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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스가랴

[스크랩] 스가랴 12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57

스가랴 12장 주석

 

  슥 12: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 여기 "경고"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

로 맛사이니 협박하는 예언(threatening Prophecy)을 가리킨다.  이것은 경성 하지 않

는 자를 깨우치기 위한 교훈이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

사대" - 사 43:15; 암 4:13 참조.  이렇게 하나님을 창조자로 칭호 하는 목적은, 그가

창조적 능력으로써 이 아래 관설된 위대한 일을 하실 자이심을 알리려는 것이다.  "하

늘을 펴신"다 함은, 천공에 무수한 천체들을 유지하심을 이름이다.  하나님 께서 물질

계에 하신 일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이 일이다. 오늘날 발달된 문명도 천체들의 세

계 곧, 우주를  지향하고 새로운 발달을 도모 하고 있다.  그 세계는 크고 오묘하다.

"땅에 터를 세우심"은 또 한 가지 그의 일의 장관이다.  땅은 어떻게 그 궤도 대로 운

전되도록 구조 되었는가?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초로 한 것이다.  "사람 안에 심령

을 지으신 자"도 전능하신 하나님 밖에 없다.  심령은 위에서 마랗다 하늘이나 땅 보다

오히려 만들기 어렵다.




  슥 12:2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 에게 흔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

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 열국은 예루살렘을 전취 하려고  왔으나

드디어 힘을 잃고 패망하게 될 터이다.  그것은 마치, 에루살렘이 저들에게 마취제 같

이 된 셈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에서 취하게 하는 음료로 비유된다(사 41:17).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통하여 열국에게 진노를 나타내실 것이다.

   이 예언은, 신약 시대에 교회가 이방 세력의 박해를 받는 중에도 오히려 복음은 승

리할 것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Lange).  "국민"이라는 말은 민족들을 가리킨다.




  슥 12: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 여기 "모든국민"

은 열국의 민족들을 가리킨다.  "무거운 돌이 되게" 함은, 무거운 돌을 쳐들어 보려는

자가 결국 그 자신이 상처를 당하고 말 것을 가리킨다.  열국은  예루살렘을 치려다가

도리어 자기들 편에서 손해를 보고 만다. 이 "돌"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단 2:45; 사 28:16; 슥 3:9; 눅 20:17; 마 21:44).

   마르티(K. Marti)는, 여기 "무거운 돌"에 대한 말씀은, 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수입

된 경기의 풍습에서 왔다고 한다.  곧, 청년들이  힘내기를 하면서 무거운 돌을 쳐들었

는데 그리 하다가 흔히 몸을 상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합당치 않다.




  슥 12:4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자를 쳐서 미치

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 이 귀

절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적군들의 병력을  권능으로 꺾을 것을 예언한다.  놀라게 하

거나 눈이 멀게 하여 패전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왕하 6:18; 삿 7:22; 삼상

14:20).  그리고 그가 "유다 족속은......도랑보" 신다고 하였으니, 그런 일은 역사상

에 있다(삼상 7:5-11; 느 1:11; 사 37:36).

  이 귀절에 기록된 세 가지 재앙("놀라게"함, "미치게"함, "눈 멀게"함) 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내릴 것으로서, 모세가 일찌기 말한 바도 있다(신 28:28).  그렇다

!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언제나 천벌로  망한다.  불란서 왕이 기독교를 반대하며

개혁자 안드류 리베트(Andrew Rivet)를 위협할 때에 리베트는 왕에게 담대히 말하기를

, "하나님의 교회는 많은 쇠망치를 부러친 쇠모루입니다"라고 하였다.




  슥 12:5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찌라 - 곧,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예루살렘       거민들이 힘이 된

다는 뜻이다.  그들(예루살렘 거민들)이 저 지도자들에게 힘이 되는  원인은, 그들(예

루살렘 거민들)이 하나님 곧, 만군의 여호와의 택한 백성이므로 그의 보호를  받기 때

문이다(10:12, 3:2, 1:17, 2:11).  시 87:2 참조.

