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13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5

마가복음 13장


< 1-8 >

1. 제자 중 하나가 보는 것과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제자: 건물의 웅장함, 돌의 크기: 이 성전은 헤롯 성전이라고 불렸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족이었는데 그가 왕이 된 후에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무너진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으로 성전을 지으려고 했다. BC 19년에 시작해서 AD 63년에 완공되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보고 있는 건물은 공사를 시작한 지 50년이나 된 건축 중인 건물이다. 성전의 뜰은 360×460m이며, 한쪽 좌대의 높이는 기드론 골짜기에서 본다면 60m 높이다. 골짜기에 옹벽처럼 벽을 쌓아 올리고 그 안을 채워서 평평하게 바닥을 만들어 세운 건물이다. 당시의 기술로는 경이적인 건물이어서 제자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자랑할만한 건물이었다. 건물의 웅장함뿐만 아니라 돌의 크기도 엄청난 것이었다.

    예수: 하나님없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께서 외면하는 자의 뛰어난 외모처럼 하나님없는 하나님의 집의 웅장함은 비극의 재료일 뿐이다. 당시의 기술로는 경이적인 건물이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2.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는 예수의 답변은 어느 정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대답일까?

    죽을 죄에 해당함: 그래서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 제자들이 조용히 물었다. 예수의 죄명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이었음을 감안해보면 죽을 죄임이 틀림없다. 초대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죄목이 성전모독이었다. 과연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성전이 완공되자마자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무너진다. 73년이나 걸려서 완공된 건물이 7년 만에 무너졌다. 성전의 벽 속에는 금이 들어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로마 병사들이 금을 찾느라고 문자 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렸다고 한다.

3. 예수님은 성전에 무슨 원한이 많아서 성전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듯한 발언을 했을까?

    유대인들이 성전 건물을 우상시하고 있었기 때문: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신 것이 성전의 시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재하시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솔로몬은 웅장한 성전을 짓고도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전이오리이까?'라고 했다(대하 6:18).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라도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적합한 곳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손들은 하나님보다 성전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성막이나, 성전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건물 자체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 성전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인데 유대인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거하실 곳은 바로 예수 자신이며 그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바로 성전이다. 유대인들이 성전 건물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사람을 무게로 달아서 값을 매긴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4. 제자들은 '이런 일'과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질문했다. 단순히 성전의 파괴에 대해서만 물은 것이 아니다. 기록되지 않은 다른 대화가 더 있었다는 말이다. 성전 파괴 외에 또 무슨 내용이었을까?

    세상의 종말: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 24장에 따르면 제자들이 물은 것은 '이런 일,' '주의 임하심,' '세상 끝'에 대한 것이었지만 성전이 무너지는 것이 세상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 가지 일이다. 이런 오해를 예수님은 굳이 설득하려 하지 않고 예루살렘의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동시에 세상의 종말을 설명하고 있다. 감람산에서 질문을 할 때는 분명히 예수님의 말 뜻을 오해하고 있었겠지만 이 글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AD 70) 한참 뒤에 쓰여졌으므로 무너진 예루살렘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5.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어딘가 동문서답인 것 같은데?

    제자들은 성전의 종말에 대해서 질문했고 예수님은 대체로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답변하셨다: 성전의 종말에 관한 답변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어느혀 없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혼재되어 있기도 하다. 성전의 종말이 우주의 종말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제자들의 관심은 성전에 있고, 예수님의 관심은 우주의 종말에 있다.

6. 우주적 종말이 시작되는 가장 큰 특징은(3-8)?

