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1) : 여호와의 날(심판의 날) (1:1-3:8) |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1:1) 1. 시대적 배경 북 이스라엘의 멸망(주전 721년)은 남 유다에게도 큰 충격이 되었다. 유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유다도 이스라엘처럼 멸망할 것인가? 히스기야(주전 715-687년)는 이사야의 말을 따름으로 이스라엘처럼 멸망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므낫세(주전 687-642년)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열왕기 기자는 므낫세가 역대 왕들 중 가장 사악한 왕이었다고 논평하고 있다(왕하 21:9). 이때에 앗수르의 강력한 왕인 앗수르바니발은 주전 663년에 애굽을 정복했으며 매우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므낫세는 앗수르 왕을 충실히 섬겼으며 앗수르가 시키는대로 했다. 이러한 처사는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으로 뜨겁게 신앙의 불이 붙었던 경건한 신앙인들을 크게 격분시켰다. 므낫세는 왕이 되면서 앗수르와 가나안 종교에 대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선지자들을 추방해 버렸다. 그러므로 그의 시대에는 아합 때처럼 악한 정치와 우상 숭배를 반대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키게 했던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없었다(왕하 21:16). 그러나 몇몇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조상들이 가졌던 순수한 믿음을 되찾으려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직무를 포기하거나 숨어서 므낫세의 통치 시대가 끝나고 자유로운 시대가 올 때를 기다렸다. 므낫세는 주전 642년에 죽었으며 그의 아들 아몬(주전 642-640년)이 그 뒤를 이었다. 아몬은 그의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했으며 2년만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아몬의 뒤를 이어 불과 8살밖에 안된 요시야(주전 640-609년)가 왕위에 올랐다. 앗수르는 앗수르바니발이 죽은 후에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신흥 제국 바벨론의 등장으로 점점 약해져 갔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요시야는 정치적 독립이 가능했다. 그때에 유다의 전반적인 면에 개혁을 촉구하고 나선 두 사람의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예레미야와 스바냐였다.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숨기신다", 또는 "여호와께서 숨기신 사람"이란 뜻을 가진 이름이다. 스바냐는 그 이름처럼 "여호와께서 심판 날에 겸손한 자를 숨기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스바냐에 대해서는 (습 1:1)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예언의 표제에 언급된 족보에는 4대가 언급되어 있는데, 선지자 중에서 이와 같이 족보를 소급해서 올라간 사람은 없었다. 구약 성경에서는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는 조부 이상의 족보를 언급한 경우가 드물다. 스바냐는 왕족 출신으로서 히스기야의 4대 후손이었으며, 따라서 스바냐는 요시야의 조카뻘이 되는 셈이다. 그는 나훔보다 반 세기 정도 늦은 요시야 왕 때에 조카로서 삼촌(요시야)에게 예언했다. 므낫세와 아몬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이었지만, 요시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통치자였다. 주전 621년(이 당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포로가 된 지 100년이 지난 때였다)에 유다에서 일어난 개혁은 소수의 남은 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대부분의 백성들은 스바냐 1장과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악한 백성들은 요시야의 개혁에 대해서 강한 반발을 했다. 백성들의 죄는 심판을 받을 만큼 무르익었다. 스바냐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스바냐가 활동하던 때에 요시야의 개혁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바냐가 요시야의 개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스바냐가 우상 숭배에 대해서 심한 책망을 한 것을 보고, 그의 예언이 요시야가 종교 개혁(주전 627년)을 감행하기 전에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스바냐는 선지자의 기준을 적용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람 중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여호와의 날"이라는 매우 분명한 초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구약 성경의 어느 저자보다 이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1장에서 그는 유다를 향해 심판을 선포한다. 2장에서는 회개를 권면하고 나서, 몇 몇 민족들의 멸망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리고 3장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잠시 언급한 후에, 후에 회복될 남은 자들이 누리게 될 영광에 대해서 약속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회복에 대한 그의 예언은 매우 포괄적이다. 