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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예레미야

[스크랩] 예레미야 37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58

예레미야 37장 주석

 

=====37:1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 본절과 다음 절은 본장과 38장의

제목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앞장(36장)에서는 여호야김 시대의 사건들을  다루었으나

여기서는 다시 시드기야 재위 당시의 사건으로 넘어오고 있다(Bright).


=====37:2

  유다가 민족적 파멸에 봉착하게 된 근원적인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

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하는 영적 차원의 것이었다.  한편  본

문은 왕하 24:17-20에 언급되고 있는 시드기야에 대한 기사를 압축해서 옮겨놓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왕하에서의 주된 취지는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으로 임

명된 후 그 역시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시드기야가 자기 신하들과 방백들이 예레미야의 가르침을 배척했기 때문에 시드기야도

거기에 끌려다녔던 것이다(Thompson).


=====37:3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 시드기야는  다급한  상황에

처하자 예레미야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본절에서 시드기야의 특사로 보내진 제사장

스바냐는 예루살렘 포위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에도 시드기야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

를 방문한 적이 있다(21:1-10).  그리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스마야란 거짓  선지자로

부터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라는 편지를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2:24-32).  그러나 예레

미야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 중에는 들지 않았다(38:1).  반면에 그의 동료 관계에  있

던 여후갈과 바스훌(21:1)은  예레미야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20:1, 2 ; 38:1-6). 

한편, 본절에 언급된 왕의 요구 사항은 아마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

에서부터 철수하였던 그런 기적을 여호와께서 다시 베풀어주시지나 않을까 하고  바라

는 마음에서 였을 것이다(왕하 19:32-37).  그러나 1-7절에서는 시드기야의 운명과 또

한 포위 공격이 시작될 것에 관해 선언되어 있다.


=====37:4

  출입하는  중  - 이 표현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는데 , 본절에서처럼  백

성들 중에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녔다는 의미이다. 13, 14절에서  그는  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때로부터 그는 B.C. 586년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까지 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37:5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 애굽군대가 팔레스틴 평원으로 들어온 것은 B.C.

588년 여름이었다.  그들은 아마 시기드야의 응원 요청에 응답하여 출병하였을 가능성

이 많지만 또한 바벨론군의 애굽 침입을 사전에 방어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라기스 서신(Lachish Letter)에는 유다군의 지휘관이 애굽에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

다.  어째든 바벨론 군대는 애굽 군대의 등장으로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풀고  그들과

접전하기 위해 군사를 돌려야 했던 것이다.


=====37:6,7

  애굽 군대는 갈대아인의 군대에 패하고 만다는 예언이다.  그들이 출병한 것도  사

실 유다를 진심으로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즉각 자기들  나라로  철수했으며,

이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는 데는 방해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

다(Clarke).


=====37:8

  갈대인이 다시 와서...불사르리라 - 본 단락에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21:1-7에  기

록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여태까지 예고되고  경고되어  왔던

유다에 대한 심판의 불가피성이 이제 완전하게 실행되고 말 것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이 중단된 것은 단지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그 어떤 것도 예루살렘

멸망을 방어해 줄 것이 없는 것이다(Nicholson).


=====37:9,10

 느부갓네살에게 비록 부상당한 병사만 있다고 해도 그가 승리할 것이므로 헛된  기

대를 버리라는 내용이다.  이런 수사적 과장법은 예루살렘의 패망과 파멸이       불가피하

다는 것을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선지자의 대답은 그 어느 때나       마찬가지

로 분명하고도 단호하였다.  오히려 유다 멸망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 이전보다 더 강

렬했다.  바밸론군의 철수로 인해서 백성들의 사기가 크게 고조되어 있던  그  시점에

이러한 예레미야의 말은 심각한 반발과 증오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다음 단락에서 그가 체포되고 투옥되는 것은 전혀 놀랄일이 아니다.  한편 '스스로

속여 말하지 말라'고 하는 어구는 히브리어 관용적 표현인데, '너희 영을  높이지  말

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37:11

 갈대인의 군대가...예루살렘에서 떠나매 - 예레미야가 체포되는  사건은 바벨론의

포위 공격이 중단되고 백성들이 성밖으로 다닐수 있던 그 어간에 발생했다.       본절에서

부터 15절까지는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37:12

 베냐민 땅에서 백성 중 분깃을 받으려고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분분하

다.  (1) 예레미야가 아나돗의 세습 토지를 유산으로 분배받고자  했음을  가리킨다는

견해(Clarke), (2) 32:1-15에 언급되어 있는 땅 구입 사건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Bright), (3)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아나돗으로

피신하고자 했다는 견해(Lewis). 이 중 세 번째 견해는 유다 민족의 파멸을 선포하면

서도 그 운명에 끝까지 동참하고자 했던 예레미야의 소신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견해는 연대기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만일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멜에게서 산 땅을 취하기 위해 아나돗으로 가고자 했다면, 이때가 32장보다  이후

의 시점이 되어야 하나 사실은 그 이전이다.  왜냐하면 32장에서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힌 것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굳이 두 번재 견해를 취하려면, 본문에서 예레

