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7장 주석
=====37:1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 본절과 다음 절은 본장과 38장의
제목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앞장(36장)에서는 여호야김 시대의 사건들을 다루었으나
여기서는 다시 시드기야 재위 당시의 사건으로 넘어오고 있다(Bright).
=====37:2
유다가 민족적 파멸에 봉착하게 된 근원적인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
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하는 영적 차원의 것이었다. 한편 본
문은 왕하 24:17-20에 언급되고 있는 시드기야에 대한 기사를 압축해서 옮겨놓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왕하에서의 주된 취지는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으로 임
명된 후 그 역시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시드기야가 자기 신하들과 방백들이 예레미야의 가르침을 배척했기 때문에 시드기야도
거기에 끌려다녔던 것이다(Thompson).
=====37:3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 시드기야는 다급한 상황에
처하자 예레미야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본절에서 시드기야의 특사로 보내진 제사장
스바냐는 예루살렘 포위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에도 시드기야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
를 방문한 적이 있다(21:1-10). 그리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스마야란 거짓 선지자로
부터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라는 편지를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2:24-32). 그러나 예레
미야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 중에는 들지 않았다(38:1). 반면에 그의 동료 관계에 있
던 여후갈과 바스훌(21:1)은 예레미야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20:1, 2 ; 38:1-6).
한편, 본절에 언급된 왕의 요구 사항은 아마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
에서부터 철수하였던 그런 기적을 여호와께서 다시 베풀어주시지나 않을까 하고 바라
는 마음에서 였을 것이다(왕하 19:32-37). 그러나 1-7절에서는 시드기야의 운명과 또
한 포위 공격이 시작될 것에 관해 선언되어 있다.
=====37:4
출입하는 중 - 이 표현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는데 , 본절에서처럼 백
성들 중에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녔다는 의미이다. 13, 14절에서 그는 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때로부터 그는 B.C. 586년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까지 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37:5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 애굽군대가 팔레스틴 평원으로 들어온 것은 B.C.
588년 여름이었다. 그들은 아마 시기드야의 응원 요청에 응답하여 출병하였을 가능성
이 많지만 또한 바벨론군의 애굽 침입을 사전에 방어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라기스 서신(Lachish Letter)에는 유다군의 지휘관이 애굽에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
다. 어째든 바벨론 군대는 애굽 군대의 등장으로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풀고 그들과
접전하기 위해 군사를 돌려야 했던 것이다.
=====37:6,7
애굽 군대는 갈대아인의 군대에 패하고 만다는 예언이다. 그들이 출병한 것도 사
실 유다를 진심으로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즉각 자기들 나라로 철수했으며,
이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는 데는 방해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
다(Clarke).
=====37:8
갈대인이 다시 와서...불사르리라 - 본 단락에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21:1-7에 기
록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여태까지 예고되고 경고되어 왔던
유다에 대한 심판의 불가피성이 이제 완전하게 실행되고 말 것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이 중단된 것은 단지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그 어떤 것도 예루살렘
멸망을 방어해 줄 것이 없는 것이다(Nicholson).
=====37:9,10
느부갓네살에게 비록 부상당한 병사만 있다고 해도 그가 승리할 것이므로 헛된 기
대를 버리라는 내용이다. 이런 수사적 과장법은 예루살렘의 패망과 파멸이 불가피하
다는 것을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선지자의 대답은 그 어느 때나 마찬가지
로 분명하고도 단호하였다. 오히려 유다 멸망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 이전보다 더 강
렬했다. 바밸론군의 철수로 인해서 백성들의 사기가 크게 고조되어 있던 그 시점에
이러한 예레미야의 말은 심각한 반발과 증오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다음 단락에서 그가 체포되고 투옥되는 것은 전혀 놀랄일이 아니다. 한편 '스스로
속여 말하지 말라'고 하는 어구는 히브리어 관용적 표현인데, '너희 영을 높이지 말
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37:11
갈대인의 군대가...예루살렘에서 떠나매 - 예레미야가 체포되는 사건은 바벨론의
포위 공격이 중단되고 백성들이 성밖으로 다닐수 있던 그 어간에 발생했다. 본절에서
부터 15절까지는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37:12
베냐민 땅에서 백성 중 분깃을 받으려고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분분하
다. (1) 예레미야가 아나돗의 세습 토지를 유산으로 분배받고자 했음을 가리킨다는
견해(Clarke), (2) 32:1-15에 언급되어 있는 땅 구입 사건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Bright), (3)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아나돗으로
피신하고자 했다는 견해(Lewis). 이 중 세 번째 견해는 유다 민족의 파멸을 선포하면
서도 그 운명에 끝까지 동참하고자 했던 예레미야의 소신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견해는 연대기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만일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멜에게서 산 땅을 취하기 위해 아나돗으로 가고자 했다면, 이때가 32장보다 이후
의 시점이 되어야 하나 사실은 그 이전이다. 왜냐하면 32장에서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힌 것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굳이 두 번재 견해를 취하려면, 본문에서 예레
미야는 이미 사둔 땅을 보러갔던 것이 아니라 그 땅의 매매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아
나돗으로 가고자 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32:8 주석 참조). 어째든 히브리어
본문은 명확하지 않으며, 우리는 위의 여러 해석들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것이 나름
대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37:13
네가 갈대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 문지기 두목 이리야는 예레미야를 이탈자나
도망자로 보고 그를 체포하였다. 아마 그가 예레미야를 그렇게 오해한 데에는 몇가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즉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해 왔었으며
(12:9 ; 38:2), 많은 유다인들은 실제로 적에게 투항하였었다(38:19 ; 52:15). 더군
다나 바벨론이 승리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예레미야가 선포하고 다녔다는 것도 잘 알려
져 있었다.
