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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 내용: 3. 사랑의 성장을 위한 기도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1:59

데살로니가전서(1Thessalon)


    III. 사랑의 성장을 위한 기도 (3:11-13).

    1. 재회의 염원(3:11)

    11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바울은 문장의 내용을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제'그러나 개역 한글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음)라는 말을 사용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자신의 두가지 간구(10절)을 더욱 자세하게 기도문(5:23,살후1:112:163:516)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성도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Chysostom).1)
    먼저 그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11절)라고 피력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1:1의 주석을 보라)와 '우리 주 예수'(2)(1:1의 주석을 보라)는 의 원문은 아위토스 데 호 테오스 카이 파테르 헤몬 카이 호 퀴리오스 헤몬 이예수소인데, 문제는 "그"이다. 이 삼인층 단수를 그대로 취하여 하나님의 대구로 보면, 결국 이 부분은 기도문이 아니라 단순히 바울의 염원을 피력한 것이 된다(De Wette)3).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이를 하나님(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수식어로 보고 있다.4)
    또 하나의 문제는 이 삼인층 단수(그)가 하나님께만 관련되는지, 아니면 성부와 성자께 같이 관련되는지 함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후자를 취하여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의 증거로 보고 있다.5) 이것은 직행하게 하옵시며가 단수 동사인 카튜튀나이로 되어 있다는 점으로 뒷받침 된다.6)
    그와 관련하여 에어하트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개념이 교회에서 점차적으로 발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서와 같은 초기 서신에 있어서 교리적으로 퍽 의미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칼빈은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같은 신성과 권능을 소유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직행하게 하옵시며는 모든 장애물을 치워 목표를 향해 곧게 나아가게 해 달라는 뜻이다(살후 3:5,눅1:79).칼빈은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가 없으면 결코 한 발자국도 성공적으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사단이 아무리 막는다 해도, 하나님의 손길이 임할 때 사단의 모든 훼방은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일상적 사건을 자기 혼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무시한다. 그러나 긴급할 때에는 하나님이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붙잡으려 한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덴에서 데살로니가에 여행하는 것 같이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도 그는 하나님의 지시와 지도를 구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제해 준 인생을 자기 것으로 하고 하나님을 이용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인생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 바클레이).

    2.흠없는 거룩을 위한 염원 (3:12-13).

    12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기도의 두번째 내용은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1:3의 주석을 보라)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12절)이다. 피차간은 같은 신자들 사이를, 모든 사람은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의 복음 선교는 말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먼저 같은 신자들(요13:3435,롬13:8,살전 4:9,벧전 1:22,요일 3:1123), 그리고 불신 사회에까지 넘치도록 많은 사랑을 베풀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베풀었고 또한 그들에게 행하기를 요구하는 사랑이란, 실상은 [그의 사랑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이다](내촌감상). 이러한 사랑의 삶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바클레이는 [그 해답은 우리가 홀로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에 있다. 아침 기도 없이 출근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나는 오늘 내 자신만으로도 사물을 잘 처리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과 대화도 하지 않고 자기 혼자 잠라리에 눕는 자는 결과적으로 '오늘 나에게 일어난 일이 어떤 결과가 되든지 나 홀로 견딜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라고 설명하였다. 바울은 그들의 사랑을 위한 기도의 목적을 가리켜, "이는 (에이스,)너희 '마음'(2:4의 주석을 보라)을 '굳게 하시고'(3:2의 주석을 보라)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1:10의 주석을 보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절)라고 한다.

    성도는 하기온으로서, 바친자, 구별된 자, 거룩한 자, 성별된 자를 의미한다. 구약에서는 제사장(레21:6-7), 땅의 십분의 일(레27:30),하나님의 거룩한 집 또는 장소(왕상 8:10,비교:히9:2),지성소(출 26:33,비교:히9:3), 다른 민족들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봉헌된 이스라엘백성(출19:6,신7:6,단 7:22,II 에스드라서 8:28)등을 가리켰다. 신약에서는 기독교인들, 즉 교회에 적용되었다(행 9:1332:4`1,롬1:7,고전 6:12, 벧전 2:9). 관념적으로는 인격적인 거룩,즉 도덕적 순결을 의미하기도 한다(레11:4419:2,고전 7:34,벧전 1:16). 또한 이 말은 천사(시89:5,단4:13,슥 14:5,에녹 1:9,12:2,14:23,39:5 등), 세례 요한(막6:20), 그리스도(행3:14), 하나님(삼상 6:20,요17:11,벧전 1:15), 하나님의 율법 (롬7:12), 하나님의 성령(행2:3338,롬5:5등)을 지시하기도 한다. 이곳의 모든 성도가 누구를 지시하는가에 대해(1) 천사들이라는 설 7),(2) 신자들이라는 설 8), (3) 둘 다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 9) 등이 있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프레임, 멕콘), 어느 것도 틀린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3) 설을 취하는 것이 무난하다. 바울의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주께서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신자들이 '거룩함' ("성도"의 주석을 보라)에서 이 점에 대해 헨리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그 때에 설 수 없을 것이고, 책망을 받지 않게 된다거나 영원한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그러므로 [의롭게 된 신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죄의 오점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매일같이 제거하여야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이 하여 마지막 날에 '거룩에 있어서 흠 없는 존재로서' 굳게 서 있어야 할 것이다](렌스키).

    우리는 마지막 심판 때에 성별될 수 있도록 비난받을 것이 없는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거룩한 생활이란 완전무결한 생활이라기 보다는 주 안에서 그를 본받아 사랑하며 사는 생활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독자들에게로 직행하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또한 그는 주의 사랑을 받아 독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들 역시 서로간에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넘치도록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마음이 주에 의해 굳게되고, 주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비난받을 것이 없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행하게 하옵시며(11절)라고 피력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1:1의 주석을 보라)와 '우리 주 예수'(2)(1:1의 주석을 보라)는 의 원문은 아위토스 데 호 테오스 카이 파테르 헤몬 카이 호 퀴리오스 헤몬 이예수소인데, 문제는 "그"이다. 이 삼인층 단수를 그대로 취하여 하나님의 대구로 보면, 결국 이 부분은 기도문이 아니라 단순히 바울의 염원을 피력한 것이 된다(De Wette)3). 그러나 III. 사랑의 성장을 위한 기도 (3:11-13).

    1. 재회의 염원(3:11)

    11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바울은 문장의 내용을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제'그러나 개역 한글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음)라는 말을 사용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한 자신의 두가지 간구(10절)을 더욱 자세하게 기도문(5:23,살후1:112:163:516)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성도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Chysostom).1)
    먼저 그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11절)라고 피력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1:1의 주석을 보라)와 '우리 주 예수'(2)(1:1의 주석을 보라)는 의 원문은 아위토스 데 호 테오스 카이 파테르 헤몬 카이 호 퀴리오스 헤몬 이예수소인데, 문제는 "그"이다. 이 삼인층 단수를 그대로 취하여 하나님의 대구로 보면, 결국 이 부분은 기도문이 아니라 단순히 바울의 염원을 피력한 것이 된다(De Wette)3). 그러나 III. 사랑의 성장을 위한 기도 (3:11-13).


    1. 순종과 거룩(4:1-8)

    가.더욱 순종하라

    1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당시의 이교도의 특색은 도덕적 타락,특히 성적 타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로마나 헬라 그리고 유대 세계가 다 같았다. 당시의 이방인 교인 중에도 여전히 옛 생활을 반복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현실에 입각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1절).
    종말로 (토 로이폰,)는 [덧붙여서(캔트),결국 나머지는, 그 밖의 것에 대하여는을 뜻한다(빌3:1,살후 3:1). 말은 새로운 주제로 옮기게 위한 것이다...곧이어 나오는 내용에 대한 소개이지 앞의 내용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빈센트)](빌3:1의 주석).
    구하고는 에로토멘으로서, 문의하다(마21:14),요청하다(눅7:36,빌4:3)를 뜻한다. 이 말은 동의어인 아이테오가 낮은 위치에서 구하는 것임(행3:2,마7:9,마7:7)을 뜻하는데 비해, 동등 또는 보다 높은 위치에서 구하는 것을 듯하는 것이다. 특히 헨드릭슨과 토마스(p.215)는 친절하고 공손하게 요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이 '주 예수 안에서'(1:2의 주석을 보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요청하고 권면하는 것(2:11의 주석을 보라)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었을 때 이미 가르쳤던 내용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2:12의 주석을 보라)하나님께 '기쁘시게'(아레스케인,2:4의 주석을 보라)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의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1절 중,하반)라고 한다. 받았으니는 파렐라베테로서, 배움의 개념에 전달된 것 또는 전해진 것이란 뜻이 덧붙여진 말이다(갈1:9,빌4:9,골2:6).
    앞서 (1:3,7,8,2:13,3:6)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칭찬해 온 바울은 그들에게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한다. 즉 [다른 교인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들도 완전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것이다](헨리).또한 그 말은 지식 특히 종교적 지식을 배우는 목적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행위 및 삶을 위한 것임을 의미해 주고 있다. 한 마디로, 모든 지식은 참된 삶을 위한 지식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더욱 많이 힘써 행해야 할 '이유'(원문에는 2절 초두에 가르,가 있다)를 가리켜,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2절)라고 설명한다. 그는, 그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자신의 신념이나 이념 또는 경험에 의해서 지시한 것(1절 내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재하신 주 예수로 말미암아 지시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명령)에 성실하게 순종하는 연습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성공과 향상을 위한 최소한의 기초로서 요구되는 것이다](에어하트).

