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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12(2)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5

마가복음 12(2)장


< 28-34 >

25. 예수님은 계속해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 서기관은 어떤 의도로 예수님께 질문했을까?

    한 수 배우려는 것 같다: 답변을 잘 하신 것을 보고(28) 질문했으며, 예수님의 답변에 전적으로 동의하였으며(32), 예수님에게 칭찬을 들었다(34). 고수들의 멋진 한판을 보면서 하수들이 감탄하는 장면 같아 보인다(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이 서기관은 나름대로 실력과 진지함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겠다(참고로,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26. 서기관이 물었는데 대답을 하시면서 왜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용하신 문장의 시작이다(신 6:4-5): 이 문장이 신명기의 인용문이라는 것을 아는 정도면 훌륭하다. 최소한 문맥이 이상하다는 생각 정도는 해야 한다. 그래야 인용문임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27. 예수님의 답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우리에게는 워낙 익숙해서 별 감동이 없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계명 준수에만 온 힘을 기울이던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비슷한 예로, 힐렐이라는 유명한 랍비는 율법 전체를 '네가 싫은 일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온 율법이요 나머지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요약했단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우열이 분명히 드러난다.

28.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248개의 규정과 365개의 금지령이 있었대인들에게는 248개의 규정과 365개의 금지령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들을 한 마디로 예수님처럼 산뜻하게 정리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

    계명의 근본정신보다는 규정에 얽매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계명 하나 하나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계명의 근본정신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우리 나라 형법을 다 알아야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불로소득을 바라지 않으면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다 이룬 셈이다.

29. 십계명을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 정리한다면?

    1-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5-10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제 5 계명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볼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30.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은 서로 다른가?

    계명을 지키는 것에 집착하면 그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할 수가 있다. 그러면 하라는 대로 잘 했음에도 책망을 받을 수 있다. 마음이 앞서고 행위가 따른다면 행위는 사람마다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마음보다는 행위가 앞선다면 전혀 다른 허위나 외식이 될 수도 있다. 가정마다 효도의 모습이나 방법이 다르듯이 행위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3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되는 계명인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본문에 나타나 있다면 무엇일까?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主시라고 믿는 것: 유일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 기본 전제가 되어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니 결국 같은 말인 셈이다.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면 섬길 수 없다.

32. 그냥 이웃을 사랑하라면 좋겠는데 '네 몸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우리가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말해보자.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아프면 쉬어야 하고, 갈증이 나면 음료수를 마셔야 하고... 그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 나? 그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 나름대로 대답을 해보자. 그것이 바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기준이다. '네 몸과 같이' 말은 '네 자신과 같이' 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영역은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이다.

33. 어떤 할머니가 버스에서 차비를 내라는 운전 기사의 요구에 "우리 아버지 차를 타는데 왜 차비를 내?"라고 했다. 그 뒷 얘기는 생략하자. 이 할머니의 신앙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어느 항목에 잘못이 있는가?

    뜻을 다하여: 판단을 올바르게 잘하여 하나님을 섬기란 뜻이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인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욕이 돌아가도록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뜻을 다하는 일이다. 뜻을 다하지 않고 열심만 내는 것을 가리켜 맹신이라고 한다.

34.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세 번이나 잠에 빠졌던 베드로의 경우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면 어느 항목에 가장 문제가 있는가?

    목숨을 다하여(힘을 다하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육체적인 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음을 다하라는 것은 외식이 아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며 목숨을 다하라는 것은 적당히 때우는 것이 아닌 육체적인 최선의 노력을 말하고, 뜻을 다하라는 것은 지적 능력을 다하라는 말이다. 힘을 다하여 라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들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새벽기도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은 이것들 중 어디에 해당할까? 사람따라 어느 한, 두 가지에 집중되는 수도 있겠지만 네 가지에 다 해당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35. 예수님의 답변에 대한 이 서기관의 반응은 감탄에 가까운 동의이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시원하게 풀어준 느낌이다.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마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에 대해서 의혹이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번제물과 기타 제물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행위에 대하여 이것이 옳은 것이 아닐텐데(삼상 15:22, 사 1:11, 호 6:6, 말 1:8):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제물로 드리는 생축이 눈이 멀었건 찢겼건 간에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식의 제사와 제물에 대하여 이게 아닌데 하는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선지자들의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풍토에서 이런 고민을 한다거나 고쳐보려는 노력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교회 내에서도 많이 생각한 끝에 바뀌어져야 한다고 확신을 가지고 바꾸려고 노력해 보라. 작은 변화 하나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해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헌금궤를 쓰느냐, 헌금주머니를 돌리느냐... 따위 말이다. 이런 사소한 일도 어려운데 하물며 번제와 제물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발언이다.

