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4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2

마가복음 4장


1. 배에 앉아서 어떻게 가르쳤을까?

    우리나라 해안선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갈릴리의 해안선 중에는 뒤가 병풍처럼 일어서 있고,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로 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 왜 비유를 사용하시는가? >

2. 구약에 어떤 비유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많은가 적은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비유를 대단히 많이 사용하심 셈이다(2).

3. 갑자기 비유가 많아지기 시작한 이유를 3장과 관련지어보자.

    대적하는 무리가 많아진 이후부터 많아졌다.

4. 11절을 참고하면 비유의 두 가지 기능은 무엇인가?

    알 수 있는 자에게 더 잘 알게 하고 알 수 없는 자들에게는 감추어버리는 기능(대적자들, 내용을 알면 더 대적하기만 할 뿐이며, 모르는 그 자체가 동시에 심판이기도 함): 비슷한 예로, 권력자가 은행에 대출압력을 행사할 때도 '돈 좀 대출해 주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들 수 있다. 나중에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떼기 위함이다. 요즘 깡패는 돈을 빌려달라고 말한다. 들어서 믿고 따를 사람에게는 알게 하고 대적하려는 사람에게는 못 알아듣게 해야 당장 대적할 수 없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해준 비유에서 다윗이 알아듣기 전에는 얼마든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끝까지 들었을까?

5. 알레고리(Allegory)란 비유에 나오는 사실 하나 하나를 다른 의미와 부합시키는 방식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Allegory로 다음과 같이 풀이하기도 했다. <여행자=아담, 예루살렘=천상, 여리고=죽음의 땅, 강도=마귀, 제사장과 레위인=구약의 사역자들, 선한 사마리아인=그리스도, 기름=위로, 포도주=영적인 권면, 짐승=그리스도의 몸, 여관=교회, 데나리온 둘=사랑의 두 계명, 여관 주인=사도바울, 선한 사마리아인의 귀환=그리스도의 재림> 비유를 이렇게 이해하면 무엇이 문제가 될지 눅 10:25-37의 전후 문맥을 참고해서 생각해보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너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비유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의도하는 부분만 옳을 뿐이다. 중심되는 주제(말하려고 하는 것)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 첫번 째 비유에 대하여, 2-20 >

6. 너희는 누구이며 외인은 누구인가(11)?

    너희: 제자들, 외인: 대적자들

7. 당시에 예수님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가?

    죽이려 모의하는 자(3:6), 미쳤다, 귀신들렸다고 하는 자(3:21-22), 병 고침을 받고 기뻐하는 자(3:10), 제자들(3:14)

8. 이 비유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관한 것(10) ↔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너희가 좋은 땅이 되는 것이다? 문맥상으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되라'고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뿌려졌으므로 힘차게 뻗어나갈 것이다.

9. 이 비유의 제목은 '여러 종류의 밭'인가 '씨 뿌리는 비유' 인가?

    밭에 관심을 두면: 너희는 좋은 밭이 되어라. 곧,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라는 뜻이다.
    씨에     〃     : 좋은 씨를 골라야 한다. 좋은 밭을 만나기만 하면 결실하리라.
    뿌리는 자에 관심:
    비록 결실치 못하는 경우도 있긴 하겠지만 반드시 결실을 거두리라.

    좋은 씨를 골라 좋은 밭에 뿌리는 이 모든 과정은 '뿌리는 자에게 달려있는 문제'이다. '대적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풍성한 자신의 수확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의 비밀이다. 그러면 좋은 땅이 되라고 가르치면 안되나? 그것은 현재 자신의 의견이지 그 당시의 예수님 의견은 아닐 것,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네가 돌밭이든 자갈밭이든 씨뿌리는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실 것임'을 천명하신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10. 열매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20):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참고 요 6:29). 나의 어떤 행위는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 일뿐이다.

