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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왕기(4): 분열왕국 이야기(1)(12-17장)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15:09

열왕기(4): 분열왕국 이야기(1)(12-17장)


1. 특이한 공관 역사

 1-1. 지그재그식 배열
  통일 왕정인 솔로몬 시대의 내러티브 구조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비교적 간단하다. 그러나 왕국이 분열한 후 유다와 이스라엘의 각각의 상황을 공관적으로 살필 때부터는 그 구조가 복잡해진다. 열왕기 기자는 두 왕국의 왕들을 철저하게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있지 않다. 열왕기 기자는 먼저 즉위한 한 왕의 통치의 전체 모습을 살펴본 다음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 왕이 통치할 때에 다른 왕국을 통치했던 왕들의 통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여로보암은 주전 930-909년까지 21년간 북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남 유다에는 르호보암(주전 930-913년), 아비얌(주전 913-910년), 아사(주전 910-869년)의 세 왕이 통치를 했다. 열왕기 기자는 (왕상 12:1)에서 시작한 여로보암의 이야기는 (왕상 14:20)에 가서야 끝이 난다. 그 다음에 (왕상 14:21)에서 22년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여로보암과 같은 해에 등극한 남 유다 왕국의 르호보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17년밖에 통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사는 (왕상 14:31)로 끝이 난다. 그리고 나서 열왕기 기자는 유다 왕국의 아비얌이 통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왕상 15:1-8). 그의 치세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치세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후에 계속해서 남방 유다 왕 아사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가 즉위한 해는 여로보암 21년으로 여로보암이 사망하기 1년 전이었다. 그러나 열왕기 기자는 아사가 즉위한 때가 여로보암의 통치 기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왕상 15:9-24). 따라서 아사도 41년이란 긴 기간 동안 통치를 했지만, 아사가 죽을 때까지 북방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아사의 통치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사의 통치에 대한 기록이 끝이 나면, 다시 4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인 나답, 바아사, 시므리, 그리고 오므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2. 대조와 비교
  이러한 열왕기의 구조를 알게 되면 우리는 열왕기를 읽을 때에 같은 시대의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비교해가면서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열왕기 기자는 남방 유다의 선한 왕 아사와 여호사밧(15:9-24)의 이야기를 읽은 후에, 같은 시대의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15:25-22:40)을 읽도록 배열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남왕국 유다의 선한 왕들의 이야기는 같은 시대의 북 왕국 이스라엘 왕들의 행동을 평가하는 기준의 역할을 한다.

 

유다왕국(왕상 15:9-24)

이스라엘왕국(왕상 15:25-22:40)

왕들

르호보암, 아비얌, 아사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디브니, 오므리, 아합

왕조

다윗왕조-안정적

5개의 왕조(여로보암,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매우 불안정)

계승

평화적 계승

2번의 살해와 왕조 교체, 1번의 자살(7일천하), 혁명과 피의 숙청

평가

르호보암, 아비얌(부정적)
아사(조건적 긍정: 선한왕)

6명 모두 부정적(여호와보시기에 악함), 1명(디브니)은 평가조차 없음

  열왕기 기자는 이와 같이 동 시대의 유다 왕들과 이스라엘 왕들을 지그재그식으로 배치하여 서로 비교해서면서 함께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열왕기 기자는 이러한 배열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 기사를 유다 왕들의 배경 아래에서 전개하고 있다. 이의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7명의 왕들(왕상 15:25-22:40)은 바로 직전의 유다 왕들인 르호보암(14:21-31), 아비얌(15:1-8), 아사의 이야기(15:9-24)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세 왕은 모두 다윗의 후손으로서 한 왕조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북방 왕들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타나는 아사왕이 비록 조건적이긴 하지만, 선한 왕으로 칭찬을 받은 왕이라는 사실이다-"아사가 그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왕상 15:11,13-14). 그 후에 이어지는 북방 이스라엘의 7왕들의 이야기는 바로 이 선한 아사 왕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왕들은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남방 유다가 왕조의 안정성을 보인 것과는 반대로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에서는 왕조의 안정성이 사라진다. 나답과 엘라가 살해를 당하고, 시므리는 7일 동안만 왕노릇하였으며, 디브니는 열왕기 저자의 평가의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로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결국 24년만에 왕조가 4번 바뀌는 정치적 불안정을 겪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이스라엘 왕국은 "긴 통치와 짧은 통치의 병치"라는 패턴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바아사의 22년간의 긴 통치(주전 908-886녀니 왕상 16:8-14), 엘라의 1년간의 짧은 통치(주전 886-885년; 왕상 16:8-14), 아합의 21년간의 긴 통치(주전 874-853년; 16:29-22:40)와 그의 아들 아하시야의 1년간의 짧은 통치(주전 853-852년; 왕상 22:51-왕하 1:18)의 반복을 주목해야 한다.