< 35-37 >

36. 36절의 '주', '내', '내 주', '내가'는 각각 누구인가?

    주: 여호와, 내: 다윗, 내 주: 아도나이(메시야), 내가: 여호와

37.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이다: 예수님 자신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을 거부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도 거부하지 않았다. 다만,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독점적인 권리를 가진 것처럼 으시대던 서기관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교정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아니다: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 다윗의 영광을 되찾을 분, 즉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란 뜻이다. 자신들만을 위한 메시야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개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다윗의 가문에 종속되지 아니한 온 인류의 메시아이다.

    복음을 받은 우리도 이 서기관들처럼 복음이 오직 우리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이것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38. 백성이 왜 즐거운가?

    평소에 많이 답답했다가 확 뚫리는 느낌이 들었을 것: 다윗의 자손 메시야는 어쩌면 특권계층만을 위한 메시야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뻐기고 있었을 것이다. 복음을 나 자신, 혹은 우리 만의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기억하고 나누어야 한다.

< 38-44 >

39. 왜 어떤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시는가?

    1)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 제사장 복장과 비슷하게 표나는 옷(티를 내는 것)
    2)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일부러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다니는 모양이다.
    3) 상석(상좌)을 원하는 것: 높임을 받고 싶은 자

40. 이들의 이런 행위에 공통점이 있다면?

    사람을 의식한 행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사람의 평가와 사람의 대접을 좋아하고 사람들에 의해서 높임을 받기를 좋아하였다. 반면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으로 살았다. 죽은 후에 기념비를 세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이야기가 드러나는 것조차 극히 꺼렸다. 우리도 열심이 있고 능력이 좀 있다고 생각할 때 서기관들과 같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잘 믿는다고 티를 내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살아야한다. 열심히 새벽기도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전도하고, 봉사해도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41. 종교적 열심과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일이 동시에 가능할까?

    이원론적 사고방식, 하나님의 영역을 일정한 틀 속에만 한정시키는 경우에는 가능하다. '신앙따로 생활따로'가 가능한 것이 바로 그런 예이다. 따로 될 수 없는 것이 따로 된다는 것은 그것이 거짓이란 말이다.

42. 어떤 경우에 우리에게도 이런 위험성이 있을까?

    남보다 열심이 있고 능력이 좀 있다고 생각할 때: 전혀 무능하면 이런 일을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열심도 능력도 다 버리란 말이 아니라 그런 열심과 능력을 지혜롭게 잘 사용하라는 말이다. 남보다 잘 믿는다고 티를 내지 말고!

43. 이런 서기관들의 잘못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명예욕과 재물욕: 둘 다 취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둘 다 잘 다루는 신앙인을 정말로 존경해야 한다.

44. 율법학자요, 주로 기록이나, 계산을 전문으로 하는 서기관들이 어떤 방식으로 문으로 하는 서기관들이 어떤 방식으로 과부의 가산을 삼켰을까?

    하나님께 바친 것을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는 것 아닐까? 예수님 당시의 과부란 고아와 마찬가지로 가장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였다. 그러니 힘으로 빼앗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힘들게, 극히 적은 헌금을 했는데 이것을 자신의 것처럼 여겼을 것이다. 교회의 헌금은 성도들의 피와 땀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이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낭비를 하거나 자기 뜻대로 함부로 사용한다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45. 가난한(실제로는 극빈자라는 뜻) 과부는 정말 적게 헌금했는가? 한 렙돈이 아니고 두 렙돈이잖아?

    현재의 헌금함에서는 동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현재의 화폐 가치를 따질 때 동전은 헌금의 단위로는 너무 적은 셈이다. 그런데 정말로 가난하여 동전으로 헌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보자. 100원 짜리 한 개는 너무나 작다고 생각해서 그나마 두 개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가슴 아픈 일이다. 렙돈이라는 단위가 그럴 정도로 작은 것이다. 렙돈은 하루 일당의 1/128에 해당한다. 정말 작은 돈이었지만 가난한 과부에게는 그나마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다. 빵 한 조각으로 허기라도 면할 수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46.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로마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설명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나라 100원 짜리 두 개는 일본 동전으로 1엔이다'는 식이다. 렙돈은 헬라동전의 명칭이고 고드란트는 로마동전의 명칭이다.

47. 부자가 칭찬을 들으려면 생활비 전부를 넣어야 하는가?

