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의 이야기는 부유한 젊은 관원의 이야기 뒤에 나타남으로 그 대조를 이루고 있다. 1절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예수께서는 여리고에 머물지는 않으셨다. 단지 이 지역을 지나가시는 길이었다. 그 덕분에 삭개오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 세리가 아니라(눅3:13, 눅5:27) 2절 세리장 ajrcitelwvnh"(아르키텔로네스)이었다. 이 명칭은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의미를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세무서의 직원이 아니라 제일 높은 사람인 듯 하다. 그는 수하에 사람에 있었고 세금을 걷어 로마 정부가 요구하는 데로 넘겨주는 일을 전담했다. 또한 여리고는 예루살렘과 동방을 잇는 주요 무역로로 세리들에게 있어서는 A급 지역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이곳으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고 예수를 보고자 생각했으나 키가 작아 군중들 틈에서는 제대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은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사실 삭개오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예수를 보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세리장이라는 직책이 있는 신분 높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체면을 생각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를 바라보았다. 예수께서는 5절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다. 이 말씀에 삭개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6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 예수의 초청을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된다(요6:35, 요7:37). 삭개오는 이미 유대인들로부터 죄인으로 취급되어 가까이 하지 않을 만큼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집에 가시고자 했다. 군중들은 당장에 수군거렸다.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신다는 것이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삭개오는 부자 청년과는 달리 먼저 나서서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것을 고백했다. 삭개의 이러한 행동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기쁨으로 하는 것이다. 10절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삭개오를 통해서 알려주신다. 삭개오 같은 사람이 잃어버린 자였다는 뜻이 있다.
19:11-27 열므나의 비유
마25:14-30 참고하라 이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달란트 비유와 유사하여 원래 같은 것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차이점이 너무 많아 비슷한 또 하나의 비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2절 어떤 귀인이은 마태복음 달란트 비유에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했다(마25:14). "귀인" eujgenh;"(유게네스)은 "마음이 좋은, 가문이 좋은"사람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비유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킨다.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이 말은 당시의 시대배경을 연상케 한다. 당시의 왕들은 로마로 찾아가 왕위를 수여 받았는데 헤롯대왕도 그러했다. 아켈라오(Archelaus)는 왕위라는 칭호를 가지고 유대에 머물러 있었는데 백성들은 그를 싫어했기 때문에 대표들을 파송하여 그에게 왕권을 주지 말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등극 후 첫 유월절에 그의 부하 3,000명 가량을 학살했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왕의 등극을 통해 풍유적으로 소개한 듯 하다. 먼 나라로 가셨다는 것은 조속한 시간 내에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13절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한 므나는 100드라크마이고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은 자신이 하던 일을 열 청지기들에게 맡기게 되었다. 여기서 종들은 청지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종들은 상업적인 계약서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마25:14-30절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각 사람의 재능대로 준 것과 달리 여기서는 균등하게 나누어준다. 장사하라 Pragmateuvsasqe(프라그마튜오마이) 이윤 추구를 하라는 상업적인 용어이다. 이 용어는 이곳이 상업의 유통지인 여리고(삭개오가 살고 있었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말에 사람들의 귀를 집중시켰을 것이다. 14절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것은 분명 '아켈라오'의 사건과 연관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유로 설명하기 위한 배경 설명이었던 것이지 진짜로 주님을 아켈라오와 연관시켜서는 안 된다.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비유이다. 15-19절 귀인은 왕권을 받아 가지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그동안 맡겨두었던 것에 대한 계산을 하게 했다. 첫째와 둘째는 각각 열 배와 다섯 배의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둘 다 자기 자라은 하지 않았다. 겸손히 주인에게 그 돈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칭찬을 받았다. 20-21절 그리고 또한 청지기가 나온다. 이 사람은 주인이 무서웠고 수건에 싸 두었던 한 므나를 그대로 들고 나왔다. 22절 이 사건으로 인해 주인은 종에게 "악한 종"이라고 꾸짖으신다. 여기서 '부익부, 빈익빈'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비록 경제적인 용어로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지만 이 비유의 목적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해야 한다. 물질의 사용에 있어서 진정 하나님께 남기는 것이 무엇인지는 부자청년의 이야기(눅18:18-30)에서 깨닫기를 바란다.
19:28-44 예루살렘의 입성
마21:1-11, 막11:1-11, 요12:12-19 비교하라 2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는 열 므나의 비유를 마치시자 급히 서둘러 예수께서 먼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심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이제 더 이상 피해 다니지 아니하신다.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셔야 할 그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신 것이다. 29절 벳바게는 성경에서 이곳에만 언급된 유일한 이름이다(마21:1, 막11:1). 이 위치는 확실치는 않으나 탈무드에 보면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촌락으로 수도의 경계지로 알려져 있다. 감람원이라 하는 산은 '감람산', '올리브산'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외의 동쪽에 위치한 남, 북으로 4km쯤 되는 길이로 예루살렘보다 조금 높은 낮은 산이다. 제자 중 둘은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나 "유월절 식사 준비를 위해"(눅22:8) 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었다. 30절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는 슥9:9의 성취로 볼 수 있다. 무력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서 오신 것이다(슥9:10). 31절 주가 쓰시겠다 하라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지시하신 예수님은 이 주인과 미리 약속하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거나 예수님의 말씀에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34절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이 지시 이후에 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일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35절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안장대신 사용하기 위함도 되지만 왕이나 귀인들에게 행해지던 존경의 표시였다(왕하9:13).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께서 스스로 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태웠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제자들의 존경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36절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마태는 나뭇가지도 길에 펼쳤다고 했고(마21:8), 요한은 이것을 종려나무라고 했다(요12:13). 또한 요한은 환영의 무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38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 군중들이 외친 이 소리를 누가와 요한은 "왕"으로 불렀음을 알려주고, 요한은 "이스라엘"을 추가하고 있다. 누가만이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는 찬송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눅2:14). 대신 누가는 "호산나"라는 히브리말이 나타나지 않고 대신 "영광"이란 말로 대치시켜 나온다. 이 군중들의 환호성과 찬양소리를 문제삼은 39절 어떤 바리새인들이 ...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함으로 이런 문제가 예수의 제자들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40절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는 대답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신다. 이 말은 합2:11의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어떠한 위험이 있어도 그리고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어도 찬양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주장하신 것이다. 41절 성을 보시고 우시며 "우시며" e[klausen(에클라우센)는 "슬픔의 눈물"을 말한다. 이 기사는 누가만이 전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미래를 아시는 주님께서 메시야적인 눈물로 그의 인성과 사랑을 우리에게 진하게 전달하고 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일은 요11:35에서 나사로의 죽음에서 울으셨던 것과 히5:7에서도 예수께서 통곡하셨다는 기사가 나온다.
19:45-48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심
마21:12-13, 막11:15-17 비교하라 사복음서 기자는 모두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누가의 기사가 제일 짧은 형태로 기록되었다. 누가는 마가의 보고를 따르고 있는데 단 한곳의 차이점은 마가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막11:17)고 했으나 누가는 46절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고 하였다. 누가는 "만민을 위한"이라는 단어를 넣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것은 이미 이방인들도 어디에서든 예배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요4:21). 마가복음의 것을 참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