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예레미야

[스크랩] 예레미야 38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58

예레미야 38장 주석

 

=====38:1

  본장은  예루살렘 함락이 가까와 옴에 따라 예레미야에 대한 핍박의  정도도  더욱

심해져감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유치(留置)되어 있으면서 여전히 하나

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을 계속하였음에도 분명하다.  여기 언급되고 있는  그다랴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착고에 채운 바스훌(20:1-3)의 아들이며,  유갈은  여후갈(37:3)과

동일인이다.  그리고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시드기야의 특사로 예레미야를 찾아갔던

자이다(21:1, 2).  이들은 모두 시드기야의 심복으로  당시  유력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친애굽파를 대표하는 자들이었으리라 짐작된다(Feinberg).


=====38:2

 본절 내용은 12:9에 언급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어떤 이는 이를 후대의 필사자

에 의해 삽입된 해설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그렇게 보아야 할  필요가  없

다.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은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

기 때문이다.  또한 '칼', '기근', '염병'과 같은 용어들은 예레미야가 빈번하게 사용

하던 말이다.  '항복하는 자'(*       , 하이체)의 원래 의미는 '밖으로 나가는 자'란

뜻이다.  포위 공격이 감행되고 있던 이런 시점에서 항복을 권유한다는 것은 반역으로

보였을 것이며, 그를 체포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Thompson).   그리고

'노략물을 얻음같이 살리라'는 말에 대한 문자적 번역은 '그의 목숨은 그의  전리품이

될 것이다'이다.


=====38:3

  이 성이 반드시...손에 붙이우리니 - 이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일신상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이 예언을 선언하는 데에 있어서 주저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Clarke).  한편, 이 예언의 요지는 34:2, 22 ;  37:8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 말을 반복해서 선포했던 것이  분

명하다(Bright).  아무튼  이 두번째 선언도 그 당시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반

국가적 소요를 야기시키는 선동적 발언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이 성이 반드시...붙이우리다'란 말에 놓여져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우가문상의

절대 부정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38:4

 방백들은 반역죄 내지는 선동죄를 적용하여 예레미야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

다.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이 약하여졌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이는  예레미야

의 투항 권고로 인해 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라기스 서신 제6편에 등장한다.  라기스 서신에서 군대 지휘관은 예루살렘 관리들  중

에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패배주의자들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

나 그 뒤의 내용이 파손되어 있기 때문에, 이 지휘관이 비난의 대상으로 삼은 자가 누

구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라기스 서신 제3편에 '경계하라'고 선언한 어느 선지

자가 언급되고 있긴 하여도 지휘관이 지목하고 있는 자가 예레미야인  것으로  규정할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예레미야가 여기서 반역적 패배주의자로 몰리고  있음은

분명하나, 민족지도자들 중에도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Thompson).


=====38:5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 이는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자기 마음대로  처분해

도 된다는 의미이다.  시드기야는 이를 통해서 그가 그들의 조언대로  시행할  것임을

간접적으로 밝힌 셈이다.  시드기야는 참으로 나약한 군주였다.  그는 선지자를  존중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막료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무죄한 자를 희생시키고자 하였던  것

이다(Clarke).  어떻게 보면 당시의 실세는 왕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백들에게 있

었으며, 이들은 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25-27절 참조).   물론,

그의 등극 자체부터가 이미 정통성을 상실케 하였을 것이다.  즉 그는 여호야긴이  포

로로 붙잡혀가고 난 다음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위에 오른 꼭두각시 왕이었으며,  또한

국민 대다수에 의해서 진짜 왕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여호야

긴이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 니콜슨(Nicholson)은 왕의 무능함을  더

욱 강조하기 위해서 이를 '왕은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런 힘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

다.


=====38:6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 맛소라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예레미야를 붙잡아 넣은 구덩이를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로 묘사하고 있다.  그

러나 이는 26절의 내용과 다소 일치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주석가  니콜슨

(Nicholson)은 왕의 아들 말기야란 말을 누락시키고 있으며, 또한 영영 성경 NEB도 이

와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 니콜슨은 이곳의 구덩이를 37:11-16에 언급되고 있는  구

덩이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서 37장의 요나단의 집이 시위대 건물

에 포함되어 있었던 복합 건물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어떤       해석자는

24-28절의 내용을 끝부분으로 옮겨다 놓고 이를 무마하려고 하고 있으나 이 역시 정확

한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설명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고대에

는, 건조한 여름 날씨에 대비하기 위해 겨울비를 받아둘 우물이 예루살렘에는 많았다.

그러므로 본문의 우물을 굳이 37:16의 '토굴 옥 음실'과 일치시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

을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예레미야를 깊은 우물속에 넣어 저절로 죽게 함으로써  피

를 흘리게 하는 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 같다(창 37:18, 19 참조).  한편,  전형적

인 구덩이는 석회암을 파내고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직경 약 90cm 정도의 좁은 입구와

물을 퍼내는 곳의 깊이가 대개 90-120cm 깊이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물을 담아 두고

있는 곳은 상당히 깊었다.  이곳에서 예레미야를 밧줄을 이용해 집어 넣고 꺼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안으로 출입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13절).


