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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6장(2)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3

마가복음 6장(2)


< 막 6:30-44 >

28. 열 두 제자의 파송(7-13)과 돌아온 제자들의 보고(30)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중간에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왜 기록되었을까?

    1) 제자들의 사역이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제자들의 활동 때문에 헤롯마저 죄책감에 시달릴 정도로 제자들의 사역이 효과적이었다.
    2)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예시: 억울하게 요한이 죽은 것처럼 앞으로 예수님도 그렇게 죽을 것이라는 예시이기도 하다.

29. 사도들의 사역을 두 가지 구분하면?

    행한 것: 병을 고친 것과 귀신을 쫓아낸 것,
    가르친 것: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이 하늘 나라이었으니 제자들이 가르친 것도 하나님의 나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십자가의 도라고 말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가? 하나님, 인간, 예수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신 책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신 대상이 '인간'이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법은 '예수님'이시다.

30. 식사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성인 사람은 어떤 부류인가?

    배를 타고 쉴만한 곳으로 이동하면 먼저 예측하고 와서 자리잡은 사람들(32).

31. 바쁘고 피곤한데도 염치없이 달려드는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짜증내지 않고 잘 대할 수 있는 무슨 비법이 본문에 있다면 무엇일까?

    불쌍하게 여기는 것: 연주를 위해서 무대에 서면 수많은 관중들을 '호박'으로 여기란다. 그래야 떨리는 것이 덜하단다. 수술을 하는 의사는 환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토끼나 짐승' 정도로 보아야 쉽게 칼을 댈 수 있단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수이다. 내게 나누어 주어야 할 좋은 것이 있다는 나름대로의 자부심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 바울의 자부심을 보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쉬기를 원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요, 쉼을 포기하고 도우는 것도 잘하는 일이다. 어쨌든 최선을 다한다면 잘 하는 것이다.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바쁘고 피곤한 가운데서도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32.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오는 판국에 쉬어도 되는가?

    휴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쉬는 것을 죄악시하지 말라. 반면에 휴식을 너무 즐기는 것도 곤란하다. 진정한 휴식은 진정한 일 다음에 오는 것이다. 제자들은 쉬기 위해서 무리들과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무리를 따돌리려고 했다.

33. 예수께서 무리를 불쌍하게 보시는 이유는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떤 처지에 있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만 제대로 가르칠 스승이 없었다. 곳곳에 회당도 있고 랍비도 있으며 바리새인들, 제사장이 있었지만 영적인 기갈을 채워주지 못하였다. 결코 배고픔 때문은 아니었다.

34. 불쌍한 무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제자들의 관심이 조금 다른 점이 있는가?

    예수님의 관심은 가르치는 것이고 제자들의 관심은 먹는 것이었다: 원래 공부 덜하는 애들이 먹는 것을 더 밝히는 법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관심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인정하셨다(37). 제자들이 이런 데에 관심을 쏟고 있으니 예수님은 말씀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35.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남자만 5000명이나 되는 무리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최소한 식사 인원이 8,000명에 ₩3,000짜리 도시락이라도 ₩24,000,000입니다. 이렇게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제자들이 말한 200데나리온을 어떤 영어번역은 '8개월치 임금'이라고 했다(한 데나리온은 당시에 하루 일당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합리적? 비논리적인가? 초합리적, 초자연적이라고 해야 한다.

36. 왜 예수님은 불가능한 줄 알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주라'고 했을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야 일이 이루어졌을 때 제대로 감동이 된다: 바이올린이 고운 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겪어본 사람과 만져보지도 못한 사람이 느끼는 감동은 전혀 다르다. 매사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열심히 산 사람은 매사에 감동을 잘 받는다.

37.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이적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사람들이 도시락을 숨기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자신의 것을 내놓자 사람들이 부끄러워 각자의 것을 내놓아 그렇게 되었다는 설명에 대해서 비판한다면?

    1) 구약에 유사한 내용이 있다. 광야의 만나, 사렙다 과부.
    2) 하나님의 능력을 너무 무시한 경향
    3) 자신들의 것을 가지고 배불리 먹고 12바구니에 차도록 남을 수는 없다.
    4) 점심이 아니고 저녁이었다. 설령, 도시락을 가지고 왔다고 해도 저녁까지 싸들고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38.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것을 내어놓은 작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 알의 밀알이 썩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면 옳은가?

    주객이 전도된 말이다: 만약에 아무도 내놓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이런 기적이 가능한 원인은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지 오병이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알의 밀알이 썩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 것이나 썩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밀알 속의 생명이 중요하고, 예수님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양식을 예수님께 드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대답하실 것이다. 나의 작은 희생 때문에 이런 기적이 생겼다고 해도 주님의 역할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잊으면 어린아이다. 밥 안 먹으려는 놈에게 사정사정해가며 억지로 숟가락으로 떠 먹였더니 다 먹고 한다는 얘기가 밥 먹어준 값 내놓으란다. '네가 한 게 뭐 있느냐?'니까 '입을 내가 벌렸잖아' 하더란다.

39. 약 8,000명 정도였다고 본다면 몇 떼를 이루었는가? 몇 명이 어떻게 나누어주었을까?

