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데살로니가전서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 내용: 2. 과거에 대한 회고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1:59

데살로니가전서(1Thessalon)


    II.과거에 대한 회고(살전 2:1-3:10).

    1. 바울 일행의 선교 자세(2:1-12).

    가 핍박 중의 선교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바울은 1:5과 9을 받아 더욱 구체적으로 데살로니가에서의 선교 활동을 회고한다.
    '형제들아'(1:4의 주석을 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1절)...
    헛되지 않은 줄(우 케네 게고넨,)의 헛된은 케네로서,'빈 손인'(핸드릭슨),'거짓된,목적 없는'(Hiebert) 1),'헛된,내용이 없는'(토마스,p224)등을 뜻한다.
    여기서는,2절에서 그들의 담대하게 그리고 열심히 말씀을 전했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헛된이란 '내용이 없는'.'텅빈'등의 질에 관한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토마스,p224). 따라서 바울 일행의 선교 결과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김용욱).
    너희가 친히 아노니라는 독자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선교와 그 직전의 빌립보 선교에 대해,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2절)라고 회고한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2)에서 당한 고난(프로파톤테스,)과 능욕(휘브리스텐테스,)은 사도행전 16:16-34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바울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주고, 그 주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그와 실라가 억울하게 매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들을 지키던 간수와 그 권속이 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고난 중에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승리였다.
    또한 그가 말한 능욕이란 구체적으로 그의 로마 시민권에 가해진 모욕, 즉 불법적인 대우를 지시하는 것이다.
    아뭏든 그러한 소식은 같은 마게도냐의 성인 데살로니가에도 들렸을 것이고, 바울은 빌립보 다음으로 데살로니가에 들어갔으므로 매 맞은 자국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도 보였을 것이다.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너희 아는 바와 같이(2절 상반)라고 말하는 것이다.
    빌립보 선교에서 이방인들에게 의해 고난과 능욕을 당한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는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행17:1-10).그는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2절 하반)라고 회고한다.
    사움은 아고니로서, 내적 또는 외적 투쟁,고민 또는 고투를 뜻한다. 본래 이 말은 투기장에서의 싸움을 가리켰다.

    기독교인들의 사움이란 실질적으로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다"(엡6:12).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승리를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엡 6:10-20). '하나님의 복음'(1:5의 주석을 보라)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의 원문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는데 담대하였다"또는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는데 담대하였다"또는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담대하게 말하였다" 이다. [선한 동기로 받은 고난은 거룩한 결심의 날을 무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날카롭게 한다](헨리). 바울은 어떠한 고난과 모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은 복음의 투사이었다. 그 어느 것도 그의 그칠줄 모르는 주께 대한 충성과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교

    3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오직 하나님의 옮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5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온갖 고난 중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고 한 바울은, 자신의 선교 동기와 방법에 대한 비난과 모함을 의식하며, 자신의 기본적인 복음 선교 자세에 대해,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3절)고 한다.
    권면은 파라클레시스로서, 간청, 호소, 탄원(고후8:4),격려,위로,위안(눅2:25,고후1:37:4),권면,권고,훈계,충고,상담(행13:5,롬12:8)등을 뜻한다.
    여기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한 바울의 권고, 격려 또는 훈계를 지시하는 것이다.

    간사는 플라네스로서, 기만, 속임, 오류 등을 뜻한다.여기서는 기만이나 속임 3)이 아니라, 플라네스 앞에 에크(근원을 나타낸다)가 있는 것을 보아 오류4)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즉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부정은 아카타르시아스로서, 불결한 상처의 고름,손질을 전혀 하지 않은 나무, 한번도 불순물을 골라내지 않은 물질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성서에서는 육체적, 도덕적,종교적 불결, 또는 불결한 것고 접촉된 것을 의미하고 있다(느13:29,겔16:2724:13,민5:19,스6:21,마23:27,롬1:24,고후12:21,엡4:195:3등). 본문의 뜻에 대해서는, (1) 당시 이교에서 행해지던 성적 부정 또는 성적 부패라는 설5), (2) 물질적 부정이라는 설6),(3) 종합적으로 보아 불순한 동기라고 하는 설7)등이 있는데,(3) 설이 가장 적합하다. 즉 그들의 복음 전도는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클라케는 [우리의 복음은 순수하고 거룩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순수하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격과 삶에 순수성을 만들어 준다]라고 하였고, 바니스는[거룩과 순결로 이끄는 것]이라 하였다.
    궤계는 돌로로서, 속임수, 속이기 위한 목적을 가진 기교, 간사스러운 계교, 속이기 위한 교묘한 시도를 뜻한다. [독일의 힛틀러 휘하에 있던 선전원들은 만약 거짓이 몇번이고 큰 소리로 반복되면 마침내는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았다](바클레이). 그러나 바울의 복음 전도의 방법은 궤계로, 즉 속이기 위한 기교가 아니라 진실한 것이었다.
    복음 전의 자세에 대해 소극적인 측면에서 언급한 바울은, 이제는 보다 더 궁극적인 측면에서, 오직 하나님의 옮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히게 하려 함이라(4절)고 주장한다.
    옳게 여기심을 입어는 완료 시상인 데도키마스메타로서, [금속의 순수성을 시험해 보고 동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리고 충분한 함량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시험하는데 사용되었다(렌스키)] (엡 5:10의 주석). 즉 하나님께서 바울에 대해 복음 전도자, 특히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적격 여부를 시험해 보신 후에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 또는 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황공하게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음을 전할 부탁을 받았(4절 상반)다고 하는 것이다(참조:갈1:15-172:7). 부탁을 받았으니는 피스튜테나이로서, 보통 "믿는다"로 번역되는 말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바울을 복음 전도자로서 인정할수 있는가 시험해 보신 후에 그를 믿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7:10)라 고 설명한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께 인정받아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가리켜,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도키마존티,2:4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이 주석을 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은 아레스콘테스로서, 기쁘게 하려고 하다(마14:6), 즐거움을 구하다, 만족시키려고 하다,인간의 자아를 조화시키다(고전 10:33,갈1:10)등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그의 선교 정신이 유대교 교사들이나 이교도의 사제나 철학자들이처럼 간사나 부정이나 궤계로서 사람들의 호의나 구하고,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어 즐겁게 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여 하나님을 기쁘히게 하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고 단언하였다.
    그러한 바울의 선교 정신은,복음 전도자(교역자)란 미명아래 사람의 호의나 인정 또는 인기를 얻으려는 아첨꾼들에게 엄한 경고가 된다. [웨슬레는 [하나님과 세상을 다같이 좋게 하려는 망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어야만 한다]라고 일깨워 주고 있다](갈1:10의 주석). 하나님을 기쁘히게 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에게 참된 의미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선교 정신을 고백하게 된 이유(원문에는 가르가 있다)에 대해,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5절)고 설명한다.
    아첨의 말의 아첨은 콜라키아스로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종속시키는 것(프레임), 또는 이욕지심이 동기가 되어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음험한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다(Milligan).8) 이 말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이곳 외에 사용되지 않았다.
    탐심의 탈의 탐심은 플레오넥시아스로서, 오만한 탐욕, 저주받은 소유욕, 남의 것을 갖고 싶어하는 불법적인 욕망,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웃 사람을 언제라도 희생시킬 수 있는 정신 등을 의미하였다. 한 마디로, 가질 권리가 없는 것을 갖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다.
    탈은 프레파세이로서, 구실, 가면, 겉치레, 외식, 가식 등을 뜻한다(막 12:40,빌1:18).

