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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5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2

마가복음 5장


< 5:1-20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 >

1. 우리 신앙인의 모습은 본문에 나오는 누구와 가장 많이 닮았는가? 가령, 귀신, 귀신들린 사람, 주변의 사람들, 말없는 제자들이라고 대답을 한다면 각 경우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해 보자.

    1) 귀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란 점에서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2) 귀신들린 사람: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란 점에서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거에는 그랬으나 주인이 바뀌었다는 점에서 같을 수 있다.
    3) 주변 사람들: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기이히 여기고만 있는 점에서 믿는 우리와 다르다.
    4) 말없는 제자들: 예수를 따르기는 따르는데 능력은 없이 구경만 하거나 당황해 하는 모습이 가장 우리와 닮았다.

2. 우리 아이들에게 귀신은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사탄의 졸개같은 이런 귀신(영적인 존재)은 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특히 아이들이 말하는 귀신은 대부분 없다.

3. 귀신이 좋아하는 곳은 어떤 곳인가?

    무덤, 돼지(부정한 짐승): 깨끗하면 들어가서 더럽게 하는 것이 귀신의 일이므로 귀신을 부르는 따위의 일을 결코 해서는 안된다.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지 말라(신18:11).

4. 귀신의 가장 큰 특징을 찾아보자.

    영안이 있다. 영적인 일을 안다. 무당, 각종 귀신 들린 자도 우리의 본질을 알 수 있단다. 그렇다고 위대하거나 존중받아야 할 일이 아니다. 이적을 행하더라도 함부로 믿지 말라(요일 4:1, 살후 2:9).

5. 귀신이 예수를 보고 자기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는데 맞는 말인가?

    아니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려고 오셨다. 귀신을 괴롭히려고 오신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귀신의 입장에서는 괴롭히려고 온 셈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귀신을 염두에 두고 오신 것이 아니기에 '아니라'는 것을 답으로 하고 싶다. 우리을 위해서 오신 그 분을 굳이 귀신의 시각에서 하는 말을 맞다고 답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6. 왜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구해놓고 이 돼지 떼를 몰사시키는가?

    귀신에게는 이런 것이 당연하고 정상 아닐까? 싸움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해롭게 하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능력은 있고 힘도 있지만 하는 짓은 이 모양이다.

7.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신앙은 자란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앙의 필요 충분 조건이다. 귀신들은 하나님을 잘 알았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지만 저들은 저주와 멸망의 대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되고 저들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두려워지는 관계이다.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7)?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제자들보다 더 나은 지식을 소유하였지만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 불행이다. 일정한 때가 있으며 그 때까지는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들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8. 예수님은 돼지떼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이 없을까?

    귀신이 어디로 가던 그것은 예수님의 소관이 아니다. 다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했을뿐이다. 내버려두면 귀신이 들어가 있는 사람은 죽을 것이고 죽고 나면 어디로든 또 이동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귀신이 돼지떼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은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내버려두는 것이다.

9. 군대귀신은 무엇이라고 개명을 해야 할까?

    군대귀신 → 돼지떼귀신 → 물귀신

10.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슈퍼맨처럼 힘이 무척 세다. 제 정신이 아닌 슈퍼맨은 대단히 위험하다.
    무의미한 소리를 지르거나,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함
    제정신이 아니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귀신에게 이끌려 무덤 사이에 거함. 그 곳은 죽은 사람이나, 부정한 사람이 거할 곳이다.

11. 따르려고 하는 사람을 왜 떼어두시는가? 제자로서 불합격인가? 아니면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서 할 일이 더 많다는 뜻인가? 고독한 전도자?

    은혜를 받았다고 다 예수를 따라다녀야 하는 것이 아니다. 떨어져 있어도 할 일이 있다. 데가볼리라는 이방인의 지역에서 이 놀라운 예수의 사역을 증거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일을 행하셔도 비밀로 하라고 하셨지만 여기서는 전하라고 하셨다. 지역과 상황에 따라 해야 할 일이 달라질 수도 있다. 무조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만 따라 다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너희는 신앙운동을 해라. 우리는 고시 공부를 할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겠다고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고시 공부가 곧 신앙운동이 되어야 한다.