    나.하나님의 뜻인 거룩함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니라. 곧 음란을 버리고 4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5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6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7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8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주의 권면(1절)과 주의 명령 (2절)을 말한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이는 앞으로 주어질 경계의 근본적 기초를 보이는 것이다](Findlay).1) 또한 [이것은 이미 언급했던 하나님의 부르심(2:12)의 목적을 지시하는 것이다](칼빈).
    그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3절)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루토 가르 에스틴 텔레마 투 테우,)가 초두에 있어 매우 강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투토,)이 주어(Lightfoot)2) 인지 술어(De Wette)3)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뭏든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 의미상 차이는 없다.
    하나님의 뜻(텔레마 투 테우,)이란 [명령(precept)으로써,(사람이 복정하여야만 하는 변경할 수 없는 법 또는 명령), 목적으로써(그들의 숭고한 목적을 찾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능력으로써(목적하는 바를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약속으로써(그 목적의 성취에 있어서 절대적 믿음성) 나타나게 될 것이다](에어하트).
    "하나님의 뜻"의 한 예로 언급되고 있는 거룩함이란 하기 아스모스로서, 정화, 신성화, 헌신,성결,거룩하게 하는,그리고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여 도덕적으로 순수하게 되는 역사와 성결의 결과적인 상태를 뜻한다] (Thayers).4) 간단히 말하면 [성화의 과정과 성화된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프레임). 성화시키는 이는 하나님(5:23),그리스도(고전 1:230), 성령(5:8,살후2:13)이시다. 거룩함과 관련하여, 당시의 가장 큰 문제는 성적인 타락이었다(행15:20,갈5:19,엡5:3,골3:5).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음란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음란은 포르네이아스로서, 비도덕적이며 비합법적인 성 행위,즉 결혼 이외의 모든 종류의 성적 접촉을 뜻하는 것이다(창 38:24,신22:21,호9:1,삿20:6,겔22:11,마5:3219:9,행15:202921:25,고전5:16:187:2,엡5:314:8 등). 이 음행의 죄는 아담 이래 인간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파괴 행위라 할 수 있다. 또한 음행은 비유적으로 우상 숭배를 의미하기도 한다(호5:4,사57:9,겔16:15,계2:219:21등).
    [바클레이는 고대 세계의 음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대 세계는 성적인 부도덕을 전혀 죄악시 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남자가 첩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다. 고린도와 같은 곳에는 신전에 몇 백명씩이나 되는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소위 거룩한 매춘부였으며 그들의 수입은 신전의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헬라인들에 의하면, 아덴에 공창 제도를 제일 처음으로 도입하고 창녀굴을 짓게 한 사람을 솔론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사업의 소득으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위하여 새 신전을 짓게 하였다. 매춘 행위에서 얻어진 수입으로 신전을 짓는 것이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헬라인들의 견해가, 바로 음행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어떠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순결이란 기독교가 이 세계에 끌어들인 하나의 새로운 미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엡5:3의 주석).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당시의 남자들의 성적 타락에 대해, [창기는 향락을 위하여 두고, 정부는 나날의 육체의 욕구를 위하여 두고, 아내는 자녀를 생산하고 충실한 가정 주부로서 두었다]라고 설명하였다.5)
    네일은 [많은 이교도들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개종자들이 성과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태도를 수용한다는 것은 복음 윤리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이교도들은, 본능적인 수준에 근거한 성 행위란 자연스럽게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례적 음행과 남근 숭배는 많은 예배 의식들의 필수적 요소를 형성하였다. 로마서 1:24이하의 바울의 기술은 과장이 아니다. 그러한 이교 도시의 환경에서 엄격한 일부 일처주의 또는 금욕의 환경으로 들어간 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독교인의 의무, 즉 자기 탐닉의 반대인 자기 통제 곧 결혼에 대한 신실성과 순결에 대해 명백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음란한 연회, 원색 문학,결혼 서약의 이완, 난잡한 혼인, 성에 대한 전반적 고착 관념,성 관계의 보편적 허용과 함께 이교주의가 오늘 우리 시대에도 다시 발흥하고 있다.이와 같은 시대에 성의 순결을 가르치는 신약의 교훈은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신악의 성결 체험은 실제적인 응답인 것이다. 이 시대의 비도덕률은 자연주의와 진화론과 같은 잠식된 철학에 의하여 배양되고 용납된다. 복음의 다이나마이트는 이렇게 상당한 악덕의 안식처를 쳐부수기 위하여 요긴한 것이다](에어하트).
    음란을 버리라고 한 바울은 이어서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고(4절)라고 권한다.

    아내(스큐오스,)에 대해서는 비유적으로 보아 '아내'(벧전3:7)로 이해하는 설6)과 원래의 뜻대로 '도구,그릇,연장,몸(본절,고후 4:7,딤후 2:21,마12:29,눅17:31,행27:17,계2:27)으로 이해하는 설7)이 있다.
    전자(아내)를 취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1) 이 말은 성경에 '그릇'으로 바로 표시되거나, 비유적으로 '아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몸'으로 사용된 것은 신약이나 70인 역이나 고전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2) 취할 줄(크타스타이,)은 '지배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취한다',획득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3) 본문의 내용상 '아내'로 이해해야 문맥이 자연스럽다. (4) 고린도전서 7:2의 '음행의 연구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는 말씀과도 일치한다.
    후자(몸)을 취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 말은 원래의 뜻인 '두고, 그릇,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후 4:7). (2) 취할 줄은 '지배한다, 통솔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3) 본문의 내용상 '몸'으로 이해해도 문맥이 부자연스러울 것이 없다.(4) 네일과 모리스(Morris)의 말대로, 도구로써 아내를 생각하는 것은 결혼관을 승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결혼관을 하락시키는 것이고, 바울의 마음과 말씀을 유지하지 못한다.다라서 '몸'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5) 아내를 음행 방지의 방편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는 것이다.따라서 바울의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5:28),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33)는 말씀과 부합되지 않는다.(6) 바울이 말하는 거룩함과 존귀란 기혼 남녀나 남자에가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므로 몸(그릇)으로 취하는 것이 더 격합하다.
    결국 바울은, 기독교인이란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함과 자신에 대하여 존귀함으로 자신의 몸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하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5절)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6절) 라고 한다.
    혈통적으로 유대인든 이방인이든 상관 없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다 이방인이다(갈4:8,살후1:8,시79:6,렘9:310:25). 조물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할 때,인간은 인간을 격하시켜 우상 숭배와 온갖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롬1:18-). 색욕은 파테이 에피튀미아스로서, 문자적으로는 '욕망의 열정'또는 '격정적인 욕망'이다.

