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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예레미야

[스크랩] 예레미야 29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8. 17:56

예레미야 29장 주석

 

=====29:1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보내었는데 - 본장은 긴 산문체  단락인데  주로

예루살렘과 바벨론 간의 편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네 통의 편지

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는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보낸  것이고(1-14,

21-23절), 다른 하나는 바벨론에 있는 스마야가 스바냐에게 보낸 것(26-28절), 그리고

또 하나는 예레미야가 스마야에게 보낸 것(24절), 마지막 것은 포로들에게 보내는  예

레미야의 두 번째 서신(30-32절)이 그것이다. 정확한 연대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본

장의 역사적 상황은 바벨론의 2차 침입(B.C. 597년, 왕하 24:8-16) 직후인 것으로  보

인다(Thompson). 그리고 본절의 '남아 있는 장로들'이란 표현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장로들 중에 일부가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처형의 이유는  본장

에서 언급될 바벨론에서의 선동과 폭동 때문이었을 것이다(Nicholson).


=====29:2

 여고니야 왕과 국모와 환관들과...떠난후라 - 예레미야의 서신이 바벨론으로  보내

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왕하 24:12-16). '환관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리심'(*            )은 아마도 궁정 내에서 활동하던 관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52:25;삼상 8:15 등 참조). 창 39:1에는 보디발이 이 단어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내시와 같은 결혼할 수 없는 관리를 뜻한다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사리심'으로 명명되고 있는 직책이 원래는 왕궁의 내실을 관리하는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가서 차츰 그 기능이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방백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레'(*      )는 아마도 왕가의 귀족들을  포

함한 관리들의 또 다른 명칭이었을 것이다.


=====29:3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 어떤 학자는 본절의  엘라사

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26:24) 사반의 아들 그마랴의 형제였을 것으로 설명한다. 그

리고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는 요시야 왕 때의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대하 34:9-22)의

아들일 것으로 설명하나 분명한 증거는 없다(Bright). 아무튼 예레미야가 편지를 보낸

경로는 외교적 임무를 띤 자들의 손에 의해서였다. 이들 사신들은 요시야의 개혁 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호의

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설교에 아마 큰 감동을 받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느부

갓네살에게 보내진 임무는 단순히 연례 행사로 바치는 조공 문제 이상의 보다 더 복잡

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여호야긴이 유다 주변 국가들과 반바벨론 음모를

계획하였다가 조기에 실패로 끝나고 만 일이 있은 다음에 느부갓네살에 대한 시드기야

의 충성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보내졌을 공산이 더 크다(27장). 그렇지 않고 다른  시

각에서 본다면, 그들은 봉신과 군주 간의 통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보내졌을 수도  있

을 것이다. 아무튼 고대 세계에 비교적 먼거리에 떨어져 있었으면서도 외교적  문서가

자주 왕래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기록되어 애굽의 바로 왕에게  전

달된 B.C. 14세기의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은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

(Thompson).


=====29:4

  만군의 여호와...이같이 이르노라 - 이것은 이 서신의 서두였다(Clarke).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자기 종 느부갓네살을 대행자로 사용하여서 포로들을 그곳으로 옮겨놓으셨

다는 내용이 다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3인칭에서 1인칭으로 화법이 바뀌는 것은 예

언적 서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Thompson).


=====29: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 예레미야가 제시하고 있는 충고는 바벨론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곧, 집을 짓고 열매를 심

으며 포로지에서 정착하라는 권고이다. 에스겔서에서도 암시되고 있다시피,       그들에게

는 정착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

들의 공동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겔 8:1;14:1). 어쨋든 정착 생활에 대한 예레미야의

권면은 포로기가 2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였던 낙관적인 선지자들의 말과는  엄

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유다 땅이 아닌 포로지에서라 하더라도 정착

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했고 성전과 희생 제사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7:1-15, 21, 22).


=====29:6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 예레미야의 이 같은 당부의 말은 포로로 잡

혀 간 곳에서 그들이 이제 오랫동안 체재(滯在)할 것이므로 그에 대해 준비를  갖추라

는 의미이다. 그리고 일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땅에서 번성하여 강한  민족이

되라는 뜻이었다(Clarke). 그런데 비교적 자유가 보장된 포로 생활이었지만 이에 대한

예외도 있었다. 예컨대 여호야긴은 갇혀서 지내야 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에윌므로닥의  즉위  때,  곧  B.C.  562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2:31-34;왕하

25:27-30, Nicholson).


=====29:7

 본절에서는 또한 그들이 체재하고 있는 나라 바벨론의 번영과 평안을 위해  노력하

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바벨론 왕권의 번영을 구하고 또 그들의 평안을  기도

하라는 예레미야의 충고는 포로민들에게 납득되기 힘든 말이었다. 이것은 유다 민족이

자신들의 행복과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 다시 말해서 국가,  왕권,  군

대, 국경, 성전 등을 내버리고 표류하라는 것과 사실상 동일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더라도 여호와에 대한 바른 신앙을 확보한다면, 여호와께서 이 민족에게  새

로운 비전을 제시해줄 것이며 그들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

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곳에 있는 자들은 바벨론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끌려왔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 충고에 대해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만했다. 그러나 이 충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긴 하였으나 실제적이고  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사건의 결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어떤 과정을 거치게 한 다음에 회복시키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

을 확신할 수 있었다(Thompson).