    결국 바울은 아무 때, 즉 복음의 진리를 그대로 전하기 어렵거나, 전할 수 없는 위험한 때이든지 그렇지 않은 때이든지 상관 없이,아첨할 때 사용하는 말이나 탐심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이 두 가지는 전도자의 진위를 가리는 표준이다](칼빈). 이 점에 대해 그는 자신있게,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5절 하반)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유대인들의 형식(창36:4450,삼상12:5620:23)인데, 바울 역시 자주 사용하였다(롬1:9,고후1:23,갈1:20,빌1:8,살전 2:10). 이것은 자신의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과 말 그리고 행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순수와 진실은 하나님께서 증거해 주실 수 있을 때에만 참된 것이다.

    다. 헌신적인 자급 선교

    6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4절과 5절에서 복음 선교의 자세를 고백한 바울은, 자기 일행의 신분과 귀권한 그리고 실제적인 처사에 대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6절)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곧 자신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그리스도의 사도들(크리스튜 아포스톨로이,)이라고 한다.

    사도는 원래 전권대사의 뜻이었다. 신약의 사도들이란 본래 (1) 지상의 예수께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은 자(마10:528:29,비교:갈1:1), (2)부활하신 주를 목격하고 이를 증거한 자(행1:2122), (3) 성령의 특별하신 영감을 받은 자(요14:2616:13,고전 2:10),(4) 그러므로 그들의 권세는 지상에 있고(마18:1820,요22:2223), (5) 표적을 행하는 권능을 받았으며(행2:435:15), (6) 그들의 복음 전파의 범위는 우주적이었고 무제한적이었다(고후 11:28).
    사도라는 칭호를 들은 이들은 12제자 이외에도 바울과 바나바(행14:414),주의 형제인 야고보(고전 15:7,갈1:19,실루아노와 디모데(살전 2:6)아볼로(고전4:9)등이 있다. 또한 70제자들(눅 10:1)도 사도로 불리었다는 기록이 있다(Irenaeus,Tertullian).9)
    사도직은 초대 교회에서 가장 높은 직위이었다(엡4:11,고전12:28).본질적으로 사도의 직분은 그를 보내신 분의 위엄을 떠나서는 그 의미가 없는 것이다(Ellicott).10)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기 일행이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는 엔 바레이 에이나이로서, 기본적으로 존엄성이 있다(토마스, p .228),무게가 있다 (고후10:10),무게를 느끼게 되다(NEB),위엄을 세우다(Wuest),11) 요구하다(에어하트),부담을 주다(NIV,칼빈,바니스),무게,즉 영예로운 위치에 있다(프레임),폐를 끼치다(웨슬레)등을 의미한다.
    결국 바울은 자기 일행이 존엄한 위치에 있는 사도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당연히 영예로운 대접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나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6절 하반)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광은 둑싸로서,[바울 서신에 75번 이상 나타난다. 이 말은 관련되기는 하지만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진 말이므로 보다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이 유익하다.명사는 동사 도케와 관련된다. 따라서 의견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IV Macc,5:18).나아가서 이 말은 어떤 사람에 대한 좋은 견해, 즉 칭찬, 찬양, 명예,경의를 의미하게 되었다.
    구약에서 가장 흔한 영광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Kabhodh는 무게, 무거움,짐(사22:24)이라는 기본적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부터 물질, 부,존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31:1). 후에 빛남,광휘,광채,훌륭함의 요소가 물질의 의미에 첨가되었다. 이와 같이 그 말은 여호와의 임재에 관한 찬란한 물질적 명백성을 지시하는데 사용되었다(출16:7,사6:1-5).

    바울은 그 말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1)피조물 또는 그에 속한 것에 부여된 찬양, 영예,반대말은 욕됨(고후6:8) 또는 부끄러움(빌3:19). (2) 하나님께 돌린 숭배 또는 경의로 본문의 듯이다(롬 3:7234: 20.11:36,고전 10:31 등). (3) 어떤 사람에 대해 명예 또는 영예를 돌리는 것,혹은 다른 사람의 영광을 높이는 덕이 있는 사람(고전 11:711:15,고후 8:23,살전 2:20). (4) 외적인 빛남,광채,찬란함,광휘(고전 15:4041).(5) 하나님께서 빛나는 구름에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롬9:4).(6) 하나님(롬 1:23,고후4:6) 또는 그리스도 (고후 3:184:4,딛2:13,살후1:9)의 명백한 탁월성, 절대적 완전, 왕적 존엄이나 장엄. (7)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롬6:4). (8) 하나님과 접촉하거나 접촉해 온 자들을 둘러싼 빛(고후 3:7).(9) 그리스도께서 이미 들어가셨고 또한 신자가 들어갈 축복의 나라 또는 장소9롬 8:18,딤전 3:16). (10) 인간 혹은 사물의 탁월함(고전 15:43,고후 3:10,엡1:61418,빌 3:214:19) (핸드릭슨)] (빌1:11의 주석).
    바울은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12)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7절)라고 말한다.
    유순한 자는 에피오이로서, 상냥한 자, 온아한 자, 온화한 자, 온후한 자를 뜻한다. 특히 이 말은 [
    웃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주인이 종에게, 인금이 신하에게, 아버지가 자녀에게 대하는 태도에 사용되었다](글로악).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425)라고 권면하셨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7절 하반) 는 모세의 어머니가, 애굽 공주의 양자가 된 모세의 유모가 되어 그를 기른 것을 연상하게 한다(출 2:1-10).
    바울은 더욱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자 됨이니라(8절) 고 설명한다.
    신약에서, 이곳에만 사용되는 사모하여는 현재 분사형 (호메이로메노이,)으로 복음을 전하던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유모와 같은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어린 교회에 대한 바울 일행의 사모의 정이 얼마나 강렬했던가는, 그의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8절 중반)이라는 말을 보아 알 수 있다. 우리 목숨까지(타스 헤아위톤 프쉬카스,)는 " 우리 자신의 목숨까지"로 매우 강조적인 표현이다.

