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8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3

마가복음 8장


< 1-10 >

1. 본문이 오병이어 기적(6:33-43)과 비교해서 별개의 사건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나 다른 내용이 있으면 찾아보자(10가지 정도).

    1) 또(1); 이전에 그런 일이 한 번 더 있었음을 말한다.
    2) 땅에 앉게 하심(6) ↔푸른 잔디(6:39); 장소뿐만 아니라 시기도 다르다는 뜻이다.
    3) 떡 일곱 개 생선 두어 마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
    4) 음식의 원소유자; 아이(↔제자들)
    5) 남은 조각; 7광주리(↔12광주리),
    6) 인원; 약 4,000명(↔5,000)
    7) 장소; 데가볼리 ↔ 벳세다
    8)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심(↔제자만 배로 보내고 홀로 기도하러 가심)
    9) 제자들의 대답; 전에는 돈타령이더니 이번에는 장소타령 (같은 이야기 - 만약 마을이 가까웠으면 돈타령이었을 것)
    10) 예수님이 먼저 말을 꺼냄 ↔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청하였음
    11) 사흘을 같이 있었음 ↔ 예정에 없이 달려온 사람들이어서 당일치기
    12) 예수님께서 별 개의 사건으로 언급하심(19-20)

    광주리의 크기도 원어상으로 다르다. 6장은 '코피노스'(작은 광주리)와 8장은 '스퓌리스'(큰 광주리).

2.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떡 얻어먹은 것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은혜로웠을까?

    알 수는 없지만 요 6:26에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는 말씀을 보면 엉뚱한 것에 더 재미를 느낀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말씀이 더 소중한 것이어야 한다. 썩는 양식과 썩지 않는 양식,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차이이다. 수련회 다녀와서 기억에 남는 것이 설교보다는 웃기는 이야기라면? 텔레비젼 드라마처럼 충실한 삶보다는 일탈행위가 더 많다면? '공부 많이 했니?'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은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3. 사흘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면 며칠이나 굶었을까? 아직도 남은 것이 7개나 있다면 그렇게 많이 굶지는 않았겠다. 배고픈 것보다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좋았을까?

    알 수는 없지만 말씀을 듣는 일에 무척 매료되었음은 틀림없다; 잘 먹고, 잘 노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지 않으면 크리스챤의 삶은 얼마나 비참한가? 이 땅에서 불신자보다 더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없는가? 성경공부라는 것이 노래방이나 고스톱보다 못한가? 토요일 방과 후에 성경공부를 했던 중 3 아이들이 기억난다. 도시락도 없던 토요일이었으니 '배고프지 않니?' 했더니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어디서 이런 성경을 배우겠어요?' 내게는 적지 않은 감동을 안겨주었던 아이들이다.

4. 오병이어 사건을 겪었음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합리적인 사고로만 일관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육의 효과가 전혀 없어 보인다. 언제쯤 합리적 사고를 뛰어넘는 신앙적 사고로 전환될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기독교 신앙은 지식적 사고에서 체험적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제자들이 기적을 체험했어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적일 뿐이다. 자신의 체험이 되지 않으면 구경꾼일 뿐이다.

5. 예수님의 관심은 하늘나라를 전하는 것인가? 무리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관심 사항은 하늘나라였지만 무리의 굶주림도 무시하지 않았다; 영의 양식만 나누어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의 양식도 충분하게 나누어주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육간의 필요를 다 아신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음에 지쳐 쓰러져 있는 제자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하셨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도 당연히 기도해야 한다. 육신에 필요한 것을 너무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찬양하고 예배드릴 때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먹고 놀 때도 열심히 먹고 놀아야 한다.

6. 오병이어 사건에서 이렇게 나누어진 떡은 바로 예수 자신이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이 떡은 우리 구원의 어떤 특징을 보여주는가?

    작은 희생이 따랐다; 작은 것을 요구하셔서 큰 것으로 갚음
    청중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떡이다(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예수님의 긍휼에서 나온 떡이다.
    풍족한 떡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배부르게 먹었다.
    기적적으로 분배된 떡, 다함이 없는 떡이다.

    먼저 유대인에게, 그 다음 이방인에게; 이 지역이 이방인이 많은 지역이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지역에서 데가볼리를 거쳐 갈릴리 쪽으로 오셨다(7:31). 아마 모인 무리들 중에 상당수는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 11-21 >

7. 바리새인들과 격렬하게 싸웠을 가능성이 보이는 단어나 표현을 찾아보자.

    힐난, 시험, 탄식, 결연한 의지(=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아마 황급히 이동하느라고 먹을 양식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적대적인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8. 바리새인들이 왜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가?

    지난 번의 선언(7:1-23)이후 사라져버린 예수를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9. 바리새인들의 힐난성 요구(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에 왜 응하지 않으시는가? 십자가에서 조롱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이었는데...

    1) 의도적으로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증거가 소용없다; 이렇게 믿음이 상실된 병이 의처증이나 의부증이고 이런 증세가 다방면으로 퍼지면 정신병자가 된다. 믿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어떤 증거도 소용이 없다.

