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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데살로니가전서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 저자,대상,내용,기록연대와 장소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1:58

데살로니가전서(1Thessalon)


    I. 저자

    본서의 저자가 자신을 가리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1:1) 라고 밝혀주고 있다.

     

     실루아노와 디모데의 이름이 함께 소개되어 있지만, 이것은 실루아노와 디모데 모두, 또는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본서를 쓰는데 어떤 역할을 했다거나 불러 준 것을 받아썼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첫절 이후에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의 인격으로 말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을 지시하는 일인칭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2:18,3:5,5:27).

     

    본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1) 그런데 19세기에 바우르(F.C.Baur,1792-1860)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고 같다.

     

    (1) 본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보다 훨씬 덜 교리적이며, 또한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다.

     

    (2) 본서는, 칭의가 율법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관념을 공격하지 않는다.

     

    (3) 수개월이란 짧은 시일 안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데살로니가전서 1:7 8과 4:10에 묘사된 바와 같이 강렬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리가 없다.

     

    (4) 데살로니가전서 2:14-16의 유대인들에 대한 강경한 언어는,바울의 저작인 로마서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라는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5) 본서는 이상할 정도로 지나친게 바울적이다. 본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특히 고린도전서와 후서)에 있는 문장들과 비슷한 문장들이 너무나 많다. 따라서 본서는 바울이 아니라 A.D. 70년 이후에 바울의 제자가 재림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쓴 것이다.

     

    黑崎는 이 편지가 정말 바울의 것이냐에 관해서는 바우르일파의 부정설이 있을 뿐, 대체로 의심 없이 바울의 편지로 인정되고 있다.그리고 바울의 부정설은 유력한 학설이 아니므로 여기에 논할 필요를 인정치 않는다]라고 일축해 버린다.

     

    아뭋든 우리는 바우르의 견해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견해에 대해, 헨드릭슨은 대사도의 모든 문서가 다 동등하게 교리적 특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 서신들은 어떤 구체적 상황으로부터 생긱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각 교회의 상황은 다르다. 따라서 어떤 교회에는 교리의 명백성을 제시해 주어야 하고, 어떤 교회에는 훈계에 주어야 하며, 어떤 교회에는 책망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둘째 견해에 대해 헨드릭슨은, 바울이 오직 단 하나의 사상만 가진 사람이었는가고 반문한다.

     

     더우기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은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의 상황과는 달랐다. 세째 견해에 대해, 우리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비교 20:16,막10:31)는 예수의 말씀으로 답변할 수 있다.

     

    헨드릭슨 역시 그럴 수 없는가고 반문하면서, 사실상 본서에 의해 제공된 일련의 정보는 사도행전 17:6의 서술에 의해 제공된 것으로 확증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네째 견해에 대해, 헨드릭슨은 순수한 슬픔 및 고통을 느끼는 것과 무서운 실재의 계시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오히려 우리는 주를 거역하고 제자들을 핍박하는 죄를 일삼는 동족(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애절하고도 뜨거운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견해에 대해, 헨드릭슨은 (1)과 (2)와 반대되는 논의라고 공박하였다.

     

    사실상 다섯째 견해는, 오히려 바울의 저작임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바우르의 학설을 여지없이 반박한 학자들은 코흐(Koch-1848),뤼네만 (Luneman-1850),그림(Grimm-1850),랑게(Lange), 로이스(Reuss-1853)등이다.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뒷받침해주는 외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본서는 말시온(Marcion)의 정경 (A.D. 140년경) 에 포함되어 있다.

     

    (2) 본서는 무라토리 단편 (The Muratorian Fragment)에도 들어 있다.

     

    (3) 2세기 말의 교부인 이레니우스(Irenaeus,130-202), 터툴리안(Tertullian, 160- 22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150-213)가 본서를 바울이 저작으로 알고 인용하였다. 이들보다 먼저 폴리갚(Polycarp,69-155) 가 저스틴 마티어 (Justin Martyr,100-165) 가 인정하고 있었다.

     

    (4) 옛 라틴어 역 성서와 옛 시리아 역 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5) 데살로니가전서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편지들의 최초 사본인 The Chester Beatty Codex (A.D.220년경)에 단편적인 형태로 발견된다.

     

    (6) 유세비우스(Eus- ebius)와 오리겐(Origen)도 본서를 바울의 것으로 인용하였다.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뒷받침해 주는 내적 증거는 논의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수하다. 본서는 바울의 처녀작이며 원형대로 우리에게 전해진 신약 중에 제일 먼저 쓰여진 책이다.

     

    그 몇 가지 증거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본서 자체가 저자로서 바울을 지시하고 있다(1:1,2:18).

     

    (2) 본서는 형식과 구조에 있어서,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부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울의 것으로 인정하는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 그리고 갈라디아서와 똑같다.

