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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스바냐

[스크랩] 스바냐(1) : 여호와의 날(심판의 날) (1:1-3:8)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50

스바냐(1) : 여호와의 날(심판의 날) (1:1-3:8)


                       
Ⅰ. 서론: 스바냐와 그의 메시지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1:1)
 

1. 시대적 배경

  북 이스라엘의 멸망(주전 721년)은 남 유다에게도 큰 충격이 되었다. 유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유다도 이스라엘처럼 멸망할 것인가? 히스기야(주전 715-687년)는 이사야의 말을 따름으로 이스라엘처럼 멸망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므낫세(주전 687-642년)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열왕기 기자는 므낫세가 역대 왕들 중 가장 사악한 왕이었다고 논평하고 있다(왕하 21:9). 이때에 앗수르의 강력한 왕인 앗수르바니발은 주전 663년에 애굽을 정복했으며 매우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므낫세는 앗수르 왕을 충실히 섬겼으며 앗수르가 시키는대로 했다. 이러한 처사는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으로 뜨겁게 신앙의 불이 붙었던 경건한 신앙인들을 크게 격분시켰다. 므낫세는 왕이 되면서 앗수르와 가나안 종교에 대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선지자들을 추방해 버렸다. 그러므로 그의 시대에는 아합 때처럼 악한 정치와 우상 숭배를 반대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키게 했던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없었다(왕하 21:16). 그러나 몇몇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조상들이 가졌던 순수한 믿음을 되찾으려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직무를 포기하거나 숨어서 므낫세의 통치 시대가 끝나고 자유로운 시대가 올 때를 기다렸다. 므낫세는 주전 642년에 죽었으며 그의 아들 아몬(주전 642-640년)이 그 뒤를 이었다. 아몬은 그의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했으며 2년만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아몬의 뒤를 이어 불과 8살밖에 안된 요시야(주전 640-609년)가 왕위에 올랐다. 앗수르는 앗수르바니발이 죽은 후에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신흥 제국 바벨론의 등장으로 점점 약해져 갔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요시야는 정치적 독립이 가능했다. 그때에 유다의 전반적인 면에 개혁을 촉구하고 나선 두 사람의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예레미야와 스바냐였다.


2. 선지자 스바냐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숨기신다", 또는 "여호와께서 숨기신 사람"이란 뜻을 가진 이름이다. 스바냐는 그 이름처럼 "여호와께서 심판 날에 겸손한 자를 숨기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스바냐에 대해서는 (습 1:1)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예언의 표제에 언급된 족보에는 4대가 언급되어 있는데, 선지자 중에서 이와 같이 족보를 소급해서 올라간 사람은 없었다. 구약 성경에서는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는 조부 이상의 족보를 언급한 경우가 드물다. 스바냐는 왕족 출신으로서 히스기야의 4대 후손이었으며, 따라서 스바냐는 요시야의 조카뻘이 되는 셈이다. 그는 나훔보다 반 세기 정도 늦은 요시야 왕 때에 조카로서 삼촌(요시야)에게 예언했다. 므낫세와 아몬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이었지만, 요시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통치자였다.

  주전 621년(이 당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포로가 된 지 100년이 지난 때였다)에 유다에서 일어난 개혁은 소수의 남은 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대부분의 백성들은 스바냐 1장과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악한 백성들은 요시야의 개혁에 대해서 강한 반발을 했다. 백성들의 죄는 심판을 받을 만큼 무르익었다. 스바냐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스바냐가 활동하던 때에 요시야의 개혁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바냐가 요시야의 개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스바냐가 우상 숭배에 대해서 심한 책망을 한 것을 보고, 그의 예언이 요시야가 종교 개혁(주전 627년)을 감행하기 전에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스바냐는 선지자의 기준을 적용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람 중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여호와의 날"이라는 매우 분명한 초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구약 성경의 어느 저자보다 이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1장에서 그는 유다를 향해 심판을 선포한다. 2장에서는 회개를 권면하고 나서, 몇 몇 민족들의 멸망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리고 3장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잠시 언급한 후에, 후에 회복될 남은 자들이 누리게 될 영광에 대해서 약속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회복에 대한 그의 예언은 매우 포괄적이다. 16세기의 어느 작가는 "선지자들의 모든 비밀스러운 신탁의 요약을 보고 싶으면 짧은 스바냐서를 읽으라!"고 말했다. 그의 예언은 초기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비슷한 표현들이 이사야와 스바냐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예레미야와 스바냐 사이에는 더 많은 유사한 부분이 나타난다. 스바냐 시대에 유다의 적은 나훔이나 다른 선지자들의 시대처럼 앗수르가 아니라 바벨론이었다. 그는 히스기야 이후에 약 60년간이나 계속된 영적 암흑기를 깨고, 마침내 요시야 왕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날은 기쁨의 날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Ⅱ. 스바냐의 내용

