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데살로니가전서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 내용: 1. 시작하는 말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1:59

데살로니가전서(1Thessalon)


    I. 시작하는 말 (살전 1:1-10)

    1. 소개와 인사(1:1)

    가. 송신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1) 본서는 당시의 편지 형식을 따라 보내는 사람(1절 상반), 받는 사람(1절 중반),그리고 기원 또는 축도(1절 하반)의 순서로 되어 있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서두에 그 자신의 이름만 쓴 것(롬,갈,엡,딤전,후,딛)과 동역자의 이름을 함께 쓴 것(고전에는 소스테네,고후,빌,골에는 디모데,살전.후에는 실루아노와 디모데)이 있다.
    본서에 연명된 세 사람은 함께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여 많은 결실을 얻었고(행17: 14), 그 후에도 계속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교류하였으므로 수신자들인 그들과 친숙한 사이였다.
    세 사람이 연명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저자는 바울이다(제1부,I.저자를 보라).

    한가지 특이한 점은, 빌레몬서처럼 본서와 후서에는 바울의 이름에 "사도"라는 직명이 첨가되지 않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편지 서두에 자신을 가리켜, 사도라고 밝히거나 강조하고 있다(롬,고전,고후,갈,엡,골,딤전,딤후,딛).그러나 빌립보서에서는 [이미 빌립보 교인들과는 깊은 애정을 나누고 있는 친밀한 사이이었고, 또한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논쟁의 여지없는 참 사도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사도라는 말 대신에 '종'이란 말을 썼다] (빌1:1의 주석). 그리고 로마서와 디도서에서는 사도라는 말과 종이라는 말을 다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본서에서 사도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은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됨을 잘 알고 있는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일 것이다.1) [츠빙글리 (Zwingli)에 의하면, 바울이 사도직 없는 동반자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생각하여 겸손한 태도로 "사도"란 직호를 사용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한다](박윤선). 그러나 이 견해는 고린도전서 1:1, 고린도후서 1:1,갈라디아서 1:1-2,골로새서 1:1 등을 보아 받아들일 수 없다.
    아뭏든,위대한 사도 바울이 나이 어린 두 사람을 자기의 이름과 함께 언급한 것은, 그의 위대한 겸손의 소치라 할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제자 2인과 함께 책임을 나누고,또 명예를 함께 한다](內村鑑三).
    특히 이 점에 대해 에어하트는 [위대한 사도는 가식 없이 자신을 어린 동료들에게 연합시켰다. .. 겸손의 은혜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외식적인 겸비나 혹은 비하가 아니라 사랑과 수고의 우정 안에서 모든 계층과 연합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실루아노는 사도행전 15:2216:2517:10등에 나오는 "실라"와 동일인이다. 사도행전 이외에는 늘 "실루아노"로 통하며, 전자는 히브리명, 후자는 로마명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행16:20) 선지자이며(행15:32), 예루살렘 대 사도 회의의 결과를 전달하도록 뽑힌 이들중 하나였다(행 15:22). 그는 그 일을 수행하는데 요긴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행16:37).
    사도해전 15:36-41에 보면, 바나바와 헤어진 바울은 자신의 2차 선교여행에 실라를 동반자로 택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실라는 참으로 좋은 조력자이었다(행17:1410).실라는 후에 베드로와 같이 일하기도 하였다(벧전 5:12).
    실루아노가 디모데보다 먼저 언급된 것은 연령과 믿음에 있어서 선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디모데는 가장 잘 알려진 바울의 통료들 또는 동역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루스드라 출신으로서 헬라인 아버지와 믿는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의 아들로서(행16:1,딤후 1:5), 특히 외조모와 어머니의 진실한 신앙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딤후 1:5).
    그와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바울의 첫 선교여행때, 바울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것 같다(행 14:6-7,딤전 1:2). 그 이유로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에는 유티게를 믿는 유대 여자라고 일컬었고, 또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여 선교 오행에 동반한 사실 등을 들 수 있다(행 16:1-3).
    디모데는 진실한 믿음의 소유자로서 (딤후 1:5),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다(행 16:2). 그가 얼마나 신실한 복음의 일꾼이었는가는 위대한 사도 바울이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2)고 칭친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실제로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내 아들(딤전 1:18,딤후 2:1), 믿음 안에서 참 아들(딤전 1:2),사랑하는 아들(딤후 1:2), 주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고전 4:17)이라고 불렀다.

    나. 수신자

    1...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리

    바울은 본서의 대상을 가리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제1부,II.대상을 보라)라고 한다. 교회란 에클레세아이며, 바울 서신에 60회 정도 나온다(바클레이) 2) 이 낱말의 히브리어적 배경으로 '카아할,gahal'(창 49:6,창12:6,민14:5,신 5:22,겔23:24등)및 "에에다,edhah'(레 8:4,민8:910:2,잠5:14등) 가 있다. 전자는 '부름받은 모임', 후자는 '지명된 모임'의 뜻으로 다같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 또는 선민 자체를 가리켰다.