     

    (3) 본서에 사용된 용어는 명백하게 바울의 것이다. 본서의 단어 중 80%이상이 소위 바울의 4대 서신(롬,고전.후,갈)에서도 발견된다. 만일 옥중서신을 바울의 것으로 인정한다면, 4대 서신과 옥중서신 속에서 거의 그 90%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목회 서신이 추가된다면 그 비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프레임,헨드릭슨).

     

    (4) 본서에는 바울 서신에서만 발견되는 특징 있는 절들이 나타나고 있다 (프레임 핸드릭슨).

     

    (5) 본서는 바울의 성품을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다(핸드릭슨). 형제들이 장점에 대한 애정어린 인식(왈커), 목회적인 배려와 애정(부르스) 그의 개종자들에 대한 강렬한 사랑과 그들의 영적 복지에 대한 염려, 그들의 믿음과 자비에 대한 그의 기쁨, 고귀한 자립심(글로악) 등.

     

    이 점에 대해 프레임은 그에 의해 믿게 된 개종자들에 대한 포근한 애정,부족한 그들에 대한 신뢰, 목회적 문제에 대한 재치 있는 처리, 사도로서의 권리에 대한 인식, 사랑의 양보, 모든 일에 있어서 독자들을 동료로 의식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동정과 기도를 위한 호소 등을 들고 있다. 

     

    (6) 본서에는 선교사인 목회자로서 살고 있는 사도 바울과 방금 태어난 고난 중에 성장하는 교회와의 가장 깊은 관계가 생생하게 묘사도어 있다(宮村武天).22) 지금까지의 논의를 미루어 볼 때, 본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II. 대 상

    1.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는 테르마(Therma) 혹은 테르메(Therme)라는 옛도성 위에 세워진 성읍이다. 그 테르마란 이름은 지금도 그 지방에 있는 테르마에(Thermae)라는 온천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의 살로니카인 데살로니가는 로마 제국 마게도냐 도의 중요 도시 살로니카(테르마) 만 동북 모통이에, 바다를 향하여 노천 극장처럼 앉아, 앞으로는 물길, 뒤로는 유명한 로마 신작로(The Via Egnatia,이달리야 동해안에 있는 두라키엄(Dyrrhachium)항구로부터 에게바닷가에 있는 네압볼리에까지 통하는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로 사방을 연락하고 있다.

     

    주전 약 315년에 마게도냐 왕 카산데르(Cassander)가 성을 재건하고, 자기 아내인 데살로니가(마게도냐 왕 빌립 2세의 딸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의붓 누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부근에 있는 몇 개의 작은 도시와 촌락을 합하여 데살로니가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웠다.

     

    이 도시는 지역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급속한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그 부근에 넓고 비옥한 평야를 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자연 항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주전 168년 마게도냐가 로마에 정복되자 데살로니가는 그 사대 행정 구역 중 하나의 수도로 작정되었으며, 또한 해군 기지가 되었다. 주전 146년, 이 나라가 로마 제국 또한 해군 기지가 되었다. 주전 146년, 이 나라가 로마 제국의 한 주로 편입되었을 때에도 총독의 주재지로 택정되어 사실상 마게도냐의 수도로 되어 있었다.

     

    로마 판도에 편입된 후에도 데살로니가는 계속적으로 번창하여 갔다.

     

    테르마 만의 제얼 궁벽한 데 있는 제일 좋은 항구에 건설되었을 뿐 아닐, 유명한 로마 신작로가 그 도시를 통과한 까닭에 그 당시 아드리아와 헬레스폰트 사이의 가장 중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주전 58년에 거기서 귀양살이의 얼마를 보냈던 키케르(Cicero)는 말하기를, 데살로니가는 '제국의 무릎'이라 하였다. 주전 49년 가이사와 폼페이와의 첫번 내전 때에 데살로니가는 폼페이 편에 섰었다.

     

    그러나 주전 42년 제2차 내전 (브루스터와 캐시우스 안토니아와 옥타비안) 때에는 안토니아와 옥타비안 편에 섰었으므로, 이 충성의 보답으로 데살로니가는 "자유시"의 자격과 특권을 향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집회의 자유와 행정관 선거의 자유를 갖고 있었다. 이 자유 선거에 의해 선출된 행정관을 읍장 혹은 시장이라 하였다(행17:6 8).

     

    이점에 대해 역사가인 누가는 정확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러므로 그 옆에 로마 식민지인 빌립보 시에 비하여 이 데살로니가는 헬라적인 성격이 더 농후하였으며, 그후에도 계속적으로 그러하였다.

     

    바울 당시에는 마게도냐인과 헬라인 이외에 로마인과 동양인 그리고 다수의 유대인이 잡거하는 복잡한 도시였다(참조: 행17:1).

