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2:15-22, 막12:13-17 비교하라 이 사건은 마태, 마가의 것과 거의 동일하게 나온다. 이 일의 주동자들을 마태와 마가는 바리새인들이 헤롯당원들과 야합하여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누가는 1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이라고 전하여 이들이 산헤드린공의회 회원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예수께 2절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재촉했다. 이 질문의 요점은 누구의 허락을 받고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과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산헤드린회원의 사람들이 볼 때 예수는 불법을 행하고 있다고 보았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어떤 직함도 가지고 계시지는 않았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어떤 체제 속에서의 활동을 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런 자격이 없는 것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에서 공식적으로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공격하는 질문이다. 3절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이 뜻은 마태, 마가에 의하면 좀더 정확하게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다'의 뜻이다. 그리고 4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로 물으셨다. 5절 하늘로서라 하면..., 6절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고민하다 그들은 결국 7절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다. 저들이 결국 대답하지 못함으로 3절의 약속처럼 8절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심으로 논쟁할 가치가 없음을 말하셨다.
20:9-18 포도원 농부의 비유
마21:33-46, 막12:1-12 비교하라 이 비유는 풍유적으로 유대주의 지도자들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한 마지막 애원처럼 그들 인생에 있어서 이제 결정할 마지막 때가 왔음을 말하신다. 그들은 꾸준히도 하나님의 사자들을 배척해 왔다(느9:26, 렘7:25, 26, 렘25:4-7, 마23:34, 행7:52, 히11:36-38 참고). 예수께서는 팔레스타인에서 자연스런 풍경을 끄집어내신다. 9절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떠났다. 여기에 사용된 문장은 구약적 표현으로 이사야5:1이하를 연상시킨다. '농부들' gewrgoi(게오르고이)은 "소작인들" 이었다. 10-12절 때가 되어 소유주는 세를 받기 위해 종을 보내었다. 그 소출의 이익이 주인에게 돌려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빚진 것을 갚기는커녕 그 농부에게 폭행을 가했다. 지속적으로 다른 종들을 보냈지만 더 큰 곤욕만 치러야 했다. 이 비유의 요지는 꼭 소출의 이익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종들을 지속적으로 "배척"하고 있다는데 있다. 11절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예수께서 체포당하시고 채찍에 맡고 능욕 당함을 연상케 한다(마26:67-68, 막14:65, 눅22:63-65). 마가는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 당했다고 표현했는데 이 역시 예수께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을 연상케 한다(마27:29, 막15:7). 13절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이제 마지막으로 종들이 아닌 아들을 보내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주인의 고민과 베려가 나타나있다. 이런 주인의 베려와 상관없이 소작인들은 14절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고 의논하여 결국은 죽이고 만다. 15-16절 주인은 할 수 없이 그들의 것을 다시 취하고 그들을 진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고 한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넘어갈 것을 예고하시는 주님의 표현이시다.
20:19-26 세금에 대한 비유
산헤드린에서 보낸 유대지도자들이 계속해서 공격해 왔다.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께 가서 마치 실제로 이일이 그들의 양심에 거리끼는 문제나 되는 것처럼 질문하게 했다.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은 한 데나리온의 인두세로서 년 9페니 정도 되었다. 14-65세까지 모든 사람은 단순히 생존해 있다는 권리 때문에 그것을 바쳐야 했다. 이 세금은 중한 부담거리로 생각되지도 않았으며 사실상 전혀 대단한 부담도 아니었다. 문제는 단순히 재정상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문제의 초점은 이런 것이었다. 즉 열렬한 유대인들은 하나님 외에는 왕이 없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세금을 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종교적인 문제였다. 이것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산헤드린의 첩자들은 예수를 진퇴양난의 궁지에다 몰아넣으려고 했다. 만일 예수께서 세금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즉시 이것을 빌라도에게 고해 바쳐서 그 날 밤으로 체포케 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하면 그는 수많은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소외당했을 것이고, 특히 그가 강한 지지를 받고 있던 갈릴리사람에게서 소외당했을 것이다. 예수는 그들 자신의 근거 위에서 그들에게 대답했다. 그는 데나리온 하나를 보여 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고대 세계에 있어서는 왕권의 징표는 화폐의 발행에 있었다. 예를 들어 마카비 왕조는 예루살렘이 수리아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즉시 그들 자신의 화폐를 발행했다. 화폐발행권을 획득하면 그와 더불어 세금부과의 권리도 가지게 된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화에 자기의 초상과 이름을 각인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면 사실상 그는 과세할 권리를 얻은 것이나 매 한가지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만일 너희가 가이사의 화폐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면 마땅히 너희는 과세할 수 있는 가이사의 권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또 계속해서 "그러나 가이사의 영장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영지가 있다"고 말하였다.