    신약에서 그 말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소환된 사람들의 모임, 특수 지역의 거주민들로부터 모집된 믿는 자들의 공동체,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소집된 공동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미디어,Minear). 3)

    바울은 교회의 교회됨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곧 교회와 일반단체와서 결정적인 차이점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교회의 근거요 생명이요 활동의 무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테오 파트리)에 대해 [메이첸(Machen)은 하나님의 父性의 교리는 예수와 바울이 똑같다]라고 말한다. 케네디(Kennedy)는 더욱 구체적으로 [예수의 교훈의 근본적 취지인 하나님의 부성의 계시는 바울의 종교적 개념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배했다]라고 설명한다. 이 사실은 바울이 자기의 모든 서신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롬1:7,고전1:3,고후1:2,갈1:3,살후 1:2,골1:2,몬3).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의미에 대해 바르트(Barth)가 그의 '교의학 개요'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란 인간 관계에서 하나님께 적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인간 관계에 적용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의 본성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 그의 피조물인 우리를 취한 아버지이시다... 참되고 정당한 부성은 하나님 안에 있고, 이 하나님의 부성으로서부터 우리 자신의 부성이 생기는 것이다. 신적 부성은 모든 자연적 부성의 근원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주도적이며 자유로우신 은혜에 의해서만 인간은 그의 자녀, 즉 그의 양자가 될 수 있다.
    양자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을 표현하는 하나의 개념이다.[고대 세계에서 가족이 양자를 삼는 것은 매우 평범한 일이다](바클레이).
    양자 결연 의식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동전과 저울을 사용한 상징적인 매매 행위에 의해 진행되었다. 아들의 친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두번 팔고, 다시 상징적으로 두번 되샀다. 끝으로 세번째 팔고는 다시 되사지 않았다. 그런 다음 양아버지가 로마의 행정 장관인 집정관에게로 가서 양자 결연의 건을 신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일단 양자가 되면, 그의 과거의 모든 빚과 계약은 무효가 된다. 그는 완전히 새 삶을 사는 새로운 인간으로 간주된다. 미래에 있어서도 그는 다른 아들과 똑같은 근거를 갖는다(바클레이).
    바울은 양자의 개념을 구속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롬 8:2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정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이다(엡1:4). 이 아들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 대신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양자의 영을 받았다(롬8:15,갈4:6). 이 영은 곧 하나님의 영으로 양자의 모든 삶을 지배한다(롬8:14).따라서 [양자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환경들, 즉 세상, 생명, 죽음, 현재적인 것들과 다가올 것들의 주인이다.바울은 항상 이 승리적 조건들을 성령의 선물과 결합시킨다](케네디). 이러한 양자의 삶은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자유로 특징지어진다(롬8:21,고후3:17).
    바울에 의하면, 양자란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서,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롬8:17). 이 고난은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고난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고전 4:10-139:19,고후1:54:8-10,11:23-32,빌1:293:10,골1:24,살후1:5,딤전 4:10,딤후1:8).

    한마디로, 바울에게 있어서 양자란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보내 주셔서, 자신의 영광의 상속자로 삼으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죄인된 우리가 조물주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 즉 그의 양자가 되었다는 것,이보다 더한 사랑의 신비가 있을 수 없으며, 이보다 더 놀라운 은헤가 있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바울이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시라 부르는 의미이다](엡1:2의 주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란 구약에서는 노예에 대한 주인을 뜻하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명예와 존엄 그리고 하나님을 표현하거나 특수한 이름인 야웨(Yahweh)를 대신하는 칭호이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그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진 "여호수아"의 와전이고, 그리스도는 "기름부엄을 받은 자"의 뜻으로 구약의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등이 있기에 해당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공적 이름으로 '예수는 메시야'라는 초대 교회의 신조가 결정된 것이었다(이상근),주 예수 그리스도는"예수는 주와 그리스도시라"(행2:36)는 것보다 더 장엄한 형식이다. 특히 이러한 공식 칭호가 바울의 최고의 서신인 본서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초대 교가 일찍부터 예수를 주로 인정하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란 [바울의 특징적 표현으로 그리스도와 신자(교회)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와 함께'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슈바이처,Schweitzer).4) 또한 이 말은 "성령 안"에와 같은 말이기도 하다(다이스만,Deissmann).5)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며 또한 우리는 그 안에서 축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을섬기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안이야말로 영적 축복의 근원이요 통로요 영역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적 생활(지,정,의 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바울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다. 그의 신비주의는 일반적인 의미의 헬라적 신비주의 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 점에 대해 다이스만이 잘 설명하고 있다.

