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장
과부와 재판장 비유
(눅 18:1) |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눅11:5, 눅21:36 |
(눅 18:2) |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
(눅 18:3) |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
(눅 18:4) |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
(눅 18:5) |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
(눅 18:6) |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
(눅 18:7) |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눅 18:8)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눅 18:9) |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
(눅 18:10) |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
(눅 18:11) |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고후10:12 |
(눅 18:12)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
(눅 18:13) |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눅 18:14)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어린 아이들을 금하지 말라(마 19:13-15; 막 10:13-16)
(눅 18:15) |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
(눅 18:16) |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눅 18:17)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부자 관리(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 |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눅 18:19)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
(눅 18:20) | 네가 계명을 아나니 ㄱ)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
(눅 18:21) |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빌3:6 |
(눅 18:22) |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
(눅 18:23) |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
(눅 18:24) |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
(눅 18:25) |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
(눅 18:26) |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
(눅 18:27) |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렘32:17 |
(눅 18:28) |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마19:27 |
(눅 18:29) |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신33:9 |
(눅 18:30) |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
죽음과 부활을 다시 이르시다(마 20:17-19; 막 10:32-34)
(눅 18:31)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
(눅 18:32) |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마27:2, 요18:28 |
(눅 18:33) |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
(눅 18:34) |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
맹인을 고치시다(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 |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
(눅 18:36) |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
(눅 18:37) |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
(눅 18:38) |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눅 18:39) |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
(눅 18:40)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
(눅 18:41) |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눅 18:42) |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
(눅 18:43) |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
- 18:1-8 불의한 재판관 비유
-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으로 결코 말하지는 않는다. 이 비유의 핵심은 7절 "하물며....."에 있다. 악한 사람도 이와 같이 하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더 하시지 않겠느냐는 대조이다.
1절 항상 기도하고 예수께서는 기도를 항상 강조하시는데 오늘 본문은 눅11:5-8에 나오는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비유와 비슷하다. 하나님 앞에서 쉽게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 것을 말하신다. 기도할 때는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말고(마6:5),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해야하고(마6:6), 중언부언하지말고(마6:7),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마5:44, 눅6:28),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라(마21:22).
예수께서는 마21:13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고 자신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고(막1:35),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고(마14:23, 막6:46, 눅6:12, 눅9:28), 마지막 시험을 앞두시고도 기도하셨다(마26:36-44). 제자들에게도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고 하셨다.
3절 한 과부가 고아와 과부는 의탁할 곳이 없는 무력한 사람의 표본이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러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압제하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되어 나타난다(출22:22, 신10:18, 욥22:9, 렘22:3).
5절 번거롭게 하니 kovpon(코폰)는 "수고, 노력한 것"의 뜻으로 성가시게 한 정도가 아니라 다른 일을 못할 정도의 지장을 주는 의미이다. 늘 eij" tevlo"(에이스 텔로스) "결국은, 마지막까지, 마침"의 뜻으로 끝까지 할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결국'(마26:58, 고후3:13, 고후11:15, 벧전1:9)으로, '결말'(약5:11), '마지막'(롬6:21, 22, 벧전3:8, 벧전4:7, 17, 히6:6)으로 '마침'(롬10:4, 빌3:19)으로 나온다.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우리는 올바로 구하기만 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또 한번의 주님의 약속이다(마18:19, 요15:7). - 18:9-14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첫째, 바리새인이 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 참된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린다. 어떤 미국인은 냉소적으로 한 설교자의 기도를 "보스턴 청중에게 드린 가장 웅변적인 기도"였다고 기술했다.
이 바리새인은 사실상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찬사를 돌리고 있었다. 유대 율법이 절대적으로 지키도록 규정한 금식은 속죄의 날의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공로를 얻고자 하는 자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역시 금식을 행했다. 예루살렘이 지방에서 온 사람들로 붐비게 되는 날은 장날이었던 그 이틀 간 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금식하는 자들은 얼굴을 희게 칠하고 어수선한 옷차림으로 나타나서는 가능한 한 가장 많은 청중에게서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려 했었다.
레위인들은 사람들의 모든 생산물 중에서 십일조를 받게 되어 있었다(민18:21, 신 14:22). 그러나 이 바리새인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렸고, 십일조를 드리도록 되어 있지도 않은 물건에까지도 십일조를 드렸다. 그의 태도는 바리새 주의의 최악의 전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바리새인은 실제로 기도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가 얼마나 선한가를 알리러 갔을 뿐이다.
11절 서서 따로 기도하여는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세리가 있다.
13절 멀리 서서 하나님을 향해서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멀리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불쌍히 여기옵소서 iJlavsqhtiv(힐라스세티) "분노하지 마옵소서"의 동사이다. 용서를 구하는 동시에 현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아들인바 된 기도는 바로 이 비탄에 잠기고 스스로 낮춘 세리의 기도이다"라고 예수께서는 말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 죄를 씻어 달라는 것"외에는 호소할게 없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분명히 기도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교만한 사람은 기도를 드릴 수 없다.
하늘 나라의 문은 지극히 낮아서 무릎을 꿇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란 오직 이것뿐이다. 주님, 당신 외에는 죄와 수치에서 숨을 곳이 어느 곳에도 없다.