  게다가 북방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선지자들이 군사-정치 지도자들을 부추겨서 왕을 살해하고 왕권을 획득할 것을 획책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엘리사가 예후를 움직여서 아합 왕을 살해한 것과, 아히야 선지자가 여로보암 1세에게 하나님께서 열 지파를 떼어 주실 것을 예언한 것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그러므로 북방 왕들은 이런 저런 적들과 싸우느라 제대로 통치를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스라엘 왕들은 모두 악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또 다수의 왕들이 살해되거나 자살하는 등의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다. 이러한 점은 이스라엘 왕국이 여호와에 의해 진멸될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해주고 있다.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일을 그치지 않다가, 유다 왕국보다 150년 먼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남방 유다 왕국은 다윗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왕조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남 유다 왕국의 왕들의 이야기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왕들의 배도를 강하게 드러내는 배경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거꾸로 바꾸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열왕기는 북방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해서 남방 유다 왕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예루 왕조가 5대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일 때에, 남방 유다는 선한 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는(요아스와 아마사) 살해되고, 이사랴는 문둥병에 걸려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북방 예후 왕조의 기사에 비추어서 동시대의 남방 유다 왕들의 행동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열왕기 기자는 절묘한 지그대그식 배열을 통해서 지루할 수 있는 왕들의 이야기를 비교, 대조하며 읽을 수 있는 재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겹치게 만드는 패턴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스토리를 독자들이 풀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고 있다. 또한 열왕기 기자는 한 나라 왕을 언급할 때에, 다른 나라의 왕을 함께 언급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가 두 민족의 역사가 아닌 한 민족의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2. 이야기 구조

  열왕기의 구조 중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그것은 열왕기 기자가 각 왕의 통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면서, 각 왕의 내러티브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 "등극 공식"과 "죽음 공식"이라는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2-1. 등극과 죽음 공식
  열왕기 기자가 각 왕의 스토리에 사용한 등극 공식은 다음과 같다.

등극공식

죽음공식

1. 동시대의 상대방 왕 언급(호세아까지)
2. 등극시의 나이(유다만)
3. 통치기간
4. 수도
5. 왕후의 이름(유다만)
6. 신학적 평가

1. 출처

2. 죽음과 장례

3. 왕의 계승

  유다 왕은 이스라엘 왕과 비교하여 볼 때에 두 개의 공식(왕의 나이와 모친의 이름)이 더 첨가되고 있다. 유다 왕의 경우는 신학적 평가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왕의 경우에는 항상 악을 행하였다고 되어 있다.

 2-2. 실제의 예

 * 이스라엘 왕의 공식

  1. 등극 공식
 
 유다 왕 .... 제 ....년에 ....의 아들 ....가 디르사/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2. 죽음 공식
  
....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엿느냐? ....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유다 왕의 공식

  1. 등극 공식
  
이스라엘 왕 ....의 아들 ....년에 유다 왕 ....의 아들 ....가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라. ....사람이더라. 아무개가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게(혹은 악을) 행하였으니....

