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6:9-15 비교하라 1절 기도하시고 ...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는 틈만 나면 자주 기도하셨는데 중요하게 기록된 사건만 세례 받으실 때(눅3:21),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눅6:12), 사역을 하시면서 자주 혼자 기도하셨고(눅5:16, 눅9:18), 제자들과 몇이 함께 하시기도 했다(눅9:28-29). 이런 예수님의 기도에 제자들이 그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해왔다. 2절 아버지 pathvr(파테르) "아버지 선구자, 창시자" 등에 사용한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pa(파)와 결합되어 있다. 이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면 "조상"이 된다. 이 말은 인도와 유럽어 세계와 그레꼬-로만의 고대세계에 널리 사용된 말이다. 아버지라는 말에는 가장에게 부여된 권한만큼 권위적인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왕하16:7, 신14:1, 렘18:6-7, 사64:8). 로마의 법률은 가장에게 모든 권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가정에서는 제사장이며 죽을 때까지 모든 자녀들과 종들에게 그 권한이 미치고 있다. 구약에서 히브리어로는 ba;'(아브)인데 파생어가 아닌 어근단어로 동의어나 다른 말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언어이다. 즉 모든 말이 이 단어로부터 시작한다고 보아도 된다.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배우게 되는 말도 이 말이다. 집안의 넓은 의미로 "조상들의 하나님"(출3:13)로 사용된 적이 있고, 조상들에 대한 애정과 긍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역할이나 "조상들"(눅1:73, 롬4:12)이라는 용법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마16:17, 마18:19, 눅2:49). 만물의 아버지 하나님(마21:28, 눅15:11)으로 만물의 창조주로(마5:43)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권위와 돌보심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은 징계와 선물을 말씀하신다(마6:14-15, 막11:25). 누가복음 15:11 이하의 그리스도론적 사랑의 메시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버지와 심판관으로(마7:21, 마18:23)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재판한다(마25:31). 요한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pathvr(파테르)를 약 115회 사용했으며 독립적인 용법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요한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낳는다는 개념과 연결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권위가 있는 분으로(요6:32), 더 우월하신 분으로(요14:28), 아들은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로 찬양한다(요10:30). 또한 요한은 아들은 아버지의 계시를 주는 분으로 기록한다(요1:14, 요4:21, 24). 아들은 아버지의 위임을 받아서 행동한다(요5:43). "아버지"라는 말 자체가 계시된 단어이다(요17:11, 26).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아버지에 대한 증거이다(요10:36, 요16:25).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아버지께 기도했다(요11:41-42, 요12:27). "아바"라는 호칭으로 갈라디아서 4:6, 로마서8:15, 베드로전서 1:17에 주기도문에서의 똑같은 용법으로 아들이 되었다는 확신과 상속자임을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기도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aJgiasqhvtw(하기아스테토)는 "깨끗하게 구별하다, 성별"로 거룩하게 여기 다는 뜻이다. 첫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 기도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복음전파를 말한다. 세 번째 일용할 양식에 관한 것이다. 세상의 목숨을 가진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서 제일 기본적인 것이며 이 땅의 삶에 제일 필요한 것이다. 네 번째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에 대한 간구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었으니"라는 표현이 우리의 용서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 조건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사랑으로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했으니"라는 간구로 하나님께 청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시험 peirasmovn(페이라스몬)은 "유혹"을 말하기도 한다. 시험은 사실 유혹이다. 예수께서 공생애 시작 전에 시험을 받으신 것도 모두 유혹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받은 것도 유혹이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고전6:18, 고전10:14, 딤전6:11, 딤후2:22 참고).
11:5-13 기도에 대한 교훈
구하라 aijtei'te(아이테이테)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에게 구하는 말로 기도와 관련하여 사용된다(눅10:13, 마18:19, 막11:24, 요11:22, 엡3:20). 구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 찾으라 zhtei'te(제테이테)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길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신4:29, 삼하21:1, 호5:15, 행17:27). 두드리라는 기도의 열심과 지속적인 행동이다. 10절 이런 기도의 행함은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약속을 주신다(시91:15, 사58:9, 슥13:9, 요15:7). 11-13절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역설적으로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설명이다.