1. 심판 날에 대한 경고(1:2-3:8)

 1-1. 자연의 심판(1:2-3)

  스바냐는 보편적 심판을 선포함으로 그의 예언을 시작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든 짐승이든 모든 것을 진멸하시겠다고 선언한다(2). 하나님은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동일한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원칙을 따라서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과, 악한 자들을 거꾸러 뜨리실 것이며, 또한 땅에서 사람의 씨를 말리실 것이다(3). 그리고 이로 인해 땅과 하늘과 바다에 사는 생물들까지도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자세하게 거론하는 목적은 공포와 징벌의 보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멸하실 것이다. 세계사에 있어서 인간의 죄로 인한 보편적 멸망은 과거에도 있었다. 특히 하나님은 악인들을 그들의 결핍들-우상과 우상숭배의 의식들-과 함께 벌하실 것이다. (1:2-3)에서는 자연에 대한 심판이 선언되고 있다. 그리고 (1:4-6)에서는 그 심판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제한되고 있다.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은 최종적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떨어질 것이다.


 
1-2. 유다에 임할 심판(1:4-18)

 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1:4-6)
  하나님이 심판은 먼저 자기 백성을 향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의 손을 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치실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바알 신상을 없애실 것이다. 므낫세의 통치 기간에는 바알 숭배로 악명이 높았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러한 바알 숭배의 모든 잔재를 제거하실 것이다. 후에 신실한 요시야 왕은 이 우상들을 파괴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그마림을 뿌리뽑으실 것이다(4). 그마림은 우상을 숭배하는 바울의 제사장들이다. 후에 요시야는 이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또 하나님은 지붕 위에서 하늘의 뭇 별을 섬기는 자들도 제거하실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평평한 지붕 위에서 일월성신을 섬겼으며, 이로 인해 모든 집이 우상의 숭배 장소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숭배는 사비아니즘(Sabianism)이라 불리었는데, 동양에서 꽤 오래 전부터 유행했었다. 모세는 이에 대해서 (신 4:19)에서 경고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스라엘에 널리 행해져서 실질적으로 모든 집이 우상의 성소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러한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자를 모두 제거하실 것이다. 또 주님은 적당히 여호와 종교와 이방 종교를 혼합해서 믿는 자들도 제거하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맹세하며 주님을 섬기는 동시에, 말감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이었다(5). 예루살렘 거민들 중에 일부는 주님을 등지고 돌아섰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주님을 찾거나 부르지도 않고, 하나님께 아무것도 묻지도 않았다. 그들은 회개하라는 요시야의 권면에 처음에는 주의를 기울였으나, 다시 옛날로 되돌아갔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실 것이다.