=====38:7

  왕궁 환관 구스인 에벳멜렉이...들으니라 - '환관'에 해당하는 '사리스'(*

     )는 구약에서 흔히 왕궁 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곤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서는 문자 그대로 환관이었던 것 같다.  70인역(LXX)은 이 '환관'이란 단어를  생략하

고 있다(Bright).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 우리는 구약에서 흔히 성문에 앉았다는 기록을  보게

되는데, 이 성문은 공개 재판이 열리던 곳이었다(Clarke).


=====38:8

  에벳멜렉이...왕께 고하여 가로되 - 예레미야의 구출은 바로 이 친절한 구스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사람은  확실한 죽음의 운명에 처한 예레미야를 구출하기  위

해 신속한 행동을 취하였다.  예레미야는 훗날 다가올 예루살렘 파멸 때에 그가  구원

받게 될 것임을 약속한다(39:15-18).  에벳멜렉은 급히 왕에게 찾아가  호소하였는데,

왕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사건의 전말을 호소하기에 아주 적합했을  것

이고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Thompson).


=====38:9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 -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이는, 그가 죽은 자나 다름없

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그곳에 던졌을 때는  조만간  진흙에

빠져 질식해 죽지 않으면 굶어서 죽을 것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따라서  에벳멜렉은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다급한 상황을 전달함으로써 갈등에 사로

잡힌 왕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했다.


=====38:10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 여기서 시드기야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설령 방백들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예레미야를 구출해 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Clarke).  맛소라 사본(MT)은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30인으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

에, 70인역(LXX)은 이를 세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브라이트(Bright)는 한  사람을

구출하는 데 30명이란 사람을 동원하는 것이 불필요한 인원 동원이라고 보고 70인역을

따라 세 사람으로 설명하고, 30이란 숫자를 히브리어 자음이 하나 중복되었을  것이라

고 말한다.  또한 어떤 히브리어 사본에도 3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어쩌면 방백

들의 저지나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30명이 할당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

무튼 시드기야의 대응책은 신속하고도 또 실질적이었다.


=====38:11

 헝겊과 낡은 옷을 취하고...내리우며 - 왕궁에는 의복이나 전투복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으며, 사절에게나 또는 공신들에게 선물로 줄 의복을 보관기도 했다.   그

러나 에벳멜렉이 바로 이러한 창고에서 이것들을 취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그

는 왕궁의 광에서 낡아 버린, 그래서 다시 사용할 수 없는 그런 의복들을 취하여 그것

들로 밧줄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선지자에게 내려 보내 그것을 타고       올라오도록  하였

다.


=====38:12,13

 에벳멜렉은 대단히 사려가 깊고 또 지략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밧줄을  예레미

야의 겨드랑이에 대고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 올림으로써 기진 맥진해 있을 예레미야에

게 힘이 들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37:17-21에는 예레미야가 구출되어 시드기야  왕과

밀담을 나누는 거사가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에서 보는 것과 같은 구출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양쪽 모두에 그가 시위대 뜰에 머물게  되었다

는 기록이 담겨 있다(13절 ; 37:21 참조).


=====38:14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집 제 삼 문으로 -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구출된 후에  이어

지는 왕과 예레미야 간의 비밀 회담이 기록되고 있다.  37:17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본문에서는 비밀 회담이 이루어진 장소가 여호와의 집 제 삼 문으로 분명

하게 지적되어 있다.  이 문에 대해서는 다른 곳의 언급이 없어 확실히 알 수가  없으

나, 추측컨대 왕궁과 성전을 직접 연결하는 것으로서 왕이 개인적으로서 출입했던  그

런 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8:15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 예레미야는 왕의 성품이 나약하고 또 그의 신하

들에게 끌려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에게 여호와로부

터 온 말씀을 전해준다고 해 봐야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임을 알았다.  시드기야는 앞

서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한 바 있으며 또한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하였었다

(32:1-5).  그러나 지금은 사태가 대단히 심각하였기 때문에 그는 예레미야를  죽이지

도 않을 것이고 또 방백들의 손에 넘기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호와의 사심을 두

고 맹세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16절).


=====38:16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사시거니와'에 해당하는  히

브리어 '하이'(*    )라는 단어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피조물들의 생명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 곧 근원적이며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Calvin).  또 본문에서처럼  여호와

의 사심으로 맹세하는 것은, 그 맹세 사항을 어겼을 경우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맹세한 자의 생명을 빼앗아 가셔도 좋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38:17

 네가 만일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 왕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느냐  마

느냐에 따라서 이 성의 안전 여부가 달려 있었다.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바벨론 왕의

방백들은 애굽군의 진격을 차단하고 다시 예루살렘 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바벨론군

장군들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 당시 느부갓네살은 수리아의 립나에       있었다(39:5,  6,

Clarke).