20:27-40 부활 논쟁
사두개인들은 본서에서 이곳에 단 한번 언급되었다. 이들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은 없어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왕상1:8, 2;35의 사독 가문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하는 집단으로 바리새인들과는 불편한 관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잡고자 하는데는 힘을 모았다. 그들의 질문의 요점은 다음의 두 가지 점에 달려 있다. 1) 그것은 계대결혼법에 관한 것이다. 이 율법에 의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식이 없어 죽으면 그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혈통을 이어 주어야 한다. 예수의 시대에는 이 율법의 시행이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세의 규례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사두개인들은 그것을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2) 그것은 사두개인의 신앙에 의존되어 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종종 함께 언급되어 있긴 하지만 신앙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반대였다. 가) 바리새인들은 완전히 종교단체였다. 이들은 정치적 야망이 없었고 자기들에게 예식 법을 이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경우라면 어떤 것이고 간에 만족했다. 사두개인들은 극소수이긴 했으나 대단히 부유했다. 제사장과 귀족들은 대개가 사두개인이었다. 그들은 지배계급이었고 대개가 자진해서 점령국에 협력적이라는 것은 흔히 있는 사실이다. 나) 바리새인들은 성경 외에 안식일 법이라든가 손 씻는 법과 같은 구전율법과 예식법 등 할 것 없이 부지기수의 지엽적인 세칙과 규례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다만 구약성서의 성문율법만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구약성서에서도 모세의 율법만을 강구했고 예언서는 중요시하지 않았다. 다)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들과 영들을 믿었다.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고 천사나 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라) 바리새인들은 운명을 믿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질서를 세우셨다고 믿었다. 사두개인은 무제한의 자유의지를 믿었다. 마) 바리새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믿고 그것을 대망하고 있었으나 사두개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의 오심은 질서 정연하게 세운 그들의 생활을 문란케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이 사두개인들은 일곱 번이나 다른 남자와 결혼한 이 여자의 남편은 하늘 나라에서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들고 나왔다. 그들은 이러한 질문은 육체의 부활 신앙의 어리석음을 실증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준 대답에는 보편적인 진리가 나타나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늘나라를 이 세상의 언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거기에서의 삶이란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혀 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쓸데없는 의논을 그치고 모든 에너지를 하나님의 사랑에다 맡긴다면 엄청나게 그릇된 방향으로 돌렸던 많은 재능을 구하게 되고 무익한 염려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보다 더 문제를 깊이 파 헤쳤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두개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가 기록했다는 율법서에는 부활에 관한 증거자료가 전혀 없어서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공언했다. 여태까지는 어느 랍비도 그 바탕 위에서 그들과 대결한 자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모세 자신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3:1-6)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도 살아 있으며 따라서 죽은 자의 부활은 존재한다고 하셨다. 서기관들은 이 말씀을 옳은 말씀이라고 외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논리적 근거지에서 당당히 그들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것을 하나의 무미건조한 구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불꽃 튀기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수긍이 가지 않지만 예수님 당시의 랍비들은 전적으로 납득이 가는 논쟁방법이다. 그러나 바로 이 무미건조한 것에서 기독교를 이웃에게 가르치고 또 권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위대한 진리가 되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와 논쟁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논증을 사용하였다. 그는 그 사람들 자신이 쓰는 말로 그들에게 말했고 그들 자신의 근거에 서서 그들은 대하였으며 일반 대중이 즐겨 그의 말을 듣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때때로 우리가 종교서적이나 신학 서적을 읽을 때 그 모든 사실은 진리이기는 하지만 일반 사회나 교회에서도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신학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실제 이해하고 있는 언어와 논증을 사용하였고 그들 자신의 어휘와 그들 자신의 바탕에 서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사고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방법을 습득하게 된다면 보다 훨씬 나은 기독교의 교사가 될 수 있고, 보다 나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41-47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가
마22:42-46, 막12:35-37 비교하라 41절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것은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삼상7장, 시89:20-37, 사9:2-7, 사11:1-9, 렘23:5-6, 렘33:14-18). 이것을 반영하여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마1:1)이라고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여러 곳에서 이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신다(막10:47, 눅18:38). 그런데 이곳에서 이의를 제기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육신 적인 계보에 의한 혈통만을 중요시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와서 유대인만을 위해서 자신들의 나라를 회복해 줄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3-4에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