11:14-26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척 당함
마12:22-30, 막3:20-27 비교하라 예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마12:22) 사람을 고치자, 15절 더러는 마태는 바리새인들(마12:24), 마가는 서기관(막3:22)이라고 말한 것은 서로 다른 사람을 말한 것은 아니며 한 그룹, 서기관의 대다수가 바리새인이었으므로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 사람들이 예수께 모욕적인 말을 했다. 소위 "바알세불 논쟁"이다. 이 일의 발단으로 금세와 내세에도 용서받지 못할 성령 훼방죄(눅12:31, 32, 막3:29)을 선언하시게 된다. 15절 귀신의 왕 바알세불 Beelzebou;l(베엘제불)에 대해서 정확하게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히브리어로 바알제불은 "오물, 똥의 신"이라는 뜻이 있어 주님에 대한 욕설로 사용되었다는 말과 왕하1:2 근거하여 '바알'이 에그론(Ekron)에서 숭배하던 우상인 '바알세붑'(Baal-Zebub)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16절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이들이 구하는 것은 중구난방이었고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귀신을 쫓아내신 것으로 다윗의 자손(마12:23)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17-26절까지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이어진다. 17절 생각을 아시고 dianohvmata(디아노에마타) "구분하다, 깊이 생각하다"의 뜻으로 이들의 목적을 간파하셨다는 말이다. 바리새인의 이러한 생각은 상당한 모순에 있다고 설명하신다. 귀신이 어떻게 귀신을 좇아낼 수 있느냐? 그것들이 서로 싸우면 자신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신다. 싸움은 사단의 세력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서만 일어난다(고후10:4). 19절 이들의 논리적 모순을 철저하게 지적하심으로,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주지시키신다. 당시 자신들의 추종자(제자)들도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면 지금 질문한 바리새인들은 재판관(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즉 자신들 스스로도 "바알세불"이 되는 꼴이다. 20절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손 daktuvlw/(다크틸로)은 "손가락"을 말하며 하나님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출8:19, 출31:18, 신9:10).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손"(출7:4, 출9:3, 15)으로도 사용되었다. 한글개역성경 마12:28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의역되었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영과도 동일하게 사용된 적이 있어(대상28:12, 19) 틀린 번역은 아니다.
11:27-28 참된 행복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에 대해서 주석가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렌스키는 눅1:42과 유사하며 눅1:48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 뒤에 있는 신적 권위를 발견한 듯 하다고 생각한 반면 뼁엘은 보통 여자들의 생각이상을 찾아볼 수 없고 인간적인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28절 이유야 어쨌든 예수님의 생각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누구든지 복될 수 있다는 기쁨을 주신다. 지키는 fulavssonte"(필라손테스) "수호하다, 복종하다"의 뜻으로 말씀을 지속적으로 지키는 것을 말한다.
11:29-32 요나의 표적
마12:38-42, 막8:11-12 비교하라 요나가 4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욘1:7) 것처럼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실 것을 말한 것이다. 진정한 표적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불신 세대가 원하는 그런 표적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표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11:33-36 등불의 비유
마6:22-23 비교하라 33절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등불의 빛을 비추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비추이기 위한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먼저 34-36절 먼저 자신에게 있는 등불이 어둡지 아니한지 돌아보게 한다. 34절 네 눈이 성하면 aJplou'"(하플루스) "순진한, 단순하다"의 의미로 헝클어진, 복잡한 마음이 아니라 단순하고 선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눈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고있음을 말한다. 36절 네 온 몸이 밝아 ... 온전히 밝으리라 앞 절의 반복과 강조로 사용 된 듯한 이 말은 에베소서 5:8, 13-14절의 의미와 같다. 우리는 일생동안 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언제 타오르도록 힘써야 한다.
11:37-44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꾸짖음
37절 바리새인의 청함에 예수님은 응하셨다. 마가복음 2:16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바리새인의 집에도 들어가신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 누구의 청함도 거절하지 않으신 것이다. 38절 손 씻지 (밥티조) "손을 담그다"의 동사로 위생법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의식적(義式的)인 정결함을 위해 제정된 규례였다. 명망 높으신 예수께서 당연히 종교적 스승으로써 그러한 습관을 철저하게 따를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손을 씻지 않으셨기 때문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손을 씻으시는 것이 귀찮거나 결례인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외식 적인 행동을 교육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손을 씻지 않으신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겉은 그토록 중시하면서 속에서는 진실이 없는 그들의 이중성을 지적하신다. 42절 화 있을찐저(☞ 눅6:24 참고하라)는 저주의 의미보다는 슬픔의 탄식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정신은 없어지고 형식주의에 매이게된 점을 비판하신다. 구약의 율법은 농산물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데(레27:30-33, 신14:22-29) 땅에서 소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바리새인들이 분류하고 있는 십일조 항목들을 열거하는데,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사랑은 버렸다고 책망하신다.
11:45-54 외식하는 율법사에게 임하게 될 화
51절 아벨의 피로부터 ... 사가랴의 피까지 유대인들의 성경 분류법상 창세기의 첫 번째 하나님을 위한 의로운 죽음(창4:8)과 마지막 죽음(대하24:20-22)을 말한 것이다. 53절 거기서 나오실 때에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시는 것을 말한다. 이 집에 식사에 초청을 받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셨을리 없다. 맹렬히 deinw'"(데이노스) "두렵게, 무섭게"의 뜻으로 바리새인들의 흥분은 이제 예수를 잡고자하는 흥분 상태에 이르렀다. 54절 목을 지키더라 qhreu'saiv(데류사이) "지키다"인데 야수를 사냥할 때 그물을 쳐놓고 기다릴 때 사용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