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1장 주석
=====41:1,2
이스마엘의 그다랴 암살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칠 월에 - 연도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해는 예루살렘이 함락 되던 연
도(B.C. 586년)였던 것 같다. 예루살렘 함락은 사월로 명시되어 있다(39:2). 그리고
히브리 종교력의 칠 월은 현대력으로는 양력 10월경에 해당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 이전에 40:7-16의 사건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다랴에 대한 암살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년이나 7년 후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명확한 근거
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유다인들은 그다랴에 대한 암살을 큰 사건으로 여겼으며, 그
후 칠월을 이에 대한 기념의 달로 예식을 거행하였다(슥 7:5 ; 8:19).
이스마엘이...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암살하는 사건
의 배경은 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다인의 관습에 따
르면, 주인은 손님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또 손님은 주인에게 신뢰를 가지고 그에
맞는 답례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다랴는 이스마엘을 손님으로 정중히 대접했을 것
이고, 이스마엘을 믿고 무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Bright). 이에 대해 클라크
(Clarke)는 보다 더 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즉 본절에서와 같이 함께 떡을 먹는
것이 단순한 식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지리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다랴를 살해한 행위는 그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한 갈대인들에 대한 공격이
고 도전이었다(Thompson).
=====41:3
거기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 첫 번째 살인에 이어 또 다른 살인이 이어졌
다.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몇몇 유다인들이 곧이어 살해 되었다. 이들은 미스바에 거주
하고 있는 백성들의 대표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미스바에 주둔하고 있던 갈대아 군사
들 중 몇몇도 살해되었다. 아마 이들도 식사에 참석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곳에
참석해 있던 갈대아인 주둔 병사들을 모두 처치하지 않고는 그 음모를 실천할 수 없엇
을 것이다. 아마 이들은 소수였을 것이고 기습을 당해 모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
런 행위는 바벨론 군대의 보복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니콜슨(Nicholson)은
이 사건에서 살해된 갈대아인들이 총독 관저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었으며, 일시적으로
미스바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41:4
본절은 그다랴 살해 사건이 사전의 각본에 따라 주도 면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암시
한다.
=====41:5
팔십 명이 그 수염을 깍고...몸을 상하고 - 북이스라엘의 옛 종교 중심지였던 세겜
과 실로, 그리고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미스바에
도착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제사하기 위해서 가던 중이었다.
이 사실은 소제물이나 유향이란 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때가 칠월이었으니 이
들은 가을의 큰절기인 초막절에 참석하고자 했을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7월은 신
년도와 같은 것이었다. 한편 순례자들이 북쪽에서 왔다고 하는 사실은 북 이스라엘
지역에 살던 사람들 중에 적어도 얼마 정도는 B.C. 622년의 요시야의 개혁을 받아들이
고 그때까지 계속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어쩌면 이들은 중앙
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것을 명하고 있는 신명기의 규례들을 따르고자 했을 것이다(신
12:5, 6). 또한 순례자들은 수염을 깍고 옷을 찢고 몸을 상하는 등 슬픔과 회개의 표
시를 하고 있었는데(16:6 ; 48:37 참조), 이는 틀림없이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한 애
곡의 표시였을 것이다. 전체 포로기에 걸쳐서 성전 파괴에 대한 애도는 중요한 주제
가 되고 있다(시 74, 79편 ; 사 63:7-64:12, 애가서 등). 많은 주석가들은 성전 파괴
이후에도 성전의 존엄성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으며 성전 지대에서의 종교 행사도 계속
되었으리라 본다(Bright, Feinberg, Nicholson 등).
=====41:6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서 - 이스마엘은 극악 무도한 위선 행
위로 위장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그 역시 이들 순례자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
으며 그래서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눌 사람들에게로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Clarke).
그다랴에게로 가자 - 이를 '그다랴의 이름으로 환영한다'라고 의역해 볼 수도 있겠
다(Bright). 이런 이스마엘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정중한 초대였다. 한편 이스마엘
이 이들조차 살해한 원인이 본문상에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아마 이들이 유다 총독
그다랴를 방문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발각되지 않게 하려는
동기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던 것 같다. 그러나 8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쩌면 이들
에게서 양식을 얻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41:7
이스마엘이...그들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니라 - 순례자들의 시체는 '구덩이'에 던
져졌다. '구덩이'는 시체들을 감쪽같이 처분해 버리기에 적절한 장소였다(38:6). 한
편 이 '구덩이'는 물이 귀한 팔레스틴의 곳곳에서 볼수 있었던 것인데, 여기다 시체를
던져 넣는 것은 매우 몰지각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시체에 오염된 물은 부정하여 마
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41:8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 본절에는 이스마엘이 숨겨 놓은 양식
을 얻기 위해 이들 순례자들에게 어떤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암시가 엿보이긴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어쩌면 이스마엘은 이들 순례자들을 볼모로 잡아서 그들 가
족들에게서 양식을 갈취 하려고 했었을 수도 있겠다. 이스마엘이 이 열명의 순례자들
의 목숨을 살려주고 양식을 얻고자 하였으나, 아마 이것도 원래 약속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인명이 살해된 이런 사건의 전말은 조만간에 퍼져나갈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들 열 명의 순례자들도 나중에는 피살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이스마엘
은 분명히 유다 땅에 남아 있을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절에는 그가 암몬으
로 도망가려고 하는 장면이 언급되는 바, 그는 이 여행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하고자
했을 법하다.
