라서 하닷처럼 애굽으로 가려는 에돔인은 이스라엘 영토를 통과하지 않으려면 미디안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바란'은 '빛나는 땅'이란 뜻이다. 이곳은 미디안과 애굽 사이에 위치한 시나이 반도 중앙의 넓은 사막 지역으로 가데스와 신 광야를 포함하고 있다. 이 지역은 기복이 심한 지형으로 종종 도피처로 사용되었다. 하닷은 애굽에서 애굽 왕 바로에게 은혜를 입었으며, 그 곳에서 집과 양식과 토지를 제공받았다. 애굽에서 하잣은 애굽 왕 바로의 마음에 들었으며, 이로 인해 바로는 왕비의 아우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리고 하닷은 왕비의 아우를 통해서 그누밧을 낳았는데, 그는 바로의 양자로 입양이 되어 바로의 아들처럼 왕궁에서 지내게 되었다(15-20). 하닷은 애굽에 있다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죽고, 솔로몬에 의해 군대장관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하닷은 그 소식을 듣고 자기 나라를 회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애굽 왕 바로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되었다. 다윗이 죽은  해는 B.C. 970년경이며 요압 또한 같은 해에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했다(2:34). 그리고 하닷의 독립 투쟁이 시작된 때는 B.C. 940년경으로 추정된다(14). 따라서 하닷은 에돔으로 돌아간 이래 거의 30년 동안 설욕전을 위해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는 하닷을 보내는 것이 섭섭해서 만류했다. 그러나 하닷의 요청이 완강했기 때문에 바로는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21-22). 하닷의 편에서 보면 솔로몬을 대적하는 일은 잃은 나라를 회복하려는 일종의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닷의 대적 행위 배후에는 우상숭배하던 솔로몬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14-2. 르손의 도전(14:23-25)
  하나님은 두 번째로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하셨다. '르손'은 '족장'이라는 뜻이다. 그는 소바 왕 하닷에셀의 신복으로 있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었다(23). 소바는 아람족에 속한 한 나라로서 레바논과 안티레바논 사이에 있는 나라로서, 사울 왕 때부터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다(삼상 14:47). 전에 소바 왕 하닷에셀은 자국의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진군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소바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크게 승리한 적이 있었다(삼하 8:3-4). 그리고 다윗은 그후에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 아람의 연합군도 공격하여 속국으로 만들었다(삼하 8:5-6). 다윗이 하닷에셀과 아람 연합군을 격파할 때에 르손은 하닷에셀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리고 불한당과 산적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솔로몬의 통치 기간 중에 다메섹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게 되자, 르손은 다메세을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메섹은 르손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된 아람 국가의 중심지가 되게 되었다(Corney)(24). 그리고 그는 솔로몬의 일평생에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대적하였다(25). 하닷과 르손은 솔로몬에게 있어 평생 동안 고통스럽게 한 큰 골칫거리였다. 하닷은 애굽에서 귀국한 후에 게릴라 전투틀 통해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르손 역시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대적하였다.

 14-3. 여로보암의 도전(14:26-40)
  솔로몬의 대적은 외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솔로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그의 신하였던 르밧의 아들 여로보암이었다.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족속인 스래다 사람이었으며, 그 모친은 과부였던 스루야였다(26). 여로보암은 북쪽 10지파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킴으로(12:16-19) 솔로몬 왕국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가 솔로몬을 대적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솔로몬은 전에 밀로를 건축하고 다윗 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리하였다. 이때에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크게 인정하여 그를 에브라임 지파의 일을 감독하는 자로 세웠다. 어느 날 그는 예루살렘을 나가다가 들에서 선지자 아히야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에 아히야는 자기의 옷을 12조각으로 찢고 여로보암에게 10조각을 취하라고 지시했다. 그 때에 아히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서 그에게 열 지파를 줄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리고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해서 솔로몬에게는 한 지파만을 남겨줄 것이라고 했다. 아히야는 하나님께서이렇게 하신 이유는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율법을 준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인해 솔로몬 때에는 나라를 빼앗지 않고, 그의 아들 때에 빼앗아서 여로보암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때에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해서 솔로몬의 아들에게 한 지파를 주어, 그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고 예고하셨다(27-36). 하나님은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이 왕이 되면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일 여로보암이 다윗처럼 하나님께 성실하게 행하고, 율법을 좆아 행하면 그에게도 다윗과 같은 견고한 집을 세워 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을 세워 다윗의 집을 괴롭게 하실 것이지만, 영원히 괴롭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37-39). 이 소식을 들은 솔로몬은 손을 들어 즉시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여로보암은 곧바로 애굽으로 도피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가서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러 살았다(40). 애굽왕 시삭은 애굽 22대 왕조의 창시자로서 르호보암 때에 예루살렘을 약탈한 왕이었다(14:25-26). 아마도 시삭은 솔로몬의 장인인 애굽의 바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장인이 사위의 대적에게 피신처를 마련해 주었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후에 결국 소로몬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40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솔로몬이 그 열조와 함께 자게 되자, 그 부친 다윗 성에 장사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41-43).


15. 솔로몬 이야기의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솔로몬 내러티브의 구조를 살펴보면서 결국 첫 주요 단락(왕상 3-8장)은 솔로몬에게 우호적인 반면에, 둘째 주요 단락(9-11장)은 솔로몬에 대해 비우호적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솔로몬의 성격에 대해 두 가지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율법을 준행했을 때에 형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떠나고 율법을 좆지 않을 때에 그는 여러 가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백성을 돌보는 일에 사용했을 때에 형통했지만, 그것을 자기를 위해 사용했을 때에는 사치와 쾌락과 우상숭배를 초래했다. 이러한 솔로몬의 타락은 결국 왕국분열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그는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숭배함으로 여호와의 진노를 사게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나친 강제징용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솔로몬의 나라를 찢어 여로보암에게 주시겠다고 예고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솔로몬 때에는 징계를 내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에 나라를 찢어 여로보암에게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에도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해서 한 지파를 남겨서 다윗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게해주셨다. 이제부터 나오는 왕상 12장부터 17장까지의 내용은 솔로몬 왕국이 분열된 과정과, 분열된 두 왕국의 역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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