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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15(1)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5

마가복음 15(1)장


< 1-15 >

1.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서 불법적인 공회를 한밤중에 열어서 사형을 언도했다(14:53~65). 새벽에 다시 모였다(1, 눅 22:66-71). 옛날 우리나라 국회도 날치기를 하느라고 한밤중에 장소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열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속전속결로 처리하려는 모습을 잘 나타내는 단어는?

    즉시: 새벽에 비상소집처럼 모여서 즉시 일을 처리하는 재빠른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백성들이 알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려는 의도일 것이다.

2. 사형에 대한 언도는 이미 있었는데(14:64-65) 새벽에 급히 모여서 또 무슨 의논을 했을까?

    처형 방법에 관한 논의 아니었을까? 사형을 선고할 때는 종교적인 죄였지만 빌라도에게 요구한 것은 정치적인 죄목인 것으로 보아 종교적인 죄로 처형할 것이냐, 정치적인 죄로 처형할 것이냐는 논란이었을 것이다.

3. 대제사장들이 정죄한 예수의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그런데 빌라도에게 고소한 죄목은 무엇인가?

    유대인의 왕: 반란, 반역의 의미인 셈이다.

4. 빌라도가 말하는 유대인의 왕, 예수가 말하는 유대인의 왕이란 무슨 뜻일까?

    빌라도: 정치적인 왕(사형에 해당함),
    예수: 종교적인 왕(죄가 되지 않음)

5. 빌라도가 이상하게 여기는 점이 무엇일까?

    고소하는 자들의 고소에 대하여 아무 대답을 않음, 최소한 부인은 하는 법인데?

6. 빌라도가 보기에 전혀 죽을 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넘겨준 걸로 생각함(10):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14)

7. 왜 전례대로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는가? 바라바가 불쌍해서?

    싹을 자르는 행위(내가 당선되기 싫어서 남을 먼저 당선시키는 것): 전례대로 죄수를 방면한다고 예수를 놓을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려는 약을 수이다. (바라바는 애국자요 민족 독립운동가일 수도 있단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더 큰 이유는 아니다)

8. 빌라도의 책임 회피성 발언이나,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찾아보자.

    1) 자기의 판단대로 소신껏 처리하지 않았음
    2) 민란을 두려워함

9. 유대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이 로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임을 확인하는 일은 이 글을 받는 성도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박해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기독교는 로마에 반대하거나 위험스런 존재가 결코 아니다는 의사표현일 수도 있다.

10. 대제사장들의 어거지, 빌라도의 우유부단, 무리들의 잔꾀, 예수님의 작심이 합하여 무엇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뜻을 이룸

< 16-32 >

11. 희롱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왜 그런 짓을 하는가?)

    자색옷: 네가 왕이라며 그렇다면 왕복을 입어야지. 왕복 흉내를 낸 것이다.
    가시 면류관: 왕이라면 면류관을 써야지.
    유대인의 왕으로 예우: 로마인들에게는 멸시의 표현이다. 왕이면 뭐하나 유대인인데?
    갈대(가벼운 게 별로 아프겠나?): 툭툭치더라도 머리에 가시가 박혀있는 상태니...
    침 뱉음: 멸시
    꿇어 절함: 왕이라고 했으니
    지나가는 자들의 조롱: (29-30)'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조롱: (31-32)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12.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지고 가지 못했을까? 너무 열심히 사역하시느라고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14절의 채찍질 때문일 것: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의 저항의식을 빼앗기 위한 채찍질이었으니 무자비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채찍질에 기진하여 죽기까지 하였단다.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면서 더 이상의 매질을 하지 않은 것도 이미 도를 넘었기 때문일 것이며 십자가 상에서 일찍 돌아가신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44).

13.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간 시몬을 소개하면서 두 아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 아들이 초대교회에 잘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구레네 시몬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초대 교회의 유명인사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런 명칭이었을까?

14. 몰약을 탄 포도주는 일종의 진통제인 셈이다. 고통을 덜어주려고 죄수들에게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왜 거부하시는가?

    죽음을 자청한 분이 고통을 자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키케로(시세로)의 증언에 따르면 십자가 형벌이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하려 하지 않았다.

15.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장면은 너무나 간략하다(24). 너무나 끔찍하여 자세히 서술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까? 아니면 모두들 잘 아는 장면이라서 묘사하지 않았을까? 혹시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마가의 관심이 어디에 쏠리고 있는가?

    마가의 관심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것'에 있기 때문이다. 집중적으로 그 부분만 묘사하고 있다. 무심하게 제비뽑는 군인들, 구레네 사람 시몬, 죄수들, 지나가는 사람들(일반인이라기보다는 재판에 거짓 증거를 대던 사람들), 조롱하기에 바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16. 예수는 온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다. 그 십자가 밑에서 피와 땀에 젖은 옷을 차지하려고 제비뽑는 사람들과 대조해 보자.

    어쩌면 인간이 이렇게 고귀할 수도 있고 이렇게 천해질 수도 있을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제 입에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17. 예수를 처형하면서 왜 두 강도를 함께 처형했을까? 빌라도의 생각일까? 제사장들이 예수를 강도와 같은 파렴치범으로 보이게 하려고 꾀를 부린 걸까? 이사야 53장에서 답을 찾아보자.

    유대인의 왕을 모욕하려는 빌라도의 생각일 수도 있고 제사장들의 잔꾀일 수도 있고, 바라바의 일당을 처형하려고 미리 정해둔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인간의 눈에 그렇게 보여도 실상은 사 53:12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자리는 원래는 바라바의 자리였다. 사실은 우리 모두의 자리였다.

18. 처형과정에서 유대인들이 싫어한 것은?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 빌라도는 예수를 정치적인 죄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정치적인 죄목을 붙인 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모욕이다. 자신들에 대한 모욕이지만 눈에 가시 같은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서 이 정도 모욕은 참을 수 있었다. 이 못난 인간들아!

19.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말은 스스로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포기하라는 유혹이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하던 사단의 그 유혹과 같은 것이다. 잠시 떠났던 사단이 마지막에 또 유혹하는 셈이다. 결국 예수를 모욕하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무엇이 된 셈인가?

    사단의 하수인이 되고 만 것이다: 뼈를 깎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의 하수인이 되고 만다. 회심하기 전의 사울의 모습이 꼭 그렇다.

20. 조롱을 하면서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인정한 예수님의 능력은 무엇인가?

    예수의 이적적인 능력(=남은 구원하였으되): 예수에게 메시야적인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욕심과 이기심에 이끌려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반증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이 자의에 의한 것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까불지 말라!

21. 십자가의 달린 예수의 우편에 좌편에 강도들이 달려있었는데 이런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막 10:35~40):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요구에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자리인지 아느냐는 것이겠지만 겁도 없이 두 형제는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주님이 이런 고난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엉뚱한 욕심을 부렸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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