< 두번째 비유에 대하여 4:21-25 >

11.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22)는 말은 원문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좀 쉽게 고치면 '드러내려하는데 숨길 수 없고 나타내려하는데 감출 수 없느니라'고 할 수도 있고 '드러나지 않고 숨길 수 있는 것은 없고 나타나지 않고 감출 수 있는 것도 없다'가 될 것이다. 핵심이 무엇인가?

    등불을 아무리 감추려해도 끝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등불을 비추려하시는데 이것을 막으려는 자나 보지 않으려는 자가 있어도 끝내 온 세상을 비추고야 말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이 아무리 방해를 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죽인다해도 예수님이 던지신 빛은 온 세상을 밝게 비추고야 말 것이다.

12. 본문에는 등불을 가져오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원문에는 사람이 없다. 다시 번역한다면 '등불이 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놓이려 함이냐 등경 위에 놓이려 함이 아니냐?'이다. 마치 등불이 사람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 비유의 주체가 예수님이면 무슨 뜻이 되는가?

    '이 빛으로 세상을 밝히고 말리라' 는 자기 선언이 되는 셈이다. 이 비유의 주체를 우리라고 하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가 되겠지만 주체가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선언적인 의미가 될 수밖에 없다.

13.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쉽게 표현하면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말씀이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말씀을 잘 듣고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은혜도 그만큼 크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에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주의해서 새겨 들으라. 그러면 더 많은 보너스까지 있을 것이다.

14. 일련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강력하게 권고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이 복음의 풍성함, 즉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하는 구절은?

    더 받으리니(24): 천국은 빈익빈 부익부이다. 맛을 아는 사람이 더 좋은 것을 많이 먹게되는 반면에 맛을 모르는 사람은 양만 채우고 만다. 예수믿는 재미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더욱 더 큰 복을 누리면서 산다. 온 세상을 밝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풍성한 은혜가 보장되어 있다. 그것은 이 땅 뿐만 아니라 내세에까지 우리에게 주어질 기쁨의 원천이다.

< 세번 째 비유에 대하여, 4:26-29 >

15. 문맥 파악을 위하여 다음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1)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2)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한다(싹이 나고, 이삭이 나고, 곡식이 맺는 데 모르다니): 눈에 자라는 것이 보이지만 그것이 아는 것이 아니다. 씨가 자라는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힘이 있으나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3) 땅이 스스로: 농부의 노력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농부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땅이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는 요소가 없다면 농부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

16. 중심되는 강조점은 무엇인가?

    씨는 저절로 자라는 능력이 있다. 농부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하늘나라는 자라난다. 하늘나라는 우리들이 뿌릴 수는 있어도 열매맺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17. 그렇다면 농부의 수고나 할 일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일지라도 농부는 농부의 일이 있다. 최선을 다하여 좋은 밭에 뿌리고, 덮어주고 김도 매고 물도 주어야 한다: 이 비유가 농부의 역할을 소홀히 하란 뜻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한다. 이 비유를 잘못 적용하면 '복음은 자생력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저 뿌리기만 하면 되고, 자라게 하는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아무데나,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뿌리기만 하는 사람이 생긴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이 말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에게 어울리지만 공부하지 않으면서 이 말을 애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진정으로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에게 속히 열매가 맺어지지 않아서 조급할 때 이런 말로 위로하여야 할 것이다. 아이를 낳을 수는 있어도 자라게 할 수는 없다. 비록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뉘실지라도 그것 때문에 아이가 자르는 것은 아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따로 있다. 그러면 부모의 애씀은 소용없는 일이란 말인가? 나라를 다스리는 일, 병 고치는 일(하나님은 치료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 결혼하는 일... 우리는 피상적이고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내면적이고 바탕은 오직 하나님께 달린 일이다. 최선을 다하자. 그러면서 일이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자.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다. 열매는 저절로 자란다고 해도 농부의 그 수고를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수고해야 한다. 씨뿌리는 자에 의하여 씨가 뿌려졌음을 기억하자. 방에 드러누워 있음에도 씨가 자란다고 말하지 않는다.

