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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2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2

마가복음 2장


1.
중풍병자를 몇 사람이 데리고 왔는가?

    다수의 사람들, 혹은 마을 사람들; 형편이 아주 딱해서 온 동네 사람들이 합세해서 데리고 온 것이다. 침상이 네 사람이 들기에 편했을 뿐이다. 문장의 주어는 '사람들이' 이다. 네 사람은 그들 중에서 운반책일 뿐이다.

2. 이 중풍병자가 병도 낫고 구원을 받게된 것은 무엇, 혹은 누구 때문인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의 은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씀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형편이 아주 딱해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합세해서 데리고 오는데 단지 운반하기 편리하기에 네 사람이 메고 온 것뿐이다. 그러니 믿음이라고 해야 무슨 큰 믿음이 있었겠는가? 예수님께 가면 고칠 수 있다는 희망정도는 분명히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그들의 믿음으로 인정해주시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씀이 가능하다. 따라서 네 사람과 중풍병자의 믿음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런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중요하다.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의 믿음조차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슨 건덕지라도 없을까해서 우리 속에서 찾아내신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같지도 않은 이 작은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그렇다고 맨날 그런 애기같은 신앙으로 살아서는 곤란하다. 차츰차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자라야 한다.

3. 교회에는 사업차 오는 사람도 있고 연애사업을 위해서 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유로 왔건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온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는 교회가 문제다. 마치 본문의 중풍병자에게 생긴 어떤 변화와 유사한가?

    처음에 원한 것은 병 고치는 것이었지만 그들이 받은 것은 영혼의 구원이었다; 연애차 왔건, 장사차 교회에 왔건 그 목적만 달성할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잘못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교회에 있는 것이지 '왜 장사하러 교회에 오느냐?'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4. 발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꽉 들어찬 집의 지붕의 뜯었으니 아래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무리 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를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무례해도 되나?

    예의보다 간절하게 사모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믿음의 수준은 낮았을지라도 적극적이었다. 남이야 뭐라고 비난하던 이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뜨거운 우정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적극성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방편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이다. 가만히 누워만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계시를 받고 나가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자가 된 사람은 없다. 잘되건 못되건 형제를 위해서 움직이자. 내가 푼수짓을 하는 것이 형제들을 위하여 즐거운 일이 된다면 기꺼이 푼수가 되자. 모든 사람의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진정으로 형제를 위하는 길이라면 과감하게 시도해보자.

5. 만약 여러분이 이런 입장에 처했다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씀과 '일어나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씀 중에 어느 말을 더 애용할 것인가? 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능력이 없어도 표가 잘 안 나니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서기관들을 위하여 부수적으로 '일어나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씀도 하셨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애매하고 검증할 수 없는 대답은 능력도 실력도 없는 점쟁이가 하는 짓이다.

6. 서기관들이 가장 분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란 뜻이다(7).

    <13-17>

7.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셨단다. 그러면 언제 또 바닷가에서 가르치셨는가?

    1:16-20;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를 부르셨던 적이 있었다. 마가는 장소의 이동 과정을 비교적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갈릴리 해변 → 가버나움 회당 →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 → 다른 가까운 마을, 온 갈릴리 → 바깥 한적한 곳 → 가버나움 →다시 바닷가로!

    그리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정돈하며 읽다보면 뜻하지 않은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8. 레위가 부름을 받을 때의 모습이 다른 제자들(1:16, 18)과 닮았다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가버나움과 갈릴리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행한 일로 이미 소문이 널리 퍼진 뒤인지라 바닷가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북세통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그 근처에서 레위라는 사람이 열심히 세관업무를 보고 있었다. 레위도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지만 나갔다가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또 무슨 더러운 꼴을 볼까 싶어서 나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을 불렀을 때 그 제자들은 바다에 그물을 던지기도 하고 그물을 깁고 있기도 했다. 레위는 세관에 앉아 있었다. 공통점은 자신들의 일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9. 세관에서 일하다가 '나를 좇으라'는 한 마디에 일어나 좇을 수 있나? 욕을 얻어먹을 망정 어떻게 얻은 직장인데?

    나름대로 진리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단순하게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다가 예수를 만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고 어쩌면 일에 충실한 것 이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인격에 매료되어 있었으나 차마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일에 충실하면서도 진리에 대한 열망이 있는 자이었을 것이다.

10. 예수께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는데 왜 자기 집으로 갔나?

    고별 파티를 하러 간 셈이다; 세리와 죄인들(레위의 직장 동료들이거나 친구들-일반인에게는 이렇게 알려짐)에게 자신의 떠남과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것은 기꺼이 예수를 좇기로 작정한 증거이기도 하다.

11. 죄인들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바리새인들의 생각; 전염을 피하기 위하여 병든 자에게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한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부당하다. 예수가 의인이거나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죄인들과 함께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생각;
    고치기 위하여 병든 자에게 가까이 해야 한다.

