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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요한복음

[스크랩] 요한복음 (3 : 1~36)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15
요한복음 3장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ㅇ니고데모 - 헬라식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로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
되지 않았으나 본서에서는 세 번에 걸쳐 나타난다(7:50;19:39).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멸되던 당시 나퀴드몬(Naqidmon)이라고 하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예루살렘?살고 있었는데  그가 혹시 40년 전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Moutefiore, Loewe). 요한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1) 예수의 시체에 바르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백 근'(19:39)
정도를 선뜻 내놓는 부유한 사람이었다.(2) 엄격한 유대교를 신봉(信奉)하는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백성되는 자격이 아브라
함을 통해 계승되는 자연적, 육적 출생에 있음을 강조한데 반해, 예수는 영적  중생을
강조하셨다. (3)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다. 관원의 뜻은 '아르콘'은 산헤
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키는데,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
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알려졌으며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다른
말로 하면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니고데모가 그러한 사회적 고위
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친히 예수를 방문한 사실은, 매사에 편견(偏見)이 없고 사리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4) 그는 조상들의 율법에 정통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다. 율법 학자가 된 사람은 종교법과 의식(儀式)의 문제들
에 대해 독자적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며(Sanh),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
여할 수 있었으며, 민사 소송 때에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아니면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또한 랍비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다
(Jeremias).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ㅇ밤에 예수께 와서 - 니고데모가 굳이 밤에 예수를 방문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1)타
인의 이목이 두려워서 (2)분주한 낮시간을 피해 예수와 예수와 친밀한 대화를 오래도
록 나누기 위해 혹은 (3)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였던 당시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
서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는 니고데모의 신중성
을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께서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요한은
19:39에서 다시 한번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사실을 언급한다. 요한의 사상
(思想)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reality)로서 상징되고 있다(11:10). 그
리고 13:30에서 유다는 '밤'에 예수를 떠남으로써 빛이신 예수에게로  나아온  셈이다
(the Anchor Bible).
ㅇ랍비여 - 니고데모는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과 마찬가지로(1:38, 49) 예수
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서품(敍品)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
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 년 동안의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마쳐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서 그들은 모든 전승 자료와 할라카의 해석 방법을 통달하게 되고, 비로소 종교법과
형법(刑法)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서품
을 받은 율법학자가 되려면 40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와 같이 '랍비'가 되기
위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Jeremias). 한편 니고데모가 사용한 이 '랍비'라는 말이 예수에 의해서 부
정되거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그
의 제자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부른
것은 유대의 상층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는 처음 있었던 일이요 따라서 예수가 이미 그
러한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ㅇ우리 - 본절에서 말하는 '우리'는 뒤따르고 있는 말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수가 행한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 곧 2:23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봄이
무난하다.
ㅇ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 니고데모는 이 말을 강조하는 위치에 첨가함으로써, 예
수를 선생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세, 예레미야, 세례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표현은 예수의 산
적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고까지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이 예
수가 과연 대망의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니고
데모의 방문의 주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니고데모가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표적을 통해서이다(2:23).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이 '표적'
이라는 헬라어 '세메이온'은 신적 권위와 위엄의 증거를 보여주는
이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적은 그것을 목격한 자의 주의(注意)를 그 행위 자체
보다는 그 일을 행하신 이에게로 이끄는 것이 그 특징이다. 표적 자체로서는 참된 구
원의 신앙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표적들을 통해 당신의 교훈들을 확
증하셨다.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탁월하신  교훈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수의 교훈보다는 표적  자
체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ㅇ거듭나지 아니하면 -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은  (1)'처
음부터', '완전히', '철저히'의 뜻과 (2) '다시', '두번째'의 뜻 그리고 (3)'위에서부
터' 곧 '하나님께로부터'의 뜻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기도, 제사, 세례로써 유
대교에 개종하면 그를 중생한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인 유
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혜서,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Calvin)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는(고후 5:17) 성령의 역사로서(엡 2:5), 성령
혹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知),
의(意), 정(情)을 항상,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이며 전인적인 변화를 의
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병든 자가 회복(回復)하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 것이 아
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변화이다.
