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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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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왕기(5): 분열왕국 이야기(2)(12-17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5:09

열왕기(5): 분열왕국 이야기(2)(12-17장)


< 참고:. 분열 왕국의 역사와 선지자들 >

1. 남북 투쟁 시기(왕상 12:25-16:20)

1-1. 남북 투쟁 시기의 북왕국 이스라엘(여로보암 1세-디브니)

가. 여로보암 왕가(B. C. 922-901)-2대-(12:25-14:20, 15:25-31)

 가) 여로보암(주전 931-910)-22년간-(12:25-14:20)
 * 솔로몬의 강제부역과 지나친 과세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짐.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을 듣고 반역을 함(유다와 에브라임 지파의 알력)
 * 이 일로 인해 솔로몬의 노여움을 사고, 애굽으로 도망침. 르호보암 때에 세겜에서 반란을 주도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초대 왕이 됨(수도를 세겜-브누엘-디르사로 옮김)
 * 후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쪽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것을 두려워하여 벧엘과 단에 금 송아지를 만들고 그 곳에서 제사하게 함.
 * 평민을 제사장으로 삼고, 절기를 7월에서 8월 15일로 바꾸어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함.
 * 이러한 그의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게 만드는 종교혼합주의를 초래하게 함.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보내어 그 제단을 파괴하고 장차 다윗의 자손 중에서 요시야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그의 뼈를 이 제단에 불사르 것이라고 예고하심. 그는 이 말을 듣고 저지하려 했으나 팔이 마비됨. 후에 회개한 그의 아들만 빼고 모든 남자들이 죽음.
 * 남 왕국의 2대왕인 아비얌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하나님의 재앙을 입어 사망함.

 나) 나답(주전 910-909년)-2년간-(15:25-31)
 * 여로보암의 아들, 바아사라는 모반자에게 피살당함.


나. 바아사 왕가(B. C. 909-876)(15:33-16:10)

 가) 바아사(주전 909-886)-24년간-(15:33-16:7)
 *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죽여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성취(왕상 14:4, 15:29을 비교하라)
 * 여로보암의 죄악을 그대로 답습함.
 * 남왕국의 제 3대왕 아사와 일평생 전쟁상태에 있었음.
 * 이스라엘 백성들로 유다와 연락하지 못하도록 벧엘과 예루살렘 중간에 있는 라마에 성을 건축하였으나, 유다왕인 아사왕의 다메섹(아람)왕 벤하닷에게 원병을 청함으로 이 일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아사왕은 라마성을 짓던 건축 자재들로 게바와 미스바(베냐민 지파의 땅)를 지어서 오히려 국경을 더욱 확장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 여로보암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문도 같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고됨.

 나) 엘라(주전 886-885)-2년-(16:8-10)
 * 바아사의 아들로 군대장관 오므리를 기브돈에 파송하고 자신은 술을 마시고 취해있을 때에 그의 신복이었던 군대장관 시므리에 의해서 피살당함. 이때에 시므리는 그의 친족과 친구들까 지 모두 죽임으로서 예후의 예언을 성취하였다.

 다) 시므리(주전 885)-7일간-(16:11-20)
 * 바아사의 후손을 멸함으로 예언을 성취함.
 * 그러나 그도 7일만에 동료 군대장관 오므리에 의해 궁전에서 포위당하여 자결함.
 * 이때에 절반은 디브니를 좆고 절반은 오므리를 좆음.
 * 결국 오므리가 디브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통일함.


2. 남북 투쟁 시기의 유다(주전 931-870, 왕상 14:21-15:24, 대하 10-16장)(르호보암-아사)

  처음 솔로몬 왕국이 분열 되었을 때에 유다 지파만이 르호보암을 따랐다.(왕상 12:20) 베냐민 지파는 처음에 북쪽의 여로보암을 좆았으나, 지리적으로 유다와 인접한 관계로 후에 남 유다에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우고 레위 지파 아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을 때에, 레위 지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남 유다로 귀환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르호보암의 세력이 강화되었다.(대하 11:13-17)

2-1. 르호보암(주전 931-913 왕상 14:21-31, 대하 10-12장)
  르호보암은 41세에 남 유다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7년을 다스렸다. 그는 다윗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 솔로몬의 말기의 영향을 받아 문란하도록 우상을 섬겼는데, 이는 암몬 족속이었던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왕상 14:21, 31)

