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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요한복음

[스크랩] 요한복음 (5 : 1~47)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16
 요한복음 5장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ㅇ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 여기 이른 바
"유대인의 명절" 이란 말은 어느 명절을 가리킨 것인가? 사건의 순서를 따져 본다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나서 유대를 떠나셨고, 도중에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시던 때
는 추수하기 4개월 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는 오순절인 듯하다(Calvin).
오순절은, 유월절 둘째날 부터 7주를 계수하여 제 50일을 말함이다(신 16:9-12). 칼빈
(Calvin)은 그렇게 보았어도, 많은 정통 학자들은 이 절기를 유월절이라고 해석하여,
2:13 과 6:4과의 사이에 유월절 하나를 더 둔다. 그리하여야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
가 3년이 넉넉하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그런 절기
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다.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ㅇ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여기 "양문"을 영국 왕역(A.V.)은 "양의 시장"(Sheep market)이라고
하였으나, "양문"이란 번역이 채택된다. 느 3:32, 2:39에도 양문이란 성문이 있다.
"행각"은 현관식으로 지은 시설을 가리킨다.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ㅇ그 안에 많은 병자,소경,절뚝발이,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
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 유력한 사본들(B, C, D)에는 3절 끝의 "물의 동
함을 기다리니"란 문구부터 4절까지의 말씀이 없고, 이것이, 보다 열등(劣等)한 사본
들(A,C )에 나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 논쟁건이 되어 있다. (1) 어떤 학자들은
이 괄호 안의 말이 사도적 원본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
기를, "참으로 이것의 사본상 권위는 무겁지 않다"고 하였고(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 1950,PP.342-343), 고데이(Godet)는, "이것이 일반
민중의 전설이었는데, 후에 어떤 사본에 기입되므로 이렇게 전승되었다"고 하였고, 헨
드릭센(Hendriksen)은 말하기를, "이 문구에 대한 사본 증거가 무겁지 못한 사실을 보
아서, 그곳에 물의 동함이 초자연적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 저자 요한의 소신(所信)
도 아니었을 것이고, 성령님의 교훈도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 병자의 신념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W.Hend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John,
P.191).
(1) 옛날 터툴리안(Tertullian, 145-220 A.D.)이, 이 부분 말씀을 사용한 실례가
있다(On Baptism V). 칼빈(Calvin)은, 이 부분의 사본 문제를 전연 취급하지 않고, 이
것을 사도적 원본으로 그저 받아 들인 태도로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
니, 곧, "물이 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
신다는 증표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그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
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ies, John's Gospel I,1847, P.189).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ㅇ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 "삼십 팔 년"이란 연수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짐이 아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38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며
고생한 사실(신 2:14)을 연상하면서, 고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40년이란 연수를 채용하지 않았으랴? 성경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40년 동안이라고
더욱 많이 말한다. 여기 38년이란 연수는, 그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이
다. 그 연수는, 그 때 예수님의 연령보다 많으니 그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암
시된다(A.Marack).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ㅇ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
느냐 -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정지를 한 번 보시고 정확히 아신다. 그는 그 병자가 절
망 상태에 빠진 것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절망 한 자에게 살 길을 주신다. 곧, (1)
그의 마음 속에 소망을 일으키시며, (2)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의미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 물으심은 그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킬 만한 적당한
말씀이었다. 믿음은, 소망과 약속에서 생긴다. 주님께서는, 긍휼에 의하여 병자를 고
쳐 주시고 그 병자 자신의 심리 상태의 어떠함을 알아보시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
나 그는 종종 사람의 몸보다도 심령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심령에 생기를 주시려고
힘쓰신다. 그러므로 그는,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기에 믿음을 건설하시
려고 하신다.
ㅇ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는데 하필 그 38년 앓던
병자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눅 4:25-27).