ㅇ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이돈'
은 단순히 어떤 물체나 형상을 바라본다고 하는 '블레포'와는 달리, '경험
하다'(experience) '참여 하다'(participate) 또는 '인식하다'(perceive) 등을 의미한
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것을 뜻한다(눅 9:27).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ㅇ사람이...날 수 있삽나이까 - 이러한 니고데모의 대답은 일견 매우 아둔해 보인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씀에 반대 주장을 제기하거나 반항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다만 그는 예수의 말씀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난점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답은 니
고데모가 둔감해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라 할수 있다. 아울러 이 질문
속에는 '사람이 다시 모친(母親)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인간 본질
의 재창조라고 하는 고차적 이적 또한 어찌 가능 하겠는가'라고 하는 강한 의문이 내
포되어 있을 법하다. 어쨌든 니고데모는 중생에 관한 예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파악
하지 못한 채 깊은 의문에 휩싸였던 것이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ㅇ물과 성령으로 - '거듭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여기서 '성령'
에 대해서는 해석상에 별반 어려움이 없으나 '물' 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로 엇갈린다.
즉 혹자는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 혹은 '기독교의 세례' 와 관련시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연적 출생'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 구절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무방할 것이다. 1:26, 31; 마  3:11;막
1:8;눅 3:16에서는 물과 성령이 세례와 관련해서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물은 깨끗하
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 제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특별
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엣세
네파(Essenes)에서도 개종자를 받아들일 경우 물세례를 행하던 관습이 있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촉구롤 받아들
여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물로 세례룰 주었다.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물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으며(행 10:47, 48)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또한 그
러했던 것으로 추측해 불 수 있다(행 8:26-39). 결국 '물'이 무엇을 나타내든간에 본
절의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물을 자연적 출생으로 볼 경우에는, 사람은 육적 출생
뿅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출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된다
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와 관련시킬 경우에는, 세례 요한의 세례
가 증거하고자 했던 성령 세례를 통해 중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끝으로
이를 기독교의 세례와 연관시킨다면, 본문은 중생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성령 세례
를 통해 이루어지며 물세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적 선포(宣布)이자 상징적 의식으로서
의 의의를 지님을 가르치는 것이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ㅇ육으로...영이니 - 사도 바울은 '육'에 해당하는 '사르크스' 라는 헬라어
를 타락한 인생의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했다(롬 8:3-9).
그러나 여기서는 이 땅에 속한 존재 곧 연약하고 사라져 갈 인생을 지칭하는 말로 사
용된다. 따라서 여기서 육(flesh, NIV)과 영(spirit, NIV)은 인간 본성의 보다 높은
차원(영적)과 보다 낮은 차원(신체적)을 구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ㅇ기이히 여기지 말라 - '기이히 여기지'로 번역된 헬라어 '다우마조'
는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결여된 놀라움'을 의미 한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중생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예수는 어떤 민족적. 신분적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
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3절). 따라서 이 원칙은 율법의 준수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
해 당혹하였을 것이며 또 향편으로는 이 중생의 방법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혹(疑
惑)에 잠겼을 것으로 보인다.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ㅇ바람이 임의(任意)로 불매 -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호'와 이에
대한 헬라어 '프뉴마'(는 둘 다 '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약성경에
서만 370회 정도 사용된 이 '프뉴마'는 대부분 영(靈) 또는 성령의 뜻으로 사용되고
'바람'이라는 의미로는 구약성경(시 104:4)의 인용 구절인 히 1 : 7에서 한 번 사용되
었다. 이 '프뉴마'가 본문에서는 '바람'의 뜻으로 '성령의 역사'를 적절하게 비유하
는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1)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해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실재성(reality))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존재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해 인식되어질 수 있
다.  폘돈(Fenton)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起源)과 운명
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두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
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
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되며 갈 5:22, 23에 기록된 바와 같은 소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2) 현대의 과학을 총동원 해도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 어
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 따름이다.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ㅇ어찌...있을 수 있나이까 - 회의심(懷疑心)을 나타내는 질문인지 아니면 보다 정확
한 설명을 요구하는 간청인지 명확치는 않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그러한 사건이 어떻
지 경험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4절에서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중
생의 교훈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하는 가능성 자체를 놓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반면
본절에서는 일단 그 가능성만은 인정한 상태에서 그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여 재차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이러한 영적 거듭남을 강조
하지는 않았지만 겔 36:25-28 등에 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과 중생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유대교의 간과(看過)와 무시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로부
터 책망을 받게 된다(10절). 사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즉 그들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창 17
:1-8)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지극히 생소하다고 여긴 것이다.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ㅇ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 우선 예수는 니고데모 개인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시