 가. 북 이스라엘과의 전쟁(왕상 14:25, 26, 30)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중에서 용사 18만을 뽑아 여로보암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이를 금하셨다. 그 이후 그는 북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항상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나. 애굽 왕 시삭의 침략(왕상 14:25-27, 대하 12:2-12)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의 교만함을 징벌하시기 위하여 르호보암 제 5년에 애굽왕 시삭의 침입을 받게 하셨다.(대하 12:1,2, 5, 7-8) 시삭은 여로보암이 애굽에 있을 때에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던 왕이었다.(왕상 11:40) 르호보암은 애굽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을 때에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과 솔로몬 때에 만든 금 방패까지 모두 다 조공으로 바치고 겨우 나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여호와께서 저희의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저희가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대강 구원하여....그러나 저희가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열국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되리라" (대하 12:4-8)


2-2. 아비야(주전 913-911, 왕상 15:1-8, 대하 13:1-22: 여로보암을 이김
  아비야는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유다왕이 되었으며 예루살렘에서 3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르호보암왕의 죄를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해 주셨다(왕상 15:4, 왕상 11:13, 36). 아비야는 약 40만의 군대로 북 이스라엘의 80만의 군대를 물리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50만의 희생자를 내었고, 종교 중심지였던 벧엘과 몇 성읍들을 빼앗기게 되었다(대하 13:19). 그는 북 이스라엘의 배반을 꾸짖었으며, 위기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함을 받았다.(대하 13:4-12)


2-3. 아사(주전 911-870, 왕상 15:9-24, 대하 14-16장): 성공과 실수
  아사는 아비야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서 41년간을 통치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모든 우상을 제거하였다.

 가. 종교 개혁 운동(왕상 15:11-15, 대하 14:2-5, 15:8-18)
  그는 개혁 운동을 가장 가까운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우상 숭배를 하자 이를 꾸짖고 그녀의 태후의 위를 폐하였다. 그는 또한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불살랐으며, 열조의 모든 우상들과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제거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산당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는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히 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막아 주시고 나라에 평안을 주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에 감사하면서 나라를 견고케 하기 위하여 성곽을 만들며 성읍들을 건축했다. 그의 개혁 운동은 선지자 아사랴의 조언에 힘입은 바 크며, 그의 경건 운동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중에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지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사왕에게로 돌아왔다.(15:8-9)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회에 모여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였다.(15;13-15)

 나. 애굽 및 구스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대하 14:9-15)
  아사 왕은 41년간의 통치 기간에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르었다. 하나는 구스(에디오피아)사람 세라가 이끌던 애굽 및 구스군과의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왕인 바아사와의 전쟁이었다. 애굽(구스)과의 전쟁에 있어서 세라의 군대는 군사가 100만이요, 병거가 300승이었다. 이것은 아사왕의 군대 58만과 비교해 볼 때에 두 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그러나 아사 왕은 적군이 "마레사"까지 진입하게 되었을 때에 스바다 골짜기에 진을 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결국 아사 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에서 대승리를 했으며, 블레셋 땅인 그랄까지 쫓아가서 많은 전리품을 얻었고, 블레셋까지 점령하였다.(대하 14:13-15)

 다. 이스라엘과의 전쟁과 하나님의 책망(왕상 15:16-22, 대하 16:1-10)
  그러나 아사 왕은 세라의 군대를 이긴 후에 점차로 신앙이 식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아사 왕 제 16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공격해왔다. 바아사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인 베냐민 땅 "라마"를 점령하고, 거기에 성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유다와 연락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때에 아사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메섹(아람) 왕 벤하닷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다메섹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북방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결국 바아사는 철군을 하게되었다. 아사 왕은 라마를 건축하던 모든 건축재들을 모아서 "게바"와 "미스바"의 두 성을 건축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나니를 통하여 다메섹을 의지한 아사 왕을 책망하였을 때에 왕은 크게 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선지자 하나니는 만일 아사 왕이 아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했다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아람까지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사 왕은 그 후 2년 후에 병이 들어 죽었다.


B. 남북 평화 시기(왕상 16:21-왕하 8:15)

1. 남북 평화 시기의 북왕국 이스라엘(오므리-여호람)

* 오므리 왕가(B. C. 885-841)(왕상16:21-왕하 10:11)
 * 4대 44년간-남방 유다와 우호관계를 맺음
 * 북 이스라엘의 초기 50년간은 매우 불안하였다. 그러나 오므리 왕조가 들어섬으로 이스라엘은 안정세력을 찾게 되었고 유다와의 긴장도 해소되었다. 그러나 외부적인 안정과 반영과는 달리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는 암흑시대였다.

1-1. 오므리(주전 885-874)-12년-(왕상 16:21-28)
 * 세속적으로 강력한 국가였다
.
  - 북왕국의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김
  - 이때까지의 왕 중 가장 막강한 왕이었음.
  - 모압을 속국으로 삼음으로서 요단 동편의 남부를 다시 장악하게 됨.
 * 영적으로는 암흑의 시기였다.

