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요한복음

[스크랩] 요한복음 (2 : 1~25)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15
요한복음 2장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ㅇ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_  "사흘
되던 날" 이것은, 1:43에 기록된 날부터 계산된 날짜인 듯하다. 이렇게 자세히 날짜까
지 기록한 것은, 그 저술자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실을 확증한다. "갈릴리 가나." 팔
레스틴에는 이 밖에 또 다른 "가나" 란 지방이 있는 것인 만큼, 여기서 "갈릴리"란 말
을 붙여서 밝힌다. 이곳은 나사렛 동북편 5마일 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 "혼인"은 기
쁨의 상징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복음이 율법과 달라서 그 주는 기쁨이 가정적(家
庭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일 것을 표상(表象)한다.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ㅇ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 예수님은 염세주의(厭世主義)를 가
지신 이가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
다. 이것은 그의 겸손인 동시에 그의 긍휼이다. 성결은 격리(隔離)가 아니다(Sanctity
is not singularity).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ㅇ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
니 - 당시에 "포도주"는 팔레스틴에 있어서 일반 음료였고, 다른 나라에서처럼 유흥과
오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틴은 사막 지방과 같아서 물이 귀하므로 과즙으
로 된 음료가 필요하였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더러 "포도주가 없다"고 한 것은, 포도주를 기적적으로 만들
어 주시기 위하여 겸손히 말한 청원이다.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
었을 터인데, 그의 모친께서 이런 청원을 어떻게 하였을까? 그것은 난제가 아니다. 예
수님께서 그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다 할지라도, 그의 인격에 초자연적이고 비범
한 일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인 만큼, 마리아로서 그에게서 이적을 기대할 만 하였다.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ㅇ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
나이다 - 그가 자기 어머니더러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하대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
이, 한국 풍속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같으나, 헬라 어풍(語風)으로는 그것이 무
례한 말이 아니다(Hendriksen).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하
신 것에는 뜻이 있다. 메시야의 공적 역사(公的役事)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만이 주
장하고 혈통적 모친 된 권세가 간섭할 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모친도
하난의 "여자"의 지위를 가질 뿐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예수님께
서 여기서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실 때에, 그는 자기 어머니도 하나님의 말
씀 앞에 순종해야 될 자로만 취급하신 것이다. 메시야의 공생애(公生涯)에 있어서, 예
수님은 그의 하실 바 일을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만 하시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그
는 혈통적 인연에 매이지 않아야 될 것이었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171-172).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런 표현은 구약에도 많은데(삿 11:12; 삼하
16:10; 왕상 17:18; 왕하 3:13), 반드시 냉정한 어투는 아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의
구속(救贖)사업에 있어서는 비록 예수님의 모친이라도 그 모친 된 권세로써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 밖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도울  중보자(中保者)가 없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여기 이른바 "내 때"란 말은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낼 때를 의미한다(7:30, 8:20, 13:1, 17:1). 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그
혼인잔치에 포도주 그것을 보급시키신 자선 사업을 목적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메시야로 확실히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11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
하였나이다"라고 한 말씀에 대하여 고데이 (Godet)는 해석하기를, 그가 메시야의 영광
을 나타내시기는 예루살렘에서야 될 일이고 가나에서 될 일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한
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가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므로 메시야로서
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우리 본문은 말하지 않는가? 11절 참조. 그러므로 여기 이른
바, "내 때"는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의 권능을 나타내실 일정한 시간을 가리
킨다고 생각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어 그의 중보 역사의
일체를 시행하신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순종은, 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대로 맞추어 움직이신 것이다. 이런 일은 일반인으로서는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절대 완전하신 순종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ㅇ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
라 - 이것을 보면, 그 모친이 예수님의 의미하신 바를 깨달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순종하여 성역을 이루어 나가신 사실이, 그 모친에게 알려졌다. 예수님
의 성역은 순종으로 일관하셨다. 그러므로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순종 일관주의에
서 움직여야 한다. 그 모친은 하인들더러,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라고 부탁한
다. 순종은 무엇에서든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는 비결이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순종은 이적보다 낫다"고 하였다.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ㅇ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 유대인
의 가정에는, 연회할 때에 물을 많이 사용하기 위하여 돌 항아리를 비치하였다. 그
것은, 주로 식사 전후에 손 씻는 예식을 행하기 위함이었다. 그 풍속은 성경이 제
정한 것이므로, 진정한 종교적 의의와 효과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런
번잡한 예식을 변하여, 맛 있는 신약의 종교(포도주는 신약의 기독교를 상징함)로
변화시켰다. 그것이 물론 포도주를 만드신 비유적 의미이다. "두 세 통 드는 항아
리"의 용량(用量)은, 약 77리터, 혹은 115리터에 해당된다. 이렇게 큰 항아리가 여
섯이나 놓여 있었다. 우리 본문이 이렇게 많은 분량에 대하여 관설한 이유는, 예수
님께서 만드신 포도주의 많은 분량을 말하여, 그의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지적하려
는 까닭이다.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ㅇ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 하인들은 즉시 순종하였다. "이제
는 떠서"라는 말을, 샘물에서 "물을 길어서"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Westcott),
확실치 않다. "연회장"은, 그 때 풍속에  연회의 손님들 중 주빈이었다고 한다. 이 이
적에 있어서,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말한 바 없고, 다만 고요히 역
사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런 기적이 나타났다.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ㅇ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주님의 기이한 역사의 유래를, 사람마다 알지 못하나 오직 주님께 충성하는
종들만은 안다.