 나. 유다에 임할 재앙(1:7-13)
  스바냐는 다가온 심판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말한다. 그는 여호와의 날, 즉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고 선포한다. 스바냐는 요엘이 예언한 궁극적인 여호와의 날을 말하고 있다. (1:7)에서 다루고 있는 특별한 희생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 임할 심판이며, 구별되어 초청받은 사람들은 갈대아인들이다. 이 마지막 때의 장면은 (계 19:17-18)에 묘사되어 있다. 주님은 제물을 잡아 놓으시고, 그 제물을 먹을 사람들을 부르셨으며, 그들을 성결하게 하셨다(7). 여기에 나오는 제물은 유다 백성들이며, 그들을 먹기 위해서 초청되어 성별된 사람들은 바벨론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제사장으로 세워서 유다를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제사장으로 삼고, 유다 백성을 제물로 삼는 제사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심판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심판은 이교도의 관습을 좆아 행한 방백들과 왕자들에게 선포된다. 그들은 악을 버리고 의로운 지도자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의 관습을 좆아 백성들을 압제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한 왕의 가족들과 방백들을 심판하실 것이다(8). 왕자들은 요시야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요시야에게는 이러한 죄를 범할만큼 나이 든 아들들이 없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예언이 성취될 때에 통치할 왕가의 왕자들과 왕의 자녀들을 의미한다. 요시야 왕은 신실한 생활을 하여, 심판을 벗어났기 때문에, 이 심판에서 제외되었다. 이방의 ㅇ,;복이란 말은 멀리 이교도 땅에서 들어와서 이스라엘의 신실치 못한 자들이 우상들을 숭배할 때에 입던 이상한 의복을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방의 의복과 함께 이방의 관습과 예배, 특히 우상숭배가 들러오게 되었다.

  두 번째 심판은 폭력과 사기로 연약한 백성을 약탈한 부자들에게 선포된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의 문지방을 뛰어 넘어 온갖 폭력과 속임수로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소유를 약탈했다. (삼상 5:5)을 보면, 문턱을 뛰어넘는 일은 아스돗의 다곤 숭배에서 행해지던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바냐가 여기에서 우상숭배의 의식을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절의 끝 부분을 보면 이러한 견해를 계속 주장할 수 없다. 여기에 언급된 것은 주인을 부자로 만들기 위해서 남의 재산을 약탈한 부자들의 종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 들이 닥쳐서 재산을 약탈했으며, 그 물건을 불의한 주인의 집에 가득 채웠다. 이로 인해 부자들의 집에는 폭력과 사기로 얻은 재물로 가득찼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폭력과 사기로 탈취한 재물을 쌓아놓은 부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9).

  세 번째 심판은 사악한 방법으로 부를 모은 정직하지 못한 상인들에게 선포된다. 느부갓네살의 침입 때에 예루살렘이 당할 고통이 여기에서 묘사되고 있다. 곧 바벨론 군사들이 그들을 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 성읍 구석 구석이 그 영향을 받게될 것이다. 그때에 성읍 북편에 있는 '어문'에서 우는 소리가 나게 될 것이다. 어문은 군대가 침입하기 쉬운 곳이었으며, 느부갓네살도 이 문으로 예루살렘 성을 침입했다. "어문"이라는 이름은 이 곳에 갈릴리 호수와 요단 강에서 잡아 온 고기를 파는 어시장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문은 오늘날에는 "다메섹 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그 날에는 '제2 구역'에서도 울부짖는 소리가 나게 될 것이다. 제2 구역은 여선지 훌다가 살던 곳으로 아그라 언덕에 있는 지역이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심판하는 날에는 어문에서 곡성이 나고, 제2 구역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날 것이며, 시온과 모리아, 오벨의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나게 될 것이다. (1:10)은 적들이 성읍의 가장 높은 곳까지 점령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는 바벨론 군대가 어문을 통해서 침입하여, 제2 구역을 지나 높은 성읍 마을까지 진격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말은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며, 따라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10). 스바냐는 막데스에 사는 백성들에게 슬피 울라고 외친다. 막데스로 번역된 말은 원래 "반죽"을 의미하는 말로서 고유명사가 아니다. 최근의 지도에는 이 장소가 나타나 있지 않다. 이 곳은 예루살렘의 어느 골짜기에 있던 지역으로 추정되며, 어떤 사람들은 이 곳을 두로뵈온(Tyropoeon) 계곡이라고 주장한다. 당시에 유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장사를 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옥수수를 빻아 반죽을 만드는 것처럼 심판하실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가나안 백성은 가나안이나 베니게 사람들처럼 장사하는 유다 장인들로서, (호 12:7)에서도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판 날에 이 곳에서 불법으로 부를 축적하던 상인들을 모두 망할 것이며, 돈을 거래하는 자들도 모두 끊어지게 될 것이다(11).

