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3): 솔로몬 이야기(2)(9-11장) |
10-8. 두 번째 히람과의 관계(9:10-14) 10-9. 솔로몬의 건축 사업과 노동 정책(9:15-25) 솔로몬은 게셀과 아래 벧호론을 건축하고, 또 바알랏과 그 땅에 있는 다드몰과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자기의 모든 영토 안에 건축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들을 건축하였다(17-19). 벧호론은 깊은 계곡에 의해 동서로 구분된다. 이중 동쪽지역을 '윗 벧호론', 서쪽 지역을 '아래 벧호론'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동쪽 지역은 해발 525m, 서쪽 지역은 해발 315m이기 때문이다(Reed). 이 벧호론은 게셀과 함께 블레셋을 방어하기 위한 진지였으며, 베냐민, 유다, 에브라임 지역을 방어하는 길목이었다(Keil). 따라서 솔로몬은 이곳을 더욱 견고하게 요새화시켰다. (대하 8:5)을 보면 솔로몬이 '윗 벧호론'까지 증축했음을 알 수 있다. 바알랏은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단 지파의 영역이며 깁브돈과 여훗 사이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수 19:44-45). 다드몰은 다메섹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전략상 요충지였다. 이곳은 많은 정원과 종려나무 숲들이 있어 쾌적한 오아시스 지대 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새로 점령한, 왕국의 북동 지역을 지원할 국고성을 다드몰에 건축했던 것이다(대하 8:3,4). 국고성은 나라에 필요한 물품들(군량미, 왕국의 재산, 구제용 식량 등)을 비축하는 장소였다(창 41:35; 출 1:11; 대하 17:12; 32:28). 이러한 국고성은 물품의 저장 뿐 아니라 방비도 요구되었으므로 요새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솔로몬이 거느린 마병의 수는 만 이천 명이었다(10:26). 솔로몬은 말과 기병들을 위해서 성을 건축했다. 이처럼 요새화된 국고성과 여타 전쟁용 병거 및 말과 기병대는 주로 북방 국경 지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대하 8:4; 16:4). 이는 당시 솔로몬 왕국에 위협이 될만한 세력은 주로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이들을 건축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자들, 즉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사람, 그리고 여부스 사람을 노예 역군으로 삼았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다 쫓아내지 못한 토착민들이었다(삿 1:21-36).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주하여 살면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했다. 솔로몬은 이러한 노예들을 건축 사업을 위해 역군으로 사용했다. 20년에 걸친 솔로몬의 건축 공사는 막대한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솔로몬은 옛 가나안 토착민의 자손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함으로써 이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었다. 솔로몬에 의해 동원된 가나안인 역군들의 수는 15만명이 넘었다(5:15). 그러나 솔로몬은 율법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로 삼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될 수 없었다(레 25:39-43). 가나안인들에 비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특권과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부역에서 면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비록 좀더 자유롭고 대가를 받으며 일을 했지만, 3만명 이상이 건축사역에 동원되었다(5:13-14).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이스라엘 자손의 노역도 과중하게 부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역 사무를 총괄하는 감역관의 존재와 솔로몬 사후 르호보암을 향한 백성들의 호소 및 탄원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일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12:4,18). 설로몬의 건축 사업을 감독하는 두목은 550명이었는데, 이들은 상급 감독으로 이스라엘인 250명과 가나안인 300명으로 구성되었다(5:16). 바로의 딸을 위한 궁전이 완성이 되게 되자, 바로의 딸은 다윗 성에서 나와서 그녀를 위해 건축한 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때에 솔로몬은 왕비가 떠난 다윗 성에 밀로의 건축 사업을 수행했다(24). 솔로몬은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그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렸으며, 여호와 앞에 있는 매 단마다 분향을 드렸다(25). 이렇게 해서 솔로몬이 건축하려던 모든 사업이 완성이 되게 되었다(26). (대하 8:13)을 보면 이 세 번의 제사는 일년의 세 절기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다. 일부 사람들은 이 언급을 '불필요한 반복'이라고 본다(Montgomery).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은 이 기록이 일상적인 제사기능이 발휘됨으로써 성전의 참다운 완성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Bahr, Hammond). 10-10. 솔로몬의 무역 활동(26-28) <참고 지도: 솔로몬의 무역> 이러한 솔로몬의 통치 아래에서 가나안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로 전락해 갔다. 전에 사무엘은 왕정이 이루어졌을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해 미리 예고한 적이 있었다. 솔로몬은 처음에는 성전 건축을 위해 역군을 일으켰지만, 후에는 병거와 기병을 위한 성, 바로의 딸을 위한 궁전, 그리고 배와 선단을 만드는일에 사용되었다. 