12. 돼지 치던 사람들이나, 소식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은 무엇에 관심을 가졌기에 두려워할까?

    돼지 치던 사람들은 책임 문제에, 몰려온 사람들은 호기심 아니었을까? 재산에만 관심을 쏟으면 뜻밖에 더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다. 귀신들렸던 사람이 멀쩡한 것을 보고 왜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경탄하지 않는가? 돼지 떼가 아까운가? 동료 한 사람보다는 돼지 2,000마리가 더 중요한가? 예수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돼지 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기에 떠나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먹지도 않는 돼지를 왜 이렇게 많이 치는 것은 이방인의 지역이란 뜻이다.

13. 예수님은 이 땅에서 슬픔을 많이 겪으셨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떤 슬픔을 가졌을까?

    예수님의 오심을 맞이해야 할 사람들은 배척을 하고 귀신들이 먼저 아는 것

14. 예수님은 귀신들의 말도 존중해 주었다. 무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귀신들도 귀신들의 때(멸망 받을 때)가 있다. 귀신의 영역을 존중하신다기보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존중하시는 것이다.

15. 돈 얼마, 자존심 한 쪼가리 때문에 천하보다 귀하다는 우리의 심령이 상하지 않는가? 꼴랑 점수 얼마 때문에, 알랑한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예가 너무 많은 현실이다. 재산 전부를 잃어버리더라도 예수가 내게 있다면 그것은 복이다. 반대로 예수를 잃어버리고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복일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최대한 요약해서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자.

    (예수를 쫓아낸) 돼지 떼의 주인이 되지 말자.

< 막 5:21-24, 35-43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16. 마가복음은 박해받는 로마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전장에서 복음은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했다. 그 예수는 자연을 다스리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여기서는 귀신(영적인 무리들)을 다스리는 분으로 소개된 셈이다. 다음에는 무슨 능력을 가진 분으로 나오실까?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상황이라면 예수님의 이런 능력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17. 다음과 같은 상황변화에 따른 야이로의 심경변화를 나름대로 정리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보자.

    1) 아이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세상이 무너짐, 어떤 어려움과 비용을 써서라도 고치고야 말겠다. 그런데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으로 되는 것도 아닌데...
    2)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희망? 돌팔이 아닐까? 나는 명색이 회당장인데 저 분은 어디서 어떻게 배웠으며 진짜로 능력이 있을까? 알아는 봐야지! 사람들 말로만 확실하다는데...
    3) 예수를 찾아 왔을 때:
    4) 많은 무리와 함께 이동하심: 좀 빨리 가자!!!!
    5) 웬 여인이 끼여들었을 때: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예수님 제발 다른 데 신경끄고 빨리 좀 갑시다.
    6) 죽었다는 기별이 왔을 때: 바람빠진 풍선 꼴이 아니었을까!
    7) 몇 사람만 데리고 이동할 때: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겠지만 불안, 초조...
    8) 집안 사람들의 비웃음: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잖아!
    9) 딸이 살아났을 때: 이 기쁨을 누가 알겠는가!

18. 거라사인들과 유대인의 차이가 있다면?

    이방인의 땅 거라사인에서는 쫓겨났지만 그래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환영했다: 거라사인들은 재산 손실에 관심이 더 많고 유대인들은 병고치는 일과 기적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영적인 곳과 육적인 곳 어디에 더 관심이 많은가? 데레사 수녀가 더 좋은가? 박찬호가 더 좋은가?

19. 야이로가 언제 가장 답답했을까?

    딸은 죽기 직전인데 예수님은 천천히 가고 사람들은 많고, 웬 여자가 끼어 들어 지체하는 순간이 가장 답답하지 않았을까?

20. 야이로의 이 답답함이 해결되려면 예수님께서 빨리 가시든지,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씀이라도 하시면 되는데?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백부장같은 믿음이 있었다면 좋았을 걸: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믿음이 잘 준비되어있는 것이 복이다. 일이 터진 다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보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믿고 평안할 수 있는 믿음이 평소에 준비되어야 한다.