고 이어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인들을 책망 하신다(11절).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지도자 층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수  없지만 헬라어
본문에 '호'라는 정관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히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쇠트겐(Schottgen)과 뤼케(Lucke)는 여기서 사용된 '관사'가 산헤드린의 의장
또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현자(賢者)등 어떤 특수한 직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라
고 생각한다. 아무튼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요, 율법학자요, 산헤드린 의회원으로서 백
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리고 공식적인 선생의 위체에 있던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예
수께서는 니고데모 자신이 성령의 의미와 위로부터 태어난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구약
성경의 연구를 통해 좀더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고 하는 점을 이 칭호(이스라엘의 선
생)를 사용하여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Farrar). 더구나 니고데모 자신은 참  선지자
와 거짓 선지자, 참 진리와 거짓을 가리고 판별해 내는 일을 맡고 있던 산헤드린의 한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ㅇ우리 - 이들이 누구를 뜻하는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1) 메이어
(Meyer)는, 주님께서 단순히 자기 자신만을 가리켜 '권위의 복수'(pluralis
majestaticus) 즉 '경어적 복수'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2) 바이스(Weiss)와
루타르트(Luthardt)는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3) 벴겔(Bengel)과  스티어(Stier)
는 '삼위 일체로서의 그리스도'를, (4) 루터(Luther)는 '그리스도와 선지자들 전체'
를, (5) 고데(Godet)와 웨스트콧(Westcott)과 행스텐베르그(Hengstenberg) 등은 '예수
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중 두번째와 다섯번째 주장이 가
장 설득력 있는 것 같다.
ㅇ아는 것...본 것 - 니고데모를 비롯한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알지 못하는
성령의 역사와 그 활동을 가리킨다.
ㅇ너희 - 니고데모를 위시해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를 믿
는 참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무지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ㅇ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와 구약성경
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예수 당시의 유대 사람들
역시 예수의 교훈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두움은 빛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1 : 5). 여기서  예수는 영생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단순한 추상적
지식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엄연한 진리임을 분명히 하고서 이를 선포적 차원에서
증거하고 있다. 기실 이러한 신령한 지식은 성령의 조명을 통한 믿음의 눈으로만 감지
할 수 있는 비밀에 속한 것이라 하겠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ㅇ땅의 일...하늘 일 - 이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헌터(A. M. Hunter)에 의하
면 '땅의 일'이란 물, 바람, 탄생 등과 같은 지상적인 현상이나 사건들인 반면 '하늘
의 일'이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초월적 사건들이라고 하였다. (2) '땅
의 일'이란 니고데모가 결국 이해하지 못했던 영적 거듭남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의 사
업이며, '하늘 일'이란 14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것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
과 부활의 사건 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3) 전자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 안에 거하게 되신 것으로 그리고 후자를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을 모두 마치고 하
늘로 올라가시고 장차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한 처소를 제공하실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4) 마지막 견해로서, '땅의 일'을 예수께서 실례로 드신 바람부는 현상
으로 이해 하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 자연 현상인 땅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어
도 이해하지 못한 다면 '하늘 일' 곧 영적 실재를 직접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는 말씀이다. 이중 네 번째 견해가 무난하리라 짐작된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ㅇ하늘에 올라간 자(아나베베켄 에이스톤 우라논) - 직역하면 이 말은
'하늘에 계신 자'란 뜻이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는 현재 완료형으로
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상반절의 의미를
이어 받아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人者) 외에는' 그 누구도
하늘에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은 인자 자신 뿐이라고 하는
자기 증거가 된다. 물론 구약의 두 인물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 : 9-11)가 승
천(昇天) 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그들은 땅에 살던 자로 하늘에 올라갔으나 그리스
도는 하늘에 계시던 자로 땅으로 내려와 하늘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
분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육 신하신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상고해
볼 수 있다. 본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인자' 그리고 '하늘에 올가간 자'는
모두 동격이다. 다시 말해서 인자(人者)로 계신 예수는 원래 하늘에 계셨던 성자(聖
子) 하나님으로서 인간 구원과 새창조롤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일
체의 모든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분이다. 바울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이지만(고전 15:47) 예수는 영원 전부터  하늘에 계신 분이다. 이러
한 성육신의 신비 또한 인간의 유한한 이성(理性)으로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비
밀이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ㅇ모세가...인자도 들려야 - 예수는 민 21:4-9의 내용을 들어 자신의 구속 사업 즉
하늘의 일을 설명하셨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
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으나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
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날 수 있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자
에서 돌아가실 것과 그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예표(豫標)하는 것이다. 이는 놋뱀 자체가 어떤 치유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이끌므로써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유대
학자들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공부하거나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
의 말씀을 외우는 열로 보내었으므로, 니고데모는 오경에서 인용한 이 말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뱀은 마귀 또는 사단이라고 불리는 '옛 뱀'(계 20:2)을
상징하며, 이 구리 뱀은 사단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한
예수의 회생을 예표한다. 따라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
써 그들의 죄악과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회개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들려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소오'는 아람어 '제캅'에 해당하는 말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이 아람어는 '들어 올리다' 혹은 '교수대에 처형되다'의 의미가 있
