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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14(1)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5

마가복음 14(1)장


1. 원래는 유월절 다음 날부터 일주일간 무교절을 지켰는데 붙어있는 명절이라서 나중에는 같은 것으로 취급되었다(눅 22:1). 간단하게 유월절과 무교절은 무엇을 기념하는 절기인가?

    유월절: 출애굽 시에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던 밤에 양의 피를 바름으로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

    무교절: 출애굽 때 급히 빠져 나오느라고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 딱딱한 떡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났음을 기억하는 절기

2. 명절에는 왜 말자고 했을까?

    민요가 날 것을 두려워해서: 유월절에는 수많은(약 10만?) 순례자들이 운집하였으며 대체로 예수께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3. 명절에는 말자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명절에 죽이고 말았다. 왜?

    자신들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유월절 양은 유월절에 잡아야 하는 하나님의 법(12, 21)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 때문이 아니다.

4. 왜 하필이면 문둥이 집에서 식사를 하는가? 문둥이는 마을에 함께 살지 못하는데?

    아마 문둥병이 걸렸다가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을 것이다.

5. 여자가 부은 향유의 용도와 가격은?

    용도: 시신에 발라 악취를 제거하는 일,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일
    가격: 300데나리온,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6. 구제에 사용하는 것과 예수님께 허비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이 경우는 죽음을 눈 앞에 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여인의 처사가 칭찬을 받은 것이다. 매번 이런다면 칭찬받을 일은 아니다. 특수한 상황임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예수님께 바치는 것이 가장 잘하는 것이라는 식의 가르침은 좀 곤란하다.

7. 이 여자의 동기는 예수님의 의도와 같았을까?

    1) 아마 아닐 것이다. 단순한 감사가 엄청난 일에 동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마치 억지로 진 십자가가 진정한 복으로 다가온 것처럼

    2) 아마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비싼 것을 드린 점에 비추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번 답이 가능성이 더 있어 보인다.

8. 이 이야기는 순서상으로 여기가 아니다. 이전에 있었던 일을 굳이 여기에 기록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가룟 유다 사이에 끼움으로 그들의 추함과 대비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9. 유다의 배신은 참으로 엄청난 비극이요 나라를 팔아먹은 것보다 더 큰 죄악일텐데 특별한 동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또 배신자 유다에 대하여 그렇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왜 그럴까?

    예수의 죽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유다는 자기 나름대로 동기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죽음에 있어서 유다의 역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래서 특별한 감정이나 미움의 표시도 없이 '열 둘 중 하나'라고 말한다.

10. 이번 유월절 만찬은 예수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산제물로 드렸던 장소(예루살렘 성전산)에서 온 인류를 위해서 드디어 자신을 드리는 비장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하실 말씀이 참으로 많았다. 반면에 적대적인 분위기 또한 최고조에 다다라 있었다. 전혀 방해받지 않는 장소에서 마지막 만찬을 보내고 싶어하신 모습이 본문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만찬을 함께 나눌 제자들에게조차 비밀스럽게 준비하셨다. 마치 간첩이 접선하듯이 장소를 준비하시고는 몰래 선발대를 보낸 셈이다. 특별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신 분도 예수님 자신이지만 만찬 석상에 올려진 떡과 포도주도 바로 자신이었다. 제자들은 이 만찬을 위해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흔히 하는 말로 다 차려진 상에 숟가락만 들고 덤비는 격이었다. 우리의 구원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셨다. 이 과정에 공헌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 일을 준비하고 도운 사람이 누구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홀로 잔치 준비를 다 하셨다.

11. 원래 유월절 식사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지만 오늘은 침울하고 걱정스러운 분위기이다. 무엇 때문인지 두 가지를 지적한다면?

    배신에 대한 경고가 있기 때문이다(18).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언급 때문이다(24).

