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9(2)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4

마가복음 9(2)장


< 30-40 >

29. 예수님과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있을 때 산 아래에서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영광스러움과 비참한 현실: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 두 모습이 다 있어야 옳다. 묵상과 실제적인 활동,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사단과의 전투를 치루어야 한다. 산 위의 영광만 생각하면서 비참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30. 왜 예수님은 소문없이 다니시며 비밀스럽게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1) 다른 일로 방해받지 않고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치기 위함: 우리도 때로는 이런 비밀스런(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과 단독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가족도, 회사 일도, 교회 일도 모든 것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근본 이유를 따질 필요)가 있다.

    2) 충격을 줄이려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 수도 없이 반복해서 말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고도 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3)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 자신도 기도와 묵상으로 마음을 정리할 여유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31. 선생님에게 묻기도 무서워하다니(32)? 예수님이 그렇게 무서운 분이셨나?

    질문만 하면 하도 끔찍한 이야기를 하시니까: 끔찍한 말씀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32.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십자가 사건을 두 개의 내용으로 구분해보자. 그 중에서 제자들은 알아들은 것은 무엇이며 알지 못한 내용은 무엇인가? 만약 둘 다 제대로 알아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십자가 사건은 '죽음'과 '부활'이다. 제자들은 부활보다 죽음에 관한 것만 알아들었다. 부활에 관한 말씀에 더 관심이 있었다면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수님의 삶도 두 면으로 볼 수 있다. 인간적으로 보면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했고, 한편으로는 이적을 행하는 능력자였다. 제자들은 어느 쪽에 시선을 두었을까? 우리의 삶도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모습을 나타낸다.

33. 지독하게 손발이 안 맞는 스승과 제자이다. 얼마나 손발이 안 맞는지 비슷한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스승은 죽을 것을 예고하고 있으나 제자들은 누가 크냐로 다툼: 운명 직전의 아버지 앞에서 유산 문제로 싸우고 있는 아들들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홧김에 죽어가던 사람이 되레 일어나지 않을까? 무슨 근거로 서로 크다고 우겼을까? 나이? 부름받은 순서? 변화산에서의 차별?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모이기만 하면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 아닌가! 길에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잠잠한 이유는 그래도 염치는 있어서?

34.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누가 큰 자인가?

    뭇사람의 끝. 뭇사람을 섬기는 자. 내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자

35. 하필이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라고 하는가? 귀엽다는 말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닮았다는 말인가?

    여기서는 어린 아이: 여기서는 어린아이의 천진무구함이나 순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접해도 아무런 유익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뭇 사람의 끝'(35)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다. 어린 아이가 어떤 존재인가?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방정환 선생님께서 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높여 부르자는 뜻에서 만든 이후이다. 고대에는 아이의 생사권이 아버지에게 있었다. 헬라인들의 생각은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 유대인들에게는 '방자하고 무분별하여 엄격한 교육이 필요한 존재이며 전쟁이나 노역에 쓸모 없음,' 한국인들에게는 '어른 사이에 끼여들면 안 되는 존재'여서 '아∼들이?' '아이들은 가라'는 말을 듣기 일쑤이었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존재로 취급받았다. 그런 아이들, 혹은 아이들같은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말이다.

36. 예수님의 말씀은 '첫째가 되려면 끝에 서라'는 것 같은데 생존 경쟁이 치열한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그렇게 하면 성공할까?

    첫째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끝에 서라는 말이 아니라 낮은 자와 천한 자를 위해서 자신을 낮추라는 말이다. 섬김의 정신을 강조하는 표현이지 성공을 위한 방법이 아니다: 따라서 직장에서 이런 방법을 쓴다면 어느 정도 성공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모든 곳에 적용하려면 안 된다. 적과 싸우는 전쟁터에서는 섬김의 원리가 아니라 적을 죽여야 하는 원리가 우선이며 부분적으로 섬김의 원리가 적용될 곳도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는? 섬겨야할 때도 있고 협력해야 할 때도 있지만 쟁취해야 할 때도 있다. 섬겨야 할 부분과 경쟁해야 할 부분을 잘 가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많은 것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드린다면 얼마나 이기적인가?

37.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말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귀여워서 안아주는 것도 해당되는 걸까?