  - 아들 아합을 이세벨과 결혼시킴
  - 성경은 그의 정치적 성공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고 그의 영적인 타락상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얼마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를 위하여 헌신하였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1-2. 아합(주전 874-853)-22년-(왕상 16:29-34, 17:1-22:40)
 * 요단 동편(요단 동편의 옥토와 왕의 대로) 점령을 위해 노력함
 
 - 이를 위해 다메섹(아람) 의 남하정책을 막아야만 하였는데, 아합은 북쪽의 베니게(두로와 시돈 지역)와 동맹관계를 맺 음으로서 다메섹(아람)을 막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 표시로 당시 베니게를 통치하던 시돈 사람 엣바알 왕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남쪽 유다의 힘을 빌리기 위하 여 자신의 딸(아달랴)을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에게 주었다.

 
* 왕후 이세벨은 바알에게 헌신한 여인이었다.

  - 그녀가 적극적으로 바알종교를 지원하게 되자,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바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분기점에 이르게 되었다.
  - 바알 종교는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 가나안의 우수한 문화를 형성시킨 신으로 동경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세벨의 바알 선교 정책은 가속화되었다.
  - 사마리아의 바알의 산당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음.
  - 아세라 목상을 만듦.

   <참고: 불의 선지자 엘리야>(왕상 17:-왕하 2:11-)-백성들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림

1) 길르앗에 거하는 디셉 사람
 - 3년반 동안의 가뭄 선포
 - 그릿 시냇가의 까마귀(왕상 17: 2-7)
 - 사르밧 과부(왕상 17:8-16)의 부양
 - 죽은 아들을 살림(왕상 17:17-24)

2) 바알의 선지자들을 상대로 850대 1로 싸워서 승리한 후에 그들을 처형함.

3) 엘리야와 하나님
 - 이세벨을 두려워하여 낙심한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지시를 받음
 - 다음 지도자 예고; 하사엘-예후-엘리사

4)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에게 저주를 선포함.(21:1-29)

5) 바알에게 가서 병이 낫겠느냐고 묻는 아하시야 왕에게 죽음을 선고함.

6) 엘리야와 불수레/ 엘리야가 요단강물을 가르고 동쪽으로 건너가서 하늘로 승천함./

7)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음.
* 아합은 상아궁을 짓고 사치한 생활을 하다가 아모스 선지자에게 공격을 받았다.
* 아합은 북쪽 아람왕 벤하닷과 싸워 두 차례 승리하여 아벡을 점령하였다(20:1-43).
* 그러나 그는 3년 후에 남쪽 도시 길르앗 라못을 점령하기 위해 미가야의 예언을 무시하고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아람을 공격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22:1-40)
 

1-3. 아하시야(주전 853-852)-2년-(22:51-53, 왕하 1:1-18)
 * 아합과 이세벨의 맏아들
 * 그의 아버지와 같이 죄를 범하고 바알을 섬김
 *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궁전에서 떨어져 병들어 치유를 위해 바알세붑에게 물어보았다가 엘리야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음(왕하 1:1-18)

1-4. 요람(여호람)(주전 852-840)-12년-(왕하 3:-8:)
 * 아합과 이세벨의 막내 아들
 * 바알의 주상을 제거함으로 아비와 같이 하지는 않았으나, 여로보 암의 길을 따르는 죄를 범하였다(왕하 3:1-3).
 * 여호사밧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모압을 침. 그러나 물이 갈하게 되었을 때에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으로(여호사밧 때문에) 물을 얻고 전쟁에서 이김.(왕하 3:4-27)
 * 나아만이 문둥병이 낫고자 하여 왔을 때에 고쳐 보냄(5:-)
 * 엘리사가 아람의 침입계획을 알아내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군대를 파송했으나 전멸함.
 * 그 후에 아람이 다시 침공하여 사마리아가 극한 기아에 시달렸으나 하나님께서 네 문둥병자를 통해 사마리아를 기근으로부터 구출하심.(6:-7:)
 * 아람 왕 벤하닷이 죽고 하사엘이 왕이 되었을 때에 갈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해 치료하던 중 군대장관 예후에게 피살당하게 되었다.
 * 그 후에 에돔과 립나가 다시 그 수하에서 떠나게 됨.
 