21. 야이로의 믿음에 대해서:

    1) 훌륭하다면 어떤 점이 돋보이는가?
    회당장이란 신분으로, 소문은 났지만 무명의 선지자에게 복종하는 일: 목사가 집사에게 간구하는 형국인데(23절) 자식이 죽어갈 정도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도중에 포기하지 않은 점: 천천히 가시는 예수님, 웬 여자가 끼어 들어 지체함, 드디어 아이가 죽었다는 기별, 손님과 집안 사람들의 비꼼


    2) 별 것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답답하면 누구라도 그런 것 아닌가?
    백부장의 믿음과 비교하면 좀 약하다. '오셔서,' '손을 얹으사'
    많은 무리들이 있는 데 자신의 딸만을 위하여 가게 하시는 것 염치없는 짓이 아닐까? 만약 가르치고 계시다면 중지하고 가야하는데...

22. 아무리 비밀로 하라해도 소문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때가 될 때까지 소문이 퍼져도 천천히 퍼지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소문이 덜 나게 하려는 예수님의 지시사항은?

    몇 명의 제자만 데리고, 모든 사람을 내어 보내고, 많이 경계하심

23. 거라사에서 군대귀신 지폈든 사람에게는 가서 소문을 내라고 했는데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고는 왜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는가?

    거라사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으니 가서 전해야 했고, 유대인들은 더욱 거세게 왕으로 세우려할 것이니 소문내지 말라는 것이다.

24. '달리다굼'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으로 '달리다, 굼'이라고 읽어야 한다. 이 말이 평소에는 어떤 경우에 흔히 쓰였을까?

    엄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Wake up!): 딸이 실제로 죽었을까? 잤을까? 야이로의 집 손님들이 보기에는 죽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자는 것이다. 곧 깨어날 것이니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아는 자에게는 죽음이 거저 잠일 뿐이다. 성도의 죽음은 얼마 후에 깨어날 잠이다. 다시 죽지 않을 천국에는 밤이 없다(계21:25). 부활에 대한 소망만이 우리가 이 땅에 매이지 않고 초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5. 딸이 진짜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사람들의 비웃음(40): 비웃다니? 예수의 소문을 못 들었단 말인가? '아무리 능력이 있다해도 설마 죽은 사람을 살릴 수가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비웃었다.
    딸의 죽음을 알리는 사람의 말(35)도 비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직접 예수님께 말한 것도 아니다(36).

26. 꾸물대던 예수님의 동작이 어느 순간에 빨라졌는가?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모두 사람을 떼어놓고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다. 어쩌면 이 때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닐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의 죽음을 기다리고 계셨다(수 1:2). 인간의 절망이 곧 하나님의 때이다(출 14:13-14).

< 막 5:25-34 혈루증을 고침 >

27.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병에 시달리는 사람은 괴롭다. 이 여인의 아픔을 조목조목 짚어보자. 그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은?

    12년이란 세월, 혈루증, 많은 의원에게 괴로움, 재산상의 손실, 더 심하여짐: 추측컨데 결혼 생활은 불가능하고, 율법에 따라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가장 큰 아픔: 노력해도 효과가 없는 것 아닐까? 희망이라도 있으면 견딜 수 있는데...

28. 이 여인이 예수님께로 나오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사회적 어려움: 여자가 무리 가운데 섞이는 것, 뒤로 오는 것, 가까이 오는 것. 유명한 연예인에 접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예수님께 접근하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종교적 어려움: 부정한 자가 남에게 접촉하는 것(레15)은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29. 미루어 짐작컨데 이 여인은 본래 어떤 성품의 여인이었을까? 미친 여자처럼 뛰어와서 그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사려깊고 조용한 성품이었던 것 같다. 원래는 돈도 많았던 것 같다. 교양있고 뼈대있는 집안의 여자이었을 것 같은 데 그 놈의 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

30.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오게 된 동기가 있다면?

    소문을 들었기 때문: 우리도 소문을 많이 내야하는 데 어떤 소문을 낼까? 소문 듣고 왔는 데 와보니 별 게 없다는데 현실의 문제가 있다. 자신을 조금 희생해서 별 수 있는 삶을 살자.

31. 옷에 손만 대어도 낫는다? 훌륭한가? 미신인가?