다. 따라서 이 말에는 (1) 십자가에  달리심(8:28;12:23) (2) 승천하실 때 영광 속에
서 들어 올려지실 것(행 2:33;5:31;빌 2:9) 등의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문맥
상으로 볼 때 직접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킨다.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ㅇ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목적을 설명하는 본절은 구원론
(救援論)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본절에 나오는 '영생'은 본서 전체에 걸쳐 요한이
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 주제이며, 이 영생에 이르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예수께 대한
믿음이 지적 되고 있는 것이다. '저를 믿는 자'란 예수의 대속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
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를 뜻한다. 특히 '믿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
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신앙의 행위가 계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ㅇ영생 - 요한의 애용어(愛用語)로서 문자적으로는 '영원의 생명' 또는 '올 세대의
생명'의 의미이다. 요한이 사용한 영생은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종
말론적인 요소와 하나님의 현재적인 선물이라고 하는 두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한편
요한은 '생명'과 '영생'이라는 말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외 복음서에
서 생명은 19번, 영생은 17번 나온다. 17:3에 의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곧 인간
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14:6에 의하면
영생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참 길이요, 살아있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
나님과의 교제이다. 이러한 앎과 교제는 현재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처소에서 이루어진다(14:3).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ㅇ슨╡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
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
명(天命)한다.
ㅇ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
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
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
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
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
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
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
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
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
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 : 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
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
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
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
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표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
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5:20, 23;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는 '보내다'
(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
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2 주석 참조).
ㅇ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
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
(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
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 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
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ㅇ심판하려 하심이...구원을 받게 하려 -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하나'
에 의해 이끌리는 두 문장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not..., but...식의 영
어 문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5:30;8:16)에  관해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12:48)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
께 위임하셨다고(5:22) 증거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날 재림하실 때 에는 분명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이다(딤후 4:1, 8). 그러
나 적어도 예수의 초림 목적을 말할진대는 심판보다는 구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
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로되,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롤 원
하시며(딤전 2:4)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시게까지 하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
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천재 지변(天災地
變)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
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심판하다'의 뜻인 '크리노'(는
'선과 악을 분별하다'(discriminate), '분리하다'(separate)의 의미와 '정죄하다'
(condemn)의 의미가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
고 '구원을 받게'란 말은 본절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
의 뜻인 '소테리아'란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본 구
절의 의미는 죄악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그리스
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죄사함과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한다.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ㅇ저를 맏는 자는...벌써 - 앞의 두 절에서 요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독
생자 예수의 초림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제 본절은, 그럼에도 불
구하고 예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심판이 불가피하게
될 것임을 설명한다. 그는 이 진리를 즐겨 사용하는 논리 전개 방식인 부정과 긍정의
연결을 통해 변증하고 있다. 심판 가운데 처해 있으므로 마지막 대심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예(後裔)로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따
라서 구속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원과 멸
망 이 두 편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ㅇ심판을 받은 - 완료 시제 '케크리타이'는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
되어졌고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을 나타낸다. 불신자들은 장차 있을 종말
론적인 대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삶(즉 정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
다.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ㅇ이것이니 - 논리 전개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 요한의 독톡한 표현을 반
영하는 어구이다(15:12;17:3;요일 1:5;5:11, 14).