미야는 이미 사둔 땅을 보러갔던 것이 아니라 그 땅의 매매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아

나돗으로 가고자 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32:8 주석 참조).  어째든 히브리어

본문은 명확하지 않으며, 우리는 위의 여러 해석들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것이 나름

대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37:13

  네가 갈대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 문지기 두목 이리야는 예레미야를       이탈자나

도망자로 보고 그를 체포하였다. 아마 그가 예레미야를 그렇게 오해한 데에는 몇가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즉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해 왔었으며

(12:9 ; 38:2),   많은 유다인들은 실제로 적에게 투항하였었다(38:19 ; 52:15).  더군

다나 바벨론이 승리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예레미야가 선포하고 다녔다는 것도 잘 알려

져 있었다.


=====37:14

 망령되다...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 '망령되다'에 해당하는 '쉐케르'(*      )

는 '허위', '거짓된', '기만하다'는 뜻으로, 애매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피해를  입

히려고 획책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항복하려'의 히브리어  '나팔'(*       )은

원래 '떨어지다'는 뜻이며, 상징적으로 '배반하다', '(다른 편으로) 기울어지다'는 의

미를 나타내기도 한다(Calvin).


=====37:15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 요나단의 집을 왜 감옥으로 사용했는지  하는

점은 알 수가 없다.  아마 유다 관리인들의 집에는 임시로 죄수 등을 감금할 수  있는

그런 방이 있었던 것 같다(Ciarke).  그들은 공정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예레미

야를 때리는 등 아예 흉악범 취급을 하였다.


=====37:16

 예레미야가 토굴 옥 음실에 들어간지 - 이 구절의 해석이 다소 어렵긴 하지만,  예

레미야가 갇힌 곳이 지하 감옥이었으라고 짐작된다.  '토굴'(*                 ,  하

하누요트)은 우물과 흡사한 구덩이로서 그 바닥은 작은 방처럼 움푹패인 형태라고  하

는데(Blayney), 본절에서는 이 움푹한 곳을 가리켜 '음실'(*        ,보르)이라  칭하

는 듯하다.  38:6, 13을 보면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던져지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아

마 여기서도 예레미야는 이 집의 구덩이에 던져졌을 것이다.  어쨌든 이곳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될 경우 결국 죽게 되고 말 비참한 장소였다(20절).  그는 시드기야가 그

를 불러들였을 때까지 이곳에 상당 기간 동안 갇혀있었던 것 같다.


=====37:17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있느뇨...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 본절의 장면은  시드기야

의 소심한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왕이 자기 신하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밀히

자문을 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메세지는 이전과 같은 것이었다.   즉

왕의 운명이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여졌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감금된 상태애  있었

으나 진실을 왜곡시킬 수는 없었다.


=====37:18,19,20

  본문은 그토록 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했던 예레미야가 위경에

처해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동정을 구한  것

이 아니라 공의에 입각한 정당한 판결을 받기 원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죽이도록  율

법에 규정되어 있지만(신 13:1-5), 상황은 전혀 반대였다. 예레미야는  진리를  전한

이유로 투옥되었으나, 거짓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켰음에도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녔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 '당신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盜用)한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속았습니다'라는 의미의 역설적 표현이다.


=====37:18-20

  본문은 그토록 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했던 예레미야가 위경에

처해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동정을 구한  것

이 아니라 공의에 입각한 정당한 판결을 받기 원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죽이도록  율

법에 규정되어 있지만(신 13:1-5), 상황은 전혀 반대였다.  예레미야는  진리를  전한

이유로 투옥되었으나, 거짓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켜음에도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녔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 '당신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盜用)한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속았습니다'라는 의미의 역설적 표현이다.


=====37:21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두고...떡 한덩이씩 - 이 비밀 회담은 결국  왕이  호의에

베푸는 것으로 끝났다.  예레미야는 구덩이에서 구출되었으며, 시위대 마당으로  옮겨

졌다.  아마 시위대 뜰은 요나단의 암굴보다는 상태가 휠씬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시

위대 뜰은 왕궁 곁에 위치해 있었으며(32:2 ; 느 3:25), 감옥과 같이 죄인들을 가두어

격리시킨 곳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행동이 제한당한 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에 있는 그의 사촌 하나멜의 밭을 샀던 것도  바로  그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32:1-15).  더군다나, 이제는 식량 문제도 해결되었

다.  물론 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식량이 남아 있을 때까지 그러했다.  그러나 포위 공

격이 점점 압박해 들어옴에 따라 지금까지 선지자가 예언하여 왔던 그 기근이 이제 실

제로 닥치게 된다.


=====37:20-28

  본문은 그토록 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했던 예레미야가 위경에

처해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동정을 구한  것

이 아니라 공의에 입각한 정당한 판결을 받기 원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죽이도록  율

법에 규정되어 있지만(신 13:1-5), 상황은 전혀 반대였다.  예레미야는  진리를  전한

이유로 투옥되었으나, 거짓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켜음에도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녔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 '당신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盜用)한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속았습니다'라는 의미의 역설적 표현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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