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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12(1)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4

마가복음 12(1)장

< 1-12 >

1.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는가? 예수를 잡고자하는 사람들이라는(12) 것은 알겠는데...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11:27):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죽으려고 오셨다. 한 때에는 숨기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셨지만 때가 되매 죽어야 할 장소에 와서 죽음을 자초하고 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들에게 계속해서 도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본 비유는 자신을 잡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2. 이렇게 열심히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타국에 갔다는 것은 당시의 형편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가령, 자신의 지위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서 로마 황제나 다른 유력한 인사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로마에 가서 오랫동안 거주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속자를 죽이는 농부들의 행위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한다고 자기들 소유가 될 수 있을까(7)?

    어느 정도의 가능성은 있었다. 즉, 주인이 타국에서 죽었거나 기존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되레 귀양을 간다거나..., 더구나 타국인이거나 부재지주에 반항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따랐을 수도 있다. 실제로 왕위를 얻으려고 로마로 갔다가 왕의 자리도 빼앗긴 채 귀국도 하지 못한 예가 당시에 있었다.

3. 이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은 누구를 가리는가? 또 세를 내지 않으려는 것 외에 어떤 점이 더 악한가?

    하나님에 대하여 신실하지 못한 유대지도자들(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 악한 농부들처럼 '너희들이 바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들은 예수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예수를 잡으려고 했으나 백성들이 두려워서 참고 있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 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었다.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요 율법에 대해서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요 율법에 대해서 진지하기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런 비난을 받아도 싸다 싸!

    점점 더 악해짐: 처음에는 세를 내지 않으려고 했었다. 종을 거저 보냈다. 욕심이 더 커지자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까지 죽였다.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이유는 물질에, 돈에 눈이 멀어버린 탓이다.

4. 당시에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고 해도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비유이다. 주인이 보낸 종과 아들은 각각 누구를 비유하는가?

    종: 이전의 많은 선지자들과 세례요한,
    아들: 바로 자신

5. 우리가(유대인들도) 보기에는 이 농부들의 행위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농부들이 이런 짓을 버젓이 저질렀다. 그럴 수 있을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일을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에 우리는 흔히 '눈에 뭐가 씌여서 ... ' 라고 한다. 훈수꾼 눈에는 보이는 쉬운 것도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돈에, 욕심에 눈이 멀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매사에 미리 대비해서 생각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연애, 결혼, 직장, 자녀교육, 가치관, 인생관... )

6.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는 주인의 방법은 정상적인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이상한 농부와 이상한 주인, 이상한 아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대적자에게 하시는 이상한 예수. 이야기의 진행과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비유가 바로 그와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인내하는 특징이 있지만 분명하게 끝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7. 이 비유에서 예수는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던져졌음, 최후의 보냄을 받은 자: 보내는 종마다 시체가 되었다는 판에 다녀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어떻게 그대로 순종할 수 있는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했고 결국 죽임을 당해서 포도원 바깥에 내어 당해서 포도원 바깥에 내어 던짐을 당했다.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 했으며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감사 외에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겟네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면서도 끝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그 주님이 얼마나 감사한가!

8. 그래서 심판이 따르는데 실제로 농부가 바뀌어 버린 것은 무엇에 대한 경고인가?

    이스라엘이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등장하는 것: 성경은 우리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하나님의 사랑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무조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말 것이다. 유대인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 포도원을 넘겨받은 사람들이 되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고, 누리자.

9. '건축자가 버린 돌'은 어떤 돌일까?

    전문가의 눈에 쓸모 없는 것: 왜 하나님은 전문가의 뜻을 무시하는가? 전문가가 다른 데 눈이 팔려 제대로 분간치 못하기 때문이다. 건축자는 집 짓는 전문가다. 정상적이라면 전문가가 버린 돌은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가장 요긴한 것)이 되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그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일'이다(11). 예수님은 이 땅에서 별로 존경받지 못했고 볼품도 없었다.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쳤다. 어느 누구도 그가 다시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정말 보잘 것 없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온 세상을 대속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도 이 땅에서는 그리 뛰어난 인물이 아닐 수 있다. 불신자들과 경쟁하면서 출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런 식으로 사느냐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어리석고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때에 그렇다.

< 13-17 >

10.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종교적 권위로 억누르려다가(11:27-33) 완패를 당하고 난 후에 오히려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가로채려는 악한 농부들이라고 비난을 받았다(12:1-12). 종교적인 문제로 이길 수 없으니 어떻게 하나?