    (1) 전자는 반은 작용으로서의 신비주의이며, 후자는 능동적 행위로서의 신비주의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해 오시는 것과 인간이 신에게 접근해 가는 것이다. 전자가 하나님의 선물 혹은 은혜의 신비주의인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노력이 주도하는 신비주의이다.6) (2) 전자는 신비주의의 목적이 신과의 교제(Communio)이며, 후자는 일치(unio)이다. 즉 하나님의 현존을 통한 인격성의 상실이다. 전자가 신의 뜻을 향한 인간의 적용인 반면에 후자는 신화(deification)이다. 사실상 전자는 신 중심적 신비주의이며, 후자는 자아 중심적 신비주의이다. 전자는 윤리적 열정주의의 신비주의이며, 후자는 경건적 도취의 신비주의이다.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이란 단순히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참가한 신비한 연합을 요약하는 것으로, 그의 감정과 의지와 이성의 전 삶이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 축도

    1...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축도한다.그의 다른 서신들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가 첨가된 유력한 사본들이 있지만 (N,A,D,K,L,P등),없는 것이 더욱 유력시되고 있다 (B,G,F등). 본서가 바울의 최고의 서신이라는 점을 보아 본래부터 없었던 것 같다.
    [헬라의 인사말인 은혜(카리스,)와 히브리의 인사말인 평강(에이레네,)이 바울에 의해 사용될 때,[그 두낱말은 기독교 전체를 포함한다](루터). "카리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일(헨리),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스템), 그리고 [죄된 피조물이 필요로 하는 모든 영적 축복을 쏟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헉스테이블)등의 뜻이다. 한 마디로,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만으로는 아직 카리스(은혜)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아니다. 카리스에 대한 핵심적인 의미란 곧 '죄와 용서'이다(루터.렌스키){갈1:3의 주석}. 하나님의 은혜 중 은혜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현된 속죄의 사랑이며(롬5:7), 그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에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할 때, 일반적인 은혜란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가 될 수 없다. 만일 누가복음 15:11이하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에게서 많은 선물(은혜)를 받았지만 용서를 받지 못했다면 그 선물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죽음과 멸망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죄악의 사슬에서 구속받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일반적인 은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이 구속의 은혜야말로 모든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것이다.

    ["에이레네"는 고전 헬라어에서는 적대적인 무리 사이의 휴전 혹은 적의의 해소라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전쟁과 다툼에 반대되는 것,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회복된 올바른 관계, 마음의 평안 또는 고요 등을 의미한다(미톤). 에이레네가 내적인 의미의 것이든, 외적인 의미의 것이든 근본적으로 [먼저 죄를 용서받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 까닭은 율법이 죄 때문에 양심을 비난하고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다](루터) [갈 1:3의 주석). 그러므로 인간이 참된 평화를 얻으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헤를 통해 죄사함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평강이란 은혜의 결과이다. 따라서 은혜의 결과로서의 평화는 세사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주시는 하늘의 평화이다(요14:27).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이 그의 다른 서신들과 달리 본서에서 자기 이름에 '사도'라는 직명을 첨가하지 않는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가 설립한 교회로서 그의 사도됨을 잘 알고 있는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수고한 나이 어린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높여 주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 곁에 연명하였다. 이어서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기원하고 있다.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다. 이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가장 큰 사랑은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다음, 평강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내적 또는 외적인 평안이다. 따라서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평안이다.

    2.감사의 기도 (1:2-4).

    2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대체로 바울은 편지를 쓸 때에 보내는 자와 받는 대상을 밝힌 후에 축도를 하고, 이어서 받는 대상에 대한 감사와 기도를 기록하고 있다(롬1:8-9, 고전 1:4,엡1:16,빌1:3-4,골1:3,딤후1:3,몬4등).
    본서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2절) 이라고 한다.
    우리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너희 무리는 어린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인하여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는 [결점을 근절하는 최상의 방법은, 더욱 많은 꽃을 피우도록 그의 장점을 칭찬하는 것이다... 바울은 훌륭한 심리학자가 하는 것처럼, 참 기독교적인 솜씨로, 책망하려고 할 때에도 칭 찬하는 말로 시작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도는 프로쉬곤으로서, 간구(데에시스) 탄원, 청원, 간청을 뜻하는 말임에 비해, 피조물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모든 태도와 말과 행동을 포괄하는 말이다.
    너희를 말함은(므네이안 휘몬 포이우메노이,)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 또는 기억하게 되는 것은'을 뜻한다.

    인간이란 원하든, 원치않든 다른 사람에게 어떤 기억을 남겨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 반면에 우리는 기억의 창고에 아름다운 기억거리를 채움으로써, 쓰라린 기억이 자리잡을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특히 주의 종들에게 아름다운 기억거리가 됨으로써,그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해야 한다. 가장 위력있는 기도는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그들을 기억하고 되는 이유를 가리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3절)라고 설명한다.