    2) 예수님께서 평소에 베푸신 이적과 병을 고치심,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전혀 표적이 아니란 말인가? 아들이 자신을 보고 '당신이 나의 아버지라는 아들이 자신을 보고 '당신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증명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호적등본, 출생 때의 사진, 의사의 출생증명서를 제시한다면 웃기는 집안일 뿐이다. 차라리 '그냥 이렇게 웃고 말지요,' '까불고 있어!' '그래 이 놈아 난 네 아비가 아니다' 이런 답이 더 낫겠다.

    3) 의도가 불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시험한 사람들 중에는 ① 자신의 믿음을 확정하기 위하여(기드온, 하박국, 말라기) ②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라는 데 시험하지 않다가 망한 사람(아하스) ③ 악의로 시험한 사람(르비딤 물가의 이스라엘, 출 17:2, 민14:22) 등이 있다. 학기초에 학생들이 선생님을 처음 만나서 실력테스트를 하는 것도 애교용일 경우와 적대적일 때를 구분해야한다. 선생 노릇 제대로 하려면 이런 시험을 통과해야 되는가? 바리새인들의 도전은 어떻게 보면 시험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시지 시험을 통과하여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문제를 출제하고 하나님이 시험을 통과해서 우리의 하나님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민망한 말인가?

10. 바리새인들의 힐난성 질문에 예수님께서 마음 속 깊이 탄식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성경을 많이 알고 먼저 믿어야 하는 자가 정작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코 배신할 수 없는 자가 배시할 때 쓰는 말 '브루터스 너마저'처럼.

11. 사람은 보고 듣는 것을 자기 수준에서 이해한다. 들은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는 것만큼 듣고, 실력만큼 본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라고 말했을 때 제자들은 이것을 무슨 뜻으로 생각했는가?

    떡이 없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해석해 버렸다. 영적인 일보다는 오로지 먹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으니... 철없고 답답한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답답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주어진 표적들조차 고의로 거부하는 사람들이고 제자들은 영적인 일보다 육적인 일에 더 관심 있으니.

12. 예수님의 책망은 깨달으라는 것이다. 도대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먹을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내가 지금 양식 걱정을 하고 있느냐? 나와 함께 있으면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내가 지금 먹을 양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느냐? 그런데도 양식 가져오지 않았다고 걱정을 하거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꾸중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다니! 제자들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관심이 엉뚱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말씀핵.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말씀하시고 듣는 제자들은 육적인 것으로 해석하고...(마 16:12)

13. 누룩에 대한 성경의 두 가지 견해는 1)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전파 2) 죄악의 영향력이다. 적은 양으로 전체를 점진적으로 부풀게 영향력을 비유로 사용한 셈이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율법주의; 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욕을 먼저 배우듯이 형식은 쉽게 배우지만 그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배우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과 행동을 통한 형식을 드리는 것 어느 것이 쉽고 빠를까?

14.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인 사람들이라면 헤롯은 정치적인 인물이다. 그렇다면 헤롯의 누룩이란 무슨 뜻일까?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세속주의에 대한 유혹, 세속에 물들 위험);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하나님을 섬기되 형식만 중하게 여길 가능성이 많지만 헤롯의 누룩은 아예 하나님을 떠나 세속의 즐거움에 매료될 가능성을 말한다. 정치라는 것도 맛을 들이면 마약보다 더 무섭단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정치적인 힘에 맛을 들이면 명분이 아무리 옳아도 절차를 무시했다거나 다른 핑계를 대며 거부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15.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에게 풍성하게 먹이신 것과 가장 대조적인 것이 본문에 있다면 무엇인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 예수님께서는 적은 양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셨지만(살리셨지만) 바리새인들과 헤롯은 작은 것(누룩)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셈이다.

< 22-26 >

16. 치료과정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차이점이 있다면 어느 환자의 치료와 비슷한가?

    7장의 귀먹고 어눌한 자; 벳새다에서 소경을 고친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이야기다. 그리 중요한 이야기 같지도 않은데 마가가 여기에 기록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17. 왜 한 방에 고치시지 않는가?

    그의 상태에 달렸다; 자신의 간절함과 믿음으로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은 특별한 절차없이 순식간에 나아버렸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온 사람들은 특별한 절차를 밟아서 고쳐주셨다. 아마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것으로 확신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8. 다른 어떤 치료 기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면?

    치료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말씀 한 마디로 즉시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오늘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이 보이나이다' 라는 이 소경의 대답을 보면 절반 정도만 고쳐진 모양이다. 이렇게 어중간하게 고쳐진 소경은 바로 제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사건 직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놀라운 고백을 하고, 바로 뒤이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지람을 듣는다. 위대한 고백을 했다가 곧 이어 엄청난 꾸중을 듣는 이 모습이, 보이긴 보이는데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소경의 상태이다. 이 소경이 만물을 밝게 보게되듯이 그런 일이 바로 제자들에게 일어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보면 도저히 믿는다고 할 수 없는 짓을 다반사로 저지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 27-38 >

19.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는 대답을 좋아하시지 않은 것 같다. 답이 틀린 탓도 있겠지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의 관심은 다른 사람 아닌 제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고백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바로 나에게 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느냐가 아니라 바로 내가 무엇이라고 하느냐가 중요하다.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당신의 고백이 중요하다. 그래서 부부사이에는 입에 발린 말이라도 자주 할 필요가 있다.

