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마가복음

[스크랩] 마가복음 3장 강해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52

마가복음 3장


1. 예수님의 행동을 엿보고 있는 사람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을 대비시켜 보면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엿보고 있는 사람들의 질문;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예수님의 질문;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차이점; 안식일에 관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예상 질문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있다. 반면에 예수님의 질문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아예 '하지 않는다'는 답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누가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겠는가? 안식일의 의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이다.

2. 같은 주제로 두 번의 충돌이 있었는데 2장 끝에 있었던 충돌과 3장 초에 나오는 충돌을 비교해 보면 나중의 것이 더욱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2장의 충돌; 제자들의 잘못에 대한 해명성 발언
    3장의 충돌; 예수님 자신이 고의로 규정을 어김;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더욱 도전적이다.

3.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서 한 편 손 마른 자를 한 가운데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 장면을 상상해 보면서 예수님의 의도를 짐작해 보자.

    이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도 고치지 말라는 말이냐? 실상을 보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힐문이다. 없는 사람 욕이야 할 수 있지만 면전에서 욕을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아무리 규정이 중요하다고 해도 실제로 손 마른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안식일에 고쳐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4. 바리새인들은 아무 일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완악하다고 하시며 노하시는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다; 불쌍한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도 이것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를 따지는 것이 그들의 일이고 불쌍한 사람을 고쳐놓고 보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이다. 바로 이것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예수님의 자명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잠잠하다는 것은 거부 의사를 나타내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들의 완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5.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대적하느라고 나가서 평소에는 원수지간이던 헤롯당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그들의 완악함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어서 외세를 배격하는 애국주의자들이다. 그러면 헤롯당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당의 이름을 참고로 해서 짐작해 보자.

    헤롯당은 정치적인 사람들로 헤롯 가문을 위하여 외세를 등에 업은 사람들이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매국노인 셈이다.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무리들이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예수 죽이는 일에 협력하고 있다.

6. 손 마른 자의 상태가 그렇게 긴급을 요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다음날 고치시면 안될까? 굳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야 했을까?

    예수님은 그들의 그릇된 안식일에 대한 생각을 고치시려고 고의로 부딪히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그릇된 안식일 개념을 고쳐놓으시려는 것이다. 그런 노력 덕분에 우리가 온전한 안식일을 누리고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안식일의 참 의미는 창조의 기쁨을 나누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날이다. 주일의 참 의미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재창조의 기쁨을 나누며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날이다.

    <7-19>

7. 바닷가로 물러 가셨다는 말은 사실은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피하여 간 것이다. 이렇게 피해다녀도 되는가?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때가 되면 스스로 죽음을 찾아가신다. 우리는 흔히 옳고 그름은 잘 따지면서 매사에 하나님께서 때를 정해 두고 계신다는 것을 잘 잊어버린다. 내 뜻대로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의심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때가 있으므로 믿음으로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금하신 이유도 마찬가지로 아직은 때가 아니며 그런 일로 인하여 그릇된 메시야관을 사람들이 가지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예수를 왕으로 삼고 로마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사전에 막으시려는 것이다.

8.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출신지별로 나누었을 때 가장 먼 지역은 어느 어느 지방일까?

    시돈과 이두메; 가장 북쪽이면서 이방지대는 시돈, 남쪽의 이방인의 땅은 에돔을 뜻하는 이두메이다.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이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뜻한다.

9.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이렇게 많아진 원인은 무엇인가?

    가르침보다 하신 큰 일(주로 병을 고치는 일);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지지는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할 때 이 들 중에 많은 사람이 동조했을 것이다. 병고치는 놀라운 이적이 사람을 많이 불러모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지는 못한다.

    진정한 교회는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이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을 때 세워지고 성장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 16:31)'고 하셨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외쳐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진정한 제자는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가능해진다.

    밀려드는 사람에게 거리를 두기 위해서 바다에 배를 띄우는 이유가 바로 가르치기 위함이다. 병을 고치는 것보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가르치던지 배우던지 해야 한다.

10. 베드로는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라고 고백해서 크게 칭찬을 받았다. 귀신들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서 꾸중을 들었다. 무슨 차이인가?

    귀신은 심판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귀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무리 그 말이 맞다해도 예수님께서 들으시기를 원치 않는다. 비록 어설퍼도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들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11. 12제자를 선택하기 전에 왜 산에 오르셨는가? 체력으로 제자를 선택했을까?