=====37:14
망령되다...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 '망령되다'에 해당하는 '쉐케르'(* )
는 '허위', '거짓된', '기만하다'는 뜻으로, 애매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피해를 입
히려고 획책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항복하려'의 히브리어 '나팔'(* )은
원래 '떨어지다'는 뜻이며, 상징적으로 '배반하다', '(다른 편으로) 기울어지다'는 의
미를 나타내기도 한다(Calvin).
=====37:15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 요나단의 집을 왜 감옥으로 사용했는지 하는
점은 알 수가 없다. 아마 유다 관리인들의 집에는 임시로 죄수 등을 감금할 수 있는
그런 방이 있었던 것 같다(Ciarke). 그들은 공정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예레미
야를 때리는 등 아예 흉악범 취급을 하였다.
=====37:16
예레미야가 토굴 옥 음실에 들어간지 - 이 구절의 해석이 다소 어렵긴 하지만, 예
레미야가 갇힌 곳이 지하 감옥이었으라고 짐작된다. '토굴'(* , 하
하누요트)은 우물과 흡사한 구덩이로서 그 바닥은 작은 방처럼 움푹패인 형태라고 하
는데(Blayney), 본절에서는 이 움푹한 곳을 가리켜 '음실'(* ,보르)이라 칭하
는 듯하다. 38:6, 13을 보면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던져지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아
마 여기서도 예레미야는 이 집의 구덩이에 던져졌을 것이다. 어쨌든 이곳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될 경우 결국 죽게 되고 말 비참한 장소였다(20절). 그는 시드기야가 그
를 불러들였을 때까지 이곳에 상당 기간 동안 갇혀있었던 것 같다.
=====37:17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있느뇨...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 본절의 장면은 시드기야
의 소심한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왕이 자기 신하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밀히
자문을 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메세지는 이전과 같은 것이었다. 즉
왕의 운명이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여졌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감금된 상태애 있었
으나 진실을 왜곡시킬 수는 없었다.
=====37:18,19,20
본문은 그토록 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했던 예레미야가 위경에
처해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동정을 구한 것
이 아니라 공의에 입각한 정당한 판결을 받기 원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죽이도록 율
법에 규정되어 있지만(신 13:1-5), 상황은 전혀 반대였다. 예레미야는 진리를 전한
이유로 투옥되었으나, 거짓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켰음에도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녔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 '당신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盜用)한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속았습니다'라는 의미의 역설적 표현이다.
=====37:18-20
본문은 그토록 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했던 예레미야가 위경에
처해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동정을 구한 것
이 아니라 공의에 입각한 정당한 판결을 받기 원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죽이도록 율
법에 규정되어 있지만(신 13:1-5), 상황은 전혀 반대였다. 예레미야는 진리를 전한
이유로 투옥되었으나, 거짓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켜음에도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녔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 '당신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盜用)한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속았습니다'라는 의미의 역설적 표현이다.
=====37:21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두고...떡 한덩이씩 - 이 비밀 회담은 결국 왕이 호의에
베푸는 것으로 끝났다. 예레미야는 구덩이에서 구출되었으며, 시위대 마당으로 옮겨
졌다. 아마 시위대 뜰은 요나단의 암굴보다는 상태가 휠씬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시
위대 뜰은 왕궁 곁에 위치해 있었으며(32:2 ; 느 3:25), 감옥과 같이 죄인들을 가두어
격리시킨 곳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행동이 제한당한 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에 있는 그의 사촌 하나멜의 밭을 샀던 것도 바로 그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32:1-15). 더군다나, 이제는 식량 문제도 해결되었
다. 물론 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식량이 남아 있을 때까지 그러했다. 그러나 포위 공
격이 점점 압박해 들어옴에 따라 지금까지 선지자가 예언하여 왔던 그 기근이 이제 실
제로 닥치게 된다.
=====37:20-28
본문은 그토록 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했던 예레미야가 위경에
처해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동정을 구한 것
이 아니라 공의에 입각한 정당한 판결을 받기 원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죽이도록 율
법에 규정되어 있지만(신 13:1-5), 상황은 전혀 반대였다. 예레미야는 진리를 전한
이유로 투옥되었으나, 거짓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켜음에도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녔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 '당신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盜用)한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속았습니다'라는 의미의 역설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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