    목숨으로 번역된 프쉬케란 구약에서는 대개 개인의 생명을 원리를 지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특별하게 정서적 행위성을 의미하고, 가끔 인격적 명사로 대치된다(케네디).13)
    불투만(Bultmann)에 의하면, 구약에서처럼 바울의 경우에도 프쉬케는 생명력 혹은 생명 자체를 의미한다.14) 그는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빌1:27)을 들어서, '일심으로'와 '한 뜻으로'는 같은 의미라고 한다. 즉 의지와 의 같은 태도 혹은 같은 방향이라는 것이다.15) 그러나 기능적으로는 같을지 모르지만 존재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바울은 프뉴마와 프쉬케를 대조하여 사용한다. 그 예로 바울은 첫 아담은 산 영(프쉬케)이 되었다고 사용한다. 그 예로 바울은 첫 아담은 산 영(프쉬케)이 되었다고 한 반면에,둘째 아담은 살려주는 영(프뉴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첫 아담은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흙에 속한 자인 반면에, 둘째 아담은 신령한 자요 하늘에 속한 자이다.
    이 두 아담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다(고전 15:45-49). 즉 프뉴마는 구속받은 자요, 성령을 따라 신적 삶을 사는 영적 인간을 의미하는 반면에, 프쉬케는 자연적이며 세상적인 삶을 사는 자연인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단순히 동물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의 삶, 즉 초자연적 삶에 대조적인 지상적인 인간의 자연적 삶을 의미한다](불트만).16)
    여기서는 자연적이며 육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

    결국 바울 일행은 어린 교회에게 복음만이 아니라, 목숨까지 주기(메타두나이,)곧 나누어 주기를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도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를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사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하였다.
    그 이유를 가리켜, 바울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8절 하반-1:4의 주석을 보라) 고 설명한다.
    이어서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기억을 불러 일으키면서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 (코폰,1:3의 주석을 보라) 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9절)고 회상한다. 원문에는 문장 초두에 가르가 있어서 본절을 8절 하반과 연결짓고 있다.
    애쓴 것은 모크톤으로서, 수고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외적인 많은 고난들을 강조하고 있다(토마스,p.230).

    데살로니가후서 3:8(참조:고후 11:27)에서처럼, 수고와 애쓴 것이라는 두 말이 결합되어 자급을 위한 노력을 묘사하고 있다. 사도들의 그러한 노력은 그들의 편지를 읽는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다(4:11,12,5:14,살후 3:6-15).
    그들은 어린 교인 누구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토메 에파바레사이) 즉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동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아마도 바울의 생업은 장막을 만드는 일이었을 것이다(행 18:3),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의 일환으로 상업(기술)을 배우게 하였는데, 바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교역자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9-11)고 하였다. 그는 아주 구체적으로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구체적으로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아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314)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그는 데살로니가에 있었을 때, 빌립보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다(빌4:1516).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재정적 도움의 유무나 다소가 아니라 복음 사업이었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당연한 권리라도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이점에 대해 그는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 9:12 하반)고 하였다.
    가장 바람직한 관계란, 목자는 신령한 것으로 양들을 섬기고, 양들은 물질로 목자를 섬기는 것이다. 신령한 사업에 전념해야 할 목자가 물질적 궁핍 때문에 지장을 받는 것은, 양들에게나 자신에게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라. 선교적 삶

    10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11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신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선교 사업을 할 때, 단순히 입으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좇는 생활을 보여 주었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10절)라고 말한다.
    거룩하고는 부사인 호시오스로서, 대개 하나님께 대해 헌신적인 것(프레임),종교적 경건(토마스,p.231),종교의 의무를 준수하는 것(바니스)등에 사용되었다.
    옳고는 부사인 디카이오스로서, 인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 사용되었다.

    흠 없이 부사인 아멤프토스로서, 하나님께나 인간에게 비난받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3:13,5:23).
    이 말은 [희생 제사와 관련된 용어이었다.율법에 의하면 제물로 바칠 짐승은 먼저 검사를 받아야 한다. 만일 어떤 결점이 발견되면,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거절당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전혀 결점이 없어야만 되었다.
    결국 이 말은 모든 생명과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드릴 제물로 생각하고 한 말이다(바클레이)
    ](엡 1:4의 주석).
    바울이 하나님께 대해 거룩하고, 인간에 대해 옳고, 양쪽에 대해 흠 없이 행했다고 하는 말은, 물론 [절대적 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품성의 일관성, 의무에 대한 신실성](바니스), 즉 상대적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생활에 대해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셨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할(딤후 4:2)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줄 선교적 삶이어야만 한다.
    7절에 유모의 애정을 보인 바울은 이제 자신을 아비로 자처하여,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궈년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1절)라고 말한다.
    너희 각 사람에게는 헤나 헤카스톤 휘몬으로서, '너희 하나 하나에게'란 뜻이다. 즉 모든 교인들을 대할 때, 마치 자기 자녀에게 하듯 해서 대해 주어야 할 교인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다.
    권면하고는 현재 분사형인 파라칼룬테스로서,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 위하여 부른다는 뜻인데, 특히 그에게 도움이 되도록 말하고 권고하고 훈계하고 격려하기 위해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렌스키)](엡 4:1의 주석).따라서 이 말을 강권적인 권면이라기도 보다는 간청 또는 탄원의 의미가 더 강하다. 위로하고도 현재 분사형인 파라뮈투메노이로서, 위로하고 있는, 위안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경계하노니 역시 현재 분사형인 마르튀로메노이로서, 어떤 사실을 강조하여 단언할 때(행20:26), 신의 이름으로 신의 뜻을 전할 때(행 26:22), 엄중히 항의할 때(갈5:3),어떤 사실을 증거할 때(엡4:7)등에 사용되었다. 벤겔은 [권면은 자발적인 행동을, 위로는 기쁜 행동을, 경계는 경외하는 행동을 고무한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11절의 목적을 가리켜,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12절)고 설명한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한 것이지만(마5:31013:1-52,눅23:43,롬14:17,고전4:20,골1:13), 또 다른 의미에서는 미래의 상속이라 할 수 있다(요14:2,벧후3:13,고후5:1,계21:14).[성령의 내주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는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이미 현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주권이 승인되고 그의 뜻이 이루어질 곳에 존재한다.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와 완성을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미래에 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미래상이다](에어하트). 행하게는 페리파테인으로서, 문자적으로 걷다. 거닐다는 뜻이나, 은유적으로 윤리적 의미에서의 습관적인 행동 또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롬 8:4,고전 3:37:17,고후 4:25:710:212:18,엡2:24:15:2815,빌3:1718,골 1:102:63:74:5,살전 4:12,살후 3:611,히13:9,요일 1:672:611,요이 4,6,요삼3).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자기 나라와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자극제이다](토마스,p.231).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 들어가기 직전에 빌립보에서 선교하다가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영적 싸움 중에도 데살로니가에까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였다. 바울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한 권면은 오류나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또한 속이기 위한 교묘한 방법에서 난 것이 아니다. 그의 선교사로서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그 적격 여부를 시험해 보신 후에 인정하신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다.따라서 그는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았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증거하신다.
    바울 일행은 그리스도의 사도들로서 능히 영예로운 대접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나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식을 기르는 것처럼 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랑하는 자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복음으로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나눠 주기를 즐거워 하였다는 점이다.
    바울 일행은 어린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자급자족하기 위한 수고와 애를 쓰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들의 복음 선교는 하나님께 대해 거룩하고, 사람들에 대해 옳고, 양 편에 대해 흠 없이 행한 행동적인 선교이었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 성취가 아니라 상대적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하나님께서 증인이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죄인을 불러 자기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도록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고있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4:1,비교:빌 1:27,골1:10)라고 당부하였다.[A.마틴은 [우리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을 살도록 권면을 받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엡 4:1의주석).

