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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10(1)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4

마가복음 1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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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하는 것은 무엇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함정을 파려는 것이다. 이전에는 주로 안식일 문제와, 손 씻는 정결례에 관한 것으로 시험했는데 여기서는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다. 바리새인들의 이 질문이 어떻게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지 이 지방(유대 지경)과 관련지어 보자.

    이 지역은 헤롯의 관할이다. 헤롯이 본 부인을 버리고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것을 염두에 둔 질문이다. 세례 요한이 이 문제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답변 내용을 짐작하고 물었을 것이다.

2. 모세는 왜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고 내어 보내라고 했을까? 예수님의 의도와 일치하려면 다음 구절의 어디에 강조점을 두면 될까? 바리새인들은 '내어 보낼'에 강조를 두었다. 이혼 증서는 어디에 소용되는 것이었을까?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신 24:1-2)

    써서 주고: 이혼증서의 용도는 이 여자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을 때 그것이 정당한 결혼임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 남편이 부정한 여자라고 고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도로 증서를 써 주라는 것이지 버리라는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법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서 악용한 것이다.

3. 이혼 증서를 써서 주고 아내를 내어보내는 것이 본래의 의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모세가 이런 법을 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에(5): 여성 보호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양보인 셈이다. 유일하게 사람 때문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거나 양보하시는 수가 있다. 특별히 만든 인간 때문에 하나님께서 힘들어하셨다.

4. 바리새인들은 사고의 근거가 모세의 율법이었다. 그래서 율법의 예외조항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이혼을 했는데 예수님은 어디에 근거해서 이혼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하나님의 법, 창조 시의 원리: 우리 신앙의 원리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고 요약한 것은 정말 멋지다. 이 순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 말씀대로 산다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인 경우가 적지 않다.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율법대로 한다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듯이.

5. 결혼의 원리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라'는 것이다. 대가족 제도를 부정하는 말인가? 부모가 소중한가 아내가 소중한가?

    이 말씀이 부모에 대한 봉양이나 섬김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부부관계가 더 소중한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부모를 잘 섬기며 공경해야 하지만 그 전에 부모와의 관계보다는 부부의 관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부부가 하나가 되는데 장애가 된다면 반드시 부모를 떠나야 한다. 그렇게 하나가 된 상태로 부모를 섬겨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자기희생과 사랑과 인내로! 결혼 전보다 더 노력해야한다. 절대적인 사랑과 무조건적인 순종으로(엡 5:22-33) 이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삼위일체라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체험할 수 있는 복을 누릴 것이다.

6. 제자들은 왜 집에서 또 묻는가?

    제자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 13-16 >:

7.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데려오는데 제자들이 왜 꾸짖었을까?

    선생님을 좀 쉬게 해야지, 어른들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니까: 동기는 선했을지라도 무식한 경우에 해당하는 셈이다.

8. 어린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을 꾸짖은 왜 잘못인가? 요즈음은 그런 현상이 없는가?

    어린 아이의 중요성에 대해서 며칠 전에 가르쳐 준 것을 잊어먹은 죄(9:36-42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느니 연자맷돌을.....)

    전도 시상 때에 보면 주일학교 아이들을 전도한 것은 계산에서 빠져있는 경우가 더러 있고, 전도집회에서 '학생들은 나중에 오너라'면서 출입을 막는 것이나, 구역예배에 아이들을 빼는 따위...

9. 다음 표현과 대조적이면서 우리나라 떠돌이 약장수들이 많이 사용한 표현은 무엇인가?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14)
    애들은 가라!: 약장수는 돈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는 남녀노소를 가릴 수 없다.

10. 15절의 '어린아이와 같이'는 목적어인가, 주어인가?

    주어: 만약 목적어로 해석하면 어린아이들이 당시에 떠받들어진 존재가 된다. 현재는 그럴 수 있지만 조금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 전적인 신뢰를 본받으라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에 입학 시험이 있다면 무슨 과목일까? 믿음이다. 이 과목에 높은 점수는 어린 아이들이 받는다. 닳아빠진 어른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어린애가 무엇을 알겠나'하는 생각이 우리에게 있다.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다(어린아이에게 구원은 없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예수님은 이것을 뒤엎었다.

