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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11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4

마가복음 11장


1.
왜 하필 말이 아니고 나귀를 타시는가? 그것도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를? 가장 비슷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평화의 왕(슥9:9)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겸손과 평화의 상징이다: 새끼가 휘청거리지는 않았을까? 사람을 태울 줄이나 알까? 아마 다 큰 어른이 아이들 세발 자전거를 타는 모습과 닮지 않았을까?

2.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개선장군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왕의 입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권위나 위엄, 힘대신 겸손과 온유, 온화함으로 오셨다: 우리는 나귀타신 예수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섬김과 자신을 주는 것이 힘으로 싸워 이기는 것보다 강하다.

3. 예수님 자신이 은연 중에 메시야임을 드러내고 있다면?

    나귀 새끼가 있음과 주인이 허락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고 계신 점,
    자신을 가리켜 주(主)라고 한 점(다른 곳에는 전혀 없음)

4. 자신이 메시야임을 전에는 비밀로 하시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드러내시는가?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때가 있고, 그 때에 맞추어서 일을 하셨다. 때가 아니면 자신이 메시야임도 숨기셨다. 때가 아니면 물러가서 숨기도 하셨다. 매사에 무조건 용감한 것만이 지혜가 아니다.

5. 예수님께서 예지(豫知)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러한 능력을 왜 어려운 때에 사용하지 않았을까? 십자가의 고난을 피해 가는 길도 알고 계셨을 텐데...

    십자가의 길은 알고 가신 길이다: 능력이 있다고 아무 때나 마구 쓰신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셨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을 때에는 보여주시지 않았다. 능력을 가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어떤 경우에 사용했으며 어떤 때에 사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신의 안일함과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만 사용하셨다. 우리에게 있는 어떤 능력도,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하는 판단력과 통제력이다.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이 바로 이런 판단력과 통제력의 부재에서 나온다. 대형 유조선의 기름 유출사건이나, 잠수함, 혹은 원자력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그런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6. 예루살렘을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의 환호이었으니 예수님은 얼마나 흥분되었을까?

    몹시 외로웠을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환호하는 이 무리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발적인 준비와 예우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은 말타고 권세를 휘두르는 정치적인 왕을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은 십자가 질 준비를 하고 있는데...

7. 겉옷과 나뭇가지를 까는 것은 왕과 메시야로 대우하는 것이다. 며칠 뒤의 일이지만 이렇게 열렬했던 환호가 왜 순식간에 변해버렸을까?

    우선 기대하는 바가 달랐다.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흥분을 일으키는 순간적인 감정이 곧 신앙인 것은 아니다: 뜨거움이 없다고 너무 기죽지 말 일이다. 연예인들이 열렬한 팬들의 환호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 환호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약에 빠져드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한다. 사람의 감정을 너무 믿지는 말아야 한다. 감정은 일을 추진하는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지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냉철한 이성이다. 자동차의 셀모터(구동모터)와 엔진과 같은 관계일 것이다. 연애시절의 그 뜨거움도 3년은 간단다.

8. 성전청결 사건은 무화과나무가 마른 기사의 가운데 들어있다. 의도적으로 가운데 두었을까? 일정에 따른 기록일까?

    둘 다 가능성이 있다. 일정에 따른 것이지만 별개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순서를 바꿀 수도 있을 텐데 그대로 기록한 것은 무화과나무가 마른 일과 성전청결사건이 관련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9. 예지의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이 무화과 열매가 있고 없음도 모른단 말인가? 더구나 무화과 열매가 있을 때도 아닌데?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일으키셨다고 보아야 한다: 제자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런 행동을 보인 적이 전혀 없다. 수가성 우물 가에서 제자들이 음식을 들고 왔을 때에도 그것을 근거로 말씀을 전하시던 분이시다. 성전이 더 이상 성전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려고 의도적으로 하신 일이다.