    100 떼(그룹):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다. 12명의 제자들이 나누었다면 얼마나 뛰어 다녀야했을까? 그룹별로 담당자를 뽑아서... 모르겠다! 보통 기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40. 이 떡의 특징을 찾아보자. 무엇이 이 떡의 특징을 닮았는가?

    청중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떡이다.
    예수님의 긍휼에서 나온 떡이다.
    풍족한 떡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배부르게 먹었다.
    기적적으로 분배된 떡, 다함이 없는 떡이다.

    인간의 방식과 전혀 다른 떡, 하늘의 떡이다. 만약 단순히 굶주림을 면키 위함이었다면 계속 먹여야 하지 않는가? 우리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끊임없이 늘어나서 온 인류를 먹이는 것이다.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인가? 믿었다는 우리의 행위가 오병이어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것은 그야말로 큰 것이다.

< 막 6:45-56 >

※ 일경: 6시∼9시, 이경: 9시∼12시, 삼경: 12∼3시, 사경: 3시∼6시 (로마식이다)

41. 무리들을 급히 돌려보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6장 참고)? 가뜩이나 놀라운 소문을 듣고 몰려왔다가 떡을 얻어먹은 사람들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 순순히 그냥 돌아갔을까?

    왕을 삼으려함 때문(요 6:14, 15): 왕을 삼으려는 것은 죽기 위하여 온 예수님께는 위기이다. 놀라운 기대감과 무리들의 환호에 흥분하면 자신의 길을 벗어날 수도 있다. 이겼구나 하는 순간에 져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42. 제자들을 보고 무리들을 돌려보내라고 하고 자신은 뒤에서 잠시 쉬는 것이 보통일텐데 오히려 제자들을 먼저 보내고 무리들을 예수님께서 돌려보내셨다. 제자들을 왜 그리 급하게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을까?

    제자들이 우쭐하여 폼을 잡을 기회를 주지 않고 보내버림, 환호하는 군중과 격리시킴.

43. 예수님은 왜 이런 때에 기도하셨을까?

    1)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과의 조용한 교제가 필요함: 예수님의 능력의 근원은 기도이었다. 무언가 완수했다는 느낌일 때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노력이 중요하다(coramdeo). 고비고비마다 하나님과 교제를 통하여 자신의 할 일과 자신을 돌아보셨다. 제자들의 전도여행의 결과로, 헤롯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데다 대규모 군중집회가 성황리에 마쳤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핍박이 닥쳐올 것이라고 예견할 수 있다.

    2) 제자들에 대한 훈련보다 자신이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 것이 더 우선이다.

    3) 얼마쯤 기도하셨을까? 제자들이 고생한 시간과 거의 같을 것이다. 아래 질문을 참고하면 철야기도를 하신 셈이다.

44. 제자들이 괴로이 노젓는 것을 얼마동안 보시고 계셨을까?

    저녁 9시에 출발했으면 적어도 6시간 이상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45. 제자들이 바람 때문에 고생할 것을 알고 계셨을까? 일부러 골탕먹이신 게 아닌가? 아니라면 기도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을까?

    1) 알고 계시면서 내버려두심: 지켜보고 계시는 것은 연단의 의미가 있다. 죽음의 고통을 이기고 나면 그만큼 용감해진다.
    2) 예수님께는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도 함

4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왜 지나가려고 하시는가?

    1) 가까이 오셔서, 불러주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그 분의 성품이다: 문밖에 서서 기다리시거나(계 3:20), 짐짓 지나가신다(마 9:27, 15:22, 20:30, 막 10:47, 눅 18:39). 자식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주지 않는 법이라고 박대하시기도 한다(막 7:27). 이럴 때 붙잡아야 한다. 그를 불러 세우고 매어달린 사람들은 횡재했다. 우리의 믿음도 이렇게 우리에게 온 것이다.

47. 떡을 떼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둔하여지다니(52)?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사건 자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이나 위대하심을 가끔 잊어버리지 않는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쳐든 루터였지만 낙심하고 있을 때 부인이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 '누가 죽었느냐?'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상복입은 이유를 말했을 때 루터가 정신을 차렸다던가? 때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외로움과 슬픔이 우리를 억누르기도 한다. 기적이나 이적을 보는 것만으로 믿음이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48. 제자들의 형편과 우리 인생살이를 비교해보자.

    1) 굴곡이 있다: 전도여행과 떡을 나누던 때와 풍랑에 밀릴 때의 제자들의 처지를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작은 변화에 이렇게 흔들리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닐까?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기초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그 굴곡을 예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점이다. 작은 일 하나, 하나마다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전체를 감사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시31:15).

49. 예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옴,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함

50. 왜 환자를 장터에 두는가?

    예수님께서 반드시 들르는 곳을 선점하느라고: 예수님께서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서 전도하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51. 옷가에 손만 대어도 낫는다는 생각은 미신적임에도 다 성함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미신 비슷한 현상이 있는가?

    두통이 심한 사람이 성경책을 베고 잤더니 두통이 사라졌다는 간증(?)아닌 간증도 있다: 신앙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의 어설픈 신앙행위를 비난하지 말고 인정해주자. 나와 다른 방법이나 열심을 가진 자를 인정하자.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밥을 풀 때 미리 십자가를 긋는 행위, 집들이나, 개업에 꼭 목사님께서 축도를 해줘야만 된다는 생각...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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