    가짜 그리스도가 등장하여 미혹하는 것, 난리, 지진, 기근: 종말의 시작은 미혹의 때이다. 인류의 장래가 장미빛이라고 하는 것도 미혹인 셈이다. 지구의 한 쪽에는 살 빼다가 죽기도 하는 반면에 다른 한 편에서는 굶어 죽고 있다. 발달된 기술이 평화를 가져다 주리라고 기대했지만 발달된 과학 기술은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을 뿐이다. 전쟁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고 터지기만 하면 엄청난 인명이 억울하게 죽어간다. 많은 질병이 정복되었지만 이전에 도무지 알지 못했던 희귀한 질병으로 좌절한다. 과학의 발달은 또 다른 재난의 시작이라는 것이 과거의 경험이기도 하다. ↔ 성전의 멸망이 임하기 전에도 자칭 메시야가 29건, AD 70년 멸망 전에 수없이 많은 난리의 소문, 폭동이 있었으며 가짜 메시야는 종말이라고 주장했으나 예수님은 끝이 아니라고 하셨다.

7.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신 교훈은 무엇인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5)
    두려워 말라(7)

    걱정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종말을 들먹이며 겁을 주거든 미혹케하는 자로 알아야 한다. 종말을 말하면서 겁을 주고 재산을 빼앗으려는 것이 그릇된 종말론자들의 가장 흔한 수법이다. 예수님이 오신다며 재산을 포기하게 하거나 직장이나, 가정을 버리라고 하거든 거짓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라.

    제자들은 언제 이런 일이 있을까하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그 '때'를 말씀하지 않았다. 다급한 상황이 될 때까지는 미리 준비하지 않는 인간의 심성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 내일이라도 오실 것같이 말씀하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만 말씀하시면서 '미혹을 받지 말고, 두려워 말라'고만 하셨다. 어떠한 유혹과 재앙이 닥친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 9-13 >

8. 3-8절이 종말의 시작이라면 9-13은 종말의 진전이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인가?

    핍박(환난): 과거의 예를 보면 이런 핍박이 오히려 복음이 빠르게 전파되는 유익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예루살렘의 박해, 유대인의 흩어짐, 로마의 박해가 복음이 전파되는데 장애라기보다는 오히려 제대로 널리 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로마의 박해가 없었다면 복음은 하류층에 퍼지는 민간 신앙 정도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박해가 오히려 상층부에까지 전달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9, 10).

9. 핍박에 대해서 취해야할 두 가지 태도는?

    조심하라: '뱀처럼 지혜로우라'고도 한다(마 10:16). 공권력에 의한 핍박도 있고(9절), 가정적인 핍박도 있다(12절). 신앙적이란 무조건 용감하게 부딪혀서 장렬하게 죽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싸우지 않고 피해야 할 경우에는 피해 가야한다. 예수님도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잘 빠져나가셨다. 물론 돌아가실 때가 되었을 때는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셨지만. 함부로 대적하여 싸우는 것만이 신앙적인 것은 아니다. 가정적인 핍박(12절)에 대해서도 조심스런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믿지 않는 부모는 모실 이유가 없다? 믿지 않는 형제와는 관계를 끊어버려라? 믿지 않는 남편과는 무조건 이혼하고? 그래야 할 때가 있기도 하겠지만 조심스런 태도로 이런 어려움을 견뎌야 한다. 이런 시련을 견디어낼 때 교회는 제대로 성장했다.

    두려워 말라: 핍박을 당할 때 조심스럽게 처신하라고 하시면서도 그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핍박에 굴복하고 아부하면서 온갖 부와 명예를 누렸던 엉터리 신학자나 목사들은 많은 글을 남겼지만 핍박에 굴하지 않고 감옥에 갇혔던 우리의 조상들은 자신들의 글을 별로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고백이나 행적은 기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일본의 최고 학문을 공부한 검사들에 의해서 상세하게 기록되고 정리되어 남겨진 것이다. 자신들을 취조하는 검사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전했다. 그들의 신앙을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그들이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 속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10. 그리스도인에게 닥쳐오는 핍박이 어느 정도의 핍박일까?