16세기의 어느 작가는 "선지자들의 모든 비밀스러운 신탁의 요약을 보고 싶으면 짧은 스바냐서를 읽으라!"고 말했다. 그의 예언은 초기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비슷한 표현들이 이사야와 스바냐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예레미야와 스바냐 사이에는 더 많은 유사한 부분이 나타난다. 스바냐 시대에 유다의 적은 나훔이나 다른 선지자들의 시대처럼 앗수르가 아니라 바벨론이었다. 그는 히스기야 이후에 약 60년간이나 계속된 영적 암흑기를 깨고, 마침내 요시야 왕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Ⅱ. 스바냐의 내용 1. 심판 날에 대한 경고(1:2-3:8) 1-1. 자연의 심판(1:2-3) 스바냐는 보편적 심판을 선포함으로 그의 예언을 시작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든 짐승이든 모든 것을 진멸하시겠다고 선언한다(2). 하나님은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동일한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원칙을 따라서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과, 악한 자들을 거꾸러 뜨리실 것이며, 또한 땅에서 사람의 씨를 말리실 것이다(3). 그리고 이로 인해 땅과 하늘과 바다에 사는 생물들까지도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자세하게 거론하는 목적은 공포와 징벌의 보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멸하실 것이다. 세계사에 있어서 인간의 죄로 인한 보편적 멸망은 과거에도 있었다. 특히 하나님은 악인들을 그들의 결핍들-우상과 우상숭배의 의식들-과 함께 벌하실 것이다. (1:2-3)에서는 자연에 대한 심판이 선언되고 있다. 그리고 (1:4-6)에서는 그 심판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제한되고 있다.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은 최종적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떨어질 것이다. 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1:4-6) 나. 유다에 임할 재앙(1:7-13) 첫 번째 심판은 이교도의 관습을 좆아 행한 방백들과 왕자들에게 선포된다. 그들은 악을 버리고 의로운 지도자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의 관습을 좆아 백성들을 압제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한 왕의 가족들과 방백들을 심판하실 것이다(8). 왕자들은 요시야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요시야에게는 이러한 죄를 범할만큼 나이 든 아들들이 없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예언이 성취될 때에 통치할 왕가의 왕자들과 왕의 자녀들을 의미한다. 요시야 왕은 신실한 생활을 하여, 심판을 벗어났기 때문에, 이 심판에서 제외되었다. 이방의 ㅇ,;복이란 말은 멀리 이교도 땅에서 들어와서 이스라엘의 신실치 못한 자들이 우상들을 숭배할 때에 입던 이상한 의복을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방의 의복과 함께 이방의 관습과 예배, 특히 우상숭배가 들러오게 되었다. 두 번째 심판은 폭력과 사기로 연약한 백성을 약탈한 부자들에게 선포된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의 문지방을 뛰어 넘어 온갖 폭력과 속임수로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소유를 약탈했다. (삼상 5:5)을 보면, 문턱을 뛰어넘는 일은 아스돗의 다곤 숭배에서 행해지던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바냐가 여기에서 우상숭배의 의식을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절의 끝 부분을 보면 이러한 견해를 계속 주장할 수 없다. 여기에 언급된 것은 주인을 부자로 만들기 위해서 남의 재산을 약탈한 부자들의 종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 들이 닥쳐서 재산을 약탈했으며, 그 물건을 불의한 주인의 집에 가득 채웠다. 이로 인해 부자들의 집에는 폭력과 사기로 얻은 재물로 가득찼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폭력과 사기로 탈취한 재물을 쌓아놓은 부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9). 세 번째 심판은 사악한 방법으로 부를 모은 정직하지 못한 상인들에게 선포된다. 느부갓네살의 침입 때에 예루살렘이 당할 고통이 여기에서 묘사되고 있다. 곧 바벨론 군사들이 그들을 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 성읍 구석 구석이 그 영향을 받게될 것이다. 그때에 성읍 북편에 있는 '어문'에서 우는 소리가 나게 될 것이다. 어문은 군대가 침입하기 쉬운 곳이었으며, 느부갓네살도 이 문으로 예루살렘 성을 침입했다. "어문"이라는 이름은 이 곳에 갈릴리 호수와 요단 강에서 잡아 온 고기를 파는 어시장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문은 오늘날에는 "다메섹 문"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그 날에는 '제2 구역'에서도 울부짖는 소리가 나게 될 것이다. 