남들을 경멸하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 기도하는 가운데 남보다 자신을 높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죄짓고 고통 당하며 애통해하는 인간이라는 큰 무리의 하나로서 모두가 오직 하나님의 자비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꿀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활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잣대를 우리에게 대어보면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바리새인이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 그는 금식도 했고 꼼꼼하게 십일조도 바쳤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그 세리와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남들만큼 선한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만큼 선한가?"이다. 지금 내가 못났어도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한가지 소망이 있다. 세상사람들은 기준이 같은 세상사람이기에 발전이 없지만, 우리의 판단의 기준은 예수이기에 우리는 발전의 소망이 있다.
그런 소망을 안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겸손한 기도여야 한다. "하나님이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누가복음 9:15부터 여기까지는 누가의 독자적인 기록(즉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기사)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마가의 것과 일치한다.
15절 만져 주심의 동사는 '안수한다'로서 축복해 줄 때 취하는 행동이다. 제자들이 왜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금했는지는 정확히 나와있지 않다. 예수께서 피곤하여 괴롭게 한다고 생각했거나 어린아이들을 하찮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8절 어떤 관원 마태는 이 사람을 "청년"(마19:20)으로 마가는 "한 사람"(막10:17)으로 소개하는 반면 누가는 "관원"이라고 말한다. 이 용어는 넓은 의미로 사용이 가능해 정확하게 어떤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로마 정부에 의해서 임명된 정부 공무원일수 있고, 회당을 맡아보는 회당장이나 또는 산헤드린 회원일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잘 나가는, 직업이 분명한 젊은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예수를 불렀다. 유대인들은 '선한'을 붙이지 않는다. (플루머에 의하면 탈무드를 다 뒤져봐도 랍비들이 이런 식으로 불려진 적이 없다고 한다. 이 표현이 주석가들 사이에는 두 방향으로 달리 해석하게 만들었다. 첫째는 무심결에 한 아첨 한마디로 흘러나왔다고 보는 견해와 둘째는 예수를 진정으로 인정한 한마디였다는 것이다.)
편집자의 경우는 처음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19절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는 대답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본문은 잘못 해석할 경우 예수께서 그의 신성을 부인했다고 하는 중대한 실수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말씀은 예수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방금 그가 한 말을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돼 물으신 것은 그가 선과 영생에 대해서 논할 때 가벼이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 젊은이는 한마디로 자신이 한 말이 진정으로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데 있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반응의 말을 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20절에서 예수께서는 계명들을 제시하셨다. 그런데 21절에 이 청년은 이것들을 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대답했다. 이 청년은 다 지켰다고 대답은 했지만 실제로 계명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도 심사숙고하지 않았음을 들어내 보인다. 이 관원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으로부터 떠나 있는지도 몰랐다.
22절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고 직접적으로 현실적이며 알아듣기 쉬운 말로 그에게 명하신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에 이 청년이 거절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23절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다. 세상의 부와 영생의 길에서 얼마나 갈등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연히 세상의 불의 한 제물로 천국을 사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를 못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부의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25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신다. 이 말씀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 말씀을 달리 해석하여 부자가 천국 가기가 좀더 쉬운 것처럼 설명되면 그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벗어나는 것이 된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세 번째 수난예언으로 나오지만 누가복음에서는(눅5:35, 눅9:22, 눅9:43-45, 눅12:50, 눅13:32, 눅13:33, 눅17:25) 모두 포함하면 일곱 번째의 수난예언이 된다.
31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시9:19, 시22:15, 사53:9, 슥12:10 등을 말하고 있다. 결국은 인간이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언된 뜻대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32절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예수를 잡아다 고발한 것은 유대인(산헤드린공회회 회원)들이었지만 유대가 로마의 속국인 당시에 처형의 집행을 못함으로 이방인인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당하는 장면은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예언한 것이다.
33절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분명히 예언함으로 기독교에 있어서 신앙의 핵심이 되는 골격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부터 예언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하는 것이다.
34절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제자들은 현재 예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이적을 베푸시는데 그가 죽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못한 그 때에 일이기에,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다는 어려운 말씀을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이 감취게 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두 소경이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마태는 전하고 있으며 마가는 바디메오라는 한 소경이 예수께서 성을 나오실 때 고침을 받았다고 전한다.
예수께서는 지금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의 입성을 향해 가시는 것이다. 이 도시는 요단강 가까이에 있으며 해면보다 200m정도 낮다. 군중들과 함께 지나가시는 예수의 소식을 한 소경이 들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우리에게는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6:2를 생각나게 한다).
38절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 칭호는 마태가 '메시야'의 의미로 즐겨 사용했는데(마9:27, 마12:23, 마15:22, 마21:9) 본서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야가 나온다고 믿고 있었다(사11:1). 이 부르짖음에 예수께서 아무 말씀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인정하신 것이 된다.
불쌍히 여기소서의 말은 고통 당하는 자, 소외된 자들의 외침이었다(시4:1, 시6:2, 시25:16, 시31:9, 시51:1, 시86:16 등). 여기서는 당연히 그가 보기를 원하는 부르짖음이다.
41절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이미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고있지만 그에게 믿음을 갖도록 하는 질문으로 다시 물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 하나님께 시인하도록 유도하셨다.
42절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는 그에 믿음으로 전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의 시인으로 나음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항상 각자에게 있는 작은 믿음일지라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를 기다리신다(마9:22, 막5:34, 눅7:50).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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