    형제를 내어주고 부자지간에 서로 죽게 하는 정도: 그래도 견디어 내어야 한다. 이런 단련을 견디어낼 때 교회는 제대로 성장해왔다. 국교로 인정되고 편안하게 자유롭게 신앙을 누릴 때면 교회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11.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라'는 말씀대로라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을까? 성경공부도?

    노력을 게을리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염려하지 마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역사 하신다는 것이지 사람이 해야할 일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게을러도 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두려움에 잡힌 자는 답변을 준비해도 소용이 없다. 두려움에 잡히지 않는 것이 더 우선이며, 필요한 답을 성령이 인도할 것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그것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한다.

12. 가장 확실한 종말의 증거는?

    복음이 만국에 전하여지는 것(10):

13.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받는 비난이나 고통은 복이 되지 않는다. 어떤 고난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가?

    내 이름을 인하여(13): 다니엘의 경우처럼 신앙문제가 아니라면 전혀 비난받을 수 없는 삶이어야 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받는 비난이나 고통을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욕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성질이 좋지 않거나 행실이 나빠서 얻어먹는 욕은 결코 복이 되지 않는다. '예수 믿는 것만 빼면 멋진 놈인데...' 이런 말을 들을만큼 살아야 한다.

< 14-27 >

14. 감람산 강화라고 불리는 이 본문을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종말에 대한 징조로만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몇 가지 근거가 있기 때문인데 본문에 어떤 근거가 있을까?

    제자들의 질문이 성전 건물이 무너지는 것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에 있는 자들(14)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30): '다'라는 말이 반드시 모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마 3:5, 행 2:17). 홍수 심판은 말세에 궁극적인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고편이다. 이 말씀도 전 세계적으로 임할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고편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나타날 것임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AD 70년을 기점으로 하여 여러 재난들과 대환난이 유대인들에게 있었다. 모든 징조들이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예루살렘은 황폐하여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피난을 갔다고 한다. 산으로 도망하라는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로마에 항거하다가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극심한 고통과 엄청난 살육에 유대인들은 정말로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예고편이었을 뿐이다. 예루살렘 멸망은 세상 마지막 때에 대한 그림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부분적으로는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키면서 최종적으로는 세상의 종말을 가리킨다.

15.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은 일차적으로 BC 168년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상을 세우고 돼지 피로 제사를 지낸 사건을 가리킨다(단 9:27, 11:31, 12:11). 이차적으로는 메시야의 재림 전에 있을 박해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이 단순하게 예루살렘의 멸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란 증거는 어느 구절일까?

    26-27절: 이 말씀이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Titus)장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시작한 것이 성전의 파괴이었으니 그렇게 보아야겠지만 핵심은 역시 종말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16. 종말 직전에 있을 환난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급격하게 닥칠 것: 물건을 챙길 시간이 없고, 빨리 도망하지 못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무자비(극심) 할 것(19): 아이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17. 환난이 겨울에 일어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망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망하기도 어렵고 양식을 얻기도 어려울테니까.

18. 극심한 환난을 보면서 성도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성도들을 위하여 날들을 감하실 것이다(20).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일이다(2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13, 22).

    고난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간섭하고 계시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고난이 아니라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지 말라는 것과 조심하라는 것이다. 깨어 경성한 자세로 종말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데 깨어 경성하는 좋은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19. 임금이 행차를 하면 길에 있던 모든 것들이 비켜 주어야 했다. 모두가 땅에 엎드리어 경배를 했다. 환난도 끝나고 드디어 예수님께서 만물의 주인으로 나타나실 때가 되었다. 누가 이것을 먼저 알고 표시를 내는가?

    자연계 (해, 달, 별, = 하늘의 권능): 아마 더 밝은 빛이 나타날 것이므로

20. 종말에 대해서 우리는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도 모든 일을 미리 말씀하셨다고 하는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다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까지 알아내려고 안달하는 자세는 버려야 한다(계 10:4, 전 7:14).

21. 종말에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고 많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도 믿지 말란다. 그럼 진짜는 어디에 있는가?