  네 번째 심판은 사악하여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선포된다. 하나님은 심판 날에 등불을 켜 들고 물건을 찾는 사람처럼, 예루살렘을 뒤져서 은밀하게 죄를 지은 자들을 찾아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대 백성들 중에는 겉으로는 사악한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나태함과 타성에 젖어서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으며, 따라서 복이나 저주를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술찌꺼기 처럼 무관심과 나태에 젖어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적극적으로 의를 행하는 일에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발효된 액체를 흔들지 않고 오래 두면 표면에 단단한 껍질이 생긴다. 이와 같이 그들도 무관심이라는 타성에 젖어서 마치 하나님께서 복도 재앙도 내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행위를 부정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러한 사악함과 오만함 때문에 율법에 기록된 저주를 부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 날에 이러한 자들을 샅샅아 찾으실 것이며, 그들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리실 것이다(12). 하나님을 무관심과 타성에 젖어 살던 사람들은 그 때에 재산을 빼앗길 것이며, 그들이 살던 집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집을 지어도 그 집에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에서 나는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될 것이다(13).

 다. 여호와의 날(1:14-18)
  요시야의 신실치 못한 후계자들이 통치할 때에 유다는 큰 고통을 받았다. 그 때에 유다가 당한 고통은 여호와의 날에 유다가 당할 고난의 전조가 되었다. 소선지서 중에서 이 날에 대해서 상세히 다룬 책은 요엘서이다. 스바냐 역시 주님께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실 무서운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 날은 멀지 않았고 또한 신속하게 다가올 것이다. 스바냐는 유다 백성들에게 그날에 울려퍼질 울부짖음을 들으라고 외친다. 주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날에 슬픔으로 부르짖는 소리와, 용사가 힘을 잃고 외치는 절규가 여기 저기에서 들리게 될 것이다(14). 그 날은 주님께서 유다의 죄에 대해 진노하여 심판하는 날이다. 그 날은 유다 백성들에게 환난과 고통이 찾아올 것이며, 성과 집이 무너지고 부서지고, 먹구름과 어둠이 뒤덮이게 될 것이다(15). 그 날에 공격을 알리는 나팔이 울려 퍼질 것이며, 싸우는 군사들의 함성이 터지고 견고한 성읍이 무너지고 높이 솟은 망대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16). 그 날에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들을 괴롭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지은 죄로 인해 징계를 받고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다닐 것이다. 그 날에는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시체가 오물처럼 거리에 널리게 될 것이다(17). 그러나 그 때에 그들이 의지하던 은과 금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해 분노하시는 날, 온 국토는 주님의 질투의 불에 태워지고 말 것이다. 바벨론 군사들은 예루살렘을 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끌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날에 그 땅의 거민을 순식간에 제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18).

 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
  요시야 왕와 스바냐 선지자 시대에 유다에는 하나님과 그 뜻을 행하는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게 큰 죄악을 행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제 마음대로 살아갔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그 뜻을 행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나태나 무관심은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에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에 무관심하고 나태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나태와 무관심에 대해서 정죄하신다. 그리고 후에 등불을 들고 찾듯이 이러한 은밀한 죄악을 모두 찾아서 심판하실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1-3. 심판은 누구에게나 임한다: 열방에 대한 심판(2장)

 가. 회개를 권고함(2:1-3)
  스바냐 1장에서 모든 심판이 선언되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제 이야기가 끝나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바냐의 메시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유다 백성들이 그 심판을 벗어날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신다. 유다 백성들이 심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스바냐 2장은 회개를 요청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시작된다. 스바냐는 유대 백성들에게 함께 모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동일한 동사를 반복함으로 강조하고 있다. "함께 모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나무토막이나 땔감을 모으는 것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함께 모이라는 것은 모여서 용기를 얻거나 지혜를 모으라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모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집회를 열고 하나님께서 심판을 돌이키시도록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거룩한 집회를 열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스바냐는 유대 백성을 향해 "창피한 줄도 모르는 백성"이라고 부른다(1). 그들은 날마다 죄를 반복하면서도 양심이 마비되어 그 일이 창피한 것인 줄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에게 임할 심판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심판이 임하기 전에, 회개할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함께 모여서 신속하게 회개해야만 했다. 회개의 날은 강한 바람에 날려가는 겨처럼 신속하게 지나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 그들은 주님의 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신속하게 모여서 주님의 은총을 구해야 했다(2).