국고성은 군사적 목적으로, 바로의 딸을 위한 별궁은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선단은 부를 추구하기 위해서 지어졌다(왕상 9:28). 이로 인해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가 솔로몬 정부의 특징이 되게 되었 다. 솔로몬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으며, 독재자가 되어 점점 더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무거움 짐을 지우고 있었다. 11. 솔로몬과 여인 이야기(2); 시바 여왕의 방문(10:1-13) 스바의 여왕은 여호와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려고 했다(1). '스바'는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지금의 예멘-에 있는 셈족 국가로 사베안(Sabaeans)왕국을 가리킨다(Keil). 이 나라는 그 위치상 이방세력의 영향에서 비교적 안전한 변방 지대였기 때문에 비옥한 초승달지역의 권력투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나라는 독자적인 정치와 경제 문화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이 나라는 고대 근동에서 중요한 무역 기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즉 그 위치로 인해서 근동 북방의 여러 나라들 및 아프리카, 인도, 지중해 국가들은 스바를 통해서만 향료, 보석, 황금등을 수입할 수 있었다(욥6:19; 시72:10,15; 사 60:6; 렘 6:20; 겔 27:22,23; 38:13). 본문의 스바 여왕은 아라비아의 전설에 의하면 '발키스'란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아비시니아전설에는 '마퀴다'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 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통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아비시니아 왕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입증되지는 않았다(Winer, Patterson). 그녀는 수많은 수행원들과 함께 수많은 향품과 금과 은, 그리고 보석을 낙타에 싣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멘'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400km나 되는 먼길이었다. 그녀는 예루살렘에서 솔로몬을 만나서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모두 말했다(2). 물론 이 문제들은 수수께끼의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솔로몬은 그녀가 묻는 모든 말에 모두 대답을 했으며, 대답을 알지 못해서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3).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가 건축한 궁전과, 그가 먹는 상의 음식과, 관리들에 대한 제반 사항과, 술 맡은 관원과, 그리고 여호와께 올라가는 계단을 보고 넋을 잃을 정도로 감탄하였다(4-5). 이 '계단'은 왕궁에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매우 예술적으로 꾸며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솔로몬 왕에게 자신이 자기 나레에서 솔로몬에 대해 들은 모든 소문이 사실이라고 말했다(6). 그녀는 사실 그 소문을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실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솔로몬을 만난 후에 솔로몬의 부와 지혜가 소문보다 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7).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곁에서 그 지혜를 듣는 신하들이 복이 있다고 고백했다. 본문에는 솔로몬의 신복들처럼 솔로몬 곁에서 늘 지혜를 들었으면 하는 스바 여왕의 아쉬운 심경이 표현되었다 하겠다. 한편 성도들은 솔로몬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월등한 지혜를 소유하신(마 12:42)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듯 복된 처지를 망각하지 아니하고 항상 말씀안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히 13:15). 그녀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에 공의를 행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했다(8-9).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금 120달란트와 매우 많은 향품과 보석을 드렸다(10). 그 후에 히람의 배들이 오빌에 가서 많은 백단목과 향품을 실어왔다(11). 백단목의 정확한 종류와 명칭은 불확실하다. 요세푸스는 이 나무를 일종의 소나무 목재로 보았다. 백단목(아체 알무김)은 인도와 실로가 원산지인 '붉은 백단향 나무', 곧 '자단목'과 같은 종류일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이 적갈색의 백단향 나무도 본절의 백단목처럼 단단하고 나무결이 고와 악기 제조에 적합했다고 한다(Trever). 솔로몬 왕은 그 백단목으로 성전과 왕궁의 난간이 있는 층계를 만들었으며, 또 노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수금과 비파를 만들었다. 이러한 고급 백단목은 전에도 후에도 이스라엘에 온 적이 없었다(12). 솔로몬 왕은 왕의 규례대로 스바 여왕에게 예물을 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 스바 여왕은 같이 온 수행원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13). 12. 솔로몬의 부와 지혜(2)(10:14-29) 솔로몬의 통치의 이중적인 모습은 그의 부와 지혜에 대한 묘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솔로몬은 (왕상 4장)에서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지혜를 사용하여 백성들의 필요를 체워주고, 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왕상 10:14-29)에서는 그 지혜가 솔로몬 자신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곳에는 솔로몬이 신명기에 기록된 규정(신 17:16-17)을 어기면서 자신을 위해서 수많은 금과 은과 말과 여인들을 소유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이 매년 거두는 세입금은 금 666 달란트였다(14). 