제2 구역은 여선지 훌다가 살던 곳으로 아그라 언덕에 있는 지역이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심판하는 날에는 어문에서 곡성이 나고, 제2 구역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날 것이며, 시온과 모리아, 오벨의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나게 될 것이다. (1:10)은 적들이 성읍의 가장 높은 곳까지 점령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는 바벨론 군대가 어문을 통해서 침입하여, 제2 구역을 지나 높은 성읍 마을까지 진격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말은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며, 따라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10). 스바냐는 막데스에 사는 백성들에게 슬피 울라고 외친다. 막데스로 번역된 말은 원래 "반죽"을 의미하는 말로서 고유명사가 아니다. 최근의 지도에는 이 장소가 나타나 있지 않다. 이 곳은 예루살렘의 어느 골짜기에 있던 지역으로 추정되며, 어떤 사람들은 이 곳을 두로뵈온(Tyropoeon) 계곡이라고 주장한다. 당시에 유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장사를 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옥수수를 빻아 반죽을 만드는 것처럼 심판하실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가나안 백성은 가나안이나 베니게 사람들처럼 장사하는 유다 장인들로서, (호 12:7)에서도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판 날에 이 곳에서 불법으로 부를 축적하던 상인들을 모두 망할 것이며, 돈을 거래하는 자들도 모두 끊어지게 될 것이다(11). 네 번째 심판은 사악하여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선포된다. 하나님은 심판 날에 등불을 켜 들고 물건을 찾는 사람처럼, 예루살렘을 뒤져서 은밀하게 죄를 지은 자들을 찾아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대 백성들 중에는 겉으로는 사악한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나태함과 타성에 젖어서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으며, 따라서 복이나 저주를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술찌꺼기 처럼 무관심과 나태에 젖어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적극적으로 의를 행하는 일에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발효된 액체를 흔들지 않고 오래 두면 표면에 단단한 껍질이 생긴다. 이와 같이 그들도 무관심이라는 타성에 젖어서 마치 하나님께서 복도 재앙도 내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행위를 부정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러한 사악함과 오만함 때문에 율법에 기록된 저주를 부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 날에 이러한 자들을 샅샅아 찾으실 것이며, 그들에게 적절한 처벌을 내리실 것이다(12). 하나님을 무관심과 타성에 젖어 살던 사람들은 그 때에 재산을 빼앗길 것이며, 그들이 살던 집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집을 지어도 그 집에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에서 나는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될 것이다(13). 다. 여호와의 날(1:14-18) 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 가. 회개를 권고함(2:1-3) 그러나 모든 백성들이 주님을 거역한 것은 아니었다. 유대 백성들 중에는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여전히 주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겸손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서 계속해서 주님을 찾고 구하라고 권면한다. 그들은 불의한 자들의 형통함을 보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 힘써야 하며, 특히 겸비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 힘쓸 필요가 있었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들은 주님께서 진노하시는 심판 날에 그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3). 하나님은 그들을 진노와 심판의 손에서 친히 숨겨주실 것이다. 스바냐의 이름의 뜻, 즉 "여호와께서 숨기신다"는 말은 이러한 그의 메시지와 깊은 관계가 있다. 후에 느부갓네살은 유대를 점령했을 때에 가난한 자들을 포도원지기와 농부로 남겨두었다. 또한 하나님은 바벨론에서도 에스겔이나 다니엘과 같은 경건한 성도들의 피난처가 되어 그들을 숨겨주셨다. 그 동안 하나님을 거역하던 유대 백성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며 회개해야 하며,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 블레셋에 임할 심판(2:4-7) 해변에 사는 블레셋인들에게도 심판이 선언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레데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렛 섬에 사는 민족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다윗의 경호원들은 그렛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블레셋 사람의 두 가지 혈통으로 추정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루 아침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블레셋 땅 가나안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리셨다. "내가 너희를 없애버리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게 할 것이다." 