  그러나 모든 백성들이 주님을 거역한 것은 아니었다. 유대 백성들 중에는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여전히 주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겸손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서 계속해서 주님을 찾고 구하라고 권면한다. 그들은 불의한 자들의 형통함을 보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 힘써야 하며, 특히 겸비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 힘쓸 필요가 있었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들은 주님께서 진노하시는 심판 날에 그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3). 하나님은 그들을 진노와 심판의 손에서 친히 숨겨주실 것이다. 스바냐의 이름의 뜻, 즉 "여호와께서 숨기신다"는 말은 이러한 그의 메시지와 깊은 관계가 있다. 후에 느부갓네살은 유대를 점령했을 때에 가난한 자들을 포도원지기와 농부로 남겨두었다. 또한 하나님은 바벨론에서도 에스겔이나 다니엘과 같은 경건한 성도들의 피난처가 되어 그들을 숨겨주셨다. 그 동안 하나님을 거역하던 유대 백성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며 회개해야 하며,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 블레셋에 임할 심판(2:4-7)
  하나님의 진노가 폭풍처럼 유대 백성들을 휩쓸고 지나갈 때에, 하나님은 다른 불의한 나라들도 역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징계하시는 동시에, 자기 백성을 괴롭힌 나라들도 처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온 열방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보편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심판의 대상으로 먼저 서쪽에 있는 블레셋 땅이 거론되고 있다. 블레셋의 대표적인 도시들은 파멸될 것이다. 가사는 버림을 받고, 아스글론은 폐허가 될 것이며, 아스돗은 대낮에도 텅 빈 도시가 될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대낮은 가장 뜨거운 시간으로 보통 수면을 취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장차 아스돗은 예상치 못한 시간, 즉 대낮에 적의 침입을 받고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 에글론 역시 대적에 의해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에서 갓이 빠진 것은 웃시야와 히스기야 때에 이미 갓이 유대의 영토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4).

  해변에 사는 블레셋인들에게도 심판이 선언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레데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렛 섬에 사는 민족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다윗의 경호원들은 그렛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블레셋 사람의 두 가지 혈통으로 추정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루 아침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블레셋 땅 가나안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리셨다. "내가 너희를 없애버리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게 할 것이다." 블레셋이란 이름은 원래 이주민을 의미하며, 가나안은 평평한 해안 지대를 의미한다. 장치 이 지역의 땅이 버려지고 주민이 거하지 않게 될 것이다(5). 이로 인해 해변 땅은 유목민들의 초장이 되고, 그 곳에 목동이 지은 천막과 양 떼의 우리가 생기게 될 것이다(6). 그때에 해변 일대는 살아 남은 유대 백성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곳에서 양 떼를 먹이다가 해가 지면 아스글론에 있는 집에 가서 잠을 자게 될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유대 백성들을 포로에서 돌이켜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7). 이 지역은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땅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언약을 지키실 것이다.