금 666달란트가 현대의 화폐 가치로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 금 1달란트의 무게는 34.3kg정도엿으며, 이는 은 45,000세겔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당시 은 30세겔은 노예 장정 한 사람의 값이었으므로(출 21:32), 금 1달란트는 약 1,500명의 노예값을 지불할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이 액수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엄청난 것으로 비추어졌음을 분명하다. 또한 솔로몬은 이 세금 외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소규모 상인들(상고)과, 대규모로 무역을 하는 객상들과, 동맹을 맺은 주변의 아라비아 왕들, 그리고 국내의 지방장관(나라의 방백)들에게도 세금을 받았다(15). 솔로몬은 금을 쳐서 얇게 편 후에 그것으로 방패 하나에 금 600세겔이 들어가는 큰 방패 200개와(16), 방패 하나에 금 3마네가 들어가는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들었다. 이러한 방패는 나무로 만든 방패 위에 얇게 편 금을 입혀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큰 바애는 전신을 가릴 수 있는 진지 방어용 방패를 말하며, 작은 방패는 개인이 사용하는 휴대용 방패를 의미한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 방패들을 레바논 나무로 만든 궁전에 두었다(17). 솔로몬이 마시는 그릇은 모두 금그릇이었으며, 레바논 나무로 만든 궁에서 사용하는 그릇도 모두 금그릇이었다. 솔로몬 시대에는 은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은그릇이 사용되지 않았다(21). 이러한 표현은 솔로몬 왕국의 부가 극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솔로몬은 바다에 다시스 배를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했으며, 3년에 한 번씩 그배들로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왔다(22). 여기에서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열왕보다 컸다고 기록하고 있다(23). 천하가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 얼굴을 보려고 각기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 방문객들이 가져오는 예물은 금과 은 그릇,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였다(24-25). 3장에서부터 줄 곧 찬양되던 솔로몬의 지혜는 이로써 그 이야기를 끝을 맺고 있다. 또한 솔로몬은 병거와 마병을 모았으며, 이로 인해 그에게는 병거가 1400대가 있었고, 마병이 14000명이 있었다. 그는 이 마병들을 병거성과 예루살렘에 나누어 배치하였다(26). 솔로몬은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처럼 많게 만들어으며, 백향목을 평지에 나는 뽕나무처럼 많게 만들었다(27). 솔로몬은 말들을 애굽에서 내어왔는데, 이는 왕의 장사꾼들이 떼로 값을 매겨서 산 것이었다(28). 솔로몬이 애굽에서 내오 온 병거는 한 대에 은 600세겔이었다. 솔로몬은 자신 뿐 아니라, 헷 족속의 왕들과 아람 왕들을 위해서도 말과 병거를 내어 왔다(28-29).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은 사실은, 경제적 번성에 따르는 군사적 부강으로 간단히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왜냐하면 1) 이스라엘의 지형은 산악 지대가 많아 병거가 많이 필요없는데, 이러한 사실은 다윗이 하닷에셀에게서 빼앗은 병거 일천 대 중 백 대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셔버린 사실에서도 입증된다(대상 18:4). 2) 더구나 왕이 말을 모으는 일은 신명기 규례상 명백히 금지된 일이라는 점(신 17:16) 등의 문제에 대해 솔로몬의 병거와 마병은 (1) 단순히 전투용 뿐이아닌 상업적 목적(매매 혹은 상선단의 보호)도 지닌 것이라는 해석도 있으나(Dentan), (2)무엇보다도 왕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Hammond, Wevers). 13. 하나님에 대한 솔로몬의 태도(2)(11:1-13) 하나님에 대한 솔로몬의 태도는 처음과 나중이 크게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다. 6-8장을 보면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으며 하나님을 크게 경외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와 그 후손이 계속해서 말씀을 지키면 그의 가문에서 계속해서 왕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11:1-13)을 보면 솔로몬은 우상의 산당을 건축하고 이방 신을 섬기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말씀을 듣게 된다.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은 우상의 산당을 지었으며(11:6-7), 하나님을 사랑하던 솔로몬우상을 섬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은 솔로몬의 나라를 빼앗아 그의 신복에게 주실 것을 선언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솔로몬의 아들 때에 심판을 시행하실 선언하셨다(11:11-12). 솔로몬은 바로의 딸 외에도 많은 이방의 여인들, 즉 모압과 아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을 사랑했다(1). 바로의 딸은 솔로몬의 아내들 증에서 정실에 속했으며, 따라서 솔로몬은 그녀를 위해서 특별히 별궁을 건축했다.