     

    주후 150년경에는 인구 20만을 헤아려 '전 마케도냐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바울의 시대 이후의 로마 역사를 보면, 데살로니가는 고트족의 침입을 막는 요새가 되었다. 중세기에는 주후 904년에 사라센에게 점령되었고, 1184년에는 십자군에게 점려오디었으며, 1185년에는 노르맨의 손에 들어갔었고, 주후 1430년에는 터어키 땅이 되었다. 1914-1918년 사이의 세계 대전에서는 터이키의 중요한 군사 기지로서 콘스탄티노플 다음 가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사도 바울의 생애와 사업에 관련된 옛 도시로서, 로마를 제하고는 이 살로니카처럼 그 당시의 성격과 중요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데가 없을 것이다.23)

    2.데살로니가 교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다. 이 교회의 설립 경로에 대해서는 누가의 기록인 사도행전 17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바울이 친히 써 보낸 이 두 편지에서도 그 밖의 많은 참고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바울은 제2차 선교 여행 중에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빌립보에서 첫 선교 사업을 시작하여 미구에 경건하고 흥성한 교회를 설립하였으나, 그 반동으로 매를 맞고 갇혔다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이적으로 구출되었다. 그는 그곳을 떠나 에그나티아 신작로를 따라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서남쪽으로 백마일을 걸어서 그중 큰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교 회당에 들어가 늘 하던대로 성경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은자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한 후, 바로 예수께서 그 그리스도시라고 확증하였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살전 1:10 4:15 16)과 그 왕국의 완성에 관하여 증거하였다.

     

    이 복음 전도의 결과로 얼마의 유대인과 경건한 헬라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그리고 귀부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그들 외에도 순 이교도로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살전 1:9 2:14).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의 성공적인 선교는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 유대인들은 저자의 괴악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실라가 머물고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그러나 허탕친 그들은 야손과 몇 사람의 성도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가이사에 대한 반역죄로 몰아 고발하였다.

     

    그러나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으므로 곧 보석이 되었다. 사도 바울의 생애와 사업에 관련된 옛 도시로서, 로마를 제하고는 이 살로니카처럼 그 당시의 성격과 중요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데가 없을 것이다.23)

    III. 내 용

    본서의 내용 및 특징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바울이 본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만 한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 선교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을 때,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폭력배들을 선동하여 함께 바울 일행을 잡아 족치려고 소동을 일으켰다(행17:1-10).

     

    이에 혀제들이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피신시켰으며,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에서도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결실을 얻었다(행17:10-12).

     

    이 사실을 알게 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므로, 바울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형제들이 바울을 아덴까지 안내해 주었다. 이 때 바울은 자기를 안내해 준 이들에게, 디모데와 실라를 속히 오도록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행17:13-15).

     

    오라는 명령을 받은 디모데와 실라는 즉시 고린도로 옮겨 간 바울을 찾아와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핍박과 환난의 소식을 전하였다(살전 3:1-3).

     

    어린 교회가 어려움을 당한다는 소식에 초조해진 바울은, 직접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살전 2:17 18).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대신하여 그들을 굳게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디모데를 보냈다(살전 3:1-3). 그러나 실라는 다른 지방(빌립보나 베뢰아)으로 보내진 듯하다] 24).

     

    그후에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건너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유하면서 함께 장막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그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다(행18:1-4).

     

    미구에 디모데와 실라가 마게도냐로부터 고린도로 와서 복명하였다(행18:5).

     

    그 내용은 바울이 염려한 것과 달리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이 잘 성장하고 있고 또한 바울 일행을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이다(3:6).

     

    그들의 핍박을 받으나 용감했으며, 그 굳센 크리스챤 품격은 널리 알려졌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꾸준히 바라며 지내고 있었다] (어드맨).

     

    그러나 반면에 걱정거리도 적지 않았다. 우선 바울이 떠난 후 수삼개월밖에 안 된 그 때였지만, 벌써 유대인들은 바울의 사명과 인격에 대하여 악평과 중상을 여지없이 퍼뜨리고 있었다(3:5).

     

    둘째, 그 교회는 핍박 받는 중이라서 성도들의 인격과 재산까지도 위협받고 있었다.

     

    세째, 이교도 출신인 교인들 중에는 여전히 옛날의 부도덕한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4:1-6).

     

    네째, 바울의 전도를 듣고 주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단정하여,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교인들이 있었다(4:11-12, 살후3:8).

     

    또한 주의 재림 전에 죽은 자들 때문에 몹시 슬퍼하는 이들이 있었다(4:13-18).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해 감사하는 (1:2-3) 동시에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주기 위해 고린도에서 본서를 쓰게 된 것이다.

     

    본서의 내용은

     

    첫재, 소개와 인사(1:1),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한 감사와 기도(1:2-4), 그리고 각처에 소문이 자자한 그들의 믿음에 대한 칭찬이다(1:5-10).