    믿음의 역사의 역사는 에르구로서, 일, 고용(마13:34,요17:4,고전15:58),성취한 것(행7:41,히1:10), 다양한 의미의 행위,행동(요9:3,계2:6,약2:14,벧전 1:17)등을 뜻한다.
    믿음은 피스테오스로서, 신조나 신앙 고백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적 행위에 대한 신뢰와 확고 또는 심리학적 의미의 내적 신념이 아니다(홍현설).1) 한 마디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엡2:8,마16:17), 성령의 은사(고전12:9)로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인간의 전 인격적인 응답이다. 전인격적인 응답이란 우리의 삶, 즉 사고, 의지, 감정 및 행위의 전체가 하나님께 대하여 복종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를 맺는 [믿음의 결단은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재 은혜에 근거된 것이므로] (웨슬레)2)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공로일 수가 없으며, 반면에 밎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사란 믿음에서 비롯되는 행위(L.Morris) 3),또는 믿음에 의해 성취된 일을 뜻하는 것이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정말 구원받게 한 믿음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행위의 열매가 있게 마련이다.그러한 의미에서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2)고 하며, 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고 단언하는 것이다.

    [ 일하는 태도보다 더 그 자신을 말해주는 것은 없다. 어떤 이는 채찍이 무서워서 일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보수를 목적으로 일할 수도 있다.어떤 이는 엄격한 의무감에서 일할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이는 믿음으로 고취되어서 일할 수도 있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결국 사람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바클레이).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고 하였고, 베드로와 사도들 역시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이들에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고 하였다.
    인간을 올바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를 좋게 해드리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는 일이다.

    사랑의 수고의 수고는 코푸로서, 에르구의 뜻에 가깝지만,분명히 엄청난 노력이 소요되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토마스,p.212).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힘과 에너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사용할 만큼 노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바클레이). 또한 이 말은 운동 선수들이 힘들여 훈련하다는 뜻도 있다](빌2:16의 주석). 때때로 수고는 기독교인의 생활을 지탱하도록 금전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고전 4:12,살후3:8). 여기서는 꼭 그렇게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병자와 굶주린 자를 돕기 위한 자선적인 노력이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한느 일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헨드릭슨)등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랑은 아가페로서 그 최고의 주석은 고린도전서 13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랑은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사랑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한 마디로, 사랑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에게 그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그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나 선행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오히려 형벌이 마땅한 대가일 수 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화목제로 그 아들을 주신 것이 곧 사랑이다. 화목제로 주셨다는 말 속에서 우리는 참된 사랑이란 진리와 정의가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전 13:6). 이 놀라운 사랑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을, 더우기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다. 인간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져야만 하는 것이다(롬5:515:30,고전 12:31-,갈5:22).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이 느끼고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영적인 면에나, 정신적인 면에나, 육체적인 면에나, 물질적인 면에서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그들의 결핍을 채워줌으로써 사랑을 실현해야 한다.

    사랑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은, 남을 사랑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또한 남을 사랑할 조건이 전혀 없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오는대로 현재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부터 실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수고란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전력을 다한 노고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수고는 싫증과 짜증과 불만 대신에 즐거움과 상쾌함과 감사를 선사해 주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란 주의 재림과 그와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확고한 기대감에서 비롯되는 인내를 의미한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께 대한 소망은 복음전파에 따르는 모든 핍박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고난과 역경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이 종말론적 소망과 현실적 인내의 역동적 관계가 본서의 주요한 과제로서 전개되고 있다(궁촌무천).]

    여기의 인내는 훼포모네로서,[-아래서 버티는 것, 인내, 확고부동, 참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바클레이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해하여,, [휴포모네는 단순히 인내하는 능력만은 아니다.그것은 여러 일을 위대한 것으로, 영광에 가득찬 것으로 변하게 하는 능력이다]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인간들과 기독교인들은 시험과 환난 그리고 번민 가운데 빠지면 조급하게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만사란 서둘러서 좋은 법이 없다. 이에 대해 잠언이 잘 경고해 준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20:21).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시험과 시련을 만나면 때가 오기까지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인내란 견뎌내기 어려운 상황과 조건을 극복하여 좋은 결실로 바꾸는 능력이다. 바클레이는 [박해 시대에 이교도를 경탄케한 것은 순교자들이 하는 수 없이 죽어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죽어간 데 있다. 어느 순교자는 화염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교도들은 그에게 무엇을 보고, 웃음짓는가고 물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기뻐한다"고 그는 말하였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내란 인간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인내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하시고(골2:15)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인내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약 1:3의 주석).