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구
원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할 처지에 있다. 그 이유는,그들은 유달리 저런 놀라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ㅇ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 이 말씀을 보면, 그때 예루살렘의 인심이
무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나 언제나 인심은 이렇게 무정하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내버림이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세상이 모르게 죽을
지경의 고생을 당하다가 남 모르게 죽는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ㅇ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이 명령
을 내리심이, 동시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능력이 되었다.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은
동시에 능력이 되는 법이다.
ㅇ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 "곧 나아서"란 말은 예수님의 말
씀의 비상 능력을 보여 준다. 주님의 병 고치시는 능력의 역사(役事)는 저렇게 완전하
여 그 병자를 즉각적으로, 또는 완전히 고쳐 주셨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
를,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며, 또한 그의 전도에 도
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병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ㅇ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성경에 금지되었다(느 13:19; 렘 17:21-22).
그러나 그 말씀은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시킨 것이고, 부득이한 휴대품을 운반하
는 것까지 금지시킨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머리털을 쪼개 듯이
번쇄하게 사람들의 행동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오용하였다.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ㅇ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더라 한대 -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자기는 발뺌을 하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권위를 승복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생각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난치병에서
건져 주신 이의 말을, 그로서는 복종할 만하였다. 9:11; 행3:9-10 참조.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ㅇ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 그 때 유대인들이
강퍅하였던 것이 여기 드러난다. 그들은, 그 불쌍한 병자의 고침 받은 반가운 사실을
묵살시키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게 한 사실만을 추궁한다. (1) 그들은 죽을 사람
을 살린 긍휼보다, 사람들의 헛된 유전을 중대시 하였으며(마 15:2, 9), (2)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을 헛되이 정죄하여 죽이는 것을 유쾌하게 여겼던 것이다.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ㅇ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
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신 뒤에,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기를
원하여 그에게로 모여들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는 병 고쳐 주심보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 믿는 것
보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을, 그는 더욱 원하신 것이다.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ㅇ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그 고침 받은  자의 병들었던 원인이 그의 어떤 특별한 범죄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죄를 다시 범치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Luther). 이 해석에는
난제가 있으니, 그것은, 성경말씀이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을 특수한 죄악에 돌리지
않은 사실이다(요 9:1-3).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이 사람의 특수
한 죄악이라고 하므로(민 16:46), 우리는 이 해석을 옳게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보다는 다음 해석을 더욱 적합하다고 본다. (2) 여기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
의 헬라 원어는, "이 이상 더 범죄를 계속하지 말
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필 그의 38년 전의 범죄(처음에 그가 병든 원인)를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고, 38년 동안 병 중에서도  계속 범죄 하던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죄악을 가리킨
다고한다(Maar de man leefde nu in zonde, had zich niet aan den Heiland
gegeben.-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352). 그렇다면,
여기 "더 심한 것"은 영적 형벌을 가리켰을 것이다. 마 12:43-45 참조.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뜻을 보여준다. (1) 예수님께서 친히 38
년 된 병자의 과거의 죄악들을 모두 다 용서하여 주신 사실, (2)그가 그 고침 받은 자
의 성화(聖化)를 요구하신다는 사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성화를 힘쓰지 않는
자는,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히 2:2-3).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그 고침
받은 자는 그 말씀에서 살아야 되며, 그 한 마디 말씀이 늘 그의 심령에 살아 있어야
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다음
과 같은 것을 권장한다. 곧,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
다"라고 하였다(dass  man an  die  Genugtuung  Christi glauben  soll.-Evangeliem
Auslegung, 4,P.206).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ㅇ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 그 병 고침 받은 자
가 저렇게 보고한 것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
님을 공적으로 핍박하기는 여기 이 사건에서부터이다(Bernard).  "핍박하게  된지라."