    자신을 지키는 삶을 살 것인가? 남을 고치는 삶을 살 것인가? 예수님이 되자는 뜻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살자는 뜻이다. 어릴 때 '믿지 않는 친구를 사귀지 말라' '교회에서만 살아라'고 배웠다. 나쁜 물이 든다는 것이다. 철이 좀 들고 생각해보니 좋은 태도가 아니더라. 내가 왜 물이 들어? 물을 들여야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가난한 자, 병든 자에게 다가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서 이 낮고 낮은 땅으로 죄인들을 찾아오셨음을 잊지 말자. 그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라면 당연히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약한 자를 위하여 더 약해지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

    불신자들과 함께 어울리다보면 자신의 적은 신앙마저 다 팔아 먹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배우기에 더 힘을 써야한다. 열심히 자신의 신앙을 다지면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열심도 있어야 한다. 결코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었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이다. 재산을 다 떨어 먹고 돌아온 탕자가 아들로서 온갖 기쁨을 누리지만 다시는 집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그 한번의 가출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엄청난 아픔을 견디셨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결코 죄를 다시 저지를 수 없다. 믿는 성도의 범죄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잘못해도 또 용서해주시겠지?' 분명히 또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에게 또 못을 박는 행위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12. 예수님의 입장에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자와 스스로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반가울까? 왜?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자; 안 그러면 할 일이 없어지잖아! 선생님 없이도 공부 잘하는 학생이나, 의사 앞에 건강한 사람, 정비사에게 절대 고장 안 나는 새 차는 그리 기분 좋은 게 아니다. 결국 예수님은 고장난 차만 찾아다니는 정비사, 환자를 보고 뛰어가는 의사 같은 분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의인을 제쳐두고 죄인에게로!

    <18-22>

13.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던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한 이유를 자신들에게서 찾는다면?

    금식해야 할 이유에 문제가 있다. '남들은 다 하는데 너희는 왜 안 하느냐?'는 것은 금식의 의미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하는 탓이다. 의미도 모른 채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형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금식뿐만 아니라 기도, 헌금, 구제, 안식일 문제 등에서...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다른 애들은 다 공부하는데 너는 왜 안 하느냐? 는 식의 말은 절대 삼가야 한다.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야지 남들과 비교하면 하던 공부도 팽개칠 가능성이 더 많다. 형과 아우 사이를 비교하는 일이나, 자기 남편을 이웃집 사람과 비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14.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던 사람들에게 한 예수님의 답변의 요지는 무엇인가?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다. 때를 알아야 한다. 이때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 금식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맹목적으로 정해진 기간이나 규정을 지켜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분별하라는 것이다. 당시에 금식기간이라 해도 혼인잔치의 경우에는 금식을 하지 않았다.

15.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는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요점은 금식할 때가 있고 잔치를 할 때가 있으므로 때를 잘 분간하라는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의미도 모른 채 종교적인 행사만 치르지 말고!

16.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이다. '금식'과 '잔치'만큼 다를 것이다.

17. 새 포도주와 생베 조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시대, 즉 율법이 아닌 믿음, 행위가 아닌 은혜의 시대.

18. 안식일의 문제(23-28)는 두 번째 도전적인 질문이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랐을까? 길을 가기 위해서 잘랐을까?

    뒤의 다윗의 이야기를 참고하면 배가 고파서 자른 것이 틀림없다.

19. 이삭을 자르는 일이 왜 안식일에 못할 일인가(참고, 신 23:24-25)?

    남의 밭을 건드렸으니(×), 안식일에 일(자르고, 비비고)을 했다는 뜻으로(O); 다른 날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신 23:24-25). 이삭을 자르는 것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추수, 타작)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20. 예수님의 말씀은 다윗이 규정을 어겼으나 괜찮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주일에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은 괜찮다는 뜻인가? 만약 다윗이 또 가서 달라고 한다면 계속 주었을까? 떡을 주면서 조건은 없었는가? 무슨 정황이 참고되었을까?

    다윗의 경우는 규정위반인 것이 분명하나 그로 인해 아무 책망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을 보아 위급한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여기서 추인 하신 셈이다. 규정에 매인 안식일보다는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제자들이 밀을 자른 것도 다윗만큼 시급한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본다면 바리새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인 셈이다. 본격적인 안식일 논쟁은 다음 장에서 계속된다.

21.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규정의 적용이 사람을 위한 것이면 규정을 어겨도 된다는 뜻인가?

    안식일을 지키는 기준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뜻이다. 새 부대와 생베 조각에 어울리는 행동기준이 필요하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안식일 규정은 더 이상 무의미해진다.

22.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도'는 어느 구절과 병행되는가?

    2:10절;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해석하고 시행할 권위가 있다는 선언이다. 이것이 예수를 죽이려고 공모하는 원인이 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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