10. 무화과나무에게 입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아들이지 이치에 닿지 않는 이런 일을 해도 된단 말인가?: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목숨을 내놓으라시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억울합니다. 왜 하필이면 내 목숨을?

    귀한 일에 쓰임 받음을 기뻐했을 것이다: 만물의 창조는 인간을 중심으로 되었고 식물도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 식물이 사람의 교육을 위하여 마를 수 있다. 피조물이 사람과 동등한 가치를 부여받거나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도 잘못이며 반대로 자연을 학대하는 것도 잘못이다. 무화과나무가 제자들의 교육에 요긴하게 쓰임 받음을 기뻐했을 것이다. '오 주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해 주옵소서'라는 고백과 비교해 보라. 앞에서 나귀새끼도 '주가 쓰시겠다'해서 쓴 것이다. 무화과나무도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쓰신 것이다. 굳이 무슨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11.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이 우연이 아니라 고의적이라는 마른 것이 우연이 아니라 고의적이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제철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13). 다음 두 가지 견해를 비교해 보자.

    1) 제철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열매는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이치에 어긋난 일을 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어쨌든 나무에게 약간의 잘못이라도 찾아내려는 생각에서 나온 주장이다.

    2) 제철도 아니므로 열매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이다. 나무의 잘, 잘못과 관계없이 예수님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고의적이라면 무슨 의도인가? 잎만 무성하고 본질에서 벗어난 성전 곧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한 저주인 동시에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이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12. 무화과나무와 성전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

    본래의 사명과 동떨어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와 하나님없는 성전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무서운 경고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하나님없는 교회가 있을까? 어떤 분이 '목사의 부정을 덮거나 옹호하는 교회는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는데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회라면 당연한 일이다.

13. 성전 청결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상대한 자들은 1) 매매하는 자들, 2) 돈 바꾸는 자들, 3) 비둘기 파는 자, 4)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을 지나다니는 자들 (전대, 지팡이, 신 등을 지니고 지름길로 사용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들은 조무래기들이다. 실제로는 누구와 상대로 싸우고 있는가?

    대제사장: 이들은 대제사장의 허가를 받아서 영리에 임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대제사장에 대한 도전이다. 죽음을 부르는 행위이다.

14. 예수님의 모습은 다음 중 어떤 타입이었을까? 얌전한 샌님, 독립투사, 인자한 아저씨, 엄한 선생님, 나약한 청년, 가족을 돌보지 않은 운동권 청년?

    모든 모습을 다 지니고 계셨다. 이 중에 어느 한 부분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15. 믿고 기도하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데 아직도 그 산(아마 감람산)이 그대로 있다는 말은 아무도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일까?

    그 말을 듣고 산을 옮기려고 기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산을 옮긴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관용어이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식으로 표현한다면 '믿고 기도한다면 해가 서쪽에서 뜨라고 해도 이루어질 것이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말씀은 기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기도의 문제가 아니다.

16. 기도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고난을 당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병으로 죽거나 가난한자 왜 생기는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가? 믿지 않아서 그런가?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별 능력도 없는 아버지가 아들을 칭찬하느라고 '무엇이든지 소원대로 다 해주겠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그 부자간에는 말이 된다. 그것을 아주 사리에 맞게 말한다고 어린 아들에게 '네게 유익하고, 위험하지 않으며, 아버지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무엇이든 소원을 말해 보아라. 다 들어줄게' 이러면 오히려 더 어색하다. 어린아이같은 믿음을 가진 제자들(기도에 관한한 초보자들)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17. 사이비 교주들이 좋아할 구절은 무엇일까?

    23절: 믿지 않으니까 안되는 거지! 자기 무능력의 방패막이로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없을 것이다.

18.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좋아서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오래 참으면 스트레스가 돼서 병이 된다. 그래서 화를 참지 말고 터뜨리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화를 참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모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에 따른 감사가 전제된 용서라야 진정한 용서가 된다.