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사랑했다는 말은 이 일에 그의 개인적인 정욕이 개입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솔로몬이 이러한 나라들과 통혼한 것에는 외교적인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국제 결혼은 원래부터 외교적인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열왕기 기자는 이 일이 율법을 어긴 일이라고 못박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나라들과의 통혼을 금하셨기 때문이다(신 7:3-4).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게 될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었다(2). 그러므로 솔로몬이 이러한 율법의 명령과 정신을 무시하고 가나안 족속(헷족속)을 비롯한 이방의 많은 여인들과 결혼한 것은 혼합주의를 채택한 범죄였다.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이 여호와께서 금하신 나라의 여인들을 연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애했다'('다바크')는 말은 '집착하다', '달라붙다'는 뜻으로서 강렬한 감정적 애착 상태를 의미한다(시 102:5; 애 4:4 등). 따라서 이 말은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과의 애정에 탐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솔로몬 왕은 후비가 700명이었으며, 빈장이 300명이었다. 10장에서 우리는 솔로몬이 말과 은금을 많이 소유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일을 생각해보았다. 이제 솔로몬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율법까지 어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솔로몬이 (신 17:16-17)에서 금한 세 가지 명령을 모두 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비('사라')는 '후궁'들과 구별되는, '왕비'의 지위를 가진 여인들이다. 이들은 원래 이웃 나라의 공주, 혹은 왕족이었기 때문에 구별된 지위와 특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빈장('필레게쉬')은 '후궁'을 의미한다. 이러한 수많은 이방 여인들은 여호와와 율법을 향하던 솔로몬의 마음을 변하게 만들고 말았다(3). 솔로몬이 나이가 들었을 때에 왕비들이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다른 신을 좆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때는 솔로몬이 60세정도 되었을 때로 보인다. 그는 말년에 우상을 좆음으로 부친 다윗과 같이 전심으로 여호와를 좆지 못했다. 솔로몬이 이방 종교를 허용한 일은 이방인과의 동맹을 견고하게 했을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다(4). 솔로몬은 시돈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사람의 밀곰을 좆았다. 아스다롯은 가나안인들이 섬기던 풍요의 여신으로, 성적 사랑과 다산을 위해 숭배되던 우상이었다. 따라서 이 여신을 위한 제사에는 보통 음란한 행위가 의식의 순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이 여신 숭배와 관련된 진흙 상들이 출토된다. 그런데 이 우상들은 유방과 음부를 두드러지게 만든 소규모의 우상으로, 당시 일반 가정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Gray). 이는 당시에 아스다롯 숭배가 얼마나 이스라엘에 만연해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다. 밀곰은 암몬의 민족신으로 인신 제사로 유명하며 '몰록'이나 '몰렉'과 같은 신이다(7). '밀곰'은 히브리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파생된 명칭이다(IDB)(5-6). 또한 솔로몬은 모압의 그모스와 암몬인의 몰록을 위해서 예루살렘 앞에 있는 산에 산당을 지었다. 그모스는 모압 민족의 수호신으로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 그모스'란 이름은 '정복자'라는 뜻으로 추정된다(Gesenius). 그모스는 암몬의 신 몰륵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고 음란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모스'는 그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으며, 손에는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Keil). 예루살렘 앞 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있던 '감람산'을 말한다. 후에 감람산의 최남단 봉우리는 '범 죄의 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솔로몬이 이곳에 우상의 산당을 지었기 때문이었다(Robinson). 몰록은 '밀곰'과 동일시 된다. '몰록'은 고유 명칭이 아니라 '왕'이라는 뜻이다. 암몬인들은 그들의 신을 왕으로 호칭한 것이다. 몰록 숭배제사 의식에는 인신 제물이 바쳐졌다으며, 이 제사는 주로 예루살렘 남서쪽 힌놈의 골짜기 도벱에서 행해졌다(Gray; 왕하 23:10; 렘 32:35). 또한 솔로몬은 다른 이방의 왕비들이 섬기는 신을 위해서도 산당을 지었다. 이로 인해 솔로몬의 왕비들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을 하고, 그 신에게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7-8). 이러한 일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게을리 했으며, 솔로몬의 통치 방향이 혼합주의로 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사단은 누구든지 교만하고 방만한 틈을 발견하면 걸코 이를 놓치지 않는다.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이교 산당은 그후에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서 여호와를 떠나게 됨으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언약 백성이 언약을 깨뜨린 일에 대해 발하시는 거룩한 분노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분노는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을 향하신 일관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두 번이나(3:5-14, 9:2-9) 꿈을 통해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때에 솔로몬에게 다른 신을 좆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에게 미혹됨으로 이러한 여호와의 경고를 무시하고 말았다(9-10). 