이 말은 헬라원어로 미완료 시상(未完了時相)에 속하는 동사인데,
핍박하기를 계속한다는 뜻이다. 이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남들을 대신하셔서 항상 고
난을 받으신 분으로 드러난다. 그는 병자를 고쳐 주셨고, 그 자신은 그 일 때문에 고
난을 받으신다.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ㅇ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 만물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창 2:2-3), 결코
하나님의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창조 역사에서 쉬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가 아는대로 그가 계속하여 만물유지와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 그와 같이, 예
수님도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 5:17,19-30에 나타난 변론이다. 그가 이
와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되신 증표이다. 예수님의 이 변론
(5:17)을 들은 유대인들 자신도 그의 변론을 가리켜, 그가 하나님과 동등이란 의미의
변론이라고 하였다(18절). 예수님의 하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신 그로서
안식일에 오히려 하실 만한 것이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안식에 속
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안식은 사람의 활동 능력을 정지시킴이
아니고, 보다 참된 일로 돌림이다"라고 하였다(Asleep in Jesus, P.55).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ㅇ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이를
인하여" 란 말은, 위의 17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유로 함을 가리킨다. 곧, 예수
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것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므로 자기도 일하신
다는(하나님과 자기는 동등이라는 의미) 말씀을 이유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은혜로운 계시(啓示)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가장 요긴한 점을 반대
한 셈이다.
ㅇ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특수한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만이 저런 특수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아버지" 라고 하셨고, "우리 아버지" 라고는 하지 않으셨다(Zahn). 그런
데, 예수님의 신자격(神子格) 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학설들이 있다.
(1) 성령적 신자설(聖靈的神子設). 이 학설이 성립된다면, "하나님 아들" 이라는
이름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라기보다도 순 인간으로서 성령과 함께 한다는
의미의 하나님 아들일 것이다. 곧, 뤼트겔트(Lutgert)의 이론에 의하면, 요한 복음에
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일들을 문견(聞見)하신다는 어귀들에 하나님 아들이란 칭호가
많이 나오는데, 이 천적(天的) 문견은 현세에 있어서 성령을 통하여 되는 일일 것이라
고 하며,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의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
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의 관계 장절들을 연구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고로
하나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이다(요 1:33-34). 그 뿐 아니라, 하늘 일에 대한 문견이, 그의 현세적 경험에 국한
한 것이 아니고 그의 화육(化肉) 이전의 것도 있다. 예를 들면, 3:32의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이가 없도다"란 어귀의 그 문견에 관한 동사는
완료 시상이다. 그것은 그의 화육 이전의 경험을 말함이다. 그 이유는, 그 윗절에 있
는 그의 화육 사실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는 현재 사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2) 종교 윤리적 신자설(宗敎倫理的神子設). 하르낙(Harnack)은 이 학설의 대표자
이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이 아
니고 종교 윤리적으로 그가 하나님과 일체이신 의미에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였다 한
다. 요한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의 신자 격(神子格)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대한 그의
순종(종교 윤리)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10:18, 12:49, 14:31, 15:10). 그러나 그렇
다고 해서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이 신자격의 성립 원인이라고 하지 못한다. 요한 복
음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이런 교훈을 찾을 수 없다. 그의 종교 윤리적 생활은 그의
신자 격의 결과로 나타는 일종의 수반 현상이고, 결코 그것이 신자 격의 성립 원인은
아닌 것이다.
(3) 역사적 신자설(歷史的神子設). 독생자란 술어를 기초로하여 역사적 신자설을
지지할 수 있을까? 독생자란 말은, 예수님의 화육(化肉) 사실을
의미한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영원 자존의 신자격을 가리킨다. 3:16, 18; 요일 4:9 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독생자 되도록 보내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화육 전에
도 이미 독생자였음) 보내셨다고 한 까닭이다. 독생자가 독생자 되심은, 역사상의 어
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영원(永遠)에 속한
일이다.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ㅇ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
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
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여기 이른 바 "본다"는 말은 현재사로
서 부자 일체(父子一體)에서 보는 것을 말함이니, 불현계(不現界)에서 되는 일이다.