  2. 죽음 공식
  .
...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 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유다 왕의 등극 공식에는 요람과 아하스의 두 경우를 제외하고는, 왕의 모친의 이름과 출신이 언급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학자는 다윗 왕가와 결혼하게 된 명망있는 가문들을 언급하고, 황후가 된 여인들에게 최고의 영예와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보다는 다윗왕조의 혈통과 연속성에 대한 관신 때문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솔로몬만이 이스라엘 밖의 여자와 결혼한 유일한 유다 왕으로 제시되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3. 시작과 종결의 리듬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왕의 등극과 죽음의 공식은 각 왕의 이야기이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다. 이러한 공식은 독자들에게 열왕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는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솔로몬의 기사를 읽을 때에 솔로몬의 등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왕상 1장)부터 솔로몬의 죽음이 언급되는 (왕상 11:43)까지를 한 단위로 읽어야 한다. 아합 의 경우에 등극 공식은 (왕상 16:29-31)에 나오며, 죽음 공식은 (왕상 22:39-40)에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아합의 이야기를 읽을 때에 (왕상 16:29-22:40)을 한 단위로 묶어서 읽어야 한다. 이러한 공식들은 열왕기의 이야기를 각 왕에 대해 여유 있고 숙과는 마음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열왕기 기자는 각 왕들의 이야기 중간에 또다른 이야기를 삽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합 왕의 이야기 안에 엘리야 스토리가 삽입되어 있으며(왕상 17-19장), 여호람의 이야기 안에는 엘리사의 스토리가 삽입되어 있다(왕하 3:1-8:15). 이러한 스토리들은 진행을 느리게 만들면서 독자로 하여금 스토리 안에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있다. 특히 오므리 왕가의 경우에는 그 안에 들어있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소토리가 무려 19장이나 할애되어 있다. 솔로몬 이야기가 모두 11장인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열왕기 기자는 이러한 방법으로 바알 숭배를 왕가의 정책으로 밀어 붙인 오므리 왕가와, 여호와의 선지자와의 관계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이야기는 열왕기의 중심 부분에 위치하면서 "누가 참 신인가?"에 대한 문제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다음과 같은 엘리야의 외침은 열왕기에서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좆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좆을지니라(왕상 18;21)." 결국 열왕기 기자는 이러한 배열 구조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인간의 주도 세력인 왕들과, 여호와의 지배를 받는 선지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대립 구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4. 평가적 관심

  열왕기 기자는 등극 공식에 나타나는 신학적 평가를 통해 두 왕국의 왕들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려는 관심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 역사는 소위 "역사를 위한 역사, 또는 냉정한 역사는 아니라, 신학적 역사이다. 이 점은 메소포타미아에서도(아마도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발견되는 공식적 궁중 기록들이 열왕기에서 보는 왕들에 대한 종교적 평가는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에 매우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종교적 평가들은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이나 유다 왕 역대 지략에는 없었던 내용을 열왕기 기자가 직접 평가한 것인지도 모른다.

 4-1. 여로보암의 죄-이스라엘 왕의 기준
  등극 공식에 나타나는 평가는 매우 도식적이다. 북방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여로보암의 죄"를 지었는가의 여부로, 남방 유다의 경우에는 "다윗의 길"을 따랐는지의 여부로 간단하게 평가하고 잇다.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에서는 전체 20명의 왕중에서 그 어떤 왕도 열왕기 기자에 의해 선하다는 판단을 듣지 못했다. 특히 예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직 예후만이 가장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왕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명으로 엘리사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아합의 전체 식구를 멸절하라는 명령도 받았다(왕하 10:30).

왕조

평가공식

비고

여로보암

여로보암1세

 

 

나답

여로보암의 죄

살해됨

바아사

바아사

여로보암의 죄

 

엘라

함축

살해됨

시므리

시므리

여로보암의 죄

자살-7일천하

디브니

디브니

평가없음

 

오므리

오므리

여로보암의 죄

 

아합

여로보암의 죄, 바알숭배 후원

 

아하시야

여로보암의 죄

 

여호람

여로보암의 죄

살해됨

예후

예후

여호와보시기에 정직, 여로보암의 죄

 

여호아하스

여로보암의 죄

 

요아스

여로보암의 죄

 

여로모암2세

여로보암의 죄

 

스가랴

여로보암의 죄

호의적인 평가

살룸

살룸

평가없음

살해됨

므나헴

므나헴

여로보암의 죄

 

브가히야

여로보암의 죄

살해됨

베가

베가

여로보암의 죄

살해됨

호세아

호세아

여호와께 악행

 

  그러면 도대체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인가?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왕상12:28-33)에 나온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을 제사장을 삼았으며, 7월15일이 아닌, 8월15일로 절기를 바꾸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로보암 왕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신명기 율법의 대부분의 원리를 깨뜨렸다는 인상을 받게된다. 1) 중앙성소 외에서의 제사(신 12:5-7), 2) 형상만들기(신 9:8-21), 3) 비 레위 계열의 제사장(신 18:1-8), 4) 비레위 계열의 제사장(신 18:1-8). 4) 마음대로 정한 달에 잘막절을 지키게 함. 게다가 두 금송아지를 만들게 한 일이나, 이를 가리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들"이라고 복수 동사를 사용한 것을 보면 여로보암이 다신론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나레이터는 분명히 여로보암의 제사는 여호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에 대한 제사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더욱이 오래 된 산당 제도도 여로보암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왕하 10:31).