               <참고: 갑절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왕하 2:12-13:21)

1) 부유한 농가의 출신(왕상 19;19)
2) 여호람-요아스 때까지 약 50년간 활동함
3) 엘리야처럼 극한 투쟁이나 도망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종종 왕들과의 교제도 있었다.
4) 엘리야가 길갈과 벧엘과 그리고 여리고에 세운 선지 학교를 더욱 발전시켰다.
5) 수많은 이적들을 행함
 * 여리고의 물이 나빠서 토산물이 설익은 채 떨어지자 소금을 물 근원에 넣어 고침(2:19-22)  *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 42명이 암콤에게 찢겨죽음/"대머리여 올라가라!"/승천하라는 말  
 * 빈 개천에 물을 채워서 모압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함(왕하 3장)
 * 가난한 선지자의 가족을 위해 빈 그릇에 기름이 차게 함(4:1-7)
 * 거처를 마련해 준 수넴 여인에게 아기를 낳게하고, 죽은 아기를 살려줌(4:18-37)
6) 길갈 에서 독 있는 국을 깨끗게 함(왕한 4:38-41)
7)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100명을 먹임(왕하 4:42-44)
8) 나아만 장군의 문둥 병을 고침(왕하 5:1-19)
9) 재물을 탐내는 게하시에게 문둥병을 예언함(5:15-27)
10) 잃어버린 도끼 머리를 되찾음(왕하 6:1-7)
11) 수리아의 은밀한 전쟁계획을 폭로함(6:8-12)
12) 게하시의 눈을 열어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하고 수리아 군대를 눈멀게 함(6:15-23)
13) 사마리아가 기근에서 해방될 것을 예언함(왕하 7장)
14) 수리아 왕 벤하닷의 죽음과 하사엘의 수리아 통치를 예언함(왕하 8:7-15)
15) 임종시 이스라엘이 수리아를 세 번 물리칠 것을 예언함(왕하 13:14-19)
16) 죽은지 수년이 지난 엘리사의 시신으로 죽은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남(왕하 13:20-21)


2. 남북 평화 시기의 남왕국 유다(여호사밧-아달랴)
 

2-1. 여호사밧(주전 870-845, 왕상 22:41-50, 대하 17-20장): 경건함과 잘못된 화해정책

 가. 종교 개혁 운동
  여호사밧은 아사의 뒤를 이어 25년간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는 왕이 된 처음부터 부왕 아사가 시작한 개혁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경건한 인물로서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려고 하였다.(대하 17:6, 19:3) 그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하고(대하 17:6) 또 부왕이 미처 계속하지 못한 "남색하는 자"를 붸아 내었다(왕상 22:46). 그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뽑고 또 방백들을 뽑아 각 성읍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책을 가르치게 하였다(대하17:7-9).

 나. 군대 조직과 전쟁에서의 승리
  여호사밧의 군대는 5개의 군단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유다 지파에서 3개의 군단, 베냐민에서 2개의 군단이 조직되어 그 군대의 수는 100만이 넘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을 방비하기 위하여 성읍들을 더욱 견고히 하였으며, 각 성읍마다 군대를 주둔시켰고,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다.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에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하시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왕은 특별히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여 찬송을 부르게 하였다. 이 전쟁은 대승리로 끝이 나게 되어 그들은 전리품을 나르는데 3일이 걸렸다. 여호사밧은 그밖에도 국고성을 건축하는 등의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이처럼 나라가 튼튼해지고 견고해 졌을 때에 그는 북방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었다.

 다. 이스라엘과의 동맹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화친을 이루기 위하여 아합 왕의 딸 아달랴를 자부로 맞았다.(왕하 8:18) 이로 인하여 그의 아들 여호람은 아달랴로부터 영향을 받아 종교적으로 크게 부패해졌다.(대하 21:6)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합작하여 에시온게벨에서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배를 짓고 다시스와의 무역을 통하여 오빌의 금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선지자 엘리에셀의 예언대로 그 배가 파선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왕상 9:26-28)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군사 동맹을 맺고, 아합의 요청을 받아 아람의 벤하닷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은 전사하였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건지게 되었다.(왕상 22:29-33, 대하 18:29-34)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또다시 아합의 아들 여호람의 청원을 따라 모압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은 7일동안 물을 얻지 못하여 군사와 가축이 다 죽게 되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모압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왕하 3:15-27). 그러나 선지자는 여호사밧이 이스라엘과 함께 참전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책망하였다.(대하 19:2)


 2-2. 여호람(주전 848-841년. 왕하 8:16-24, 대하 21장)