    2. 말씀 청종과 인내에 대한 감사 (2:13-16).

    가 말씀 청종에 대한 감사

    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본문 (13-16절)의 내용은 1:6의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는 압축된 사상에 대한 확장이다](바일리,헨드릭슨).바울은 1:2-4에 이어 다시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13절).
    이러므로 (카이 디아 투토,)는 바로 전절 "H.A.W.Meyer.Alford"2) 이상근이나 1-4절의 복음을 전한 사실(프레임)이 아니라, 1_12절 전체3)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1:2의 주석을 보라)은 의 원문 초두에 "또한"이 있다는 점을 들어, 바울 일행이 복음을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회의 감사 편지를 받았을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4)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늘 감사하는 내용의 소극적인 측면에 대해,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슴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13절 중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여기서는 하나님께 관한 말씀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말슴,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의미한다(토마스,p.233, 김용욱).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즉 주의 종들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설교에 대해 중차대한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슴으로 들려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 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로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8)라고 하며, 또한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2)고 하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일행의 복음 설교(전도)를 통해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즉 [사람에게서 비롯된 말](바니스)로 받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헨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인간의 전도나 인간의 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그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미려함이나 설교 구성의 아름다움 또는 설교자의 목소리나 태도 등으로 기쁨을 삼으려 하고, 그러한 것을 유익으로 여기는 자들도 비난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는 설교를 자기 입장에서 취사 선택하며 듣는 것도 잘못된 자세이다.
    바울은 늘 감사하는 내용의 적극적인 측면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13절하반)고 말한다.
    받음이니는 에덱사스테로서, 앞의 "받을 때에"(파랄라본테스,)가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임에 비해,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프레임). 또한 파랄라본테스가 객관적 동작을 나타나는데 비해, 에덱사스테는 주관적 동작을 나타낸다. 특히 전자는 현재 분사형이므로 계속적으로 듣는 것을 가리키고, 후자는 부정 과거형으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받아들인 사실을 표시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일행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성심 성의껏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토록 말씀을 높이 평가하였던 것이다.5)

    그와 같이 받아들여진 말씀은,그 말씀을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하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해 역사 하신다(히4:12). 여기에 사용된 역사하느니라는 에네르게 이타이로서, 일에 착수하다,6) 힘을 발휘하다,활동하다, 작용하다,효과적으로 행하다의 뜻이다(고전 12:11,갈3:5,빌2:133:21).
    인간의 심령 속에 받아들여진 말씀은 그 인간의 영혼을 회개시키고, 마음을 밝히며, 기쁨과 평화를 주며, 또한 성공및 승리적 삶을 가능케 해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의 능력이고, 최대의 사랑이며 (요 1:14,시119:105), 생명의 양식이고(시 119:93),영적 무기이며(엡6:17),만사형통의 비결이기 (수1:8) 때문이다.

    나. 인내에 대한 감사

    14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15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히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받아들인데 대해 감사한 바울은, 이제 그들이 박해 중에도 잘 참은 사실(1:6)에 대해 감사한. '형제들아'(1:4의 주석을 보라)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14절). 원문 초두에는 가르,왜냐하면, 그 이유는) 가 있으므로 본전에 대해서는(1)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역사하심(13절)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설7), (2) 데살로니가 형제들의 믿음의 사실(13절)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설(Olshausen)8), (3)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실(13절)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설("Best"9) 토마스, p.235),(4) (1)설과 (3)설을 종합하는 설(이상근),(5) 13절 전체를 받아, 마음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계속 역사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설(칼빈,프레임,박윤선)등이 있다. 여기서는 종합적인 견해인 (5)설을 취해야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역사하므로 그들 역시'그리스도 예수 안에서'(1:1의 주석을 보라)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1:1의 주석을 보라)들을 '본받은 자'(1:6의 주석을 보라) 되었으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저희 곧 유대 교인들이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동족들에게 같은 일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환난과 핍박을 잘 참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와중 속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께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가졌다(1:2).

    주를 믿는 자들에 대한 박해는 유대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고 모든 세대의 교회에도 임할 것이다. 아뭏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기꺼워하는 것은 제자됨의 증거이다](헨드릭슨).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믿는 자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은혜라고 하였다(빌 1:29)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따르는 고난이란 기독교인의 특권이다. 기독교인의 고난이란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하나님의 백성된 확실한 증거이다(마5:10,요15:19,벧전 1:67). 예수께서도 믿는 자의 고난을 복이라고 하셨고 (마5:41112,눅6:22),야고보 역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12)고 하였다.바클레이는 [어느 장군이건 제일 곤란한 일을 하기 위해서 제일 우수한 군인을 택하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고난을 받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 라고 말하였다. 더우기 지난 날에 죄인으로서 죄로 인한 고난 가운데 살던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주와 주의 나라를 위해 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인가! 그런 의미에서 바울는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하였다.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를 위해 겪는 고난이란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고난이요, 바로 그 그리스도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온갖 박해와 핍박 그리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파한 바울 자신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고 고백하였다.
    이어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박해와 핍박, 즉 그들의 죄상에 대해,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히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15절)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보내 주신 하나님의 선지자들(구약 시대)를 죽였다는 것(마5:1221:35-39,22:29-32,롬1:23:21, 11:3)은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더구나 하나님의 선민인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찾아오셨는데, 그 '주'(1:1의 주석을 보라)를, 하나님을 위한다는 구실 하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사실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다.

    우리를 쫓아내고의 쫓아내고는 부정과거형인 에크디옥산톤으로서, 추방했다(RSV),핍박했다(KJV)등을 뜻한다.

    바울은 회개한 후 오래지 않아 자기 동족들에 의해 다메섹(행9:23-25)과 예루살렘(행9:2930)에서 축출당한 바 있었다. 그가 전한 말씀은 거절되었고, 그의 일행은 유대인들에 의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났다(행 13:454650).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으며, 결국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강제로 축출하였다(행 14:256). 그들은 루스드라까지 바울 일행을 쫓아가 그 지역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을 돌로 치게 하였고, 돌에 맞아 기절한 바울을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버리기도 하였다(행 14:19). 또한 데살로니가에서도 바울은 쫓아나게 되었다(행17:5-10).