    과부를 칭찬하려는 것이지 생활비를 다 넣으라는 말이나 부자를 비난하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섭섭한 부자가 있었을까? 그러면 부자 그만두고 과부처럼 살지? 제대로 하나님을 아는 부자라면 예수님께서 과부에게 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 잘 하는 아들과 공부를 못하는 아들이 있는데 공부를 못하는 아들이 어느날 좋은 점수를 받아와서 아버지가 크게 칭찬을 했다. 좋은 점수라고 해봐야 잘 하는 아들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것인데... 이럴 때 이 아들이 '나는 그보다 훨씬 잘 하는데 칭찬도 않고...?' 한다면 잘못인 것과 같다.

    별로 칭찬받을만 하지도 않은 일을 칭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가져야 한다. 집나가서 재물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환영하는 아버지가 꼭 착한 맏이의 눈치를 봐야 되나? 가난한 과부가 그 어려운 중에서도 빈손으로 나오지 아니한 그 마음을 칭찬하시는 것이지 누구나 재산을 다 갖다 바쳐야 한다거나 부자들을 책망하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48. 이 과부는 왜 생활비를 전부 다 넣었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희생이 아닐 수도 있다. 조금 있는 것을 다 주는 것보다 많이 있는 데서 많이 주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고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다. 과부의 헌금은 부자가 생활비 전부를 바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쉬운 일이다. 그것을 소중한 것으로 평가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더욱 고마운 것이다. 우리가 전심으로 헌신하고 애써도 우리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그리 가치가 있을까? 그렇게 보아주시는 하나님이 고마운 것이지, 내 노력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것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의 믿음이 구원을 이룰 만큼 대단한 것이 전혀 아니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려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무슨 그럴싸한 건덕지 하나를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선행이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정말 별 것 아닌 것을 귀한 것으로 여겨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며 우리의 예배와 기도와 찬송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코흘리개 아이가 자기가 먹던 과자 부스러기를 아빠 입에도 쑤셔 넣을 때 그걸 받아먹는 아버지의 행복을 생각해보라. 과자 부스러기는 아무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이 주면 더럽다고 피할 것이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코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면서 기뻐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으로 연보하는 이 과부의 마음도 소중하지만 그 행위와 마음을 기쁘시게 받아주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더욱 감사를 드려야 한다.

49. 가난한 과부의 전 생활비와 부자의 전 생활비는 어느 쪽이 더 가치 있을까?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뜻이지 실제로 가치는 당연히 부자의 전생활비다: 두 사람의 수준에 맞도록 다른 사람이 도우려면 과부의 생활비를 대는 것은 쉬운 일이다. 비록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드렸지만 누군가가 딱한 사정을 알고 도우려면 간단하게 도울 수 있는 일이다. 워낙 적은 액수이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다시 채울 수도 있다. 만약 부자가 전 재산을 연보궤에 넣었다면 아무도 이것을 채워주거나 그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드린다면 부자의 헌금이 훨씬 더 요긴하고 유용하다.

    어떤 교회에는 재력있는 분들이 있어서 웬만한 일은 혼자서 다 해결해 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과부가 드린 연보를 모아서 큰 일을 한번 하려면 노력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 것이다. 하나님이 어느 것을 더 기뻐하실까? 작은 헌금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일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신다. 교회를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능력이 없으면 몇몇이 마음을 맞추면 어떨까? 그것도 어려우면 일이 있거나 필요가 있을 때 목적헌금을 하면 어떨까요? 가령, 수재민을 도와야 할 필요가 있다면 '수재민 돕기 헌금'을 하면 되고, 교회에 뭔가 필요한 것이 있기는 한데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을 구입하는데 보태주세요' 이런 식으로 헌금을 하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여지는 헌금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운 헌금 아닐까? 능력이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도록 노력하자.

50.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애초에 비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역전(?) 현상이 생기는가?

    하나님은 재물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무엇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연보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동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

    어느 친구가 어릴 때 너무나 가난해서 주일날 연보할 수 없어서 약속어음을 끊었더랍니다. 종이에 금액을 적고 '나중에 커서 꼭 갚겠습니다' 라고 써서 헌금주머니에 넣었는데 선생님이 주인공을 찾아내서 장난쳤다고 야단을 몹시 쳤답니다. 어릴 적 그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더군요. 어린 아이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어린 친구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음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 예물보다 먼저 마음을 드려야 한다. 이 과부가 칭찬을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 내세울 것이 없는 가난한 마음 때문이었다.

51. 이 과부에 대한 칭찬은 동시에 서기관들에 대한 책망이 될 수 있다. 서기관들과 비교해 보자.

    서기관들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나 속이 비어있지만 과부는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하나 그 중심이 하나님께 겸손하다. 신앙의 핵심은 풍부한 외양과 화려한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중심과 순수한 본질에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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