  일부 역사 지향적인 학자들은 여로보암은 단지 이스라엘의 고대 예배 전승을 회복하려는 것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는 법궤가 여호와의 보좌인 것처럼, 단지 그 발등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금송아지를 세운 단과 브엘세바는 왕국의 남과 북의 끝이기 때문에 이 곳에 금송아지를 세운 일은 다신론적인 배도의 행위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예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열왕기 전체에 있어서 여로보암의 죄는 후대의 죄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여로보암의 죄는 모든 북방 이스라엘 왕들을 비난할 때에 기준이 되고 있으며, 요시아 왕에 의해서만 이 죄가 해소되고 원상태로 돌아온다(13:2, 왕하 23:15-20).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왕하 23:15)." 열왕기에 있어서 여로보암의 행동은 가장 악한 죄로서, 여로보암은 선한 왕의 모형인 요시야와 대조되는 악한 왕의 모형이었다. 금송아지는 순진한 이들에게 곡해될 소지가 너무 많이 있었으며,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무서운 신학적 위험을 초래하였음은 아무스와 호세아 선지자의 글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여러 군데의 성소는 가나안적 바알 숭배의 지역적 복수성을 암시하며, 단의 여호와와 벧엘의 여호와라는 잘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결국 여로보암은 후대의 왕들이 심판받는 악의 패러다임으로, 죄를 저지른 왕으로 제시된다. 이 점에서 여로보암은 다윗과 대조를 이룬다. 이는 후에 요시야와 므낫세가 대조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점에서 저자는 고대 근동 아시아의 관습을 따르고 있다. 나람-신(Naram-Sin)은 니푸르(Nippur)의 엔릴(Enlil) 신전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1,500년 동안 메소포타미아 문헌에서 악한 왕의 전형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키투(Akitu) 절기를 훼방하였다는 이유로 불건전한 왕의 전형으로 묘사된 나보니두스(Nabonidus)는 후대의 악한 지배자의 전형이 되었다. 여로보암은 고대 근동 아시아적인 전형적인 사악한 왕의 대명사이다. 결국 여로보암의 죄는 열왕기에 나오는 두 가지 형태의 배도 가운데 하나로서, 여호와에 대한 부족절한 예배 행위였다. 이것응 열왕기상 11장에 언급된 솔로몬의 우상 숭배와 함께 열왕기에 나타나는 두 가지 배도 가운데 하나이다. 결국 열왕기 기자는 "여로보암의 죄"라는 신학적 평가 공식을 통해서 여로보암과 북방 왕들은 국가를 죄로 이끌고 가고, 궁극적으로는 멸망과 포로로 끌고 간 가장 사악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우상 숭배자로 묘사되고 있다. 열왕기 기자는 이를 통해 이스라엘이 성전 예배와 여호와를 버리기 시작하고, 끝내는 앗시리아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계기가 바로 북방 이스라엘의 분리임을 지적하고 있다. 특별히 열왕기하 17장에서는 북방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온 장본인은 여로보암이라고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다(왕하 17:21-23). 열왕기 기자는 열왕기 구조의 신학 공식 안에 반복적으로 왕국의 멸망이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열왕기의 구조는 열왕기 전체 내러티브 안의 골격과 순서를 제공하며, 이스라엘 역사의 집적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4-2. 이방 신 숭배
  북방 왕국은 국가 정체성의 인식이 없었기에 목적지가 없었다. 바알 숭배가 북방 왕국에 먼저 들어온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 정체성이나 언약의 소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남방 왕국은 "이상화된 다윗의 이미지" 로 표현된 국가적 정체 의식이 있었다. 모든 유다 왕들이 이 다윗 왕의 후손이었으며, 유다의 일반 시민들도 "영원한 다윗 왕조"라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다윗 왕조 자체를 전복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왕하 2장)에서 바알 숭배자요 아합의 딸인 아달랴의 유다 왕조를 말살 시도가 실패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일부 유다 왕들이 살해를 당하긴 했지만, 다윗 계열 안에서 더 나은 인물을 왕으로 세우려고 그렇게 했을 뿐이다(왕하 12:20-21, 14:19-21, 23-24). 그러므로 이유로 열왕기 기자는 "그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좆았는가?"를 유다 왕들의 통치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부정적(배도)

