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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호세아의 외침 - 죄,심판 그리고 사랑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23:20

호세아(Hosea)의 외침


- 죄,심판 그리고 사랑 -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돈에 거쳐 넘어지리라 (호14:9,참조,호2:14-16,6:1-4,8,9,14:4-8)"

의심할 바 없이 이 말씀은 호세아 자신에 의해 쓰여진 선지서의 결어이다. 유다 왕국에서의 그의 사역 기간은 70년 이상이다. 본서를 통해 우리는 그의 사역 기간 동안에 행했던 많은 설교의 집대성을 대할 수 있다. 호세아는 본서를 완결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이 결어는 본서가 16선지서 중 그러한 결어를 갖는 유일한 선지서는 사실 때문에 훨씬 더 돋보인다. 선지자의 의도가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지혜가 있느냐?" 그리고 "누가 총명이 있느냐?"는 것은 이 글이 어떤 조건하에서 고찰되어야 하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지혜와 총명이라는 말들은 간당하면서도 깊은 뜻을 지닌 말들이다. 하지만 선지자가 사용했을 때 그 말들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지혜는 참 빛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총명은 빛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받은 자가 알 것이다. 이 조건을 제시하는 질문 다음에는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라는 인상적인 선언이 따른다. "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길, 즉 행위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탄탄 대로를 일컫는 말이다. 선지자는 이 길이 정직하다고 선언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자신이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해석하고 예언하였던 하나님의 통치와 활동의 모든 결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호세아는 하나님의 도가 정직하다는 이 진리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보여 주었다. 첫째는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도는 변함이 없다. 또 언제나 정직하다. 따라서 그 도에 순종하는 자들은 그도에 행할 것이다. 즉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그 도에 순종치 않는 자들은 같은 도에 거쳐 넘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물음과 선언에 대한 답으로서,"그렇다면 본 호세아서에 정직한 것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도는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그 답을 70년이상 동안 호세아가 선포한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달으므로써 얻을 수 있다.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본서를 읽을 때,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의 명확한 계시, 죄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 그의 활동에 관한 분명한 단언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사랑의 호소에 대한 언명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죄와 심판과 사랑이라는 세 단어가 하나의 선 상에 놓이게 된다. 이것들은,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백성 가운데 있으며 또한 그들은 위해 있는 하나님의 도에 입각해 취급될 수 있는 말이다.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그의 심판 활동, 그리고 그의 사랑의 호소이다. 이 세가지는 본 선지서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이 세가지는 서로 결합하여, 선지자가 정직하다고 선포한 하나님의 도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그렇다면, 호세아는 죄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첫째는 많은 특권을 가진 백성의 범죄는 인간이 범하는 죄중에서도 가장 가증스러운 죄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다의 죄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에게 사랑을 물붓듯 쏟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가상에 배신으로 답하였다. 이 선지서에서 죄가 통속적인 형태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음은 주목할 만하다. 죄는 단지 도덕적이며 영적인 의미로만 언급되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는 사랑에 대한 배신의 죄이다. 유다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사랑하시고 찾으시며 구속하여 주신 민족의 죄였다. 그들은 그들이 행할바에 대해 하나님께 가르침 받은 백성이었고, 하나님의 팔에 안긴 백성이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인에 대한 사랑 이상의 것이었다.이런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계약에 불충실했다.