 다. 모압과 암몬에게 임할 심판(2:8-10)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의 기원은(창 19:30-38)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역사는 롯과 그 딸의 관계, 즉 근친상간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부정했으며, 또한 교만하기까지 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몰락하고 남 왕국 유다가 쇠퇴하게 되자, 이스라엘의 동편에 있었던 모암과 암몬 족속은 크게 교만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고 비난했으며,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 땅의 일부를 취해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적대감을 나타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그들의 교만함에 대해 책망했다(사 16:6, 25:11, 렘 48:29-30). 하나님은 모압이 자기 백성에게 욕을 하고, 암몬 자손이 악담하는 것을 들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욕하고 그 국경을 침범한 일을 기억하고 계셨다(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삶과 이름을 걸고 그들의 심판을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곧 모압과 암몬이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땅은 장차 사람이 살지 않아서 거친 풀이 우거진 곳이 될 것이며, 소금 구덩이가 가득한 영원히 불모지와 황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 땅은 그 후에 줄곧 사해 지역처럼 황폐화 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소금은 메마름과 멸망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하나님의 선민을 거스려 교만했던 모압고 암몬은 이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압과 암몬을 심판하신 후에 그 땅을 재난에서 살아 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산으로 주실 것이다(9).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보여주었던 교만한 태도와, 만군의 주님 되시는 여호와의 백성에게 욕을 했기 때문이었다(10).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매개자로 선택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일이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하는 일인지 모르고 있었다.

 라.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됨(2:11).
  하나님의 심판은 징계 자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악을 제거하고 혼란을 정돈하며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범죄한 나라들을 파멸하고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제거하실 것이다. 2:11에는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신들을 굶주리게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신들을 여위게 하고, 쇠잔하게 하시며, 또한 파멸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을 심판하실 때에 그들이 섬기던 신들도 파괴하실 것이다. 우상들은 그것을 섬기는 사람들이 없으면 존재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우상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 열방은 여호와께서 유일하고 진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가 처소에서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각 나라에서 소수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현재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스바냐는 세상 모든 나라가 회심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11). 이러한 일은 (말 1:11)에도 나타나 있으며, (사 2:2, 미 4:1-2, 슥 8:22-23)등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신 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 날에는 모든 나라들이 연합하게 될 것이며, 이 연합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연합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며,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바라고 고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마. 에디오피아(구스)와 앗수르에 임할 심판(2:12-15)
  지금까지 스바냐는 유다의 동편과 서편에 있는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했다. 이제 그는 유다의 남쪽과 북쪽에 있는 나라들, 즉 구스와 앗수르로 그 눈을 돌리고 있다. 구스인들은 하나님의 칼에 의해 살육을 당하게 될 것이다(12).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은 하나님의 칼에 관해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구스는 나일 강의 제 1폭포 남쪽에 있는 나라로서, 주전 720-654년에 애굽을 지배했다. 이 예언은 느브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함으로 성취되었다. 구스의 운명은 구스 왕조에 예속되었던 애굽의 운명과 관계가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구스, 즉 에디오피아는 애굽을 포함한 지역을 향한 예고였다.

  스바냐의 예언은 구스를 지나서 북쪽에 있는 앗수르를 향하고 있다. 이때에는 아직 앗수르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였다. 거듭된 화와 심판에 대한 선포는 당시의 가장 강한 정치 세력이었던 앗수르에 대한 언급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앗수르의 운명을 좀 더 자세히 살피려면 나훔의 예언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스바냐는 장차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황무지로 만드실 것이며, 이로 인해 앗수르가 사막처럼 메마른 곳이 될 것이라고 예고한다(13). 그때에 골짜기에는 펠리칸과 고슴도치와 같은 온갖 들짐승들이 떼를 지어 살게 될 것이며, 갈가마귀와 올빼미가 집을 세웠던 기둥 꼭대기에 살면서 창문 턱에 앉아서 지저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사34:11)에도 나타나고 있다. 어려진 집터에는 문을 넘는 사람이 사리지고, 길에는 돌조각들이 이리 저리 널려 있고, 송백나무로 만든 들보는 썩고 온갖 장식들이 찢겨지게 될 것이다(14).