    정치적인 문제(납세)로 얽으려는 것이다. 다니엘의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안되니까 종교적으로 박해를 받았다니까 종교적으로 박해를 받았다. 교회사에도 개인적인 원한을 교리적으로 해결해버린 예가 수두룩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얽어서라도 이단으로 몰아버리면 성공하는 것이다. 정정당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주 악질적인 범죄행위다. 더구나 당시에는 로마 총독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민족을 배반하는 범죄행위라고 주장하는 열심당원들이 설치던 시절이었다.

11.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평소에는 원수처럼 여기던 헤롯당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그들의 완악함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어서 외세를 배격하는 애국주의자들이다. 가이사에게 세금내는 것에 비판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면 헤롯당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당의 이름을 참고로 해서 짐작해 보자.

    헤롯당은 정치적인 사람들로 헤롯 가문을 위하여 외세를 등에 업은 사람들이다. 민심에 다소 이반적이지만 세금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매국노인 셈이다. 바리새인들은 세금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무리들이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예수 죽이는 일에 협력하고 있다. 예수님의 답변이 어느 쪽도 거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원수지간이 서로 협력하고 있다.

12.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구성한 정부에서도 세금 문제는 예민하다. 세금을 올린다거나 일부 계층에 많이 거둔다면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는 것이 세금이다. 더군다나 이것을 일선에서 담당하는 세리를 창녀와 같은 죄인으로 취급하던 시절 아닌가? 무엇을 노리고 이 문제를 던지는가?

    '바치라'하면 민심이 떠나갈 것이고, 매국노라고 비난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좋은 구실을 바리새인들에게 주는 셈이다. '바치지 말라'고 하면 반역죄을 지었다는 구실을 헤롯당에게 제공하는 셈이다. 이것을 간파한 예수께서 흑백논리의 틈새를 빠져나오신 것은 기이한 지혜이다(17)

13. 바리새인들의 하수인이 예수님을 묘사하는 14절 말씀은 옳은 말인가 틀린 말인가?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의도가 나쁘다. 대답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막는 말이지 결코 존경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이 어디가 틀렸느냐?'고 고집부릴 일이 아니다. 말이 맞다해도 의도가 나쁘면 잘못된 말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과 악의 문제이다. 악한 말이다. 칭찬할 때 주의해야 한다! 말의 옳고 그름보다 그렇게 말하는 의도가 더 중요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자신들의 말대로 예수를 대접하지 않으면서 하는 말은 외식이다(15).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장사하지 않는다(고후 2:17)고 말한 바울이나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는(요한일서 4:1-2) 사도 요한의 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아첨꾼이나 입에 발린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14. 당시에 인두세는 1년에 1데나리온이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데나리온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폐에 황제의 얼굴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16). 예나 지금이나 화폐에는 반드시 인물 형상이나 그림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과거에는 권력자들의 자기 과시, 근래에는 위폐 방지가 주목적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조차 제2계명 위반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그냥 대답하시면 될텐데 굳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는 말씀은 왜 하셨을까?

    은근하면서도 강력한 반박이다. '너는 데나리온을 왜 갖고 다니니? 세금내려고?' 바리새인의 주머니에서 데나리온이 나왔다면 이미 진 게임이다.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셈이다. 인두세를 거두기 위해서 로마가 발행한 이 화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새삼스럽게 무슨 질문이 더 필요하느냐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이사'로 음역된 말은 일반 책에서 '케사르'라고 음역되었고 영어식 발음으로는 '시이저'이다)

15. '데나리온에 그려진 글과 화상이 가이사의 것'이라는 말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말은 논리적인가?

    아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데나리온에 그려진 글과 화상이 가이사의 것이라도 그 데나리온은 소유한 자의 것이지 가이사의 것이 아니다. 아무런 논리적 상관관계도 없는 말을 이용하여 대적자들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하여 '가이사의 것'이란 말을 하게 하고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표현대로 뱀처럼 지혜로운 분이셨다.

