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이곳의 장소도 때도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이 사람이 상당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헬라어의 뜻은 ajrcovntwn(아르콘)통치자인데 그는 바리새파에 속한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인 것 같다. 엿보고 있더라 parathrouvmenoi(파라테메노이)는 미완료로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감시함을 말한다. 2절 갑자기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고 나타난다. 어떻게 고창병자가 이들 틈에 끼어 있었을까?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안식일에 예수의 병 고침으로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하나의 계획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3절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고 예수께서 먼저 질문하신다. 이로 보아 예수는 이미 그들의 작전을 알아차리시고 먼저 질문하시는 것이다. 합당하냐 #Exestin(엨세스탄)는 문장적으로 직역을 하면 [그것이 율법적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이전에 두 차례의 안식일 논쟁이 있었는데(눅6:1-11, 눅13:10-17) 또다시 안식일을 문제삼은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보여준다. 4절 잠잠하거늘 이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에 의거하여 생명이 위태롭지 않은 환자는 고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대답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예리한 질문을 미리 던짐으로 이들을 이미 그 권위에 눌려 할말을 잃은 것이다.
14:7-14 자기를 높이는 자들에 대해
7절 상좌 택함을 보시고 이 식사에는 예수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초청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개 가장 높은 사람이 나중에 도착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ㄷ자 모양의 중앙 가운데 앉는 사람이 우두머리였다. 아마도 자신들끼리 그곳에 앉기를 좋아하고 그러한 교만이 보였을 것이다(막12:38-39). 예수께서 이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이야기의 핵심을 말하신다. 이들이 제일 엄격하게 생각하고 있는 결혼식장을 비유로 들어 상좌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하신다. 13절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고 하신다. 이날의 바리새인 집에는 아마도 높은 사람만 초청된 것이 틀림없다. 예수의 신랄한 지적은 계속되었다.
14:15-24 큰 잔치에 대한 비유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해 들어 오셔서 새로운 황금의 시대가 시작될 때 일어날 일에 대하여 항상 상기하는 일연의 인습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념의 하나에 메시아의 잔치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큰 잔치를 배설하실 것이며 그 잔치에서는 바다의 괴물인 레비아탄도 음식의 일부로 나오게 될 것이다. 예수에게 말을 건넨 사람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 같은 잔치였다. 그 사람이 그 잔치에 손님이 되는 사람들은 복되도다고 말한 것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흔히 정통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죄인들이 하나님의 잔치에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발 그 때문이다. 팔레스틴에서는 누가 잔치를 베풀게 되면 그 날자는 오래 전에 미리 알리고 초청장을 사전에 발송해서 수납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이 와서 만반 준비가 되면 종들이 나가서 미리 초청된 손님들을 불러들였다. 초청을 미리 수락했다가 그 날이 되어 거절하는 것은 중대하고도 심각한 모욕이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말한다. 처음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의 전 역사를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오실 날을 대망해 왔다. 그런데 막상 그가 오셨을 때 그들은 비참하게도 그 분의 초청을 거절했다. 거리와 골목에서 모아온 가난한 사람들이란 정통 유대인들은 결코 하지 못한 태도로 예수를 영접한 세리들과 죄인들을 나타낸다. 23절 길 oJdou;"(호도스)는 성밖의 공용 도로를 가리키며 산 울 fragmou;"(프라그모스)은 "둘러막다"의 뜻으로 울타리를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백성이 초대됨을 말한다. 강권하여 ajnavgkason(아낭카손)은 "필요하다"의 뜻을 ajnagkhv(아낭케)에서 나온 말로 물리적으로 강제적인 힘을 발휘하여 데려오라는 말이 아니라 엉겁결에 사양한다고 해도 친절한 자세로 끈질기게 초청을 받아드리도록 설득하라는 것이다. 즉 예식 집에 오는 사람에게 예의를 다해서 정중하게 초대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서 초대된 사람의 들의 변명을 보게 된다.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사서 그것을 보러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를 저버리고 자신의 사업의 요구에 응했다. 오늘날까지도 이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예배드릴 시간은 고사하고 기도할 시간조차 없다고 하는 일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둘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요구를 뿌리치고 신기한 일이 요구하는 일을 따랐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손에 넣게 되면 그 일에 마음을 빼앗겨서 예배와 하나님의 요구하심을 제쳐두고 마는 일이 흔히 일어나고 있다. 새로 자동차를 입수한 사람들이 흔히 "우리가 주일이면 빠지지 아니하고 늘 교회에 나가곤 했지만 이제 우리가 차를 샀으니 그 날에는 야외로 나갑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셋째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노라"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단호하게 말했다. 구약성서의 율법 중에서 지극히 자비로운 것 중의 하나는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년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신24:5)"고 규정하고 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 사람은 바로 이 율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인생에서 좋은 일들 즉 가장 좋은 일이 하나님의 요구를 그 생활에서 밀어내어 버리게 한다면 이 보다 더한 인생의 비극이 있을 것인가? 세상에서 가정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이 이기적으로 사용되어도 좋다고는 결코 할 수 가 없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남들과도 가장 훌륭하게 함께 살아가며 이웃을 봉사하는 사람들이 자기 가족들에게도 최선을 다하며 가정의 분위기는 그 가정에 사는 식구들이 자기들도 역시 하나님의 대가족과 그 권속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하겠다.
14:25-35 제자 될 자의 각오
25절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많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대부분 현세적 욕심을 가지고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혹자는 이 무리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순례자였고, 또 어떤 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으로 등극할 것에 대한 기대로 따랐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나아오는 자에 대한 입장을 말씀하신다. 27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는 것이다. 34-35절 맹목적으로 따라오는 것에 대한 비유로 소금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우리는 지금까지 소금의 짠맛과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소금에는 이러한 성질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34절은 바로 그러한 맛에 대한 이야기로 소금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35절의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팔레스타인의 소금은 요즘처럼 깨끗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중에서 파는 것은 불순물이 섞인 소금을 여과시켜서 염화나트륨을 만들었다. 그리고 남은 찌꺼기는 소금 맛을 잃어버린 불순물들뿐이다. 문자 그대로 이것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다. 땅을 비옥케 할 수도 없고 쓰레기 더미를 빨리 썩게 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이것을 내다 버렸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에게는 이런 쓸모 없는 자가 아닌 예수의 제자는 제자 다와야 함을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