    그의 믿음이 비록 훌륭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보시는 예수님 때문에 그것은 소중한 것이다. 가냘픈 그의 믿음과 안타까움에 기꺼이 반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자. (죽도시장 앞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꼭 저래야 되나? 하고 생각하는 우리와 어찌 보면 소용도 없어 보이는 미련한 짓을 하고 있는 그를 하나님께서 누구를 더 기뻐하시겠는가? 효과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부럽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 더욱 노력해야겠다고 격려를 받음)

32. 그렇다면 34절의 네 믿음은 무엇인가?

    연약하고 미신적인 믿음이었다해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셨음으로 믿음의 주체도 여전히 예수님이시다. '시험을 잘 쳤으니 자전거 한 대 사줄께'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미 사 줄 마음이 있었다. 아이의 말은 '시험 잘 쳤다고 자전거를 사주셨다' 옳은가? 옳은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그래 잘 했다. 1등만 해봐라 무슨 소원을 못 들어주겠니?' 이런 식이다.

33. 예수님의 옷은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 있을까?

    옷에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은 것 때문이다: 병자가 지나다가 무심코 마주쳐도 나았을까? 아니다. 그럼에도 예수보다는 옷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성의, 성배 자체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믿고 소유하거나 보려고 앴는 것이 그렇고, 안수 기도, 목사님의 기도, 특별한 장소를 강조하는 것도 그렇다. 예수님께 직접 향하는 내 기도가 중요하다.

    옷에 향하는 관심도 이것이 예수를 알아 가는 과정이라면 중요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믿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예수를 배우는 경우는 드무니까. 그런 경우라면 '저것도 신앙이라고?' 하지말고 계속 성장하도록 아는 사람이 도와주어야 한다. 비록 부족한 생각일지라도 순수한 믿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한나처럼 무능한 엘리의 말을 믿고 근심 빛이 없었든 것은 놀라운 일이다.

34. 부정한 여인이 만지는 것은 부정하다고 하는 데(레15) 예수님은 왜 다른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부정이 닿으면 부정해지지만 부정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능력 있는 예수님께 닿으면 오히려 깨끗해진다. 능력의 차이이다.

35.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질문의 두 가지 반응은 무엇인가?

    제자들: '아니,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뻔히 보시면서 그러십니까?' 사람들이 부딪힌 것입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가 없는 형식적인 신앙인의 모습이다.
    여인: '제가 그랬습니다.' 신앙은 아무도 모르는 하나님과 나만의 비밀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경험과 교제가 바로 신앙이다.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연애같은 것이다. 하나님에게 행한 것을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이상하다! 연애편지를 공개하고 싶은 사람하고 똑 같다.

36.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고 왜 물으셨을까?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다.

    이 여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칭찬, 격려,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 만약에 묻지 않았더라면 이 여인이 누리는 기쁨은 작았을 것이며, 두려움, 혹은 훔쳐온 것 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병을 고치는 능력이 옷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하고 나아가 영혼을 치료하는 인격적 교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만 고치고 사라지는 것을 예수님은 원하지 않으셨다. 만약 예수님이 묻지 않으셨다면 그 여인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옷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병 고치는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이 복음으로 인도하는 기초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37. 왜 예수님을 만나는(체험하는) 사람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두려워하는가?

    능력을 체험하기 전: 관심이 오직 병을 고치는 데에만 있었고 예수가 위대하다해도 관념 속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능력을 체험한 이후: 병이 낫고 나니 예수가 누구인가에 생각이 미침,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앞에 극도의 이기심으로 무장된 자신을 보는 순간에(=실체를 알고 나니) 두려워짐, 이사야, 베드로, 바울, 욥...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 계셨구나!

38. 이 본문으로 다음과 같은 주제로 설교를 한다면 어떨까요?

    이 여인의 신앙은:
    1) 겸손한 신앙-무리 가운데 조용하게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실천하는,
    2) 절대적인 신앙-예수만이 자신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믿은,
    3) 고백하는 신앙-예수님께서 물을 때 서슴없이 자기를 고백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여인을 이렇게 만들어 가시는 분도 예수님이시다. 초점이 여인에게로 향했다는 점에서 다소 감점이다. 예수님에게로 시선을 돌리도록 하는 설교이어야 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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