    한마디로,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 또는 무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아뭏든 [어떤 사람이라도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를 죽임으로써 복음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다](바클레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의 기쁘시게는 현재 현재 분사형인 아레스콘톤으로서, 과거애 행한 살륙과 박해의 결과로 현재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 큰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란 앞의 말들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특권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생각하고, 남을 섬기기 위해 선택되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자기 자신의 권리와 특권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과 충돌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충돌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결정적인 내용에 대해 바울은,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16절)라고 설명한다. 모파트(Moffatt)와 바일리는 [본절의 끝 문장은 재앙과 공포가 동반된,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주후 70년) 후에 누군가가 추가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10) 홀츠만(Holtzmann)은 14-16절을11), 쉬미델(Schmiedel)은 15-16절을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 생각하였다.12) 그러한 삽입일설들에 대해 토마스 (p.236)는 [하지만 거기에는 삭제되어야 할 곤란한 증거는 조금도 없다.정확하게 무엇으로 인해 바울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감정을 격발시키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부분적으로 적대적인 행위들이 바울의 마음 속에 누적된 것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라고 답하고 있다. 또한 바울의 갑작스런 감정의 격발이란, 그의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고 한 말씀과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롬10:1)고 한 말씀을 미루어,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동족 구원의 열망에서 비롯된 종교적 공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하면 삽입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16절 중반)는 유대인들이 주 예수와 그의 선지자들을 죽인 일과 그 후에 계속되고 있는 모든 적대 행위들을 지시하는 것이다. 특히 채우매(아나플로로사이,)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가리켜, 이 잔이 차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뜻한다(이상근).
    유대인들은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대신에 계속 반복하여 범죄함으로써, 그들의 죄의 양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참조: 마23:32). 인간은 무한정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의 양이 한계에 이르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창 15:16).
    죄들은 하마르티아스로서,[원래 윤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활쏘기에서 나온 말로서, 화살이 표적을 빗나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죄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이다. 죄란 자신의 가능성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일꾼으로서의 자기의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것, 최선의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되지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손과 눈과 마음과 두뇌의 은사를 사용하며 발전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죄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표적에서 빗나간 경향, 사상, 말 그리고 행위들을 뜻하는 것이다](웨슬레,헨드릭슨,흑기](엡2:1의 주석).
    '노하심'13)(1:10의 주석을 보라)이 '끝까지'14)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16절 하반)의 임하였느니라(에프타센,)가 부정 과거형이므로 이를 가리켜,(1) 과거에 있었던 일, 즉 유다의 반란 (행 5:36)이나 예루살렘 기근(행 11:27-30) 등을 지시하는 것이라는 설(Baur)15),(2) 유대인들이 예수와 그 사도들을 박해한 죄로 인해서 종교적으로 받는 재앙아 곧 그들의 심령이 강퍅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설(Van Leeuwen),16) (3) 예언적이며 예상적인 언급으로, 약 15년(혹은 20년) 후에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던 재앙을 지시하는 것이라는 설 17), (4) 종말의 때에 있을 진노를 뜻하는 것이라는 설 18)등이 있다.
    [부정 과거형의 예변법적 용법은 예언적 문장에서는 자연스런 것이고,70인 역에 그 유비가 있다(Dob.notes 호9:2-10:5->](프레임) 는 사실과 하나님의 진노란 종국적인 심판과 현실적인 형벌 양쪽에 적용된다는 점을 미루어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1:2-4에 이어 다시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 내용은 그들이 바울의 설교를 사람의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말씀,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단번에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받아들여진 말씀은, 그 말씀을 믿는 자들 속에서 효과적으로 활동한다. 한 마디로, 그 인간을 회개시켜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해 주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이 박해 중에도 잘 참은 사실에 대해 감사한다. 이는 마음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들 역시,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은 것과 같이 동족들에게 동일한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 또한 유대의 교회들처럼 고난을 잘 참아내었다.
    끝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의 죄상에 대해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복음의 선교사들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히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자기 일행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들의 죄를 채워갔으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으며 또한 종국에도 임할 것이다.

    3.막혀버린 방문계획(2:17-20).

    가.보고 싶은 열정

    17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셨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유모와 같고(2:7), 아비와 같은 (2:11)애정을 표현한 바울은, 그들을 다시 방문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에 대해,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17절)고 고백한다. 원문 초두에는 데(그러나)가 있어서 방금 앞에 언급한 박해자들(2:14-16)과 저자 자신을 대조시키고 있다.

    잠시는 프로스 카이론 호라스로서, 매우 짧은 시간을 표현하는 관용어적 표현이다. 이 표현은 떠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떠난 것은 아포르파니스텐테스로서,헬라어 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난다(프레임). 이 말은 공간적인 의미를 가진 코리스텐테스와 달리, 고아의 상태로 버려둔 것(바니스) 또는 자녀들을 두고 떠난 부모의 상태(렌스키)를 뜻하는 것으로 이별, 공허, 적막 등의 감정을 내포한다.특히 이 말은, 수동태로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자식처럼 사랑하는 양들을 떠나게 된 정신적 고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얼굴이요 마음은 나니니(프로소포 우 카르디아,)란 유대인의 박해로 부득이 쫓겨 나와(행 17:5-10) 얼굴은 볼 수 없지만,'마음'(2:4 주석을 보라)은 여전히 데살로니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바울은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17절 하반,참조 3:6)라고 말한다.

    열정으로는 엔 폴레 에피튀미아로서, 강렬한 욕망으로를 뜻한다. 에피튀미아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라, 단순히 의욕, 바램,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고 싶어한 강렬한 욕망을 입증이나 하듯,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18절)라고 말한다.
    나 바울은 에고 멘 파울로스로서,정말로 나 바울이라는 아주 강조적인 표현이다.

    한번 두번은 문자대로 두번("Zahn,Milligan,"1) 글로악)이 아니라, 반복하여 또는 몇 번이나2)를 의미하는 것이다.
    칼빈은 [한 번 두 번이라는 말은, 데살로니가를 심방하려던 그의 소원이 갑자기 뜨거웠다가 갑자기 식어버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고, 목표를 굳게 정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이었음을 지시한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러한 확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를 가리켜, 바울은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나(18절 하반)라고 한다.
    사단은 마귀(디아볼로스,)와 동일한 것으로, 바알세불(마12:27), 벨리알(고후6:15). 악귀의 머리(막3:22), 이 세상의 왕(요14:30),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2:2),뱀(고후 11:3), 용(계12:3),원수(계11:12), 악한 자(엡6:16),대적자(벧전5:8),고소자(계12:10), 시험하는 자(마4:4),속이는 자(계12:9),살인자(요8:44), 거짓말장이(요8:44)등의 별명이 있다.
    사단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초자연적 존재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인간들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짓을 한다(욥1:6,슥3:1,마4:1-13:39,눅4:1-8:12,요13:2,행10:38,엡6:11,딤전3:6-7711,딤후2:263:3,살전2:3,약4:7,벧전5:8). 그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히2:14) 이 세상의 통치자이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적으로 패배를 당하였다(마25:31,유9,계2:1012:91220:210).
    또한 사단은 결국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전 5:5,고후 12:7), 사단은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요13:2) 그로 하여금 예수를 팔게 했찌만, 결국 예수의 죽음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이용된 꼴이 되고 말았다. 사단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원대하고도 심오한 섭리를 위해 허용되고 있을 뿐이다.

