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9(1)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3

마가복음 9(1)장


< 1-13 >

1. 당대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이해했을 수도 있겠지만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바로 다음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즉 변화산 사건, 예수의 죽음, 부활의 영광, 승천, 성령강림, 베드로의 능력 있는 설교, 복음이 널리 퍼져나가고, 말씀이 세상을 점령해나가는 것(로마를 기독교화?); 마가복음은 AD 7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마가가 이 본문이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면 이미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있으며 1, 2년 후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거라고 믿으며 이렇게 기록 했을 리가 없다. 마가가 보기에는 이 말씀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 변화산 위의 변형은 어느 정도의 변형인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 무서울 정도, 제 정신이 아닐 정도(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 비슷한 경우는 모세가 하나님을 뵙고 내려올 때 얼굴에 빛이 나서 수건으로 가려야 했던 것을 들 수 있다(출 34:29-35).

3. 이렇게 변화한 모습과 변하기 전의 모습은 어떤 관계일까?

    변화된 모습이 범죄하기 이전, 즉 창조된 원래의 모습일 것이다;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은 빛으로 옷 입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단순하게 아담과 하와가 나체족처럼 살았다?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회사에도 직급이 높아지면 소위 품위유지비라는 수당이 나온다. 상급자가 아랫사람에게 품위를 유지해야 통솔이 가능하다.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려면 무슨 권위가 있지 아니하였을까? 모든 짐승이 저절로 굴복할 만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변화한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짐승들이 사람을 보면 같은 현상이 일어날 만한 것이 없이 어떻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겠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품위유지비가 바로 빛이 아닐까?

    중국사람들의 조상은 창세기의 이런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 다음 한자들을 살펴보자. 불 火자는 사람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火; 사람에게서 빛이 나는 모습이며, 光; 첫 사람에게서 빛이 나는 모습이다. 두 글자 다 '사람인 변'에 속한 글자이다. 榮; 두 사람이 나무와 격리되어 있는 것이 '영화로울 영' 자이다.

4. 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을까? 대화의 주제는?

    자기들의 경험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가령, 모세는 '지도자의 길은 정말 힘들다'는 것에 대해서, 엘리야는 '혼자 외롭게 하나님 편에 서서 싸운 이야기' 그러나 끝내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되는 영광'도 누린 점 등. 누가는 이 때 대화의 주제가 별세에 관한 것이었다고 전한다(눅 9:31). 율법(모세)과 예언(엘리야)의 대주제는 예수의 죽음이다.

5. 제자들에게 이렇게 변현된 모습을 보이신 이유는 무엇일까?

    제자들이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함일 것; 필요한 사람에게는 어떤 환상이나 체험이 그를 평생토록 확신 속에 살도록 인도한다.

6.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다.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수없이 반복해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잘 안 들어서? 도무지 말이 말 같아야 알아듣지! 예수님께서 저지르신(?) 일이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는 뜻이다.

7. 앞 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것은 베드로의 특기이지만 이 때는 두려웠다고 했다. 왜 두려웠을까? 너무나 영광스러운 광경 때문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제 정신이 아닌 말을 했다는데 베드로의 말이 제정신이 아니란 이유는 무엇인가?

    초막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상반된다. 편히 계시려면 아예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다. 메시야의 본질과 주제(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산 밑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우리끼리만 잘 지내기면 되는가? 불신자들이 교회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는 교인들이 자기들끼리만 잘 어울린다는 점을 든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8. 지금 산 위에는 몇 명이 계시는가?

    7명; 세 제자, 예수님, 모세, 엘리야, 하나님. 현장에 없는 듯이 함께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9. 바로 앞에서 말을 잘못했다가 '사탄'이라는 책망을 들었다. 지금 베드로가 하는 말은 칭찬감일까? 책망감일까? 예수님께서 대답을 않으셨는데 만약 했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

    정신나간 소리하지 마라. '사탄아' 소리 한번 더 들을래?

10. 왜 예수님은 12 제자 중에서 세 명만 데리고 올라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게 하셨는가? 편애 아닌가? 아니면 이 세 제자에게 특별한 계획이라도 가지고 계신 것인가? 이 세 제자의 생애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베드로; 교회를 세우는 사역의 책임자며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기까지 수고를 다함
    야고보;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가 되어서 사도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 됨
    요한;
    거꾸로 끝까지 살아 남아서 교회를 돌봄, 예수의 모친을 돌보느라고 최후까지 살아서 고생을 함, 결국 요한계시록을 남겨 성경의 마지막을 장식함

    결론; 정말 어렵고 귀중한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하여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하신 것, 하나님이 귀한 사역을 준비하지 않은 채 감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게 닥치는 어려움이 남과 다르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가 없다. 영광의 길을 걷기 전에 위대한 경험을 하게도 하시고, 고난의 길을 걷게도 하신다. No cross, No crown! 이라던가!