  스바냐는 이 멸망의 메시지를 마치면서 전쟁에서 패한 적들이 부르는 것과 같은 풍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원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그 영광과 위엄을 온 세상에 자랑하며 뽐내던 곳이었다. 앗수르가 멸망하기 225년 전에 이스라엘은 갈가 전투(주전 854-853년)에서 앗수르에게 크게 패하였다. 앗수르인들은 100년 전부터 블레셋 땅을 차지하고 유다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가 무르익어서 그들이 벌을 받을 때가 되었다. 그들은 니느웨 성만은 세상에서 안전하다고 자랑했으며, 이 세상에는 자기밖에 없다고 자만하며 뽐내곤 했다. (사 47:8)을 보면, 바벨론도 이렇게 주장했다. 이러한 교만으로 인해 바벨론은 가장 비천한 상태, 즉 짐승이 사는 곳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곳으로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들의 교만과 자만을 비웃으면서 손가락질을 하게 될 것이다(15). 그들이 손가락질을 한 것은 그 나라가 심판을 자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전 401년에 니느웨가 있던 곳을 지나가던 그리이스인 크세노폰은 한 거대한 성읍이 제우스에게 정심을 팔렸다가 멸망항 것을 발견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거만하게 행동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다.
  스바냐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다시 긍휼을 베푸시어 포로 상태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예고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임하셨다. 그때에 하나님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나라들을 심판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풍성한 승리의 삶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1-4.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책망(3장)

 가. 신실하지 못한 예루살렘에 임할 재앙(3:1-5)
  스바냐 2장에서 여러 나라들에 대해 일련의 화를 선포한 선지자는 이제 3장에서 다시 예루살렘을 향한 메시지를 선포한다. 예루살렘은 많은 사랑과 특권을 받았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더욱 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순종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3:1에 성읍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3:2을 보면 이 성은 예루살렘 성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멸망하게 될 성, 반역하는 성, 더러운 성, 억압을 일삼는 성이라고 부르셨다(1). 그들은 불순종과 오래된 범죄로 인해 더러워졌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과부를 보살펴 주지도 않았다. 선지자는 이 성의 번죄에 대해서 네 가지 비난을 했다. 첫째로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둘째로 그들은 그들을 올바르게 교정하려는 주님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셋째로 그들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과 우상과 동맹국들을 믿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았다(2).

  이러한 상황은 지도자들도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의 관리들이 으르렁거리는 사자들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양떼를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양떼를 잡아 먹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재판관들은 먹이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남기지 않는 저녁 이리 떼와 같았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백성들을 착취했다(3). 또한 예언자들은 교만하며 일관성이 없어서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대표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고, 오히려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또 율법을 범했다. 그들은 거룩하게 해야 할 성소를 부정한 행위로 더렵혔다. 그들은 율법의 의미와 의도를 왜곡시켜 가르침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게 만들었다(4).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크게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다.

 나. 하나님의 징계와 경고(3:5-7)
  예루살렘의 죄악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 안에 거하셨다. 예루살렘 중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에 파묻힌 예루살렘을 확실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용납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아침마다 의로운 재판을 통해서 공의를 세우셨다. 그러나 사악한 예루살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죄를 지었고, 죄를 지으면서 부끄러워 할 줄도 몰랐다(5). 하나님은 응징과 경고를 통해서 공의를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열방을 칼로 베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열방의 심판을 보고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성 모퉁이에 선 망대들을 부수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자를 없애서 거리를 텅텅 비게 하셨다. 이로 인해 성읍들은 폐허가 되어 거민들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6).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만은 징계하지 않고, 평화를 주셨다. 요시야가 통치하는 동안에 다른 나라들은 전쟁에 시달렸지만, 유다는 평화를 누렸다. 유다는 수리아가 서부 아시아를 무지비하게 침입했을 때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유다는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유다는 평화로울 때에 주변 국가들의 멸망을 보면서 교훈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율법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유다 백성들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처벌하기로 작정했지만, 그들이 거할 곳을 없애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권고를 거역하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돌아다녔다. 그들은 죄를 짓는 일에 적극적이고 열심을 내어 새벽부터 죄를 지었다(7).

 다. 열국에 대한 진노(3:8)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라고 경고하셨다. 이제 하나님은 먹이를 덮치려는 야수처럼 일어서실 것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지은 모든 죄를 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 날에 그들이 죄에 대해 증인으로 나서실 것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심판하는 날에 민족들과 나라들을 불러모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유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서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를 쏟아 부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이제 그 날이 되면 유다 온 땅은 하나님의 질투의 불에 타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8).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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