    기도하기 위함이다; 이런 질문에 혼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성경공부 방법으로 그리 좋지 못하다. 다른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 제일 좋다. 눅 6:12-16절에 답이 있다. 어떻게 찾느냐구? 외워서 알고 있으면 가장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관주 성경, 성구사전이라는 것이 있는데...

12. 무림의 고수들이 제자를 선택하는 방법이나 유능한 아르바이트 교사가 가르칠 학생을 구하는 방법과 비교해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선택한 방법이나 결과는 낙제점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조건에 맞는 자를 철저히 검증하고 난 후에 선택한다; 유능한 아르바이트교사는 사례를 많이 준다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학생은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자신이 유능하다고 소문이 나기 위한 기본적인 처세술이다.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들은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도 제자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물론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는 그랬다.

13. 열두 제자 중에서 누가 가장 마음에 드는가? 혹은 누구를 가장 닮고 싶은가?

    한 명도 없음; 적어도 성령이 임하시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은 닮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물론 개인차는 있을 수 있지만.

    1) 시몬 베드로(게바, 바요나 마16:17); 이름 뜻은 반석이지만 반석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했다면 언제? 그는 비록 과격하고, 비겁하고, 혈기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의 굳건한 반석이 되었다.

    2-3) 야고보와 요한; 보아너게(우뢰의 아들); 얼마나 시끄러웠을까? 좌의정, 우의정의 장본인(치마바람의 장본인)

    4) 안드레; 베드로와 형제,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를 따름

    5) 빌립;오병이어의 기적 때 시험받음

    6) 바돌로매; 돌로매의 아들(어쩌면 나다나엘이 아닐까?), 항상 빌립과 함께 언급됨

    7) 마태; 세리 레위 (마가는 세리라고 언급하지 않으나 마태복음에서 본인이 언급함)

    8) 도마; 디두모(요 21:2) 의심(요 20:25)과 용기(요 11:16)와 고백(요 11:16, 20:28)로 유명해짐(이성적 신앙인)

    9)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작은 야고보라고 불렸다(막 15:40, 마 27:56).

    10) 다대오; 눅 6:16의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본명일 것이다.

    11) 가나인인 시몬; 가나안인이란 말은 그가 '열심당원'이었음을 뜻한다.

    12) 가룟(Iscariot) 유다; 배신자

    4명은 어부, 세리 1명, 독립운동가 1명, 나머지 6명은 언급 없음. 제자선택은 성공적인가?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실패작이다. 12제자는 새 이스라엘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들이 성공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탓이기에 어떤 사람을 제자로 선택했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복음은 이런 사람들을 들어서 지혜로운 자의 입을 틀어막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고전 1:26-29).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이렇게 자라났다.

14. 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가?

    함께 있고,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게 하려 하심(15); 혼자서 하기에는 일이 벅차서일까? 함께 있어야 할 인간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크게 보면 이들에게 맡길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함께 있으면서 제자로서 갖추어야할 1) 교육과 훈련과 교제를 나누었고, 2) 파송해서 전도도 하고 3) 귀신도 쫓아내게 만들었다. 이것은 오늘에도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삶이어야한다.

    <20-35>

15.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는 바람에 식사할 겨를도 없었단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식사할 여가가 충분하거나 먹는 일에 너무 충실하면 안 되는가?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루 이틀 하고 말 것도 아니란 점을 감안해서 건강과 자신을 돌보는 노력도 필요하다.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가 아니라 효과적이고 많은 일을 하기 위하여 너무 바쁘면 안된다(막 6:31). 건강을 돌보지 않고 무조건 일만 열심히 하는 것도 현명하지 않다. 어느 목사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이다. '책 사지 말고 밥 사 먹으라!' 본문은 그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일 뿐이다.

16. 식사할 겨를도 없도록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염치도 없나?

    몰려든 사람들은 자기 한 사람의 입장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프거나 병이 들면 간호하는 사람이 더 힘들다. 사람은 남의 입장에 서기가 어렵다. 이런 일을 이왕 맡았다면 각오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17. 친속들의 기록(21)과 모친과 동생들의 기록(31)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마 친속들이 설쳐대는 통에 모친과 동생들이 소극적인 태도로 이끌려 왔을 것이다.

