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10(2)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4

마가복음 10(2)장


< 23-31 >

22. 부자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제자들이 거듭 놀라는(24, 26)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재물이 있는 자도 못 들어가면 없는 사람은 더욱 어려운 것 아닌가?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재산이 많은 것을 복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더 가까운 자라고 믿는다. 하나님께 복을 더 많이 받은 사람도 들어갈 수 없다면 누가 들어가겠느냐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당시에나 그 후에도 상당한 기간동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종교개혁 때에 다시 이 말이 등장하는 것은 그 이전, 중세 때에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제자들도 놀랄 수밖에! 그들에게는 이렇게 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다면 그것은 너무나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 있다는 뜻이다.

22.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면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구원의 필수 조건인가?

    구원이 그런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27a)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 가능한 것(27b-c)이기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구원을 위해서는 전재산을 헌납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억지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부자나 제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가?' 즉, 인간의 노력에 관심이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은 하나님이 가능케 하시는 것,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란 말이다.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씀과 같다.

23. 튀는 발언으로 책망을 받는데 이골이 난 사람이 베드로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는 베드로의 이 말은 책망거리가 안될까?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당연히 책망받을 말이다; 부자나 제자들의 한결같은 생각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저는 이만큼 했는데요' 하는 말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는데 이런 소리를 하면 책망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의 답변; 100배의 보상이 있을 것이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핵심은 그 뒤에 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1)' 그만큼 많은 것을 버렸으니 그만큼 많이 받게 될 것이라고 들뜨지 말고 나중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24. 난외주에 보면 29절 끝의 '[아비나] 아래에 [아내나]'가 있단다. 버린 것에 대하여 백배의 복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제일 먼저 버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다수결로 결정해 보자)

    아마 남자들은 아내를 제일 먼저 버리지 않을까? (아래 질문을 참고해야 한다)

25. 이 복이 문자 그대로 백배의 복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베드로의 생애에서 찾는다면 무엇인가? (본문에는 없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지만 정말 문자 그대로 백배를 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심한 고난을 받은 셈이다. 베드로가 버린 것은 물질이었고 그가 받은 것은 영적인 복이다. 아무리 많은 물질도 영적인 복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결국 이 말씀은 믿는 자가 누리게되는 참된 기쁨과 복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약 어부인 베드로가 배를 한척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면 그는 100척이나 배를 거느린 대선주가 되어야 한다. 그가 예수의 수제자가 되어 '제대로 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과 비교해 보라.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26. 버려도 잘 버려야 한다. 자신의 명예를 위하거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버리는 것은 결격사유에 해당한다. 무엇을 위해서 버려야 효력이 있는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29);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 중에도 목적이 불순한 경우는 적지 않다. 불신자들에게 욕을 먹어도 진짜 그리스도인다워서 욕을 먹는지 이기적인 자기 욕심 때문에 욕을 먹는지 잘 분간해야 한다. 핍박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경우도 잘 살펴보면 자신이 어리석어서 그렇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

27. 버려도 백배를 받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비; 버리는 대상에는 있지만 보상의 대상에는 언급이 없다. 아비를 백배로 주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백배라는 문자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풍성한 상급'을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8. 베드로는 신이 난 것 같다. 아마 얻을 것이 많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일까?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 먼저 왔다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는 실족할 우려가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음에 대한 감사만 있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남들과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 눈에는 하나님만 보여야지, 나 자신의 한 일과 다른 사람의 일이 보여서는 안된다.

29. 예수님의 말씀은 100배의 보상을 받으려면 재산과 모든 가족을 버리라는 말인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29)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 다른 본문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족 관계를 소홀히 하라고 한 적이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지 고의로 버리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 32-45 >

30. 유월절은 유대인의 최고 명절이다. 명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진이 어떤 분위기인가?

    예수님이 앞장서고(결연한 모습?) 제자들은 놀라고, 무리들은 두려움에 쌓여 있다. 순례자들이 예견되는 예수님의 고난을 알고 그런가(32-34)?

31. 이전에도 두 번이나 수난을 예고했는데(8:31, 9:31)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길래 이렇게 두려워하고 놀라는 걸까?

    수난의 시기(유월절)와 장소(예루살렘)가 구체화되었으니 더 실감이 나는 모양이다; 다음에 여리고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현재 여리고에 가까이 왔다면 예루살렘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며 유월절도 얼마 남지 않았다.

32. 예수님께서 당하실 수난의 내용은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는 것,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이는 것' 들이다(33-34). 예수님께서 굳이 이런 수난을 겪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1) 인간 편에서, 예수님 편에서, 하나님 편에서 이유를 찾아보자. 2) 또, 수난이 수난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인간 편에서 본다면 우리의 처지가 워낙 불쌍하기 때문이다. 고맙긴 하지만 요구하거나 희망을 가져볼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예수님 자신도 마찬가지다.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굳이 있다면 아버지의 원하심 때문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사랑할 가치도 없는 인생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감사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사랑이다. 하나님에게 만약 친구가 있다면 이 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2)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날 능력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죽음인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로지 십자가와 부활만 전했다. 지금도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피와 그 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부활의 소망이 바로 우리 삶의 원동력이다.

33. 지금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앞둔 결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에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제자들에게 한 마디 충고를 해준다면?

    야고보와 요한; 변화산이나 야이로의 딸을 고칠 때 함께 했으므로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을 꼭 드려야 하는데' 라고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면 다른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사람은 묘하게도 자기가 아는 대로 듣고, 듣고 싶은 대로 들리기도 한다. 지금 예수님의 수난 얘기는 들어도 들리지 않는 상황이다.