    파토스는 [본질적으로 느낌이나 경험을 뜻했지만, 헬라의 고전 작가들에 의해서 그것은 선하든 악하든, 어떤 수동적인 감정을 언급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후에는 거친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보우간,p.175) (골3:15의 주석). 신약에서는 부끄러운 욕심(롬1:26), 사욕(골3:5), 색욕(본절) 등 무절제한 욕망 또는 나쁜 종류의 정서를 의미한다. 에피튀미아는 의욕 또는 바램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식욕,성욕 포함)은 본래 좋은 것으로 삶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문제는 욕망의 대상과 내용이다. 여기서는 문맥상 색욕, 성욕, 색정등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촌감상은 [하나님을 모르고서 철학자일 수 있으리라. 정치가, 군인,경세가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하나님으로 모르고서 '사욕의 열정'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6절 상반)에 대해서는 지금가지의 문제와는 별도로 '탐욕'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거래할 때에 정당한 거래의 한계를 넘어서 형제의 재물을 착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는 설8)과 지금까지 말한 음란으로 보아, 부부 관계의 한계를 넘어서 형제의 아내를 빼앗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는 설9)이 있다.
    전후 문맥상으로 보나, 이 일에(엔 토 프라그마티,)에 관사가 있는 것으로 보나, 일이 단수로 된 것을 보아 후자가 더욱 적합하지만, 1절부터의 논의와 거룩의 개념을 꼭 성적인 문제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는 점을 보아 오히려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형제(신자와 불신자)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6절 하반)라고 설명한다.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는 에프디코스 퀴리오스로서, 문자적으로 '주는 신원자(보수자)이시라'의 뜻이다. 불의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복하산디는 것을 성서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사상이다(시140:12,단7:22,신10:18,사 49:4,욥36:6,잠22:23,사51:52,계6:1018:20,보수로 번역된 곳.신 32:35,사 34:8,시79:10, 시149:7,렘20:12,사1:24 등).여기서는 현재의 보복에 관해 말하는 것(고전 5:1-511:30-32)이라기보다는 재림의 때에 있을 주의 심판(롬 14:10,살전 3:13,요5:22,고후5:10)이다. 우리는 원수에게 보복하는 죄 가운데 떨어지지 않도록 궁극적인 보수자이신 주께 맡겨 주의 처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이제까지 언급ㅎ 모든 명령들을 순종해야 할 궁극적인 동기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2:3의 주석을 보라)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7절)라고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으로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8절)라고 단언한다.
    성결, 특히 성적 순결을 강조한 바울의 교훈은, 당시의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쉽사리 저버릴 수 있을 만큼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교훈을 저버리는 자는 사람인 자기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눅 10:16)고 말씀하셨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그의 성령'(토 프뉴마 아위투 토 하기온,), 즉 '그 거록한 그의 영'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성결한 삶을 위하여 우리 마음 속에 그의 거룩한 영을 보내 주셨다. 성도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같이 계시므로(요14:16-17,롬8:15,갈2:204:6),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고전 3:166:19). 그렇다고 하면, 바울의 교훈은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교훈이므로, 그 교훈을 저버리는 신자는 자기 마음 속에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공손하게 요청하고 권면하고 있다. 그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전에 가르쳤던 내용, 즉 하나님 앞에서 당연한 행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현재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인데, 바울은 더욱 많이 힘쓰도록 요청하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많이 힘써야 할 이유는, 그 내용이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로 말미암은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성도의 거룩함 곧 성화의 과정과 성화된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음란을 버리고, 각자 거룩하고 존귀하게 자기 몸을 통제하라고 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처럼 색욕을 좇지 말고, 성을 비롯한 모든 일에 있어서 한계를 넘어 형제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주께서 재림의 날에 신원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명령에 순종해야 할 궁극적인 동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신 목적이 거룩케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그러므로 성령에 의한 자기의 교훈을 저버리는 자는 사람인 자기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2. 형제 사랑과 근면(4:9-12)

    가.형제 사랑

    9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10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이제 ..에 관하여는"은 페리 데로서, 바울이 새로운 주제를 도립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는 형식이다(4:13,15:1,비교:고전 7:1258:112:1, 16:1, 12).고린도서에서는 질문을 받은 문제를 가리켰지만, 여기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관한 디모데의 구두 보고 가운데 각각 다른 요소들을 가리키고 있다(3:6).
    바울은 형제 사랑의 중요성에 비추어 이전에 자기가 가르쳤었고 또한 본서의 앞 부분(1:3,3:12)에서도 언급했던 바를 이제 새삼스럽게 다시 거론하고 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9절).
    형제 사랑은 필라델피아스로서, 형제같은 사랑(바니스)이라기보다는 형제의 사랑("Lightfoot,Ellicott"1)(에어하트),또는 형제에 대한 사랑이다(헨드릭슨). 사랑의 대상인 형제는 혈연, 국가 또는 동맹에 의한 형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이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벧전2:17)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프레임).
    이 사랑(필리아)은 신약에 흔한 아가페가 신적이며 이성적인 사랑인데 비해, 인간적이며 감정적인 따스한 사랑이다. 즉 인륜적 사랑이다(이상근),바니스는 필리아를 가리켜, 특별한 자비와 애정을 뜻한다고 설명하였다.
    바울은 형제에 대한 사랑에 관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더 이상 쓸 필요(크레이안)가 없는 이유에 대해, 그들이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즉 그들 안에 내재하신 성령의 감동(롬 5:5,갈 5:22)를 받아 서로 '사랑함'(1:3의 주석을 보라) 이라 (9절)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시매,그를 알고 사랑을 모를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람에게 나타내사, 그에게 친히 사랑을 가르쳐 주신다. 옳다. 사랑은 이것을 사람에게서 배울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서만, 혹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서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저 사도 바울이라 해도, 사랑을 사람에게 전하기에 족한 그릇이 못된다](내촌감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의 실천에 대해, 너희가 온 '마게도냐'(1:7의 주석을 보라)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10절) 라고 칭찬하며 또한 부탁한다. 주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 주와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한계가 있을 수 없다. 참사랑에는 끊임없는 성장만 있을 뿐이다. 아마 바울만큼 영적 진보와 성장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근면

    11또는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2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어서 바울은 근면에 대해,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절)라고 권면한다.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란 아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명령한 것을 지시하는 것 같다.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절 중, 하반)의 원문에는 힘쓰라(필로티메이스타이,:후기 헬라어에서는 영예를 사랑하다, 야망을 품다, 공공정신으로 행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George Milligan)2)가 맨 앞에 있어 다음 세가지에 관련된다.

    첫째는 '종용하기를 힘쓰라'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평온하게 되기 위하여 열망하라'는 뜻이다(에어하트),종용하여 (헤쉬카제인,)는 고요한 것, 평온, 침묵 등을 뜻한다. 이러한 훈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문제가 침착하지 못하고 몹시 들떠 있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둘째는 자기 일을 하고(프라스세인 타 이디아,), 즉 '자기 일을 행하기를 힘쓰라'이다. 이러한 훈계는 그들의 들떠 있는 마음의 외적 표현인 남의 일에 대한 참견 또는 간섭하기 좋아하는 풍조가 교회를 어지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조용히 자기 일에 전념할 줄 아는 사람은 불필요하게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느라고 자기 일을 망치고, 자기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세째는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이다. 일하기는 에르카제스타이로서, 손으로 하는 노동을 지시하지만, 그러나 숙련 노동인지 미숙련 노동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바울 자신도 손으로 장막짓는 일을 하였다(행20:34). '수신자들도 대부분이 문자 그대로 수공업자들었을 것이다] (Alford,Findlay).3) 에덴 이후 이마에 땀에 흐르게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과업이었다(창 3:17-19).
    수신자들 중에는 제손으로 일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형제들에게 폐를 끼치고,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었다(
    살후 3:8-12).
    수신자들 중에 공연히 마음이 들더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고, 자기 일을 힘쓰지 않고, 손을 놀려 일하기를 싫어하게 된 주된 요인은,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가 잘 설명하고 있다. [
    재림의 교훈은 데살로니가에 별나고 이상한 상황을 만들어 내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림의 날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저들은 일상의 일을 포기하고 떠들썩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자신과 다른 이들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일상 생활은 붕괴되었다. 생계를 잇는 과제는 단념하였다. 그리고 저들은 그저 흥분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상 참 신앙은 일상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대신에, 오히려 더욱 충실하게 감당케 하는 것이다. [
    '인생은 끝난다'는 사상은 일을 정지할 이유가 되지 안는다](바클레이). 더우기 언제일지 모르는 죽음이나 재림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매일의 일에 충실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권하는 근면의 목적에 대해,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절)고 설명한다.
    외인은 투스 엑소로서,[교회 밖의 사람들(고던 5:12,13,골4:5)곧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다.이 표현은 이방인들을 그렇게 부른 유대인들에게서 빌려온 것이다(아보트)]골 4:5의 주석).
    단정히는 유스케모노스로서, '좋은, 모양,'의 뜻으로,고린도전서 14:40에는 방언 문제의 결구로 그릇된 신비주의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적당하게'행하는 질서를 가리킨다. 그 외에 '이치에 합하게'(고전7:35),'존귀한'(막15:43)등으로도 번역된다. 신앙의 핑계로 일상 생활이 비정상으로 되어 사회로부터 빈축을 사서는 안된다. 오히려 불신자들보다 더 단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면에서부터 교회에 끌리게 하여야 할 것이다(이상근).
    아무 궁핍함이 없게 (메데노스 크레이안 에케테,)의 대명사인 메데노스는 중성으로도, 남성으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구는 '아무 궁핍함이 없게'4)로도,'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게'5)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문맥상 후자가 더 적합하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는 형제들에 대한 인간적이며 감정적인 따스한 사랑에 대해서는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온 마게도냐 혀제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더 많이 사랑하도록 권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전에 명한 것처럼 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제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한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대하여 합당하게 행하고 또한 궁핍한 것이 없어 남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3. 부활과 재림(4:13-18)