    막았도다는 에네코프센으로서, 에어하트는[원종가는 행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된 막대(road block)를 놓는다는 특수한 낱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갈5:7,벧전3:7).
    문제는 사단이 어떻게 막았는가 함이다. 이 점에 대해(1) 바울의 신병이라는 설(고후 12:7,토마스,p.240 "Simon"3).(2)사도행전 17:1314의 기사처럼 유대인의 핍박이라는 설(칼빈,벤겔), (3) 정치적 세력이 야손 같은 신자를 구금하여 둠으로써(행17:6-9) 바울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라는 설("Ramsay") 4)부르스), (4) 고린도후서 11:23-28의 고난을 지시하는 것이라는 설(데이크), (5) 3:7의 "모든 궁핍과 환난"이라는 설(바일리), (6) 사도행전 16:7의 경우처럼, 내심의 고민이라는 설(Jowet)5), (7) 바울의 선교 사업의 긴급성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설(Grotius,Moffatt)6),(8) 확실히 알수 없다는 설7) 등이 있다.
    바울이 무엇을 가리켜 한 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며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모든 세력을 사단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칼빈은 [불신자들이 우리를 괴롭힐 때마다 그들은 사단의 기치 아래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그들은 우리를 방해하는 사단의 도구들인 것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노력을 기울일 때, 의심할 것 없이 사단에게서 비롯되는 어떤 장애가 있게 마련이라는 점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어드맨도[그리스도의 사업을 방해하며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모든 세력의 근원을 사단이라는 인격적 악령에게 돌리는 것은 성경 기자의 일반적 경향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 교역자의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

    19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20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을 비롯한 교역자들의 소망은, 이미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은 교인들이 그의 강림(파루시아,1:10의 주석을 보라) 하실때 완전한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항상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요10:3),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다(빌2:12 하반).
    비길 데 없는 목자의 '기쁨'(1:6의 주석을 보라)이란, 양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을 소유하는 완전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목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이다(참조:빌4:1).
    [결국 세 가지는 다같은 사실로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교회의 구원의 완성이므로 얻어지는 주관적 및 객관적 보상이다](이상근).
    자랑의 면류관(스테파노스 카위케세오스,)이란 일종의 히브리 관용구인데, 이와 유사한 표현들로 "영화로운 면류관"(잠 4:912:4,사28:5), "화려한 면류관"(겔 16:1223:42),"영화의 면류관"(잠16:31), "교만한 면류관"(사28:1),"아름다운 면류관"(사62:3), "영광의 면류관"(렘13:18)등이 있다. 신약에도 "썩을 면류관"(고전 9:25), "의의 면류관"(딤후4:8),"생명의 면류관"(약1:12,계2:10,) "영화의 면류관"(벧전5:4),"금 면류관"(계 4:4)등의 표현이 있다.
    자랑은 카위케마로서, 기쁨을 동반한 자랑, 영예,영광 등을 의미한다(롬4:2,고전5:69:1516,고후1:145:129:3,빌2:16,히3:6).

    면류관은 (1) 왕에게 씌워 주권을 표시한 것(왕하11:12,시21:3,렘13: 18), (2) 그리이스의 경주에서 승리자에게 준 것(고전 9:25,딤후 2:5), (3) 공적인 영광이나 기쁨을 표시한 것(사28:1)등이다. 여기서는 (2)와 (3)의 뜻으로 보아야 적합하다.
    바울은, 너희는 우리의 "영광"(2:6의주석을 보라)이요 기쁨이니라(20절)라고 반복하여 강조한다. 즉 재림 때 뿐만 아니라 현재도 [정말로 우리의 영광과 기쁨의 대상은 바로 너희들이라는 것이다](프레임). 이것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들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나오는 이해라 할 수 있다.
    참된 목자란,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이 비록 부족하고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들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영광과 기쁨으로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참된 양이란 목자를 자신의 영광과 기쁨으로 알아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목자와 양의 관계란 서로에게 영광과 기쁨이 되도록 주안에서 각자의 위치를 지켜 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겨로가에 의하면, 바울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믿음의 자녀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고아처럼 버려두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떠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므로 그는 몇 번이나 데살로니가에 가려고 시도하였는데,그때마다 사단이 막아버렸다.
    바울은 믿음에 의해 구원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주의 강림 때에 완전한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는 것이 자기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 하며, 또한 현재도 그들은 자기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한다.

    4.디모데의 파송(3:1-10)

    가.디모데를 파송한 이유

    1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2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4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5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잠시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후 자신의 소망이요 기쁨이고, 자랑의 면류관이요 영광인 그들을 만나고 싶은 열정 때문에 몇 번이나 다시 방문하려고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사단이 막았다(2:17-20)고 한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1절) 라고 한다(제1부,III.내용을 보라).
    우리란 물론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가리키는 것인데, 문제는 우리만이 바울 자신만을 지시하는 것1)이냐,아니면 바울과 실라를 지시하는 것2)이냐 함이다.
    바울은 2:18에서 "나 바울은"과 "우리"를 혼용하면서 자신을 가리키고, 또한 3:5에서도 "나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 바울 자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 점은 머물기의 뜻을 보면 더욱분명해진다. 머물기는 카탈레이프테나이로서, 다른 사람이 헤어짐으로 후에 남아 있는 것(요8:9,행25:14), 결혼하여 어버지와 헤어지는 것(엡 5:31), 죽었기 때문에 처를 뒤에 남기는 것(막12:19)등 원래 고통을 느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인데, 만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에 그 느낌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궁천무천).
    바울은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행17:15,살전3:3)견디지 못하여,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는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1:5의 주석을 보라) 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2절)라는 말을 통해서, 양들을 위해 자신의 불편과 고독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바울의 목자적 사랑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일꾼(디아코논 투 테우,)은 N,A,P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B 사본에는 "하나님의 동역자"(쉬네르곤 투 테우,)로 되어 있다. 그리고 G,F 사본에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동역자"(디아코논카이 쉬네르곤 투 테우,)로, Dc,K,L 사본에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우리의 동역자"(디아코논 투 테우 카이 쉬네르곤 헤몬,)로 되어 있다. 일꾼은 섬기는 자를 뜻한다. 대개의 경우는 이곳에서처럼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일꾼을 가리키지만, 때로 집사의 직명(딤전 3:8)또는 사단의 일군(고후 11:15)으로도 사용되었다. "동역자"는 '같이,일하는 자,라는 말이다.