ㅇ빛보다 어두음을 더 사랑한것 - 여기 사용된 '빛'의 헬라어 '포스'는 달빛
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빛'을 의미하는  말로, 본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유일한 빛'(the  one  light),
'참 빛'(1:9)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어두움의 뜻인 헬라어 '스코토스'
는 빛과 반대되는 완전한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순히 어두운 밤의 상태를  의
미하는 것과는 다르다(Westcott). 따라서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
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처해 있는 자는 빛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빛이 적극적으로 비춰들 때 비로소 그
빛을 인정한다. 그러나 빛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그 빛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고리고 빛 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하는 표현이 믿지
않는 자들이 빛도 어느 정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뤼케(Lucke)는
말하기를, '더'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론'이라는 단어가 '오히려'의 뜻 보다
는 '더 많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빛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랑을  인정하였다
고 하였다. 그러나 '말론'이 사용된 다른 많은 구문에서는 그 뜻이 '비교급'으로 보다
는 부정 적인 의미에서의 '...보다 도리어'(rather)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43;마 10:6;딤후 3 : 4). 따라서 본 구절은 빛보다는 어두움 즉 하나님
과의 영생의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을 사랑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ㅇ19절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원인을 나타내는 전치사 '가르'가 사용되었
다. 19절에서 이 전치사는 사람들이 죄악된 길을 택하게 된 원인을 설명해 주며 본절
에서는 19절에서 밝혀진 원인을 보층 설명한다. 앞절에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
랑'한다고 하는 소극적 어투로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보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의미에
서의 '악행'을 지적한다. 특히 본절은 더욱 더 죄악으로 치닫는 인간의 성향에 대해
도덕적  이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므로 빛보다
는 어두움을 택하며 더 나아가 죄로 점점 오염될수록 악행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가속
도가 붙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ㅇ드러날까 - 헬라어 '엘렝코'는 '죄를 깨닫게 하다'(convince) '밝
히 드러나다', '혐의를 두다', '교정하다'(correct) 등의 뜻을 지니는 바 악을 행하는
자가 죄를 감출 뿐만 아니라, 이미 지은 그 죄에 대해서 회개조차 하지 않으려는 습성
이 있음을 나타낸다.

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ㅇ진리를 좇는 자 -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
라, 그 신앙의 열매(마 3:8, 10)를 맺는 자'(A. M. Hunter) 즉 참된 기독교적인 신앙
과 삶을 실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진리'의 의미나 본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논의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 이 진리의 빛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심령을 뚫고 들어 오면 회개와 전인적 삶의 변화가 수반되기에 이르
는 것이다. 
ㅇ빛으로 오나니 - '에르케타이 프로스 토 포스'는 '빛에
게로 나아오다'란 뜻이다. 사람이 빛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원래의 자기 자
신의 기원(起源)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charlesworth).

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ㅇ이 후에...유대 땅으로 가서 - 많은 학자들은 22-30절을 현재의  위치에서 옮겨서
2:12 뒤에 놓아야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Barrett, Senders). 왜냐하면 '유대 땅으로'
라고 하는 표현이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왔다고 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 메시야에 대해 냉담한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 유대 지경 내의 변두리 마을
로 물러가신 것을 나타 낸다고 볼 수도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곳이 요단 강
근처의 평야이거나 아니면 여리고빠 근접한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
ㅇ세례를 주시더라 - 예수께서 세례(baptizing, NIV)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사복음서
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고 또 4 : 2로 미루어 보건대 실제로 세례를 베푼 자는 예수
의 제자를이었을 것이다. 이 세례를 기독교의 세례전(洗禮典)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그 보다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
수께서는 친히 세례 요한의 증거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셨으며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열렬히 따르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과도기적 수단으로
서 세례 요한식 세례를 긍정적으로 허용하셨으리라 이해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의 첫 메시지도 세례 요한의 주된 강조 사항인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마 3:2;4:17). 한편 예수께서 몸소 세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 들에게 대행
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화 훈련(弟子化 訓練)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제
자들은 훗날에 오순절(the day of Pentecost, NIV)의 성령 세례를 체험하고 난 후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이었다(행 2:1-4, 37-41).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ㅇ살렘 가까운 애논 - 이 두 지명이 현재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는 지는 분명지 않다.