     

    둘째, 과거에 대한 바울의 회고, 즉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아비가 자녀에게 하듯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것 (2:1-12),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올바른 자세와 믿음의 시련에 대한 권면(2:13-16), 그리고 직접 가보고 싶었으나 뜻을 이룰 수 없어서 (2:17-20) 대신 디모데를 파견하였으며 (3:1-5), 그의 복명을 통해 위로를 받고 기뻐한다(3:6-10)는 것이다.

     

    세째, 바울은 그들의 사랑의 성장을 위해 기도한다(3:11-13).

     

    네째, 신자의 윤리 및 교리적 교훈, 즉 바울은 순종과 거룩(4:1-8),형제애와 근로(4:9-12), 부활과 재림(4:13-18), 재림의 시기오 그 대책95:1-11)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교역자들에 대한 태도(5:12-13)와 부족한 형제들에 대한 도움(5:14-15)에 관해 가르친다. 또한 그는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5:16-18)고 권하고, 취할 것과 버릴 것(5:19-18)고 권하고, 취할 것과 버릴 것(5:19-22)에 관해 훈계하고 있다.

     

    다섯째, 바울은 그들이 주의 재림 때까지 성결하도록 기도해 준다(5:23-24).

    끝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인사하며 축도해 준다(5:25-28). 본서의 내용을 소개하는 가운데 대체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본서의 특징을 다음과 같다.

     

    (1) 개인적이며 임시적이다(어드맨).25)

     

    (2) 교리를 진술하기보다는 바른 생활을 장려하고 있다(어드맨). 26) 본서의 교리는 조직적인 것이 못되며, 종말론에 치중하고 있다. 이 점은 전.후서에 공통되는 사실이므로 두 서신을 '바울의 종말론'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는 본서가 바울의 최고의 사본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아, 초대 교회의 신앙의 중요한 요소가 바로 종말론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갖 설립된 어린 교회에 보낸 편지답게,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것처럼, 부모의 애정과 같은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치고 있다(글로악).27)

     

    (4) 그 뿐만 아니라 본서는 참으로 사도적이며 권위적이고 영감적이다(어드맨).28)

     

    (5) 선교사요 위로자요 예언자로서의 바울의 성격이 그림처럼 드러난다. 그의 확실한 신앙,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 헌신, 그의 無私, 그의 기도, 부단의 감사, 복음의 대적에 대한 의분, 거짓된 비방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정, 친구들의 기도와 동정을 바라는 인정, 그의 기지, 예의, 그의 사랑(어드맨).28)

     

    (6) 초대 교회의 전도의 열심, 핍박에 대한 인내, 목자에 대한 존경, 그리고 재빠른 믿음의 성장 등이 잘 드러냐 있다.

     

    어드맨은 전.후서의 특징을 가리켜,이 두 잛은 편지는 실생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나 또는 정신적 종교적 광명을 탐구하는 모든 자에게 깊은 의의를 제공해 준다.30)라고 설명하고 있다.

    IV. 기록 연대와 장소

    A,K,L 사본 등에는 "아덴에서"로 되어 있으나31) 신빙성이 없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2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32). 기록 연대를 규명하려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지내고 있을 때 그를 재판한 아가야 지방의 총독인 갈리오(행 18:12 이하)의 연대를 참조해야만 한다. 이 점에 대해 렌스키가 잘 설명하고 있다.

     

    1909년에 회색의 석회석 비석이 델피(Delphi) 채석장인 하기아스 엘리아스(Hagias Elias)에서 발굴되었는데, 이 비문에 델피의 시민들에게 주는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의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갈리오의 이름 (행18;12) 뿐만 아니라 "(Lucius Junius Gallio,my friend and proconsul of Achaia") 가장 중요한 시대, 즉 클라디우스의 12년째 (26대황제)라는 기록이 있었다.

     

    이 진술은 이 사건을 52년의 아우구스트 1세와 1월 25일 사이에다 위치시키고 있다. 총독은 겨우 1년간 근무하였고, 2년도 채우지 못했었다.

     

    황제의 명령은 이 지명된 총독을 4월 1일에 로마를 떠나 임지로 가게 하였고 그 이듬해 4월 25일에 돌아오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갈리오는 52년 5월 1일에 고린도에 왔고, 바울이다. 그러므로 데살로니전서는 51년 말에서 52년 초에 걸쳐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3) 흑기와 토마스는 50년경, 에어하트는 50 또는 51년경, 헨리와 궁촌무천은 51년경,F.B.마이어는 51-52년경,바니스와 光田豊은 52년경, 글로악은 52 또는 53년초, 헨드릭슨은 51-53년경으로 보고 있다.

     

    위의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본서는 50-53년경 사이에 고린도에서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본서는 바울 서신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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