ㅇ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다음과 같다. (1) 복종의 원리.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4절), 침묵하며 순종한 후 하인들더러 "너희에
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5절). 이것은, 무조건 순종을 말함이
다. 무조건 순종은  하나님께만 하는 법인데,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 대우를 받으신
것은 당연하다. 과연 하인들은 조금 후에 그렇게 순종하였다(7-8). 루터(Luther)의 말
과 같이, 참된 신앙의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을 지정해 드리지 아니하고, 자신
을 그리스도에게 복속시킨다(Wahrer Glaube schreibt Christus nicht vor-wad er
tunsoll-,sondern weiss sich darin zu schicken.-Evangelien Auslegung, 4, P.93).
(2) 변화의 원리(6-9).결례의  항아리 물의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권능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죄인들이 변화되어
성도가 될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악한 사람이라고 변화시킬
수 있다. 1733년부터 선교사들이 5년 동안 창세기 1장을 가르쳤어도 하나님의 인상도
받지 못하던 에스키모족 중에서도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생겼다. 루터
(Luther)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또 변화시킬 수 있다
는 뜻으로 말하였다(Evangelien Auslegung, 4,P.98).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은 죄인들
을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ㅇ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
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을 이 세상보다 선미(善美)
한 내세(來世)로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 이른 바 "좋은 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
현되는 구원의 기쁨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1) 혹설에, 여기 "좋은 포도주"는 취할 수
있는 강한 술을 의미한다고 하나,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이적으로 만든 술 인 것인 만큼 취하게 하는 성분이 강하지 않고도 좋은 술일수 있다.
(2)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만드신 술은 발효(醱酵)하지 않은, 취하지
않는 술이었을 것이라고 하나, 그렇게 주장할 만한 본문의 증거는 없다. 설혹 예수님
께서 만드신 술은 취할 수 있는 성질을 가졌다 할지라도,그것을 절제 있게 마시는 사
람들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절제"의 덕을 가르친다(갈 5:23). 금주
(禁酒)를 규칙으로 가지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이 이적이 문제될 것 없다.
한국인의 특수한 사정(술 취하기 잘 하는 한국인)으로 보아, 금주는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친 "절제"를 위한 것이다.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ㅇ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여기 "표적"이란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리는
신령한 증표라는 뜻이다.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메시야의 증표로서의 권능
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이다.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ㅇ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공중 성역(公衆聖役)에 헌
신하시기 때문에 가정에서 지체하시지 않게 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ㅇ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 이 귀절부터
22절까지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
을 보여준다. 성전 청결 사건은 두 번 있었는데, 여기 그 첫 번 것이 기록되었고, 두
번째 것은 성역 말기에 된 일이다. 이 사건이 가르치는 교훈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것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속화 되었을때에 그것을 방임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슐라
텔(Schlatter)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곧바로 그 시대의 제사장들을 위한 복음
(Das Evangelium fur die Priester)이라고 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74).