조건부 긍정적(부분개혁)

긍정적(완전개혁)

솔로몬

다윗과 같지않음(왕상 11:4)
산당을 지음

 

이상적, 지혜로운 왕

 

르호보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14:22)
산당 세움

 

 

아비얌

다윗과 같지않음(왕상 15:3)

 

 

아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산당 제거 안함(15:11)

 

여호사밧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산당 제거 안함(15:11)

 

여호람(요람)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
아합의 집같이 행함
(왕하 8:18)

 

 

아하시야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
아합의 집같이 행함
(왕하 8:27)

 

 

아달랴

없음

 

 

요아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산당 제거 안함(12:2-3)

 

아마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다윗 같지 않음(14:3)

 

아사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
산당 제거 안함(15:3)

 

요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산당 제거 안함(15:34)

 

아하스

여호와앞에 정직하지않음, 다윗같지 않음
이스라엘 열왕의 길
아들을 불사름(16:2-3)
산당에서 제사함

 

 

히스기야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함(18:3)

므낫세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
아합같이 이방제단 세움.열방보다 더 악함
산당 다시세움(21:1-8)

 

 

아몬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21:20)

 

 

요시야

 

 

여호와 보기에 정직
다윗 길로 행함(22:2)
산당 제거

여호아하스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23:32)

 

 

여호야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23:37)

 

 

여호야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24:9)

 

 

시드기야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24:19)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유다 왕들의 죄는 솔로몬이 이방 아내들을 위해 산당을 짓고 이방 신을 섬긴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런 이방 신 숭배는 후에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왕상 15:13)가 아세라 우상을 섬기고, 여호람의 아내 아달랴가 바알을 숭배한 것(왕하 11:1-20)으로 이어지고 있다. "선하다"는 평가를 받은 왕들 중에서도 여섯 명이 이스라엘에서 가나안의 이방 풍습의 상징들, 산당들을 제거하는 일을 무시하였음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산당에서의 이방 신 숭배가 유다에서 가장 큰 죄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솔로몬과 유다 왕들이 지은 배도의 죄는 요시야의 개혁이 해결하려는 문제였다. "또 예루살렘 앞 멸망 산 우편에 세운 산당을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위해 세웠던 것이며(왕하 23:13)...."


5. 배도와 개혁의 구조

  여기에서 우리는 배도와 개혁의 썰물과 밀물이 열왕기의 구조적 리듬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 가운데 나나타는 나레이터의 평가 공식 패턴은 새 왕들(여로보암, 예후)의 등장으로 희망을 갖다가, 그들의 실패로 끝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구속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개혁의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실패라는 그림자로 얼룩지고 있다. 북방 왕국을 여호와께로 회복시키려는 노력으로 시작된 예후의 개혁은 예후가 율법을 따르지 않음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왕하 10:28-31). 이로 인해 예후 역시 작은 왕조로 생을 마치고 끝내는 역사의 무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특별히 유다의 이야기는 선한 왕과 악한 왕 사이를 오고 가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솔로몬의 통치에 나타나는 "순종과 배도"의 패턴은 열왕기의 "배도와 개혁"의 패턴의 기본 배경을 제시하고 있지만, 실제로 배도와 개혁의 리듬이 시작되는 것은 개혁을 실시한 첫 번째 왕인 아사에 의해서였다. 아사는 태후를 폐위시키고(왕상 15;13), 그의 마음은 솔로몬(11:4)과는 달리 온전하였다(15:4). 그는 솔로몬이 행한 것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보물을 성전에 드렸다(15:15-7:51 참조). 아사는 개혁을 통해서 르호보암과 아비얌(14:23-24:15-1,2,3)의 배도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렇게 해서 아사는 일련의 개혁자 가운데 첫 번째 인물이 되었고, 그 개혁의 역사를 여호사밧이 계승하고 있다.