    결국 바울은 자신의 감사와 기도의 이유에 대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께 대한 소망이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1:1의 주석을 보라)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므네모뉴온테스<1:2의 "말함은"의 주석을 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사의 궁극적 이유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절)라고 한다.
    형제들아4) (아델포이:믿음의 형제들)라는 애정어린 호칭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이라는 말이 첨부됨으로써 그 애정의 도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프레임,토마스.p.215).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에가페메노이 휘포 투 테우) 자란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칭호이었고, 개인적으로는 모세, 솔로몬, 베냐민, 사무엘등을 가리키기도 하였다(프레임). 바울은 이러한 칭호를 서슴치 않고 이방인 교회에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바니스), 그래서 바울은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절 하반)라고 하는 것이다.
    너희를 택하심(텐 에크로겐 휘몬,의 택하심(행9:15,롬9:1111:5728,벧후 1:10) 이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우수성(Chrysostom)이나 6),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믿은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 7)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가리키는 것이다 8)(참조:엡1:4-5의 주석).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그 이유는 그가 그들의 믿음에 의한 행위와 사랑에 의한 최선의 노고 그리고 주의 재림에 대한 확고한 기대감에서 비롯되는 인내를 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 즉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선택한 자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3. 소문난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1:5-10>

    가, 바울 일행의 전도 결과

    5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굥니들을 선택하셨음을 안다고 한 바울(4절)은, 그 근거에 대해 이는(호티, 왜냐하면)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5절)고 설명한다.

    우리 복음(토 유앙겔리온 헤몬,)은 바울 일행이 창시한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2:2,8:9,롬1:115:16,고후11:7),또는 그리스도의 복음(3:2,살후1:8,롬15:19,고전9:12,고후2:129:1310:14,갈1:7),즉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께서 창시한 복음이요, 그리스도께서 그 핵심적 내용이 되시는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복음"이란 우리 곧 바울 일행이 받아들여 전한 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바울은 복음보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너희에게 이르렀다'고 하는 대신에, '우리의 복음이... 너희에게 이러렀다'고 하였다.

    복음이란[좋은 소식, 복된 소식이라는 뜻이다. 성서적 의미,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다](엡3:6의 주석). 이 복음은 사역자들을 통해 네 가지의 복합된 방법으로 데살로니가(교인들)에 이르렀다.

    첫째는 말로(엔 로고)전해졌다. 복음은 말로 전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말 그 자체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말로만 전해질 때, 그것은 단지 인간적인 논설이나 웅변에 불과하다(에어하트).

    둘째는 능력들로 (엔 뒤나메이,) 전해졌다. 능력은 고전어에서는 자연적 힘을 뜻하였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또는 속성으로서의 힘(눅1:17,행3:12,고전1:18), 능력있는 행위, 이적(마11:20)등을 의미하였다. 이 말은 다이나마이트(dynamite)로 영역되어 폭박하는 힘을 표시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행한 이적들(Theodort,Oecumenius) 1)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 2)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로마서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16)라고 하였다. 바니스는 [복음에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를 끊고, 우상을 버리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세째는 성령으로(엔 프뉴마티 하기오,) 전해졌다. [그는 말로 전파된 말씀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개념을 부가시킨다](토마스). 하나님의 영이요 그로 전해진 설교는 인간을 구원하거나 성결케 하는 복음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네째는 큰 확신으로(엔 플레로포리아 폴레,<골2:2,히6:1110:22>) 전해졌다. 즉 바울은 일행은 자기들이 받아서 전하는 복음이 참이라는 것과 그 참된 복음의 효과에 대해 가장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성령의 내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복음 전도자로서의 자기 일행에 대해,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4)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5절 하반)라고 한다(2:1-12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아는 바와 같으니라(카토스 오이다테,)고 함으로써, 독자들이 이미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는 확실한 사실을 재확인해(김용욱)줄 뿐만 아니라, 혹시 이견을 가질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예방한다.
    그 사실은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이기적 관심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때의 성령의 내재에 의한 그들의 신실한 인격과 삶을 지시하는 것이다.

    복음 전도자 또는 설교자들의 거룩한 생활은, 그가 전하는 종교적 진리를 더욱 확고하게 해 주며, 또한 청중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이제 바울은 방향을 바꾸어 독자들의 복음에 대한 반응을 상기시켜 준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6절).
    환난은 틀리프세이로서, 외부에서 가해지는 철저한 압박을 의미한다. 또한 이 말은 박해나 기타의 환경 속에서 기독교인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시험이나 어려움을 포함하는 일반적이며 포괄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같은 어원의 동사는 포도를 짜는 틀에서 포도를 으깬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마13:2124:21,계7:14). [이 환난들을 메시야의 재림 바로 전에 있을 마지막 날의 환난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Best).5) 마지막 날의 환난이란 사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이 절정에서 이르는 화난이다(마24:21,살전 5:9).