그것은 시간적 선후(先後)를 가져오는 모방적 행위를 말함이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
의 뜻을 실행하시는 아들의 종속적 의지 행위(從屬的意志行爲)를 말함이다. 그 행사는
부자(父子)의 중복(重複) 행위를 말함이 아니고, 부자의 일체적(一體的) 행위를 가리
킨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일이 실행됨을 말함이다.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ㅇ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 보
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 여기 "사랑하사"란 말은, 헬
라 원어로 필레오 - 니,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본
질적 관계에 나타난 사랑을 가리킨다(Bauer). "보이시고"란 말은 계시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미래사로 된 것은 그 보이는 행위가 현재 뿐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계속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역(中保役)을 통하여
계시하시며 행하신다(마 3:17, 11:27).
"그보다 더 큰 일" 이란 말을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이 일들보다 더 큰 일"이
란 뜻이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큰 일을 가리킨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ㅇ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
니라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이 있다. 그
러므로 이 귀절은 앞절의 "더 큰 일"이란 말을 설명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일으키심"
이란 말은 영적, 또는 육체적 부활을 겸하여 가리킨다(Grosheide). "같이"란 말의 헬
라 원어가 여기서는 일체 동행(一體同行)의 뜻을 가졌고, 시
간을 서로 달리하는 중복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
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일을 가리킨다.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살릴
자를 살리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의 심판 권위에 대하여 말씀한 것인데, 다음 귀
절들(22,23)이 이사실을 자세히 해설한다.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단지 대종말에 나타날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지
만, "죽은 자"란 말, "일으켜"란 말, "살리심"
이란 말들이 현재 영적 관계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 뿐 아니라,
여기 "일으켜란 동사(動詞)와, "살리심" 이란 동사
가 모두 현재사니 만큼, 이 귀절 말씀을 대종말에 나타날 부활에
국한하여 생각할 수 없다.
스밀데(E.Smilde)는 말하기를, "21절의 말씀은 살리는 운동의 일반적 관설이고,
24-25절은, 현재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내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영적 생명을 가리키
고, 26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음을 말하는 신학적 진술이고, 29절은,
그리스도 재림 때에 신자들이 받을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7).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ㅇ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이 귀절
은 헬라 원어에서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것은 이
귀절이 윗귀절의 설명 문구인 사실을 보여 준다. "심판"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은 살리시고 어떤 사람은 그 본래 정죄된대로 두시는 그의 행위를 가리킨다.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ㅇ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
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곧, 아버지
를 공경하는 일은 그 아들을 공경하는 데서 실현된다는 뜻이다. 이 뜻은 하반절에  밝
히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신 처지를 가리킨다.
24-29. 이 귀절들은, (1) 그리스도께서 현세에 그 복음에 의하여 사람들을 영적(靈
的)으로 중생하게 하심과(24-25), (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원
리와(26-27), (3) 내세(來世)에 신자들에게 육체의 부활을 주실 것을 가리킨다
(28-29).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ㅇ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내 말을
듣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내 말을 듣고 ... 영생을 얻는다"는 어귀는, 말씀
이 생명력(生命力)을 마술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셋트(Boussett)는, 여
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작용을 마술적인 것으로 간취하고, 그것을 헬라의 비지적 오
묘(秘智的奧妙)란 것 (Geheimnisvolles mysterien wort)과 동일하게 보았으니(Kyrios
Christos, 1926, S.170) 잘못이다. 여기 "듣는다"함은, 헬라 신비주의의 범신론 사상
(汎神論思想)이 가르친 마술적인 생명 전달이 아니다. 그 들음은, "나 보내신 이"를
믿는데 이르게 하는 지석 요소를 가진 동시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결과
로 가져온다. 이것은, 지식성과 인격성이 제외된 마술적 작용과는 청양지차로 다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곧, 신자가 현세에서
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친다
(눅 17:21; 고후 5:17; 골 3:3; 벧전 1:23). 스밀데(E.Smilde)는, 이 점에 있어서 요
한의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稱義論)과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곧,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44).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ㅇ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 이 말은 현세에
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즈안(Zahn)은,
이 귀절 말씀이 주님의 재림 때에 신자들의 육체가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곧 이 때라"고 하신 말씀
(25절 하반)은 현재 신약 시대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불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의 사상이 노시스 신화인  만데안(Mandean) 문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194).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오데벌키
(Odeberg)가 수집한 만데안(Mandean) 문집에서 몇 개의 문구들을 실제로 보여 준다.