=====29:8,9

 어떤 주석가들은 본 두 구절이 7, 10절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15절  다음

에 놓이는 것이 적절하게 보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이 앞  구절들에  대한

보다 확대된 강조 설명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불필요하다.  거짓

선지자들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머무는 것이 잠시 잠깐일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예언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아니

며, 그들이 주장하는 예언이 거짓임을 확신시켜주고자 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앞

장에서 살펴보았던 하나냐와 같은 자들로서 그는 이들 부류의  대표자였었다.  그들은

꿈꾸는 자, 복술, 술사, 요술객들과 접맥이 되어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어떤 헛된 예언

의 정보를 받았던 것 같다(27:9 참조). 이러한 선지자들 중에 몇몇은 반란을 주도하였

으며, 민족에게 재앙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본장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21-23절).


=====29:10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와 의도가 무엇인지가 언급되고 있다. 바벨론에서의 70년이란 기간

이 차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한편,  근동

의 패자로 급부상하였던 바벨론 제국의 권세가 불과 70년만에 몰락하게 될 것을  암시

하는 본절의 예언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잘 믿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70년이라는

기간에 대해서는 굳이 엄밀하게 계수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25:11 주석 참조). 니

느웨의 멸망이 B.C. 612년에 일어났고 이때로부터 바벨론 권세가 시작된 것으로  한다

면 바벨론 멸망이 B.C. 539년이기 때문에 그 기간은 73년간이 된다. 그리고       느부갓네

살의 즉위하던 때(B.C. 605년)로부터 바벨론 멸망 때까지 66년간이란 기간이 된다.


=====29:11

  너희 장래에 소망(*                       , 아하리트 웨티크와) - 이에 대한  직

역은 미래와 희망이란 의미이다. 이는 두 개의 비슷한 말을 겹쳐 씀으로써 그  내용을

강조하는 증언적 표현법이다. 따라서 이 말은 결국 너희가 바라던 미래, 대망하던  미

래,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란 뜻이다(Bright, Feinberg).


=====29: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 자기 백성을 위한 여호와의 생각은 이미 정해져 있

었다. 곧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고통과 재앙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래에 이 백성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여 이전에 누리던 특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아마 예레미야가 이 편지를 기록

할 당시에는 여호와를 향한 원망과 그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또 그에게 기도하며 그에게 나아갈 때에는 여호와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다(암 5:4-6;호 2:16-20). 반면에 여호와는 패역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백성에 대해서는 언약의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겔       2:3-5;33:17-20).

여호와의 축복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에는 순종과 충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

통이 우선적으로 요청되었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

에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겔 33:10)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

백성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의 죄악을 깨닫는 백성에 대해서 여

호와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 여기서 '전심으로'(*                 , 베칼

레바브켐)라는 말은 '네 마음을 다하여'란 뜻으로서 감정적인 면보다는 의지적인 측면

에 더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29:14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돌아오게 하리라 - 13절에 제시된 약속이 여기서도 계

속되고 있다. 즉 언약의 축복이 유용하게 될 것이란 내용으로서 신       30:3-5에  언급된

약속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Delitzsch).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우

선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결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여호와를 거부하고

그의 언약을 저버리는 자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저절로 허용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29:15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 메시지의 자연스러운 진행 과정은  15절에

서 21절로 넘어간다. 본절만을 가지고 살펴보면 16-19절은 회복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

가기에 앞서 여호와께서 유다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

다. 한편 70인역에서는 16-20절의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29:16

 다윗의 위(位)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 본절에서는 메시지의 대상

이 바벨론으로 잡혀가지 않고 유다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여호와

께서는 그 당시 다윗 계통의 왕인 시드기야와 이들 백성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설사

그들이 B.C. 597년의 심판에서 벗어나고 화를 모면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은 여전히  심

판 아래에 놓여있었던 것이며, 그들에게 임할 비참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29:17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 여기 언급된 징법 수단들은 본서의 다른 곳에서도

누차 발견된다(17, 18절;15:2, 3;24:10;42:17;44:12 등). 그리고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란 표현은 24장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 24장과 이곳은 둘

다 아직 유다에 살고 있는 자들을 공격하는 논쟁이며 그와 함께 B.C. 597년 이후 포로

로 잡혀간 자들을 격려하는 내용의 말씀이다(Thompson). 또한 선지자는  현재  다윗의

왕자에 앉아 있는 시드기야를 부러워하지 말고 더군다나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의  운

명을 부러워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왜냐하면 현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자들

은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형편보다 더 참혹한 운명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9:18,19

  B.C. 597년 이후에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종을 통하여서  말씀

하셨던 것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행위를 고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끊임없이 그들을 설득하고 재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

들의 죄악된 고집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심판은  불가피했던

것이다(Thompson).