=====41:9
아사 왕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를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 - 약 300년 전에 유다 왕
'아사'가 미스바를 요새화하려는 일환으로 이 구덩이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왕상
15:22에 따르면 아사는 북쪽 이스라엘 '바아사'왕의 영토에 있던 라마의 성벽을 허물
고 거기서 얻은 재목을 가지고 미스바에 요새를 건축하였다. 오늘날의 텔 엔 나스베(
Tell en-Nasbeh)를 발굴한 결과 이로 보이는 구덩이가 발견되었다(Thompson). 이 구덩
이는 원래 그 지역의 물을 공급하기 위한 저장소였으나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전쟁을
치르는 시기에 요새화의 일환으로 활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Clarke).
=====41:10
왕의 딸들 -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되고 있다. 바벨론 군대가 정치적으로
상당히 비중이 있는 이들을 붙잡아가지 않았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다윗 왕족이나 방백들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드기야의 딸들이 예루살
렘 함락 당시에 재빨리 도피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Calvin). 한편, 예레
미야에 대한 언급이 여태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는데, 어쩌면 예레미야는 이스마엘이
포로로 잡아간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포로들이 요하난의
도움으로 베들레헴 근처로 돌아올 수 있었을 때 예레미야가 이들 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42:2 이하). 그러나 이것도 추측일 따름이다.
=====41:11,12
여기서는 요하난과 다른 군대 장관들이 이스마엘의 악행 소식을 듣고서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기브온 큰 물가에서 이스마엘 일당과 마주치
게 되는데,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9.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또한 '큰 물가'라고 하는 곳은 깍아지른 듯한 바위 사이의 거대한 웅덩이 정도 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이 기브온은 미스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4.8km떨어진 곳이었
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미스바로 추정되고 있는 텔 엔-나스베에서부터 기브온까지
의 방향은 본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암몬 방향과는 각도가 약간 다르기 때문
에, 틸 엔-나스베가 미스바의 위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잇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마엘
이 추적을 따돌리려는 이유에서 우회했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Bright).
한편, 니콜슨(Nicholson)은 삼하 2:12-17에 기록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
바로 이 큰 물가였다고 본다.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9.5km 떨어
진 오늘날의 엘-집(el-Jib), 곧 고대 기브온 지역에서 깊이 약 25km 정도되는 거대한
구덩이를 발견했다. 이곳은 원래 물을 저장하거나 모아두기 위한 구덩이였던, 그 내
부로 내려가는 계단이 꼭대기에서부터 바닥에까지 닿아 있었다.
=====41:13,14
이스마엘에 의해 강제로 끌려 가던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잔인성과 장차 암몬에서의
노예살이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마엘을 징벌하러 온 가레아의 아들 요나단
과 그 군대 장관들을 대했을 때 매우 기뻐하며 달아날 수 있었다(Clarke).
=====41:15
여덟 사람과 함께 - 이스마엘을 끝까지 따라갔던 자들은 아마도 그다랴 살해 사건
에 처음부터 연루되었던 골수 분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다랴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성공적으로 치르었기 때문에 그를 사주 하였던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로 곧장
되돌아갔다.
=====41:16,17,18
여기에는 요하난이 인솔하는 무리가 그다랴 살해 사건으로 인해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미 애굽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그 일
환으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약 6마일 가량 떨어진 베들레헴 근방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행로를 멈추고 예레미야에게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42:1, 2). 한편 게롯김함이란 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김함이란 사람 이름이
었던 것이 분명하다. 김함은 바실래의 아들이었는데, 이 바실래란 사람은 다윗이 압
살롬의 반역으로 도피하던 중 다윗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그는 예루살
렘으로 귀환하는 중에 다윗을 호위하여 요단 강을 건넜다. 다윗은 바실래를 귀족의
일원으로 초대했지만, 바실래는 연로한 이유를 내세워 그의 아들에게 그 영예를 허락
하도록 요구하였다(삼하 19:31-40).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져 왕가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베들레헴 근처의 땅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로부터 이곳은 게롯김함으로 알려지
게 되었다. 이 '게롯김함'이란 말의 뜻은 '김함의 소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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