    원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 때문에 자신을 낮추는 행위를 말한다. 내키지 않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장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귀여워서 안아주는 것은 내 뜻에 따르는 것이므로 위의 말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 38-50 >

38. 이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자신들의 무리에 들지도 않는 어떤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 그래서 그런 짓 내쫓았다? 그래서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을 발견한다면?

    능력은 없고 자격증만 가진 자가 자격증은 없고 능력있는 자를 괄시하는 현상:
    내 교회 성도만 소중하고 남의 교회 성도들은 형제로 취급하지 않는 현상

39. 제자의 무리에 들지 않으면서 예수의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예수님과 그것을 금한 제자들에게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에게 반대하느냐 아니냐(복음 전파)에 관심이 있다면 제자들은 자신들의 위치(기득권)를 염려하는 셈이다. 나 자신의 유익보다는 교회의 유익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빌 1:18).

40. 물 한 그릇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전혀 가치 없는 것의 예로 물 한 그릇을 들었다. 그런데 물 한 그릇 준 것에 대해서 왜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는가(41)?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이유로 대접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대접했느냐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가 중요하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41. '이 소자 중 하나'는 어떤 의미인가? 왜 그렇게 소중하게 취급되어야 하는가?

    `보잘 것 없는 사람: 어린 아이가 작고 값어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생각을 그대로 적용하였을 뿐이다. 이 본문이 아이의 값어치를 논하는 본문이 아니다. 아이를 소중하게 다룬 본문은 따로 있다(막 10:13-16, 눅 18:16).

    나를 믿는 소자이기 때문: 인간의 소중함이 어디에 있는가? 만물의 靈長이라고? 창조될 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범죄함으로 그 형상이 조각나고 말았다. 다시금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관심 때문에 소중하다. 그 회복을 위해서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셨다(롬 14:15, 습격당하셨다(롬 14:15, 고전 8:11).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은 아무리 작아도 그것은 큰 것이며,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 나라의 것은 큰 것이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42. 누구 목에 연자맷돌(나귀나 소가 돌리는 맷돌)을 달라고 하는가?

    실족케 하는 사람: 아이를 실족케 하느니 그 아이 목에 연자맷돌을 달아서 죽이는 것이 낫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러면 정말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성경 말씀에 근거한 유아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할라!

43. '∼하느니 차라리 ∼하라'가 몇번 인가?

    4번: 세 번이라고 해야겠지만(손이, 발이, 눈이), 42절을 정돈한다면 '소자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려라'고 할 수 있다.

44.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스스로 신체의 일부를 잘라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천국에는 불구자가 얼마나 있을까?

    거의 없다.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다: 목숨을, 손을, 발을, 눈을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다. 왜? 그대로 하다가는 남아날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더 선하게 사용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 실제로 가장 많이 실족케 하는 것은 입인데? 온몸으로 실족케 한 사람은 어떻게 하나? 눈이 단독으로 범죄하기보다는 머리가 시킨 경우라면? 범죄의 원인이 되는 것을 찾아 철저하게 회개하라는 뜻이다.

45. 지옥이 고통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고통이 끝이 없음(48): 일반인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믿지 않고 죽은 자도 끝날에는 부활한다(행 24:14). 영벌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지독한 분이신지 알아야 하는데...

46. 소금을 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정하게 하는 의미가 있고 부패를 방지하는 의미가 있다. 불로 소금치듯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불의 역할이 여기서는 고통이다. 소금도 정하게 하는 것보다는 영원의 의미가 강해 보인다. 결국은 영벌에 대한 것 아닐까? 참고로 미꾸라지에 소금을 치면 난리가 나는데 관련이 없을까?

47.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어떤 사람을 가리킬까?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

48.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여기서 소금이 의미하는 것은?

    9장의 결론일 것이라고 보면 '겸손하게 섬기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겸손의 근거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49. 38-50절에서 언급하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서 비교해보자.

    1) 그리스도를 위하여 작은 일을 행한 자: 제자의 무리에 들지 않으면서 예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는 일을 말리지 마라' 하셨고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것만으로 너희를 대접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잊지 않으리라'고 하셨는데 '그리스도 때문에 작은 일을 행하는 자를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2)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약한 제자들을 실족케 하는 자: '실족케하느니 차라리 죽으라'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50.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우리 삶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나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그 분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예수 때문에 대접하는 것과 섬기는 것이 의미가 있고, 예수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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