11. 산을 내려오신 모습과 비교하면 산 위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영광스런 빛 가운데 계시는 분(3); 빛을 잃은 세상, 이 어두운 곳에 빛으로 오셨다(요). 산 밑은 마땅히 있어야 할 빛이 없는 세상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셨다.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2) 믿음의 용사들과 함께 거하시던 분(4); 엘리야, 모세와 함께 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실 것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산 밑을 내려오면 예수님의 대화 상대는 전혀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함께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고독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어서 책망받아야 할 사람들로만 가득 찬 그 곳으로 예수님은 내려오셨습니다. 치료받아야 할 병든 자를 찾아오신 의원이셨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7); 하나님께서 친히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산 밑에는 하나님 대신에 귀신이 활개를 치는 세상입니다. 귀신이 제 세상인양 설치고 다니는 그 곳에 귀신을 제압하려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대궐에 살던 왕자님이 냄새나고 불편한 시골로 내려온 것과 비교도 안될만큼 지저분한 곳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12.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다른 9명의 제자까지도? 무리들? 대적자들을 가리키는가? 왜 비밀로 하라고 하시는가?

    적어도 부활할 때까지는 예수를 메시야로 제대로 이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해서 사역에 방해만 되기 때문이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일과 무식하게 마구 덤비는 것은 다르다. 열심히 하되 현명하게 하라는 것이다. 한 영혼이 내게 달렸으니 잠잘 겨를이 어디 있으며 밥 먹을 여유가 어디 있느냐? 그래서 한 며칠 팔팔 끓다가 천국가면 되는 것이냐? 적절한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13.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들어도 모르는 제자들은 뭐야? 왜 그럴까?

    유대인들에게 부활이란 개념은 아주 익숙한 것이다. 다만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메시야의 개념(정치적인 개념)이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메시야의 길(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분은 감동하는데 어떤 사람은 지루하기만한 경우가 있다. 설교를 들으면서 기대하는 것이 다른 탓이다. 정신이 다른 곳에 있으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기를 원하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물질의 축복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다르다.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귀가 다른 것이다.

14. 산을 내려오면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별로 느낌이 좋지 않다. 왜?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과 자신들의 궁금증을 풀어 보려고 남의 말을 인용하는 것; 자신은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남의 말을 빌려 자신의 질문을 하는 것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질문을 받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면야 괜찮지만.

15. 제자들이 한 질문의 내용은 '서기관들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했는데 만약 예수님 당신이 메시야라면 엘리야가 먼저 와야하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다(11). 예수님의 답변(12)의 요지는 무엇인가?

    엘리야에 대한 생각부터 틀렸다. 그래서 임의로 대했다(13);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식이라면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면 굳이 메시아가 와서 고난을 받을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대답하셨다. 모든 것에 대한 회복의 의미도, 엘리야의 역할에 대한 이해도 틀렸으니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복음서는 공히 요한을 오리라한 엘리야인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 타락한 시대를 향하여 엘리야와 같은 심정으로 회개를 외쳤던 요한이 바로 예언된 엘리야라는 것이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와서 회개운동을 일으켰던 그 요한을 한낱 어린 계집아이의 춤값으로 사라지게 한 것은 하나님도 너무 무심한 것 아닌가?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그러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길을 예비하는 자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그렇게 길을 예비했으니 예수도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그럴만한 값어치 있는 자들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로서는 감사할 뿐이다.

16. 서기관들은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엘리야가 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5-6) 이 구절에 대한 서기관들의 해석에 따르면 메시야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백성들을 회개케 했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그냥 임하셔서 왕이 되시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마치 요압이 성을 거의 다 점령하고 마지막 순간에 왕에게 기별하여 왕이 점령한 것으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고난과 멸시를 받고 죽는다니?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다.

17. 엘리야가 미리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서기관들이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대로 메시야가 와서 고난을 받고 멸시를 받을 것은 왜 모르나?