'살렘'(Salim)은 '평화'라고 하는 셈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지명이며, '애논'(Aenon)
은 '샘'이라고 하는 아람어의 복수형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 지명들에 대해서는 전
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1) 베레아 지역 요단강 건너편으로 보는 견
해.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28). (2) 스키토폴
리스(Scythopolis) 남방 8마일 지점 즉 요단 계곡의 동쪽으로 보는 견해(4세기의 유세
비우스). (3) 세겜으로부터 동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곳에 옛부터 알려졌던 '살림'이
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
'아이눈'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애논'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 비록 현재
이곳은 물이 전혀 없지만 과거에는 많은 샘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Albright) (4) 또
한 1세기 초기에는 '살렘'이 예루 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듸여졌었다고 하는 견
해가 있다(Cheyne). 이 중에 세번째 견해는 그곳이 유대 지역이  아니라 완전히 사마
리아 지역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문과 다소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크리거
(Krieger)는 저자의 확실치 않은 지리적 보고(報告)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는
데 즉 요한의 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지만
그러한 평화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반면 예수의 세례는 구원과 평화(살렘)의 샘(애논)
이 펑펑 솟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트만(Bultmann)도 역시 살렘과 애논, 이 두
지명이 실재적인 것이지만 복음서 저자에 의해 상징적인 의미로써 사용된 것일 수 있
다고 믿었다(the Anchor Bible).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ㅇ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옥에'에 해당하는 원문은 '그 감옥에'(
에이스 텐 퓔라켄)이다. 이는 저자와 당시의 직
접적 독자들이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의
투옥에 관해서는 눅 3:19이하를 참조하라. 저자가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에 대해 구
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공관복음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 
및 요한의 관심사가 예수의 사역에 보다 밀도있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본서에서 셰례 요한이 등장하는 유일한 의의는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한
편 요한은 공관복옴서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지 않는 내용즉 세례 요한과 예수의 동시
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요
한이 투옥되고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등장이 있기 이전에 초기에 유대  지방에서 전도
사역을 행하셨던 셈이다.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ㅇ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淨潔)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논쟁(argument, NIV)이 유대인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결 예식에 반대하여 요한과 예수가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또는 요한과 예수가 각자 따로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명확
지 않다. 본문에서는 '결례'(ceremonial washing, NIV)의 뜻인 헬라어 '카다리스모스'
가 '세례'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변론'의 뜻
인 헬라어 '제테시스'에 대해 바울은 '위험하고 쓸데 없으며 분노에 찬
논쟁'(딤전 6:4; 딤후 2:23; 딛 3 :9)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요한의 제자는 유대인과
더불어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의와 효력에 대해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그리고
예수가 행하시는 세례와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
으로 짐작하건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제자들의) 세례 중 어느 것이 더 확실
한 근거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변론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ㅇ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고 하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를 깎아 내리고자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단강 저편인
베다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고(1:19-28) 또한 예수께 세례
를 베풀었다 (마 3:13).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빚을 진
자요, 감사해야 할 자였지만 도리어 세례 요한의 명성을 떨어 뜨리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결례(缺禮)에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져왔
을 때, 그것은 단순한 논쟁 거리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변화되었다.