호세아는 자신의 찢긴 심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웠단. 그의 가정 생활은 파괴되었으며,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고멜의 배신 때문에 차믈 수 없는 번민에 시달려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죄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죄를 묘사하는 데 간통, 행음이라는 자극적이며 통속적인 단어를 채택하였다. 간통죄는 불법적인 관계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범죄이다. 이는 이 백성들이 범한 죄였다. 행음은 더 나쁜 것이다. 이는 돈으로 몸을 팔고 사는 죄이다. 이 죄 역시 유다가 범한 죄었다. 선지자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셨으며 사랑하셨다. 또 그들에게 행할 바를 교훈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른 신을 좇았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계시는 그러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일 것이다. 첫째는 그러한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러한 죄를 결코 너그럽게 봐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와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것ㅇ. 그 묘사는 생생하고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 백성들에 있어 사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업신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사랑을 훼손하였다. 하나님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언어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자신의 목적을 밝히셨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그의 사랑을 멸시하였다. 그들은 음녀와 간부가 되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고통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눈감아 준다거나, 죄와 타협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었다. 지혜가 있는 자는 깨달을 것이고, 총명한 자는 알 것이다. 하나님의 도는 정직하다. 따라서 언제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특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우리는 흔히 대화 속에서 작은 죄 또는 큰 죄라는 말을 하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구분은 전혀 근거가 없다. 하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는 사실이다. 호세아처럼 민족적인 견지에서 보면, 특권을 가진 민족의 죄는 특권을 가지지 못한 민족의 죄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빛을 누리는 데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 결국 쉽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치 못할 것이라면, 우리는 영국에서 태어나는 것보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선지서는, 고멜이 호세아를 대하듯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면 하나님께서 괴로워하신다는 점을 탄식과 한숨으로 교훈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두변이나 말했듯이, 죄와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너그럽게 눈감아 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뿐만 아니라 그의 필연적인 심판 행위에 대한 것까지도 명백히 밝혀졌음을 알게 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심판이란 말은 공의 속의 징벌적인 요소를 지적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 선지서 전반에 걸쳐 진노의 호통으로 울려 퍼지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 선지서의 빛 가운데서,그리고 실로 성경 전체의 계시의 빛 가운데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결코 변덕스러운 것이 아님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징벌은 오히려 죄 자체가 가져오는, 취소할 수 없는 결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곧 도덕적 세계를 조성하사 우리가 그러한 결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게 하셨다. 죄는 언제나 심판에 이른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이는 바로 사람이 스스로 심은 것을 거둔다는 것을 명백히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 형벌은 불가피한 것이며 죄의 경로 속에 반드시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불가항력적인 강제성이 죄에 대해 최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호세아에게서 들어 인식하였지만,이외에도 알아야 할 것이 상당히 많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로부터 피할 길은 없다.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시편 기자가 물었을 때, 그 정확한 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선언 가운데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다. 또 그의 통치가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도 없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사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간구하는 것은 정말 당연한 일이요 옳은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의 왕권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다렬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반역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강력한 방패에 부딪혀 깨질 수 있다. 또 하나님의 피난처로 피해, 모든 해로부터 보호받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자신의 통치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각, 그의 선택, 그리고 그의 철학을 그 통치의 궁극적인 결과에까지 성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신다. 한 전사를 바라보고 "누구뇨"라고 물었던 이사야는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면서 매우 주목할 만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사63:1). 그 전사는 포도즙 틀을 밟고 있었다. 즉, 포도를 짜서 그것의 특성을 드러내게 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늘 하고 계시며 오늘날 전 세계에 이 일을 행하고 계시다. 따라서 인간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자신의 철학과 선택을 그 통치의 궁극적인 결과에 까지 성취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벌로서의 심판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니다. 이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떠맡은 것이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의지를 망라하는 것이며, 그러므로써 도덕적 세계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벌칙은 의에 대한 축복 만큼이나 결정적인 것이다. "여호와와 도는 정직하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사랑의 호소를 하신다는 가장 중대한 사실에 접하게 된다. 이는 실로 호세아가 전한 메시지의 가장 뚜렷한 특색을 이루는 내용인 것이다. 그것은 시편의 음악을 끊임없이 울린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호세아의 비극을 통해 그에게 나타났다. 고멜은 그를 속였고, 그에게 불충실하였으며 그를 버렸다. 그녀가 허망한 연인에게로 가 버렸을 때, 그의 마음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호세아서의 이야기는,그녀의 연인들이 그녀를 버렸고, 그녀는 종으로 전락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때 호세아는 그녀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되찾기 위해 그녀를 노예로서 사야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골 골짜기에 있는 그녀에게 소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아골이라는 단어는 고통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통의 골짜기에서 소망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이 개인적인 뼈 아픈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영적인 간음과 매음의 죄를 범한 민족에게 그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신가를 보이셨다. 고통의 골짜기에 소망의 문이 열렸다. 이는 모든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 사랑의 노래이다. 오직 호세아만이 그가 순종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명해진 일을 수행함으로써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메시지를 다음의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나니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 큰 외침은 자기 백성의 반역으로 인해 고통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극도의 경멸 속에 처해 있던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떡, 즉 설 구워져 흐물거리는 떡, 한 쪽은 덜 익었고, 다른 한쪽은 재가 되어 버린 떡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중심의 외침을 듣는다.

사진설명 : 나라 혹은 민족은 그 심은 것을 거둔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그에게 돌아온다면 그 땅에 다시 번영을 가져다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유대 산지에서 추수한 곡식을 타작하고 있는 장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11:8)

이에 대한 답변은 바로 다음의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14:4).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중심에서 나온 변함없는 말씀을 듣게 된다.

내가 이 설교의 본문으로 이러한 말씀들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다른 구절들 즉 죄의 특성과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나타내는 엄하고 두려운 경고의 말씀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사랑의 노래가 들려 오는 이 구절을 택하였다.

이 구절은 호세아의 위대한 메시지에 있어 불변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궁극적인 사상으로 인해 이에 관계된 말씀을 다른 말씀들보다 강조함으로써 본서 전체의 가치를 매우 하찮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가 사랑의 노래만 듣고 심판의 선포는 잊어 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심판만을 강조하고 사랑의 노래는 잊어버린다면, 이 또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랑에 대한 배신이야말로 가장 가증스러운 죄악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고통을 준다. 또한 죄인 자신도 파멸시킨다.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눈감아 주시기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회복시키실 수 있고, 또 희복시키신다. "누가 지혜가 있는가?" 그는 깨달을 것이다. "누가 총명이 있는가?" 그는 알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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