(1) "생명의 음성이 부르짖는다. 깨어 있는 귀는 듣는다. 어떤 자들은 듣고 살아나고
어떤 자들은 계속하여 잔다"(Ginza Left 596,9)라고 한 말, (2) "생명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믿고 그것의 교훈을 받아 죽음을 미워하고 생명을 얻는다"(Ginza Righe 12)라
고 한 말, (3) "혈육으로 된 자들의 영들이 생명의 소리를 듣고 믿으면 생명의 집에서
존전에 거하게 되리라"(Ginza Right 12)고 한 말이다.
그러나 여기 소개된 바 만데안(Mandean)문헌의 내용은, 사도 요한의 사상과 아주
다르다. (1) 만데안(Mandean) 문헌에서는, 사람의 영혼에게 외치는 자가 역사적 인물
이 아니고 가상적인 우주적 실존이라고 한 반면에,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역사적 인물이다
(1:14, 2:1,12, 4:6, 5:27, 7:1, 8:59). (2) 만데안(Mandean)문헌에서는 성령을 가리
켜 흑암의 신(神)이라 하였고, 예수님을 가리켜 거짓 메시야라고 하였으니(C.H.
Dodd,The Fourth Gospel 1953, P.119). 어떻게 사도 요한이 이런 괴이한 문헌 중에 어
떤 부분이 그리스도 이전 것으로 생각되나, 거기 포함된 사상은 파사의 이원론과 관련
되어 있다. 이런 사상은 성경을 위반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런 사상을 섭취하지
않았을 것은 명백하다. (4) 만데안(Mandean) 문헌이 말하는 구원론은 영혼이 세상을
떠남이라고 하나, 사도 요한의 구원론은 신자들의 부활을 구원의 완성으로 본다. 이렇
게 이 둘은 서로 다르다.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ㅇ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
셨고 - 여기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란 말은 아들에게는 없던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
가 아니다. 여기 "주어"란 것은 시간적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영원한 시간을 말
함이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중보자로 세워 택한 백성에게 생명 주는 역사(役事)를 하
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여기 이른 바,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하신 "생명"은 그들만이
독점하신 절대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생명 운동의
근원이다(요 1:4).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ㅇ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몇 가
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인자(곧, 사람)의 형상을 입도록 낮아지셨으니 만큼, 하나
님께서 그를 심판장으로 높이셨다는 것(빌 2:7-10). (2) 칼빈(Calvin)은 이 말씀을 윗
절에 연락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인자(곧, 인성)되신
방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계시하시어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뜻이라고 한
다.(3) 구속 사업 전체를 인성(人性) 소유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시는 것인 만큼,
구속의 일부분되는 심판도 그가 하신다는것(Meyer). (4) 심판은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
를 드리는 의미의 행위인 것인 만큼, 사람들 측에서 할 일이며 그것을 실행할 이는 이
상적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해야 된다는 것(Godet). (5)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니
만큼 누구를 정죄하시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구주를 배척하므로 자정죄(自定罪)하
는 것 뿐이다. 그들이 인간성으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넘어진다.
곧, 그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신 사실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걸
려 넘어진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그의 사랑을 구체화 한 것이었다. 그것에 걸려 넘
어지는 것은, 실상 그것에게서 심판을 받음과 같다. 곧, 그것은 그들의 자정죄이다.