20.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 세례 요한; 헤롯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이적을 행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2) 엘리야; 이적적인 능력때문이다.
    3) 선지자 중의 하나;
    가르침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세 가지 답안의 공통점은 메시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믿기 전에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세계 삼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는 귀신들이 더 잘 알았다.

※ 그리스도 = 基督, 크리스마스, 메시야

21.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제 정신인가 아니면 얼떨결에 해 본 소리인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결단이 따르는 고백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백은 엄청난 축복과 칭찬이 따른 것이 된다. 별 생각없이 뱉은 한 마디가 인생을 송두리채 바꾼 사건은 많이 있다. 그 대상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상대로 사고(?) 좀 치자. 잘 해보려는 생각이 중요한 것이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록 실수가 있다해도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이 고백에 굉장한 칭찬이 기록되어있다. 마가복음에 아무 반응이 없는 이유는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겸 양아들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베드로의 의도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이 사건을 설명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 자신이 받은 칭찬을 의도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22. 베드로의 이 고백과 간함이 제정신이라면 베드로가 실수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에 대한 엉뚱한 기대감; 온 세상을 위해서 희생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한 탓이다. 정치적인 메시야는 결코 죽을 수 없는 메시야이다. 원수들을 다 몰아내고 왕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베드로가)이 가졌던 메시야의 개념은 이스라엘의 왕이요, 압제의 해방자이었다.

23.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베드로의 성격은?

    덜렁댄다. 생각없이 나서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칭찬도 들었다가 책망도 듣기를 반복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나섰다가 책망을 듣기도 하고, 칭찬을 듣기도 하고 그러다가 수제자로 세움을 받았다.

24. 예수님은 메시야가 어떤 고난을 겪게 될 것인지 제자들에게 이제야 털어놓았다(31). 그 전에 무엇을 확인하셨는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확인하는 일(27-30); 무슨 역할이나 일을 하기 전에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따지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예배드릴 자격을 갖춘 사람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자.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그 분의 역할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분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25.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31); 역사상 죽으러 온 사람이 또 있는가? 없다. 인류를 위한 속죄제물로 오신 유일한 분이시다. 사람의 일이란 무엇인가? 땅의 일이요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일이다.

26.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을 다 듣지 않았거나 일부만 인정하고 일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듣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 죽는 것만 생각했지 살아난다는 말은 듣지 않았거나 믿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27. 아무리 그렇지만 베드로를 보고 사단이라고 하다니 심한 것 아닌가?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고 볼 수도 있고 적어도 이 문제만은 단호하게 매듭지을 필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뜻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나 사단이 될 수 있다. 베드로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이런 책망을 들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앞의 그 고백 한 마디를 근거로 교황무오설이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어색하다.

28. '나를 따라오려거든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라'는 말씀은 역으로 생각해보면 제자들이 무슨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인가?

    정치적 메시야로서 세속적인 출세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29. '예수믿고 복을 받으라'는 말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는 말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수믿고 받는 복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받는 복은 부가적인 것일 뿐이다. 만약에 전자가 내세에 대한 복을 말하는 것이라면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지만 그저 이 땅에서 만사형통하기를 바라는 표현이라면 정반대의 의미이다.

30.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자기를 따르려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라는 말은 좀 모순이 아닌가?

    버리면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두 종류의 목숨이 있다. (일시적인 목숨을)버리면 (영원한 목숨을)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목숨을 버리고 영원한 목숨을 얻으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관점은 영원한 생명에 있다.

31.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목숨을 버리란 말인가?

    초대 교회 상황에서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라는 말씀;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에서 예수와 그의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현대인의 상황에서는 나의 욕심과 하나님의 뜻이 달라 보일 때 자신의 지, 정, 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32. 마가복음이 기록된 상황은 로마의 핍박이 시작되었을 때이다. 죽음의 위협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현대의 우리가 중요한 기득권이나 우리 삶의 중요한 것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는가?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는 것, 예수님께서 죽음을 스스로, 기꺼이 당하심을 따르는 것; 진짜 소중한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다른 것이 사소하게 보일 수 있다. 가령, 부부사이에 서로를 선택한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임을 안다면 나머지 일은 다 사소하게 보인다. 그러면 서로를 존중하게 될 것이다.

33. 35절을 요약하면 '잃으면 구원하리라'이다. 두 개의 동사의 앞에 시제를 나타내는 부사어를 넣어보자.
(          ) 잃으면 (              ) 구원하리라.

    지금 잃으면 인자가 다시 올 때 구원하리라.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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