  아달랴의 섭정. 여호사밧의 뒤를 이은 여호람 왕의 유다 통치의 8년간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는 아사 왕이나 여호사밧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아합 왕의 뒤를 따랐는 데, 그것은 바로 그 아내인 아달랴 때문이었다(대하 21:6, 왕하 8:18). 만일 하나님께서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완전히 멸망당했을 것이다.(대하 21:7) 그는 왕이 된 후에 아달랴를 반대하는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였으며, 이스라엘과 같이 우상종교 정책을 썼다. 엘리야는 그의 가족들과 모든 재물을 빼앗길 것이며, 그의 창자에 중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 나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대하 22:11-15)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군대를 일으켜 유다를 쳐서 왕궁의 모든 재물과 아들들과 아내를 탈취하였으며, 오직 여호아하스만이 남고 여호람 자신은 예언대로 중병이 들어 2년 후에 죽었다(대하 21:16-20). 여호람 통치 기간 중에 국세는 심히 약해져서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유다를 침략하였으며, 에돔도 유다를 배반하여 독립하였고, 립나도 유다를 배반하여 그 수하에서 벗어났다.(대하 21:8-9, 왕하 8:20-22)


 
2-3. 아하시야(주전 841, 왕하 8:25-29, 9:27-29, 대하 22:1-9): 아달랴의 섭정-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공으로 겨우 여호아하스만이 살아 남아 여호람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왕하 21:17), 그는 왕이 된지 1년도 못되어 죽었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어머니인 아달랴의 교도를 따라 아합의 길로 행하였고, 북방 이스라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했다. 그는 북방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이 아람의 하사엘과의 전쟁이 있었을 때에 그를 도우려 길르앗 라못으로 갔다. 그 전쟁에서 요람 왕은 부상을 입고 이스르엘로 돌아와 있었으며, 아하시야가 그의 병 문안 차 갔다가 때마침 반란을 일으킨 예후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어 그의 통치가 끝나게 되었다. 이때에 아하시야는 자기의 부하들까지 잃게되어 왕위를 지킬 힘을 잃고 말았다.


 
2-4. 아합의 딸 아달랴의 섭정(주전 841-835년, 왕하 11:1-6, 대하 22:10-23:15)
  아달랴는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왕족들의 씨를 모두 죽여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때에 여호람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어린 아들인 요아스를 간신히 피신시켜서 6년 동안 숨겨 키웠다. 아달랴는 그 어머니 이세벨의 뒤를 따라 남방 유다에서 피의 숙청을 자행하였다. 그는 바알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려 하였다. 만일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이 없었더라면 유다는 다시 한 번 영적 암흑기를 맞을 뻔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달랴는 여호야다의 반정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칼에 죽었다(대하 23:21). 그러나 어린 요아스가 왕위에 오름으로 6년간의 암흑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북방 이스라엘과의 긴밀한 관계도 끊어지게 되었으며, 얼마동안 두 관계는 평행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C. 남북 평행 시대(왕하 8:16-15:12)

1. 남북 평행 시대의 북왕국 이스라엘(예후-호세아)

1-1. 예후 왕가(B. C. 842-753)-5대 89년간-(왕하 9:)
  오므리 왕가를 멸하고 왕이 된 예후 왕가는 이스라엘 왕가 중에 가장 강력한 정권이었다. 그러나 예후 왕가는 아람의 침입으로 많은 것을 잃었으며, 종교적으로 바알을 반대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는 못하였다.

 가. 예후(주전 841-814)-28년-다메섹 및 앗수르의 침입-(왕하 9:-10:)
 * 엘리사가 보낸 사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혁명을 일으켜 치료차 이스르엘에 있던 요람을 죽였으며, 병문안차 요람을 방문한 아하시야도 므깃도에서 죽었다. 그리고 즉시 이세벨을 죽임으로 엘리야의 예언을 모두 응하게 하였다(9:-)

 * 그리고나서 그는 사마리아의 정치적 지도자들에게 아합의 70인 아들 중 한 명을 내세워 싸 우게 하라고 하였으나, 예후를 두려워한 그들은 아합의 아들 70인을 모두 죽여 예후에게 그 머리를 보내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전국에 있는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하였다. 하나님께 서는 이 일을 인하여 그를 4대동안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해셨다. 그러나 그도 역시 하나님 의 율법을 전심으로 섬기지는 않았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이세벨과 유다 왕 아하시야와 그 일가를 죽임으로 베니게와 남 유다와 원수가 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는 혼자 힘으로 아람과 모든 주위 나라들과 싸워야 할 입장이 되었다.

 *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람왕 하사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치시기 시작하셨고, 예후는 죽게됨(10:-)


 나. 여호아하스(주전 814-798)-16년-구원자를 만남-(13:1-9)

 * 예후의 아들: 그의 군대가 아람의 하사엘에게 공격을 당하여 거의 전멸되었을 때에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였으며,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일으키셔서 아람을 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

 * 그러나 그가 계속하여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두었으므로, 하나님은 아람을 통해 그 나라를 치게 하셨고, 극히 미약한 군대만 남겨두었다.