    다른 제자들; 마찬가지로 분히 여겼다.

    야, 지금이 그런 말을 할 때냐? 하더라도 분위기를 봐가면서 해야지? 그러면 결국 나도 같은 놈이다.

34. 야고보와 요한이 요구한 것은 '주의 영광 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대답하셨다. 주님은 영광은커녕 수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을 야고보와 요한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정말 몰랐던 1) 주의 우편과 좌편은 누구의 자리이며 2) 예수의 잔과 세례는 무엇인가?

    1) 강도들; 이런 자리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임금님이 될 줄로만 알았다. 이들은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밝혀주는 역할이다. 죄없이도 마땅히 죽어야 할 자처럼 죽었음을 보여주는 배경인 셈이다.

    2) 인류를 위한 수난; 알았더라면 할 수 있다고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는 말은 '두 강도의 자리라도 괜찮으냐?'는 말인데 할 수 있다고 했으니 해야지. 뜻도 모르고 대답을 했지만 이 두 사람은 결국은 자의로 그 길을 갔다. 한 사람은 일찍 예루살렘에서 순교하고 한 사람은 끝까지 남아서 교회를 돌아보았다.

35.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는 우리의 기도와 많이 닮았다. 이 기도와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의 특징은 무엇인가?

    택도 없는 소리를 뜻도 모르고 함

    예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 요구한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적어도 왕이 될 것이라고 왕의 좌우편을 요구했지만 어쩌랴 예수님의 좌우편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인 걸, 결국 이 두 제자는 그 길을 충실하게 따랐다. 자신들의 요구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획하심과 원하심대로 이루어졌다. 그게 그들의 복이다.

36. 죄를 범하면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인류가 죄를 범했으니 누가 죽어도 죽어야 한다. 죄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대신해서라도 누군가 죽어야만 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해낼 능력이 없으므로 대신 죽을 수 있는 분은 인간이 아닌 자신의 독생자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        )이라고 했다.

    대속물(45)

37.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본문은 어떤 종류가 있다고 하는가? 각 방식의 장, 단점도 생각해보자.

    1) 집권자나 대인들처럼 권세를 부리는 재미로 산다; 장점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더 차원높은 재미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한, 가장 재미있는 것이다. 단점은 권세를 잃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한창 펄펄 뛰는 나이에 은퇴하신 분들도 은퇴하고 나면 금방 늙어버린다. 하늘을 찌를듯한 권세를 누리던 자도 권좌에서 물러나면 볼품없이 시들어 버린다.

    2)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세로 산다; 권력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섬기는 삶이다. 힘은 들지만 이게 더 차원 높은 재미가 있다. 진정한 평안과 사라지지 않는 기쁨은 섬기는 삶이어야 가능하다. 스트레스는 전혀 없는 삶이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그 근거는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이다.

38. 인류의 모든 고난은 사탄의 유혹에 따라 하나님만큼 높아지려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이것을 회복시키려면 낮아지는 과정이 필수이겠는데 낮아지는 과정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독생자가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다.

< 46-52 >

39.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나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목적지가 여리고가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곳이란 뜻이다; 가령, 동쪽으로 들어와서 서쪽으로 나가는 경우처럼 말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목표이니 여리고는 지나가는 길목이다.

40. 바디매오의 훌륭한 점이 있다면?

    1) 나사렛 예수(인간)란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메시야로 인정)이라고 부른 점; 다른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가르쳐 주었는데 왜 그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나? 이게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여러 표현 중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왕으로 오시는 이', 즉 그리스도라는 뜻이다(마 21:15, 행 13:22-23). 소경거지가 어떻게 이것을 알았을까?

    2) 주위에서 뭐라하든 소리를 질러댄 적극성;

    3) 부름에 적극적인 응답; 내어버린 겉옷은 옷이며, 침구(소경에게는 전재산일 수도)이다. 직장(길 가)까지 버리고 뛰어 왔다. 거지에게 길목이 얼마나 중요한 직장이라고!

41. 소경 바디매오는 이미 체념하며 살지 않았을까? 무엇을 더 바라며 무슨 소망이 있었겠는가? 그저 그날 하루 먹고 살만하면 감사하지 않았을까? '바-디매오'는 자신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타는 소망이 있었다. 이 뜨거운 열망이 그로 하여금 열정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결과는?

    보게 되어 예수를 좇으니라; 가진 소망이나 열정이 엄청난 복으로 화해버렸다.

42. 예수님께서 소경거지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몰라서 묻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알면서 왜 물을까?

    자신의 소원을 자신의 입으로 말해 보라 = 인격적인 교제를 위함이다; 아무 말씀도 없이 멀리서 말없이 고쳐주셨다면 고침을 받아서 기쁘기는 하겠지만 감사의 말도 한 마디 못하고 그저 던져주는 은혜의 부스러기를 얻은 기분 아닐까? 바디매오를 한 인격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시는데(마 6:8)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이든 기도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복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무슨 답답한 게 그리 많아서 새벽 미명에 기도를 열심히 했을까(막 1:35)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나누셨던 것이다.

43. 제자들과 바디매오를 비교하면 누가 더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는가?

    바디매오; 겉으로 보기에는 제자들이 못나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결코 바디매오보다 못하지 않다. 결국 제자들은 남아도 바디매오는 떠난다. 열심있는 초신자와 미적지근한 구신자(?)를 비교해보면 오래 믿었다는 사람이 믿는 건지 안 믿는 것인지 분간도 어려울 때가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구신자가 너무 기죽지는 말아야 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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