  한편 아합 가문과의 동맹으로 유다에 우상 숭배가 깊이 물든 후에,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아달랴를 축출하고 왕 위에 올라 개혁을 시도했다(왕하 12장). 그러나 성전 기금으로 마련한 돈을 이방 침략자를 회유하는 자금으로 사용함으로 개혁은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12:17-18). 유다 왕국 사의 끝에 가까워지면서 배도와 개혁의 진자 운동은 점차 넓어져서 거의 완벽한 히스기야 왕과, 악의 대명사인 므낫세 왕, 그리고 다시 완벽한 요시야 왕으로 진자 운동을 하고 있다. 특히 완벽한 왕 히스기야의 개혁은 앗시리아의 침공으로부터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하게 했다(18-19장). 그러나 히스기야의 역사는 바벨론 사신들에게 성전과 궁전의 보물들을 자랑하는 실수로 끝을 맺고 있다(20:12-19). 마지막으로 이런 일련의 개혁의 절정으로 제시되는 요시야의 개혁도 궁극적으로 므깃도에서 요시야가 전사함으로 끝을 맺게 된다. 이러한 패턴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6. 이스라엘의 배도

  한편 아합 왕은 북방 이스라엘 왕들뿐 아니라 남방 유다 왕들에게도 부정적 모델로 등장한다. 심지어 열왕기 기자는 유다 왕인 여호람, 아하시야, 므낫세 왕을 평가할 때 "아합같이 행하였다"고 악한 왕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왕하 8:18,27 , 21:1-8). 이처럼 아합 왕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배도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 이유는 이 때에 왕후 이세벨과 아합의 주도 아래 왕정이 우상 숭배를 적극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최대의 배도는 예후라는 개혁자에 의해 원점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예후는 아합 가문을 몰살시켰으며, 바알 숭배를 일시적으로 나마 이스라엘에서 제거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러한 이유로 여호와께서는 예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도다(왕하 10:30)." 북방 왕들 중에는 이러한 평가를 받은 왕은 예후뿐이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예후에게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 위를 이어 4대를 지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안에서 가장 긴 왕조(5대)가 주어졌으며, 이스라엘 안에 일종의 왕금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후의 개혁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예후는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않았다(왕하 10:28-29). 북방 왕국을 여호와께로 회복시키려는 노력으로 시작된 예후의 개혁은 예후가 율법을 따르지 아니함으로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왕하 10:28-31). 그리고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죄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로 이스라엘은 예후 왕조가 몰락한 지 30년도 지나지 않아서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다(왕하 17:6). 이스라엘 멸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왕하 17:7-23을 읽어 보면,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 이유는 바로 여로보암과 아합이 범한 죄 때문이었다. 예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계속되는 배도와 죄로 인해 결국 앗시리아의 포로가 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가고 말았다. 여기에서 열왕기 기자는 이스라엘의 몰락을 단순한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기록한 것은 아니다. 열왕기 기자는 이스라엘의 몰락에 대해 그 백성들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다.


7. 유다의 배도

  그렇다면 이토록 무서운 배도의 결과가 유다에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아합 시대에 유다 왕들로서 아합 가문과 결혼 관계나 동맹 관계를 맺었던 여호람과 아하시야는 아합의 배도에 강한 영향을 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열왕기 기자는 명시적으로 이들이 "아합의 집같이 행하였다"고 밝히고 있다(왕하 8:18,27). 이같은 왕들의 배도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은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그리고 요담에 의해서 상당 부분 상쇄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은 완벽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 우를 범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해되고(요아스, 아마샤), 문둥병에 걸리는 고통을 받았다(아사랴). 결국 네 명의 선한 왕의 통치 하에서 유다는 진정한 개혁을 이루지 못햇다. 마침내 요담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에 올랐다. 아하스는 지금까지의 어떤 유다 왕보다 부정적인 평가는 받은 악한 왕이었다.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20세라. 예루살렘에서 16년을 치리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왕하 16:2-3)." 아하스는 "조상 다윗과 같이 아니하였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였다"는 일반적인 부정적 평가 공식을 넘어서서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했다는 명시적 판단으로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게다가 (왕하 16:10-18)을 보면 아하스는 이방 신전의 단을 그려다가 그 모양대로 단을 만들어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엇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성전 안에 이방의 제단을 가져와서 성전의 구조에 변형을 가져온 것은 아하스가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은 결과인 것만은 분명하다. 열왕기 기자가 이런 식으로 아하사를 묘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결과 이스라엘은 마침내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왕하 17:7-17). 만일 유다가 이스라엘 왕들이 저지른 잘못과 같은 종교적 범죄를 저지르고, 앗시리아 왕과 자발적으로 동맹을 맺는다면, 유다도 이스라엘과 동일한 심판을 당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함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유다는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는 아하스 왕 아래에서 이스라엘 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유다의 운명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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