=====38:18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 시드기야에 대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이전과  동

일하였다(2, 3절 ; 21:8-10 참조).  왕과 백성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항복이

었던 것이다.  항복을 권유하는 이 메시지로 인해서 그는 방백들에게 붙잡혀 구덩이에

던져졌었다.  한편 유다 방백들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히브리어'사림'(*        )이란

말을 갈대아인들의 장군들에게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아이러니한 표현이다.

유다 방백들은 예레미야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였으나,  적국인  갈대인들의       방백들은

그의 생명을 구해주게 될 것이다(Thompson).


=====38:19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 하였노라 - 여기서도 시드기야의  우유

부단한 성격이 다시 노출된다.  그는 예레미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드기야의 말에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갈대아인들에게 투항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들중의 어떤 이

들은 예레미야의 충고에 의해 투항했을 수도 있겠다(Bright).  아무튼 시드기야는  예

레미야의 말을 따를 용기가 없었다(5절 참조).  그는 방백들을 두려워 했을 뿐만 아니

라 이처럼 바벨론에 투항한 자들의 적대감이나 푸대접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38:20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 이는 결국 시드기야의 모든 두려움의 원인이 여호

와께 대한 불신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시드기야가 참으로 염려하고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게 하고 그래서 바벨론 군대에 항

복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

기 때문에, 그는 예상할 수 있는 온갖 두려운 상황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거기에  기우

(杞憂)를 더하고 있었다.


=====38:21,22

  예레미야는 이어서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항복하기를 거부할 때 생겨날  참

혹한 결과에 대해서 말한다.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 이는  친

구들에게 배반당했음을 나타내는, 익히 알려진 관용적인 표현이었던 것 같다(20:10  ;

시 41:9 참조).  진흙에 빠짐을 보고도 물러갔다고 하는 내용은 시 69:14의 내용을 상

기시킨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먼저 투항했던 자들의 조롱을 두려워 했다.   그러나

자신의 후궁들로부터 이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더       수치스러울  것인

가! 당시에는 정복국의 왕이 패전국의 궁녀들을 모조리 취해가는 것이  상례였다(삼하

16:21, 22 참조).  한편 이 짧은 내용의 노래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게 될 때의 시

드기야에게 적용될 것이긴 하지만, 이는 또한 예레미야가 최근에 겪었던 사건을  연상

시키는 것이기도 하다(6절).


=====38:23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인에게로 끌어냄을 입겠고 -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시드기

야의  운명은 구덩이에 던져지게 된 예레미야의 운명과 평행을 이루며 기록되고  있다

(6절 참조).  여호와께서는 에벳멜렉을 사용하여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13절) 죽음을 면케하여 주셨으나, 여호와의 목소리를 거부하는 시드기야는 그를 해할

갈대인에게로 '끌어냄을 입을'것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여자들은 왕의  자

식들을 낳은 왕비들이었을 것이고 앞절의 여자들은 젊은 궁녀들이었을 것이다.   아마

전자는 나이가 많고 또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방백들에게 환영을 받지도 못했을  것

이다(Clarke).


=====38:24

 너는 이 말을...알게 하지 말라 - 우리는 시드기야가 선지자의 충고를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선지자의 충고에 대한 시드기야의 말은 예레미야에게  침

묵을 지키고 있기란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예레미야의 말이 진실됨을

깨닫게는 되었으나 여전히 신하들의 반발 등의 여러가지 걱정거리들 때문에 그 충고를

실행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바벨론의 포위 공격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를

논의한 것 자체를 방백들에게 말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시드기야의 바람이었다.


=====38:25,26

  여기서도 신하들을 두려워하는 시드기야의 유약한 심성이 드러난다.  그는  한편으

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언급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였지만,  그

것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신하들의 입장에 굴복되어 있었다.       그는 항복하고 싶

어도 신하들이 행여나 반역을 꾀하여 자신을 살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득세한 신하들은 대부분 친애굽 내지는 반바벨론 정책을 견

지 하였기 때문이다.


=====38:27

 예레미야는 왕이 명령한 대로 말했으며, 방백들은 더 이상 예레미야를 구출해 내도

록 왕이 명한 사실은 이미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던 듯하기 때문에 그들은  예레미야

의 대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도  당파적이면서도

강력한 권세를 형성하고 있던 방백들에게 불필요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나약한 왕을 곤

경에 처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38:28

  예레미야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않고 다만 자신의 구출 문제만을  그

들에게 말함으로써 그 사건의 일말은 끝났다.  이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시위대 뜰에 머물도록 허용이 되었던 것이며,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충고를

실행할 용기가 부족하긴 하여도 돌아와서 과연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를 고심하게 되었

을 것이다(Thompson).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