 다. 요아스(여호아스)(주전 798-782)-16년-국세를 회복함-(13장)

 * 여로보암의 길을 좆아 범죄를 함.
 * 병상에 누운 엘리사를 찾아가 아람에게 세 번 이길 것을 예고받고 아람을 쳐 성을 빼앗음.
 * 유다왕 아마샤를 치고 예루살렘의 성벽 일부를 무너뜨리고. 성전과 궁궐의 보물들도 빼앗았 다. 이때 이후 남쪽 유다는 북쪽 이스라엘에게 완전한 예속을 당하게 되었다.


 라. 여로보암 2세(주전 793-753)-40년-이스라엘을 부강케 함-(14:23-29)

 * 북왕국 왕 중 최장기간 통치함/ 북왕국 왕 중에서 가장 막강한 왕중에 하나.
 * 요아스와 여로보암 2세는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는 아니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요나의 에언을 성취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로보암 2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상실한 영토 중 상당 부분을 회복하게 하셨다."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솔로몬 때의 영토 회복)
 * 아람을 속국으로 삼고 요단 동편의 모든 영토를 정복(아람이 앗수르의 공격으로 약해졌으며, 앗수르도 북방 민족을 막기에 골몰하였고 연약한 지도자들이 왕위에 있었다.)
 *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더욱 겸손해야 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부요해지면서 부패하게 됨. 바로 이때에 이들을 향해 메시지를 던진 사람들이 바로 호세아와 아모스였다.


 마. 스가랴(주전 753년)-6개월-(15:8-12)

 * 예후의 4대손, 예후 왕조의 4번째 왕.
 * 살룸이라는 폭도에게 피살당함. 이리하여 하나님이 예후에게 내린 예언이 성취됨.(왕하 10:30/ 14:29/ 15:8-12)


 바. 살룸(주전 752)-1개월-(15:13-16)

 * 스가랴가 살룸에게 죽으면서 예후왕가와 함께 이스라엘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 므나헴이라는 잔인한 병사에게 살해됨.


2-2. 므나헴 왕가(B. C. 752-742)-10년-(15:17-26)

 가. 므나헴(주전 752-742)-10년(15:17-22)
 * 예후 왕가의 마지막 왕이었던 스가랴의 군대장관으로서 예후 왕가의 스가랴를 죽인 살룸을 물리치고 왕이됨. 그러나 이때에는 앗수르가 다시 강력한 세력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의 침공 때에 은 일천 달란트로 그를 매수하였으나,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 꼭두각시가 되기에 이르렀다.


 나. 브가히야(주전 742-740)-2년-혁명으로 죽음-(15:23-26)

 * 므나헴의 아들, 군대장관 베가에게 피살됨.


 다. 베가(B. C. 740-732)-20년-앗수르에 굴복함-(15:27-16:20)

 * 브가히야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됨. 여로보암의 죄를 좆음.
 * 아람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치려했으나 유다 왕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원병을 요청하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이스라엘의 북부와 동부를 공격하고, 백성을 앗수르로 잡아감.
 * 호세아에게 피살당함.- 그 이후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완전히 점령되는 상태가 됨


 라. 호세아(B. C. 732-721)

 *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처음 9년 동안은 앗수르왕 살만에셀의 공격을 받고 그에게 굴복하여 조공을 드렸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애굽과 연합하였다가 호세아 9 년에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다.

@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왕하 17:7-18)
1) 우상을 섬기고 이방인의 규례를 따름
2) 여로보암의 죄악을 좆음.
3) 하나님을 배반하고 산당을 세우고 산과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움.
4) 산당에서 분향을 함
5)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함
6) 사술과 복술을 행함
7) 선지자들의 전한 말을 듣지 않음-하나님을 배반하고 모세가 준 규례를 어김.

@ 종교 혼합주의와 혼혈족 사마리아인의 탄생(17:24-41)
  앗수르는 이스라엘에 수많은 이방인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이는 혼혈 족으로 만들어 앗수르에 대항하려는 혁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종교의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방 신과 여호와와를 함께 섬기는 혼합종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아있던 유대인들이 이주해 온 이방인들과 결혼을 함으로 하나의 혼혈족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2. 남북 평행 시대의 남왕국 유다(요아-아하스)

2-1. 요아스(주전 835-796년, 왕하 11:4-12:36, 대하 23:1-24:27):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

 가. 반정의 성공과 왕의 즉위(대하 23:1-21, 왕하 11:4-21)
  여호야다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여호와의 백성이 되어 바알들을 깨뜨리고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였다.