    가.부활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데살로니가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자는 자(죽은 자)들에 관한 잘못된 지식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있어야만 확실한 구원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재림 전에 죽은 성도에 대해 불신자나 다름없이 슬퍼하였다. 이 점에 대해 클로펜스테인은 [데살로니가의 문제란 고린도에서 그런 것처럼 부활에 대한 공공연한 부인이 아니었다(고전 15:12). 또한 후메네오와 빌리도의 주장인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라고 하는 이교 사상도 아니었다(딤후 2:17-18). 그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왕국에 대한 성도들의 부활에 관한 연대기적 관계를 오해한 것이었다'(Lillie)라고 설명하였다. [그들은 재림 이전에 죽은 사람들을 근심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바클레이).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절)고 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아델포이)라는 애칭이 "그러나"(데,)라는 접속사와 더불어 새 부분이 시작되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자는 자들은 톤 코이모메논으로서, 잠자고 있는 자들 곧 죽은 자들을 뜻하는 완곡 어법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근거 삼아 죽은 자가 자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 서는 안된다(눅 16:22,요13:25). 또한 육체만 자고 영은 깨어 있다고 논할 필요도 없다](흑기).
    죽은 자를 자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구약(창47:30,삼하 7:12,신31:16,왕상2:10,단12:2)이나 신약(마9:2427:52,요11:11,행7:6013:36,고전7:39, 11: 30,15:6,18,51,벧후 3: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한 표현은 이교 세계나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이말 위에 어떤 교리적 의미를 기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에어하트). 그러나 기독교에서 특히 이 표현을 쓴 것은 미래의 부활을 전제하는 것으로 본다.1) 에어하트는 [이 비유적인 말이 시작하는 개념, 즉 공포나 쏘는 것이 없는 죽음(고전 15:55-57), 안식 그리고 몸의 미래적 부활은 분명히 기독교의 본질인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초대 교인의 묘비에 새겨진 공통적인 비문은 [그는 잠들었다]라는 것이었다.2) 바울은 기독교인의 죽음을 의식이 없는 휴식 상태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태로 보고 있다(빌1:23).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16절)라는 표현도 그것이 영혼의 잠과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는 자"란 비록 그들의 유체는 무덤 속에 있지만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계속 교제하는 자라고 생각하였다](토마스,pp.258-259).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13절중반)란 바울이 독자들의 그릇된 생각이나 난해한 문제를 해명해 주려고 할 때에나(롬11:25,고전10:112:1),혹은 독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정형을 간절하게 알리고자 할 때에(롬1:13,고후 1:8,골2:1)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에 관해 알지 못함을 원치 않는 이유를 가리켜, 바울은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절 하반)라고 설명한다.
    소망없는 다른 이는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엡2:12). 그들의 모든 소망이나 역사적 대망은 결국 거대한 죽음의 절망 속에 삼켜지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소망일 수가 없다(롬8:24). 또한 그들의 영혼 불멸에 대한 소망도 실재가 아닌 공허한 사변에 불과한 것이므로 참된 의미에서 소망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도, 내세의 소망도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 죽음이란 최후, 최대의 절망적인 슬픔인 것이다.
    바울이 성도들로 하여금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은 것이지, 죽은 자에 대한 추모를 금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근거에 대해 바울은,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1:10의 주석을 보라) 이와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14절)라고 설명한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는 세 가지의 어려운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예수 안에서(디아 투 이예수,)의 전치사인 안에서, 즉 디아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나"예수 안에"또는 "주 안에"라는 애용구를 사용할 때에는 늘 "엔," 이란 명백한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레이크(Lake)는 그 전치사를 "때문에"로 보아,"예수 때문에 잠자는 자 곧 순교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3) 그러나 죽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다 순교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미루어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디아는 "말미암아"나"통하여"의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예수 안에서가 "자라는 자"(코이멘타스,)를 지시하는 것인가.4) 데리고 오시리라(악세이,)를 지시하는 것인가5)하는 문제이다. 첫째 문제에 대한 논의의 결과를 미루어 보아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세째는 데리고 오시리라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인지(Theodore of Mopsuestia,Vos 등)6), 재림 때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는 것7)인지 하는 문제이다. 다음 절(15절)의 "...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보아,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인 후자가 적합하다.

    결국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는 자들도 예수로 말미암아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온갖 성경 문서 중 맨 처음으로 쓰여진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이 가장 흥미있는 점이다. 바울이 이 기록을 쓴 것은 부활 사실이 있은 후 20년 못된 때였다. 그러므로 이 성경 귀절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중심되는 교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이며 동시에 거기 따르는 신자의 부활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어드맨).

    나. 재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바울은 앞의 내용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에 대해,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15절)고 설명한다. 주의 말씀으로(엔 로고 퀴리우,)에 대해 (1) 복음서 등에 이미 나타난 말씀(마24:3031, 26:64,25:1,요6:39등)을 바울이 해석한 것이라는 설8), (2) 복음서에 없는 구전의 말씀이라는 설(행20:35,살후2:153:6),9) (3) 바울에게 독특하게 계시된 것이라는 설(고전 &;29,11:27,15:51.갈1:11122:2,빌 4:5)10)등이 있다.15-17절에 소개된 주의 말씀의 내용이 복음서와 다르므로 (2) 설이나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구전 혹은 계시로 받은 주의 말씀의 내용은 "주 강림하실 때까지"(1:10의 주석을 보라)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15절 하반)고 하는 것이다.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에 대해(1) 바울 자신을 포함한 것, 즉 바울 자신도 재림때까지 살아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잘못되었다는 설11), (2) 재림때까지 살아남아 있을 모든 성도를 대언한 것이라는 설 12)이 있다. 아무도 재림의 때가 언제인지 모르므로(마24:36),바울 역시 자신이 재림의 때에 살아 남아 있을지 죽어 있을지 몰랐을 것이다. 따라서 (2)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설을 취해도 잘못은 없다고 믿는다. 역대의 성도들은 언제나 주의 재림이 임박한 줄 생각하고, 생전에 주를 맞이할 심적 준비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 믿음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자신의 죽음을 예기한 일이 있었지만, 그러나 생전에 주를 만나기 원했던 것이다(빌1:23,고후5:1-2,딤후 4:6](이상근). 자는 자란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특히 결단코는 이중 부정인 우 메로서, 강력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바울은 재림의 광경에 대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16절)라고 설명한다. 원문 초두에는 호티(왜냐하면,즉) 란 접속사가 있어 전절의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께서란 아위토스 호 퀴리오스로서,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주 자신이'의 뜻이다. 바로 주 자신이 재림하실 때에는 세 가지 소리가 들린다.

    (1) 호령은 엔 켈류스마티로서, 원래 지휘관에 군대를 향해, 사냥꾼이 개덜을 향해, 마부가 말들을 향해, 선장이 선원들을 향해 외치는 명령을 가리켰다(헨드릭슨). 여기서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요(롬14:9), 재판장(딤후 4:18,고후 5:10)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호령을 지시하는 것이다.

    (2) 천사장의 소리는 엔 포네 아르캉겔루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그리스도의 심판대로 소환하는 전령자의 의무를 수행한느 것을 지시하는 것 같다(칼빈,바니스). 여기 천사장(아르캉켈루,)란 말은 이곳 외에 유다서 9에만 보인다. 천사 13)에 관한 기사는 구약이나 외경 등에 많이 나타나고 신약에서도 나타난다. 본절의 천사장은 유다서 9이나 요한계시록 12:7에 의하면 미카엘로 보인다. 미카엘은 선한 천사들의 지도자요 하나님의 백성의 수호 천사이다(단 10:132112:1). 미카엘을 포함한 일곱 천사장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가브리엘(단8:169:21,비교:눅1:1926), 성도들의 기도를 집성하는 라파엘(토비트 3:17,5:4,8:2,9:1,5,12:15), 그 밖에 우리엘(II Esd.4:1),라구엘,사리엘, 예레미엘 등이다. 최대의 천사장은 루시파이었으나 타락하여 사단이 되었다(사14:12).14)

    (3) 하나님의 나팔로는 엔 살핑기 테우로서, 하나님께서 부시는 나팔이 아니라 백성을 불러모아 하나님의 뜻을 전하거나 그의 현현을 상징하는 나팔일 것이다 (참조:출19:1316-19), 시 47:5,사27:13,슥9:14,마24:31,계1:10등). 바울은 나팔과 관련하여,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라고 하였다. 위 세가지 소리는 [육의 고막에 울리는 소리가 아니다. 또 제사장이 불어대는 은나팔이 아니다. 양심에 울려퍼지는 소리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두려운 음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눅17:20)라고 했으매, 그리스도의 재림이, 육의 이목을 끄는 것 같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재래는 현상적임에 틀림없다해도, 그 현상은 주로 영적이 아닐 수 없다.. 吾人은 성서의 이 말씀을 가지고서 예수의 관물적 재림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해석할 수 없다](내촌감삼). 재림의 현상을 우리의 시공 개념에다 결부시키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렌스키). 아마도 위의 표현은 초림과는 달리, 권능의 심판자로서 공개적으로 '강림'(1:10의 주석을 보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엄을 나타내는 것 같다.