    진짜는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행 1:11, 마 24:27): 자신을 소개할 필요도 없다. 자신을 메시야라고 소개하거나 설명이 필요하다면 메시야는 아니다.

< 28-37 >

22. 1980년대에 예수 재림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많아서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 이유는 본문과 관련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나라를 다시 세운 것을 의미한다(1945년).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이라고 했으니 한 세대를 40년으로 계산하면 1985년이 된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여러분 나름대로 한 마디 해보시오.

    예수님께서 모른다고 한 일에 대하여 그렇게 머리 쓸 필요가 없다. 다만 시대의 표징을 보면서 '오실 때가 되었구나' 하고 느끼면서 환난을 이기는 것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연대측정을 위한 비밀메시지'라고?

2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1)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의 어떤 특징을 말하는가? 타국으로 간 주인의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한 것임을 강조.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24.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에 의거 예수님께서 재림의 날짜를 모를 리가 없다(32절)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중대한 오해이다. 무슨 오해일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이런 차이마저 없다면 '삼위'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성경은 명백하게 일체를 주장하면서도 삼위를 구별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른다고 하셨으면 그렇게 알아 들어야 한다. 무능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을 존중하는 발언이다. 알아도 자신의 영역이 아닐 때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경우처럼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는 발언 아닐까? 그렇다면 알았다는 뜻이냐고? 제발 그 쪽에 관심을 두지 말고 말씀하시는 의도에 관심을 두라는데도...

25. 35-36절은 주인이 어느 때 오는지를 알아내라는 말인가?

    아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주인이 어느 때 오는지 안다면 매일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 그 날과 그 시에 맞추어서 깨면 될 일이다. 그 날에 맞추어서 준비하느라고 부산을 떤 것을 주인이 알면 혼날 것이다.

26. 본문은 말세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성도가 지니고 있어야 할 자세에 대하여 '주의하라, 조심하라, 삼가라' 등으로 말하지만 결국은 (        )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깨어 있으라: 주의하라, 조심하라, 삼가라, 깨어 있으라(5, 9, 23, 33, 35, 37)는 것은 다 같은 말이다. 사람이 약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인지 몰라야 경성하는 사람의 못된 습성, 시험칠 날이 다가와야 공부하는 학생과 같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27. '주의하라, 조심하라, 삼가라, 깨어 있으라'는 표현은 다 같은 말이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몇 번이나 이렇게 주의를 주셨는가?

    여섯 번: 반복해서 경고하신다. 34절은 아니다. 큰 고기 뱃속에 들어있는 작은 고기 같으니까!

28. 주인이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36-37)면 자지도 말라는 얘기인가?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는데?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문지기이다(24): 문지기는 항상 깨어 있어서 주인이 오는지 도적이 오는지 살펴야한다. 농사일을 맡은 종이 대문간에 앉아서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린다면 크게 꾸중을 들을 것이다. 문지기는 깨어서 살피고 농사를 맡은 종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주인을 기다리는 자세이다. 환영 준비 잘 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하던 그 일을 잘 하고 있으라는 말이다.

29. 이 주인은 예의도 없나 왜 남이 잠자는 시간에 도둑같이 들이닥치는가?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다. 본인 자신도 언제 돌아올지 모른 채 떠나기 때문이다. 왕권을 받으러 가서 몇 년씩 머물러 있기도 하고 때로는 돌아오지도 못하기도 하고, 돌아온다 해도 지금처럼 정해진 시각에 다니는 교통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대는 낮이 더워서 밤에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30. 종말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가깝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정확한 때는 알지 못한다.

31. 예수님 때부터 종말이라 하면서 정확한 때를 알지 못하게 한 채로 지금까지 종말이 아니다. 누구 놀리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종말이 언제인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살아야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기에 늘 경성하고 깨어 있으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33, 34, 37). 그래서 과거에 핍박과 환란이 있을 때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헷갈리게 말씀하셨을까?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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