ㅇ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 - 역시 예수의 이름을 피하고 있다. '증거하다'의 뜻인
헬라어 '메마르튀레카스'는 현재 완료로서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
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왔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긍
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ㅇ세례를 주매 - 원문에는 이 말 앞에 '보라', '보옵소서'의 뜻인 헬라어 감탄사 '이
데'가 붙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혹은 그의 제자들이)가 세
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ㅇ가더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콘타이'는 연속적인 행
위를 나타내는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
는 뜻을 나타낸다. 막 1:45;3:7은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의 호소(呼訴)가 많은 사람
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11:48).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ㅇ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이다. 본문에 있어서는 대화의 내
용상 세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하늘'은
하나님을 지시하는 완곡어로서 사용됨)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1) 요한 자
신(Bengel, Calvin)이나 (2) 예수 그리키스도(Godet, Mey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3) 그 일을 행하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 예수의 제자들 등도 포함 된다(Lange,
Lucke, Moulton). 여기서 세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의  명성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
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의 모든 사역이 바로 하나님께  그 기욍을 두고 있다는 점
을 역설하고 있다.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ㅇ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 1:20에서 산헤드린(Sanhedrin)에서 파견된 대표자의 질
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번 천명(闡明)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자신을
메시야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되는 모든 혼란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분명
하게 확언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말한 바'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 대해 이미 여러번
증거하였던 사실을 나타낸다.
ㅇ너희니라 - 이 말은 원문상 강조법으로서 '너희가 내 설교를 귀담아 듣고 그 의미
를 헤아렸다면 이미 너희들 스스로(yourselves) 답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시사한
다. 한편 세례 요한의 우려대로 그의 가르침과 세례를 고지식 하게 추종하는 인물이 1
세기 중엽까지도 상당히 존재했음에 분명하다. 예컨대 에베소에서 사역 했던 알롄산드
리아의 아볼로의 경우가 그러하다(행 18:24-26). 그 후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바
있다(행 19:1-7).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ㅇ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며, 신랑은 그리스
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신부로 상징하였고(사
54:5;렘 3:20; 호 2:7;말 2:11) 신약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
다(엡 5:32;계 19:7).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보다는 신랑인 예수
와 그 친구인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있다. 세례 요한은자신이 아니라  그긔스도가 새
이스라엘의 주인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C.K. Barrett).
ㅇ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 히브리어에서 '쇼쉐벤'은 신랑의 친
구로서,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역할과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 하는 역할
과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
까지도 담당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잔치에 있어서 그 중매자 역할을
담당하였고(출 19:17) 바울도 역시 자기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그
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올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고후 11 : 2). 이런 의미에
서 우리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등장했던 연회장(2:9)도 신랑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서, 그 잔치를 주관하였을 것이 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친구가 마치 종과 같은 태도로
혼인 예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ㅇ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페플레로타이'는 완료 수동태형으로 마
치 물이 컵의 끝까지 가득 차 있는 상태처럼 세례 요한의 기쁨이 가득 차 있었음을 나
타낸다. 그의 기쁨은 완벽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했던 일 곧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또한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를 친히 목격
하고 증거했기 때문이다(A. M. Hunter).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ㅇ그는 흥하여 야...나는 쇠하여야 - 이 말은 본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진
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이다.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
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
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
의 뜻히 필연성과 당의성을 확고히 천명 하고 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
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을 당함으로써 '주의 길을
곧게하는 자' 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막 1 : 14 ; 눅 3:18-20).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ㅇ위로부터 오시는 이...땅에서 난 이 - 본격적으로 예수와 세례 요한과의 대조와 세
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 증거되고 있는 31-36절까지의 본문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 내용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12, 13절). 본서를 기록한 요한의 근
본 의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신적 탁월성(卓越性)을 드
러내는 데 있었기 때문에(20:31),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제가 일간되게 부각되어 
있다. 여기서 저가가 강조하는 바는 세레 요한에 대한 예수의 상대적 우위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탁월성에 대해서 이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눅 7:28) 여전히 '땅에서 난 이'라는 점에
서 감히 예수의 신적 존재와 비길 상대가 못되는 것이다. 한편 '땅에서 난 이'란 직접
적으로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인 측면으로 확대해서 생각 하면 아담 이후
의 모든 인류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오시나 이'라는 표현은 대망의 메시야
에 대한 또 다른 칭호로서 세례 요한에 의해 사용되곤 했다(1:30;마 11:3;눅
7:19). 그리고 위로부터 오시는 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적 초월성과 유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여기
서 '땅'(the earth, NIV)이란 표현이 '세상'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악한 것',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 향하는 어떤 요소를
지녔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요한의 표현에 있어서 '땅'은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것과는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실존의 자연 상태 즉 창조주와는 구별되는 피조물을
지칭한다. 즉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말이다(창 2:7).