    기쁨은 카라스로서, [세상적인 기쁨이나 값싼 승리에 의한 기쁨이 아니라, 대체로 종교적 근거에 의한 기쁨,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 기쁨을 뜻하는 것이다(시30:11,잠29:6,롬14:1715:13,갈5:22 등).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한 받고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 기쁨이요, 사랑을 행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참된 의미에서 인간 사회의 기쁨도 서로 사랑(아가페)을 주고 받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빌1:3의 주석).
    그러므로 성령의 기쁨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기쁨이요 동시에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영적 기쁨이다.

    결국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포도를 으깨는 듯한 외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령 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기쁨으로, 자신이 전한 도(톤 로곤,)곧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칭찬하는 것이다(행17:5-10)<자세한 것은 제I부,II.2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그들이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미메타이, 모방자들)가 되었으니(6절 하반)라고 극구 칭찬한다. [신앙은 주를 앙모하는 것이나 신앙 생활은 보다 앞선 신자를 본받는데서 향상한다](이상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고전4:16)과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9빌3:17)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하였다. 이 권면은 단순히 바울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바울은 주를 본받고자 애쓰는 자신의 겸허한 열정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바울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원형이시다.
    오늘의 비극은 본받을 사상과 말은 많으나 본받을 행동인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원형으로서의 주를, 그리고 겸허한 열정으로 주를 볻받는 자가 된 자기를 본받는 자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이 본이 되었는지라(7절)라고 칭찬한다. 본절의 본은 튀푸스 6) 는데 비해,'쳐서 만든 자국 또는 모형'으로 여실히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이상근).
    주전 146년 이후에 헬라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주로 나뉘어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전자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제I부,II.1.데살로니가를 보라)이고, 후자의 수도는 고린도이었다. 불행스럽게도 고린도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달리, 좋지 않은 면에서 소문난 교회이었다.

    나. 소문난 믿음

    8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9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또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에게 본이 되었다고 한 바울은, 그 이유98절의 원문에는 '왜냐하면'의 뜻을 가진 접속사 가르로 시작되었다)를 가리켜,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8절)고 설명한다.
    주의 말씀(호 로고스 투 퀴리우, 비교:롬10:18)은 주께서 하신 말씀 또는 그리스도께서 고취하신 말씀, 즉 복음의 별명으로 바울 서신에서는 본서(4:15)와 후서(살후 3:1)에만 나타나고, 그 외에 사도행전에 여러번 나타나고 있다(행8:2513:44484915:353616:3219:1020). 이 말은 구약의 "여호와의 말씀" (사38:45)과 같은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전해진 주의 말씀 곧 복음이,믿은지 얼마 안되는 그들에 의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1:3의 주석을 보라)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자기들은 아무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탄복한다.
    들릴은 완료형인 엑세케타이이다. 이 말은 와의 합성형으로 '소리를 우렬낸다'는 것으로 '큰 소리로 분명히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같이("Chrysostom"7) "Bloomfield)8), 또는 우뢰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욥3:14)을 뜻한다.

    각처에(엔 판티 토포)란 그 범위상 반드시 온 세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토마스, p.220). 마뭏든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소문이, 특히 그들의 열정적인 전도에 의해 널리 퍼진 것을 사실이다. 각처에 퍼진 소문에 대해 바울은,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1:5의 주석과 제1부. II.2.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라)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9절)라고 설명한다. 우상들(에이도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형상 또는 형상으로 만들어진 신에 대한 예배를 뜻하였다. 구약의 히브리인들 사이에서는 형상이 있든지 없든지 거짓 신들에 대한 모든 예배를 우상 숭배라 하였고, 심지어는 눈에 보이는 상징(송아지)를 통한 하나님 예배까지도 우상 숭배로 취급하였다(호 8:5610:5).신약에서는 어떤 피조물이나 인간의 창조물에게 하나님께 속한 여예와 헌신을 제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욕을 하나님의 의지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우상 숭배라 하였다(고전 10:14,골3:5,벧전4:3).한 마디로, 우상 숭배는 관념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상관 없이 절대가 아닌 것을 절대시 하는 것, 즉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롬 1:25)이라 할 수 있다.