(Beyschlag, Neutest, Theol. 1,P.290). (6) 헨드릭센(Hendriksen)은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곧, "이 귀절의 '인자'란 말이 관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만 인간 성품을 의미하고 메시야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나,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지나치게 일정한 구분을 할 필요는 없
다. 어떤 때에는 직명(職名)이 관사를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자'란 말이 보통
으로는 메시야의 직명인데, 하필 여기 와서 인간 성품만을 의미하였다는 것은 자연스
럽지 않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권세
를 받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
다. 곧, "여기'인자'란 말은 인간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서 자기가 하나
님의 아들이심을 내세우시고(26절), 또 다시 그의 인간성을 내세우신다(27절). 이렇게
그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어 심판의 권세를 받을 자격을 가지셨다. 그가 인간성을 가
지신 자격으로써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성에게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더욱 윗절(26절)에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
들이시기 때문에 심판하실 수 있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375-376). (8) 슐라텔(Schlatter)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
다. 곧, 이 부분 말씀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생명의  창조자이시고(25절), 인자
(곧, 인간성)이신 그는 심판자이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인자는, 속죄
자(곧, 인간성으로 피 흘려 죽으신 분)이시니 만큼, 죄악을 심판하실 권리도 받으심이
당연하다. 그 이유는, 죄는, 이와 같이 속죄하여 주신 그를 믿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은 주로 사단에게 대한 것이다(12:31, 16:11). 이 심판은 예수님이 그 인
간성으로 죽으심에 의하여 성립시키셨다고 하였다(Das Hauptstuck des Gerichts ist
das Gericht am Satan, 12:31, 16:11, und dieses bewirkt Jesus durch seinen Tod.-
Der Evangelist Johannes, P.151).
위의 여덟가지 해석 중 우리는 첫째 해석을 택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
면, 다섯째 해석을 취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ㅇ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이것은 별세하였던 신자들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몸으로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ㅇ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3:19-21).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
원어로 포이에-산테스니,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어귀에 있어서 "행한"의 헬라어 원형
은 프라쏘이니, 상습적으로 행한것, 혹은 일생의 행습(行習)을 말함이
다. 악을 행하기는 이렇게 쉽고 상습적이다. 이 귀절이 말한 두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
의 재림시에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하였다(행24:15;
고후5:10; 계20:12, 13; 단12:2).
이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
고 불트만(Bultmann)은, 이 부분 말씀을 본래의 원본으로 생각지 않고 후대인의 삽입
구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p. 196-197). 그러나 불트만(Bultmann)의 이같은
주장은 억측에 불과하다.
(1) 이 귀절들에 대하여 사본상 일치하지 않는 것은 전연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사본들이 다 함께 같은 내용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저작자의 기록 그대로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신약 학자들은, 이 부분(5:28-29)말씀이 문맥상으로도 본래의 원본인 사실을 알려준
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부분 말씀보다 앞서 벌써 27절이 미래의 심판을 말
한다고 하며, 이 부분 말씀은 그것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슐라델
(Schlatter)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5:19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살리시는 역사
롸 심판하시는 일이 현세에 벌써 실행된다고 강조하는데, 그와 같은 역사(役事)의 권
세는, 곧바로 28-29절에 기록된 그의 장차 행하실 심판 권세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말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 152).