 나. 요아스 왕의 성전 수리(대하 24:4-14, 왕하 12:4-16)
  여러 해 후에 이제 요시야 왕은 스스로 정책을 결정할 때가 되었을 때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할 계획을 세웠다. 왜냐하면 아달랴는 모든 성전을 파괴하고 성물들을 바알에게 드렸기 때문이었다. 요시야는 여호야다에게 명하여 성전을 수리할 헌금을 모으게 하였다. 그리하여 성전이 완성되었으며 모든 성물들은 옛날같이 정돈이 되었다. 매일 드리는 번제도 회복되게 되었으며, 전국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다. 요아스왕의 타락과 징벌(대하 24:15-27, 왕하 12:17-21)
  그러나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사정은 급변하였다. 여호아댜가 죽자 유다의 방백들은 아세라 목상을 세우며 섬길 것을 청원하였고 요시아는 이를 허락하였으며, 이를 경고하는 선지자 스가랴를 돌로 쳐죽였다(대하 24:20, 22). 스가랴는 죽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신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고, 그 기도대로 스가랴가 죽은 후 1년 뒤에 다메섹 왕 하사엘이 유다를 쳤다. 이때에 요아스는 성전의 모든 금을 다 거두어 아람에게 조공을 드리고 하사엘을 떠나가게 하였으나, 이때에 많은 방백들이 죽었고 요시야 자신도 크게 부상을 입었다.(대하 24:25) 그 후 그는 부하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는데 그의 통치 기간은 40년이었다.


2-2. 아마샤(주전 796-767년, 대하 25장, 왕하 14:1-20): 승리와 실패

  요시아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아마샤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부왕의 죽음 이후 약해 졌던 나라를 든든하게 하였으며,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처형하였다(대하 25:3). 그리고 그는 에돔을 공격하기 위하여 30만의 군대를 조직하고, 또 이스라엘에서 10만의 용병을 고용했다(대하 25:5,6). 그러나 한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이 용병을 원하시지 않는다고 하여 다시 돌려보냈다. 이 용병들은 화가 나서 유다의 성읍들을 공격하여 약 3천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하였다(대하 25:13). 그러나 아마샤 왕은 계획대로 에돔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개선하여 돌아올 때 에돔의 우상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경배하며 분향하였다(대하 25:14).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어찌 자기도 구원하지 못한 나라의 우상을 섬기느냐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아마샤는 선지자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25:15-16). 그 후에 아마샤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며, 선지자의 예언대로 크게 패하였다. 마침내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전의 모든 기구도 약탈되었으며 아마샤 왕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역대기의 기자는 이러한 사실이 아마샤가 에돔의 신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대하 25:20) 그는 마침내 자기 백성들의 모반을 받아 피살되어 재위 29년만에 끝나게되었고, 그 아들 웃시야가 대신 왕이 되었다.


2-3. 웃시야(주전 767-739년, 대하 26장, 왕상 14:21-22): 유다 왕국을 부강케 함

  아마샤 왕의 아들 웃시야(또는 아사랴)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을 다스렸다. 그는 유다의 열왕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유능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는 북쪽 이스라엘을 크게 부강하게 하였던 여러보암 2세와 대등한 인물이었다. 그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여로보암이 차지했던 위치를 대신 차지하였다.

 가. 영토의 확장
  그는 부왕 아마샤가 정복한 에돔을 계속 주관하고 북부 연안에 엘랏 엘롯 항구를 건축하여 솔로몬 때와 같이 무역정책에 힘을 쓰면서 남방을 제압했고, 또 동쪽으로는 암몬을 다스리며 그들에게서 조공을 받았고, 서쪽으로는 블레셋을 쳐서 여러 성읍을 정복했다. ?리고 애굽 변방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예루살렘의 성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나. 산업정책
  그는 엘랏을 건설하여 홍해를 통한 아라비아의 무역에 힘쓸 뿐만 아니라, 거친 땅에는 물웅덩이를 많이 파서 목축에 힘을 썼고, 산과 밭에는 농부들과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어 농업에 힘을 썼다.

 다. 국방과 군사정책
  그는 지금까지의 군대의 조직을 재편성하여 군대장관 하나냐 밑에 족장들 중 용사 2,600명을 뽑고 그 수하 30만 7천 5백 명의 정예 병을 두어 훈련시켰다.(대하 26:14-15) 당시의 무기인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 맷돌까지도 풍부하게 준비하였고, 성 주위에는 돌을 쏘는 장치를 만들었다.(대하 26:14-15) 그가 이렇게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북방의 다메섹은 신흥 앗수르에게 꺾여 약해져 있었고, 또 앗수르마저 북방의 "아라랏"의 공격을 받아 그것을 방비하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북방의 여로보암 2세는 구력을 키워 중동 아세아의 가장 강력한 나라로 등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가 죽게되어 이스라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유다왕 웃시야가 강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라. 그의 교만과 실패
  유다 왕국이 강하여지매 백성들을 물질주의로 기울어져 한없이 사치해졌고(사 3:18-23), 웃시야 왕 또한 교만해졌다(대하 26:16).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제사장의 직분마저도 무시하게 되었다.(대하 26:21-23) 그는 하나님의 징계로 문둥병이 들어 별궁에 살면서 그 아들 요담에게 왕국을 관리하게 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후에 결국 문둥병으로 죽게되었다(대하 26:5). 그도 역시 하나님을 구하는 동안에는 형통하였으나, 하나님을 버리고 교만해져서 세상의 번영만 생각하게 될 때에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다.