여기 "유월절"이란 말에 "유대인의"란 설명을 붙인 것은, 사도 요한의 상대한 독자
들이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구원을 기념하면서 지킨 것이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다가 해방될 임시에, 애
굽의 장자를 죽이는 여호와의 형벌이 내렸다. 그 때에 이스라엘 집만을 그 재앙에  들
지 않게 하려고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던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한
규례였다(출 12:12-20, 13:2, 12).그런데, 이 명절은 아빕월(3,4월 사이에 있었음) 14
일에 지키고, 거기 이어서 1주간 누룩 없는 떡 먹는 절기를 지킨 것이었다. 유대인들
이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처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온 것이다(신 16:1-8).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시려
는 것이었다.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ㅇ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
고 - 멀리 이방에서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오는 순례자(巡禮者)들에게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편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편리를 위하여 고요히
예배 드릴 장소에 혼잡을 가져오는 것은 도리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인
간은 편리를 도모하는 것이 당연하나, 영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것을 취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돈을 바꾸는 것은, 이방에 살던 유대인들이 가지고  온
로마 돈을 성전에 바치기 위하여 유대의 세겔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출 30:13). 그
들이 그 때에 성전에서 이런 매매 행동을 통하여 부당한 수입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
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잘못이었다(사 56:7; 렘 7:11).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ㅇ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
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 이 말씀을 보면, 이 때에 예수님의 의분(義憤)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이 의분인 만큼, 질서 있게 움직였다. 예를 들면, 그가 돈 바꾸
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셨을 뿐이고 그것을 뿌리지 않으셨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그 소유자들로 하여금 돈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심이었다. 만일 그가 그 돈을 뿌리
셨다면, 돈 임자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ㅇ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
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도 예수님의 의분이 질서(秩序)있게 나타
난 것이 드러난다. 그는, 그저 말씀으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
가라"고 하셨을 뿐이고, 그것을 날려 버리지 않으셨다. 그는 남의 소유물을 이렇게 존
중히 여기셨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것은 상업을 정죄하는 의미가
아니고, 성별된 기관을 세속(世俗)과 혼동시키지 않아야 할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공
관 복음에서 취급된 둘째 번 성전 청결 기사(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
에 있어서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
들의 정직하지 않은 것을 꾸짖은 말씀이다. 물론 이 말씀에는 성전 안에서 그런 영업
을 할 수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ㅇ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것을 기억하더
라 - 이것은, 시 69:9의 인용인데, 다윗이 그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핍박 받
은 사실을 가리킨 말씀이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날카로
운 행사를 보고 그가 유대인들 앞에 핍박 받으시게 될 것을 예측하게 된 것이다. 예수
님은 성전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 죽으실 수 밖에 없었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ㅇ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
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에 일으키리라 -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불신앙하는 태도로 이렇게 표적을 구하였다. 인
간은 이렇게 그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나타내신 권위를 알아볼 줄 모르고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기이한 일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렇게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요구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여기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예언을 주신 것 뿐이다. 곧, "너희가 이 성전
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을 오해한 그들이 후일에 이 말씀을 책잡아 예수님을 송사한
일도 있다(마 26:61). 그들은 여기서도 저의 무식을 폭로하였다(20절). 이런 수수께기
예언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깨닫는 때
에 믿음이 굳세어지는 법이다.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ㅇ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
키겠느뇨 하더라 - 요세보 사기(史記)에 의하면, 헤롯의 성전건축은 주전 20년에 시작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말한 이때는 주후 27년경이었을 것이다. 유대인
들은, 예수님의 예언(19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기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영적
(靈的)으로 어두운자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해석하다가 저렇게 오
해한다.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ㅇ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예수님께서 성전으
로 그의 육체를 비유하신 이유는, 구약 성전이 신약 교회와 같기 때문이었다. 신약에
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되었다. 이 귀절의 뜻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죽
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다는 것이다.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ㅇ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 여기 이른바 "성경"이란 말은, 구약에 있는 부활 예언
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시 16:10 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과 예수
님의 말씀을 깨달음에 있어서 점진적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하
기 때문에, 인간의 많은 경험과 체험을 경유하기 전에는 깨닫기 어려운 까닭이다.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ㅇ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
름을 믿었으나 - 이적(異蹟)을 제일로 알고 믿는 믿음은 변동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
나 기적보다 하나님 자신 때문에 생긴 믿음은 전진성(前進性)과 지속성(持續性)을 가
진다.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ㅇ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
음이니라 -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알기 어렵다. 속담에 말하기를, "물은 건너
가 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나 보아야 안다"는 말도 있다. 또 혹은, "사람의 마음은 죽
을 때까지도 다 모른다"(人死不知其心)라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밝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지혜를 가지셨다. 오늘날 신자
들 중에도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안
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시험해 보아야 된다(요일 4:1). 만일 그들이 무엇을 알아 마친
다는 일에 조작스럽고 번잡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시고, 그것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그것은 심판자의 정당한 지식이다. 그 이유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이다(렘 17:9)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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