(2)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두 가지 사상의 병립을 보여주
셨다고 생각한다. 곧, 영생(또는 심판)의 현재적 실시와 및 세상 끝날의 실시를 병립
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 저자의 사고 방식이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
라"고 하였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신자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사실
과 또한 그들이 대종말에도 부활의 형태로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6:44, 54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시면서 그의 수평선적(水
平線的)인 종말관(終末觀)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는, 12:48에서도 "마지막 날"이라
는 말을 사용하셨다. 그기서도 그는, 현재적 심판과 미래의 심판을 병립시켜 말씀하셨
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하신 말씀이 미래의 심판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도 그 말씀이 심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
려진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끝
날에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ㅇ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이 말씀은
19절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재설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행사, 곧,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변증하신 말씀이다. 그의 행사가 정당한  이유는, 그가
자행자지 하시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듣는
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심판한다"는 말이 여기서는 그의 재림시의
종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복음을 통하여 살릴 자를 살리시는 주권행위를 가
리킨다(3:18).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ㅇ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 이 말씀은 유대인들
을 표준하여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신다면, 그들은 멋모르고
그것을 잘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실상 예수님의 자증(自證)은 오히려 당연하다
고도 생각되는 것이다. 8:14에 말하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
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
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누구든지 자율적(自律的)으로는 그에게 대하
여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들도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증거도 저렇게 그리스도께서 성립시킨 것이니만큼, 그리스도의 자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스키페르스(R. Schippers)는, 성경에 있는 "증거"란 말은 법정 술어의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여 요한 복음의 특색을 나
타내어 보여준다. 곧, "요한 복음은 하늘과 세상,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대립의 기세를
보여준다. 이 대립의 기세는 소송의 광경으로 결정적으로 나타낸다. 특별히 유대인들
이 미망(迷妄)에 빠져 스스로 재판장인 체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재판정에 있어서는
피고(被告)였던 사실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pp. 159-160)

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ㅇ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다고 한
말씀은,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나 대다수의 헬라 주석가들의 의견과 반대로 알렉산
드리아의 시릴(Cyril)과 라틴 주석가들에 의하면, 아버지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학자 뷕셀(F. Buchsel)은, 이것이 세례 요한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하였
다. 스키페르스(Schippers)도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가리키지 않고 세례  요
한의 증거를 의미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곧, "예수님께서 자기의 증거와 남의 증거
를 관설하는 이 문맥에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하기에는 도무
지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라고 하였다(Getuigen van Jezus Christus in het nieuwe
Testament, p. 162).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ㅇ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 유대인들
이 세례 요한에게 심문자들을 보낸 것은, 1:19-28에 기록되어 있다. 세례 요한은 그리
스도의 증인으로서 표준이었다. 그는 진리 (眞理)대로 말한 증인이었다. 그러므로
10:41-42에는 말하기를,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
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하였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말의 헬라 원어는 현재 완료 동
사로서, 과거에 행한 일의 결과가 아직 남아 있음을 표시하는 시형(時形)이다. 그러므
로 이 말은, 세례 요한의 증거한 바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때에도 아직 효과
적이고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Grosheide).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ㅇ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곧, 요한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
대인들의 회개를 위한 것 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자증적(自
證的)으로 진리이시며 빛이시다. 그의 참되심의 성립은 어두운 인간에게 의존하시지
않는다. 빛은 그 자체의 증거로 알려질 뿐이고 어두움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다. 밝
히 비추고 있는 태양의 존재를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가 촛불을 켤 필요는 없다. 태양
은 그 자체를 자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말씀하신 목적은, 세례 요한의
증거 목적이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만큼, 그것을 그들에게 기억시켜 그들로 하여금
믿어 구원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ㅇ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
"비취는 등불"은 일시적으로 좁은 범위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증
거에 대하여 적당한 비유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빛 자체이시고, 온 세상을 비추신다.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ㅇ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
이요 - "나의 하는 그 역사"는 그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그 역사는 예수님께서 메시야
이신 사실을 밝히 보여 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란 말은 그가 메
시야로 오셨다는 뜻이다. 불트만(Bultmann)은, 이 귀절의 "그 역사"란 말이 그리스도
의 살리시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21-29절이 가르친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으나,  "그
역사"란 말이 그런 특수한 일들만 가리킨다고 할 수 없다. 10:25의 해석을 참조하여
라.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ㅇ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
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선지
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셨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그 증
거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처럼 강퍅했다. 그들은 그 증거의 형태("형용")를 전연 모르
는 자와 일반이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그들이, 구약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
성을 들었다고 자처하며 그의 형용을 보았다고도 자처하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
는 한, 그 자처하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ㅇ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
니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
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
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ㅇ이 귀절들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를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신다(41,43). 그러나 유대인들은
실상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만큼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에는 차이
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ㅇ이 귀절들은, 다시 39-40절 말씀에 연속하여 구약 성경(모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무식, 혹은 불신의 태도를 책망한다. 그들이 구약 성경을 믿었더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구약을 배척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
죄할 자는 구약 성경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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