18. 예수님의 친속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믿고 잡으러 온 모양인데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으로 추측을 해보자.

    내부적인 요인: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현재의 모습보다는 요셉의 아들로만 기억하거나, 어릴 적 모습만 기억하는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악의적인 소문이나 시기심이 더 위력적이다.

    외부적인 요인: 서기관들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다. 탈영이나 인질사건이 발생하면 제일 먼저 애인과 어머니를 동원하는 것처럼. 그럴 때를 대비해서 군에서는 이동하는 곳마다 애인 이름과 주소를 적으라고 한다. 없는 사람은 애로사항이 적지 않다.

19. 예수에 관한 두 가지 소문이 난 모양이다. 미쳤다는 것과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다. 악의적인 이 소문의 출처는 누가 퍼뜨렸을까?

    아마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22):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도 전에 그저 해대는 이야기아닌가? 우리가 이단을 상대하는 방식도 이런 것 아닐까?

20. 이단이라고 덮어놓고 배척해야 하는가? 아니면 들어보고 판단해야 하는가?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요일 4:1-3). 그렇지 않으면 진정으로 신뢰할 사람이 필요하다. 무조건 상종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식의 대응에서 벗어나 상종해도 이길만큼의 실력을 기르는 자세로 살자. 자신을 더 정확하게 살피든지 아니면 적을 더 자세히 살피든지 해야 한다. 자신이 신앙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채 적을 살피는 것은 더 위험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이단을 상대하지 않는 방법을 쓴다. 최소한 교리나 신조를 통하여 자신의 울타리만이라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21.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서기관들의 비난에 대하여 어떻게 답하시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스스로 분쟁하지 않는다; 내가 귀신이 들렸으면 스스로 망할 짓을 왜 하겠는가? 늘 이상한(?) 대답을 하시던 예수님의 답변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 알아듣기 쉬운 답이다. 국가든 단체든 외부의 침략으로 망하기보다 내부의 비리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가 더 많다.

22. 예수를 미쳤다고 하는 것과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것을 비교해보자. 무슨 차이가 있으며 누가 더 어리석고 악의적인가?

    미쳤다: 내용도 모르고 방방거리는 사람이다. 미쳤다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어떻게 설명하나? 어리석은 사람이다.

    귀신이 들렸다: 능력은 인정하는 셈인데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을 부정함으로 상식이하의 발언이 되고 말았다. 악의적이다.

23. 서기관들의 주장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이라는 말인데 '강한 자를 결박해야 세간을 늑탈할 수 있다'는 말씀이 어떻게 그에 대한 반박이 되는가?

    귀신들을 쫓아낸 것은 내가 귀신의 왕이기 때문이 아니라 귀신의 왕을 결박했다는 뜻이다.

24. 예수님의 비유에서 자신을 강도로 설명했다. 설마 구세주가 어떻게 강도짓을 할 수 있는가?

    사탄의 입장에서 보면 날강도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구세주이지만.

25.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누가 저지르고 있으며 어떤 죄인가?

    서기관들이 하고 있는 악의적이고, 고의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죄; 이런 죄 때문에 걱정이 되는 사람은 결코 이런 죄를 저지를 수가 없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고의로 거부하는 행위이다. 결국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성령훼방죄이다.

26. 모친과 동생들에게 이렇게 매정할 수 있나? 끝내 못 만났을까?

    가족에 대한 의무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소중함을 가르치셨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결코 가족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으셨다. 국가대표로서 시합 중에 아버지의 위독함을 듣고도 계속 시합을 마쳤다면 임종을 지키지 못한 반인륜인가? 그것을 칭송한다고 해서 부모를 돌보지 말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은 진짜 우리의 가족인가? 믿는 형제가 가족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때문에 가족에 대한 의무를 함부로 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27. 가족에 대한 의무보다 믿는 형제가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가족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만큼 믿는 형제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28.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누구를 보고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는지 생각해보자.

    예수님 곁에 둘러앉아 있는 것;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요 6:29).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에 다른 일들이 따라와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면 천국의 촌수는 어떻게 되는가? 이 모든 관계가 동시에 가능하다!

◇늑탈(勒奪);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빼앗음
◇핍근(逼近);매우 가까이 닥침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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