    돌아와서는 에페스트렙사테로서, 180도 돌아오는 것 곧 회개를 뜻한다(참조:행14:1526:1820,고후3:16).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 일행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여 우상에게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목적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9절 하반)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테오 존티 카이 알레티노,)이란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그 사상은 성서 전체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이 표현은 생명이 없고 거짓된 우상과 대조시킨 것이다(참조:렘10:10).
    참이란 특히 요한 문학에 현저한 것으로(요1:96:3717:3,요일 5:20등) 순수한 것을 뜻한다. "사시고 참되신"은 결국 같은 사실의 안팎으로, 살지 않는 자가 참될 수 없는 것이다(이상근).
    섬기며 둘류에인으로서, 종(참조:빌1:1의 주석)으로서 섬기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롬8:1415,갈4:7), 여기서는 신분이 아니라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두번째 목적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니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10절)라는 말로 표현된다. 본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과 심판 등의 중요한 교리가 제시되고 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10절 상반)이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역설한 바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행17:3). 이것을 데살로니가인들은 그대로 받아들였다(행17:4).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최대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행2:24323:154:1010:4013:33-37,17:31,롬1:4,고후13:4,갈1:1).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는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소산이며 하나님의 손의 행위였다. 부활은 사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으며, 절대로 패배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능력의 완전하고도 결정적이며 논박할 수 없는 표명이었다]6)라고 설명하고 있다.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우주의 섭리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것보다 더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할 수 있는 예는 없다. 이 외에도 바울은 부활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증인들을 열거하고 있다(고전 15:3-7).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의 역사인 동시에 그리스도 자신의 권세로 스스로 부활한 것이며(요10:18), 또한 성령의 역사이었다(롬8:1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그의 구세주됨이 결정적으로 재확증된 것이다(롬 1:3-414:8-9). (2) 육체적 죽음의 신비에 대한 승리요, 저주와 죄로부터의 영원한 구속의 표명이다(행17:31). 따라서, 우리가 장차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것, 즉 영생에 대한 소망이 된 것이다(롬 5:21,고전 15:20,골1:18,죽은 자들의 부활 - 고전 15:52,살전 4:1416-17,산 자들의 부활 - 롬4:248:11,고후 1:1013:4). 신령한 몸 곧 부활체의 성질에 대해 F.B 마이어가 잘 설명하고 있다. 누가복음 및 그 밖의 복음서의 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인간의 경험이나 사상을 초월한 특이체였다. 무덤이 비게 된 것, 또 손발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으로는(요20:27), 시체 그 자체가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엠마오로 가는 도중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눅24:13-33), 또 마리아도 다른 제자들도 부활의 주를 오인하였다는 점에서 보면 (요20:14-1621:4), 생전의 육체와 꼭 동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문이 닫혀 있는데도 방에 들어 오시고(요19:19), 또는 방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리신 것9눅24:31)등을 보면, 보통의 육체가 갖는 물질적 제한이나 제약을 받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음식물을 섭취한 것, 말씀하신 것 등은 보통 육체와 동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체였다. 즉 물질이면서도 우리들이 경험할 수 있는 물질과는 다르고, 영이면서도 단순한 영이 아니라 몸을 갖추고 있었으며, 마음대로 나타나고 마음대로 사라지시는, 시간 및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기이한 존재이셨다. 이것으로 우리는 부활체가 어떠한 것인지 희미하나 상상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우리들은 이에 관하여 오늘날의 과학에 의한 증명을 기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제2의 창조-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자연체가 아니라, 영체였던 것이다.
    바울 자신은 죽은 자의 부활을 가리켜,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고 하면서 (고전 15:42-43), 그 몸을 신령한 몸이라고 한다(고전 15:44).
    우리의 영생에 대한 소망은 단순히 미래에 성취될 것이 아니라,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다(고후 5:17,롬7:4,참조 갈2:20).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스트와트,J.A.T.로빈슨).10) (3) 우리가 천국을 소유할 것에 대한 보증이다(고전 15:50,골1:13).

    그러므로 사도 시대에 있어서 부활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또한 모든 선교의 초점이 되었다.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는 본서와 후서의 주재인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늘은 우라논으로서,[보이지 않는 세계, 영원한 영역을 의미한다(베어). 이 점에 대해 블레이키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이 존재할 수 있는 하늘의 한 장소-성부의 영광의 현현과 접촉하는 - 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엡1:20의 주석).
    기다린다는 아나메네인이며,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낱말로 바울의 애용어인 아페크데코마이<롬8:19,고전1:7,빌3:20등)에 비해 보다 간절한 대망의 태도를 의미한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재림이란 파루시아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술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마24:3273739,살전2:193:134:155:23,살후2:1,고전15:23,요일 2:28,벧후1:163:4). 이 말의 통속적인 뜻은 누군가가 거기에 있다든지, 도착했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 외에 전문적인 용어로써, 군대에 의하여 나라가 침략당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또한 특별히 왕이나 행정 장관이 나라 안에 있는 어떤 지역을 방문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이 예수께 대해 사용되었을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 파루시아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상에의 침입과 백성의 궁극적인 복종과 예찬을 받기 위한 왕의 내림을 의미한다(바클레이). 그 외에 에피파네이아라는 말이 재림의 뜻으로 사용되었다(살후 2:8,딤전6:14,딤후4:18,딛2:13).