11. '축복'이라는 말은 '복을 빈다'는 뜻이다. 즉, '내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이 복을 내려주기를 빌어준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표현은 잘못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표현은 옳은가?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는 예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비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누구에게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이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한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섬기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자신의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셨으므로 가능하다. 말하자면 특수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계신 예수님께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 17-22 >:

12. 그리스도인들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야 하지 않는가? 특히 앞장서야할 목사님들이 재산을 가지거나 저금을 해도 되나?

    아끼고 저축하는 것이 옳다: 이 청년에게 주신 답이 일반적인 경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결론을 내야 한다. 재물은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다. 긍정적인 면은 신 8:18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구절을 위시하여 많이 있다. 재물의 복도 분명히 복이다. 부정적인 면이 많은 것은 재물을 하나님이나,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욕심을 부릴 가능성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성경이 재물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재물 자체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13. 여려분은 이 사람의 어떤 점에 호감이 가는가?

    부자라는 점: 이재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이게 가장 먼저 눈에 뜨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런 면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서 많은 재물을 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잘 사용하는 능력도 길러야 하고.

    부자가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린 것: 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더구나 영생을 추구하는 사람: 예수님을 찾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급박한 사정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런 시시한(?) 문제로 찾아온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계명을 잘 지킨 점: 당당하게 계명을 지켰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14. 예수님의 대답은 칭찬인지 책망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는 말씀은 예수님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책망하시는 말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나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함부로 선하다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틀린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이 부자의 생각이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수준을 맞추어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사용한 선생님(didaskalos)이란 말은 일반적인 교사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런 선생님에게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15. 이 사람의 질문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바울에게 빌립보 옥의 간수가 한 질문(행 16:30)이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들은 유대인의 질문(행 2:37)과 같은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람의 질문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어디에?

    내가 ... 해야: 무엇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행함으로 영생을 얻어보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답도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계명(율법)을 지키라는 것이다.

16.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19절이다.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무슨 말인가? 옳은 대답인가?

    계명(율법)을 지켜라: 율법을 폐한다고 비난을 받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실 리가 없다. 잘하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 자에게 비꼬는 투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으로 되지 않음을 깨우치시려는 것이다. 바울이나 베드로의 답변은 '믿으라, 회개하라'는 것이었던 것과 비교해보자.

17.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신 것은 십계명인가? 아니면 다른 계명인가?

    십계명이 아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4개의 계명과 사람에 대한 6개의 계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계명을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정상적인 십계명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을 지켜라는 뜻으로 말씀하신다면 더 중요한 계명을 빠트릴 리가 없다. 이 부자가 자신있는 부분만 지적하면서 자부심을 더 키우는 것이다. 풍선이 쉽게 터지도록 탱탱하게 바람을 넣듯이 넣어놓고 침으로 가볍게 콕 찔러버리는 것이다.

18. 계명을 잘 지켰다고 자부하는 이 사람의 자부심을 무참하게 깨뜨려버린 것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것이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이 한 마디에 근심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재물이 자신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는 계명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진심으로 가난한 자를 돌아보려는 마음은 없었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긴 것도 물론 아니었다. 그러므로 재산이 그의 우상이었으며 곧 하나님이었다. 그것을 버리라는 것은 그에게는 치명적인 선고이었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의 허식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19. 결과적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어린 아이와 어떻게 다른가?

    계명을 잘 지켰고 재산도 많지만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 사람이 자라서 많이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이 아니다. 배우고 알아도 어린아이의 그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이 많이 배우고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한 것이 과연 사람의 발달에 기여했는가? 어린아이 같은 자는 천국에 들어가고 이 사람은 들어가지 못한다.

20. 이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있었고 한 가지만 부족했다. 그러면 100점은 아니라도 80점이나 90점은 되지 않는가?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없다면 결국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이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재물을 더 섬겼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빠지기 쉬운 우상이 재물이기에 성경은 무수히 경고를 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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