    바울은 재림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6절 하반)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천년 왕국과 관련지어, 그 이전에 있을 신자의 부활 곧 '첫째 부활'(계 20:6,고전 15:52)을 언급하는 것("Wohlenbherg",15 이상근)이 아니다. 먼저 일어나고라는 기술은 재림 때까지 살아 남은 자들의 연속적인 일어남, 즉 몸의 부활(신령한 몸<고전15:5152,빌3:21,롬8:23)을 시사하는 것이지 나머지 죽은 자들의 두 번째 부활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16) 이 점에 대해 글로악은 [여기서 주장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자보다 먼저 변화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자 사이의 대조가 아니다. 또한 악한 자의 부활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그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숙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17절) 고 설명한다. 그후에 (에페이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후에, 재림 당시에 살아 있는 성도들이 순식간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저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기 위해 구름 속(비교:단7:13,행1:9,계11:12)으로 끌어 올려진다는 것이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공중에(아에라,)은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보다는 아래이고, 인간이 사는 땅보다는 높은 곳으로 영들, 특히 악령들의 거주지이다. 이들을 지배하는 존재가 "공중의 권세잡은 자"곧 사단인 것이다](엡2:2의 주석). 이 사단의 지배 영역이 재림하시는 주와 구원받은 성도들의 만남의 무대가 된다는 것이다.
    끌어 올려란 하르파케소메타로서, 포착하다. 열심히 요청하다, 잡아채다, 강탈하다, 잡아가다, 우리는 이 말로부터 환희라는 용어를 이끌어 낸다. 거기에는 구별이 되었다고 부활하여 사랑받고 있는 사람들과의 기쁜 재결합이 있을 것이다(에어하트).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17절 하반)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신령한 몸으로 부활 또는 변화된 우리가 영원토록 주와 같이 살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비교:막 13:27,마24:31). 그 때에 우리가 살 세계에 대해 요한은"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지 않더라...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최후, 최대의 소망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18절-2:11의 "권면하고"의 주석을 보라)고 바울은 결론짓는다.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의 구원에 대해 확신이 없었으므로 크나 큰 슬픔에 잠기는 사람이 있었다(13절). 그래서 바울은 위와 같은 사실들을 가르쳐 줌으로써, 서로 권면 겸 위로해 주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은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슬퍼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부활과 재림에 관해 가르침으로써 위로하고 있다.

    그는, 믿는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는 자들 곧 재림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도 예수로 말미암아 저와 함께 재림 때에 데리고 오신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위의 내용과 저와 함께 재림 때에 데리고 오신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에 대해, 구전 또는 계시로 받은 주의 말씀으로 말한다. 즉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성도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자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고, 곧 이어 살아 있는 성도들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기 위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진다. 그리하여 신자는 영원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새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이므로, 신자 상호간에 권면 겸 위로해야 한다.

    4. 재림의 시기와 그 대책(5:1-11)

    가,알수 없는 때

    1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시헤 앎이라 3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앞(4:13-18)에서 재림 때에 있을 죽은 성도들의 부활을 다룬 바울은, 이제 또 다른 문제인 재림의 때와 시기 그리고 그 대책을 거론하고 있다. 그는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1절)이라고 한다.

    때와 시기(톤 크로논카이 톤 카이룬,)의 [전자는 단지 연륜이 경과하는 것을 지시한 일반적인 표현이고, 이에 대하여 후자는 이러저러한 사건을 함축한 연륜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첨가되어 있다(행1:7,단2:21)(렌스키). 너희에게 쓸 '것'(필요:크레이안,)이 없음은이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항상 재림에 대해 준비하고 있기 때문(벤겔)이나, 재림의 때와 시기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미 저자(바울)의 가르침을 받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 바울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2절)고 설명한다. 원문 초두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있어 전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주의 날은 해 헤메라 퀴리우1)로서, 구약의 "여호와의 날"에 해당된다(욜 1:152:1211313:14,사2:123:16-24,13:9-11,렘 39:7,겔13:5,암5:1819,습1:14-18).바울은 이를 "그날,(5:4,고전3:13,롬13:12),"그날,(살후1:10),"그리스도의 날,"(빌1:102: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1:8)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다(1:10의 주석을 보라).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마24:36,계3:3),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밤에 도적 같이 이른다는 것이다. [이 표현에 근거하여, 고대 교부들은 그리스도께서 밤에 심판하러 오실 것으로 추론하였으므로 철야제를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더욱 세밀하게, 유월절 저녁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에서 유추하여 부활절 전야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확정하였다](글로악). 그러나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예기치 않은 때에 갑작스럽게 임하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마 24:44,막13:3536 눅12:39,벧후3:10). 너희 자신이 '자세히'(아크리보스:정확히) 앎이라(2절 하반)는 말에서, 우리는 단순히 진리를 이성적으로 안다는 것과 그 진리를 실제 생활 속에 구현한다는 것이 별개의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제 또 본서를 통해 재림에 관해 훈계를 받았지만, 후에 재림 문제에 대해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였다(딤후2:12). 이어서 바울은 그 날과 불신자들에 관하여,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참조:렘6:14,겔13:10)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3절)라고 설명한다.

    엘리코트(Ellicott)2)와 프레임에 의하면, 평안(에이레네,)은 그들의 내면적 평온을 특징짓는 말이며(1:1의 주석을 보라), 안전(아스팔레이아,)이란 그들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를 나타낸다고 한다.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불신자들이 실제로 평화와 안전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말할지도 모를 때' (호탄 가르 레고신,), 바로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3절 중,하반)고 하는 것이다.
    해산 고통은 오딘으로서, 문자적으로 이곳에만 사용되나 비유적으로는 신구약에 흔히 사용되었다(믹4:9,렘6:2422:33,사13:826:17).여기서는 재림때에 불신자들에게 임할 멸망의 갑작스러움(눅17:31),극도의 고통, 필연성을 비유하는 것이다.
    멸망은 올레트로스로서, 존재의 절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프레임). 이말은 재림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이,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받는 영원한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다(살후 1:9).
    홀연히 임하는 멸망의 특성은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3절 하반)고 하는 말로 표현되고있다. 원문에는 이중 부정인 우메로 아주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주의 재림은 불신자들이 현실 생활에 대해 평안하다고 안심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임할 것이다. [재림 같은 궁극적 사건 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사 제반에 있어 안일에 도취될 때 패망이 다가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게 읽어준 노래의 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신32:15-16).

    나,격려와 보증

    4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바울은 "그러나"(데,)로 시작하여 앞절과 반대되는 사실을 논의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4절).
    어두움(스코테이,)은 영적 무지(엡4:18,고후4:46),타락(행26:18),고통(사9:1),사망(사9:2)등을 상징한다. 한 마디로, 사단과 그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과 영역의 특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엘리코트(Ellicott)에 의하면, [어두움에라는 말은 사악함과 어두어진 이해력의 영역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파멸에 임박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음을 가리킨다]고 한다.4)
    그러므로 어두움에 있지 아니한 믿음의 형제들에게, 그 날이 도적 5)같이, 즉 예기치 않은 때에 갑작스럽게 임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어서 바울은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한 신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낯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5절).

    빛의 아들(휘오이 포토스,)은 히브리 표현법이다. 빛이란 본래 하나님의 존엄성과 영광(요일 1:5,딤전 6:16)그리고 그의 완전한 의와 진리(시43:3,요3:20,요일1:5)를 표현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빛이시다(요일 1:5,요1:9). [알란에 의;하면 [이 빛은 충분히 그리고 명백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비치므로 무지와 죄와 죽음이 극복된다(눅 1:78-,마4:16,요1:1-188:129:1-41,고후4:4-6).따라서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은 빛의 본질을 나누어 갖는다(요12:35-)라고 한다](엡5:8의 주석).
    그러므로 빛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본질이다(마5:14,요3:20).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밤 또는 어두움의 영역에서 빛의 영역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다(행26:18,롬13:12,고후4:6,골1:13,벧전2:9).
    그러한 의미에서 신자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5절 하반)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라이트후트(Lightfoot)는 [그리스도는 빛이시고, 교회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의 낮이다]라고 하지만,그러나 두 가지 표현을 엄격히 구분할 수는 없다. 이 이중적 표현은 단순히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렌스키,글로악,이상근).
    물론 낮의란 주의 날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렌스키,토마스,p.268),영적인 빛에 관련해서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Lightfoot).6)