12. 유다도 '내니이까'라고 했을까?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는 말대로라면 그 순간에 누가 그릇에 손을 넣고 있는지 보면 범인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을 것이다(마 26:25): 유다가 얼마나 놀랐을까? 거듭되는 예수의 경고에도 끝내 돌이키지 아니하는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도운 것 아닌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사용하셨을 뿐, 유다는 자신의 뜻대로 했을 뿐이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는 말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한 솥 밥을 먹는 자'라는 말이다. 그 순간에 함께 그릇에 손을 넣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13. 다음 빈 곳에 알맞은 단어를 본문을 보지 말고 넣어보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_____(에)게 좋은 뻔하였느니라'

    제게: 예수님은 유다 있건 없건 그 길을 가야 할 몸이기에 아무런 변동이 없다. 누가 되었건 개인적인 욕심에 이끌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화가 있다.

14. 22~26을 보면서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를 세 가지 찾아보자.

    잘 가르치심: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어려운 것을 쉽게, 오래 기억토록 하는 것은 스승의 훌륭한 자질 중의 하나다. 제자들이 먹을 때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기억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이 교훈의 의미도 모른 채 몸과 피만 찾는 어리석은 제자들이 현실에는 적지 않다!

    헌신하심: 제자들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한 스승이다. 어려운 때 용돈 나눠 쓴 일도, 등록금 한번 대준 것도 못 잊는다. 하물며 목숨을 버리셨다면? 부하 장수가 임금을 위해서 대신 죽는 것도 대대로 칭송하거늘, 말단 병사를 위해서 임금이 목숨을 버렸다면?

    끝까지 돌아보심: 왜 다시는 마시지 않는가? 기다리겠다는 말이다. 언젠가 새 만찬을 나눌 때가 있음을 가리킨다. 하늘 나라에서 함께 나눌 만찬을 기다리며, 우리 위해 간구하신다! 평안히 쉬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롬 8: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15. 우리는 약속을 할 때 손가락을 걸기도 하고 어른들은 도장도 찍고 계약서도 쓰는 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표시로 무엇을 했는가?

    피를 뿌림: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언약이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 애꿎은 짐승이 죽었다. 피 없이는 언약이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히 9:22)는 말과 같다. 제한적이어서 반복되어야 할 구약의 수 많은 피뿌림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언약의 피란 출 24:8에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계명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할 때 피를 뿌림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일종의 계약을 맺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16. 세 종류의 인간, 즉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가룟 유다, 마리아에 대해서 비교 평가한다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겨야 할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앞장섰다. 성경을 가장 잘 알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 사람이지만 말씀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죽이는 일을 저질렀다. 좋은 머리가지고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명절에 예수를 죽이면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니 명절에는 피하자는 것이다. 많이 배우고 좋은 지위에 앉아서 겨우 잔머리나 굴리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교회를 허무는 자들이 교회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자들이 아니다. 나름대로는 말씀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교회를 허물고 예수를 깎아 내린다. 소위 신학자들 중에도 엄청난 파괴력으로 교회를 허무는 자들이 적지 않다. 많이 배운 것, 머리가 좋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많이 아는 것과 머리 좋은 것은 그만큼 더 해로울 수 있다.

    가룟 유다: 예수님께서 3년 간이나 함께 다니며 가르쳤음에도 스승을 배신하고 만다. 더구나 그는 헌금궤를 맡았던 사람이다. 그만큼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다.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이유를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성경은 간단하게 돈을 언급하고 만다. 돈 문제에 걸려서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돈의 유혹 앞에 당당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목사가 돈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추할까? 가룟 유다가 꼭 그 모양이다.

    마리아: 아름다운 헌신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아낌없이 헌신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때에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을 섬겼는데 예수님은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하시고 기뻐하셨다. 반면에 이를 비난하고 돈에만 온갖 관심을 기울이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추한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듯하지만 돈에 관심이 더 많은 유다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을 뿐이다. 곧 돌아가셔야 하는 예수님의 죽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17.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27)는 말씀은 의역이다. 개역성경 난하주에 보면 '나를 인하여 실족하리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이것이 원어식 표현이다. 실족한다는 말은 흔히 쓰는 말로 '스캔들'이라고 하는 말이다. 연예인이 한번 스캔들을 일으키면 생명이 끝나는 수도 있다. 제자들이 그럴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만약 그런 짓을 하게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막아야하는 것 아닌가?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면 나도 너희를 버리리라. 이래야 정상같은데? 갈릴리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말이다. 우리의 과거, 온갖 추억이 깃든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말이다. 예수님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 제자들과 함께 새로 일을 시작하시겠다는 중요한 선언이다.