ㅇ땅에 속한 것 - 이 구절 또한 앞에서 설명한 '땅'의 개념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 즉 회개에의 권유와 회개한 자들에게 행한
물세례 등등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위시한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것일 뿐 직접 영생(eternal life)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예수가
오시기 이전의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예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한 '전령(傳令)'에 해당
하는 것이고,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이후의 모든 제자들의 사역
도 결코 예수에 대한 '증언'(testimony, NIV)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ㅇ보고 들은 것 - 이 표현 역시 앞서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며
(11절), 헬라어 '보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 완료형이고, '들은'에 해당하는 동사
는 부정 과거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다소 문제시 된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예수 그리
스도의 영원하신 존재성과 관련시키며 후자를 공생애 동안의 사역과 관련시킨다. 그리
고 이러한 시제상의 차이로 인해 '보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요일 1 : 3에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다.
보고 들은 바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늘로부터 난 자가 알고 있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나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실, 그를 믿는 자는 이
미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을 두루 포함한
다.
ㅇ받는 -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는 '능동적으로 취하
다'(take), '영접하다'(receive), '깨닫다'(apprehend) 등의 뜻으로 복음에 대한 성도
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ㅇ하나님을...인쳤느니라 -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전하러 오셨기 때
문에 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다
(12:44-50;요일 5:10). 반면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로부
터임과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는 사실 및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모
든 약속이 진실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거하게 되는 셈이라는 의미이
다. 물론 하나님의 진실성은 인간의 인정이나 증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
다. 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인침(certification)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
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인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프라기조'
는 본래의 뜻인 '밀봉하다'의 의미보다는 '재가(裁可)하다', '증명하다'
(certify) 등으로 잘 사용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ㅇ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하
나님이 메시야의 증거자인 세례 요한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셨다고 보는 견해(R.
C. H. Lenski). 렌스키에 의하면 '주심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도신'
은 '계속적인 수여'를 뜻하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으므로 예수께 적용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는 없다. (2) 하나님이 성도들에
게 성령을 주심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은사를 받을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
나니'(엠 4 : 7)라는 말씀이 있듯이, 성도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보기는 어렵다. (3) 하나님이 예수께 성령을 한없이 (without limit, NIV) 부어주셨음
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전후의 문맥으로나 사용된 어휘의 용례 등으로 볼 때 이 세번
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예수는 곧 성자(聖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을 지니셨고 성령과도 하나이셨던 것이다.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ㅇ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 사
랑으로 연합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상호 관계 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고전 15:27;계 1:18)의 표현과 유사한 본 구절은 예수께서 아버
지의 이름과 그 권세로써, 만물 즉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부여받으신 분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각각 예수와
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2) 인간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의존하시는
모습이다. 전능성(全能性)은 삼위(三位) 하나님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어느 쯤에서 다
른 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과 아울러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수
여받으셨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낮아지심' 과 인생의 완전한 모범을
보게 된다.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ㅇ본절은 사람들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을 권고한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생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 가운데서 멸망에 처하든지 둘 중 하나가 앞에
놓여 있을 뿐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ㅇ영생이 있고 - 아버지가 그 아들이신 예수를 사랑하고 만물의 지배권을 주셨다는
앞절의 말씀이 결코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영생이야말로 성도
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적용되고 주어질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것이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영생이 현재적 소유의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성도둘 또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육체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영
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사건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한 삶에로 들어간 것이다.
ㅇ영생을 보지 못하고 - 요한에게 있어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유사한 단
어이다. 본절에서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또는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나눔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이미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ㅇ하나님의 진노...머물러 있느니라 -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또 다
른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는(출 22:24;32:11;신 13:17; 스 10:14)
이 표현은 인간의 일시적인 성냄이나 분노를 의미하는 헬라어 '뒤모스'와
는 달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패역한 세대에게 내리시는 일관된 '심판',
'벌' 등의 뜻인 '오르게'를 의미한다. '머물러 있느니라'로 번역된 '메노'를
직역하면 '남아 있다'(remain)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진노
가 새롭게 부여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진노(God's wrath, NIV) 아래
서 살아가던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롬 1:24). 예수의 증거를 용납
하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악의 세력 속에 그대로 방치(放置)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처벌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
래에 끝마치게 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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