=====29:20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 - 여기서는 다시 화제가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블레이니 박사(Dr. Blayney)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가 두 개였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에게 사신으로 보낸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가 귀환했을 때 예레미야

는 자신의 충고가 그들에게 적절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바

벨론의 포로들이 예레미야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포로들 중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허황된 설교에 속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두

번째 서신을 기록해서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21-23절 내용을 14절에 이어

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다.


=====29:21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 이 두 사람은  바벨론

의 포로들 중에 있었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예레미야의 설교에 반기를 들고서 유다의 번영과 평안을  주장하였던  허황된  예언이

B.C. 597년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인한 파멸에도 불구하고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낙관주의는 엄청난 고통을 자초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계속해서 거짓을 예언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생활 역시 악하고 죄악에 물들어 있었다(23:9-15). 그들은 동료, 이웃의  아내

들과 간음을 행하였다(23절).


=====29:22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아 아합 -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불살라  죽였는

데, 이러한 화형은 바벨론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시행되었던 처형법이었다(함무라비

법전 25, 110, 157;단 3:6). 이 두 거짓 선지자의 죽음은 저주를 나타내는 하나의  속

담같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저주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로  바

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을  것이다

(Thompson).


=====29:23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 예레미야는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의

처형을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거짓 예언에 대한 징벌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느

부갓네살이 그들을 처벌한 것은 단순한 도덕적 범죄 때문이 아니라 국가 반란과  선동

죄로 처벌하였을 것이다.


=====29:24

 본절을 26-28절에 포함시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예레미야가  스마야

개인에게 보낸 경고 서신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에레미야의  서신을  보고

서, 포로지에서는 심한 반발이 일었으며 그 반발을 부추킨 중심 인물이 바로 스마야였

던 것 같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스마야에게 경고조로 개인 서신을 보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서신의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되어 있으며, 곧바로  스마야가  예레미야를

고발하는 내용의 편지가 이어진다(26-28절). 한편 스마야란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사

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스마야를 수식하는 말인 '느헬람 사람'에 대해서는 (1)출신지

로 보는 견해(Calvin, Thompson), (2)가계명(family name)으로 보는  견해(Harrison),

(3)'꿈꾸는 자'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으나 (1)이 보다 무난한 듯하다.


=====29:25

  네가 네 이름으로...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 예레미야는 여기서 스마야가 스마

야 자신의 이름으로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유사이기도 하였던 마아세야의 아들  제

사장 스바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비난한다. 스마야가 마치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

는 것처럼 가장했지만 실상은 자기 임의대로 편지를  썼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Delitzsch). 이런 비난은 31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그 뒤에는 이곳에서는  언급되

지 않고 있는 결과가 언급되고 있다(Thompson).


=====29:26,27,28

  여기서부터는 스마야의 편지의 내용이 요약되어 설명된다. 스바냐는 당시 여호야다

의 직위를 물려받은 성전의 제사장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 자리를 바스훌이       차지하고

있었다(20:1-6). 이 사람은 B.C. 597년에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것이 분

명하다. 한편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는 시드기야의 특사로서 예레미야를 방문하여 두

번씩이나 그의 조언을 구한 바 있다(21:1;37:3). 그는 예루살렘 멸망 후인 B.C. 586년

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52:24-27;왕하  25:18-21).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들이 확실하게 발생되었고 또 성취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는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여전히 '미친자'로 취급당하고 있다.


=====29:29

  스마야의 지적은 스바냐가 아나돗사람 예레미야를 자유 상태로 내버려 둠으로써 성

전 유사로서 해야 할 바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이며 미쳤고 또 자칭 선지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착고에 채워져야 하며 칼을  씌

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 드러난 스바냐의 행동으로 볼 때 그는 예레미야에

게 오히려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Delitzsch). 스바냐가 예레미야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는 어떤 경고 조치를 취했는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예레미야가

스마야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던 점에서 어떤 특별한 경고  조

치는 없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29:30,31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 스마야에 대한 여호와의 메시지를 포로민들에게 써  보낸

내용이 소개된다.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 예레미야는  하나냐

를 상대로 했던 말과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여 거짓 선지자 스마야에 대한 예언을 포로

들에게 편지로 써 보냈다(28:15, 16). 즉 스마야는 거짓을 예언하였으며 또 그것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는 그를 처벌하실 것이고 또 그의  후손

들도 징계하실 것이다.


=====29:32

 스마야에 임할 저주로 끝맺고 있는 본장의 마지막 절은 본장의 끝일  뿐만  아니라

26-29장에 달하는 하나의 단락의 결말이기도 하다. 26-29장의 각각의 장들은 여호와의

종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이 백성이 거부하고  있다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장 내에서는 이러한 거부에 대한 심판  선언의

내용이 뒤따랐다. 당신의 백성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하고 또 언약에  순

종치 않는 것은 언약의 파기였으며, 그 결국은 언약에 명시된 저주       조항의 가동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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