19. 예수께서는 유월절을 맞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오셔서 성전청결 사건 외에는 별 다른 일을 하시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매일 성전에 출퇴근하시는데(11, 12, 19, 20, 27)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을 리는 없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말하는 '이런 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28)? 참고로 예수님께서 체포되는 일은 14장에 가야 나온다.

    성전청결은 단회적이었겠지만 주로 가르치는 일을 하셨는데 이것은 날마다 성전에서 계속하는 일이었다. 뒷장에 이어지는 많은 교훈들이 이 때 성전에서 제자들과 사람들을 가르친 내용의 일부이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웬 촌놈이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성질이 났을까? '걸어다니실 때'라는 말은 가르치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이동하는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20.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나아왔다. 이들을 한꺼번에 지칭하는 표현이 있을까? 적절한 현대식 표현으로 말하면 어떻게 될까?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이다. 대표로 찾아왔을 테니까 요즘말로 하면 '전권위원'이나 '대책위'라고 할까? 자신들의 안방을 연일 휘젓고 다니고 있으니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심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대표를 파견한 것이다.

21.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백성들이다(32). 진짜 두려워 해야 할 분은 누구인데?

    하나님이어야 한다: 마땅히 백성들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백성들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능력있는 지도자의 등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는 교인들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이것은 별개의 질문이 아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교인의 눈치를 보는 것이나 교인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것은 둘 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아니다.

22. 이들이 묻는 것은 성전청결과 가르침에 대한 자격에 관한 것이다. 자격증도 없는 예수가 떠들고 다니는 것도 보기 싫은데 사람은 구름떼같이 모이고... 제법 예의를 갖춘모이고... 제법 예의를 갖춘 것 같기도 하지만 백성이 무서운 탓이다. 무슨 대답을 예상하고 물었을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라는 답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면 참람하다고 고소할 작정이다.

23. 진정한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예수의 권위와 이들의 권위에 대해서 비교해 보자.

    예수의 권위는 능력있는 말씀의 선포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들의 권위는 당시의 제도에 따른 것이다: 제도적 권위는 갖추었지만 능력은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은 비극이다. 허준이와 유도치가 바로 그런 경우 아닐까? 제대로 능력을 갖추려면 무엇이 참인지에 대하여 민감하여야 한다.

    권위가 진실에 근거하고 있을 때는 무조건 따르는 것이 복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잘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권위와 권위주의자는 분간해야 한다. 목사가 성경공부하자고 하면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집사가 성경공부하자면 많은 성도가 찾아온다.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목사의 입장과 집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24. 그들이 궁지에 몰린 이유가 무엇인가?

    진실을 애써 부인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세례요한을 인정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예수의 권위를 인정해야 했다. 그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럴 수는 없었다. 실력없는 목회자가 뛰어난 평신도에게 함부로 일을 맡기지 못하는 두려움이나 마찬가지다. 그럴수록 교권이나 제도적인 권위에 더 의존하면서 스스로 무덤을 판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따르지는 않았다. 진리냐 비진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득권 수호가 최대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25. 예수님은 결국 이들에게 체포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아직 며칠 더 남았다. 그러면 아무리 교묘한 질문이라도 꼬투리 잡히지 않고 빠져나간다. 이것도 능력이다. 어떤 방법으로 빠져나갔는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백성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서: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예수는 지혜로운 분이셨다. 상대방의 속을 꿰뚫고 계시는 분이셨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라고 말씀하신 대로 대적들의 공격을 지혜롭게 비켜 나갔다. 성도들이 순교해야 할 때도 있지만 지혜로 싸울 때도 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싸워야 할 때는 지혜로 싸워야 한다.

26.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 의하여 하늘로서 온 것임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다. 하필이면 이 때 예수께서 세례요한을 들어서 그들의 입을 막으셨을까?

    그가 예비한 그 길을 따라 예수도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분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불렸다. 세례요한이 닦아둔 그 길을 예수님이 가셨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걸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자.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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