그러므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라를 빼앗아서 그의 신복에게 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11). 여기서 신복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인물은 '여로보암'이었다. 그는 솔로몬의 노역 감독관이었으나, 솔로몬이 죽은 후에 그는 나라를 나누어서 스스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다(B.C. 930-910).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솔로몬 때에 그를 징계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 때에 징계하시겠다고 선언하셨다(12). 그리고 나라를 빼앗을 때에도 모든 나라를 다 빼앗지는 않고, 한 지파를 남겨서 그의 아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3). 솔로몬의 왕위가 대를 끊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의 가치 때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바하르'하신 도성으로서, 다윗 언약에 근거된 바(삼하 7:13),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둘만한 장소로 택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의 행위는 그만한 자비를 받을 이유가 없지만, 하나님 자신의 언약과 선택을 위해서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이름을 세계 열방에 전파할 종교적 수도로서 유지되어야 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유다의 주권을 아주 박탈하지 않으신 것이다(Hammond). 솔로몬의 범죄는 모든 나라를 빼앗겨야 했지만, 하나님은 다윗 언약과 예루살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최소한의 것을 솔로몬의 후손에게 남겨 주셨다. 14. 왕위 계승문제(2)-왕국 분열-(11:14-43) 솔로몬 내러티브에는 왕위 계승과 관계된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 1-2장에는 다윗의 죽음이 임박하면서 솔로몬이 선지자 나단과 대제사장 사독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솔로몬은 보좌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3명의 경쟁자, 즉 요압과 시므이, 그리고 아도니야를 물리쳐야 했다. 솔로몬은 이러한 정적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하면서 그의 왕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 내러티브의 후반부인 (11:14-43)에 가면 솔로몬의 왕권이 급격하게 약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솔로몬이 늙게 되자,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대적하게 되면서 왕위 계승의 암초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지자 아히야가 솔로몬으로부터 나라의 반을 빼앗아 여로보암에게 준다. 솔로몬은 말기에 3명의 정적들, 즉 에돔왕 하닷과 르손, 그리고 여로보암을 맞아 싸워야 했다. 그리고 결국 솔로몬 사후에 나라는 둘로 나뉘어지게 된다. 14-1. 에돔 왕 하닷의 도전(14:14-22) 14-2. 르손의 도전(14:23-25) 14-3. 여로보암의 도전(14:26-40) 15. 솔로몬 이야기의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솔로몬 내러티브의 구조를 살펴보면서 결국 첫 주요 단락(왕상 3-8장)은 솔로몬에게 우호적인 반면에, 둘째 주요 단락(9-11장)은 솔로몬에 대해 비우호적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솔로몬의 성격에 대해 두 가지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율법을 준행했을 때에 형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떠나고 율법을 좆지 않을 때에 그는 여러 가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백성을 돌보는 일에 사용했을 때에 형통했지만, 그것을 자기를 위해 사용했을 때에는 사치와 쾌락과 우상숭배를 초래했다. 이러한 솔로몬의 타락은 결국 왕국분열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그는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숭배함으로 여호와의 진노를 사게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나친 강제징용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솔로몬의 나라를 찢어 여로보암에게 주시겠다고 예고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솔로몬 때에는 징계를 내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에 나라를 찢어 여로보암에게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에도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해서 한 지파를 남겨서 다윗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게해주셨다. 이제부터 나오는 왕상 12장부터 17장까지의 내용은 솔로몬 왕국이 분열된 과정과, 분열된 두 왕국의 역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
'구약 > 열왕기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열왕기(5): 분열왕국 이야기(2)(12-17장) (0) | 2015.02.07 |
---|---|
[스크랩] 열왕기(4): 분열왕국 이야기(1)(12-17장) (0) | 2015.02.07 |
[스크랩] 열왕기(2): 솔로몬 이야기(1)(1-8장) (0) | 2015.02.07 |
[스크랩] 열왕기(1): 열왕기 서론 (0) | 2015.02.07 |
[스크랩] 열왕기상 주석 (0) | 2015.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