18. 예수님의 기적적인 사역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순식간에 건설할 수 없었을까? 이 비유는 이런 질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일정한 세월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자라난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점진적으로 신앙은 성숙하여간다.

19. 씨, 싹, 이삭, 열매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가?

    씨: 감춰져 있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싹: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이삭: 세계로 뻗어나가는 하나님 나라
    열매: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20. 자라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나면 농부는 뭐야? 농부가 섭섭하지 않은 이유를 본문에서 찾으시오.

    추수의 기쁨은 뿌리고 가꾸는 자의 것(비록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을 지라도)

21. 그렇다면 이 비유의 제목을 붙여보자.

    저절로 자라는 씨: 농부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더 관심이 있는 비유다. '자라는 씨'라고 한다면 자라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우리의 행위를 강조할 오류의 위험이 있다.

< 네 번째 비유에 대하여, 4:30-32 >

22. 겨자를 왜 나물(푸성귀)에 비유했을까?

    겨자는 실제로 나물 종류이다.

23. 왜 하필 겨자씨에 비기는가?

    씨 중에 가장 작은 씨이기 때문: 겨자씨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채송화씨보다 작다고 한다. 언뜻보면 조금 큰 먼지 정도.

24. 천국은 크게 자랄 뿐만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보인다. 그런 예를 비유 중에서 지적한다면?

    나물이 마치 나무처럼 자라는 것: 나물이 자라서 가지가 생기고 새들이 깃들일 그늘이 있는 나무처럼 자란다. 단순히 키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달라질만큼 자란다. 그런 예는 금속에서도 볼 수 있다. 순도가 몹씨 높아지면 특성이 변하는 예가 많다. 나물이 변하여 나무가 되는 것이 천국의 비밀이다.

< 33-35 >

25. 예수님의 비유를 청중들이 거의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왜 예수님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았는가?

    어차피 예수님을 죽으러 왔다. 만약 모두가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예수를 죽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가르쳐 둔 것일까?

< 4:35-41 >

26. 풍랑이 정말 거셌다는 증거가 있다면 무엇인가?

    어부출신 제자들이 풍랑을 겁내었다는 점: 어부 출신 제자들이 목수 출신 선생님을 깨우다니! Irony가 아닌가?

27. 예수님께서 몹시 피곤하셨다는 증거는?

    어부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풍랑이 거센데 그냥 잠을 잘 수 있었다: 예수님도 피곤함과 배고픔과 고통을 다 느끼시는 분이었다.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연약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다 겪으셨다.

28. 제자들이 책망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두려워함? 불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만한 때가 되었음에도?

29. 마가는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간, 장소, 주변상황, 배에 물이 가득 참, 다른 배들,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심,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제자들의 울부짖음, 제자들의 당황함... 이렇게 자세히 묘사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예수는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제자들도 설마 예수님이 그런 분이신 줄은 몰랐다. '저가 뉘기에?'라는 반응이 그것이다. 위대한 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30. 풍랑에 대하여 예수(믿는 자의 표본)와 제자들(믿지 않는 자의 표본)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공통점: 함께 풍랑을 당한다는 점, 성도건 아니건 간에 자연의 법칙에 따른 고통은 동일하게 일어난다. 다만 대처하는 방법이나 자세가 다를 뿐이다.

    차이점: 받아들이는 자세나 태도가 다르다. 일어나는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면 두려움이 적어진다. 전 7:13-14을 참고하면 장래를 알지 못하게 하셨다. 연단, 선물을 주시기 위함, 징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하심이다. 폭풍 속의 평화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성도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마가 복음이 당시에 박해받는 로마의 성도들을 염두에 둔 글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1. 앞에서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든 예수님을 위대한 교사라고 한다면 여기 모습은 무엇이라고 할까?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자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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