블레셋이란 이름은 원래 이주민을 의미하며, 가나안은 평평한 해안 지대를 의미한다. 장치 이 지역의 땅이 버려지고 주민이 거하지 않게 될 것이다(5). 이로 인해 해변 땅은 유목민들의 초장이 되고, 그 곳에 목동이 지은 천막과 양 떼의 우리가 생기게 될 것이다(6). 그때에 해변 일대는 살아 남은 유대 백성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곳에서 양 떼를 먹이다가 해가 지면 아스글론에 있는 집에 가서 잠을 자게 될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유대 백성들을 포로에서 돌이켜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7). 이 지역은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땅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언약을 지키실 것이다. 다. 모압과 암몬에게 임할 심판(2:8-10) 라.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됨(2:11). 마. 에디오피아(구스)와 앗수르에 임할 심판(2:12-15) 스바냐의 예언은 구스를 지나서 북쪽에 있는 앗수르를 향하고 있다. 이때에는 아직 앗수르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였다. 거듭된 화와 심판에 대한 선포는 당시의 가장 강한 정치 세력이었던 앗수르에 대한 언급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앗수르의 운명을 좀 더 자세히 살피려면 나훔의 예언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스바냐는 장차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황무지로 만드실 것이며, 이로 인해 앗수르가 사막처럼 메마른 곳이 될 것이라고 예고한다(13). 그때에 골짜기에는 펠리칸과 고슴도치와 같은 온갖 들짐승들이 떼를 지어 살게 될 것이며, 갈가마귀와 올빼미가 집을 세웠던 기둥 꼭대기에 살면서 창문 턱에 앉아서 지저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사34:11)에도 나타나고 있다. 어려진 집터에는 문을 넘는 사람이 사리지고, 길에는 돌조각들이 이리 저리 널려 있고, 송백나무로 만든 들보는 썩고 온갖 장식들이 찢겨지게 될 것이다(14). 스바냐는 이 멸망의 메시지를 마치면서 전쟁에서 패한 적들이 부르는 것과 같은 풍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원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그 영광과 위엄을 온 세상에 자랑하며 뽐내던 곳이었다. 앗수르가 멸망하기 225년 전에 이스라엘은 갈가 전투(주전 854-853년)에서 앗수르에게 크게 패하였다. 앗수르인들은 100년 전부터 블레셋 땅을 차지하고 유다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가 무르익어서 그들이 벌을 받을 때가 되었다. 그들은 니느웨 성만은 세상에서 안전하다고 자랑했으며, 이 세상에는 자기밖에 없다고 자만하며 뽐내곤 했다. (사 47:8)을 보면, 바벨론도 이렇게 주장했다. 이러한 교만으로 인해 바벨론은 가장 비천한 상태, 즉 짐승이 사는 곳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곳으로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들의 교만과 자만을 비웃으면서 손가락질을 하게 될 것이다(15). 그들이 손가락질을 한 것은 그 나라가 심판을 자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전 401년에 니느웨가 있던 곳을 지나가던 그리이스인 크세노폰은 한 거대한 성읍이 제우스에게 정심을 팔렸다가 멸망항 것을 발견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거만하게 행동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다. 가. 신실하지 못한 예루살렘에 임할 재앙(3:1-5) 이러한 상황은 지도자들도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의 관리들이 으르렁거리는 사자들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양떼를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양떼를 잡아 먹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재판관들은 먹이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남기지 않는 저녁 이리 떼와 같았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백성들을 착취했다(3). 또한 예언자들은 교만하며 일관성이 없어서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대표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고, 오히려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또 율법을 범했다. 그들은 거룩하게 해야 할 성소를 부정한 행위로 더렵혔다. 그들은 율법의 의미와 의도를 왜곡시켜 가르침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게 만들었다(4).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크게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다. 나. 하나님의 징계와 경고(3:5-7) 다. 열국에 대한 진노(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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