    다.근신하라

    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바울은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인 신자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6절)라고 설명한다. 이 귀절은 지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윤리적 행동을 위한 굳건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란 은유로서, 불신자들처럼 도덕적 및 영적 무각성, 무감각,그리고 부동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5:14에서 잠자는 자란 죄와 허물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자를 의미하고 있다. 자는 (카튜도멘,)것과 정반대인,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마24:4225:13,막13:35)깨어란 은유로서 경계, 도덕적 기민,그리고 불의한 자들의 공격에 대한 불침번을 뜻한다(프레임). 이 말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상태 및 생활을 의미하기도 한다(히12:2). 헨드릭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깨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과 시간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마 24:4225:13,막13:3537). (2) 끊임없이 불침번 노릇을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양 떼를 위협하는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적들이 있기 때문이다(행 20:31,벧전5:8). (3) 깨어 있다(경계)는 것은 영적으로 깨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계 3:2316:15). (4) 깨어 있다는 것은 감사를 포함하는 규칙적인 기도의 습관을 의미하는 것이다 (골4:2). (5) 아마도 경계에 관한 가장 충분한 기술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314)일 것이다. 깨어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할(글로악) 근신할지라는 네포멘으로서, 영적으로 조용하고 침착하다. 절제하다, 냉철하다,신중하다를 뜻한다.7)

    베드로전서 5:8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만일 사람이 경계는 하지만 근신하지 않는다면, 무수한 위험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8)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잘못된 종말론적 흥분은 심각한 문제이었으며, 따라서 영적으로 근신하는 것이 그 치료책이었다(토마스,p.269).베드드전서 1:13에는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라고 하였다. 동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바울은 6절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원문에는 7절 초두에 가르(왜냐하면)가 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7절)라고 일상적인 경험을 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잠자는 일과 술 취하는 일들은 밤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6절에 있는 "잠자는 일"에 관한 그 자신의 상징적 용법을 잠에 대한 평상시의 습성에 관련시켜 설명하며, "술 취함"을 사용하여 근신에 대한 자신의 언급을 강조하고 있다(토마스,p269).

    이제 바울은 불신자들과 대조하여 신자들을 가리켜,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8절)라고 권면한다. 여기서의 근신은 영적인 술 취함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만 언급되고 있다. 영적인 의미에서의 낮에 속하였으니(8절상반)라는 개념은 4,5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근신하는 행위의 동인이 되고 있다. 근신의 내용은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8절 하반-1:3의 주석을 보라)고 하는 것이다. 구원의 소망(엘피다 소테리아스,)의 구원이란 부정적으로는 진노(1:10)로부터의 자유이며, 긍정적으로는 5:9-10의 선언과 같이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구원은 종말론적 개념 곧 얻어질 어떤 것이므로(5:9), 바울은 ()이라 하지 않고, ()이라 말하는 것이다. 흉배와 투구는 고대 군인의 군장의 일부이었다(사59:17). 전자는 [고대 군인들의 걸친 것으로 굳은 가족, 쇠 또는 구리 등으로 만들어졌으며,[큰 것은 목에서부터 허벅지까지 내려가, 가슴과 등을 보호함으로써 생명을 지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우드)](엡6:14의 주석). 후자는 [고대 군인들의 검이나 전투용 곤봉이나 전투용 도끼 등에 의한 적의 공격으로부터 치명적인 부분인 머리를 방어하기 위해 쓴 것으로, 단단한 가죽이나 청동 또는 놋쇠로 만들어졌고 그 꼭대기에 깃털로 장식하였다(바니스), 바르트에 의하면 [투구 안에는 모전이나 해면을 대어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하였다.작은 도끼나 쇠망치는 견고한 투구를 깨뜨릴 수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 경첩으로 투구의 앞 부분에 면갑을 달기도 하였다]고 한다](엡6:17의 주석). 바울은 종종 군대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롬 6:13,고후10:4,딤후 2:4,엡 6:13-17),특히 에베소서 6:13-17에는 전신갑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라.우리를 세우신 목적

    9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10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끝으로 바울은 신자들의 궁극적인 구원의 소망의 근거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9절)고 설명한다(원문 초두에는 호티<왜냐하면>가 있다).
    세우심은 에테토이며, 의무와 운명이 결합된 낱말로서,정하다,지정하다, 임명하다,예정하다등을 뜻한다. 이 말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어떤 사건을 결정하시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Milligan) 3).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를 정하신 목적은, 마지막 심판 때에 그의 "노하심"(오르겐,1:10의 주석을 보라)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중보자)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
    "얻다"라는 말은 명사인 페리포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은 능동적인 의미인 얻음, 획득함, 손에 넣음 등을 뜻하기도 하고(살후 2:13,히10:39,빌2:12-13)10), 수동적인 의미인 소유(말 3:17,벧전 2:9),양자됨, 남은 자(대하 14:13)등을 뜻하기도 하다 ("Lightfoot"11),토마스.p.270).
    여기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신자 속에 작용하지 않는 하, 신자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빌2:12)이 불가능하므로 바울은 이어서 구원이 얻어지는 방법, 즉 내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원인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프레임).
    이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는 과저에서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고 또한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 있다면, 오로지 내재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랑의 역사에 대해 복종하는일이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대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10절)고 설명한다. 본절은 본서가 바울의 최고의 서신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바울은 처음으로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수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 속에 내재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는 부활의 주께서는, 또한 우리, 즉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던 이시다(갈1:34, 엡1:7,고전 15:3). 그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즉 사나 죽으나12) 자기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살게 하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요한계시록 1:18에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내촌감상은 [그리스도는 그 몸에 있어서 죽음을 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 그 안에 있는 자에게 죽음 없다. 우리들은 살아도 그와 함께 있어서 살고, 죽어도 그와 함께 있어서 사는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11절)고 한다.

    그러므로(디오,) 즉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살 보증을 받았으므로의 뜻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낙심하지 않도록 서로 '권면하고'(2:11의 주석을 보라),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덕을 세우기란 오이코도메이테로서, 원래는 '집을 세운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이 말을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인(고전 3:166:19),또는 교회가 지어져 가는 것(성장)으로 비유하여 사용하였다(엡2:20-22). 다시 말하면 지식과 확신과 영적인 힘을 증가시키는 것이다(고전 8:110:2314:4). 여기서는 서로간에 영적 진보를 도모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11절 하반)는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 진보 및 유익을 도모해 주는 일을 계속해서 더 잘 하도록 권면을 받고 있다.

    주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 부여된 과제 중 하나는 끊임없이 자신 및 형제들의 성장을 축구하는 일이다(고후 4:16,엡4:13).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의 구원관을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죄의 용서, 내재하신 영적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한 도덕적 갱신, 그리고 장래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최종적 완성이다](프레임).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이 주의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하여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자신이 주의 날이 밤이 도적처럼 예기치 않은 때 갑작스럽게 이를 줄을 자세하게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이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말한 때, 마치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르는 것처럼 결단코 피할 수 없는 멸망의 형벌이 갑자기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그들이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로서 사단의 영역인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으므로도 도적 같이 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들과 같이 자지 말고, 즉 도덕적 및 영적 무각성, 무감각 상태가 되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해야 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밤에 자고 밤에 술에 취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했으므로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한다.
    끝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을 가리켜, 마지막 심판 때에 그의 진노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란,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사나 죽으나 그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 권면하고 서로 영적 진보를 도모해 주어야 한다.

    5. 교역자들을 귀히 여기라(5:12-13).

    12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본서의 4장과 5장 사이에는 구조적인 유사점이 있다. 즉 4:1의 권면에 이어서 2-8절에서 윤리적 교훈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5:11의 격려(권면)에 이어서 12-22절까지는 또다시 윤리적 교훈으로 연결된다. 이 두 부분의 윤리적 교훈 사이에 재림에 관한 교설이 삽입되어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보면, 바울의 종말론을 윤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김용옥).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4:1의 주석을 보라)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코포이온타스, 1:3의 주석을보라) '주 안에서'(1:2의 "그리스도 안"의 주석을 보라)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12절)라고 하여 교역자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다스리며는 프로이스타메누스로서, 집을 다스리는 것(딤전 3:4),선한 일에 참가하는 것(딛3:814), 통치하는 장로들(딤전 5:17)등에 사용되었다. 또한 이 말은 지도하다, 통치하다, 지도자로서 행하다 등의 기본적인 의미 외에도 보호하다, 돌보다, 지키다 등의 파생된 의미가 있다(프레임). 토마스(p.274)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아 하나가 되는 곳에서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복종은 주를 섬기는 일이다. 지도자들은 회중을 인도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지도자들의 결정은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다(참고:히13:7)]라고 설명하고 있다.