18. 배신할 것을 미리 아신다면 배신하지 않도록 용기를 준다던가, 부인하지 말고 지조를 지키라고 당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이 배신을 미리 막는 것이 아니라 그 후 다시 제자의 자리를 찾는 것에 있다: 제자들이 예수를 배신하고 마음 아파할 때 예수님께서 미리 이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것은 위로가 되고 용서를 구하기가 쉬울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고백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실족하여도 용서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까? 제자들은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은 다 깨어져야 할 것이겠기에 굳이 말리지 않은 셈이다. 해서는 안될 일을 꼭 해야겠다고 우기면 놔두는 것처럼, 결굴은 자신들의 교만을 다 깨고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함이다.

19. 예수님께서 살아난 후에 먼저 갈릴리로 가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주로 사역하시던 곳이고, 제자들의 대부분이 어부였고, 양떼가 흩어지는 것처럼 제자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과 연관지어 보자.

    예수를 버리고 흩어지면 그들이 갈 곳은 예전 삶의 터전밖에 없다. 청운에 부풀어 고향과 생업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는데 그 분이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실망과 좌절로 다시 배를 타려는 그들에게 다시 찾아가겠다는 뜻이다.

20.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을 보면 베드로의 어떤 점이 드러나는가?

    다른 제자보다 우월함을 은연중에 드러냄: 결국은 다른 모든 제자들을 이끄는 임무를 맡게 되지만 베드로는 결코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겸손한 지도자는 이렇게 뼈아픈 경험을 하면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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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떤 영화의 주인공은 엄청난 고민이 있어도 끝까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비밀로 하고 임무를 완수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 그리도 고민이 되었을까?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 일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셔서 잡히시기 직전까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던 분이 막상 일이 닥치니까 두려워진 것인가? 제자들에게까지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한 것은 너무 약한 모습 아닌가?

    일시적일지라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 정신적인 고통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큰 것일까? 제자들이 공감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 정신적인 고통일 것, 육체적인 고통보다 타인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스데반의 죽음의 경우를 보면 육체적인 고통이 정신적인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육체의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다.

22. 혼자 기도하시러 가시지 기도도 하지 않을 세 제자를 왜 데리고 갔을까?

    아마 위로 받기를 원하시지 않았을까? 진짜 외로운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될 것 같지 않은 갓난애가 옆에 있어도 위로가 된다. 예수님의 외로움이 극에 달하였기에 이런 제자들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잠만 자는 제자들이라도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그러했다면 위로가 필요없을 만큼 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형제를 돌아보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23. 기도할 때 기도하지 아니한 것이 바로 제자들의 실족의 원인이 아닐까? 기도했더라면 실족하지 않았을까?(38)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족하였다는 것도 일리는 있지만 단세포적인 발상이다. 좀 더 큰 문제가 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자들이 잘 모르는 것이 주원인일 것이다. 예수께서 잡혀 죽을 것과 제자들의 배신을 미리 말하였지만 제자들은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상황 같다. 그러니까 졸고 잤지! 실족한 원인은 좀 더 종합적으로 본다면 제자들의 불신앙, 인간적인 연약함이 아닐까?

24.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이루어졌는가?

    질문이 적당하지 못하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 뜻에 기꺼이 순종하도록 힘을 요청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얻었는가?'라고 묻는 것이 올바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을 거기에 맡김으로 평안을 되찾았다. 우리가 늘 하는, '기도가 응답되었는가?'라는 질문은 그렇게 자주 애용할 좋은 질문은 아니다. 기도가 우리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가 변하는 기도도 있다.

25. 예배 시간이나 설교 시간에 유독 잘 조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구절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8): 예배시간에 조는 것이 습관화된 것인지, 육신이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설교자가 시원찮아서 그런지... 명확하게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서는 좀 곤란하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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