2-4. 요담(주전 739-731년, 대하 27장, 왕하 15:32-38): 유다의 부패를 다스리지 못함

  요담 왕은 16년간 유다를 치리 했으나(대하 27:1) 그것은 부왕 웃시야의 섭정 밑에서의 기간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는 이같이 부왕의 생존시에 이미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는 부왕의 신앙을 본받아서 비교적 신앙적으로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부왕에게서 계승한 많은 건축 공사도 완성시켰으며(대하 27:3-4, 왕하 15:3), 부왕이 남겨준 군사력도 계속 유지하였다. 이때 암몬이 그를 배반하려 했으나, 그는 암몬을 정복함으로 계속 조공을 드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부유한 틈을 타서 사치해졌으며 점점 더 타락해갔다. 그리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그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였다. 이때에 앗수르에서는 새로운 전략가요 정치가인 디글랏 빌레셀 3세(주전 745-727년)의 세력이 커져 가는 시기였으며, 당시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의 세력권 안에 들어 있었다.(왕하 15:19) 요담 왕 말년에 다메섹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는 강성해져 가는 앗수르를 공격하고자 먼저 그 동맹자인 유다 왕 요담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하였다.(왕하 15:37)


2-5. 아하스(주전 731-715년, 대하 28장, 왕하 16:11): 친 앗수르 정책

  아하스는 왕위에 올라 16년간을 통치하였으나, 이 기간에 유다 왕국은 심히 약해졌다. 북쪽에서는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압력이 계속되었고, 서쪽과 남쪽에서는 블레셋과 에돔의 공격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때 아하스왕은 오직 앗수르만을 의지하는 친 앗수르 정책을 견지하였으나, 앗수르는 유다를 돕기보다 유다마저 괴롭게 하였다.(대하 28:20-21)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정책의 잘못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 베가와 르신의 공격(대하 28:5-21, 왕하 16:5-9)
  친 앗수르의 노선을 걷는 아하스 왕을 다메섹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공격을 해왔다(왕하 16;5, 대하 27:5,6). 이것은 앗수르를 대항하는 연합전선에 유다를 끌어들이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두 연합국의 공격으로 유다는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이때 아하스는 매우 당황하여 앗수르만을 의지하였다. 이 사실을 안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였으나 아하스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이사야는 세내 온 삭도인 앗수르가 결국 유다 백성의 발 털도 밀게될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이스라엘과 다메섹의 연합군은 앗수르의 개입으로 물러가기는 했으나, 사실상 가장 큰 적은 이스라엘과 다메섹이 아니라 앗수르임을 아하스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나. 에돔과 블레셋의 반격(대하 28:16-21)
  아하스의 세력이 약해지자 에돔은 유다를 배반하고 공격해왔다. 이때 유다의 많은 백성들이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후 또 블레셋이 침략해왔다. 그리고 유다의 여러 성읍들을 점령하였다. 이처럼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을 받은 아하스 왕은 또 다시 앗수르의 디글랏벨레셋에게 많은 재물을 보내며 구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때는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앗수르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북쪽으로는 다메섹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쪽의 에돔까지 그 힘을 뻗치게 되었고, 유다도 앗수르의 손에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된 유다는 사면초가의 연약한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다. 아하스의 종교적 타락(대하 28:1-4, 22-25, 왕하 16:2-4, 10-18)
  아하스는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 하나님을 분노케 한 자였다. 아하스는 모든 우상을 다시 섬겼으며, 바알 우상을 다시 부어만들었고, 어린 자녀를 불살라 드리는 몰록 종교를 따랐고, 산당에서 우상을 섬기는 일을 자행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만을 의지하였다. 그리고 다메섹의 제단 모양을 본떠다가 예루살렘에 두고 제사를 드렸으며, 성전의 놋 제단을 그 우상의 제단 북편에 두었으며, 성전의 기명들을 뜯어내고 성전을 폐쇄해 버렸다.(대하 28:24)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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