    권하는이란 누테툰타스로서, [훈계하다, 권고하다,경고하다,타이르다 등을 뜻한다. 보우간 (p.152)은 ['권하다'라는 말은 바울 서신에 여덟 번, 그 외의 신약에는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데(행20:31),이는 의지와 정감을 수반하여 권면하는 것을 뜻한다]라고 설명하며, 핀들레이는 [과거에 대한 책망을 지시할 수도 있으나, 더욱 특별하게 미래에 대한 경고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골1:28의 주석).
    본절에 사용된 분사는 모두 한 개의 관사 투스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아서, 여기서 언급된 것은 세 그룹의 사람들이 아니라 세 가지 기능을 가진 한 그룹의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토마스, p.275,김용욱).1)
    바울은 그러한 기능을 가진 교역자들을 알아줄 뿐만 아니라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13절)고 권한다.
    평신도들은 교역자들의 '역사'(에르곤,1:3의 주석을 보라)를 생각하여, 두려움이나 불신이 아닌 '사랑'(1:3의 주석을 보라) 안에서 최대한 존경해야만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교역자가 완전무결한 존재이기 때문에 최대한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의 실수와 잘못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계속 그들을 들어 백성들을 지도하게 하셨으며, 생각있는 백성들 또한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한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그들의 모든 역사는 부모나 스승의 그것보다 더욱 위대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정된 틀에 맞추어 교역자를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개성 및 재능 등을 최대한 살려 일하도록 교역자로 부르신다. 따라서 평시노들은 자기들의 교역자나 그의 목회 방식에 대해,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3:17)라고 하였다.
    성도들은 교역자들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며, 또한 서로 '화목하라'(에이레뉴에테,1:1의 "평강"의 주석을 보라)는 말씀을 지켜야 한다.
    교회 생활에는 여러가지 일로 인해 성도들 사이에 불화와 반목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 유무가 아니라, 어떻게 주 안에서 문제를 극복하여 화목을 유지해 나가느냐 함이다. 교역자와 성도, 그리고 성도와 성도가 주안에서 화목할 때(롬12:1814:19)참된 성장이 가능하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들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들을 지도하며 훈계하는 교역자들을 알아주라"고 요청한다. 또한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교역자들이 완전무결한 존재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교역자들의 역사로 인해 교역자들을 사랑하고 최대한 존중하라고 한다.
    이어 그는 성도들끼리 화목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6. 부족한 형제들을 도우라(5:14-15)

    14또 혀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15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바울은 새롭고도 보다 강력한 지시 사항들을 일러 주기 위해, 또 형제들아 '너희를'1) 권면하노니(14절 상반)라는 말로 시작한다. 형제들아에 대해(1)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2), 일반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3), (3) 지도자들과 교인들 모두들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헨리,"모리스"4) 궁촌무천)등이 있다. 그 이하의 내용을 보아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한 것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일반 교인들을 배제한 것은 아니라, 일반 교인들 역시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나 불신자들에게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울은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14절 중,하반)고 한다. 규모 없는 자들은 투스 아타크투스로서, 원래 군사 용어이었으며(chrysostom)5)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난다. 이 말은 군기를 문란하게 만드는 자들을 뜻한다.또한 의무에 있어서 태만한 자들을 뜻하기도 한다(살후3:6). 렌스키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 그와 같은 자들이 있다는 것으로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이교도에서 전향한지가 오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 회심한 자들이 계속해서 회중 가운데 들어오고 있어서 그러한 과오는 계속 저지러지게 마련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러한 자들을 '권계하라'(누테테이타,5:12의 "권하는"의 주석을 보라)고 명하는 것이다.

    마음이 약한 자들(투스 올리고프쉬쿠스,)은 (작다)와 (혼)의 합성어로서, 담력이 적은 자들, 낙담하는 자들,소심한 자들을 뜻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박해로 인한 환난(2:14,3:3), 또는 재림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형제들에 대한 오해(4:13-18),또는 재림 때의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당혹(5:1-12)등의 그러한 자들을 '안위하라'(파라뮈테이스테,-2:11의 "위로하고"의 주석을 보라)고 명하는 것이다. 힘이 없는 자들은 톤 아스테논으로서, 신체가 허약한 사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미성숙한 교인들을 이겨내기 어려운 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시119:9799,수1:8) 기도하고(막9:29) 순종하지 않으면 안된다.또한 우리는 그러한 자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말대로 붙들어 주어야 한다. 붙들어 주며란 안테케스테로서, 약한 자를 친절하게 이끌어 주고 지켜 준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14절 하반)의 모든 사람은 앞서 말한 바 있는 규모 없는 자들, 마음이 약한 자들, 힘이 없는 자들을 총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들을 포함한 일반인 전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래 참으라는 명령형인 마크로튀메이테로서, 근원적 의미는 사람에 대해 참는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매우 참을성이 강하여 불쾌하거나 심술궃거나 잔인한 대우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지 않고, 가르칠 수도 없는 어리석기 그지 없는 것에 실망하지 않고, 미련한 것에 대해 성내지 않고, 미움에 대해 사랑이 결코 변질되지 않는 특질을 가진 마음과 생각이다. 마크로튀미아는 사 에게 대한 인내심과 신뢰와 희망을 결단코 잃지 않는 정신이다(바클레이). 특히 마크로튀미아는 인간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신적 속성이다. 즉 그것은 인간에게(고후 6:6,갈5:22,엡4:2,골3:1213,딤후 4:2)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롬 2:49:22),그리고 그리스도께 (딤전 1:16) 돌려진다](골1:11의 주석).

    이어서 바울은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15절)고 한다.
    보복이란 가장 자연스럽게 본능적인 것이다... 그것은 가장 쉽게 덕인 것처럼 가장할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이 복음의 정신을 거스려 행하는 마지막 세력이다(Denney).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악을 갚는 보복이란 실질적인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더 큰 악을 불러 일으키는 악순환을 만들 뿐이다.
    그러한 보복에 대해 율법은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출 21:23-25), 또는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찌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렘24:20)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본래 백성들이 공동체에 대해 행해진 사회적 악행들을 응징할 때 받은 악행 이상으로 보복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개인적인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십계명의 목적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제한된 율법으로서 주어졌던 비가 인간적인 전승들을 거쳐 허용된 규정으로 그 모습이 변형되었던 것이다](토마스,p 277).
    아뭏든 고대의 보복 원리(출 21:23-,신19:21,레24:19-)는 발달하는 이스라엘의 도덕적 통찰(잠20:2224:2925:21-)과 조화하여 완화되어 왔지만, 예수께서는 아예 이를 금하실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가르치셨다. 이 점에 대해 누가는 더욱 자세하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택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고 기술하고 있다.
    예수의 높은 도덕률은 베드로나(벧전 2:19-233:8-9) 바울에 (롬 12:17-21)의해 계승되어 기독교 윤리의 근간이 되었다.

    소극적으로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라고 한 바울은, 적극적으로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15절 하반)고 함으로써 보복 대신에 취할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여기서의 선이란 [악(남을 해치는)의 반대이므로, 자선적 행위로 볼 수 있으나(Lightfoot),그렇게 제한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상근).[선이란 유익하고(헨드릭슨,글로악),친절하고(토마스.p.277),의롭고 선한 것이다](바니스). 한 마디로, 선이란 일반 도덕의 어떤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고의 선이란 사랑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을 좇으라(토 아가톤 디오케테,)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와 같은 뜻으로 취할 수 있다](프레임). 특히 좇으라는 핍박함으로도 번역되는 (행9:4) 바울의 애용어(롬9:3012:13,고전4:1214:1,갈4:295:11,빌3:12)로서, 열렬하게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믿음의 형제들이나 불신자들에 의한 피해 유무에 상관없이 그들을 대하여 항상 열렬하게 선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상 신자에게 있어서 다른 이들의 악행이란 선을 회피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주의 영을 모신 자의 참 모습을 보여줄 좋은 기회인 것인다(참조:창26:12-33). 기독교인의 성숙도는 원수에 대한 사랑의 크기로 측정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형제들, 특히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한다.

    (1) 규모 없는 자들, 즉 의무 수행에 태만한 교인들을 훈계하여 경고하라고 한다. (2) 마음이 약한 자들, 즉 소심하여 낙담한 교인들을 위한하려고 한다. (3) 힘이 없는 자들, 즉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미성숙한 교인들을 친절하게 이끌어 주고 지켜 주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위에 언급한 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가장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실상 이렇다 할 해결책이 될 수 없는 보복을 금하라고 한다. 그 대신에 건설적인 대안으로 믿음의 형제들을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열렬하게 선을 추구하라고 한다.

    7. 기쁨과 기도와 감사(5:16-18)

    16항상 기뻐하라 17 쉬지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2-15절의 사회적 규례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상관 관계에 있는 세가지의 개인적 교훈을 주고 있다.