    여기 '디모데'(1:1의 주석을 보라)의 경우에는 어느 사본을 취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는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굳게 하고 '믿음'(1:3의 주석을 보라)에 대하여 위로함,즉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굳게하고는 스텍릭사이로서, '고정하여'(눅16:26), '견고한 기초위에 세우는'(눅9:51)것을 의미한다. 지도자의 사명 중 하나는 말씀으로 신자의 믿음을 굳게하는 것이다(행14:2218:23,눅22:32). 이 점에 대해 內村鑑三은 [신앙의 기초를 굳게 하는데 신앙적 지식의 주입을 요한다. 신앙은 물론 지식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관한 지식으로서 그 뿌리를 깊이하고, 또 굳게 하는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잠든 신앙을 깨울 수가 있다. 하지만 지식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면 신앙의 뿌리를 굳게 할 수가 없다]라고 설명하였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위로하게 하려는 목적에 대해,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3절)고 설명한다.
    [바울은 동요케 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랑으로서는 가장 동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자신의 '환난'(1:6의 주석을 보라)에 대해서는 가장 냉정했던 그는, 타인의 환난에 대해서는 아주 열렬했다] (내촌감삼).
    요동치는 사이네스타이로서,[원래 개가 좋아서 이리 저리 꼬리를 흔드는 것을 뜻했다(Home.Od.K.216.AEL,A.N.x7.Ovid,xiv.258;).여기서 애무한다. 껴안다, 아양떨다, 아첨하다의 뜻이 되었고, 그 다음,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동요하는 것, 즉 무서워하다, 떨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의미는 두려움 또는 핍박의 공포 때문에 종교적 신념이 흔들리거나 교란되는 것이다](바니스).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호티 에이스 투토 케이메타, 3절 중반)이란 우리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당하게끔 운명지어졌다는 뜻이다(마5:10, 10:17,16:24,행14:22, 빌1:29,벧전2:214:12,딤후3:12 등). 데살로니가 교인들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유익과 안일과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들, 즉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주를 수단으로 삼는 자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빌립보서 1:29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다.

    그는 무조건 고난이 기독교인이 특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 또는 욕망 때문에 겪는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따르는 고난이 기독교인의 특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고난이란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하나님의 백성된 확실한 증거이다(마5:10,요15:19,벧전1:67). 예수께서도 믿는 자의 고난을 복이라고 하셨고9마5:4,11,12,눅6:22), 야고보 역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12)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지도자란 가장 힘들고 곤란한 일을 하기 위해서 제일 우수한 일꾼을 택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고난을 받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 더우기 지난 날에 죄인으로서 죄로 인한 고난 가운데 살던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주와 주의 나라를 위해 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인가!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하였다.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를 위해 겪는 고난이란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고난이요, 바로 그 그리스도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온갖 박해와 핍박 그리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파한 바울 자신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4)고 고백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환난을 가리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4절)라고 말한다(2:14,살후1:46). 그는 교인들에게 거짓 목자들의 상투적 기만인 장미빛 인생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더불어 겪어야 할 환난까지도 분명히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고 있는 것이다.
    예언의 성취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해 주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확신케 해준다. 따라서 예언의 성취는 환난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아뭏든 예언의 성취라 하더라도 교회가 환난을 당하면 교역자는 초조할 수 밖에 없다. 바울 역시 이러므로 나도 참다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5절)라고 초조감을 토로한다. 시험하는 자는 페이라존으로서, 마태복음 4:3과 이곳에만 나타나는데 사단의 별명이다(2:18의 주석을 보라).

    바울은 사람이나 사건 등, 모든 종류의 시험(유혹)을 시험하는 자 곧 사단에게 돌리고 있다. [특히 사단의 비열함은 먼저 인간을 범죄하도록 유혹하고, 그런 다음 그에게 그 죄를 추궁하는 것이다. 더우기 사단은 인간의 죄가 사해진 후에도 계속해서 그를 비방한다](헨드릭슨). 사단은 평안을 누리는 신자에게는 안일과 나태로, 강한 자에게는 고만으로, 약한 자에게는 환난으로 시험하여 넘어뜨린다.사단이 시험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며(히12:2),또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엡6:11). 바울은 그러한 사단의 시험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을 잃게 되면, 자기 일행의 수고(코포스,1:3의 주석을 보라) 가 헛되게 되므로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의 '믿음'(1:3의 주석을 보라)이 여전한가를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전도자들의 근로가 헛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세상에 잔혹한 일치고 사람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일 이상 없다. 하지만 이 참사는 우리들 전도사가 날마다 목격하는 바이다. 우리의 근로는 종종 헛되이 된다.신앙의 자녀는 날마다 속화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속화되는 줄은 모르고서, 아니, 향상으로 스스로 믿으면서!](내촌감상).

    나. 디모데의 복명

    6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9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0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바울의 염려와는 달리 디모데의 복명은 꽤 고무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6절 상반)라고 설명한다.
    지금은(아르티 테,그러나 지금은)이란 디모데가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돌아온 지금을 가리키는 것이다(행18:5). 이 말은 "방금"(마9:18,갈1:104:20)또는 '조금 전'(살후2:7,고전 13:1216:7)의 뜻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후자가 더욱 적합하다(토마스,p.245).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관하여 바울에게 전해 준 기쁜 소식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1:3의 주석을 보라)이었다.[믿음과 사랑이란 가장 고귀한 경건의 전체이다](칼빈).
    특히 이곳과 요한계시록 10:7에만 사용되고 있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란 유앙켈리사메누로서,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다. 교회가 환난과 핍박 중에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는 소식은 실로 전도자에게는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또 하나의 기쁜 소식에 대해 바울은,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6절 하반)라고 설명한다.

    앞의 것이 종교적 내용이라 한다면, 이것은 인격적 내용이라 할 수 있다(프레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일행이 전해 준 복음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견지할 뿐만 아니라,항상 바울 일행을 잘 생각해 왔다.
    잘은 아가텐으로서, 인간과 사물에 있어서 선한 또는 좋은 등을 뜻한다. 그리고 육에적이며 도덕적인 영향으로도 사용되었다(마7:18,눅6:45,벧전2:18, 빌1:6),롬10:15).
    생각은 므네미안으로서,기억,기억력,생각,회상등을 뜻한다(롬1:9,엡1: 16, 빌1:6,딤후1:3).