    에피파네이아는 신이 예배자에게 현현하는 것에 사용되었고 또한 황제의 즉위식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이 그리스도께 적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나타나시는 것, 즉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의 반역하고 모독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의미한다(메카더,바클레이).
    또한 아포칼뤼프시스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쓴 것을 벗기다' 또는 '발가벗기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모든 것을 발가벗겨 완전히 드러내 보이는 사건이다(고전1:7,살후1:7,벧전1:7134:13).
    신약의 재림 사상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극비에 속한 문제로서(마24:36,막13:12) 번개가 번쩍임같이 임하며 또는 밤에 도적같이 예기치 않을 때에 임한다(마24:273739,살전 5:2,벧후 3:10). 그리스도에 재림은 초림과는 달리 위엄과 영광 그리고 대격변의 사건이며 (살전 4:16) 성도들이 함께 강림한다(살전 3:13,고전 15:23), 또한 재림이란 사건은 마지막 심판(롬1:82:2-10,3:6)과 모든 것의 완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마지막 심판은 신자와 불신자들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있다. 전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됐으므로, 형벌의 심판으로부터 면제될 뿐만 아니라(롬5:9-11). 완전한 영광의 생명을 얻는다(고전 15:53,칼빈). 반면에 후자는 지금 여기서의 모든 삶이 그 자신에게 진노를 쌓는 것으로 마지막 형벌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주께서 오시는 날은 어두운 비밀들이 밝혀지고 마음의 뜻과 동기가 드러나게 된다(고전 4:5,스튜어트). 마지막 심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갑작스런 파멸이며 진노요 저주이다(살전 1:105:39,살후2:10-12). 이 형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것으로 특징지워 진다.

    다음, 재림의 날은 모든 것이 완성되는 때이다. 이 날에 모든 하나님의 대적들은 파멸에 이른다(고전15:24,살후2:8).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실질적인 힘을 상실한 죽음은 맨 나중에 완전히 파멸된다(고전15:26).
    반면에 기독교인들과 그외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의 죄의 결과로 인한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를 성취하게 된다(롬8:18-21). 또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며, 만물을 지배하는 그리스도 자신도 아버지께 복종하게 된다(고전 15:24-28).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이미 부분적으로 성취된 부활의 생명이 완성되는데, 이 때의 몸은 영적 조직으로 구성된 신령한 몸이다(골3:4,롬8:23,빌3:21)
    ](약5:7의 주석).
    데사로니가 교인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 즉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날이나 기독교인에게는 완전한 구원의 날이요 영원한 천국 소망이 실현되는 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밖에도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1)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벧전 4:7 살전3:135:23,롬13:11-14). (2) 재림이 아무리 지연되더라도 실망하거나 망각해서는 안된다(벧후 3:4).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대하여 인간과 같은 관념을 갖지 않으신다(벧후3:8). (3)그 때에 우리는 시랑의 친교 가운데서 발견되도록 해야 한다(벧전 4:8-9,고전16:1422). (4) 그 때를 위해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요일 2:28).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이들이 간절히 대망하는 재림주를 가리켜,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10절 하반)라고 설명한다. 장래 노하심이란 테스 오르게스 테스 에르코메네스로서, 다가오고 있는 노하심을 뜻한다.

    노하심 곧 하나님의 진노란 [퍼키서에 의하면, 변개될 수도 있는 하나님의 감정이나 의지의 반응이 아니라,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한 착오 없이 계속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적대심을 의미한다](엡2:3의 주석). 죄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적대심 또는 심판이란 곧 하나님의 거룩과 의의 발로이며(롬1:18)동시에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의 일면인 것이다. 마치 자식의 잘못에 대한 부모의 진노가 그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사랑의 발로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의 노란 그의 종말적 심판을 지시하기도 하나(습1:142:3,계6:165:9,엡5:5-6,골3:6),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으로 되어, 그 심판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프레임).

    건지시는 (뤼오메논) 역시 현재 분사형인데, 이는 신자의 구원도 불신자에 대한 심판과 마찬가지로 진행 중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완성의 시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재림의 때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선택하셨음을 아는 근거에 대해 설명한다. 즉 바울 일행이 받아 전한 하나님(그리스도)의 복움이 말로만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과 성령과 그로인한 확고한 확신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는 자기와 자기 일행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신실한 인격과 삶을 그들이 아는 바라고 재확인 해 준다.

    이어서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외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서 누리도록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바울 일행과 주를 본받은 자들이 되었다고 칭찬한다.
    결과적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마게도냐의 아가야의 모든 신자들에게 본이 되었다. 그 까닭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의해 주의 말씀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각처에 소문났기 때문이다.
    그 소문의 내용은,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일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사신하나님을 섬기는 일 그리고 그들이 부활하신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일에 관한 것이다. 이 주야말로 지금도 다가오고 있는 심판(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이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