    사 53장에 메시야의 고난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지만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고난의 종에 대해서 잘 모른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 성경을 읽으면 그것은 조명없는 무대이다.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 것이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는 길이요, 형제와 가족을 이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첩경이다. 사회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말은 외국어를 통해서 보면 더 잘 보인다. 세상은 예수를 통해서 보아야 의미가 있고 잘 보인다.

18. 당시의 일반적인 종말론은 엘리야가 먼저오고 정치적인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지닌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은?

    엘리야가 먼저 왔다는 것, 메시야가 고난과 멸시를 당할 것,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

< 14-29 >

19. 큰 무리가 둘렀고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다는데 무슨 변론이었을까? 제자들이 이겼을까?

    서기관들이 '능력도 없으면서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것 아니냐?'고 공격을 하고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28)라고 묻는 것으로 보아서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20. 귀신이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요약하면 무엇인가?

    벙어리 되게함(17, 귀먹게 함-25), 거꾸러지게, 거품을 흘리게하며, 이를 갈게하며, 파리하게(18), 경련을 일으키고, 굴며(구르며), 거품을 흘림(20), 불과 물에 자주 던짐(22)

    (요약)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조금 남아있는 것마저 파괴시키는 것; 귀신을 부르는 일이나 가까이하는 일은 피해야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21.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데 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했는가?

    예전에 고친 적이 있다(6:13); 그런데 왜 지금은 못 고치는가? 성령 충만은 사라지기도 한다. 기도로 하나님과 꾸준히 교제하는 것이 능력을 지키는 방법이다.

22. 이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두 가지를 말한다면?

    믿음(19, 23) 기도(29); 어떻게 답이 두 가지인가? 치료받기를 원하는 아비에게는 믿음이 있어야한고 치료하는 역사를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 성령 세례(믿음으로)와 성령의 충만(기도로)을 가리키는 것으로 결국 이 둘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적 교제를 말한다.

23. 예수님은 누구에게 야단을 치시는가?

    믿음이 없는 세대에게? 제자들? 군중들? 아마 전체를 상대로 하신 말씀 일 것이다.

24. 숨이 막혀 응급실을 찾은 환자에게 의사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언제부터 그랬느냐?' 등등 질문을 계속하면 미친다. '접수부터 하라' 하고는 피검사하고 X-ray찍고...... 함부로 약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의사는 그럴 수밖에 없단다. (반복되는 일이라면 담당의사의 소견서를 하나 받아서 핸드백에 넣어서 다니면 좋다) 이런 의사를 닮으셨나, 아이가 위급한 모양인데 예수님은 왜 빨리 고치시지 않고 이야기가 그렇게 길까?

    아비의 신앙과 제자들에 대한 교육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목표는 아이를 고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응급실 의사의 질문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어도 어쨌거나 대답을 해야 하고 치료하는 절차를 따라야 한다. 하물며 더 큰 목표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의 치료는 아비가 보기에는 더 답답할지 모른다. 이런 답답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25.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예수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는가?

    있다. 게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할만하시거든'(마 26:39); 다른 점이 뭐야?

26.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가? 한번 해볼래?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면 무엇부터 하고 싶은가?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믿으라는 것이고(23) 기도하라는 것이다(29). 무엇을 할 것이냐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우선이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뜻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은 해병대가 하는 일이다.

27. 아이 아버지에게는 믿음이 있나 없나?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무조건 있다고 해야 한다. 냉정히 살펴보면 없다. 그래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한다. 문제는 이런 것도 믿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제대로 믿지 않음에도 믿고자하는 그 마음을 보시고 있는 것으로 여겨주심이다. 예수께 나와서 믿음으로 병을 고친 많은 사람들 중에는 '그것도 믿음이냐?'는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적지 않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사명을 받던 장면도 도전히 믿음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점은 마찬가지다(출 3-4장).

28. 본문에 등장하는 다음 사람들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중에서 우리와 가장 닮은 사람은 누구인가 생각해보자.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 간절한 소원이 있으되 방법도 능력도 없다.
    산에 같이 올라갔던 제자들; 놀라운 감격을 가졌으면서도 능력이 없다.
    산 밑에 있던 제자들; 찾아온 사람을 돕지 못해 쩔쩔맸다. 관중은 많고 되지는 않고
    예수께서 아이를 고치실 때 옆에 서 있던 제자들; 예수는 따르되 능력은 없다. 그래서 조용할 때 이유를 물었다.
    달려 모인 사람들; 겨우 한 마디 했다. '죽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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