  이렇게 단체의  일이 잘 될 때에는, 그 단체의 성원들이 서로 높인다.  곧, 남이 나

에게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 힘의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




  슥 12:6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 이것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곧, 복음 전도자들이

모든 불신앙과 죄악의  적들을 이기고 교회도 왕성케 할 것에 대한 비유이다(Pusey).

   교회의 원수들은 언제든지 교회를 없이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교회(예루살렘 사

람으로 비유되었음)는 늘 그 본곳(제 자리에 그대로)에 있다.




  슥 12:7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유다 지방을 예루살렘보다      "먼저 구

원"함은, 구원이 하나님께로서 온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유다 지방은  예루살

렘과 달라서 방위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원이  거기 먼저 임하였다면, 그것

은, 전연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집"(곧, 이스라엘 왕족이나 예

루살렘 거민)과 꼭 마찬가지로 유다 지방 백성도 사랑 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오히려

방위가 없는 유다 지방 사람들을 먼저 구원 하신다(렘 9:24; 고전 1:31; 고후 10:17;

갈 3:28; 눅 10:20; 약 2:5).




 슥 12:8


  그 날에 여호와가 에루살렘 거민을 보호 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 이것

은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어떻게 큰 은혜 받을 것을 보여 준다.  여기 "약한 자" 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닉솰이니 "넘어진 자"(Stumble)를 의미 한다.  넘어진 자들이 회

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때에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된다. "다윗의 족속"이라는 문구

는, 베트 다위드이니 다윗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다윗의 왕퉁을 의미하나니, 그

영광이 하나님 같이 나타나기는 그리스도(다윗의 후손이심)로 말미암은 구속 사업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말씀이다. 더욱이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라는 명칭은 실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니 만큼,  위의 예언

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염두에 둔 것임이 분명하다.  칼빈(Calvin)도 그런 의미로

해석하였다(Minor Prophets, Vol. V. p. 357).




 슥 12:9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 사람은 아무리 힘

써도 성공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을 목표 하시고 힘쓰시는 것은

그대로 다 이루신다.  그는 교회의 원수들을 멸하실 것을 힘쓰신다고 하셨으니,  교회

의 원수들은 그 앞길이 캄캄할 뿐이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 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 이것은,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

교 끝에 일어난 회개 운동으로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행 2:37-41). 거기 말하기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 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고난을 생각하고 애통하는 것은, 그들이 그를 십자가

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할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이다.  혹 우리가 잘못 생각 하기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우리는, 기뻐할 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생

각이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생각 밑에서 죄를 아프게  여겨야

한다.  자기 죄에 대하여 통분히 여길 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없

다.

   자기의 죄를 슬퍼할줄 모르는 자는 구원 소망이 전연 없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

다"라고 하였다(약 4:9).  우리 본문에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

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라고 했으니, 이는 진정한 슬픔을 의미하

며,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  자기 죄가 메시야를  죽인 일에 대하여 이런 진정한 슬픔

을 가진 자들은 진정한 영적 희열을 가진다.




  슥 12: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자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은,  요시야 왕이 거기서 전사한 때에 유대인

들이 슬퍼하였음을 의미한다(대하 35:22).  유대인들이  추앙하던 왕의 죽음은 그들의

큰 슬픔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신자들의 슬퍼

할 일이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 슬픔이 아니고 회개의 슬픔이니 신령한 것이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다  눈물을 소유한다.  눈물 없이는 십자가를 깨닫지 못한다.

눈물은 부드러운 마음의 표현이다.  부드럽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으

니 어찌 십자가를 깨달으랴?  그러므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눈물

의 골짜기를 지남이 없이 하나님의 품에 이르는 길은 없다.  실망, 낙담, 응답되지 않

는 기도, 이것이 있고서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실망, 낙

담할만한 때에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한다.




  슥 12:12-14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

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

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다윗의 족속"은 유대의 왕족이고, "나단의

족속"도 그러하다(나단은 다윗의 아들임).  그리고 "레위의 족속"은 제사장 족이고,

"시므이의 족속"도 그러하다(시므이는 레위의 증손임-민 3:18).  스가랴가 여기서 왕

족과 제사장족을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케 한다.  여기 "따로"라는 말이 열 한

번이나 나온다.  이것은 회개의 애통을 진실하게 또는 착실히 가져야 할 것을 가리킨

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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