    양들이 복음을 전해 주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해 준 목자에 대해서 항상 좋게 기억(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참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일행에 대한 호의적인 생각으로 바울 일행이 그들을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그들도 바울일행을 간절히 보고자 하였다. 특히 간절히는 현재 분사형인 에피포툰테스인데, [이페와 포테오의 합성형으로 '간국한 염원'을 뜻한다. 현재 분사형인 것은 그 염원이 현재 그대로 불타고 있는 것을 표시한다.우리 개역에는 흔히 '사모함'으로 번역되며 혹은 바울이 로마인이나(롬1:11), 빌립보인이나(비1:18),디모데를 (딤후1:4)보고자 한 애정을 표시하고, 혹은 예루살렘 교회의 이방 교회에 대한 (고후 9:14) 사랑, 혹은 성령의 성도에 대한 (약 4:5) 사랑을 표시하고 있다](이상근).
    바울과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는 서로간에 사모의 정이 복받쳐 못견딜 정도로 보고 싶어하는 관계이었다.

    기쁜 소식을 들은 바울은,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7절)라고 고백한다.
    모든 궁핍과 환난(파세 테 아낭케 카이 틀리프세이,)의 궁핍은 육신적 결핍(프레임), 물질적 궁핍(토마스,p.245),육신적 필요(Robertson)3)을 뜻하는 것이다.
    바울은 도처에서 물질적 궁핍과 적들로 인한 '환난'(1:6의 주석을 보라)에 시달렸다(고후 6:4511:23-27, 딤후3:12). 이 점은 본서를 쓰고 있는 고린도에서도 마찬가지이었다.그는 물질적인 궁핍 때문에 장막을 만들어야 했으며(행18:3), 또한 동족인 유대인들로 인해 환란을 당하였다(행18:61213).
    그러한 와중에서도, 그는 교회가 믿음을 잘 지킨다는 소식에 위로를 받았노라(파레클레테멘,)고 하는 것이다.[교인들의 거룩한 생활과 신실성을 복음의 사역자들의 짐을 덜어 주고 마음에 위로 및 격려를 주게 된다](바니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 고생하면서도 그 자식이 잘 성장하는 모습 때문에 큰 위로를 얻는 것과 같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1:1의 주석을 보라)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8절)고까지 말한다. 굳게 선즉은 스테케테로서, B,A,G,F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N,D 사본 등에는 로 되어 있다. 아뭏든 그 뜻은 적군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군인들처럼 굳세게 서 있다는 뜻이다(빌1:274:1 갈5:1).

    이제는(눈,)이란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이다(Ellicott).4) 즉 데살로니가가 교인들의 환난에도 불구하고, 내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 덕택에 요동치 않고 믿음과 사랑을 견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제' 를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리라(조멘,)는 이 말이 지닌 가장 고귀한 뜻인, 구원받은 신자가 나누어 갖는 그리스도의 생명 요1:14,요일 3:145:12)이나 영생(요17:3,요일5:11)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행복함 또는 생기 넘침](칼빈,헨드릭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프레임은 [죽음의 문을 부단히 만나지만(롬8:36,고전15:31,고후6:911:23), 바울은 새로 임대받은 생명을 갖는 것으로 느낀다]라고 설명한다. 내촌감삼은 [우리가 사는 보람은 너희의 신앙에 의해서이다.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바라랴? '너희로 하여금,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바 되는 일'(13절,日譯)아니랴? 우리의 생명은 너희의 신앙에 연결되는 것이다. 너희의 신앙이 무너진 것인가? 우리에게 사는 보람이 없어진다고, 이는 격어같이 들리지만 격어가 아니다. 어머니의 생명이 그 자식의 그것에 연결되듯, 전도사의 생명은 신자의 신앙(영적 생명)에 연결(관계)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기보다도 그 자식을 사랑하듯, 영의 사부인 전도사는, 자기보다도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낳은 신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아직 껏 전도사된 일 없는 자이다]라고 자세하게 풀이하였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바울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9절)라고 말한다.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파세 테 카라 헤 카이로멘,)의 모든 '기쁨'(1:6의 주석을 보라)에 관사가 있어서 '큰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너희를 '위하여'(페리,:관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9절 하반)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굳건한 믿음과 그 소식을 들은 자신의 큰 기쁨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비롯된 것이므로 그 하나님께 이루 다 감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의 동기가 된 그들을 위하여 늘 기도하고 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10절).
    주야로 (뉘크토스 카이 헤메라스,)는 '밤과 낮으로'(2:9,눅18:7,딤후1:3,계4:8)이다.

    심히 간구함(휘폐레크페리스수 데오메노이,)은 열렬히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바울과 같은 경지의 신앙인에게는 기도와 생활을 둘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을 것이다. 그는 5:17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의 강렬한 기도의 요지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다.
    온전케 하다는 카타르티사이로서, 수리하다(마4:21), 실수와 죄로부터 바로 잡다(갈6:1), 부족한 것을 온전하게 하다(벧전 5:10), 깨어진 조화를 회복하다(고전1:10),순서를 정하다, 정돈하다(히11:3),활을 세우다, 준비하다, 보충하다(에어하트). 선한 일에 온전케 하다(히13:21)등을 뜻한다.[바클레이는, [그 말은 외과 의사들이 수족의 골절을 다시 맞추고 어긋난 관절을 다시 제자리에 끼어 맞추는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정부의 일이 잘 되어 나갈 수 있도록 대립되는 당파를 합칠 때 사용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엡 4:12의 주석).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이미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굳건한 것으로 높이 평가한 사실(1:3,8,2:13,3:6-8,살후1:3)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함이다.
    믿음은 물론, 인간사에 있어서 완전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이다. 그들의 믿음이 환난과 핍박이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더 이상 충족 또는 성장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복음에 대한 무지 또는 왜곡된 지식으로 인하여 도덕적 결함(4:2-6), 재림에 대한 오해(4:13-18), 현실 생활의 불성실(4:11)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칼빈은 [스승의 맡은 사명은 하루나 혹 한달 동안 일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끔 인도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믿음을 완전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이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목자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 세계에 더 이상의 교육이 필요 없는 수준이나 경지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은, 우리의 겸손과 성장의 필수적 조건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가보고 싶어하였으나, 사단이 막았으므로 자기만 아덴에 머물기로 하고 대신에 디모데를 파견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해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란 운명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환난에 대해서는 이미 에언했던 것이므로 그들의 환난은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아뭏든 어린 교회가 환난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견딜 수 없어서 그들의 믿음이 여전한가를 알기 위해 디모데를 파견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단의 시험에 걸려 넘어져서 믿음을 버리게 되면 바울 일행의 모둔 수고가 허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디모데의 복명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여전하였다. 또한 그들은 복음을 전해 준 바울 일행을 좋게 생각하여 간절히 보고 싶어하였다. 이 점은 바울도 마찬가지이었다. 그 기쁜 소식은 모든 궁핍과 환난 중에 있는 바울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살맛나게 해 주었다.

    그 결과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따라서 그는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를 정도이었다. 끝으로 바울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주야로 간구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