    대학시절에 술 안먹는다고 구박을 더러 받았다. 특히 별나게 구는 친구에게 '금복주 이마에 털이 몇 개인지 아느냐? 술깨나 한다는 자식이 그것도 모르냐?' 이래서 다시는 술 얘기를 못하게 해버렸다. 역시 아무런 논리적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대단히 효과적인 질문이었다(참고로, 금복주는 대구에서 생산되는 소주로, 상표에 등장하는 술꾼의 대머리 한 가운데 네 가닥의 털이 두 개의 반원을 안팎으로 그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지혜도 배우자.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서 이런 지혜를 배워야 한다. 성경은 이런 지혜마저 깨달을 수 있는 지혜의 보고이기도 하다. 정독과 묵상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책이며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16.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면 가이사가 하나님과 대등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하나님? 대등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역이 아닌 가이사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 영역 안에서 일부 위임된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라는 의미일 뿐이다. 국가에 순종하고, 부모나 선생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래서 정당하다. 반항하고 대립하기 전에 순종하는 자세부터 배워야 한다.

< 18-27 >

17.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했다. 이것을 참고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거나 잘못을 지적한 경우는 많이 있어도 사두개인들과 논쟁한 경우가 극히 드문 이유를 설명해보자.

    사두개인들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24): 이단이냐 아니냐를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 하나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느냐의 여부이다.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을 추가하거나 성경의 일부를 제거하는 것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중대한 이단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18.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사두개인들의 생각에 따르면 부활이 있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그런 문제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을까? 조상과 후손의 관계는? 언어는? 살았을 때 가졌던 원한 관계는?

    부활은 현실의 연장이 아닌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고민할 일이 아니다. 공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질적인 변화(가령, 3차원 존재가 4차원 존재로)가 있다면 숫자나 장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천사와 같다는 말은 육체의 모든 소욕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을 지닌 새로운 질서 속에 거하게 된다는 뜻이다. 처음 창조되었던 것보다 더 나은 몸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런 문제 때문에 부활은 없다고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믿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19. 사두개인들의 이 질문은 자신들의 딜레마일까? 바리새인들의 딜레마일까?

    바리새인들의 딜레마: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이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단지 바리새인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좋은 재료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대답에 바리새인들이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히 즐거워하였다(마22:33-34). 우리가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곤란한 이런 질문이 없는가? 선악과? 삼위일체? 예정론?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책망을 받을지도 모른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라고.

20. 사두개인들도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고자 절묘한 질문을 던졌다. 자신들로서는 절묘한 질문이었는데 무슨 책망을 들었는가?

    성경도 알지 못함: 성경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쓰여있지 않는가(출3:6)? 조상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는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전혀 무지함을 드러냄.

21. 사두개인들은 현세적인 귀족층이었다. 이들은 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함으로 하나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활에 대한 말씀도 구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음(시16:10, 욥 19:25, 사 26:19, 단 12:2)에도 굳이 출 3:6을 인용하여 기발한(?) 해석을 시도한 이유가 무엇일까?

    모세의 글이라야 인정하는 사람들이니까: 본래 이 표현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예수님께서 부차적인 의미를 살려서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풀이하셨다.

22.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있다. 성경의 이적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형식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전혀 아니다. 성경의 기적을 자신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부정하거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각색하려는 자들이 그렇다. 동정녀 탄생이나 오병이어의 기적도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발한 설명을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수준이 비슷한 하나님을 만드는 짓'이다.

    바다를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바닷물에 뛰어 들어야 한다. 바다를 물통에 담아서 가져온다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니다. 짜다는 것 외에 무엇을 느끼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세계에 나를 던지지 않고 하나님을 내 머리 속에 집어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지 못한다. 내 머리로 이해되는 것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일뿐이다.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믿는 않는 사두개인들은 결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봉사하면서도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23. 천사와 같다는 말은? 날개가 생긴다는 말인가?

    육체의 모든 소욕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을 지닌 새로운 질서 속에 거하게 된다. 처음 창조되었던 몸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상태일 것이다. 구체적인 형태는 알기 어렵다.

24. 자식없이 죽은 형의 후사를 잇기 위해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것(계대결혼법, 수혼제도)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로서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 어떤 필요가 있었을까?

    대를 잇는다: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간다는 점에서 대를 잇는다는 사상이 이스라엘에게는 특히 중요한 것이었다. 죽은 형제의 가문과 기업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심지어 딸이 대를 잇는 경우까지 있었다. 거절하는 수도 있었다(신25, 룻, 창38).

    과부를 제도적으로 보살핌: 남편도 자녀도 없는 여인이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사회보장적인 성격마저 띠고 있는 제도였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고대의 상황에서 살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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