    16절의 항상 기뻐하라(판토테 카이레테,)는 조건 및 상황에 근거한 인정적 기쁨이 아니라, 주안에서 누리는 영적 기쁨(1:6의 주석을 보라)을 뜻하는 것이다.

    17절의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환난 중에서도 감사하며[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Chrysostom),7) 물론 그 교훈은 일생 동안 매일 24시간씩 형식을 갖추어 기도만 하라는 뜻은 아니다.

    여기의 기도하라는 프로슈케스테로서, 피조물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모든 태도와 말과 행동을 포괄하는 말이다(고전 7:5,골4:2). [블레이키는 [성령에 의하여 마음이 하늘을 향한 바램과 대망으로 채워지지 않는 한 참기도가 될 수 없다]라고 설명하였다](렘6:18의 주석).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입을 열어 아뢰는 기도의 내용은, 생활 속에서 그대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마디로, 참된 신자의 기도란 곧 삶이다.

    18절 상반의 범사에 감사하라(엔 판티 유카리스테이테,)는 무슨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이다. 현재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과 환난에 직면하고 있다(1:6,2:14,3:4). 그러나 성도는 생의 모든 정황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실상 그 어느 상황도 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과 무관할 수 없다. 불행한 처지에 있는 자식에게 부모의 사랑이 더욱 강렬하게 기우는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불우한 상황에 처했을 때 더욱 강렬하게 임하는 법이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에게 불리하고 악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라도 단지 우리의 영적 복리를 위한 보다 광범위한 계획의 일시적인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롬8:28).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항상 감사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토마스,p.278). 많은 어려움이 따랐던 광야 여행 중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 준 상반된 태도를 미루어 보아, 우리는 감사 또는 불평이 환경이 아니라 신앙 인격의 문제임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절 하반)고 한다.
    이는 이란 투토 가르로서, '왜냐하면 이것은'의 뜻이다.

    이것은에 대해 (1) "쉬지 말고 기도하라"(17절)와 '범사에 감사하라"(18절)을 지시한다는 설(Grotius)8),(2) "범사에 감사하라"(18절)만 지시한다는 설9) , (3)"항상 기뻐하라"(16절)와 "쉬지 말고 기도하라"(17절)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라"(18절) 를 지시한다는 설 10) 등이 있다.

    (1)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가 단수 대명사라는 점을 내세워 (2) 설과 (3)설을 반대한다. [그러나 이 ()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교훈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지칭하는 단수 대명사라고 본다면,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문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의미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16절에서 18절까지 사이에 나타난 바울의 교훈은 그것이 세 가지로 구분되어 있으나 그 모두가 신앙에 의한 행위라는 점에서 하나의 통일적 근거를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가지 행위를 한 마디로 "신앙의 행위"라고 보고, 여기의 ()는 그 신앙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김용옥). 또한 논의의 성격으로 보아 '하나님의 뜻'(4:3의 주석을 보라)을 어느 하나에 국한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 11) 안에서'(1:2의 주석을 보라)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란 신앙 생활의 본질에 속하는 바,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가르친 세 가지 교훈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와 계시에 의하여 명백하게 밝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말은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에서 비롯되는 능력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주요한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항상 기뻐하라. 즉 조건 및 상황에 근거한 인정적 기쁨이 아니라, 주안에서 누리는 영적 기쁨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 여기서의 기도는 형식을 갖춘 기도라기보다는 모든 태도와 말과 행동을 포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삶으로서의 기도이다.
    세째,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은 생의 모든 정황에대해 그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이다.

    8. 취할 것과 버릴 것(5:19-22)

    19성령을 소멸치 말며 20예언을 멸시치 말고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바울은 독자들에게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에 관해 교훈하고 있다.
    먼저 그는 성령을 소멸치 말며 (19절)라고 한다. 여기서의 성령(토 프뉴마,)에 대해서는 (1) 영감이라는 설(NEB),(2) 성령이라는 설("Phillips"1), 헨리), (3) 성령의 역사(행사)라는 설 2), (4) 성령의 열매(윤리)들이라는 설("Chrysostom"3) 김용옥). (5) 성령의 은사(선물)들이라는 설4), (6) 포괄적인 의미에서 우리 마음 속에 작용하는 성령의 영향들이라는 설(A.클라케,바니스)등이 있다.
    본절의 경우에는 취사선택하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즉 성령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것이다.
    소멸치 말며(메 스벤뉘테,)의 동사는 불이나 빛을 끄는 것을 의미한다 (Wetstein),5) 따라서 성령 또는 그 작용은 여기서도 불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마3:11,눅3:16,행2:318:25,딤후 1:6).
    성령의 불을 끄는 것에 대해 A.클라케는 [성령께서는 자랑의 영이시므로 분노, 적의,원한, 불친절,불경한 기질은 성령의 불을 끌 것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떠난 것이고 마음은 완고해지고 어두워질 것이다.... 범죄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며 또한 그 불을 끌 것이다]라고 하며, 어드맨은 [어떤 신자나 다 성신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성신의 감동을 거역하며 그의 지도를 거부하며 성신의 주시는 은사를 활용하지 않으며 그의 은혜를 함양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성신을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행하게 된 것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63:10)라고 외쳤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4:30)고 하였고, 율법주의를 가르친 거짓 교사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라고 탄식조로 책망하였다. 한 마디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은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좇으라는 뜻이다(갈5:17).

    다음으로 그는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 예언을 멸시치 말고(20절)라고 한다. 이러한 금령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고린도 교인들처럼(고전 14:1)에언의 은사를 매우 하잖게 여겼던 것 같다. 본절의 동사는 엑수테네이터로서,단순히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경멸하거나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을 뜻한다.
    예언이 복수(프로테이아스,)로 되어 있는 것은,예언이 수많은 표현 형식을 갖기 때문이거나, 개개의 경우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예언이란 성서를 해석하는 기술이 아니다(칼빈). 또한 미래를 미리 말하는 은사도, 과거를 설명하는 은사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프레임). 그래서 예언자(고전 12:28-14:29-)란 내재하신 그리스도 또는 성령 안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의 계시자인 것이다.
    헨드릭슨은 예언자란 말을 어원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프로페테스는 프로(앞으로, 밖으로)와 페미가 앞으로(말하기)가 결합된 단어이다... 그리고 그 (예언자)가 앞으로(밖으로) 말하거나 공공연히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다. 그는 선포자이지, 반드시 예고자(예언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범사에 헤아려 6) 좋은 것을 취하고(21절),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22절)고 한다.
    범사에(판타,)즉 모든 일에를 성령의 불 또는 예언을 지시하는 것7)으로 볼 수도 있지만, 꼭 그렇게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말 자체가 일반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 그것들을 포함한 "모든 일에 있어서"라고 폭넓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8)
    헤아려(도키마제테, 2:4의 '감찰하시는'의 주석을 보라)는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고전 12:10). 여기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식별을 뜻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하고, 예언을 멸시치 말아야 하지만, 한편 그들은 시험해 보지도 않은 채 경솔하게 말려 들어가서도 안된다(Lightfoot).9) 어드맨은 시험하는 방식에 대해[모든 성신의 은사는 사랑 안에서 활용할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라고 다른 곳에 밝히 적혀 있다. 그리고 참으로 성신의 감동을 받은 자는 그것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주신 은사인 줄 알아 오직 그의 영광만 나타내고 자기는 전혀 숨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베드로전서 4:10에도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좋은 것을 취하고(21절 하반)란 식별한 후에 취할 태도를 말한다. 특히 취하고(카테케테,)는 구데 붙잡는 것, 견고하게 지키는 것을 뜻한다. 즉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22절)에 대해 (1) 악이 모양의 형용사, 즉 모든 악한 모양이라는 설10), (2) 악이 모양의 주격, 즉 악은 모든 모양이라는 설11)이 있다. 둘 다 같은 뜻이기는 하지만 후자가 보다 강조적이다.
    모양은 에이두스로서, 신약에는 드물지만, 70인 역에는 많이 사용되었다. 이 낱말은(1) 육체의 모양(요5:37,눅3:22,외관, 용모(눅9:29,욥 41:10),육체의 출현, 현현(고후5:7,출 24:17,민9:15), (2)종류,부류(렘15:3)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겉모양 12)이라기보다는 종류13)로 이해해야 한다.

    버리라는 아페케스테로서, 피하라(NIV),버리라 등을 뜻한다. 이 말은 21절의 "좋은 것을 취하고"와 병행하여, 상당히 적극적인 태도를 요청하는 것이다(김용옥).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성령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것을 없애지 말라고 하면서,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 예언들 곧 하나님의 말씀 선포(설교)를 전적으로 무시하지 말라고 한다.
    이어서 그는 앞서 언급한 것을 비롯한 모든 일(것)에 있어서 잘 시험하여 좋은 것을 굳게 붙잡고, 대신에 악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버리라고 명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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